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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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은 한국문학의 기쁨이다이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을 번역 없이 우리말 원작 그대로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세 해 전, 쓰고 게시하지 않았던 감상을 그 축하의 감격과 함께하는 감동으로 이제 옮겨 놓는다. 


역사적 사건, 그 본질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언어, 감정적 동일성을 우리가 가지고 있을까? 라는 물음이 작품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아마 그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낸 지 두 달 가까이 지났을 때(11)”, 밀물에 수많은 무덤들과 뼈들이 씻겨날까 안타까워하는 반복된 꿈의 의미에 대한 화자의 자각 장면 때문이었던 것 같다.

 

빠르고 직관적이었던 그 결론은 내 오해였거나 너무 단순한 이해였는지 모른다고

처음 생각한 것은 지난여름이었다.” - 11

 

불가능성을 예시하는 듯한 반복된 꿈은 광주민중 항쟁이라는 민중적 트라우마를 지닌 역사의 이야기인 자신의 책(소년이 온다)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윌 수 있을 거라고(23)”, 순진하고, 뻔뻔스럽게 바랐던 것일까라고 자성하는 것에서 다시금 제시된다. 타인의 고통에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라고 편승하지 말 것을 당부했던 수전 손택의 말을 이제야 어렴풋이 헤아린다. 고통에 공감했다는 마음만으로, 나름의 다시 쓰기만으로 수월하게 흔적들을 떨쳐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오해였고 단순한 생각이었다는 문제의 제기일 것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설의 제목이 화자에게 역사적 고통은 단지 그것 밖에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27)”처럼, 삶과 함께 지속될 수밖에 없으니 등지고 갈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작별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리라. 화자에게 광주의 트라우마는 삶에 틈입하여 일체화된 고통이 된 듯하다.

 

바닷가 묘지 꿈을 토대로 공동의 영상작업을 하기로 했던 영상 다큐멘터리 작가인 인선의 절단되어 봉합 수술을 한 손가락 두 개의 치료 장면은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49)”는 걸, 신경이 죽지 않도록 3분마다 바늘로 찔리는 고통의 전율로 다가온다.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것이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後略),57 라고 인선이 속삭이는 고통의 감응에서 역사 재현이란 어떤 한계, 영원히 결핍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읽게 된다.

 

어쩌면 화자와 인선의 삶과 동반하는 역사적 고통의 지속성은 폭설이 내리는 제주 인선의 집에서 고통을 겪는 앵무새 아마와, 길을 잃고 두통과 위경련으로 화자의 현실 속에서 재현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끊어진 전기와 한기, 생생한 신체적 고통의 한계 끝에 바다가 빠져나가고 있었다.(175)”는 악몽의 떠남을 막연하게 예감하며 화자는 자문한다. 그들과 싸워 이긴 건지, 그들이 나를 다 으깨고 지나간 건지 분명하지 않았다.(177)” 이렇듯 광주의 흔적에 대한 화자의 감응의 미결성(未決性)은 인선이 자신의 어머니가 겪었던 제주 4.3과 보도연맹 사건 속에 사라져간 참혹한 역사의 증언으로 이어진다.

 

인선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 자신의 삶을 옥죄는 비겁하고 나약한 사람으로서 어머니에 대한 반감, 그리고 어머니를 잃은 후에야 알게 된 그녀가 찾으려했던 흔적과 실패의 처연한 사연이다. 소설의 2부는 사건의 기록들과 증언들이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영화로 만들 것인지를 인선에게 물었을 때 인선은 다음의 이유로 즉시 부인한다.

 

썩어가는 냄새, 수십 년 동안 삭은 뼈들의 인광이 지워질 거다. 악몽들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갈 거다.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이 제거될 거다.” -287

 

그래, 이 작품은 작가의 전작 소년이 온다의 연속선상에서 읽힌다. 무수한 기록들과 증언, 인터뷰의 내용들이 발산하는 고통 재현의 불가능성, 어떻게 그것을 오늘 우리네가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었던 것 같다. 재현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초월의 폭력성과 그칠래야 그칠 수 없고 현재의 언어로 환원할 수 없는 고통의 실재에 대한 윤리적 자기 한계에 대한 고뇌가 계속되고 있음을.

 

어머니가 사라지면 같이 사라지리라 여겼던 그 고통이 인선에게 더 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314)” 싶은 감응으로 남는 것처럼 화자의 광주 흔적은 제주 4.3사건과 결합하여 지금 우리에게 말해지고 있다. 수많은 정치적 타살이 남긴 한국사회의 트라우마는 차치하고라도 대중 혹은 군중인 나와 우리는 이들 동료 인간들, 타자를 향했던 무참함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지 망각과 무심함을 되돌아보게 된다. 혹여 회한과 애도라는 순수한 연민이 억압되거나 잃게 된 어떤 지배 이데올로기에 압도되어 냉담함과 잔인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하게 된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호흡하고 있다. 고통과 그 참담한 상처의 흔적은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동료 인간들의 고통을 야기했던 그 역사적 인식의 이해는 바로 지금 우리네 윤리의식의 위치일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모든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앓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님으로써 비로소 역사적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이해를 촉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계속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이 비록 표현의 한계가 지닌 윤리적 결여라 할지라도. 잠든 도덕 인식을 일깨우는 처절한 자기 고투의 이 작품에 작은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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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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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읽어나가다 소설 속 아버지, 이 땅 어디서도 존재하지 못했던 유령처럼 살아가야만 했던 김이섭의 생을 복기해나가는 딸 지형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임을 발견하고 어떤 동지애를 갖게 되었다.  좌익 경향의 사상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특정 범죄를 다시 범할 가능성 혹은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가 되어 여행과 거주이전의 제한을 가하고, 취업을 봉쇄하며 보호관찰과 보안 감호로 운신의 자유를 제한하던 사회안전법이라는 해괴한 독재권력의 억압을 피할 수 없었던 이섭의 고통에 감히 비할까 만은, 학내에서 은밀히 암약하던 사복경찰들을 피해 늘 잠행해야만 했던 내 대학 시절의 기억은 아마도 이 소설의 저류를 흐르는 올가미를 휘두르며 사냥꾼에 포위된악몽과 고독한 울음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꼭 30년 되는 날이니 1975815일이다. 인생의 절반을 일체 치하에서 살았고 나머지 30년을 해방된 조국에서 살았던, 한 남자의 짐작할 수도, 감히 알 수도 없었던 시간들의 이야기다. 60년이라는 시간에 이 땅과 이 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으며, 그 삶이 오늘 우리들의 삶에 어떤 변화, 영향을 가져왔던 것일까. 이러한 물음을 왜 다시금 해야 하는 가는 서글프고 안타깝기조차 하지만, 오늘, 지배 권력에 저항하는 동료 시민들에 대해 연민조차 가질 내면의 공간이 사라져버린 그 무감해진 우리네 도덕 감각의 전환이 요구되는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가 진실, 진정성 따위를 등 뒤에 흘릴 때 그것을 조용히 수습하는 문학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2016년 이 작품에 대한 대산문학상 선정 사유처럼, 우리는 이 책에서 어느 센가 잊어버린 도덕적 책임의 감각, 시민적 양심을 긴급하게 각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아하게 유영하는 새우는 물속만 벗어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몸을 구부려 옆으로 누워있는 꼴은 언제나 투항의 자세처럼 보였다.” 48

 

그래, 이섭이 대하(大蝦) 종묘 양식장의 등 굽은 새우를 자기반영으로 인식했듯, 딸 지형이 세상 누구보다 뜨겁고 격렬했지만 오랫동안 차갑고 어두운 곳에 갇혀버린 새우처럼 온몸으로 이 땅의 불의하고 냉소적 물결을 버텨내던 한 남자의 삶을 통해서 보게 되는 우리 현대사의 한 그늘에서 그 흔적이 슬그머니 지워지고 망각된 모두의 비극을 읽게 된다.


일제 식민 지하에서 살아내야 했던 이 땅의 사람들은 모욕과 굴욕, 억압의 삶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때 식민지 권력의 압제에 저항하는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었던 이념이 사회주의였으며, 그것은 가지지 못한 자와의 나눔과 배움이고, 공평한 사회를 향한 시민의 연대였다. 이섭이   식민지 말단 관리나 잘해야 선생 노릇이라는 이용만 당하고 말 일본 유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사회주의자가 되어 친일 자본주의의 이권을 물려받은 권력에 의해 쫓기는 것은 자신들의 불의한 권력의 항구적 유지를 위해 사상과 이념에 색깔을 입히기 시작한 까닭이다. 오늘도 여전히 권력의 무능과 부패와 부조리함에 저항하면 곧 빨갱이라 매도하는 작태, 그 불의함은 이처럼 식민지의 잔재이고 그 친일 종자들의 더러운 욕망이 한 연원일 것이다.

 

5년의 수감 생활과 전쟁통에 아내와 세 어린 자식들과의 헤어짐은 이섭에게 죄의식과 사라지지 않는 그리움을 남긴다. 돈과 권력을 헐벗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사는 공평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그가 믿었던 이념은 자신의 가족조차 지키지 못하는 빛바랜 몽상이 되어버렸다. 그는 결코 폭력도 전쟁도 꿈 꾼 이가 아니었다. 그러함에도 소수 권력자들은 이념을 자신들 권력의 방패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만난 고교 시절 친구였던 최라는 인물은 이섭에게 말한다. 인간은 그렇게 거룩하지도 않으며, 인간이 타고난 잔혹한 욕망을 무시한 이념일 뿐이라고. 공평함과 약자와의 나눔이 한낱 몽상이며, 이상주의라 치부하며 이섭의 꿈꾸었던 세계에 대한 희망을 냉소적으로 힐난한다. 더구나 최는 약육강식의 생존본능대로 살아가는 것, 이 사회의 조건이라 말한다. 식민지 치하에서도 부를 축적한 친일부역자나 할 만한 소리다. 이것은 다시 변조되어 이섭의 꿈은 범죄이고 절대악이 되어버린 세계가 된 것이다.

 

이섭이 사회주의자로서 행동을 하도록 했던 깨달음의 일화가 회고되고 있는데, 상전, 아랫것과 같은 자신을 가두었던 오랜 습관적 위계의 굴레를 떨쳐내기 위해 직접 땅을 갈고 나무를 하며 몸의 감격을 느끼고 있을 때, 마을의 가난한 친구 운식이 도련님이 심심풀이 원족이라도 나오신 겐가? 심심한 도련님이 나무를 싹싹 긁어가는 바람에빈 지게로 내려가며 하는 말이다. 당장 끼니를 끓일 나무가 없어 온 산을 헤매고 다니는 사람은 놀이삼아 지게지고 온 도련님과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이섭의 작은 나뭇짐은 누군가의 것을 빼앗은 것이라는 얘기다. 분배의 정의, 곧 자본주의가 메우지 못한 결핍, 사회적 정의를 위한 각성의 한 표현일 것이다.

 

지형의 기억을 통해 1960~70년대 이 땅을 지배하던 반공주의의 그 악질적 악령, 그리고 독재의 항구화를 위해 탱크를 시내 한가운데 세워놓고 시민을 위협하며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라는 기이한 구호를 내세운 10월 유신, 그리고는 사회안전법이라는 자신들의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사상범으로 옥죄기 위한 법령에 이르기까지 그 던적스러운 시대의 풍경이 흐른다. “오랜만에 오신 삼촌/ 간첩인가 다시보자.”는 표어로 가족의 유대에까지 불신의 눈초리를 밀어넣는 그런 파렴치함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시간이었음을, 이섭은 취업을 위한 신원조회에서 모든 취업이 봉쇄되어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꾸려갈 권리가 부정되고, 하물며 5촌인 종질로부터 종질부의 외교관 발령을 위한 신원내역 조사로 이섭의 전력이 드러나 반려되었다는 비난을 듣기까지 한다.

 


1981년이 되어서야 우리의 형법에서 완전히 폐지되었던 연좌제, 즉 친족관계로 연루시켜 형사 및 각종 사회적 관계에서 배제하는 자기책임의 원칙에 반하는 악질적 법규에 붙들려 옴짝달싹 할 수 없게 한 제도였다. 그런데 오늘, 헌법상 개인의 기본권에 반하는 이 폐지된 단어의 망령이 다시 되살아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여론에 흘려져 누군가를 비난하고 조롱하려 할 때마다 그 화살을 대상인의 가족에게까지 겨누어 사회적 불이익을 조장하려는 악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현재의 헌법 133항은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로 명시하여 연좌제가 적용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결국 이 땅에 함께 살고있는 우리네 믿음이란 것, 그 인식의 도덕적 불모성일 것이다. 권력의 안위를 위해 저항하는 사람들을 억압하기위해 악용되었던 이 시대착오적 법률이 폐지되기까지 해방 후 36년이 걸렸다. 소설 속 이섭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회안전법이라는 또 다른 악의적 법률과 그의 삶을 내내 옥죄었던 연좌제가 폐지되는 걸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이섭의 장인은 잃어버린 딸과 손주들, 가슴에 박힌 대못을 차마 뽑지 못하는 사위의 생존을 위해 어떻게 든 연줄이 닿는 사람들을 동원해 그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래서 제주도 목장을 거치고 충청도 서해안 양식장을 꾸려나가고, 가구점 외판영업사원을 전전한다. 옛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처 없는 시선으로 두리번거리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시선조차 주지도 않는 이섭의 집에 들어와 치매 시아버지를 간병하고, 여인 미자는 아들과 세 딸을 가지게 된다. 종이라도 들인 듯 뻔뻔하고, 제 고통을 무기삼아 함부로 칼을 휘두르는 남편이지만 시린 가슴을 부여안고 묵묵히 내조한다. 이섭의 두 번째 아내가 되는 지형의 엄마인 미자의 신산한 삶 또한 이 사회가 만들어낸 또 다른 형태의 고통을 보여 준다. 전쟁, 국가의 폭력성, 삶의 잔인성을.

 

이들 가난한 삶에 다시 균열이 발생한다, 막내딸 지우의 죽음을 겪게 된다. 다시 이룬 가족을 위해 발바닥에 피가 나도록 걷지만 누추한 병실에 누워있던 아이가 병원비 걱정을 하던 장면은 아비로서의 어깨를 걱정하게 만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억지로 버티고 있던 마음의 철심이 툭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는 자신의 생 전부가 부정당하는 이 소리에 그는 삶의 길을, 그 방향을 상실하고 방황한다. 내 탓이다. 내 탓이야, 모두가 잘 못 산 내 죄다.”

 

나는 이 통한의 목소리를 부정하고 싶어진다. 그의 탓이 아니다. 그는 결코 잘 못 살지 않았다. 가장 아끼는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나서까지 남는 게 무어란 말인가와 함께, 나는 결국 몽상가였어라는 자조적 고백의 말은 그 고통을 알기에 감히 이해에 근접할 수 없지만, 나는 그의 좌초된 꿈이 곧 이념적 굴종이라 믿지 않는다. 뭇 사람들은 꿈, 이상, 유토피아는 그 단어의 의미처럼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도달 가능한 현실의 성취가 아닌 망상이라며 혐오감을 보이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아주 작은 변화를 이루고 다시금 그 곳에서 또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 그렇게 끊임없이 변화해 나가는 것이 곧 이상이요, 꿈이라고 말이다.

 

한낱 몽상이라는 자발적 굴복을 정당화하는 그 노예적 삶을 강압하는 현실 조건의 변화를 위해 투쟁하는 삶, 바로 이 작품처럼 그것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노력이 바로 꿈이라고 생각한다. 이섭은 절대 실패한 삶이 아니다. 지형이 작가가 되어 아버지 삶을 온통 채우던 그리움, 지켜내야 할 가족에 대한 사랑을 전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 우리 인간의 삶은 충분하지 않은가? 준엄한 삶의 가치만을 말한다고 비난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섭을, 그가 이룬 가족들의 삶에 감히 고통을 느낀다. 내가 느끼는 공감과 슬픔이 무어 대수롭겠는가마는 이섭은 우리들이 잊어버릴 이야기를 다시 듣고 각성하게 해주지 않는가. 그로서 그의 꿈이 절대 몽상은 아님을 증명한 것일 게다.

 

술에 취해 요에 엎드려 사지를 버둥거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 지형의 연민과 그녀의 보이지 않는 각오가 보이는 것만 같다. 아마 지형은 뭐든지 뜨거운 마음으로 해야 돼. 공부를 해도, 연애를 해도 마음을 다 바쳐야 돼. 그렇지 않으면 의무감만 남고 사는 게 재미없어라는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가 남겨준 마지막 말은 소설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채우는 작가로서 방북해 평양 시가를 내려다보는 시선과 글로 응축되어 아버지 김이섭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의 애도로 승화한다. 지형은 그곳에서 욕망이 철저히 통제된 세계와 욕망이 지나치게 과잉된 세계, 그 어느 쪽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념으로 재단하여 타자를 적대화하여 공격하고 매장하던 시대가 완전히 저물고 이제는 공정과 평등, 개인의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가 열렸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큰 오해가 되고 말았다. 다시금 역사 퇴행적인 친일과 색깔론이 우악스럽게 등장하고, 국민을 이념적으로 분열시켜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려는 무도함의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  이제 또다시 권력에 의한 이념과 사상의 왜곡으로 존재를 부정당하고 모멸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   이섭이 자신이 쓰려는 제목 유령의 시간이라는 삶을 부정당해야만 했던,  자서전을 쓸 것임을 해방 30년이 된 날 아내 미자와 지석, 지형, 지선을 모아 앉혀두고,  나중에 너희가 커서 이걸 읽게 될 때 오늘을 기억해주면 좋겠구나.”라는 그 유언같은 말을 되새긴다. 이 책은 이념과 사상으로 인해 뒤틀린 세상을 살아내야만 했던 한 인간의 삶의 비극성을 바로 지금의 우리네 삶의 현실 속으로 현재화하여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그 실천일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이섭이 지켜내려 했던 것, 바로 신뢰와 연민, 소중한 사랑일 것일 것이다. 혹자들은 말한다. 사상, 이념, 국가폭력, 반공주의 등등 케케묵은 옛 시절의 단어들, 그것들이 소환하는 진부함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그 안으로 들어가 아무것도 보지 않거나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치졸한 변명의 언어가 아닐까? 어찌 그 진부함이란 오만한 언어로 이 땅의 역사가 은폐한 것들을 함부로 재단할 수 있다는 말일까? 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작가 김이정은  제목 때문인지 책은 몇 년간 죽어 있었다.”, 유령과 같이 떠돈 지 4년째 책의 의미가 지난 역사로 묻힐 것 같은 분위기가 도래하기도 했다.“고 쓰고 있다.


나 또한 2015년 이 나라에서 더 이상은 국민의 삶을 억압하는 폭력적 권력은 들어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성급한 오판이었음을 실토한다지금 직면한 이 가당찮은 현실은 유령의 시간을 긴급하고도 절대적으로 소환한다. 수많은 가려져 보이지 않은 존재들이 견뎌야 했던 그 고통의 실체를 다시 복기하고, 환기하며, 각성의 추동력으로 삼으라고 말이다. 독자인 나 또한 작가처럼 기쁘게 이 책을 맞이했다. 젊은 독자들이 그 어떤 자들이 말하는 오래전 시간의 먼지 더미를 뒤집어 쓴 묵은 언어라는 자기 합리화, 변명에 휩쓸리지 않고 읽어야 할 작품이라고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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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1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0-31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스칼 인생공부 - 인간의 마음을 해부한, 67가지 철학수업
김태현 지음, 블레즈 파스칼 원작 / PASCAL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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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그 인식 자체는 위대한 것이다.” - 팡세-분류된 단장101, 김화영 , 선한청지기


파스칼의 팡세는 많은 단장(斷章)으로 이루어진 기독교 유일신을 섬기는 것만이 현실적 존재로서 인간이 걸어야 할 유일한 길임을 안내하는 호교론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에의 귀의(歸依) 여부를 떠나 오랜 역사의 시간을 지속하여 뭇 사람들에게 폭넓게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위의 인용 구절처럼 인간이 겪는 무능과 부조리 상태라는 삶의 항구적 비참에 대한 깨달음과 인간 정신의 존엄과 위대함에 대한 모순과 대립을 돌파할 수 있는 현실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지향해야 할 길의 훌륭한 안내서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현실적 조건을 이해하고, 그 존재론적 결여와 존엄함을 진술하는 파스칼의 사유로부터 새로운 삶의 전망이나 인간 실체에 대한 각성이 촉발될 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오래된 인간 정신의 스승을 만난다.

 

이 책, 파스칼 인생 공부는 철학자 파스칼의 사유들에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을 위해 현세적이고, 실천적 언어로 독해하여 삶의 방법들을 유효하게 풀어내어주기 위해 집필된 것 같다. 저자인 인문학자 김태현은 팡세읽어야 하는 이유라는 프롤로그를 통해 현대인에게 인생의 지침 및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67개의 대표 구절을 선택하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 존재의 나약성에 대한 인정, 인간 삶의 불완전성과 모순성, 불행의 원인,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기위한 인간의 마음이라는 4개의 큰 주제 아래 인간 심리의 알기 쉬운 해설과 설명을 부연하여 설명하며, 자기 이해의 확장과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우리는 개인적 한계와 좌절로 슬픔에 주저앉기도 하지만, 타인과 사회, 그리고 세계의 질서와 욕망으로 인해서도 혼란스러워하고 그 장벽 앞에서 번뇌하기도 한다. 선택된 67가지 소주제를 가진 구절들 모두가 우리네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할 문장들이겠지만, 읽는 이마다 마주한 현실과 개인적 사정이 다른 만큼, 그 직접적 감흥은 조금씩 다를 것이다.

 

내면의 평화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던 나는 불안과 고독은 당연하다.”는 구절에 멈춘다. 그는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불안과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생각하기를 강조하지만, 나는 그 생각이 무엇을 향한 생각이어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면의 평화를 찾기 위해 방황하면서도 정작 그 원인인 불안을 직면하는 일을 회피하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아마 그 불안의 심층적이고 본질적인 () 그 자체의 지각에 다가가려 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라는 문장의 의미를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음이리라. 이제 나는 내 침묵 속 불안의 한 요인을 잠재울 수 있는 평온에 이르는 길을 마침내 깨달은 것일 게다.

 

이처럼 나는 미처 그 사유의 심해에 있는 의미에 진정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눈에 밟히는 몇 구절을 발견한다. 그 첫째는 적게 설명하는 방식이 있다.”는 구절이다. 이 문장의 의미를 왜 모르겠는가마는 그것이 내게 체화되지 못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단순함과 명확함, 그 간결함은 곧 진짜배기 이해에서 나온다는 것을. 최근 나는 프랑스의 전시기획자이자 작가인 나탈리 레제의 글에서 바로 이 압도적 간결함을 접하고 매료되었었다. 정보의 양을 단 번에 초월하는 그 단순 명료함을. 우리네 일상적 소통과 글쓰기의 무수한 양상들 속의 내 모습을 다시금 상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는 아마도 요즘의 불의한 정치의 난맥상, 특히 법질서가 파괴되고 있는 실상에 대한 불쾌감으로 인해 주목된 것인데, 대칭은 양쪽에 차이를 만들 이유가 없음을 전제로 우리가 한 번에 볼 수 있는 균형이다.”라는 것이다. 위치와 환경이 달라도 대칭적으로 반사하는 능력은 동일하듯, 이는 평등의 가치를 말하려 함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동등한 권리와 기회가 박탈되거나 제거되고 있다. 디케의 저울은 이제 수평을 이루지 않는다. 대칭을 통해 평등이 발견되고 이것을 보지 않고 외면하기 시작하면 진리는 알아 볼 수 없는 어둠에 잠기고 만다. 사회의 건전성과 안정성이 심하게 훼손되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붕괴한다. 불편한 진실을 보지 않으려하는 것, 그래서 현명한, 지혜로운 선택은 물 건너가게 되고, 공동체는 함께 그 부정적 영향에 매몰되어 버린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인간은 필연적으로 미치광이이기 때문에 미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광기일 것이다.”는 문장에 한 동안 머물게 되었는데, 아마 이성의 한계, 완벽한 이성적 삶의 불가능성에 대한 겸허한 수용의 문제를 생각게 하였다. 자기 수용과 이해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에 우리들이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불인정이 그 얼마나 커다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게 되는지 목격하고 있기에 더욱 새롭게 인식된 구절이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누누이 우리 사회의 자기 성찰을 위해 강조했던, 그리고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구절의 발견이다. 적게 생각하거나 많이 생각하면 고집스러워지거나 광신이 된다.”, 이 문장은 무지와 이념적 과잉에 찬 사람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가짜뉴스, 편향 정보들이 홍수를 이루는 오늘, 사고 없이 표면 정보만 받아들이고, 비판적 사고를 배척하는 이 사회의 만연한 무지의 행태들이 보이는 고집스러움, 그것이 이 사회가 많은 피를 흘리며 성취한 것들을 퇴행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런가하면 과도한 생각들은 끊임없는 불신과 의심을 생산하고, 이내 극단적 이념에 몰취하여 사회적 갈등과 분열의 심화를 만들고 있지 않은가? 고집스러움과 광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오늘의 우리들을 생각해본다.

 

끝으로 형식 자체에 희망을 두는 것은 미신이다라는 구절이다. 법률과 규칙, 예절 등 조직 질서의 유지라는 생활양식의 기준, 이것 자체에 희망을 두는 것은 심각한 개인적, 사회적 해가 됨에 대한 지적의 문장이다. 형식이란 우리네 삶의 도구이지 삶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더구나 변화의 시도에 장애가 될 뿐이다. 그렇다고 형식을 무시하면 자의적 판단이 정당화되고 사회적 혼란이 초래될 수도 있을 것이지만 형식에 종속된 삶이란 이 세계를 수구화하고, 그 기득권적 색채로 인해 차별의 심화와 사회적 불평등의 항구화라는 불편한 세계로 전락할 수도 있다. 형식과 본질의 균형을 항시 성찰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필수의 지혜일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듯하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단순함, 호기심이라는 지혜를 잃어버리고,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과 아집이 얼마나 극성을 부려대고 있는가? 퇴행이고 추락이며, 자멸을 향한 지점이 가까워질 뿐일 게다.

 

이렇듯 이 책은 충만한 자아욕구 충족과 자신의 가치 신념의 실현을 위한 삶의 의미와 목적의 발견을 향한 무수한 구절과 해설들, 나아가 사회와 공동체적 시선으로 오늘의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 이를테면 빈곤, 무지, 죽음처럼 필히 직면하여 그 해결을 사유해야 할 문제들을 회피하려는 기제들과 그 근본적 문제에 도사린 상실되거나 차단된 능력들을 사유토록 안내하기도 한다. 요즘 빈번하게 발견되는 자신 만의 삶에서 의미와 목적을 찾아라는 문장은, 내적 빈곤과 영적 공허로 불만족과 내적 갈등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있음의 반증 일 것이다.

 

도처에서 비교된 삶, 타인과 비교하느라 내적 공허를 외부로부터 채우려 안달이다. 그럴수록 내적 공허는 더욱더 증폭될 뿐이다. 외부로부터 채워지는 것이 아닌 것을 채우려는 헛된 행위들을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인간 존재의 본질, 그 미약하고 취약하며 한계를 지닌 존재임을 처절하고 겸허하게 자각하고, 그로부터 자기 욕망과 동기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어 자기 고유의 삶의 가치를 발견해 낼 수 있으리라. 아마 파스칼의 사유를 현재화하여 해설한 이 시의적 사유의 기록은 자신과 깊은 유대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기 성찰의 훌륭한 안내서가 되어 줄 터이다. 또한 창의와 개성을 추구하고 다양성과 혁신을 향해 노력을 경주하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귀한 계발 지침서가 되어 주리라 믿는다. 팡세도 읽고 자기 계발도 하며, 저자의 인문학적 지식도 아울러 경청할 수 있는 일석삼조의 읽기가 되어 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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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나탈리 레제 지음, 김예령 옮김 / 봄날의책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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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글을 쓰기에 앞서 이 책의 미덕을 먼저 말하여야 할 것 같다. 150여 쪽 남짓 간결하고 농축되어 써진 작품으로서 그 내용의 풍성함과 강렬함은 수천 쪽에 이르는 여느 대하소설을 단 번에 넘어서는 엄청난 사유가 집적된 글이라고 말이다. 작가는 정말이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한 여인이 나타내려한 방식 그대로를 관찰하며, 하나의 주제로 돌진한다. 그럼으로써 그 어떤 본원적 비가시성을 우리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현재화 시킨다. 가히 압도적인 소설이다.

 

전시기획자, 출판물기록 연구자이자 작가이기도 한 나탈리 레제의 이 독특한 작품은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밀한 프랑스 제 2 제정시대(1850년 전후)의 물질문명의 발흥과 새롭게 대두된 소비 시대를 관류하던 한 여인의 초상에 대한 에세이로 읽을 수 있는, 그런가하면 작품의 제목인 전시((L'Exposition; 展示)’의 중의성((重義性, ambiguity)으로 이 어휘는 물론 작품 구조와 그 내부에서의 작용에까지 두루 둘 이상으로 해석되기를 요청하는 듯하다. 때문에 모호하고 불확정을 지향하는 작가의 의도를 예상할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의 책장을 열면 스스로를 방기하기, 아무것도 미리 계획하지 않기.(...) 흐릿하게 만들기.(...) 이동시키기, 교묘하게 빠져나가기, 모습을 드러내는 단 하나의 1)마티에르를 관찰하기,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대로,(...) 심지어 그 질서 속에서라는 문단을 만나게 된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문장이 불러일으키는 당혹감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하고 첫 페이지를 넘기게 되지만, 이내 이 문장이 곧 이 작품의 전개 양식을 안내하며, 작가를 덮쳐 혼란을 느끼게 하고 급기야 길을 잃고도 끈질기게 고집부리는 유령들을 천천히 게워내게 하는 주제로 밀어 넣는 글쓰기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야기는 그래서 이리저리 주제가 이끄는 대로 마치 불가항력적 어떤 힘에 끌려가듯 기억과 기록(아카이브), 문학과 사진, 회화, 영화를 망라한 예술 작품들을 종횡하며 당초 박물관 소장품의 한 점을 모티프로 하여 선택된 소장품의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한 테마 폐허와 관련해 의뢰된 기획전에서 시작되었던 화자의 감수성과 시간에 대한 날카로운 의식의 근저에 있던 것들을 깨워낸다.

 

작품 속 화자는 박물관에서 제안한 전시기획담당 학예원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만의 전시(Exposition)의 의미를 프랑스어 보전 Tresor de la langue francaise의 설명을 압축요약하여 정의하고 있는데, 사물명을 주어로 하여 모종의 비밀스러운 유기를 배치하는 일이라고 상기시키려 한다. , 이 전시기획의 한 소품 글을 닮은 듯한 이 소설은 바로 이것, 책의 첫 문단을 실천하는 글쓰기임을 다시금 확인케 한다. 미리 계획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단 하나의 마티에르’, 그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이 이내 확인되는 데, 화자는 우연히 어느 지방도시의 작은 서점 나무 계단 꼭대기에 붙어있는 스스로의 연출에 의한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의 카탈로그 표지 위 시선의 심술궂음에 소름끼치며, 이미지로 떠오른 그 여인의 난폭함에 깜짝 놀란.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혼란한 정신 상태에서 올라탄 노선버스에서 들려오는 소위 굴곡진 여성성의 여정에서 발이 걸려 비틀거리는 돌부리인 딴 여자’“라는 한 인간의 특질을 무효화하는 이름의 불쾌감이 들려온다.

 

아버지로 하여금 엄마 곁을 떠나도록 하였던 여인, 딴 여자로 불렀던 합법적이지 않으며, 기능에만 결부된 여자, 증오의 대상이며 동시에 욕망케 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병행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두 이야기가 분리되어 기술되는 것이 아니라,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이라는 여인의 사나움과 깊이 없는 애수와 실패가 주는 불쾌감의 이미지가 폐허와 관련한 기획의 훌륭한 주제로 불쑥 덮쳐 옴을 느낀다. 형태의 소멸, 비극적 시간의 비수같은 의식에 대해서.

 

<스케르초 디 폴리아Scherzo di Follia>로 명명된 사진, 1899년, 생을 마감한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인 피사체의 사진은 1900년 프랑스 만국박람회에

<금세기 최고의 미녀 La Plus Belle Femme du siecle>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다.

이 사진은 그녀를 상징하는 심볼이 되었다. 책 표지 사진은 이 사진의 일부이다.

 

이제 소설은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 그녀가 살던 동시대인들 가운데 이 여인보다 사진을 많이 찍은 사람이 없다고 알려진 인물의 아카이브와 사진과 남겨진 소품들, 그리고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 백작(1855~1921)의 주의깊고 면밀하게 수집 정리된 유언, 약력 기사들, 하다못해 재산 경매의 코멘트에 이르는 관계 자료들과 카스틸리오네의 사진을 찍었던 피에르 루이 피에르송과의 작업 방식과 환경, 그리고 장면들, 발자크, 에밀 졸라, 보들레르와 프루스트, 위스망스, 쥘 베른에서 트루먼 커포티, 이자벨 위폐르, 메릴린 먼로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영화와 사진 예술에 대한 비유적 인용이 더해져 그야말로 거대한 예술비평이 한 여인의 현전과 비가시성, 몸짓들과 부재의 수수께끼 같은 조합의 광야를 거닐게 한다.

 

비르지니아 올도이니 디 카스틸리오네’, 스스로의 미모에 대한 확신이 불어넣은 상상력 이외의 상상력은 갖고 있지 않은 나폴레옹 3세의 정부였던 귀족 여인, 그녀는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그와 얼추 비슷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라는 지고의 미로 칭송되던 그녀는 500장이 넘는 당대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초상을 비롯한 여러 포즈의 사진을 남겼다. 전시하고자하는 주제를 위해 화자는 모티프를 설정하는데, 처진 눈매, 그토록 지치고 불만에 차 보이는 얇은 입, ()을 치르는 듯한 모습, 이 여자의 슬픔은 소름이 끼친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슬픔이라니, 그야말로 진정한 자기의 괴멸이고, 내면의 와해이며, 침통이다.”라는 1857년에 찍은 <베일을 걷어 올린 초상>의 감상을 남긴다.

 

화자는 아마 이 초상사진에서 폐허를 읽었을 것이다. 이 폐허는 1995년 몇 겹의 종이막을 찢고 나오는 전위 예술가 무라카미 사부로의 몇 초간의 퍼포먼스를 통해 부연 설명되는데, 제 빈 구멍위로 천천히 늘어지는 찢긴 종이 자락이 바로 한 인간을 먹었다가 다시 뱉은 그 주제라는 것, , 박물관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이같은 폐허, 마모되며 길을 트는 통과로서, 그 터진 구멍이라는 것이다. 이제 소설은 이 수많은 의미를 담은 터진 구멍에 담긴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것이 된다. 마모되며 길을 트는이야기들.

 

비르지니아 올도이니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유력가문에서 1837322일 출생한다. 그리고 18541916세에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이 된다. 13세 때 이미 자신만의 의상실과 농장 마차를 소유할 정도의 대귀족의 여식이었다. 이 여인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꾸밈노동에 시달리고 그 사태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자신 앞에선 모든 것이 굴복했으며, 완고하고 변덕스러움과 비탄으로 가득 찬 밉살스러운 인형 그것이었을 테다. 하늘이 주는 지배와 고통, 그 경악과 미친 듯한 고독을 손에 쥔 여인,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은 나폴레옹과 동침으로 파리로 거처를 옮긴다. 사진들은 이러한 여자가 처했던 상황 속에 숨겨진 내면의 연극을 드러낸다. 설혹 온통 거짓일지언정 역할의 정수가 내부로 충분히 침투돼 자신이 하고자 하는 공연의 현실성을 스스로 믿을 수 있었던 여인의 실체를.

 

파리 상류층의 사교계는 이렇게 말한다.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은 완료형의 미인에 속했다. 그 아름다움은 우리의 시간대에 속한 것 같지 않았다.”, “비할 데 없이 영롱한 눈, 진주같은 이를 내보이는 입, 용모의 우아함과 세련됨, 얼굴의 광채, 어쩌다 길을 잃어 우리의 세속적인 시대에 있게 된 고대의 대리석상.”, 랭데팡당 벨주 L'Independant belge그녀는 우리 지역 사회의 미인들 사이에 불안을 심었다.(...) 부인들은 심히 당황했다.”고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과 주변 사람들의 시기와 절망적 곤혹을 전한다. 대중들은 이 고귀한 여인을 보기위해 좌석위에 올라서 완벽 그 자체인 여자를 향유했다,

 

더 멋진 발언도 있다. 모니 백작이라는 인물은 그녀는 마치 구름에서 내려오는 여신처럼 등장했다. 그녀는 여자들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다. 자신의 우월성에 대단히 심취해 남을 업신여기고 거만한 그녀는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우상숭배에 가까운 숭앙을 하고 있었다.” 그래, 미모와 상상 이상의 우아함을 향한 깊고 아낌없는 경탄 뒤에는 그 무심성에서 발산되는 거만함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자신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여자 나르키소스, 유연함도, 부드러움도 없는 성격, 아무런 자비심 없이 야심차고, 터무니없이 거만하다.“는 표현은 그녀가 마치 황후처럼 행동하는 데 심사가 뒤틀린 상류사회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바로 딴 여자라는 이름의 19세기식 반응이었을 것이다.

 

사실 화자의 시선 또한 이러한 여성성이란 것의 화신인 이미지에 거의 적대적 불쾌감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거부감만으로 일관된 편협성을 유지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사진을 찍기위해 일과처럼 찾아가는 촬영소에서의 포즈와 그 연출에서 여인이 표현하고자 했던 음각으로 새겨진 격동, 다시말해 흐느낌의 각인을 읽어내기도 하고, 진실을 말하기 위한 최후의 트릭, 그 사나우면서도 애원하는 듯한 눈빛을 발견한다. 아마도 전시기획자인 화자에게 이 사진이라는 가면 속 여인은 지속적으로 딴 여자로 불리는 그 기능적인 불쾌함의 투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의 종교, 복식, 입관이라는 온통 각종의 욕망이 담긴 유언의 글에서 냉소적으로 물론 그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는 욕망이야 관 속에 기꺼이 넣어줄 수 있다. 처치 곤란인데 잘 됐네.”라고 싸늘하게 한 대 갈기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욕망 가득한 유언의 글과 달리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이 남긴 사후 요망 사항 목록 20가지는 더 이상 욕망되지 않는 굴욕에 휩싸여 세상과 등진 여인의 미련없는 세상에 대한 무심한 고통이 보인다. 십자가 없이, 사제 없이, 종교의식 없이, 꽃 없이, 전시 없이, 밤 샘 없이, 의사 없이....대사 없이, 사례금 없이, 상속인 없이, 동반인 없이, 장례식 없이, 부고 없이, 안내 자료 없이, 신문기사 없이

 

높은 지능을 지녔던 이 여인은 자신의 전도를 정치에서 찾기를 욕망했지만 그녀에게 전달된 것은 자기 믿음으로부터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화자가 소개하는 18575, 아르티스트 Aritiste에 발표된 보들레르의 시, 나는 음산한 거울/ 그 속에서 메가이라는 제 모습을 노내!”라는 저 자신의 사형 집행인의 시구들은 묘하게 그녀가 처했던 상황 묘사처럼 보인다. 여인은 하스페치아의 고향집으로 돌아온다. 여기서도 화자는 그녀를 아름다움과 권력에 도취된 채 타인에게 바라보인다는 그 마르지 않고 변하지 않는 향락, 즉 자기 반영의 주위를 돌고 도는 인물로 묘사한다. 프루스트의 게르망트 부인의 모델인 몽테스키우 백작의 사촌인 엘리자트 그레푈 백작 부인의 입을 빌어 향락 가운데 자신이 모든 시선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아는 여인이 누리는 향락에 견줄 만한 것은 없으리라.”, 자기에 주어지는 동시에 자기 스스로는 개의치 않게 되는 절대적인 힘, 이 거대한 익명의 애무를 경험하고 맛보다 더는 촉발할 수 없게 된 존재의 삶을 상상해 본다.

 


여기서 엄마가 느껴야 했던 외할머니에 대한 두려움과 외할머니의 딸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그녀의 교태와 절대적 지배력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되어 흐른다. 엄마는 화자에게 비통이나 모욕, 협박, 배신에 얽힌 추억들을 얘기했다고 회상한다. 그럼에도 그런 일로 고통받을 필요가 없는 남자들은 외할머니에 대해 장난을 잘 치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 다였음을 말한다. 화자는 색 바랜 엄마의 사진 한 장을 바라본다. 자기 엄마 곁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있는 어린 엄마의 모습이다. 엄마를 지지하며 사랑하고, 그토록 다정하고 자애로웠던 엄마이지만 그건 정말 수치스럽다고. 수치심은 마치 묘비같은 말이라고 머리를 흔드는 것 같다.

 

화자는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 이 여인을 자신을 찾으러 자신을 붙들고 가두기 위해서 생애 전체를 기꺼이 사진가 작업실에서 촬영으로 축소된 인간으로 묘사한다. 경박함의 외피 아래로 멜랑콜리의 내부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사진을 찍고 그것에 붙들린 여인으로서. 인간의 초상을 찍은 인류 최초의 사진은 하나의 얼굴을 고정시킨 <익사자의 모습>이다. 이것은 당대 한 컷의 사진촬영을 위해 오랜 시간 고정된 포즈를 취해야 했던 그 고정성, 그 굳음의 예시이다.

 

화자는 한 장의 사진에서 폐위의 채비가 된 여인이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굳어버린, 요컨대 죽음의 침상을 위한 대상임을 알아본다. 이제 더 이야기를 진척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화자는 폐허를 주제로 한 전시 재료를 찾기 위해 한 여인의 사진과 기록과 관련 정보들을 수집했다. 그녀는 그것들 속에서 비가시적인 것의 소실성 자체를 한데 모아 역으로 그 존재를 확고히 하는 탐색을 진행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는 왜 박물관의 소장품을 오브제로 삼지 않느냐는 제안측의 말처럼 폐허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거부된다. 이미 스러진 한 인물의 초상은 현전과 부재라는 폐허의 이미지에 진정 부합하는 것이라는 화자의 생각은 폐허 위에 솟은 문화유산 한 점을 통한 영광의 재현이라는 실리와 상충하는 것이다. 이제 화자는 지금까지의 방식을 고수하며 교묘하게 빠져나가 주제를 따라가는 자기만의 질서를 이어나간다.

 

그것은 사적인 화자만의 전시다. 입센의 연극 브란 Brand에는 죽은 아이의 작은 옷가지를 펼쳐놓고 기억을 추억하는 여인이 있다. 그러나 집에 돌아 온 남편은 그 조그만 물건들을 처분할 것을 강요하고, 마침내 그 강요에 동의하지만 그녀는 죽은 이처럼 되고, 곧 그로 인해 죽는다. 화자가 인용한 이 연극은 결국 그 어떤 것은 생의 한 기억이 아니라 생 그 자체, 생의 감지할 수 없는 박동임을 제시하려는 듯하다.

 

이어서 1843년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이 메리 러셀 밋포드에게 쓴 글을 인용한다. 초상 사진들은, 비단 그것들이 지닌 유사성 뿐 아니라 이 오브제가 불러일으키는 여러 연상과 근접감 때문에도 신성화된 듯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인물의 그림자 자체가 거기에 영원히 고정되고 마니까라는 내용이다. 화자는 어린 엄마를 포함하여 넓적다리까지 물에 잠긴 등 돌린 세 소녀의 사진을 바라본다. 잠수하는 아이, 탐색하는 아이, 몽상하는 아이, 등 돌려 볼 수 없는 소녀의 시선, 미지의 불확정성이 기다리는 머나먼 저곳이 있음을 그 비가시적 의미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소설은 덮치고 사로잡아 더 이상 숨 쉴 수 없게, 거의 살 수 없게 몰아붙이는 주제들을 향해 이끌려갈 절박한 필요성을 소환한다. 이것은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이 생의 전부를 투사했던 초상 사진, 즉 정확히 제가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바를 공연하는 바로 그 사진, 저 자신을 전시하고 제 포즈 속에 지속하며 그럼으로써 제 반영으로 응고되려는 육체의 영속 안에서 포착되는 보이지 않는 시계판에 새겨진 엄숙한 시간을 찾는. 화자가 마침내 발견한 단 하나의 마티에르는 시간이 해부되어 돌출된 교태스럽고 사치스러운 페티코트 위의 음산한 죽음의 생각이고, 이는 화자의 죽은 엄마에 대한 애틋함, 여성성이란 것의 교묘한 역전에 의해 고통받았던 삶에 대한 애도로 향하는 것 같다.


 “구멍 앞에서 그녀는 다만 부재의 덩어리다. 사진들에서는 그 점이 보인다. 그 점만 보인다.” 부재의 덩어리인 구멍, 그 어둠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들은 본다. 거기에 영원히 고정된 존재의 그림자를, 사진 예술에 관한 소논문이며, 전시에 관한 에세이이고, 한 귀족 여인의 전기이며, 가족사인 엄마에 대한 애도로서의 사()소설이기도 하다. , 이 작품은 고전적 지위를 분명 확보할 걸작으로 살아남을 것 같다. 문학을 예술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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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티에르: 표현된 대상 고유의 재질 그 자체 또는 재질감, 작품 자체 표면의 평활(平滑)함과 울퉁불퉁한 질감, 용법에 따라 창출한 표면 효과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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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도둑 - 예술, 범죄, 사랑 그리고 욕망에 관한 위험하고 매혹적인 이야기
마이클 핀클 지음, 염지선 옮김 / 생각의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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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했던 도둑 중 가장 많은 예술작품을 훔쳤고, 가장 성공한 도둑임에 틀림없는인물의 일대기라 해야 할까? 예술품 절도 역사상 이 인물보다 자주, 그리고 더 많이 훔친 도둑은 없다는 말처럼 예술 역사의 영원한 한 부분을 차지, 가히 기록적 범죄를 둘러싼 예술범죄에 대한 총합적 보고서라 할 만한 저작이다. 한낱 절도범에 대한 추적의 기록이 무어 그리 흥미롭겠는가하지만 그 대상이 고가의 회화와 조각 등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이라는 것, 게다가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해서 훔치고, 그 어떤 금전적 이득을 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다팔기 위해 훔친 예술품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이 예술 도둑의 행위와 심리를 비롯한 행적은 어떤 매혹을 느끼게까지 한다.

 

프랑스, 스위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등 7개국 박물관, 미술관 등지에서 추정가치 20억 달러에 달하는 예술품을 7년 동안 평균 12일 만에 한 번씩 훔친 희대의 예술 절도범인 프랑스 알자스 출신의 스테판 브라이트비저는 그의 나이 스물두 살에 연인 앤 캐시 클레인클라우스가 망을 보는 사이에 알자스의 농촌마을 창고를 개조한 박물관에서 최초의 절도물인 수발총을 훔친다. 그는 소유했다는 승리감에 미친 듯한 행복의 절정에 달하고, 도난당한 박물관의 동향을 주시하고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는 것에 한 번 더 해 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체포되어 처벌될 위험이 많은 행위로부터 절도범은 어떤 느낌을 향유하고자 했던 것일까? 첫 도둑질로부터 자신감을 얻은 브라이트비저는 19952, 알자스산맥 고성의 중세 박물관에서 두 번째 도둑질을 하는데, 이때 공포가 기쁨으로 바뀌는 시간은 더 짧아진다. 이 책의 묘미는 이렇듯 최초의 절도에서 두 번째로, 그리고 또 다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절도범의 심리 변화에서부터 절도가 가능한 박물관의 보안수준, 절도의 수법은 물론, 절도대상이 된 예술품에 대한 미학과 예술사적 가치, 예술품 약탈과 절도의 역사적 기록들, 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예술계에 만연한 악의, 그리고 예술품 범죄 전문 경찰기구와 이 희대의 예술품 절도범의 추락하는 삶의 모습이 흐른다.

 

이 예술품 절도범에 대해서 상충하는 이해가 있다. 브라이트비저의 병적 도벽은 절도가 아니라 수집 강박으로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해서 훔치는 것이라며, 단순 도둑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달리 자기애성 인격장애자로 흉악범에게 보이는 특성을 가진 미성숙한 소매치기범이 예술계의 대도로 미화되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상반된 주장으로 나뉜다. 이 책은 그 어느 측에 편향된 시선을 취하지 않는데, 저널리스트로서의 저자의 훈련된 균형일 것이다.

 

브라이트비저의 일상에 대한 기술을 들여다보면 과연 그는 진정 심미관을 지닌 선택된 예술 애호가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주말에 도둑질하고 주중에는 지방 도서관과 고고학 도서관을 찾아 예술 기초지식을 섭렵하고, 142만 페이지로 구성된 베네지트 예술가 사전의 카달로그 레조네를 탐독하며, 자신의 다락방에는 500여권의 미술장서로 작은 도서관을 꾸미고, 장인에 관한 논문, 도상학, 우의학, 상징주의 등을 연구하며, 훔친 예술품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어 며칠이고 작품에 대해 공부한다. 사물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받은 자로 여기게 하는 대목이다. 이는 브라이트비저를 단순한 절도범이라 할 수만은 없게 한다. 한 인간의 사회가 예술로 대체되어 있는 것인데, 어쩌면 바로 이 수집 강박이야말로 이 책의 모든 이야기들의 근원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만이 예술품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차릴 수 있기에 불법이든 아니든 원하는 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브라이트비저의 논리는 터무니없이 허황된 주장이지만, 반박을 무력화시키는 인류의 예술품 약탈사의 한 페이지만을 보더라도 예술의 역사는 절도의 역사와 맥을 함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일례로 기원전 4세기 그리스에서 제작된 조각상인 산 마르코의 말1세기 네로에게 약탈되어 로마로, 그리고 4세기에는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12024차 십자군전쟁에서 약탈되어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으로, 1797년 나폴레옹의 약탈로 루브로로, 그리고 다시 18세기 워털루전쟁의 승자인 영국은 베네치아로 돌려놓는다. 어차피 예술계 종사 모든 사람이 도둑이나 마찬가지라는 주장의 맞춤 증거다. 그러나 이처럼 예술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악의 연쇄적 소굴에서도 브라이트비저는 독보적인 악당이다.

 

수백만의 수백만만큼 훔치고 싶다. 성공하지 못하면 마음이 편치 않을 거야. 나 자신을 잃어버린 느낌이겠지.”, 브라이트비저가 연인이자 공범인 앤 캐서린에게 하는 말이다. 그를 감상적이고 날카로우며 뛰어난 심미안을 지닌 진정한 미술품 수집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위의 진술처럼 어쩌면 도벽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결여 아닐까? 이러한 강박적 수집 욕구는 물론 위대한 미술가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욕구라는 일화도 있다. 1907피카소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유물석상 한 쌍에 매혹되어 절도를 의뢰하여 그것을 입수한다. 훗날 그의 자서전에서 고백된 내용이다. 이 석상이 <아비뇽의 여인들>모델이다. 모나리자도난 사건의 용의자 선상에 자신이 오르자 겁을 먹은 피카소는 슬그머니 제 3자를 시켜 경찰서에 석상을 몰래 갖다 놓는다. 예술의 값어치보다 아름다움 자체가 좋아 공공을 배제하고 자신 혼자만이 그것을 누리기 위해 훔치는 행위가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깔끔하고 치밀하게 대낮에 이루어지는 브라이트비저와 앤 캐서린 2인조 절도범은 자신들의 행위가 언젠가는 덜미를 잡힐 것인지 예견하지 못했을까? 앤 캐서린은 자신들에게 사방에서 시선이 조여 오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렸던 듯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서 수술 장갑을 브라이트비저가 반드시 착용하고 작업을 할 것을, 지나치게 많은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음을 전체적으로 감지했을 때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만 이 강박적 수집가는 그의 인생이 영원히 절단 나는 전환적 사건을 맞이한다. 능숙함과 강렬한 소유욕망은 조심성을 망각하게 한다.

 

169쪽 절도품 도록 중 발췌


이 저작의 재미는 예술품 절도와 그 예술사적 의미의 향유에 그치지 않는데, 브라이트비저와 앤 캐서린의 동거와 그네들의 관계에서 추정되는 애정의 본질과 갈등, 브라이트비저라는 인물의 절대적 보호자인 어머니, 후일 그가 수감되었을 때 아들의 성장을 외면했던 아버지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처럼 인간애가 자칫 메마른 르포기사가 될 저술을 풍성한 인간미로 에워싼다. 게다가 마치 추리문학과 같은 긴장감까지 한 몫 해서 그들의 절도 행위에 순간 은밀히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그 불합리하고 부당한 행위에 동조했음에 놀라기도 한다. 특히 7년여에 걸친 절도이후 운명의 날이 다가와 그가 수감되었을 때 그를 면담한 심리학자들을 비롯한 특이하게도 독보적 분야의 전문영역을 연 예술범죄학, 분석심리학자들의 예술품 절도에 대한 진단 등은 자칫 가벼운 일화로 멈출 이야기의 품격을 올려놓기도 한다.

 

수집을 통해 세상과 분리된 자기만의 세계로 마법처럼 탈출하는 느낌을 지적하며 충동적 수집 강박을 처음으로 언급한 베르너 뮌스터버거의 수집: 통제할 수 없는 열정, 진정한 수집가라면 모두 포화점이 없다. 충분하다고 느끼는 순간 따위는 절대 오지 않는다.”며 예술품을 훔치는 부류가 자신의 행위를 결코 부도덕하다고 느끼지 않음을 지적한 에린 톰슨의 소유 Possession는 예술품 범죄에 대한 연구를 하고자하는 이들에게 훌륭한 참조가 되어줄 것 같다. 부모의 이혼, 가정의 파탄으로 고독의 구덩이에 빠졌던 청년은 예술로나마 주변을 채워야 했을 것이라는 한 영혼에 대한 관대함은 이내 구제할 길 없는 나락으로 빠지는 인간에 대한 속수무책의 허탈함을 느끼게도 한다.

 

브라이트비저가 자신의 절도 행위를 예술에 대한 도취로 주장하며 내세운 스탕달증후군 또한 우리 인간들의 자기기만 혹은 정당화의 모습으로 바라보게 하는데, 예술 작품을 보고 감동과 열띤 관능에 압도되어 황홀경을 경험하는 정신적 분열증상을 이른다. 1871년 스탕달이 일기 형식으로 쓴 이탈리아 여행기 로마, 나폴리, 피렌체에서 산타 크로체 성당 구석의 작은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의 감상에서 느꼈던 정신적 혼란의 묘사에서 나온 용어인 모양이다. 사실 이것은 그럴듯한 말로 꾸며낸 여행에서 겪는 시차로 인한 피로의 어지럼증, 떨림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브라이트비저의 예술 운운 하는 주장은 도벽의 기만적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전과자로 낙인이 찍힌 인간에게 세상은 거듭되는 그의 절도 행위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는 201920여 년 전에 훔쳤던 상아조각상 아담과 이브가 있는 벨기에 루벤스 박물관의 단돈 4달러 짜리 책자를 훔치다 다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강화된 예술품 절도범에 대한 처벌로 인해 60세가 되어서야 출소하게 될 것으로 예견된단다. 이제는 한낱 파렴치한 소매치기범으로 전락한, 더 이상 심미안의 소유자로서 단순 도둑놈이 아님을 항변할 수 없을만큼 전락한 것이다.

 

그의 인생을 영원히 뒤바꾼 스위스 루체른에서의 체포와 구속은 아들을 예술에 빼앗긴 어머니의 대대적인 다락방 숙청 작업으로 강변에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수많은 유화들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인류 문화유산에 대한 무책임한 훼손은 그를 공공의 적임을 피할 수 없게 한다. 매년 5만 건의 예술 도난사건이 발생하며 개인 소장물의 경우 그 회수율은 10%, 박물관과 미술관 등 공공기관의 도난회수율은 50%에 그친다고 한다. 우리사회의 현황은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으나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미국 등 구미 선진국들은 예술품 범죄 전담기구에서 20명에서 300명에 이르는 특수요원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이 책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번은 하게 되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가히 매혹적인 심리스릴러에 비견되며, 강렬한 예술 작품 앞에서 미학과 윤리의 경계에 서 갈등하는 마음에 이입되기도 하고, ‘집착과 그릇된 재능에 의한 범죄행각과 그 심리탐사이며, 배신과 놀라운 반전이 있는 흥미진진한 한 인간의 삶의 전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저술은 놀라운 예술 작품이다. 무언가에 지극한 사랑으로서의 이 미친 예술 이야기는 예술이란 진정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멋진 질문을 던진다. (*수록된 26작품의 절도품 컬러 도록이 책의 완성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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