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과 가족, 핵가족의 붕괴에 대한 유쾌한 묵시록 가족특강 시리즈 1
고미숙 지음 / 북튜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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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거 자체가 길 위에 나서는 거고, 길 자체가 삶이에요.” P 120

 

 

유튜브의 한 채널에서 강연된 내용이가족 특강이라는 시리즈의 제 1권으로 출간된 저작이다. 책의 제목 중 기생충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그것이다. 물론 이 어휘가 의미하는 것은 생물학명이라기 보다는 서로 다른 종류의 생물이 함께 생활하며, 한쪽이 이익을 얻고 다른 쪽이 해를 입고 있는 일. 또는 그런 생활 형태.’라고 하는 사전적 의미로 사용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이란 오늘의 전형적 가족 구성형태인 혼인한 성인남녀와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핵가족이다.

 

기생충을 관람한 이들은 영화 속 가족이 모두 핵가족임을 상기할 수 있다. 게다가 송강호가 분()한 김기사 가족의 생활형태가 사전적 주석과 일치하는 기생, 바로 그것이니 이 책은 영화 기생충을 통해 핵가족에 내재된 섬뜩한 반생명적, 반사회적, 병리학적 현상을 발견 규명하여 그 음침하고 교활하며 야비한 위악의 리얼리즘을 벗어나고자하는 변화의 모색이라 할 수 있다.

 


WARMING-UP (준비 운동; 데우기)

 


본론에 돌입하기 전에 저자 고미숙은 봉준호의 기 발표 작품들인 괴물,설국열차,옥자를 통해 문명의 폭력성, 기술의 오만, 욕망의 무한 증식을 향한 탐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세 영화의 가족에는 엄마가 없다. 소위 결손 가정이거나 기이한 가족 구성을 하고 있다. 엄마가 있는 스위트홈의 핵가족이 아니기에 오히려 이들은 결코 외부와 단절된, 타자와 경계를 둔 그런 사람들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모두 가느다란 하나의 탈출구를 제시하며 막을 내린다.

 

미군이 한강에 버린 독성 폐기물로 인해 출현한 괴생명체인 괴물을 고미숙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큰 몸집, 거대한 입, 입안에 입, 그리고 또 입...”, 무한 탐욕의 상징물임을 알려준다. 생태계 오염이라는 거대한 재앙과 이에 대한 국가 시스템의 부조리함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테다. 설국열차또한 지구 온난화에 대한 기술문명의 오만, 사건을 대하는 인간 태도의 어리석음, 그리고 멸망한 인간종족의 유일한 생존집단인 열차에서 조차 계급사회를 구성한다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종자임을 확인하게 한다.

 

그런데 모두 지배 계급이 있는 앞 칸으로의 전진만 생각한다. 여기서 저자의 시니컬한 변은 걸작이다. 앞으로 가는 건 기차 바깥의 세상을 일체 상상조차 하지 않는 것, 끝에 가봤자 뻔한 것, 자본주의 생태계란 것이 정점에 오른들 우월감 이외에 대체 뭐가 있다는 것이냐고 반문한다. 앞이 아니라 옆 칸으로 뛰쳐나가는 것, 그래야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기생충」 – 핵가족의 묵시록

 


Game over를 쓴 독일 슈피겔지()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한스 페터 마르틴오늘의 세계는 많은 사람들이 꿈꾸던 안정적인 발전같은 것은 이제 없다. ‘극단적인 불확실성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진단처럼 신분과 계층의 사다리를 오를 정상적인 수단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일까? 영화의 핵심 키워드라 할 수 있는 김기사(송강호)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대사는 망가진 혼돈의 이 세계에서 소위 성취라는 걸 어떻게 하는 지에 대한 전형의 제시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중요한 것은 꿈이 아니라계획이란 것이다. 누군가를 밀어내고 내 자리를 확보하는 것, 내년에 갈 대학이기에 미리 당겨쓰는 것, 이게 계획이 되는 거다. 사기꾼의 방식인가? 아니, 우리 모두가 사용하는 삶의 방식이 아닌가? 대출 받아서 쓰고, 투자 받아 쓰고..., 그러니 이들에게 죄의식이 없다거나, 미안함과 같은 양심도 없는 인간이라 매도하는 것도 자기 얼굴 침 뱉기가 될 수도 있다. 지금의 인간 생태계에 지독하게 적응한 인간들이라 해야 하지 않겠나?

 

()이 다른 을()을 어떻게 대하는지 박사장네 가정부 문광이 지하에서 올라 올 때 발로 차 죽게 하는 것으로 설명이 족할 것이다. 소통, 연대가 아닌 그냥 밟아서 치워 버려야 하는 존재라고 사회가 가르쳐 오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지상에 작은 창이 간신이 걸린 반지하의 창도 없는 지하의 삶이 등장 하는 장면은 가히 충격, 어떤 당혹감을 기억해 내게 한다.

 

김기사의 아들 기우와  딸 기정이 박사장네 저택에 진입하는 과정의 수단들과 그것이 성공하는 장면들에는 날카로운 이 사회의 일상적 삶의 모습들이 꼼꼼하게 투영되고 있다. 디지털 문명이 초래한, 이를테면 인스타그램에 노출된 상위 계층의 태도와 경험까지 배워 동일해진 욕망의 내재화는 이들의 현실과 이상의 구별을 지워버린다. 사실 핵심은 이제 부터다. 김기사네가 박사장네에 자연스레 기생이 가능토록 하는 근원적 배경, 환경적 토대라 해야 할까?

 

핵가족이 지닌 폐쇄성인데, 등장하는 세 가족 모두 타자와의 연결 고리가 한없이 취약하다는 데 있다. 광현 부부, 김기사 가족, 박사장 가족, 이들 모두 우리는 가족이야.’를 내면화한 채 외부 세계는 그저 정보를 주고받거나, 밟아 뭉개야 하는 존재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외부가 없다. 부자는 부자이기에 타자와의 접촉을 경계하고, 가난한 자는 올라서기 위해 타자를 혐오한다. 여기에 그 폐쇄성의 장막이 얼마나 취약한지는 박사장 부인의 영앤심플(Young & Simple)이라는 맹함은 오히려 양념에 불과하달 것이다. 타자에 대한 불신과 경계가 기우와 기정이라는 터무니없는 인간들의 진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니 핵가족, 즉 가족 이기주의가 자기 파멸적 구조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니들과 우리로 구별하면서 인간 감각의 가장 원초적인 후각, 냄새 타령을 하는 박사장, 그가 얼마나 타자를 견디지 못하는 지에서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아무런 공감도 잣대도 없음을 목격하게 된다. 냄새라는 어휘에 민감한 것은 김기사 또한 그 대척점에 있다. 가난의 냄새, 그 콤플렉스가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은 서로를 인정할 외부가 없는 이들의 불가피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저자 고미숙이 지적하듯이 핵가족, 스위트홈이라는 환상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정작 그 속에 사랑도, 삶이라는 인생행로에 대한 서로의 응원이란 것도 부재하다는 것이다. 어린이날, 생일, 이런 범주의 특정일에 핵가족들이 하는 행동이란 아마 상품과 이벤트 이외에 무엇이 아닐 것이다. 그저 마시고 먹고 쇼핑하는 소비, 그리고 화폐로만 이루어진 관계가 스위트홈의 정형화된 묘사라는 데 이의를 달기에는 변명거리가 너무 없다.


 



그런데 이 영화가 정말 무서운 것은 살인과 죽음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기우가 아버지 김기사에게 하는 자기성찰이란 아예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던지는 말이다.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세요.”,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한 치의 변화도 없는 욕망, 보편적 윤리란 것이 싹 거둬진 탐욕만이 여전히 넘실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당하는 모멸감에만 반응하며 타자에 대한 공감 능력이란 아예 존재치 않는 인간들이 바로 오늘 이 사회 우리들의 초상임을 발견해내야 한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결론 핵가족 폐쇄회로 탈출하기


 

겉보기에 안정적이고 화목하며 단란한 우리 가족이라는 스위트홈, 핵가족에 담겨있는 진실이란 이처럼 음울하고 반생명적이며 위악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정작 핵가족을 해부하고 보니 거기엔 공감의 세계도, 윤리도,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이다. 오직 소비와 화폐의 욕망만 있더라는 것이다. 괴물」「설국열차」「옥자에 엄마가 없었기에 가능했던 한 가닥의 통로가 기생충에 와서는 막혀버린, 사방이 완전 봉쇄되어버린 것이다. 어디에도 길이 없는 데 이제 어쩔거야!”라고 묻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끔찍한 계획을 버려!”라고 말한다. 명문대를 가야해, 공무원이 되어야 해, 30평 이상 아파트를 사야해,...(...) 핵가족을 꽁꽁 묶어 놓는 우라질 계획’”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계획의 삶을 살아내는 것, 즉 생명 차원에서의 연대, 세상을 향해 나가도록 힘차게 응원해주는 관계, 길을 나서는 베이스캠프, 생명의 플랫폼으로 변환하는 길을 모색하라고 제안한다. 오늘 우리네 사회의 이 무수한 혐오와 적대가 빚어내는 갈등들의 밑바닥에는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계와 단절, 개인들의 무한 탐욕을 근본으로 하는 핵가족, 그 구성원인 우리들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내가 변해야 하고, 내 가족이 변해야 한다. 너와 너희들에게 변하라고 말하기 전에. 비난의 손가락이 타자를 향하기 전에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먼저 향해야 세계는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팸플릿 분량의 짧은 글이지만 그 압축되고 정리된 문장들은 감당할 수 없는 불균형과 불안의 시대인 오늘, 그 꽉 막힌 듯한 모두가 원치 않는 세계에서의 탈출구를 찾기 위한 예리하지만 연민 넘치는 통찰의 혜안이 넘친다. 세계인이 공감한 문제작과 냉정하고 비범한 분석과 함께 하는 놀라운 각성의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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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재미있는 수학이라니 -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매혹적인 숫자 이야기
리여우화 지음, 김지혜 옮김, 강미경 감수 / 미디어숲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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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업무의 일환으로 활용하는 직업군에 속하지 않는 이상 소정의 학업과정을 떠나게 되면 가까이 할 기회란 거의 전무하다해도 그릇된 이해는 아닐 것이다. 더구나 학과목 중에서 수학이나 혹은 이를 응용하여 생각게 하는 물리학 시간은 거의 고통에 가까운 시간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마 보편적인 느낌이리라. 그러니 수학에 "이토록 재미있는"이라는 수식어는 왠지 기만적으로 들리기까지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의 직업을 보면 IT업계 종사자인 수학 마니아로 소개되고 있듯이 수학을 학문적으로 가르치거나 연구하는 이가 아니라는 점은 일단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프롤로그에서 그는 '페르마 정리''리만 가설' 같은 심도있는 수학을 평이한 설명으로 대중 친화적 쓰기를 하려 했다면서 수학 공식의 아름다움을 역설하기까지 하며 유혹한다. 수학적 사고력, 논리와 추론 능력을 자가 테스트해 볼 절호의 기회라는 호기까지 생기게 하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수학'이지 않은가.

 

첫 장을 열면 17세기 프랑스 수학자 '마랭 메르센'의 성을 딴 '메르센 소수'가 등장하여 기를 팍 죽이기 시작한다. 자기 자신 이외의 수로 나누어 지지 않는 수인 평범한 소수도 내키지 않는데 메르센이라니? 그럼에도 "2-1이 소수라면 n은 필히 소수"라는 정리까지 등장하고, 새로운 소수의 발견을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를 찾는 수학 마니아들이 있다는 말은 왠지 도전의 욕심을 자극한다. 또한 소수 순서 생성 공식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서 난제를 슬며시 던져 이를 부채질하기까지 한다.

 

페이지를 넘기면 인간의 불타는 질투심의 아주 작은 사례가 등장하는데, 케이크를 공평하게 나누는 방법이다. 세 사람이 공평하게 나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항상 남의 케이크가 더 커 보이는 이 심리적 본성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분할하여 만족 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다. 질투 없는 목표의 실현을 위해 수많은 수학자들이 도전하였던 모양인데 '셀프리지-콘웨이 분할'이란 방법의 설명을 골똘히 들여다보다 문득 아이구 이렇게 많은 반복의 칼질을 해야 하나 하고, 그냥 조금 양보하면 될 문제를 하고 미소를 짓게도 된다.

 

아무려니 우린 일상생활에서 마주하게 되는 문제에 대한 부분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직각 모서리를 가진 폭이 1인 복도를 통과할 수 있는 소파 단면적의 최대는 얼마일까? 현재까지 계산한 최대 면적은 조제프 게르버의 부분최적화법에 의한 2.2195란다. 그 발상 모형또한 문제만큼 흥미진진하다.

 

본문 49 쪽 부분 발췌

 

이처럼 수학적 난제들로 빼곡한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네 직관을 벗어나는 수학적 결과들을 보게 되는데, 조화급수의 발산 개념을 이용한 개미의 고무 고리 둘레를 도는 문제라던가 구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의 최단경로가 결코 직선이 아님을 수학적 증명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즐거움을 넘어서 인간의 감각이란 얼마나 편향적이며 관습적 환경에 지배되는지를 되돌아보게도 한다.

 

그런가하면 SF 작가 류츠신의 소설삼체를 읽어 본 이들이 눈을 밝히고 관심을 가질만한 삼체 문제(three-body problem)라는 만유인력의 작용으로 서로 끌어당기는 세 개의 행성 궤도를 과연 계산 해낼 수 있는가에 이르면 저자가 수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사실 고마움까지 느끼게 된다. 일명 '라그랑주 평형점'이라는 "특정 초기조건에서 3개의 질점(소행성)은 정삼각형의 세 꼭지점 위에 있다."는 정리가 실제 태양과 목성, 목성 궤도상의 소행성이 이 같음으로 입증되었다는 것은 수학 이론의 우주 천체로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신비로움에 가닿기도 한다.

 

대수 나선, 에어디쉬 편차, 그레이엄 수,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 등 지적 호기심, 아니 우리의 사고력을 시험하는 내용이 즐비하다. 여러번 반복하며 곱씹어도 사고력이 따라가지 못하는 내용도 물론 있다. 내 수학적 사고력의 쇠퇴 혹은 게으름 탓이겠거니 하며 후일 다시 도전할 과제로 남기기도 했다


모처럼 쓰지 않던 두뇌를 사용하느라 애쓰기도 했지만 결코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며 사고하고 추론해보는 즐거움을 넘지는 못한다. 특히 책의 마지막장인 5수학적으로 세상을 수학하라는 이미 깊숙이 우리들의 생활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 디지털 세계와 AI와 관련하여 '확률 알고리즘'에 대한 이야기는 어쩌면 수학은 남은 21세기의 언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조차 갖게 된다. 삶의 믿음과 가치에 대한 편향으로 굳어진 사고의 틀을 잠시 조정하고 깨우기에 이 만한 책과 독서도 없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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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주의 시대 - 거짓 문화에 빠진 미국, 건국기에서 트럼프까지 질문의 책 32
수전 제이코비 지음, 박광호 옮김 / 오월의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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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반지성주의을 말하는데 있어서 반합리주의, 대중의 일반적 무지, 정크(junk)사상, 근본주의 등을 이용하여 그 편협성과 거짓말로 점철된 건국에서부터 트럼프 시대의 미국사회를 돌아본다. '사상과 이성, 논리, 정확한 언어를 황폐화시켜' 특정 집단이나 계급적 이해관계에 복무케 해왔으며, 여전히 그 근본적 양상들이 위력을 발하는 요인들을 분석, 비판하고 있다.

 

서 언 ; 반지성이란 무엇인가?

 

'반지성'이란 용어는 문자 그대로 지성에 대한 반어로서 의심과 혐오, 그리고 두려움이 결합한 기이한 어휘다. 그런데 반지성을 알아보는 것이 그리 수월한 것이 아닌 이유는 이것이 어떤 성향이나 취향이라는 일견 순수한 것 뒤에 숨어 자기 이익적 집단체계와 분리될 수 없는 관습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결국 지적 게으름이나 무지에 편승한 편협성의 토양에서 자라는 교활함, 사악함,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의 한 양식이라는 점이다.

 

지성을 혐오하는 반지성과 대중의 일반적 무지가 뿌리내린 미국사회의 역사적 토양을 읽는 것이 우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반문이 있다면 혹여 반지성주의에 침윤된 것이 아닌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반지성은 미국사회만의 독특한 현상이 아닐뿐 아니라 한국사회 역시 현재 진행형인 양태이며, 이것이 정치사회적 퇴보는 물론 인간의 도덕적 역량과 문명적 퇴화를 재촉하고 궁극적으로는 인간 삶의 질적 양적 후퇴로 이어지는 그 실재에 도사린 요인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며, 더구나 미국이라는 강대국 대중의 무지는 물론 그 리더의 반지성이 다른 세계, 약소국에 특히 위험하다는 까닭에서 그 중요함을 가볍게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우스를 클릭하면 반합리주의 세계가 열린다." - P 336 에서

 

"디지털 환경이 추동하고 문자메시지와 트윗이 촉진한 언어의 황폐화"가 양산하는 가짜뉴스의 사례로 시작하는 서문은 "비디오 영상과 끊임없는 소음으로 가득한 무지몽매의 대중문화와 공생하는 혼미한 정신의 신종 반합리주의로 악화"되는 오늘의 문화와 정치의 급증하는 반지성주의의 위험을 지적한다. 이 위험이란 소셜미디어와 결합한 편협성의 증가인데, 이것은 견해가 같은 이들만의 집결로 편견을 강화하고, 그것의 무엇이든 믿어버리는 편협성 충족의 공간 역할 이외에는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며, 오류와 거짓을 빠른 속도로 거리와 무관하게 확산시켜 갈등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아마 지금 바로 유튜브를 클릭하면, 많은 정치적, 문화적 동영상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근거없는 유언비어에서부터 조금만 시간을 들여 알아보면 사실과 다름이 드러날 거짓말, 근거가 빈약하기 그지없는 데이터, 합리적 해석과 일치하지 않는 부조리한 사례를 거리낌 없이 구사하여 사람들과 사회를 자신들의 욕구와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몰아 불의한 소음을 계속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에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대중의 무지를 먹고 사는 것이다. 실제적 오류의 간파는 기초지식과 비판적 사고력을 요구한다.

 

140자의 단문과 조금만 긴 문장이면 읽기를 중단, 회피하는 진지한 읽기의 쇠퇴, 줄임말의 난무와 심각한 문법적 오류투성이 문장, 자신의 무지를 자랑스러워하기 까지 하는 부끄러움 상실의 현실은 반지성이 활동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준다. 정치인, 연예인 등 유명인의 뒤나 캐는 화젯거리와 가십에 클릭이 모이고, 심각한 것은 피하고 싶어하는 열망에 부응하는 무용(無用)의 것들에 손놀림을 하느라 분주하지만 책 읽을 시간은 없다고 말하는 자기기만을 깨닫지 못한다. 이에 비하면 지성에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며 책을 읽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반지성은 자기 이해라도 있다고 해야할 것 같다.

 

본 론 ;기독교 근본주의, 사회적 다윈주의, 빨갱이 좌익분자, 정크 과학과 사상 ..

 

18세기 건국기부터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의 21세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반지성과 반합리가 사회적 주류였음을 주장하는 책의 저자 '수전 제이코비'"영국의 학자, 예술가, 작가들에 의존하여 자신들의 지식을 축적하려 애쓸 필요 없이 지식의 보고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었기에 지적 추구를 무시하면서도 야만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며 미국 건국기의 '유사 식민지적 종속성'이라는 당대 특징으로 반지성 역사의 포문을 연다.

 

계몽주의 이성의 시대가 열리자 전통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근본주의(종교 문서의 문자적 해석에 기초한 믿음)적 신념을 파괴하는 지성에 의심과 혐오, 반감을 드러냈으며, 이들의 근거지역과 흑인 노예와 무식한 백인 하층 노동자들을 부리는 대농장주가 중심인 남부지역 등은 연방정부에 의한 전국적인 공교육을 반대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오늘에까지 이어져 공교육의 심각한 불평등과 문화적 분열로 남아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남의 아이들 교육에 세금을 내는데 관심이 없었으며, 자신들 지역(state)만의 종파적 교과서를 만들어 근본주의적 신앙을 위해 합리적 이성과 지성을 배제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미국 사회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진화론을 믿지 않으며, 신이 4000년 전에 세심하게 인간을 창조하였다는 믿음을 여전히 고수하는 과학적 문맹으로 생물학, 지질학 등의 과학은 물론 합리적 이성과 관련한 여하한 인문 사회적 통찰도 교과서에서 실리지 못하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진화론이 자연으로서의 인간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자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이 지적설계론이라는 사이비과학에 열광한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음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아마 오늘날 우리사회에도 범람하는 자기계발서들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적 다위니즘에 입각한 '적자생존의 사회선택'이라는 황망한 사이비 이론의 시작에 이러한 미국사회의 배경이 있었음에서 반지성의 그 적나라하고 견고한 뿌리를 보게된다.


찰스 다윈은 '적자생존'이란 말을 한 적도 없을 뿐더러, 그의 저서 인간의 유래; The Decent of Man에서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문명 상태로 바뀌면 환경 요인과 도덕적 사안이 자연선택에 우선하게 된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도금시대로 불리는 19세기 독점 자본가들과 빈곤의 만연을 합리화하기 위해 다위니즘을 산업 자본가들과 대농장주,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을 위한 사상적 토대로 제공한 사이비 과학의 전형이랄 수 있다. 즉 반지성이 사회를 잠식하고 오늘에도 재생되는 현실처럼 특정 계층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한 거짓 이론의 끈질긴 생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W.부시의 뇌로는 예일대, 하버드 경영대학원은 연줄이 없었다면(부시 가문의 부와 권력)

근처에도 못 갔을 것, (...) 노력 없이 얻은 특권...." - P 439 에서


미국사회를 지배하는 반지성주의의 이 질긴 생명력의 근간에는 이처럼 개신교 복음주의 근본주의자 집단이 놓여있다. 이 종교적 믿음에 기초한 대중들(창세기에 대한 문자적 믿음, 진화론의 부정)은 지성, 엘리트에 대한 불신과 혐오에 싸여있기에 반지성이 권력화되고 부를 축적하기에 훌륭한 기초가 되어준다. 이러한 사회의 바탕은 아이젠하워, 닉슨, W.부시로 이어지는 무식함과 개신교 복음주의 바탕의 대통령을 탄생시키고, 급기야는 "상스럽고 무지를 숨기지조차 않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까지 한다.

 

"세계지도에서 자신의 골프장들 외에 다른 무언가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증거는 거의 없다."고 까지 지적 능력을 의심받는 도널드 트럼프의 트윗 단문은 대중의 일반적 무지에 부응하여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패턴의 사용이라는 반지성적 성향의 증거이며, 이는 곧 대통령(국가 리더)의 스타일은 대중의 지식(지식의 부족)에 의해 형성됨을 의미한다고 역설하기까지 한다.

 

근본주의 종교의 이데올로기와 정크과학이 결합하여 유독한 효과를 내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트럼프의 코로나19에 대한 엉터리 의학적 권고와 처방의 난발, 대대적인 바이러스 확산에도 불구하고 마스크 착용과 같은 확립된 과학 지식의 거부와 이러한 자기 결정에 대한 열렬한 정서적 확신은 반지성과 반합리주의의 전형적 위험의 표상이랄 수 있을 정도이다.

 

정크과학은 정크사상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자기계발이라는 반합리주의를 팔기 시작했는데, 미국의 것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한국 사회의 미국에 대한 유사식민지 근성은 그대로 이식되어 서점가를 누빈다. 이것이 잘 팔리는 이유는 늘 손쉬운 방법을 담고 있기 때문인데, 그만큼 사유와 숙고라는 노력, 지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까닭이다. 정크사상, 자기계발 따위의 책이 팔리는 사회라면 반지성의 적신호임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허섭 쓰레기들을 쓰는 자들의 지적능력은 매우 높은데, 자신들의 필요 논리를 포획하는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곳에는 과학적 언어를 사용하지만 과학적 증거도 없으며, 수학적 논리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우연의 일치와 인과관계도 구별하지 못한다. 전문가가 이따금 틀린 사실에 기초해 자신의 주장을 진실화 하기도 하는데, 이미 틀렸으므로 반론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를 악용하는 반지성적 지식이 있는 것이다.

 

반지성의 횡행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빨갱이, 좌익분자라는 낙인찍기이다. 1950년대를 전후한 미국사회에서 지식인들의 목을 조르는 데 이보다 좋은 도구는 없었던 듯하다. 이를 그대로 이식하여 한국의 수구집단들 역시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오늘까지 지겹도록 활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사회전체의 지성이 정치적 공격에 취약하게 한다. 애국주의와 국가반역이라는 올가미를 씌우는 것인데 반지성의 대표적 형상이라 할 것이다. 우파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반공 히스테리와 결합하여 자본과 기득 권력은 대중의 반지성을 구태여 비판할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더구나 미국 사회의 가속화된 문화적 대중성 추구는 '미들 브라우(middle-brow)'라는 일종의 지적 중간층을 해체케 함으로써 모든 지적 척도의 하향화를 재촉하여 전체 사회의 반지성, 반합리주의를 고착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결 어 ; 오늘의 미디어 - 반지성의 비옥한 토양

 

미국 백악관의 최고위급 정치인의 인터뷰 일화로 시작해야겠다. 그가 한 발언이 거짓말임이 백일하에 드러나자, 왜 그런 거짓 발표를 했는가고 기자가 질문했단다. ", 그건 거짓이 아니라 '대안적 사실'이에요." 사실(fact)에 대한 대안(代案)이란 이 황당한 답변이야말로 반지성의 표상(?)이라 할만하다


소셜 미디어가 생활 플랫폼의 주류가 된지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다.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단문 메시지에서부터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와 같은 사진과 짧은 영상, 그리고 검색 엔진을 통한 텍스트의 무수한 링크 정보들, 이러한 것들이 생산하는 정보의 양은 그야말로 무한대로 증식하고 있다. 누구나 쓰고, 게시할 수 있는만큼 그 모든 것들이 가치 있는 정보, 진짜 정보, 사유를 낳는 정보는 아니다. 왜곡과 거짓과 위선과 기만의 언어와 이미지들로 가득한 것 또한 사실이다. 어쩌면 이곳에서 진지한 사고와 정보를 획득한다는 것은 자기기만이거나 망상일지도 모른다.

 

실제 독서 및 글쓰기와 인터넷의 텍스트 접근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한편, 소셜 미디어에 장황한 비평이나 서술의 문장 따위에 주의를 기울일 시간이나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다. 더구나 상업성 추구가 최대 목적인 대중문화의 폄하에 발끈하며 엘리트 문화주의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는 이들도 있으며, 인터넷 뉴스사이트의 코흘리개 편집자가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며 지성적 자기 검열의 책임을 외면하기도 한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지적 돌팔이 짓을 하며 그릇됨을 추궁하면 그저 견해가 다른 것이라며 일축하고 사실 증명의 어려움을 악용하기도 한다.

 

"그가 입을 열면 늘 인간의 지적 능력은 총량이 줄어들고 만다." 

- 1890하원의장, 토마스 리드

 

소셜 미디어나 인터넷 플랫폼만이 이런 형국은 아니다. 주요 일간 신문이나 이명박 정권이 기업자본가들을 위해 선물한 우후죽순의 종합편성 채널과 같은 TV역시 지적 측면에서 이미 품질이 낮아질 대로 낮아져 있다. 산만하기 짝이없는 반사적 인포테인먼트가 주를 이루고 뉴스는 진위의 확인 없이 아니면 그만 식으로 적대적이고 악의적인 정보나 가십, 뒤캐기 식의 화젯거리 중심의 쓰레기를 쏟아낸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용하는 이들, 시청하는 이들의 분별 능력 없음이라는 무지(無知)에 터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TV만 틀면 한국인들의 지적 능력 총량이 줄어드는 형국인 것이다.

 

일 년에 인문, 사회과학, 자연과학, 문학예술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이들이 인구의 절대 다수라는 것은 새삼스런 자료가 아니지만, 많은 지적 에너지를 요구하는 독서가 지닌 사유의 힘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얻어들은 자기 편향적 클릭의 정보는 편견과 무지를 확대할 뿐이다. 인터넷에서 특정 정보를 찾고자 두리번거리는 것에는 사유가 불필요하다. 그리고 발견한 텍스트에서 집단지성 덕분에 한 권의 고립된 책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엮어낸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짜깁기(remix)와 표절 생산이 판치는 이유이다.

 

베토벤과 비틀스의 음악을 모두 사랑할 수 있지만 그 둘의 음악이 같은 수준의 음악적 천재성을 의미하지 못한다. 심미적 감각과 이성적 사고 능력의 엄청난 차이를 무시하려는 마케팅적 발상은 그야말로 무지의 소산일 것이다. 반지성은 항상 반합리주의와 함께한다고 한다. 자신의 주장에 공명하지 않는 목소리를 들으려하지 않는 경향이 한국 사회에 폭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왜 다른가, 무엇이 다른 것인가, 정말의 사실이란 무엇인가, 대체 정의와 지켜야 할 도덕가치는 무엇인가, 삶에서 지켜내야 할 진정한 안전과 자유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는가? 반지성주의의 본질은 게으른 정신과 함께한다고 한다. 무지라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늘 악덕이다. 오늘 나와 우리들, 이 사회의 주체들은 과연 지금의 오늘을 이끄는 가치가 옳은 것인지 반성적 사유를 위해서라도 이 한 권의 책 읽기를 권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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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관이 충돌할 때 하나의 근본 원리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 J.S. 밀 공리주의』에 대해서



삶이란 무수한 선택의 과정이며, 사회적 사건 또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연속을 요구한다. ' J.S.밀'의 직관주의처럼  "인류는 경험에 의해 행동의 경향을 익혀왔기"에 대부분의 일상적 선택에서 사람들 개개인은 즉각적으로 도덕적인 옳은 방향의 선택을 하지만, 그것이 그 개인에게도 항상 옳은 것이 아닐뿐아니라 타인이나 사회라는 집단적 측면에서는 그른 행위가 될 여지가 있다. 특히 도덕관이 충돌할 때에는 어떤 도덕관이 보다 우위인가, 즉 모든 도덕의 뿌리가 되는 하나의 근본원리 혹은 법칙의 필요성이 절실해 진다. 두 옳음 중에서 현재의 인간 사회가 합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도덕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이러한 도덕기준의 '제 1원리'로서 공리주의자들, 그리고 이들의 계보를 잇는 실용주의자들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최대 행복", 이라는 '공리(utility:;효용, 유용)'를 주장한다. 즉 '행복이 도덕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것이다.  "행복을 하나의 목적으로서 욕망할 만한 것 혹은 유일하게 목적으로서 욕망할 만 것"이라는 의미이다.  J.S. 밀은 그의 저술 『공리주의』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행위가 행복을 증진시켜주는 것이라면 그 증진의 정도에 비례하여 

옳은 행동이 되며, 만약 불행을 증진시키는 것이라면 그 증진의 정도에 비례하여

 그른 행동이 된다. (...) 행복은 어떤 의도된 쾌락이며, 고통이 없는 상태이다."


이와같은 공리주의가 말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 밀은 "긍정이 부정을 압도하고, 전체 삶의 밑바탕으로서 인생이 제공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 순간들, 바로 그런 만족의 순간들을 가리켜 행복이라 하는 것이며",  "만족하는 인생의 두 가지 주된 요소는 '평온(tranquility)과 흥분(excitement)'이라는 충분한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의 행복은 사회구성원 전체의 행복과 일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즉 사회효용의 극대화를 이루는 '제레미 벤담'이 말하는 '최대 행복 원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행복은 쾌락(즐거움)이며, 이에더해 밀은 "유익이 곧 유쾌함이요, 장식이다."라고까지 그 의미를 확장한다. 그런데 서로 다른 도덕관만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쾌락도 충돌하는데, "더 바람직하고 가치있는 쾌락을 측정할 때 (...) 오로지 수량에 의존한다면 아주 어리석은 일이다." 며, "양과 질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쾌락의 질적 차이란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질적 우수함"이라고 질은 수량에서 나온다고 선언한다. 결국 공리주의의 도덕 근본원리는 다수가 좋아하는 쾌락이라는 의미이다.



1. 공리주의에 내재하는 도덕적 한계들


(1) 만족 총량주의의 문제


개인의 공리와 다수의 공리가 합치하지 않아 다수의 쾌락으로 사건의 판단이 이루어질 경우 개인은 고통에 빠진다. 그러나 사회전체의 쾌락이 개인의 불쾌를 훨씬 상회하므로 도덕적 옳음이 된다. 여기에서 시작하여야 할 것 같다. 오늘의 사회가 안고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부의 불균형한 분배로 인한 양극화라는 불평등의 심화이다. 사회전체의 부(쾌락)가 증대하지만 개인의 부는 감소하는 이 현상에 대해서 공리주의는 '옳음'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그름'이지 않은가? 개인의 만족을 소외시키고 최대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지점이다.


(2) 편의적, 직관적 도덕으로서의 문제


밀은 편의(expediency)란 "어떤 즉각적인 목적 또는 일시적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유용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유익함을 낼 수 있는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라 정의하면서 이것은 "문명과 미덕 등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는 모든 것들을 퇴화시킨다."고 비난하면서 공리주의는 결코 '편의적 부도덕한 도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무엇인가』의 한 사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망망대해에 조난당한 네 사람이 있으며, 생존을 위해 먹을 것이 없어 쾌락의 총량이 큰 선택으로 동료 한 명을 살해하여 식용하였다. 이 공리주의적 선택이 도덕적 올바름인가하고 묻는 것이다.


아마 공리주의의 편의성을 이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피살된 희생자 가족의 고통, 나아가 식인이라는 인간 존엄에 대한 문명적 파괴라는 인류전체에 대한 도덕적 상처 등 세 명의 생존이라는 쾌락이 인류전체의 고통으로 인해 최대행복을 최대고통으로 역전시키고 만다. 밀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는 편의적 부도덕성의 외피를 벗기 어려워 보인다.


(3)쾌락의 성격이 지닌 문제


쾌락의 순수 잔여량 극대화가 도덕의 근본원리라면 자유를 구속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 다른 사람의 손실을 보고 기뻐하는 것처럼,  노예제는 공리주의 도덕기준에서 옮음이며, 노동 착취를 통해 자본가의 부의 독식 또한 옳음이 된다. 행복의 총량주의에 기초한 공리가 뉴노멀, 새로운 가치와 표준을 창출해야하는 오늘의 인류는 미래를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퇴화와 소멸의 도덕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외에도 인간을 최대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도구주의와 같이  공리주의는 무수한 도덕적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이쯤에서 그쳐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우리들을 위한 진정한 도덕 근본원칙을 정리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2.  진정한 도덕율 제1원리는 무엇이어야 하나?


J.S.밀은 그들의 도덕율 제1원리인 공리와 충돌하는 도덕가치들에 대한 비판과 폄하를 위해 그의 책 절반 이상을 할애하고 있다.  '미덕',  '정의',  '자유',  '안전'에 대해 이들 모두는 '행복(쾌락)'의 종속적인 도덕가치에 불과하다거나, 그 도덕 가치의 자기 제재 내용이 애매모호하며, 수학적 논증에 의문이 있다는 식이다. 특히 정의(justice)에 대해서는 혹독할 만큼 도덕원리가 될 수 없다는 증명에 많은 지면을 채우고 있다. 


아마 '존 롤스'가 그의 책 『정의론』에서 칸트 윤리학의 핵심인 '옳음의 우선성' 논리에 의거한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이라는 도덕의 기본구조에 대한 이해를 상기한다면 왜 쾌락이 아니라 정의가 도덕의 근본원칙, 도덕 최고의 기준이어야 하는지 오랜 사유를 통하지 않고서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미덕은 결코 쾌락과는 무관한 심리적 동인을 지닌 도덕적 가치이며, 안전(safety, security)은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매순간 살아갈 수 없는 중대한 가치이다. 만일 안전이 상시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라면 인간의 생존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가 부인되고 만다. 안전의 욕구는 절대적 욕구이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작금의 세계에서 안전이야말로 최고의 도덕원리, 모든 도덕 가치의 기준이어야 한다고 주장해도 쾌락, 최대행복 이상의 논거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3.  마무리 ; 2020년 오늘을 생각하며


끊임없이 수구집단과 진보집단은 저마다의 도덕관을 들이밀며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하고, 시민을 설득, 자기 집단화하려 싸움을 벌이고 있다. 물론 집권세력이 되겠다는 권력의 욕심이 있겠으나 차치하고, 순수한 도덕적 대결로 좁혀 이 사회에 들끓는 갈등 이슈들을 보면, 그 기반 논리, 혹은 표면적 주장에는 자신들의 믿음에 기초한 도덕성이라는 잣대가 있다.  이를테면 고위 공직자 자녀의 군복무 의무에 대한 시비, 위계를 이용한 성 추행 또는 성 폭행에 대한 시비, 국가적 재난에 따른 재난지원금 지급이나 향후 기본소득 지급에 대한 시비의 근저에는 명료한 도덕관이 있다.


거대도시 서울의 시장이 직원 성추행 고소일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담한 일이 발생했다. 그의 죽음과 성추행 인과관계의 진의는 논외로 하고, 장례와 관련하여 그 형식에 대한 갈등에서 진영마다 내세우는 도덕적 잣대의 다름에 촛점을 맞추어 보면 우린 어떤 결정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를 위한 오랜 헌신과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복지의 증대, 불균형의 해소를 위한 행정적 수완등 그의 공적 행적에 마땅한 형식을 주장하는 이들은 고인의 미덕과 생명의 소실이라는 안전이라는 도덕가치에 의존하고 있다. 한편 고소인인 성추행을 주장하는 이들은 정의, 즉 공평성에 근거한 인간존엄의 도덕가치를 내세우고 있다.  어떤 도덕관이 더 우월적 도덕가치를 지니는가? 


한 인간의 죽음과 성적 추행이란 사실에서 한 사회가 도덕적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는 너무도 중요한 미래를 낳는다.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정의인가? 아니면 성추행 피해 주장자를 위로하는 것이 정의인가? 무엇이 우위인가? 전체 쾌락의 크기로 도덕적 우위를 결정하는 공리주의자는 애도 집단과 미투 집단의 수를 비교해서 많은 쪽이 옳다고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매킨타이어와 같은 인간존재의 서사성이라는 삶의 이야기, 즉 우리 공동체가 써왔으며 쓰려고하는 서사축에 무게를 두게되면 우리가 오늘 어떤 이야기, 어떤 시대를 만들고자 하는가를 판단하면 될 것이다. 망자를 두고 시비를 가리는 것에 외람됨을 떨치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여전히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행동의 경향일 것이다. 이 직관적 도덕율 또한 외면할 수 없는 도덕원리이다.


도덕율의 근본원리, 모든 도덕 가치의 기준이 되는 원칙을 수립하는 것은 그 사회의 합의이다. 밀이 비록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칸트의 도덕의 보편적 제 1원리인  "그대 행동의 바탕이 되는 법칙이 모든 합리적 존재들이 발아들일 수 있는 보편 법칙이 되도록 하고, 그 법칙에 따라 행동하라." 는 정언명령을 새기면서 마쳐야 할 것 같다. 사실 합리적 존재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낸 것이 법(法, 規則, 制度) 아니겠는가? 도덕이 법에 물어야 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음에 거북한 흥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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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의 말 - 이 말이 내게로 스며들었다, 살아갈 힘을 얻었다
김연숙 지음 / 천년의상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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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어떤 책은 그것과의 적정거리를 둘 수 없을 때가 있다가슴에 쿡 들이미는 육화된몸의 언어들이 발산하는 헤아릴 수 없는 의미들 탓이다토지의 인물들이 토해내는 켜켜이 체득된 언어들을 화두로 하여 세상사람관계들을 새삼스럽게 바라보고 이해케 하는 저자의 반추로 다져진 곡진한 이야기들은 그대로 좁아터진 내 이해 공간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 틈새로 깊숙이 스며든다.

 

"어 가자간장 녹을 일이 어디 한두 가지가산 보듯 강 보듯가자! "

 - 토지』 6권 370

 

언젠가부터 책을 읽기위해서는 안경을 벗어야 하고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는 다시금 안경을 써야하는 노안이 저자 김연숙 교수처럼 내게도 찾아왔다이 현실을 "세상과 다시 관계 맺으라는 신의 명령"이라고그래서 "지금껏 바라보던세상 모든 것들과 다시금 거리를 조정하기 시작했다."는 저자의 이해는 그대로 내 이야기가 된다가난한 살림의 어미와 여동생을 두고 독립 운동을 떠나며 가족에 대한 연민으로 만주벌판을 향한 발걸음을 차마 떼지 못하는 석이를 향한 관수의 말에서 비롯된 배움의 사유이다이 호기로움의 말집착을 벗어나 새로운 거리 감각을 지닐 줄 알게 되는 담대함 앞에 또 하나의 산 언어를 배운다.

 

"초조함은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게 한다. (...) 성급한 해결을 원하는 

조바심이 아닌 어떤 것을 해결책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 (...)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반추하는 것, ...에움길로 걷는 것, ...

충분히 주변을 살펴 보는 것, ...통찰하는 것이다." - P 113 에서

 

이렇게 공감의 문장들을 열거하다보면 책을 모두 베껴야 할 성싶다나에게 스며드는 말,질문하는 젊은이를 위하여,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라는 3장으로 구분되어 있는 이 책에서 노화가 한창인 내가 '젊은이를 위한()의 글들에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빠져 든 것은 어쩌면 여전히 삶의 미숙함에 허우적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아니 여기서의 '젊은이'는 '세상을 이해하고 배우려 하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련다대체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왜 지금껏 마치 전방만 있다는 듯이 급하게 질주하기만 했었나주변을 보지 못하는 편협과 외곬조바심에 이은 성급함어쩌면 삶 내내 정말의 생각이란 것을 하기 했었나를 자문하게 된다이러한 감상은 철새의 날개짓에 경외의 감탄을 쏟아내는 토지의 문장에 가닿게 한다.

 

"어중간히 눈 밝은 자들이 큰일이라. ... 순결한 마음 순박한 열정만이 저어 

수만리 장천을 나는철새처럼 목적한 곳에 당도할 수 있는 게요." 

토지』 7권 274

 

결과에 맞추어진 삶의 태도가 아니라 과정자체에 정성스런 날개짓을 하는 삶의 방식몸에 새기는 그것이 곧 배움이며 삶의 영원한 태도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배움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쳐야 하겠다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야말로 '스며드는이야기를 놓칠까 우려되니 말이다일본 홋카이도 탄광에 강제징용 당했던 이가 탈출하며낯선 일본인 할머니로부터의 도움을 받으며 그이를 묘사하는 문장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조건 중 으뜸"이라는 '공감'의 의미를 온 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데 마음속으로 늘 울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토지』 20권 154

 

인간과 인간이 이어져 있음을 증명하는 이 말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할 줄 아는 능력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지금 우리네 모두에게 요구되는 유대와 연대의 요구성으로어두워졌던 눈을 밝게 해주는 듯하다옮겨 적고 싶은 문장이 한 둘이 아니다이제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가치와 삶의 태도를 요구하는 그런 분기점에 도달해 있다노동가치의 재정의를 비롯해 자본주의적 무한 욕망에 이르기까지 모두 변화되어야 하는 그런 지점에그런데 사람이 단지 비용의 대상으로만 인식되고모든 사람들의 일상을 굴러가게 하는 노동자들은 '위험의 외주화', '죽음의 외주화'라는 비정규외주계약다단계 하도급이라는 방식으로 자본이익의 희생물이 되어버렸다.

 

"하늘땅을 보믄 살아볼 만한 세상인데 우째 사람들 맴이 눈비겉이 질척거리는지 모르겄다."

토지』 10권 417

 

세상의 일상을 굴러가게 하는 노동자들하지만 우리는 자주 우리와 함께 있는 사람우리 뒤에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아니 보지 않으며그들이 내지르는 비명조차 듣지 못하고듣지 않으며그들의 죽음을 통해야만 겨우 볼 따름이라는 말은 위협과 폭력에 시달리던 경비원 죽음지하철 스크린도어 수리를 하던 청년의 죽음이라는 사건에서 무엇을 보고 깨우쳐야 하는지를 생각케 한다사람이 사람이 아니게 되는 공포가 지속되는 오늘우리의 사회그리고 나와 너인 우리들의 책임임을 통감하여야 함을.

 

이 책의 띠지에 써진 문장으로 마쳐야 겠다. "'설움이 왈칵 솟는 삶'을 용케 살아내는 이들에게", "'박경리의 말'이 전하는 '인간의 말'"이라는 문장만큼 이 책을 잘 설명할 수는 없기에 말이다감각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다고 오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말처럼 이 책은 어떤 사태를 현실화하는 시선을 갖추게 해주는 그런 여정이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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