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장소, 환대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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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 도덕적 공동체 -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中略)...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 1사람의 개념 중에서

 

위의 인용 문장은 책 첫 페이지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이렇게 길게 옮긴 이유는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항시사람임을 인정받고 있는가?, 그리고 국적, 인종, 직업, 성별, 연령과 무관하게 타인을 사람으로 환대하고 있는가를 생각게 했기 때문이랄 수 있다. 사람이란 외형적, 생물학적 동일성이라는 보편성에 의거한 종()으로서의 인간과는 구분되는, 인간 상호간의 의례(질서)에 따라 인간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체하는 것에 대한 상호 믿음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인간에 대한 이름이다.

 

현대 사회, 오늘 우리의 사회는 의례적 평등 원칙을 표면적으로는 상호작용 규제 규범으로 하고 있다. ‘법 앞의 평등이라는 말은 의례교환의 대칭성을 선언하는 대표 원칙이란 얘기이다. 그러나 이 원칙은 현실 세계에서 지켜지지 않는다. 이 의례원칙이 사라지는 예외지대가, 아니 예외 현상이 오히려 만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현상이 고착화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1. 모욕과 신분주의

 

유교적 세계관에 뿌리박은 낡은 신분주의가 지역주의에 편승하여 여전히 횡행하고 있으며, 배금주의 토양위에 맹렬하게 퍼져나가는 신분주의 또한 의례적 평등주의를 훼손하고 위협하며 파괴하고 있다. 한 쪽이 다른 쪽을 모욕할 수 있는 의례코드 자체의 비대칭성이 차별을 수용한다는 조건하에 상호작용 집단 안에 머무를 자격을 얻는 다는 것은 조건부로 사람됨의 자격을 얻는다는 것이며, 이는 의례적 불평등이 일상화 되었다는 의미이다.

 

신분적 의례가 상호작용 질서를 압도할 때 지배적 지위를 지니지 못한 인간들은 더 이상 사람이라는 자격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사람 자격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상호작용 공동체(집단)의 성원권을 잃는다는 뜻이다. 같은 공간 안에 있지만 거기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 다시 말해 비가시화되고, 현상되는 공간의 바깥으로 배제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인격,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이 그 상호작용의 틀 속에서 사라지고 비인격화되어 버리는 것, 모욕 받는 것이다. 모욕은 이렇게 존엄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며, 마침내 기존의 자기 이미지를 포기케 하여 굴종을 정상화하고 사회에 현상하지 않는 존재처럼 지워버린다.

 

문득 2020415일 선거결과가 한국사회의 상호작용 의례에 만연한 비대칭성, 의례적 불평등을 겪고 있는 시민 개개인들의 자각에 따른, 모욕의 상시화에 대한 시정의 외침이 아니었을까하는데 생각이 다다른다. 마치 자신들 이외에는 사람이 없다는 듯이 행동하던 수구 기득권 집단에게 비가시화된 시민들의 저항이었다고 말이다. 너희들이 비인격화한 인간이사람으로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고.

 

행위자들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의례적 권리/의무가 달라지는 이 사회의 불순함과 물질 우선의 신자유주의 신봉, 양반/노비 타령을 하는 지역적 특성, 가부장적 권위주의 지향의 보수주의자들의 신분주의적 권력과 정치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었을 것이다.(물론 일부 지역의 투표권자들은 어떠한 모욕도 없는 사회에 있다고 해야겠지만)

 

고관대작도 재벌도 아닌 대다수의 시민들은 무수한 모욕을 떠안으며 신분(지위,재산 등등)이 낮을수록 그들에게 행해지는 무례함의 한도가 커질 뿐 아니라 모욕의 질량이 평가절하된다. 이렇게 사회에 만연한 모욕에는 그 고유한 성격을 내재하고 있다. 타인의 인격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 이러한 부정에 대해서 다시금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너는 개새끼야, ‘나는 개새끼입니다라고 크게 복창해!” 모욕은 이처럼 자기 부정을 강요하여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포기하게 하는 폭력이다. 이러한 의례적 폭력은 사실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순순히 이에 협조하지 않으면 간신히 걸친 사람의 자격을 완전히 박탈당할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의례적 비대칭성이라는 신분주의는 곧 구조적 폭력의 근간을 이룬다는 것이다. 극단적 표현을 빌린다면 신분주의를 숭배하는 보수주의 집단의 한국사회는 근본적 폭력사회를 지향한다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저자 김현경은 존비법이 엄격한 사회는 엄청난 감정노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임을 지적하고 있다. 아마 건물 경비원, 백화점 판매원, 골프장 캐디, 전화 교환원. 마트 계산원 등등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 상황을 목격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감정이 그만한 배려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뼛속 깊은 신분주의적 가치관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제복 착용을 강요받고 신분적 차별의 대상으로 공시한다. 낙인찍기라는 것이다. 전형적인 스티그마의 한국사회 면모일 것이다. 상호작용의 평등성, 대칭성은 이렇게 파괴되어있고, 신자유주의적 노동세계는 이처럼 신분적 모욕을 일상화한다.

 

한편 가해자가 있는 모욕은 이제 가해자 없는 굴욕의 형태로 변화하여 그 모습을 감추고 더욱 극렬하게 인격을 무너뜨리고 있다. 예고 없는 실직(문자로 날아온 해직 통보), 일한 대가와 무관한 보수, 일방적인 월세 인상... 아무도 굴욕을 당하는 사람을 모욕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장주의가 명하는 대로 행동했을 뿐, 굴욕감은 전적으로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문제라고 한다. 그런데 상호작용 질서차원에서 모든 인간의 존엄을 주장하면서 구조 차원에서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으며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라고 비아냥거리는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인 수구주의자들은 이 모순을 깨닫지 못한다. 형식적 평등, 실질적 불평등을 정상화하는 이 사회를 바라보는 것은 사실 공포 그 자체이다.

 

 

2. '절대적 환대'를 생각하며

 

이 정도에서 사람의 자격에 대한 객설은 마쳐야 할 것 같다. 사실 이 책의 리뷰를 쓰도록 한 동기는 지하철에 탑승한 독일 거주 9년차인 한국인 부부를 향해 독일인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진 5인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빌미로 노골적으로 인종차별과 성희롱을 무차별적으로 행사하는 2020427일 뉴스 매체의 영상 때문이었다고 해야겠다. 관할 독일 경찰은 구타의 흔적이 없으므로 사건 접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무시했으, 이에 주독일 한국영사관이 항의하자 조사해보겠다고 했다는 전언이었다. 저자 김현경은 공간에 대한 권리이자 교제의 권리, 즉 친교의 가능성으로 충전된 현상학적 공간에 들어갈 권리라는 칸트의 환대에 대한 정의를 인용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됨을 부정하지 않는것이라는절대적 환대를 주장한다.

 

환대란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며, 이러한 인정은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는 몸짓과 말을 통해 표현된다. 이미 사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조건부로 사람됨을 인정받는 현실에 외국인이라 불리는 이방인에게 무조건 자리를 내주는 절대적 환대가 가능하겠는가라는 의구심이 앞선다. 그럼에도 사회란 절대적 환대를 통해서 성립했다고, 만일 이 환대가 불가능하다면 사회 역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몸에서 벗어나 이 세상에 나오는 동시에 사회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무조건적 환대는 사회의 기본 원칙이란 것이다.

 

그러나 보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복수하지 않는 환대가 가능한 것인가? 칼을 들고 뛰어드는 강도에게도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것인가? 저자는 말한다, 비록 범죄자이더라도 그를 사회 바깥으로 두는 순간 그가 더는 공동체의 성원이 아닌, 즉 사람이 아니므로 법의 질서하에서 그를 처벌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법의 바깥에 있는 것인데 어떻게 범죄가 된다는 것인가 하고 묻는다. 또한 희생 담론을 인용하면서 사후의 명예라는 죽은 자의 산자들 사이의 자리에 대한 믿음처럼 자리란 신성한 것, 불가침의 무엇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구에서 들려오는 한국인에 대한 인종적 차별과 폭력의 뉴스는 계속되고, 하물며 일본, 베트남과 같은 아시아권 국가에서조차 한국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 사건은 그치지 않고 들려온다. 절대적 환대가 인류의 역사에서 단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지만 사회운동이란 현재 속에 이미 도래해 있다고 이해하며 실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서바이벌 로타리의 모순, 사적 공간과 공적공간을 분리하지 못했다며 데리다의 절대적 환대 부정론 비판에 따르는 저자의 성찰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계의 곳곳에서 발생하는 사람자격의 박탈 소식은 모욕감으로 떨려온다.

 

이 저술을 이렇게 국한된 사건에 한정하여 서술하는 것은 내 부족함이다. 조건부로만 사람됨을 인정하는 유교의 전근대적 인권의 시각에서부터 조르조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예외 상태의 담론을 활용한 사람의 자격에 대한 사유, 공리주의 피터 싱어와 론 해리스의 왜곡된 생명윤리에 대한 시각 비판을 통한 의례대상으로서의 사람에 대한 통찰적 분석은 가히 인간 존엄에 대한, 사람의 평등에 대한 중대한 시사를 안겨준다. 아마 책 전체가 지금 이 세계를 살아가는, 타인을 대하는 보다 성숙된 지적 풍부함과 아울러 도덕적, 비판적 성찰로 이끄는 사유들로 빼곡하게 차있다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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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구병모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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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흠집에 매혹되는 건 오래된 인간의 불가해한 본능이다.” P 145에서(수정인용)

 

 

합리적 추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죽음들과 피부에 수놓아진 사람들의 사연이 참담하게 얽혀있는 이야기다. 괴이하다할 - 온 몸에 불이 붙어 창밖으로 떨어져 내리고, 육식동물의 날카로운 송곳니로 찢어놓은 듯한 열상, 벽시계 높이까지 젖었다 마른 흔적만 있을 뿐 물에 빠져 질식한 듯한 - 죽음을 맞이한 대상들은 생전 타인을 향한 비열함과 비정함 그리고 잔혹한 폭력을 행사한 자들이다. 그렇게 타인을 사회적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이들이란 과연 누구인가?

 

시미’, 오십대의 중년 여성, 애 낳고 솥뚜껑이나 운전하지 않아서, 마트 계산대도 아니고 콜센터 상담원도 아닌 사무부서 직원으로 재취업한 것이 조롱 대상이 되어야 했던 여자, 남편의 폭력으로 이혼하며 아이와의 만남까지 배제되어야 했던 여자, 십년이 지나도 아무런 직위도 없는 그저 사무원인 사람이다. 딸 벌인 후배 직원 화인의 목뒤에 꼬리를 고붓하게 말고....한 점의 불씨처럼 빛나는 문신, 샐러맨더,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타투, 살갗을 뚫어 새겨진 매혹적 상처가 그녀에게 우연의 길을 연다.

 

재래식 한약방 같은 주택, 화려한 여느 타투 스튜디오 간판도 없는 곳 앞에 주저하며 서 있는 중년의 여성이 그려진다. 충동적으로 몸에 새긴 샐러맨더에 대해, 잃었던 자신감과 의욕이 다시금 심장에 고이는 듯 했던 날들에 대한화인의 얘기가 이끈 발걸음. 우체국 공무원 같은 인상을 지닌 30대 중후반의 타투 아티스트도 아닌 문신술사라는 명함을 지닌 사장과 시미의 선문답 같은 대화는 이야기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한 문장 한 문장을 새기며 읽게 된다.

 

제가 한 건 맞는데 따로 찍지 않습니다. .... 남겨 두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요. ...

언제가 됐든 사라지니까요 - P 42~44 (발췌 인용)

 

기이한 죽음 뒤에 남아있는 여자들, 사회적 약자들, 한 때의 충동을 기억 한 채 흐릿한 흔적만을 지닌 사람들. 소설을 여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쭈그려 앉아 떨고 있는 한 젊은 여성의 모습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인 방화 추락 사건의 희생자를 화인의 아비로 연결 지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샐러맨더’, 그녀의 타투가 영혼이 들고 나는 통로였겠구나하는 뒤늦은 애틋함, 그 고통의 나날을 잊기 위한 처절한 몸의 울림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가위로 샐러맨더를 찍어버리려 덤벼드는 아비, 밀어 넘어뜨리고 주먹으로 얼굴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아비, 화인은 아비의 죽음을 말한다. 그 인간이 없어지기를 20년 가까이 바랬다고. 그녀가 제일 절박했던 순간에, 이러다 죽을 것 같았을 때, 아비의 잔혹한 폭력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준 것은 무엇일까? 사회적 인습이라는 얼굴로 누군가의 아내이며 어미이며 딸인 여자들을 옥죄던 너울들, 뒤늦게 엄마 노릇하려 들지 말라는 성장한 아이의 냉담한 소리에서 모자관계란 애당초 형성되지 않았음을 깨닫는 시미의 현실 인식은 화인의 비참한 소망처럼 오래된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의 목소리가 되어 울린다.

 

시미의 손목에 새겨진 작은 별 하나, 그 별이 떠올라 부풀어 산산이 흩어져 밤하늘을 수놓을 때, 불현듯 기 발표된 작가의 단편 소설, 관통이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칼로 캔버스를 베어내 틈을 만들어냄으로써 세계를 확장한 루초 폰타나(Lucio Fontana)의 그라피티가 떠오른다. 살갗을 뚫어 무언가를 새기는 상처의 매혹, 비일상을 꿈꾸고 기존의 인습적 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이 내 마음속에서 겹쳐졌던 것 같다. 그들의 문신은 억압된 인식의 지평을 한 차원 확장하는, 공간을 들고나는 영혼의 창, 그 통로였으리라. 아마 이 소설을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 누구보다 빛나기를 열망하는 사회적으로 죽임 당한 자들의 이 이야기가 문신을 통해 편협에 갇혀 무관심을 동반한 내 무지를 한 뼘 만큼 줄여줬다고. 그리고 내 이기적 시선이 조금은 관대해 질 수 있게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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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저널리스트 : 카를 마르크스 더 저널리스트 3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영진 엮음 / 한빛비즈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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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동력을 판 노동자는 자기 삶의 8시간, 12시간, 24시간....조금씩 떼어 판다.

누구의 소유에도 속하지 않지만 떼어낸 삶의 시간에는 자본가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 자본가에게 매여 있는 것이다.” - 본문 151, 임금노동과 자본

 


마르크스의 주저(主著)자본(Das Kapital)과 함께 이의 원활한 이해를 위하여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시리즈와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를 참고하며 더딘 속도로 내 본질적 사유체계를 확인하기 위한 읽기를 하던 중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무엇보다 편역(編譯)자의 소개말처럼 마르크스가 어떤 과정을 통해 사상을 구체화했는지, 그 맥락 이해에 좋은 역할을 해주리라는 기대에서였다고 해야겠다.

 

자본1편 제2교환과정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상품은 스스로 시장에 갈수도 없고 스스로 자신을 교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품의 보호자 즉 소유자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은 물건이므로 인간에게 저항하지 못한다.”

출처: 김수행 자본론』Ⅰ[], 2008420일 비봉출판사, 2개역판 9P108

 

굳이 이 문장을 인용하는 이유는 너무도 당연한 것, 지극히 평범하고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곳에 마르크스의 시선은 그 행위에 내재된 의미의 밑바닥까지 들이밀고, 바로 그 심연에서 실질적 작동의 원천을 기어이 퍼 올려, 보이지 않았던 아니 보지 못했던 진실을 우리들에게 펼쳐놓기 때문이다.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이 전제적 소유권을 행사하는 구매자인 자본에 끌려가는 자본의 내재적 폭력성을 함유하는 글이다.

 

마르크스를 오늘 읽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처럼 평범한 것에 놀라는 눈, 맹목을 맹목으로 보지 않으려는 관심의 눈을 배우기 위함이다. 그리고 덤처럼 지금 이 세계의 체제인 자본주의가 지닌 한계와 그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올바른 지혜의 틀을 구축하고 내 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이를테면 왜 자본가와 노동자의 부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기만 하는 것일까?’, 또는 최저임금은 진정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와 같은 물음에 대한 근원적인 답을 사유하는 지혜의 바다로서의 역할을 해 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를 읽는 것이 곧 체제전복 모의인 것으로 몰아대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에도 여전히 이를 기득권 유지의 도구로 이용하는 세력이 있긴 하지만 이젠 무시할 정도로 시민의 지적 소양이 높아졌다고 나는 믿는다. 오늘 민주화된 우리의 사회가 있기까지 일제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이래 무려 반세기에 걸친 부패와 독재, 유신, 폭력시대를 거쳐 왔다. 이에 대한 생생한 육성처럼 여겨지는 최근에 발표된 장혜령의 소설 진주에는 편집된 민주화 투쟁을 외치는 시국선언문의 문장들이 있다. 그리고 불법 연행, 감금되어 고문자가 읊어주는 나는 공산주의자입니다. 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나는 불법조직에 가담하여 사람들을 선동하였습니다.”(소설 진주128쪽에서 인용)를 울면서 받아쓰게 하곤 당신은 잘못한 것이 없어요. ...곧 돌아가게 될 겁니다.”라고 거짓 위로를 뇌까리던 소설 속 문장이 떠오른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이식되는, 자본을 축적하느라 노동력, 인간의 노동이 오직 착취대상으로만 취급되던 시기였다. 우리에게도 자본과 결탁한 권력, 권력과 자본이 유착하여 노동력의 축적가치를 독식하던 압축된 시기가 있었다. 이에 이의를 제기하면 사용하던 수법이 바로 공산주의자 몰이, ‘빨갱이낙인찍기다. 이 파렴치한 말이 지금도 정치배들로부터 흘러나올 때면 그 추악한 저의에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곤 한다.

 

케케묵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자본의 성장과 축적의 집중이 진행되고 있다. 분업의 가속화, 자동화와 노동의 단순화라는 노동 경쟁의 극렬화로 인한 압박이 높은 실업율을 정상화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대대적인 설비와 기술개발 경쟁으로 생산비용 감소를 통한 자본경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과열된 동요”(본문 180)가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자본의 생존을 위해서 끝없이 반복되어야 하는 모순으로 가득한 체제의 불협화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옆의 약자와 고통 받는 이웃들이 알지 못하고 겪는 자본의 내재적 폐해에 대해서.

 

1. 저널리스트 마르크스의 기사들

 

책은 17편의 기사와 노동임금과 자본이라는 노동자를 위한 자본주의 설명서랄 수 있는 1847년 출간된 팸플릿으로 구성되어 있다. <The people's paper: 人民報에 실린 노동자 의회의 창립을 축하하는 편지를 제외하면 16편의 기사가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기고한 글로서 게재된 1850년대의 영국중심의 경제, 사회적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대부분 부르주아의 대변지 기능을 수행했던 <선데이 타임스를 비롯한 자본가들과 정치권력 계층의 곡해된 논리를 반박하는 형식의 글로 씌어진듯하다. 자본가들의 자기 계급적 이익을 위한 맹렬하고 저열하며 추악한 탐욕이 아마 가장 강렬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이번 달에도 런던에서는 기아 사망 사건이 또 여러 건이 발생했다....

메리 앤 산드리는 얄팍한 짚더미 위에서 아무것도 덮지 않은 채 발견됐다...”

(본문 30, <기아라는 형벌>에서)

 

공장주는 자신들이 고용한 노동자의 목숨이나 팔다리를 지켜주려고 하기는커녕....

움직이는 기계들의 마모비용을 어떻게 남에게 떠넘길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본문 119, <공장노동 현안 보고>에서)

 

 

이처럼 기사들의 내용은 온통 기아와 빈곤, 부상과 죽음의 위협에 놓인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을 일회용 소모품 정도로 취급하는 자본가들의 거침없는 축적의 열망, 욕망의 질주로 채워져 있다.

 

그 중 깊은 인상을 주는 몇 몇 기사가 시선을 잡는다. 그 첫째는 임금에 대한 당대 주류 경제학의 논리이다. “임금이란 공장주의 실질이익이나 추정이익에 대한 일종의 공동지분을 챙기는 것이라고 부르주아지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은 무식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임금이란 자본가가 일정량의 노동력을 사기위해 기존에 축적한 상품, 즉 축적된 노동력의 일부분이다.” 노동력을 통해 축적된 가치자본이다.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는 불합리하게 착취당한 노동력의 생산 가치를 돌려달라는 의미이다. 게다가 임금인상을 요구하려면 공손한 태도로 요청해야 수용될 수 있다고 말하는 공장주의 말은 헛웃음까지 터져 나오게 한다.

 

둘째는 세계 경제, 아니 경제 식민화와 관련한 영국의 대외 수탈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렬한 비판의 시선이다. 2차 아편전쟁으로도 불리는 애로우 호사건에 숨은 영국 자본가의 비열함과 탐욕이 혼합되어 만들어낸 상품시장의 강제 개방을 위한 침탈 행위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자본주의 민낯인 노동력과 생산비용, 상품 시장에 이르는 자본 축적의 순환에 내재한 폭력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즉 노동력을 쥐어짜 생산비용을 절감하고 이윤을 더 많이 축적하기 위해서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 내야하며, 이렇게 초과 생산된 상품의 교환가치를 늘리기 위해서 대외 통상을 통해 판로를 확장하려는 자본가들의 세력이 벌인 야만적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 기록으로서의 기사를 통해 이론의 살아있는 사례를 접하는 횡재를 얻기도 하는 것이다.

 

2. 임금노동과 자본에 대해서

 

사실 내겐 노동자들을 위해 준비된 강의 자료였던, 이후 1849<신 라인신문>5회에 걸쳐 게재되었던 노동임금과 자본을 마침 읽는 기회가 되었다는 반가움이 더욱 컸다고 해야겠다. 이후 집필된 자본(Das Kapital)의 주요한 내용이 압축되어, 그것도 누구라도 쉽고 이해 가능한 글이 되도록 하려는 마르크스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기회일뿐더러, 상호 틈새를 메워줄 무엇인가를 발견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동력을 말하기 위해서는 상품을 설명해야 하고, 또한 인간관계와 그 역사성에 대한 선행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아무려니 이 모든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의욕 탓에 상품, 교환가치, 노동력, 임금, 거래, 화폐, 이윤, 사회적 관계, 생산비용, 축적된 노동, 생활유지수단가격, 실질임금, 상대임금, 자본, 이자수익 등 각 용어마다 수십 쪽에 이르는 설명으로도 부족한 것들이 불과 30여 쪽에 집중되어 있어 읽는 수고가 만만찮다.

 

임금 노동자들인 당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자기 계급적 인식과 부르주아지와 그들이 축적하려는 자본의 성격을 명료하게 인식시키는데 총력이 기울여진 저술이다. 노동력이 왜 상품인지, 상품이기에 여느 상품처럼 가격 결정하는 방법도 같다는 것, 상품 가격의 상승과 하락은 무엇을 뜻하는지, 즉 노동력의 가치가 왜 상승 혹은 하락하는지를 설명한다. 결국 상품가격은 생산비용으로 수렴하며, 이 말은 상품의 가격은 생산비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임을 확인시킨다. 그리고 생산비용에 따른 가격 결정은 상품 생산에 들어가는 노동시간에 따라 가격을 결정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라고 다시금 부연 설명하기도 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임금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것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인지, 예컨대, 면방직 공장 노동자는 면제품만 생산하는가? 하고 묻는다. 그리곤 그는 자본을 생산한다!” 고 알려준다. 그가 만들어내는 가치는 다시 자신의 노동을 통제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자본은 축적된 노동력이다. 노동자의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생산물의 교환가치 중 생활유지수단 만큼만 지급되고 나머지 잉여가치는 자본가가 축적한다. 그러니 자본을 축적된 노동력이라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축적된 노동력에 의해 노동자는 고용되고 또 생활유지수단을 의존하게 되는 것이니 노동자의 노동은 자기 자신을 얽어매는 기이한 형국이랄 수 있다. 자본의 본질이란 이처럼 노동력 착취를 근간으로 한 인간 역사 이래 아주 특수한 사회체제임을 설명한다.

 

더구나 이 순환 고리는 노동자의 임금 노동이 자기 자신 위에 군림할 별개의 부(), 그러니까 자신의 적대세력인 자본을 생산해내고 있다는 뜻임을 알려준다. 이 결과를 통해 노동자는 생활유지수단이 주어지는 체제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배경 지식을 기반으로 자본이 어떻게 성장해왔으며, 그 축적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한다. 새로 창출되는 가치에서 살아있는 노동이 차지하는 몫과 축적된 노동, 즉 자본이 차지하는 몫과의 관계인 상대 임금(relative wage)'을 이해하게 되면 임금과 이윤의 일반법칙의 절반은 안 것이 될 것이다. 이는 21세기 세계화된 상품시장에서 경쟁하는 오늘날의 거대 자본가들 간의 경쟁, 실업율의 지속적인 증가 현상, 소득 간극의 극단적인 확대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앎의 과정이 된다.

 

상대임금은 실질임금이 오르는 비율이 이윤의 증가비율에 미치지 않을 때 떨어지게 된다.

... 따라서 자본이 급속히 증가하면 노동자의 수입도 늘어나겠지만

동시에 노동자와 자본가를 가르는 사회적 간극은 더 벌어지고,

자본이 노동을 지배하는 권력도 커지며....”   (본문 174쪽에서)

 

 

이쯤에서 그쳐야 할 것 같다. 자본주의라는 생산방식은 역사발달 속에서 아주 특이한 관계에 속하는 사회체제임을 이해하는 것, 자본은 노동력의 축적가치임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수고는 충분히 보상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 사이에는 그 어느 때보다 진정성과 불편부당에 대한 요구의 목소리가 높다. 알아야 요구할 수 있으며, 왜곡과 그릇됨을 분별할 수 있다. 당연한 것이라고 관심을 지니지 않거나 혹은 몰랐던 것으로부터 그 원천과 본질을 통찰해내는 마르크스의 눈으로부터 더 한층 배우게 되는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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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만찬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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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에게 실례되는 표현일 수 있겠지만 이스마일 카다레(), 즉 그만의 독특한 특징이 유감없이 발휘된 또 하나의 걸작이라 하고 싶다. 오랜 관습의 옷을 입고 전승되어오는 신화적 이야기가 발산하는 어떤 두려움과 숭배의 감정, 그리고 급작스럽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유발하는, 이를테면 무구한 표정 뒤에 해살을 떨어대는 악마적 심사가 결합하여 묘한 양가적 감정을 자극하며 독자의 정신을 유혹하는 것이다. 이 두 요소는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환기시키고 주목하게 하여 그 진실을 사유케 하는 데 최적화된 결합인 것 같다. 그래서 주제가 뿜어대는 진중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경쾌한 재미에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다.

 

나는 이 작품에 대해 고의적인 오독을 하려한다. 번역된 제목에서와 같이 소설의 근간이 되는 만찬(Le diner)’에서 비롯된 역사적 기록과 경험 및 증언과 같은 기억이 서로 충돌하여 빚어내는, 우리네의 표현으로 하자면 과거사()에 대한 복잡다단한 기억 전쟁의 작품으로. 발칸반도에 위치한 국가 알바니아는 20세기 내내 주변의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에 의해 복속과 해방, 분열과 연합이 반복되었다는 측면에서 우리의 근대사와 유사한 민족적 고통을 안고 있다. 소설의 배경은 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이탈리아에 병합되어 억압된 삶으로 숨을 죽이던 알바니아 남부도시 지로카스라 시()에 해방시켜주겠다는 명목으로 독일 기갑여단이 진입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시작된다.

 

보수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진영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그들에게 독일군의 진입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로 분열되어 자중지란의 상태에 빠져든다. 기갑여단의 척후병이 시에 진입할 때 누군가 독일군을 저격하고, 성난 전차의 포신이 일제히 도시를 향했을 때 창 밖에 흰색의 항복기가 펄럭인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집안에 들어앉아 숨을 죽이고 있던 대다수의 시민들, 이들이 한 것은 무엇일까? 소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어둠이 내리고 의문이 더 집요해지는 시간이 왔다. 누가 그 흰 천을 펼쳤을까?

독일 척후병에게 총을 쏜 사람은 누굴까? - P 28 에서

 

이어서 으레 인간이 하는 행동을 서술한다. “후자에 대한 답은 머지않아 밝혀져 어떤 이들의 자랑거리가 되겠지만”, 흰 천을 올린 사람의 정체는 점점 더 어둠 속으로 빠져들 것이라고. 그리고는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순백의 항복 신호를 올린 게 사람인지, 유령인지... 9월의 바람이었으니 찾지 못할 

것이다....(中略)...단지 바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조물주의 손가락이 정해진 일을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 P 28 에서

 

9월의 바람이란다. 조물주의 실행이니 다수가 짊어져야 할 비굴함, 가책은 증발해 버리고 망각의 나락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 유머의 문장은 조롱이라는 악마의 모습으로 인간의 저열성에 비수를 꽂는다. 이제 이야기의 축이 되는 역사, 소위 과거사의 기억을 위한 다분히 상징적이며 현실적 사건의 중심인물인 저명한 외과의사 대()구라메토와 그의 환영 같기만 한 소()구라메토가 이 역사적 현장에서 불가피하게 마주하여야만 했던 일화로 옮겨간다.

 

정치인들이 고작 진영 싸움에 매몰되던 시간, 무작위로 잡아들인 인질들이 시청광장에 세워지고, 독일군 기갑여단장 프리츠 폰 슈바베대령은 뮌헨에서의 대학 동창이자 형제보다 나은 친구였던 대구라메토를 불러 알바니아의 손님맞이 법()베사(신의)’를 들먹이며 저격에 대한 책임을 추궁한다. 또한 동태(同態)복수법인피는 피로 갚는다.’라는 관습법 카눈으로 위협한다. 구라메토는 베사에 의해 친구인 슈바베에게 만찬을 제의하고, 죽음의 기다림이 드리운 불결한 광장의 기운과 달리 이윽고 대()구라메토 박사의 집에서는 음악이 울려 퍼지며 샴페인을 곁들인 만찬이 벌어진다.

 

슈바베는 구라메토에게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세력의 이름을 추궁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음을, 별명뿐임이라 반론한다. 그러나 인질들은 모두 무사히 집에 귀가하게 되고, 이 역사적 만찬은 치욕의 만찬부활의 만찬이라는 양극단의 불가사의한 사건으로 잊혀지는 듯, 알바니아는 또 다른 정세의 변화라는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독일의 후퇴와 러시아의 우위는 자동으로 세력의 상황이 역전된다. 새로운 체제, 새로운 시대, 재건, ... 소설은 이 시기를 제로(Zero)밑의 시간, ()의 시간이라 부른다. 동요가 항구적으로 쉼 없이 따라다니고 집회가 끝없이 이어지는, 만세와 타도가 번갈아 외쳐지며 살아야 할 것만큼이나 죽어야 할 것이 있다고, 피의 회수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진다.

 

검은 샤니샤 동굴이여

너를 보니 이성이 달아나는 구나“     - P 148 에서

 

가장 깊고 무시무시한, 악명 높은 고문으로 전설이 된, 그러나 오랜 시간 폐쇄되어 있던 감옥이 구라메토의 심문을 위해, 그 동굴의 문이 열린다. 스탈린의 눈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야망에 불타는 젊은 판사 아리안 치우는 구라메토의 그 누구도 넘겨볼 수 없는 권위, 그 경외감에 대한 시기심으로 그의 심문에 뛰어든다. 심문 담당자로 선임되는 날, 그는 행복감이 달뜬 도취감과 뒤섞였고, 도취감은 묘하게도 공격성과 뒤섞였다.”고 복수의 갈증을 피력한다. 비겁함, 배신의 의사가 아니라 단지 바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조물주의 손가락이 행한 일이라고 백기를 치부하던 대다수의 방관자는 이 지점에서도 그 방관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안전과 영달에 연연할 뿐.

 

이제 공식 문서기록과 사건의 직접 경험인기억과의 사투가 시작된다. 공산당 지도자 청산계획이라는 전 지구 차원의 암살 계획 음모의 핵심인물로 지목되어 만찬에서 슈바베와 나눈 대화의 모든 것을 고백할 것을 종용 당한다. 고문과 협박, 회유가 반복되는 참혹한 시간이 흐른다. 사실 첩자에 의해 은밀히 작성된 보관 기록은 물론 이 심문 내용에서 유죄를 확정지을 증거란 것은 없다. 심문의 지원을 위해 독일에서 파견된 판사가 젊은 심문관에게 내뱉는 이 재판의 성격에 대한 의지표명이 어쩌면 진실에 가 닿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둠 한가운데, 그 무()속에 우리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심을 겁니다.

그들의 수수께끼도 그들의 진실도 우린 관심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 우리는 우리의 수수께끼를 심을 겁니다.” - P 197에서

 

이 회색지대에 대한 발설은 역사와 허구,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역사 규명의 곤란에 대한 어떤 해명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일례로 역사의 기록물이라는 것이 거짓을 어떻게 진실로 둔갑시키는가는 난징 대학살의 살육자인 일본군에 중국 어린아이와 미소를 짓고 놀고 있는 병사의 사진 기록물을 통해 선의자이며 외려 피해자라는 터무니없는 이미지를 생성하는 왜곡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해자, 방관자가 희생자로 둔갑하여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부조리의 역사를, 그리고 기억에는 모호함을 덧씌워 그 사실능력을 지워버린다. 강제 동원된 종군위안부를 부인하는 일본의 태도에는 선택과 배제라는 기록의 태생적 부정직함이 자리하고 있다. 산자가 죽은자의 목소리에 응답하려는 기억이라는 그 진실을 어둠의 지대로, 수수께끼, 불가사의한 무엇으로 전락시켜버린다. 그리곤 망각이라는 비열한 나락으로.

 

여기에는 이와 같은 역사의 기록과 기억의 논쟁 외에 또 다른 물음을 제기케 한다. 심문을 담당하는 세력과 심문을 받는 자 중에서 누가 옳으냐는 것이다. 구라메토가 국가를 배반했나? 모든 인간들이 집안 문을 걸어 잠그고 방관하던 그 시간에 그는 시청광장의 인질이 살육되는 것을 막지 않았나? 독일에 친구를 가진 것과 나치의 협력은 동일 한 것인가? 독일군에 저격을 하고 숨어든 것만이 애국인 것인가? 무수한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심문관 아리안 치우는 말한다. “당신은 당신이 한 행동으로 국가에 봉사한다고 믿는 거요. 우리는 우리가 그렇다고 믿고 있고. 모두가 옳을 수는 없소. ...그러니 누가 옳은지 밝혀봅시다.....”, 권력과 영예의 굶주림이 야기하는 이 광기가 진실을 결정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마 인간의 역사라는 것을 들여다보면 이처럼 맹랑한 요인들의 연속에 불과한 것인지도.


 


구라메토는 이 야심찬 젊은이의 욕망에 실려 그 자취조차 찾을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버려진다. 훗날 그의 시신을 회수 하려는 그 어떠한 노력도 무위가 되어버리는, 당시의 과정을 복기할 그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기억 속에만 존재 할 뿐이다. 기록이라는 실증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있었던 것이 없는 것이 될 수 있는가? 기억은 역사의 증명으로 소용이 없는 것인가? 소설은 이 사실에 대해 아마도 죽은 사람이 그 세계의 법과 신호를 가져왔던 것이라고, 그 때문에 온갖 혼란과 오해가 생겨난 것이라고”, 사자(死者)의 초대로 빚어진 그들 신화의 한 이야기를 빌려 영원한 회색지대에 묻어버린다. 그러나 흐릿한 어둠의 지대로 진실을 묻어버리자는 이 말이 내겐 역사적 무능에 빠진 이들을 향한 조롱과 추궁의 말처럼 들린다. 작가의 의지가 무엇이었는지는 그만이 알 일이지만.

 

인간 심연의 무엇을 건드려 수긍과 공감의 의지로 내몰아 두려움과 경계, 폭소와 환희를 번갈아가며 인간 본성의 본질, 역사의 모호한 지대에 은폐된 진실의 이면에 대한 성찰로 이끄는 이스마일 카다레의 솜씨는 과연 독보적임에 손을 치켜세우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역사의 사실에 대해 진짜와 가짜, 가해자와 희생자라는 이분법적 시선을 들이미는 것이 진정 옳은 것인지, 그 복잡다단한 기억전쟁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촉구하는 또 하나의 문학적 정수라 한다면 지나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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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찬 예찬 시리즈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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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세이(Esse)에는 아홉 개의 챕터, 82편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작은 나무와 숲이라는 수필이다. 아마 일군의 나무들에 에워싸인 채 나 홀로 우뚝 서있는 숲속 빈터의 나무를 말하기 위해, 어쩌면 자신의 삶을 이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숲을 견디지 못한다.” 고 쓴다. 개체주의적이고 고독하고 에고이스트였던 자신의 모습에 대해.

 

두 개의 챕터, 몸과 재산 1, 몸과 재산 2계절과 성자들 1과 함께 이 에세이집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는 챕터에 해당한다. 그 어느 챕터보다 입담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프랑스 사상가이자 소설가인 미셸 투르니에가식을 싹 갈아엎어 버린 노인의 육화된 지식의 산물, 오랜 세월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축적한 열정이 고스란히 배어난 글들로 짜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각설하고, 무릎에서 머리털, 격세유전으로 이어지는 몸과 재산 1챕터의 글들은 물 흐르듯 유연한 문장 속에서 실물로서의 몸의 부분을 신화와 예술과 종교와 철학적 담론으로 이끌며 소박한 단상을 풀어놓는 솜씨는 아주 그만이다.

 

무릎은 신체의 구동축으로서 노력과 탄력과 충동이 발원하는 핵심 관절 부위다.”

- P 63

 


그래서 무릎은 인간을 복속시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제니플렉시옹(genuflexion)’, 예배와 복종의 표시로서 무릎 꿇기에서부터, 가장 빈번히 장식적으로 상처받는 기관으로서의 피의 역사를 소개하기도 한다. 그런데 글의 마지막은 경박스러움으로 맺는다. 해마다 제기되는 디자이너들의 핵심적 문제: 여자들의 옷을 무릎위로 끌어 올릴 것인가 무릎 아래로 끌어 내릴 것인가”, 능글맞은 노인네의 해학이라니...,

 

소금과 설탕은 무미건조한 물질의 속성이고 조미료는 우유성(偶有性)’에 불과하다

그러나 모든 문화는 우유성들, 즉 희귀하고 값이 비싸지만 무용한 부()로 

이루어져 . 문명은 필요성이고 문화는 사치다.” - P 96

 


무용하지만 그 장식적이고 쾌락적 즐거움에 바쳐지는 것이 또한 인생이 아닐는지...

어쨌든 이 발칙하며 전복적인 '미셸 투르니에 ' 의 단상을 반쯤은 우스갯소리로 따라가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이런 자극을 느끼게 된다. 이 세계를 나는 어떻게 보고 생각하는가, 그저 익숙한 습관화된 보기를 벗어나기 위해 정말로 애를 써 본 적이 있는 것인가?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래서 어떠한 의문도 갖지 않았던 것들이 포함하고 있는 다른 세계와 시선 또한 있음을.

 

이를테면 이런 질문부터 가능할 것 같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리면 밤이 되는 것인가? 하수구로 빠져나가는 물은 항상 시계 방향으로 돌아 내려 나가는 것인가? 조금 어려운 질문을 해보면, 진지한 일이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쪽의 전유물인가? (아이슬란드의 1월과 6월에는 자정에도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북반구와 남반구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흘러내린다, 적도에 있는 가봉은 남북반구에 걸쳐있다. 북반구에 있는 개수대는 시계방향으로 남반구에 있는 화장실의 변기는 시계반대 방향으로 흐른다/외려 종속 또는 소수자, 약자, 피지배자의 전유물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의 복식을 보라!)

 

또는 이런 종류의 질문도 가능할 것이다. '마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L' Amant)15살 주인공 소녀가 뒤라스 자신의 자전적 분신이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가 15년 일찍 나타난 것은 아닌가? 그리고 '빛을 지고 다니는 자'라는 천사 루시퍼(Lucifer)가 왜 '암흑의 왕자', 사탄이 되었는지, 동일한 햇볕아래 피부를 노출했는데 누구는 우아한 그을림이고 누구는 시커멓게 탔다고 하는 것인지? (소설 연인(L' Amant)에 대한 기존 주류의 해석이 무너져 내린다.)


 

"이 동화(백설공주의 반면 거울)가 예시해 주는 악성전이는 가장 거룩한 책들과 가장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건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은 다행스럽게 전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그런 곳에서. 내게는 그 어떤 찌푸린 얼굴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 P 310 에서


자신의 관념세계 중 하나인 '악성변이(惡性變異, inversion maligne)', 즉 선악의 극단적인 양면적 변화의 잠재태를 얘기하는 투르니에의 세상보기 시선이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를 생각게 된다. 때론 동화와 신화 속 인물을 빌리고, 걸출한 문호들의 소설과 시를 차용하며 멋지게 오래된 우리네 관습적 관점을 전복시키며 그 밑바닥과 뒷면을 드러내게 한다. 그러나 결코 부정적 시선이 아니라 빛나는 찬미의 긍정으로. 이러하니 그의 문장에 더욱 매료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세계의 공고한 몽매함을 돌파하려는 자의 시선은 언제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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