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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페스트 (반양장) - 1947년 오리지널 표지디자인 ㅣ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알베르 카뮈 지음, 변광배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8월
평점 :
"이 연대기에서 그려지는 기이한 사건들은 (...) 사실 오랑이 평범하다는 게
첫 인상인 도시요, (...) 꼭 강조해야 할 것은 이 도시나 그 안에서 사는 삶의
모습이 시시하리만치 평범하다는 사실뿐이다."
- 본문 9, 12쪽 변형 발췌
한 도시의 소개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첫 다섯 쪽은 지루한 설명과는 달리 꽤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특별한 장소나 사람들에게 발생한 것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사는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곳에서 발생했음을 강조하려는 서술자의 의지 때문이다. 더구나 증언과 서류라는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적 기술로서의 '연대기'임을 천명하는 것도 이 소설을 다분히 사실로서, 현실적 체감의 읽기를 기대한다는 작가의 어떤 의도를 느끼게 한다. 서술자의 이야기에서 '나는 이들과는 다르다.'라고 빠져나가려 들지 말라, 이것은 모든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편성을 띤 기술이라는 것이다.
의사 '리외'가 계단 중간에서 물컹한 죽은 쥐를 밟고 별 생각없이 계단을 내려온 이후 페스트의 질병적 징후와 확산 가능성의 인식이 시작되는, 보건 전문가, 행정 관청은 물론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는 전언은 물론, "여전히 개인적 관심사에 우선을 두"고, "자신들의 일상적인 습관을 방해 받고 이해관계에 영향 받는 것에만 예민했"으며, "첫 반응은 언론과 한 목소리로 행정당국을 비난하는 것"이었다는 서술은 여전히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없는 오늘의 우리네를 생각케 한다.
"어리석음은 항상 끈덕지니까. 그러니 사람들은 제 생각에만 파묻혀 있지 않은지
늘 살펴야 한다."
-본문 52쪽에서
코로나19로 세계가 신음하는 가운데, 감염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매일 발표되고 있다. 이 숫자를 구체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아마 당사자와 이들의 가족 등 관계자, 그리고 이를 감당해야하는 의료진들 정도가 아닐까? 정말 이 숫자는 추상적 개념일 뿐이어서 그저 "상상속에 피어나는 한 줄기 연기에 불과하다."는 서술자의 표현을 부정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의사 리외가 "개개인의 행복과 페스트라는 추상 사이의 지긋지긋한 투쟁"이라 한것은 이러한 인류적 재난에 씌워진 추상성, 즉 현실과 괴리된 이 추상을 공략하는 것이 바로 과제라는 자각임을 알려준다. 대개 자신만은 이 죽음의 전염병이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타인의 상황으로, 좀처럼 자신의 상황으로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 추상이 구체성을 띨 때, 사람들의 다양한 행동 양식, 삶을 대하는 인간 개개인의 태도를 발견케 된다.
재앙이, 페스트라는 억압과 절망의 공포가 '나'와 '내 가족'을 덮칠 때, 이해할 수 없는 세계와 삶의 한계라는 그 간극의 좌절을 깨닫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절규하기 시작한다. 부당하고, 부조리하다고. 그럼에도 이 엄습한 불행의 인식, 재앙의 실체를 바로 자신, 인간 모두의 문제임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떤 이타적인 인간들의 행동이 시작되고 이것이 자신들의 의무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있고서야 비롯됨을 보여준다. 코로나19 초기, 대구지역의 확진자가 급증할 때 자원봉사 의료를 위해 달려가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아마 우리도 이때쯤 해서 어렴풋이나마 바이러스를 자신의 안위와 연결짓기 시작했을 터이다.
"보건 위생대 덕분에 우리 시민들은 이 병과 싸워 물리치는 건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을 납득했다.페스트가 몇몇 사람의 의무가 되자, 페스트의 실체가 드러났다.
바로, 모두의 문제라는 것이다."
- 본문 168쪽에서
도시의 폐쇄와 격리, 무차별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고통의 현장이 늘어 감에 따라 사람들은 용기와 의지와 인내를 상실하기 시작한다. "시간의 흐름을 미래로 재촉하고 싶은 비이성적 갈망" 조차 사그러진 채, 꿈꾸는 것, 미래의 도래를 더 이상 쳐다보지 않고 제 발밑만 살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쩌면 소설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철저하게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 지점, 비합리적, 비이성적인 재앙을 내재한 세계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그 한계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죽음이라는 절망적 삶의 유한성, 삶이란 희망이라는 미래 없는 공허함이며 끝없는 패배의 연속일 뿐이라고 현실을 외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해독이 불가능하고 한계가 정해져 있는 이 세계,
여기에서부터 인간의 운명은 스스로 의미를 획득한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부조리의 추론」에서
재앙적 사건인 페스트는 다의적 언어로 여겨진다. 비인간적인 것, 원초적인 적의로 인간을 공포와 무기력, 절망에 몰아넣는 무 논리의 해독 불가능한 세계로써. 삶의 의미를 삭제하는 이 불모성 속에서 삶을 버텨내고, 이 무의미에서 조차 자신만의 색깔을 입히는 삶을 어떻게 수행해낼 수 있는 가의 물음일 것이다.
페스트의 재앙 속에서 사람들은 행동하기 시작한다. 폐쇄된 도시 오랑으로부터 연인과의 재회를 위해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기자 '랑베르', 혼자 죄수가 되느니 차라리 다른 모든 이와 함께 죄의식 없이 즐길 수 있는 재앙의 시간이 영속되기를 기대하는 '코타르', 주변의 고통에는 무심한 채 가족의 안위에 여념 없는 판사 '오통' 등 일상적 이기심에 침잠하는 인물들을 보게 된다. 서술자는 이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겸손함을 잊고, 자기들은 여전히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 남들보다 더 잘못된 게 아니"라고. 그러나 이것이 불모의 세계를 살아가는 자의 태도가 될 수 없음은 페스트라는 무차별성과 비이성 때문이다.
한편 이들과 다른 행보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보건위생대를 조직하고 역병의 그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불합리에 저항하는 '타루', 하느님의 재앙이라며 "정의로운 이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고통의 암흑 바닥에 놓여있는 영생의 황홀한 미광"을 역설하는 신부 '파늘루', 내세의 영광이라는 알 수 없는 진리의 말 이전에 현실의 고통을 보살피는 것, 재앙을 회피하거나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의사로서 자기 의무에 최선을 다하는 '리외'가 있다.
"그 작은 얼굴에서 서서히 입술이 벌어지더니 긴 비명이 흘러나왔다. (...)
아이가 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전 인류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항변 같았다."
- 본문 271쪽에서
서술자, 아니 리외는 이 세계의 불모성, 인간과 불화하는 운명의 부조리함에 반항한다. 부조리를 자기 삶에서 떠나보내지 않고 삶의 인식의 최선봉에 내세우고 투쟁하는 인간, 모든 초자연적 위안을 집요하게 부정하며 메마르고 자신만만한 명철함 속에서 의사로서의 자기 수행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인간을 발견케 한다.
리외는 구원에 호소하는 것, 영원에 대한 향수보다 자신의 용기와 이성을 선호한다. 아마 인간을 부추기는 희망이라는 수단의 거짓됨, 인간인 자신이 가진 것의 한계를 아는 인물이기에, 추상과 그 공허함과 싸우려는 인간으로서 생명, 그 육체성을 지켜내는 구체성이 그의 삶을 정의한다. 오통의 죽어가는 어린 아이와 함께하는 리외의 위 문장은 부조리를 떠안은 인간의 엄숙함, 실천 행위의 숭고함이 절로 마음 깊이 스며들어 온다. 죽음, 이 끔찍한 최악의 부조리에 대한 아이의 긴 비명, 그 항변에 괜스레 눈물이 흘러내린다.
우리는 인간의 이해 바깥에 있는, 패배 할 수밖에 없는 이 숙명성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서술자는 파늘루와 타루와 리외를 통해서 삶의 부조리를 자기 삶의 조건으로 인식한 인간이 어느 순간까지 이 부조리의 논리를 삶의 태도로 지닐 수 있는가를 다시금 묻는다. 부조리의 인식이란 삶의 유한함, 그 허무성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것, 육체의 시간에 저항하는 육체라는 모순이 놓여있다. 페스트가 신의 징벌이라고 외치는 파늘루 앞에서 악의 오염이 개입할 여지없는 어린아이의 죽음은 영혼의 정화와 병 걸린 육체의 비논리를 생성한다. 파늘루는 이 부조리에 직면하여 부조리의 논리를 자신의 죽음까지 몰고 감으로써 이 처절한 모순인 신에 저항하는 것 같다. 치료를 거부한 채 페스트로 죽어가며 자신의 믿음에 순응함으로써.
이와 달리 '타루'는 그야말로 카뮈가 그의 에세이에 쓴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인다. 리외에게 자신의 과거와 삶의 이해를 말하는 부분은 「부조리의 추론」속 문장 "부조리는 인간의 가장 극한의 긴장이자, 혼자만의 노력으로 끊임없이 유지하는 긴장이다." 를 떠오르게 한다. 방심하지 않는 인간, 긴장의 끈을 놓치 않는 의지, 한 순간도 부조리, 즉 페스트를 지니고 있음을 망각하지 않는 인간.
"이런 상태를 끝내고 싶어 하는 몇몇 사람이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들을 해방시켜 주지 않을 극도의 피로를 자진해서 겪는 것입니다."
- 본문 318쪽에서
그는 환상 없는 삶을 살아가며, 평화를 찾아 헤맨다. 그는 "이 세계에 내 자리는 없다는 걸"알고 있으며, "스스로를 영원히 끝나지 않는 추방형"에 처했기에, 그의 삶은 모순으로 찢어졌고, 삶의 현실은 아무런 색채를 지니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리외의 그것과 결별한다. 타루가 리외에게 말하듯이 그는 리외보다 야심이 덜하다. 리외는 부조리와 함께 숨쉬며, 부조리가 가르쳐 주는 바들을 인정하며, 그 교훈의 살아 숨 쉬는 육신을 찾는 데 있기 때문이다. 리외는 부조리의 인간, 삶의 완벽한 모델의 전형, 카뮈가 지향했던 반항, 열정, 자유를 삶에 그대로 투영하여 자신을 넘어서는 현실에 맞서 싸우는 지성, 최고의 풍경이 된다.
리외는 인간에게 속한 것만을 바라는 사람이며, 평화는 희망을 전제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희망, 미래라는 기한이 정해져 있는 이 부조리, 관념 덩어리는 반항의 대상이지 추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는 파늘루의 신이나 영속으로의 추락도 아니요, 타루의 관념적 허상이 아니라 인간 삶의 구체적 예증들이며 그 인간적 숨결을 추구한다.
"이 연대기는 (...) 모든 이들이 공포에 맞섰던 기록이자, 앞으로도 결코 끝나지 않을
공포의 가차 없는 맹습에 맞서서 확실히 수행해야 할 것들에 대한 기록일 뿐이다."
- 본문 390쪽에서
연대기를 마치며 서술자가 리외 자신임을 밝히며 기록의 성격을 표명하는 이 문장에서 인간, 자기 힘의 근본으로서 필요한 열의와 집중력과 통찰력을 읽게 되며, 강고한 인간적 확신, 모순 속에서 자기 믿음을 묵묵히 실천하는 단단하고 확고한 인간 존재의 위엄을 발견하게 된다. 그 어떤 형이상학도, 꿈의 미래와 같은 희망도 거부함으로써 완전한 현실의 자유 속에서 사고하며 행동하는 이 인간적 열정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페스트가 도시를 물러나고 폐쇄의 해제를 맞이한 후 이별의 해후를 즐기는 사람들을 통해 "가끔씩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고 말하는 리외는 이 연대기의 작성이 사람간의 유대와 애정이라는 찬미해야 할 인간의 덕목을 또한 헤아리게 한다.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는 숭고함이 절로 읽히는 작품이다.
지금 우리네가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은 많은 이들을 고통과 힘겨움에 내몰고 있다. 주어진 한계, 이 현실 속에서 삶의 명백한 가치를 깨닫는 데 이보다 맞춤의 글은 없을 듯하다. 인간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위해 쥐들을 흔들어 깨운 카뮈의 정신에 새삼 겸허해진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