괴테의 파우스트비극23, ‘성안의 안 마당에 이르면 파우스트는 중세기사로 변장하여 헬레나에게 압운시를 가르치는 관능적 쾌락의 정점에 달하는 장면이 있다. 고대와, 중세와 근대를 마구잡이로 널뛰며 도착한, 이 장면은 역사적 위치로부터 해방된 서로 다른 시대의 인물들과 양식들이 공존하는별난 세계, 소위 비동시대성(Non-Synchronism)’이라는 말을 설명할 때면 빈번하게 인용되는 부분이다.

 

비동시대성이란 많은 개인들이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문화적 또는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한 사태를 일컫는다. 이러한 양태의 탁월한 사례로서 파우스트는 예외없이 등장한다. 이 개념이 떠오른 것은 바로 지금 우리 정치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커다란 파문을 바라보면서 문학의 기능을 새삼스럽게 생각게 된 탓이다. 한국사회는 엄청난 변혁기에 서있으며, 평화와 번영, 평등과 자연과의 공존 등 새로운 가치를 향해 있다. 대부분의 개인들은 더 이상 안보에 볼모가 되어, 불안과 경쟁, 성장과 차별의 수구적 경향에 머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독일의 사상가인 에른스트 블로흐가 그의 저술 Heritage of Our Times, 1932에 쓴 문장은 마침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개인들이 지닌 시대성의 논파 그것만 같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지금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 오직 외적으로만 그렇다.

오늘 거리에서 이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동시대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이들이 서로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 자(6.15) 뉴스를 보면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들이 선거 참패에 따른 자성의 목소리가 여럿 소개되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새로운 가치와 민생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서 몰락했다.”, 혹은 보신주의, 수구 냉전적 사고를 버리고 당 해체를 통해 다시 시작해야 한다.” 와 같이 자신들이 동시대의 가치지향에 동행하고 있지 못함을 비로소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이 진정이라면 한국사회의 미래는 아마 밝을 것이라 예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같은 한국사회의 구성원임에도 이처럼 비동시대성의 역행적 의식에 머문 집단들로 인해 너무도 큰 갈등의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다.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떠난지 오래된 진영 논리에 사로잡혀 의식이 마비되어 있던 사람들이 이제 시대의 의식을 깨달았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니체 또한 선악을 넘어서에서 독일인들은 그저께의 사람들, 그리고 모레의 사람들이다. - 그들에게 아직 오늘이 없다.” 라며, 시대의 가치에 뒤쳐진 자신의 동족을 향해 외치기도 했으며, 프로이트는 끝이 있는 분석과 끝이 없는 분석(Die endliche und die unendliche Analyse)에서 원시 시대의 용(dragon)들은 실제로 멸종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듯 수구적 가치의 망령이 여전히 발목을 잡아당기는 현실을 꼬집기도 했다.

 

혹여 나의 문화적, 정치적 의식이 현재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이 사회에 비동시대성이 횡행하게 하는 존재가 아닌지 다시금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헤르만 브로흐의 소설 몽유병자들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그에게 요하임과 루체나는 그들이 속한 시대, 즉 그들에게 살아갈 권리를 부여해준 시대에서

존재의 작은 단편들만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리고 더 큰 부분은 어딘가 다른 곳에,

 (....)이 세계가 각기 다른 세기에 속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래도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바로 그들이 동시대인들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들이 불안정하고 서로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마 이 때문이리라.”

 

문학 작품은 실로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제한된 공간속에 공존하는 역사적 비동질적인 사회적, 상징적 형식들을 예리하게 통찰해 낸다. 우리의 문학작품들에서도 이러한 성찰들이 발견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최근의 한국 소설들은 지나치게 현상적인 문제들에만 몰두하는 것 같다전환기에 선 나라들에서는 항상 세계적인 걸작이 탄생했다. 마침 우리도 그렇다. 지금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거대한 발걸음을 구성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사유의 가치들을 모색하는 문학 작품들이 많이 써지기를 기대해본다. 이번 지방 선거에서 보여준 우리나라 사람들의 선택은 정말 멋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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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6
가라타니 고진 지음, 윤인로.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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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저술 중 가장 대중친화적인 글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13조의 저술이다. ‘칸트의 실천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의 탐험, 일본인의 도덕관과 책임의식의 실체를 규명 연구하고, 인류사회의 지속가능한 순환적 사회의 구축을 위한 세계시민으로서의 사유를 환기시키는, 하나의 토대로 여럿을 알게 해주는 까닭이다. 궁극적으로는 윤리란 무엇인가라는 도덕성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지만 이 궁구(窮究)의 여정에 등장하는 일본인의 공동체의식이나 천황의 전쟁책임과 같은 제재(題材)들이 우리 한국인에게 시사하는 것들 탓에 이해에 구체성을 띠게 된다.

 

일본 내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던 적군파의 인질살해사건의 일화로 시작하는데, “도대체 책임이란 것에 회의적인 일본인들이 왜 열렬하게사건 가담자들의 부모에게는 책임을 추궁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여기서 소위 주체나 원리도 없는 사회도덕이라는 일본의 특수한 현상을 들춰낸다. 그 실체는 마을공동체라는 것으로 겉으로는 사이가 좋은 사회로 보이지만 단지 개인 자신들의 고립이 두려워서 모이는 것뿐이며, 그들 사이에 돈독한 우정이란 것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우정이 존재키 위해서는 자기가 있어야하는데 바로 이 공동체라는 것에 자기가 없는 것, 즉 근본적으로는 이기적인데 자기(에고)도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도 없는 이 모호한 공동체가 도덕적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관련도 없는 부모에게 책임을 묻는 기이한 현상으로 표출되는 것이지만 정작 도덕적 책임을 져야할 당사자의 주체로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고 지적한다. , 이 고찰은 주체의 자유가 도덕적으로 어떠한 위치를 지니는지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이로서 자유라는 관점에서 도덕을 인식하는 칸트의 실천윤리에 대한 담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과연 자유의지라는 것이 진정 존재하여 선택하는 것인가에 이르면 그 자유는 이내 불확실해진다. 마치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어디까지나 인과성에 의해 강제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며, 따라서 인간의 행동은 모두 원인에 의해 결정되고 자유 따위는 없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자유로운 주체가 아닌 인간은 책임이 없다는 결과가 되고 만다.

 

여기서 칸트는 자유는 결코 이처럼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인식하고자하는 의지, 바로 자유로워지라!”는 지상명령으로 비로소 자유가 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로서 도덕성은 선악보다는 오히려 자유의 문제이며, 자유 없이 선악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연적, 사회적 인과성을 배제하고 오직 자유를 의지함으로써만 자유가 생겨나는 것이니, 실제로 자유롭지 않다고 할지라도 자유로웠던 것처럼 간주하는 것, 다시 말해 인생을 타인이나 주어진 조건 탓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만들어 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일례로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결과로 끝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그 때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며, 자신이 원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책임이 생기는 것과 같다. 이를 보다 진전시켜 생각해 보면 자유의지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을 그렇게 믿는 것을 부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자유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윤리적(자유)인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한편 공동체의 도덕을 도덕으로, 세계시민으로서의 도덕을 윤리로 구분한 칸트의 세계시민(Cosmopolitan), 즉 공공적(公共的)으로 생각하는 의지를 지닌 시민의 상정은 인류가 진정으로 지향해야 하는 윤리의 도달점을 말한다. 즉 진실이지만 자기연대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 (부정한 조직을 정의심과 용기로 공개할 경우 자신의 조직에서 배제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곧 세계시민으로서 행동하면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조직을 위해 좋은 구성원, 가족을 위해 좋은 아빠가 되는 소위 사회도덕을 지키면 세계시민으로서의 도덕인 윤리를 지킬 수가 없게 된다. 이는 윤리적이라는 것은 바로 도덕성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고, 진정 윤리적이라는 것은 이처럼 자기와, 연대의 희생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쉽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영미(英美)계 윤리학의 중심사상을 이루는 타인에게 위해만 가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된다!”는 공리주의의 경우 이미 자기 원인적, 즉 자유가 아니라는 점에서 도덕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더구나 공리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는 현대자본주의가 분업과 교환이라는 타자를 수단으로 삼는 것, 즉 타자를 목적으로 대하는 것을 희생시키고 있으며, 공공적 합의라든가 사회적 계약과 같이 지극히 협소한 타자, 즉 살아있는 타자에 한정되어 미래의 타자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비판된다.

 

()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등식,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추구라는 신념을 고수하여,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려 한다면 전()지구적 환경파괴, 에너지와 식량부족 등 비참한 사태가 초래되는 것은 불가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비참한 사태를 체험하는 것은 미래의 타자이며, 이들 미래 인간이 참여하지 않은 공리주의의 공공적 합의라는 것은 이미 도덕성을 결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우린 미래의 인간을 위해서 희생(생태계의 복원, 자원의 절제 등...)해야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말하는의무’, 윤리(실천)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후(戰後) 일본 천황의 형사적 책임에 대한 논의들을 통해 책임이라는 도덕적 의무를 성찰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이나 중국 등 주변국과 일본의 명쾌하게 해결되지 못한 과거사의 문제로 관심을 증대시킨다. 독일의 경우 전후 뉘렌베르크 재판을 통해 전범들에 대한 형사적 책임을 물음으로서 정치적, 도덕적 책임의 단계로 진전되었으나, 일본의 경우 천황의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고 엉뚱하게도 일억총참회(一億總懺悔)’라고 국민의 책임으로 전가하여 전쟁 책임의 논의가 모호하고 불투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누구도 책임을 질 사람이 없고 모두가 피해자가 되어 버리는 무책임 체계가 되어버렸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천황 대신 자신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어딘가 부당하다는 것이며, 이는 일본인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부족한 이유가 되고, 도덕적 책임의 문제로 나아가지 못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지적 관심을 배제하는, 일종의 무관심(저자는 괄호에 넣는 것이라는 기발하고 유용한 표현을 하고 있음)을 통해 도덕을 보지 못하는 일본인들의 지적 쇄신과 책임의 요청이 있다하겠다.

 

사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우리들이 풍요로움과 물질적 욕망만을 추구한다면 현재의 자본주의체제에 대항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연환경의 리사이클 수준을 넘어서는 위기와 남북문제와 같은 양극화로 인한 갈등을 비롯한 숱한 윤리적 문제가 있다. 우리가 현재의 행복을 위해 미래의 인간에게 계산서를 돌린다면, 즉 그들의 자유를 박탈한다는 것은 윤리의 공공연한 부정과 파괴가 되어버린다.

 

아마 민족주의의 환기와 자국민의 행복을 위해 전쟁을 불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칸트의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윤리는 그래서 21세기 지속가능한 순환적 사회를 형성하는 우리 인류의 생존을 위한 모럴이라 하여야 하지 않을까? 칸트의 이성비판(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누비며, 마르크스주의의 가능한 코뮤니즘의 이상에 이르기 위해 언급되는 도덕과 윤리에 대한 가라타니의 철학적 향연은 문학적 감상을 초월하는 재미에 빠져들게 한다. 칸트, 니체, 스피노자, 키에르케고르, 프로이트, 야스퍼스, 헤겔, 아도르노, 데리다 등을 종횡무진하며 자유와 이성, 도덕과 윤리를 수월한 언어로 대중에게 전달해주는 이 저술은 보편적 도덕 법칙에 대한 칸트주의의 실천철학 안내서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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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맨 부커상'(50th, The Golden Man Booker Prize)공개투표에 즈음해서

 

 

2018년 올해는 맨부커상 50주년 기념의 해로서 '황금 맨부커상(The Golden Man Booker Prize)'을 시상한다고 발표되었다.  526일 심사위원단은 지난 50년 동안의 수상 작품을 10년 단위로 나누어 매 10년 기간 중 최고의 한 작품을 선정한 다섯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선정된 다섯 작품은 조지 손더스의 Lincoln in the Bardo와 힐러리 맨틀의 Wolf Hall, V. S. 나이폴의 In a Free State, 페넬로페 라이블리의 Moon Tiger, 마이클 온다체의 The English Patient로 몇몇 작품은 국내에 번역 소개되었으나 현재는 품절, 절판 된 상태이며, 마이클 온다체의 잉글리시 페이션트만 유일하게 판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다섯 작품 중 최종 수상작은 맨부커상 재단 홈페이지인   http://themanbookerprize.com/vote  에서 공개 투표를 통해 선정된다. 공개투표는 누구나 해당 사이트에서 투표할 수 있다. 투표 기간은 526일부터 625일까지(Saturday 26 May to Monday 25 June)로 되어있으며 관심 있는 사람들은 직접 참가해서 수상작 선정에 일조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선정된 수상작은 오는 78, 영국 런던 사우스뱅크 센터에서 발표될 예정인데, 76일에서 8일까지 맨부커 재단은 50주년 기념의 국제적이고 대대적인 페스티발을 17에이커의 규모에서 화려하게 펼쳐질 것이라 예고하고 있다. 국제 도서 페스티발의 성격을 가지고, 수상 후보 작가들의 인터뷰는 물론 토론회, 영화 상영 등 다채로운 이벤트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도 이들 작가와 작품들이 다시금 독자들의 시선을 받을 것 같다. 어느 작품이 수상작품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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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8-06-14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부커 상 받은 작품은 아마 9월 안으로 출간되지 않겠어요? 전 잉글리시 페이션트밖에 모르겠어요^^;;

필리아 2018-06-14 10:19   좋아요 0 | URL
50년에 한 번 나오는 상(Prize)이니 만큼 대대적인 홍보가 있을 것 같습니다.
‘황금‘이거든요. 저는 개인적으로 ‘힐러리 맨틀‘에게 한 표...
 
클레브 공작부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9
라파예트 부인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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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소설의 문을 연 작품이다. 극단적으로는 등장인물의 심리변화가 곧 주제라 할 만큼, 행동을 중심으로 한 이전의 서사문학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또한 현대의 여느 소설에도 비길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 묘사의 절제와, 객관적 서술에서 내면적 분석, 그리고 독백에 이르는 세련된 구조를 지닌 소설로써 오랜 시간을 견뎌온 문학적 가치가 인정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영향은 라클로, 스탕달, 라디게 , 그리고 루소와 지드, 카뮈로 이어지는 프랑스 현대문학 계보의 중요한 줄기를 형성케 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학적 위치와 가치를 뒤로하더라도 주목케 하는 것은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진부한 이야기에 놓여있던 남성중심의 시선이 17~8세기의 시대성에도 불구하고 와해되거나 거부되고 있다는 점이다. 스토리는 온갖 이해관계와 권모술수가 난무하던 앙리 2세 재위 말년(1558~1559)의 궁정 사회를 배경으로 구성원인 왕족과 명문 귀족들의 쾌락과 사랑의 줄다리기에 얽힌 한 여인의 자기 지키기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영화 <클레브 공작부인>의 한 장면, 1960년작

 

 

야심과 정사, 술책과 쾌락이 어우러진, 그런가하면 어느 누구의 사적인 비밀도 유지되기 힘든 위험천만한 궁정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질투,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비애의 이야기다. 궁정 최고의 미모로 꼽히는 클레브 공작부인은 영국 여왕과의 결혼문제가 오가던 느무르 공()에 남편인 클레브 공작에게는 느껴보지 못했던 설렘,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고, 무수한 여인들을 편력하던 느무르 공 역시 한 번의 마주침에서 공작부인을 잊지 못한다.

 

그런가하면 클레브 공작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지고하기만 하다. 그 사랑은 존경과 신뢰와 배려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남편의 사랑에 대한 이해와 자기 가문에 대한 명예는 느무르 공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은폐하게 하지만 느무르 공의 은밀한 구애의 암시와 표시들은 그녀를 끊임없는 내면의 갈등에 시달리게 한다. 소설은 이렇듯 유부녀의 흔해빠진 자기 갈등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사랑의 기쁨과 두려움 사이를 오가는 클레브 부인의 심리적 기복의 묘사는 지연과 전진을 오락가락하며 결말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그야말로 최고의 서사 미학이 주는 쾌감을 만끽하게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의 진수는 이렇게 빼어난 심리적 묘사의 세련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이 근대 소설의 효시로 불리게 되는데 기여한 요인이랄 수 있을 것인데, 소설의 출현이란 사적(私的)생활이라는 개념의 출현이 전제됨으로써 가능했다는 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즉 사생활, 사적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투쟁하는 개인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특히 (남성에게)보여지는 여성이라는 시선에 대한 집요한 저항의 얘기라는 점이다.

 

소설에는 사적인 편지가 공개적으로 돌려가며 읽히며, 궁정의 어떤 인물이든 개인적 비밀이 유지되지 않는 적나라한 세계이다. 게다가 느무르 공이라는 남성의 집요한 시선은 여인의 내밀한 공간을 지속적으로 침범하려는 시도로 점철되어 있다. 자신의 흔들리는 감정을 보이지 않기 위해 시골의 별장으로 도피해있는 클레브 공작부인을 느무르 공이 몰래 엿보는 장면은 풍부한 은유적 상징들로 가득 차있다.

 

창문은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느무르 공은 울타리를 따라 살금살금 다가갔다.

긴장된 나머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창문 그늘에 숨어서 클레브 부인의 모습을 엿봤다.

부인은 혼자였다. ...부인은 매우 진귀한 인도산 지팡이에 그 리본을 묶고 있었다.

그 지팡이는 전에 느무르 공이 사용하다가 여동생에게 준 것이었는데...”

 

이렇게 느무르 공은 황홀경에 빠진 채 이것은 일찍이 그 어떤 연인도 맛본 적 없는, 또 상상조차 하지 못한 기분이었다.”라며, 은밀한 관찰에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잊을 정도라고 중얼거린다. 이것은 궁정사회라는 공적 공간에서 남용되는 사적 생활의 침입과 아울러 남성 시선이 여성의 은밀한 공간인 사적 영역으로 침입하는 것에 숨겨진 관음증적 쾌락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또한 열린 창문’, ‘지팡이’, 그리고 그것에 리본을 묶는 클레브 부인의 행위는 다분히 성적 암시의 도구로서 그 위력을 발휘한다.

 

이 지점을 통과하면서 소설은 잔뜩 독이 오른 독자에게 결말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급격히 내닫는다. 시종을 통해 느무르 공작을 미행하게 했던 클레브 공작은 이러한 상황의 질투로 병을 얻게 되고 급기야는 죽음에 이른다. 남편의 깊은 사랑을 알고 있는 클레브 공작부인은 궁정 출입을 멈추고, 시골의 별장에 은둔하며, 외부의 모든 시선을 차단한다. 그래서 느무르 공은 모든 문이 굳게 닫혀있는 것을 보게 될 뿐이다.

 

샤르트르 주교대리의 은밀한 주선에 의해 마주한 느무르 공에게 건네는 클레브 공작부인의 말은 당대 여성들의 시선을 대변하면서 그것을 전복하는 선각적인 의식을 내보인다.

 

전 호의를 단순히 보기만 한 게 아니라, 당신이 그렇게 봐주기를 원한대로 보아왔어요.”

 

남성중심의 시선에 길들여졌던 여성의 수동성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들의 시선에 담긴 욕망의 이기심을 꿰뚫는다.

 

지금까지 당신이 변심하지 않은 건 당신의 정복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장해물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무심결에 드러난 제 행동이나

우연히 들킨 모습이 얼마간 희망을 주어 그 정복욕을 계속 불태웠던 거고요.”

 

그녀는 궁정 생활에 이별을 고하지 않고 요양을 핑계로 수도원으로 들어가 버린다. 느무르 공의 구애와 궁정 생활 둘 다를 거부하는 것인데, 클레브 공작부인은 사적 영역의 본질, 그리고 그것을 범하려는 기도와 본질까지 충분히 알고 있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아마 소설 쓰기라는 공적 행위를 통해 당대 귀족들의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고서는 개인의 사적 영역의 귀중한 가치를 얘기 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는 후대 해설자들의 평가처럼 명문 귀족가문의 여성이었던 작가라 파예트 백작부인의 이 소설은 시대의 변화상황에 대한 뛰어난 인식능력을 발견하게 한다. 여성을 대상화하려는 남성적 시선에 대한 최초의 저항을 말한 문학 작품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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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소설의 경우, 육체에 도달하려는 의도는 성공, 혹은 실패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산출되는 성취, 혹은 환멸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중심 플롯이 된다.

이것은 바로 인생의 신비를 꿰뚫어 보려는 욕망의 구체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 피터 브룩스, 육체와 예술(2013, 문학과지성사) 에서

 

 

소설 작품을 읽을 때 표면에 나타난 이야기가 어떤 이면의 이야기, 즉 표면이 품고 있는 진짜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독서의 진실일지도 모른다. 홀로 내밀히 맛보는 즐거움, 뭔가 은밀한 것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달성하려 했던 앎의 욕망의 성취. 그럼에도 이 욕구는 만족할지 모르고 다른 소설 작품으로 향하게 한다. 결코 영원히 알 수 없는 앎의 세계, 좀처럼 멈춰지지 않는 소유에의 충동, 그 본질적으로 만족될 수 없는 파우스트적 시도를 지속하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하다보면 에로틱(Erotic)'이란 말과 유별나게 닮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육체를 욕망의 주체 및 대상으로 파악하려는 태도, 욕망과 관련하여 의미를 띠게 되는 육체에 대한 고찰, 그 본질인 성적이며 호기심 가득한 지식욕이 얼마나 육체적인 것인지 말이다.

 

롤랑 바르트상징적인 장()은 오직 하나의 물체로 채워져 있다. ....다름아닌 인간의 육체다.”라고 썼다. 또한 테리 이글턴육체는 정신의 전제 조건이며, 형이상학적 탐색이 궁극적으로 회귀하는 실체라고 했으며, ‘피터 브룩스육체는 의미생성의 장소이며, 이야기가 각인되는 장소가 되며, 동시에 그 자체가 하나의 기표, 서술적 플롯과 의미산출의 일차적 요소라고 하기까지 했다. 즉 육체는 모든 상징의 근원임과 동시에 궁극적인 종착점이란 뜻으로 읽힌다. 결국 인간의 지식애적 욕구란 육체를 알기 위해, 육체를 소유하기 위해 서술되는 이야기들의 알레고리, 바로 그 자체인 것처럼 여겨진다.

 

1. 지식애() = 내밀한 삶으로서의 육체

 

피터 브룩스의 육체와 예술에는 이러한 생각을 확증해 주듯 장 자크 루소고백록에 대한 문학사적 성격의 설명이 있는데 꽤나 흥미롭다. 고백록1권 첫 머리에 소개되는 자기 육체에 대한 고백인데, 열한 살 시절 자신의 교육을 담당하던 랑베르시 양이 벌로써 그의 엉덩이를 때린 사건이다. 그때 루소는 고통 중에, 심지어는 수치감 속에서도 일종의 관능적 쾌락을 느꼈으며 .... 두려움 보다는 차라리 욕망을 느꼈다.”는 고백이다. 이때부터 그의 육체에 에로틱한 기표가 새겨졌다는 것이다.

 

그리곤 이렇게 진술한다. 그 벌이 나의 전 생애에 걸쳐 내 취향과 욕망과 열정, 그리고 나 자신의 정체성까지 결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대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결국 그의 생의 이야기는 초기에 그의 육체에 새겨진 자국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육체에 새겨진 자국이라는 알레고리는 신 엘로이즈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에서 반복되는 알레고리로 꾸준히 등장한다고 한다. 이 자국은 욕망의 자국이 새겨진 육체다. 재현되지 못하던 육체가 자국을 통해서 언어의 영역, 글쓰기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브룩스는 주장한다. “글쓰기는 욕망과 그 대상의 재현 관계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아마 고백록은 인간 삶의 모든 문제는 육체가 자리 잡은 곳과 그 의미로 귀결된다는 점을 간파한, 그래서 자기 자신의 사적 생활 영역에 주목하고, 육체는 육체 이외의 장소에서 생성되지 못하는 의미 생성의 장소로서 파악한 인간 의식의 역사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한 저작임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이처럼 육체에 대한 고려가 이야기의 중심 주제가 되는 서사물들이 육체가 어떻게 의미를 갖게 되는가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야릇한 즐거움을 준다. 책을 읽는 것,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욕망은 육체에 대한 욕망과 무척이나 흡사하다는 점이다. 육체는 욕망 충족, 권력, 의미의 열쇠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상징적 체계의 본질에 다다르는 길을 열어주는 여정이 마치 육체에 대한 욕망에 접근하는 것과 동일한 다른 표현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2. 글쓰기 작업: 치명적 죄의 극복

 

육체에 글을 쓰는 문제의 이야기로서 1916년에 발표된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유형지에서는 문자 그대로 육체가 글을 새기는 공간이 되는 끔찍한 상황을 묘사한다. 루소의 작품이 가부장적 남성의 시선에 포획된 것이었다면 카프카의 소설은 육체에 메시지를 쓰려는 것에의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반()육체적이고, 남성적 시선의 전복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롭다.

 

상관에 복종하지 않은 한 군인의 처형에 초대된 탐험가의 이야기다. 아마 이야기의 핵심은 일벌백계의 관습을 항구적으로 존속시키려는 사형 집행기계에 관한 설명일 것이다. 기계가 작동되면 사형수의 몸에 내려진 선고의 문장(“상관들에게 경의를 표하라!”)이 거대하고 날카로운 바늘로 사형수의 몸에 12시간에 걸쳐 새겨지는 것이다. 탐험가는 사형 집행자인 장교에게 묻는다.

 

죄수가 자기 몸에 새겨지는 문장을 압니까?” , 장교의 대답은 그야말로 잔인한 무지로 가득 차 있다. “모릅니다. 죄수에게 말해봐야 소용없을 겁니다. 죄수는 몸으로 그 문장을 배울 겁니다.” 즉 죄수의 몸에 법률을 새기는 벌이 죄수를 내적으로 변화시키리라 기대하는 것으로, 장교는 부언한다. “정확히 여섯 시간 만에 얼마나 조용해졌습니까? 죄수의 눈 주위에서 깨달음이 시작되죠.” 죄수가 몸에 새겨진 상처를 통해 의미를 해독하는 데 여섯 시간이 필요하며, 그때 쯤 죄수는 피와 물이 흥건한 구덩이에 던져진다.

 

과연 죄수는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까에 대해 탐험가가 회의를 보이자, 장교는 직접 시범을 보이기 위해 기계에 정당해라!’라고 선고를 써 넣고 기계위에 서자 그 기계는 저절로 파괴되며 12시간이 아니라 바로 장교의 몸에 바늘이 꿰어지고 장교의 몸은 꼬챙이에 매달려 죽고 만다. 장교가 설명했듯이 새겨진 문자를 깨닫기는커녕 아무런 깨달음도 없이 그저 죽었을 뿐이다. 결코 정당하라!’는 문장은 써지지도 않으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육체가 법과 의미를 회복해주리라는 기대는 믿을 수 없는 잘못된 것이라는 작가의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우화이리라.

 

즉 고통당하는 육체는 고문하는 권력을 만족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이며, 도덕적 타락의 상징일 것이다. 단지 육체를 문화의 산물로 만들려는, 육체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에 대한 경고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육체의 의미화에 대한 이런 냉혹하고 부정적인 시선처럼 아무런 깨달음도 주는 것이 없는 것일까?

 

육체에 대한 자국내기의 과정을 지배하는 것은 일련의 욕망들이다.  그것이 긍정성을 지니든, 부정적이든. 권력이 개인의 육체를 좌우하려 하는 것이든, 연인의 육체에 다가가려는 것이든, 육체를 소유하거나 합일하려는 갈망의 존재라는 측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즉 타자를 알려는 충동이다. 비록 오늘의 세계가 육체를 진부한 것으로 만들고 신비를 거의 벗겨내기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우리는 육체를 알지 못한다. 어찌 앎이 달성 될 수 있겠는가. 어찌 타자의 육체를 소유 할 수 있겠는가. 육체를 반복적으로 글쓰기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어쩌면 탈육체화가 이루어지는 어느 날 의미를 상실할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까지는 육체에 대한 욕망의 이야기는 인간의 앎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지속되지 않을까를 생각게 된다. 소설 읽기를 멈추지 못하는 내 무의식의 유혹은 이렇듯 앎을 향한 쾌락의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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