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기 베인
더글러스 스튜어트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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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열망이 지향하는 것과 현실적 삶이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과의 간극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곤 한다. 오늘의 세계는 상품과 서비스의 소비를 끊임없이 강요하고 이 욕구를 성취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실패자로 취급하며, 그 책임은 오직 개인의 능력이라는 것에 돌린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는 그야말로 효율성과 합리성을 토대로 한 신자유주의의 약육강식 생존 논리가 인간 정신을 지배하던 시대이다.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산업 구조 조정이 무참하게 감행되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실직자가 되어 길거리로 내쫓기고 가족들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대던 시기이기도 하다.

 

탄광을 비롯한 오래된 제조업 기반의 도시 글래스고는 마거릿 대처의 이러한 경제정책에 직격탄을 맞은 대표적 도시이다. 이 소설을 마냥 등장인물들의 사적 삶이라는 인간 내적 욕망의 갈등이 빚는 비극이라는 시선만으로 읽을 수 없게 한다. 소년 '셔기()'가 알코올에 중독된 엄마 '애그니스'의 열망을 "새로운 물건에 둘러싸여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502)"하는 것이라고 감지하듯, 마치 물질만이 사람을 갱신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희망이 되고 만다. 이렇게 생각하도록 강요한 사회가 그 책임을 외면할 때 빚어지는, 닿지 않는 욕망으로 자멸해가는 인간들의 초상이 바로 이 우울하고 슬픈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소설은 직접적으로 자의식 강한 세 아이의 어머니인 애그니스가 겪는 도달되지 못하는 욕망을 오직 강자가 구축한 환경 탓이라고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계층구분의 확고화와 일자리를 잃고 무력감으로 뒹구는 남자들, 실직과 장애 수당에 기대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억척스러워진 여인들처럼 사람들에 스며든 삶의 배경임을 부인할 수도 없다.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계층화와 인간 구별 짓기는 도처에서 명료하게 드러나 배제된 인간들에게 '수치의 낙인'을 찍는 장면이 반복되어 등장한다. "실눈을 뜨고 위아래로 훑어보는 그들의 시선(341)" , 억양과 사투리처럼 언어습관에 배어있는 말투로도 인간을 차별하는 "억양의 굴레를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521)."라는 절망에 지배되고, "서로를 보기에 꺼리는 두 세계의 잔인한 대조(410)"로서 외딴 공영주택단지와 기막히게 고급스러운 회원제 골프클럽은 그야말로 그 어느 누구도 새사람이 되는 것을 차단하는 세계, 극단적인 양극화 사회가 되었음을 드러낸다.

 

이 작품의 중심인물은 '셔기 베인'이라는 소년이다. 그의 관점에서 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비가(悲歌)이다. 세 아이, , 캐서린, 셔기()의 엄마인 애그니스는 소비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전형적 여인으로, 세련된 표준어를 사용하는 자의식 강한 여성이다. 종일 앞치마를 두르고 가부장적 남편을 위해 집에 노예처럼 묶여있는 삶을 원했던 첫 남편과 이혼하고 새로운 남자와 결합하지만 결코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바람둥이에 가족을 돌보려는 의지조차 없는 쓰레기다. 물질적 욕망이 곧 자존감인 여자는 이 현실적 상태가 빚어내는 괴리를 회피하지 못하고 술에 의존하기 시작한다.

 

셔기의 아빠인 둘째 남편 빅 셕은 아내와 세 아이를 정부의 폐광조치로 죽어가는 동네, 핏헤드의 공용주택에 버리듯 밀어 넣고는 다른 여자와 결합하기 위해 떠나버린다. 여자의 물질적 욕망이란 고작 카탈로그에서 아이들에게 입힐 옷과 집안을 꾸밀 소박한 가구이며, 물질문명이 이룩한 도시의 화려함에 참여하는 작은 이벤트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곰팡이가 피어난 주방 벽, 이탄 가루를 뒤집어 쓴 동네 여자들과 아이들의 꾀죄죄한 추레함처럼 가난과 절망의 분위기에 잔뜩 눌려있는, 도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탄광동네는 애그니스를 치욕과 좌절의 수치심과 슬픔의 세계로 몰아넣는다.

 

애그니스는 알코올의 지배력에 점점 빠져들고 취기는 남자들과 세상에 대한 분노로 표출된다. 그녀의 주장처럼 "슬픔에서 벗어나려고"마셨거나 "힘든 날에 맞서 싸울 투지를 불어 넣(416)"기 위해 마셨거나 아이들과 주변사람들을 더불어 절망의 늪으로 끌어들인다. 아이들은 이 끔찍한 터전으로부터 자신들의 삶을 위한 탈출만을 모색하고, 딸 캐서린은 오직 이 목적만을 위해 결혼하여 애그니스로부터 달아난다. 그림에 천재적 재능을 지닌 큰 아들 릭조차 "스스로가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느끼게"하는 이 지옥같은 가정이라는 공간을 떠나기 위한 자립을 준비한다.

 

소설의 시점(視点)인 어린 아이 '셔기 베인'은 형제들의 떠남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성적 정체성을 지닌 연약한 아이는 어머니 애그니스에 삿갓조개처럼 찰싹 붙어산다. 망가져 가는 여인, 그녀를 성적으로 이용하려 만드는 추악한 남자들과 애그니스의 미모를 이용하여 술턱을 보려는 잡년들로부터, 알코올에 젖어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으로부터 엄마를 보호하기위해 어린 아이는 자신의 욕구와 분노를 참아내며 어머니와 함께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꾼다. 애그니스의 "넌 커서 어떤 남자가 될 거"냐는 물음에 셔기는 대답한다.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 걱정 좀 안 하고. (...) 모르겠어요. 난 그냥 엄마랑 있고 싶어요.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곳으로 엄마를 데려가고 싶어." -366

 


그럼에도 애그니스란 인물을 묘사하는 다음의 문장은 그녀가 얼마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온 몸으로 나타내고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린 다음날에도 그녀는 가장 좋은 모피 코트를 입고 세상을 마주했다. 자신과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도 머리에 힘을 주고 사람들이 달리 생각하게 했다." -372

 


어쩌면 세상의 관점을 지극히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타인 앞에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을 연출하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야만 자의식이 버텨낼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희망이 결핍된 병색이 도는 동네의 여인네들에게는 그녀의 우아한 말과 차려입은 옷차림, 하이힐의 또깍 거리는 소리는 외설과 천박한 몸부림으로 비칠 뿐이다. 동네의 모든 인간들 역시 세상의 계층화, 서열화를 체화하고 이들 모자에게 혐오와 멸시의 폭력을 무시로 행사한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닮은 애그니스, 그녀의 미모는 또 다른 남자의 시선을 끌고 여자는 알코올이 아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란 기대를 갖게 하지만, 택시 운전이라는 그나마 일자리를 붙들고 있는 운 좋은 사내는 "당신은 정상으로 보이거든.(409)"이라며, 인간을 범주화된 사고의 틀로 들이민다. 그의 세계는 이 차별이라는 분리 의식에서 한 치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사실 이 한 마디의 언어에서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지속될 수 없는 것임을 예견케 했을 것이다.

 

음울한 실패자들의 외딴 동네인 핏헤드를 떠나 삶의 다양성이 반짝이는 도시로 이사한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물질이 있는 곳이면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이 자기기만적 실행은 철저한 거짓 환영으로 드러난다. 셔기에게도 이 같은 희망은 물거품처럼, 엉겅퀴의 솜털처럼 날아가 버린다. 이사 가면 절대 마시지 않겠다던 약속을 애그니스는 당일부터 어기기 시작한다. 분노한 셔기의 실망의 소리에 애그니스는 셔기를 쫓아내기까지 한다. 형 릭의 작은 거처를 찾아들었을 때 그는 셔기에게 말한다. 너도 떠날 수 있다고. 네가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너 자신뿐이라고. 셔기는 반박한다. 엄마를 누가 보살피냐고, 엄마는 그럼 어떻게 낫겠냐고.


 

"이제껏 자신들이 '수건돌리기'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규칙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확신이 가슴에 와 박혔다." -555


 

엄마의 생명을 빼앗아갈 만큼 술은 강력한 것이었다는 셔기의 회한은 그와 같은 환경의 소녀 리앤의 깨달음의 언어가 되어 들려진다.

 


"내 생각엔 알코올중독자들이 원하는 게 결국 그것 같아. (....) 죽는 거 말야. 단지 어떤 사람들은 한참 멀리 돌아가는 것뿐이야." -536

 


사랑한다는 말을 유령에게 속삭이고 손가락으로 튕겨서 어머니에게 날려 보내는 소년의 몸짓, 셔기와 애그니스 모자를 끈끈이에 붙은 파리처럼 달라붙게 하고 무()로 둘러막았던 고달펐던 탄광촌의 삶조차도 어머니를 잃어버릴 일 없던 곳이었다고 회한에 애타게 하는 연민과 그리움은 읽는 이의 눈시울을 붉게 하지만 이러한 감상적 느낌에 마냥 빠져있기에는 이 세상이 뿜어내는 인간에 대한 적대적이고 탐욕스런 시선들이 더욱더 위협스럽게 여겨진다.

 

빈곤이 초래하는 비참은 이 빈곤과 떨어지지 못하게 연관된 도덕적 곤경과 폭력을 항시 수반한다. 이를 버텨내기 위한 여인의 분투는 스스로 붕괴되는 수순을 밟지만 그 애달픈 와해에 저항하기 위해, 어머니를 향한 한 소년의 애끓는 사랑의 노래가 전면에 흐르며 우리네 마음을 마냥 젖어들게 한다.

 

근심 없는 평화로운 마음을 지니는 것조차 그렇게도 힘겨운 우리들의 이웃이 있다. 약자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더 취약한 약자에게 보내는 비틀린 부도덕의 관점 또한 우리들을 슬프게 한다. 다름을 수용하지 못하는 세계, 꿈의 가능성을 기대치 못하게 좌절시키는 세계는 자신이 강요하여 만들어낸 희생자를 외면하는 무책임이요 책임 회피 아닌가? 애그니스와 그녀의 자식들, 셔기, , 캐서린과 같은 이 세계의 모든 자식들이 정말 희망에 부푼 삶의 가능성을 믿을 수 있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감히 꿈꾸어 본다. "빛나는 구두 축으로 빙그르" 도는 셔기 베인의 춤을 미소와 함께 그리며, 축복의 입맞춤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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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의 역사
마틴 반 크레벨드 지음, 김하현 옮김 / 현암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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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인간에게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완전하게 예측,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나 방법이 있다면 살아가는 것에 어떤 의미, 어떤 세상이 펼쳐 질 수 있을까? 우리들은 삶을 선택 과정의 연속이라 말하곤 한다. 그런데 미래를 남김없이 안다면 그저 예정된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미래를 미리 알고자 안달하지만 정작 알게 되었을 경우 목표도 희망도 성취도 어떠한 의욕도 쓸모 없어지게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세상을 예견 할 수 없다면 인간은 또한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기에 이 예측의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그것이 무수한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역사학자 '마틴 반 크레벨드'는 이처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예측하고 그에따라 행동하려는 것은 "생명 현상의 본질"이라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역사 내내 예측을 위해 사용된 방법들과 추론의 과정은 당대 인간들의 신념을 드러내 주리라는 것이며, 이 것은 곧 인간성의 본질을 들여다 보는 작업이라 주장한다. 인간의 예측 방식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간 동안 과연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고대 샤먼에서 현대의 빅데이터를 기반으로하는 수학적 알고리즘에 의한 예측에 이르기까지 그 방식들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통해 인간 능력의 본질을 추적한다. 이 역사적 탐사에서 어쩌면 우리들은 기존의 관점을 수정해야 하는 망설임의 지점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1. 변성 의식 상태를 요구하는 예측



'변성 의식'이라 함은 "중독, 희열, 가수 상태, 꿈"과 같이 정신 기능에 대한 주관적 경험이 의식이 명확히 깨어있을 때의 일반적 기준을 현저히 벗어난 상태(28쪽)"를 일컫는다. 고대 사회의 예측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샤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에 의존했다. 평상시와 다른 의식 상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들 샤먼의 예측 능력, 마술적 힘을 지니게 된다고 믿었다. 이 샤먼이 21세기라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발생 초기부터 '어처구니없는 사기꾼, 위험한 악령을 불러들이는 악마, 어린아이의 정신적 산물'과 같이 샤먼에 대한 의구심은 항시 따라다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기이하고 불길한 꿍꿍이를 지닌 존재에 대해 불신을 보내며 이성적 판단을 요구한다.


『구약』에 무수히 등장하는 "신에게 영감을 받아 미리 이야기 하는 자" 로서  예언자(prophet)라 하여 샤먼과는 구분하지만 그 본래의 특성은 결코 샤먼이 하는 영(靈)의 교류와 다르지 않다. 에레미야, 이사야, 엘리야 등등 이들이 예언을 하려 할 때면 "아이고 배야! 아이고 가슴이야...(「에레미야」4:19)",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포도주에 잔뜩 취한 사람처럼 되었으니(23:9)"와 같이 변성 의식 상태에 빠져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의 신탁을 내리는 피티아 또는 시빌라로 불리던 예언자 역시 섬망의 발생을 자극하는 가스를 흡입하고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불분명한 내용을 주절거렸으며, 이것을 신관들이 해석한 것이 소위 신탁이라는 것이었다. 꿈 또한 해몽가가 달라붙어 자신들의 꿈을 해석하고 싶어하는 이들의 욕망을 들어줬다. 아침에 깨어 꿈으로 뒤숭숭해하는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며 정치적, 군사적, 왕의 신변에 대한 미래를 예측하는 해몽가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죽은 자와 상담한다는 심령술사는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에 더욱 번창했던 예언 행위의 일면을 보여준다.  베르길리우스의『아이네이스』나 단테의『신곡』에 등장하는 죽은 자들은 한결같이 미래를 알고 있는 자들로 등장하여 예언적 말들을 들려준다. 오늘 현대 합리주의 이성을 지닌 우리들은 심령술에 의지하는 것을 나약함과 혼란의 징표라고 여기기도 한다. 더구나 1326년 교황 요한 22세의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한 심령술사 처단이라는 강력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심령술사는 어디에나 있었다는 당대 역사의 증언처럼 중력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믿음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1904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존 윌리엄 스트럿 레일리'는 심령연구협회장을 맡기도 했다니 입증 불가능한 영매에 대한 사람의 오묘한 마음에 대한 주소를 가늠케 한다. 이러한 영적 믿음에 대한 심리학적 규명을 떠나서 인간의 문화적 신념 그 자체로 이해 될 필요가 있다.



2.  합리적 예측의 형식을 지닌 것들



샤먼,구약의 예언자, 신탁 예언가 시빌라, 꿈 해몽가. 심령술사 등 이들은 한결같이 변성 의식 상태에 기초한 예측 행위들이다. 근대 사회 이전의 모든 예측이 이처럼 이성과 논리를 사용하지 않는 예측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상세히 관찰하고 규칙을 만들어 적정한 추론에 의한 미래 예측을 하기도 했다. 점성술(astrology)은 그 대표적인 예측 방식이다.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고 그 주기적 질서를 인간의 삶과의 연관성을 통해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 이 방식이 합리성을 취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황도대의 12궁과 인간의 네 가지 기질(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사이의 관련성(133쪽)"으로 인간의 미래를 예측한다는 그 유사적 유추는 조잡해 보이기까지 한다. 한편 징조나 전조와 같이 일상에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 새롭고 드문 현상의 목격은 인간에게 정신적 경각심을 야기하고, 이는 곧 명백한 미래의 현상을 암시하는 예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혜성의 다가옴이나 태양 흑점의 증가나 감소는 다가올 재앙으로 해석되거나 인 간 영혼에 대한 유리와 불리함으로 유추하곤 했다. 이에대해 '성 아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도 했다. 



"징조는 해로운 호기심과 마음을 괴롭히는 불안, 지독한 예속으로 가득 차있다. 

징조에 어떤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고 기록을 하기 때문에 

징조에 의미가 생긴 것이다."   -147쪽





이러한 믿음들의 역할이 사라지게 된 것은 과학 혁명이다.  혜성은 재앙이 아니라 단지 주기적인 운동일 뿐임을 증명한 '에드먼드 헬리'의 정확한 관측에 의한 과학적 예측의 정확성에 자리를 내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번개 또한 신의 징벌이 아니라 구름의 전기 방전 현상이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발견처럼 '세계의 탈주술화'에 밀려난 것이다.  기원전 고대 철학자인 플라톤 역시 점술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어리석음"의 증거라고 힐난했음에도 주술 세계에서 벗어난 오늘에도 이들 전근대적 예측 방식은 여전히 그 믿음을 따르는 인간을 없애지 못했다. 왜 사람들은 이러한 비이성적 예언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 이들 예측의 모호함에 의존한 자의적 해석이 주는 자기 위안적 예언의 가능성과 유치하기까지 한 유아적 유추가 주는 수월함이라는 무사유의 편리함이며, 과학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운 직접적인 강렬함의 인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바이블 코드(Bible code)'라는 성경의 문장을 낱개의 알파벳으로 열거한 후 그것을 종과 횡, 대각선으로, 혹은 한 자 건너 한 자를 읽으며 마치 예언적 문구가 있었다며 예수의 예지력을 말하는 것처럼 공허한 것에 대한 믿음도 여전히 횡행한다. 이 방법들은 "『성경』이외의 이 세상의 모든 책에도 적용 가능(193쪽)"하다. 개개의 인간마다 그들이 성장하고 활동하는 문화적 공간에 다소의 차이들이 존재한다. 이들 미래 예측 방식은 이러한 문화적 태도와 믿음이 결합되어 특정 개인들에게 주입된 문화의 영역에 좌우되곤 하는 듯하다. 이렇듯 터무니없는 헛소리이지만 바로 그것에 은닉된 인간 본성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기도 하다.



3. 현대적 예측 방식



현대적 예측 방식은 분명 다음과 같은 클리셰를 기초로 한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미래는 과거의 앎을 양분으로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거나 주기적으로 순환한다는 발상이다. 따라서 과거의 관찰,  역사적 교훈을 발견하면 미래를 보다 근접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변하지 않는 속성들이 있다. 권력의 속성이나 이를 얻고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은 누천년간 변하지 않은 것들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은 불변하지 않는 세계의 패턴을 주장하는 목소리지만 오늘 이러한 논리로는 아무런 예측도 내 놓을 수 없다.


이 역사적 패턴의 순환이나 반복이라는 생각은 오늘에도 건재한데, 특히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기의 주기 이론이다. 쿠즈네츠 사이클이나 드라티예프 파동 이론은 불황과 호황 설명의 주류로서 활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기라는 것은 본디 고저를 오르내리는 것이고 이들의 주기 년한이란 것이 항상 들어 맞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이들이 중요 변수로 사용하는 물질의 중요성은 이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여 실제 경제를 반영하지도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더 이상 무수한 자료들 중에서 어떤 자료(변수)가 유의미한 지를 가려내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지만 의미의 유효성과 무효성을 구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특정 변수를 이용하는 것은 예측의 정확성을 심하게 왜곡시키곤 한다. 저자 크레벨드는 인간 예측의 역사 이래 "지속적이고 확실한 하나의 '마스터 키'는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213쪽)."고 단정하기까지 한다. 1965년 인텔의 창시자 중 한 명인 '고든 무어'는 집적 회로의 트랜지스터 수가 18개월마다 2배로 증가할 것이라 선언했으나 이 예측은 오늘에는 아무런 의미도 전해주지 못하는 무용한 예측이 되었다.  속도가 너무 빨라 관계들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버리는 세상이 되었다. 


드디어 오늘을 휩쓰는 예측의 기술인 변증법적 역사 방식에 기초한 '트렌드', 즉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회적 변화의 개념을 반영한 예측 방식이다. 사실 오늘날 기업의 경영계획을 비롯한 국가의 예산 계획은 모두 이 트렌드에 외삽법을 가미한 예측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추세를 전제로 하여 이 연장선 위에 미래의 일정 시점에서의 상황을 예측하는 것이다. 세계의 위대한 석학들인 스티븐 핑거, 유발 하라리, 레이 커즈와일 등의 저술 상의 예언들은 이 방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방식 또한 우리의 인지 편향을 배제하지 못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트렌드(추이)란 여기에서 나올지 모르는 이익을 얻고자 하는 트렌드가 가세하여 스스로 가속화, 증가한다. 또한 외삽법 역시 주로 발전 중인 분야에 촛점을 맞추기에 이것은 예측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방향을 심화시키는 일종의 방향 제시가 될 우려를 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결코 자연 과학의 법칙을 따른 적이 없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항상 물이 되듯이 인간 세계는 불변의 동일한 상황을 낳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는 늘 자기 고유의 길을 걸어왔다. 즉 변증법적인  "더 높고 새로운 수준으로의 고양"을 향해 걸어왔다는 것이다. 급기야 현대인들은 강력한 예측 도구로서 통계학을 토대로 하는 모델, 그 알고리즘을 통한 예측에 나섰다. 이것은 점성술이나 역사 주기론과 같은 자의성이 개입된 단순 합리론도 아니며, 변성 의식 상태에 의존하는 영적 예측도 아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중대한 특이점이 있다. 이 모델 예측 방식은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예측은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집단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251쪽)"는 것이다. 보험업자는 특정 인간이 교통사고를 낸다고 예측하지 못하지만 나이, 성별, 년간 주행거리와 같은 범주에 따른 사고율을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곤 막대한 수익을 얻는다. 이 통계적 확률 모델은 리스크 관리와 추정 이익 등을 예측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 모델 역시 수시로 중요 변수를 변화시켜 주어야 하며, 변수들의 배제와 포함 여부라는 선택의 어려움을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이들 또한 인간과 환경의 복잡다단한 요소들의 빈틈없는 반영의 산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한창인 선거 결과 예측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여론 조사 역시 통계적 모델 방식의 하나이다. 여기에는 표본집단 선택과 편향 배제를 위한 임의적인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며, 여론 조사 발표는 미래의 결과에 영향을 끼쳐 예측이라기 보다는 미래 결과의 강화를 조장하기도 한다. 더구나 언제나 말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 인간의 심리적 동요는 반영할 수 도 없으며 반영되지도 않는다. 다분히 정치적 이익 집단에 의한 조작과 왜곡이 개입하는 근대 이전의 샤먼이나 점성가의 예측보다 나을 것이 없는 방식이라 할 수도 있다. 외형은 과학적 도구인 통계를 이용하지만 여타의 섬망이나 직관적 유추와 그리 다를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현대 과학의 엄청난 진보의 역량에 기대 막강한 컴퓨터 및 예측 장비 동원한 오늘의 기후 예측은 예전보다 조금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보는 별로 진전된 것이 없기도 하다. 다리가 쑤셔오니 비가 올 것 같다는 징후에 의한 예측이나 60% 비 올 확률의 예보가 무엇이 그리 다른가? 비는 오거나 오지 않는 것이다. 60% 비가 내린다는 이 애매모호한 예보는 항상 옳거나 틀린 예측이다. 사실 이 표현은 외형적으로는 과학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예측 가능한 미래' 라는 표현처럼 역량 부족을 눈가림 하는 언어처럼 꼴 사나운 말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책 288쪽 부분 발췌】 


4. 결 어


인간의 예측을 향한 관심은 모두에서 말했듯이 생명 현상의 본질이다. 이 책의 여정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아내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의 역사를 탐사하며 궁극적으로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오늘의 관점으로 보면 미친 인간의 헛소리이거나 터무니 없는 소리이고 음험하고 교활한 술책을 숨긴 조작된 말이지만 그것들은 당대의 나름대로 인간의 문화적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과학화, 관료주의적 통제 방식이 휩쓰는 오늘날의 일관성, 규칙성, 신뢰성을 축으로 하는 과학적 예측이라 하여 그리 나을 것도 없다. 


아마 파우스트가 예측 불가능성을 토로하는 구절이 진실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내 가슴 속에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 있구나,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에 무엇이 현실이 될 지 예측하는 것은 순전히 운 또는 기껏해야 직감이라 알려진 모호한 것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294쪽;파우스트1-1112,)"  



정말 중요한 예측의 누락이 있다. 결코 예측에 반영하지도 할 수도 없는 것,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고려할 어떠한 방법도 없다는 점이다. 이에 더해 "무엇인가 관찰하려는 시도가 그것의 변화를 일으키고, 아원자 수준에서 두 개를 동시에 측정 할 수 없다(295쪽)"는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불확정성의 원리나 복잡계의 카오스 이론처럼 인간에게는 완벽한 예측을 가능케 할 충분한 지적 능력 없음을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어쩌면 인간의 '찬란한 예측 불가능성'이 인간의 본질인지도 모를 일이다. 


만일 기표가 기의에 정확히 일치하여 아무런 간극도 없이 정확히 일치하는 세계, 남김없이 명확한 미래의 예측이 가능하다면 과연 인간의 삶이 더 풍요로워질까? 냉혹하고 모든 것이 그저 의미없이 거닐어야 하는 무의미, 아마 무(無)의 공간이 되지 않을까? 인간의 예측 역사라는 지대를 탐사하며 예측이란 인간에게 삶의 고유한 향취를 더해주는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는 것 같다. 개인의 예측이 배제된 현대의 세련된 과학적 예측 방식은 호기심 가득한 인간 본성으로부터 결코  점 술과 샤먼(무당)의 예언을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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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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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시작하며 '죽음의 집'이라는 이 어두운 제목을 한 소설을 읽게 된 것은 '죽음이 아니고서는 산 자들 삶의 성찰이 어렵기' 때문이라는 각성이 야기한 요청 때문이었다고 해야겠다. 다만 이 작품의 배경인 서(西) 시베리아 유형지라는 특수한 공간에 갇힌 인간의 기록이기에 여느 산 자들의 언어와는 다른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발에 찬 족쇄처럼 인간의 행위가 엄격하게 강제된 곳이기에 '인간의 삶'이란 것을 보다 절실하고 넓게 사유할 수 있는 장치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래 이 소설은 그 어떤 문학 작품보다 삶을 향한 지독한 향수를 지닌 '생생한 삶의 기록'이다.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 그의 처녀작인 가난한 사람들이 발표된 후 17년이 지난 41세에 출간한 소설이다. 농노제와 검열제 폐지를 주장하던 사회주의 그룹에 가담한 죄로 시베리아 옴스끄지방에서 1850년부터 4년간의 유형생활이 그에게 선사한 운명의 산물이랄 수도 있다. 작가 자신을 투영한 것으로 짐작되는 작중 화자인 '알렉산드르 빼뜨로비치 고란치꼬프'의 입을 빌어 "견딜 수 없는 우수, 극도의 정신적 고독이 없었다면 (...) 자신에 대한 반성도 지난 생애에 대한 엄격한 비판도(435)"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하듯이, 보다 깊은 인간과 삶을 이해하는 부활을 예비한 죽음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250명 남짓한 절도, 사기 등 잡범들, 살인범, 정치범 등 온갖 기결수들과 미결수들을 감금하고 있는 옥사는 '죽음의 집'이다. 잔혹한 신체적 형벌과 고된 노역뿐 아니라 질병과 폭력이 지배하는 시베리아 허허벌판에 격리되어 수용된 죄수들에게 이것보다 적절한 이름도 없겠지만, 이러한 실재하는 죽음의 근접성뿐만 아니라 감옥 바깥의 세상, 인간의 자유가 거니는 세상이라는 간절한 희구의 도래를 위한 불가피한 고통에 종속된 유예된 시공간의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1. 인간 관찰기

 

소설은 죄수에 행해지는 형벌들이 인간의 영혼에 끼치는 해악과 제도적 역기능에 대한 고찰이며, 격리 폐쇄된 공간 속에 있는 인간들의 생존적 행태로 발현되는 심리 분석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증오와 금지된 향락에 대한 욕망과 무서운 경솔함을 부추기기"만 하는 강제 노역,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며 표면적 목적만 달성할 뿐"인 독방제도, 억제된 사생활 위반에 가해지는 각종 체형과 태형에 도사린 신체의 자본화라는 인격 말살 등이 죄수들의 감방 내 생존을 위한 각양의 은밀한 거래와 축적의 행태와 조응하며 고독과 공허감, 무력감이라는 박탈된 삶을 통과해내는 인간들을 그려낸다.

 

아마 이 작품은 수많은 인간 개체들의 다종다양의 심리적, 행태적 관찰기라 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인간의 양면성 혹은 복합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이를테면 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고 타인의 목을 베어버리는 자가 자신의 태형을 앞두고는 공포로 몸을 떨며 기가 죽는 인간이 있는가하면, 복수의 욕망과 예정된 단일한 목적 달성이외의 욕망은 사라져 어떤 종류의 고통과 형벌조차도 무시하는 인간을 보기도 한다. 타자에 무심한 인간일수록 자기 연민에 극성을 떨곤 한다. 자신에게 닥치면 더없이 큰 문제로 인식되어 증오를 뿜어대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편 감방 내 은밀한 술 거래로 부자가 되어 수하에 죄수들을 거느리는 자와 조수가 되어 이들의 명령을 오로지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자들의 행태적 거래의 모습에서 고용과 피고용자 사이의 가혹함과 무자비함, 착취하고 가능하면 여분의 것까지도 갈취하는 구조의 형성에 도사린 힘의 불모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하는데, 죄수들이 동료들 앞에서 뽐내고 우쭐대는 것, 그 허세의 이면에 있는 심리이다. 이 거드름과 오만과 헛된 망상은 자신들이 타인에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자유와 힘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확신하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라고 기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자유와 인생의 요원하기만 한 환영의 표출로서 단지 억눌린 개성의 드러냄일 뿐이라고 관대하게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그 부정성의 근원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모름지기 피와 권세는 인간을 눈 멀게 하는 법이다. 거만과 방종이 심해지고 급기야 (...) 비정상적인 현상도 달콤하게 받아들이고 (....) 이런 현상에 무관심한 사회는 이미 그 기초가 위협 받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311

 

소설의 화자인 귀족 출신의 죄수가 겪는 자기 성찰은 이 같은 동료 죄수들과 이들의 감시자인 소령과 형리의 심리와 행태의 관찰과 분석적 통찰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을 억누르고 빼앗으려하며 누군가의 권리를 박탈하면서 오직 규칙과 법을 들이미는 자들에게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이해의 능력도 부재함을 발견하고, 급기야는 채찍으로 때리는 권세에 맛들여 인간의 육체와 피, 영혼을 지배하고, 더 할 수 없는 모욕으로 죄수들을 멸시할 수 있는 권력에 도취된 자들의 병적 포악함에서 또 다른 인간 본성을 보기도 한다. 죄수를 때리기 전에 느껴지는 묘한 흥분 상태, 그 쾌락적 즐거움이 권력자라는 자기 인식을 강화하는 왜곡된 인간 본성에 전율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화자의 시선에서 줄곧 떠나지 않는 것이 있다. 아마 연례 행사처럼 베풀어지는 비좁은 목욕탕에 아래위로 포개져 한 바가지의 물에 몸을 씻는 죄수들의 벗은 몸에 드러난 매 맞은 등허리와, 빡빡 깍은 머리가 어른거리는 지옥 같은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한 죄수의 광기어린 아리아의 울림이다. 이 묘사는 동료 인간에 대한 쓰라린 연민이며, 상실된 인간성에 대한 고통스러운 공감이며, 타인의 절대 고독과 고통에 대한 연대감이다. 화자는 귀족으로서 체형의 경험이 없다. 그는 동료들에게 감히 묻는다. <아픈가?>, <아프지요, 타는 느낌이 들어요, 불처럼. 마치 뜨거운 불로 등을 지지는 것 같습니다.> 4백대 5백대로도 사람을 죽이는 채찍 체형은 3천대로 동료 죄수들을 기어이 죽이기까지 한다.

 

2. 민중의 숭고한 갈망, 정의, 자유...

 

유일하게 감옥 외부의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성탄절을 맞이하는 죄수들, 증오와 적대감으로, 억압과 유폐(幽閉)된 장소로부터의 고립감, 사라져버린 희망에서 오는 우울감을 떨쳐내고 성스러울 정도로 공손함과 세심함으로 구원을 향한 경건함에 젖어든다. 욕설과 조롱, 혐오를 일삼던 죄수들이 먼저 기꺼이 공손하게 성탄절 축하 인사를 하며 타자를 맞는다. 가난한 자들이 마지막 남은 한 푼을 털어 가난한 사람에게 보내는 선물은 그 어떤 화사한 선물보다 진심을 표현한다. 불평도 시기심도 사라진 그들에게서 숭고한 정신을 향한 인간의 내적 본질을 발견한다.

 

성탄절 행사의 일환으로 죄수들의 행위에 사사로운 트집으로 방해하던 소령이 그들의 연극을 암묵적으로 승인하고, 이들이 감옥에서 펼치는 민중 연극에 모여든 지역의 시민들이 빽빽이 들어 찬 공간의 장면은 사람들이 목말라하던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살피게 한다. 죄수들이 뒤집어쓰고 있던 껍질을 벗어던지고 눌려졌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할 때 놀라운 그들의 정신세계와 숭고한 갈망, 절로 표출되는 정의감은 활기와 존경의 감응으로 비좁은 감옥을 채운다. 빈약한 무대장치지만 관객은 상상력으로 결여를 채우는 것에 동의하며, 부자유와 힘겨운 운명 속에 쓸모없이 파멸해가는 배우 죄수들에 대한 동류 인간으로서의 경의가 흐른다.

 

"아무런 희망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그도 자기 식대로 인위적인 순교 속에서 출구를 찾아냈다. (...) 단지 고난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악의 없이 소령에게 덤벼들었다는 것이다." -389

 

인간은 어떤 목적과 그 목적을 향한 지향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살아갈 수 없다. 절망에 빠지게 하는 희망 없는 불가능에 휩싸인 공간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행위들은 저마다의 구원을 향한 출구의 모색일 뿐이라고 화자는 해석한다. 인간 정신에 대한 섬세한 화자의 이해는 이처럼 개체들의 고유한 삶에 대한 존중의 시선, 인간에 대한 집요하고 너그러운 정신에 기초한다.

 

그것은 삶의 자유로운 구현을 향한 너무도 본질적인 추구라는 점에서, 또한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원죄의 업보라는 측면에서 "정말로 누구의 죄인가?"라 묻는 것은 죄와 벌의 상보성에 대한 도덕적 물음을 낳는다. 자유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본질적 표현, 삶을 절망시키는 것에 대한 인간적 행위에 대한 '입장(환경+운명)' 바꿔 생각해봐!'라는 윤리적 질문이기도 할 것 같다. 출옥, 화자의 발목에서 족쇄가 떨어져 나갈 때 "죽음으로부터의 부활(457)"을 외치는 장면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의 깊이로 다가온다. 인간 심리와 도덕적 성찰로 그득한 이 소설은 인간 나에 관한 자성을 넘어 타인을 그것이 아닌 동류 인간으로, 차별 없는 윤리적 동등성의 인간으로 함께 생각하는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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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와 가족, 아버지의 집에서 낯선 자 되기 가족특강 시리즈 6
오선민 지음 / 북튜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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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그림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가장의 근심에서 설명되고 있는 '오드라덱(odradek)'이라 불리는 형상을 그려 본 이미지다. 대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 형상의 핵심은   "그 누구도 합의할 수 있는 형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는 것이다.  , 아무런 목적도 없는 존재!, 통제나 지배가 불가능한 그 무엇,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할 때 불안을 느끼고, 근심을 초래한다. 목적이 따로 없으니 경우의 수가 얼마나 많겠는가?


 

​​​​【 75, 2'성스러운 흡혈가족 이야기' 중 인용된 이미지 재인용



아마 카프카가 그의 소설에서 시종 말하려 했던 것의 실체인지도 모르겠다. 상식을 의심할 수 있는 시선을 갖는 것, 삶에 어떤 고정된 척도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삶을 바꾸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자의 의지를 느끼게 된다. 카프카는 법, 질서, 삶의 척도로서의 아버지를 극복함으로써 사회에 비로소 하나의 성숙한 인간으로 적응한다는 오이디푸스적 발상에는 애초에 관심조차 없다.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상식이라는 그물로 처진 시선이 아닌 다른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는 삶, 삶을 실현하는 감각을 바꾸는 일에, 어떤 규율이나 명분에 구속되지 않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꿈꾸었을 뿐이다.

 

그러고보면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Anti-Oedipus)'를 카프카가 선취했던 것 같다. 들뢰즈가 '"아이는 엄마,아빠를 엄마와 아빠로 본 적이 없다."라며 "무의식이 문명인인 인간의 전유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욕망-기계'"라고 표현했던 '분열자의 산책'을 이미 변신에서 '그레고리 잠자''K', 실종자'카알 로스만'이 세상의 익숙한 시선들을 찢어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가족적 경험 이전의 것으로 인간 존재를 해방 시켰던 들뢰즈와 같이 더 이상 아버지를 권위를 부여받고 군림하는 규율로 바라보고 있지 않는 카프카의 소설 속 아들들의 시선은 많은 부분에서 중첩된다. 이들에게 가족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근원지로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으며 각양각색의 사회적 관계 속으로 나아가는 무수한 길이 있음을 안내하지 않았는가?

 

사실 18세기부터 출현한 핵가족 중심의 스위트홈이라는 낭만적 허상이 자본주의 욕망을 지탱하는 축으로 작동해왔음을 지적하는 것은 이제 진부한 이해가 되어버렸으며, 화폐에 대한 탐욕과 위선을 덮어주던 '가족'이라는 대의로 포장된 도덕의 효력도 이젠 거의 소진된 형국이다보니 근대 가족주의에 매달리는 퇴행적 진술은 언어의 불필요한 남용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카프카가 "어떤 원인도 목적도 없는 글쓰기"를 통해 바로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로 상징되는 당대의 속물주의와 민족주의에 맞서는 문학형식으로 주장한 것이야말로 바로 그 어떠한 근대 가족주의의 비판적 지성을 넘어서는 탁월함일 것이다.

 

"가족을 유지하는 형식이 도대체 무엇인지 물어 들어가면 최종적으로는 물질적 구색 밖에는 안 될 거라는 것..." - 21

 

가족주의가 발하는 것이 무엇인가? "잘나가는 직업을 갖고 착하고 예쁜 아내(돈 잘 버는 남편)와 토끼같은 자식들을 거느리고 떵떵거리는 삶, 이러한 관계를 건실하게 끌고나가는 교육 잘 받은 성인 남성(여성)-30"으로 키워내는 것, 지배문화에 영합하고 주류계층의 취향으로 도배시키는 것에 열중하는 것, 이러한 삶의 태도를 주입시키는 것에 온통 사로잡혀 있는 것 아닌가? 카프카는 이런 삶의 태도를 참을 수 없어 했었던 것 같다.

 

이 속물주의에는 현실부정론과 준비론, 즉 미래를 위해 현실을 희생시키고 언젠가 도래할 행복을 기대하며 사는 삶, 목표지상과 현실부정의 음습한 냄새가 가득하다. 자본주의의 축적논리와 기독교의 메시아주의, 근대 핵가족의 이기주의가 완전히 닮아있지 않은가? 인간의 삶이 "무리들이 칭송하는 아이콘만 좇게 될 때" 그 얼마나 살벌한가? 삶의 다양성을 축소시켜 쪼그라들어 편협해진 욕망의 기이함에 매달려 주둥아리와 온 몸에 피를 낭자하게 묻히고 허겁지겁하는 괴물들의 투쟁장으로 인간 삶을 축소시키는 중심에 가족이라는 이름의 위선적 규정이 있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재칼과 아랍인은 오늘의 인간들에 대한 적나라한 초상일 것이다.

 

인간 ''를 규정할 수 있는가? 어쩌면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고정된 척도에 매달려 있으니 규정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는 늘 다른 꿈을 꿀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어떤 인간도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며 살 수 없다, 만일 "나는 이런 사람이니 이러저러한 것들을 갖추고 있어야 해."라며 어떤 경험들을 필수로 간주하게 되면 남는 건 불안뿐일 것이다. 이걸 주워 담는 틀인 우리시대의 '가족'은 이 책의 표현처럼 "성스러운 흡혈가족"이라 할 것이다. 영화 기생충의 박사장네, 김기사네, 이들 핵가족의 일그러진 표상, 바로 그것.

 

척도를 계속 바꾸고, 다른 방식으로 삶을 실현하기 위한 감각의 변화를 도모한 갑충-그레고리, 사는 방법을 조금씩 조금씩 바꾸어보는 실험을 하는 실종자의 카알 로스만, 삶에 어떠한 고정 척도도 용납하지 않음으로서 삶의 무궁한 변화를 시도하는 K가 바로 오드라덱이다. ‘넌 계획이 다 있구나라는 이 천박한 우라질 현실부정의 속물성을 벗어나 목적없는 존재, 무수한 다양성의 길을 걷고자 할 때 우리네 세상은 타자와의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고 생명의 플랫폼으로서 새로운 공동체를 축조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카프카를 통하여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상식을 의심할 수 있는 하나의 시선을 갖는 것", 그럼으로써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터전의 토대를 놓고 있다. 또한 카프카의 원인도 목적도 없는 소설들의 형식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행로와 태도로부터 개인 각자의 삶에 대한 시선을 스스로 묻고 답하는 사유의 실마리를 갖도록 이끌어주기도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진정 그러한 것인가를 , 그 상식이라는 것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를 생각케 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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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배 애도 적대 - 자살과 한국의 죽음정치에 대한 7편의 하드보일드 에세이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천정환 지음 / 서해문집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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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아니라면 산 자들은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해 낼 방법이 별로 없는데,

죽음이 만연해 있어 무감해져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런 책을 낸다.” -머리말에서

 

 

이 머리말은 오늘의 한국사회 구성원들인 대중을 지배하고 있는 마음의 레짐(regime; 인간의 상호관계를 이끄는 가치, 규범의 총합)’에 대한 문제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까지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무수한 저항의 노력 후에 어느 만큼의 성취를 인식하게 됨에 따라 200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러서 사람들은 인간 해방 이념의 실종과 함께 착취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사회의 전망(143)”또한 상실했다.

 

이제 인간 유일의 주체적 사유 방식의 원천은 자기계발 따위의 경영학적 신자유주의적 속물성, 즉 경제성과 효율성을 지닌 인간외의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는 그런 시대성에 압도되어있다. 이러한 레짐의 변화는 타자와의 관계를 소멸시키고 그 자리에 성과주의라는 시간의 기획성에 종속시키는 주체들로 들끓게 만들었다. 대중을 이루는 각 개인들은 다른 존재에 대한 연민조차 가질 내면의 공간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니 누군가의 죽음, 하물며 자살이야 일시적 호기심으로서의 쾌락으로 금방 소비되는 스펙터클 이상이 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도덕적 무감증(無感症)을 넘어 조롱하고 희화화하며 잔인성과 무자비한 적대감을 내뿜기까지 한다. 우리는 동료 인간의 죽음이 말하는 것에서 그 어떠한 도덕적 언어도 그것이 환기하려하는 의미에 대한 각성도 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 천정환은 이 사회가 이러한 죽음을 이용하는 두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는 그 죽음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고립화시켜 마치 존재치 않았던 것처럼 지상의 삶에서 추방하고 배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죽음이 야기한 죄의식과 안타까움을 자기연민과 뒤섞어 이용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인간 동료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지 못하고 한낱 병적 수준의 욕구만을 드러내게 되었을까?

 

 

어쩌면 이 책은 바로 이 무감해진 우리네 도덕 감각의 전환적 사건이라 부를 수 있는 사건들을 통해 죽음에 보내는 시선인 숭배와 애도, 그리고 적대의 감정에 은폐된 실체를 파헤친다. 그 파헤침의 작업은 숨어버리거나 사라지고 있는 도덕적 감수성을 깨어내고 복원시키고자 하는 노력일 터이다. 그것은 열사(烈士)들의 시대로 부를만한 80~90년대 학생과 노동자의 죽음에서부터, 민주주의가 정착된 시대라는 2000년대에 발생하는 무자비한 정치 폭력에 의한 죽음, 즉 정치적 타살이라 부를 수 있는 자살과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증오와 복수의 적대가 기획한 죽음들, 그리고 여성 연예인들의 자살을 강요하는 이 사회가 지닌 잔인성의 체제가 야기한 죽음들의 성찰이다.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는 어두운 힘은 학교, 가족, 이웃이 근거하는 세계에 있다.

이 힘을 조절하고 제어할 수 있는 힘 또한 정치다.“ -8

 

 

A. 열사(烈士)를 양산하던 폭력사회

 

 

80~90년대의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자살은 정치적 타살이라 함에 주저치 않으련다. 80년 광주민중항쟁, 87년 시민민주항쟁, 91년 민주투쟁 등을 비롯하여 71년 노동자 전태일 열사의 분신에서부터 헤아릴 수 없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죽음은 이 사회의 지배 권력에 저항하다 어떻게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음(40)”이라는 절망적 심리 상태에 몰렸던 긴급하고도 절박한 상태의 토로였다.

 

당대의 시민 대중은 이들 사회적 죽음을 맞이한 동료 인간을 기념하고 기려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감의 언어(45)”로 그들을 열사(烈士)‘로 부르며 자신들의 윤리적 딜레마를 달랬다. 즉 이들의 죽음이 시민을 각성하게 하는 도덕적 각성의 추동력이었음이다. 또한 이 도덕적 책무감의 언어는 일반 자살과는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는 복잡다단한 시민적 양심, 죄의식이 시민 대중에 폭넓게 수용되고 확산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인식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효율성, 경제성에 점령된 2000년대 이후의 사회는 노동자들의 죽음을 70년대 기업주들과 공권력이 일하기 싫어 소란을 피운 깡패(69)”라 악선전하던 퇴행의 언어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201212월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자살, 명확한 사회적 타살사건임에도 한국사회를 지배하던 언론 미디어는 잠잠하기만 했다. 다시금 쌍용자동차 노동자 23명의 죽음이 뜻있는 작가들의 르포로 발표되고서야 미약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조중동 수구 언론기업들은 고작 강성 노조가 노사관계에 해악을 끼쳤다는 악의적 비난의 기사를 게재하며 선동질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미 경제적 인간의 가능성 이외의 인간을 생각지 못하는 인간들의 사회는 동료 인간에 대한 연민의 상실을 떠올리지 못한다. 사회 관계망 전체가 성과주의에 식민화(144)”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인식능력과 표상을 배분하는 것은 사회 전반의 윤리적 능력이나

이데올로기의 상황에 근거한다."   -144

 

지금의 한국 사람들이 윤리적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는 진정 무엇일까? 공정을 말하지만 그것은 성과주의, 능력주의라는 효율과 경제적 이익, 힘을 지닌 자리로서의 권력 아닌가? 사회 전반의 의식에 속속들이 스며있는 인식의 부패성에 대한 성찰 없음 아니겠는가?


 



B. 억압과 배제 그리고 보복의 정치 참살

 

이 사회에는 강력한 특권과 주류집단의 동맹이 있다. 검찰, 언론, 정당 권력으로 이루어진 이들이 지배하며 그자들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지원하지 않는 타자는 삶이라는 지상의 영역에서 쫓아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속물 권력 절정의 표상이랄 수 있는 2009년 이명박, 오세훈은 폭력 진압으로 용산 재개발 철거민을 극악한 저항에 불가피한 대응이었다는 변으로 참살을 정당화 했다. 이 엘리트의식에 장악된 권위주의적 수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 독점에 방해되는 것에는 오로지 혐오와 적대감만을 투사한다.

 

2009430일은 전직 대통령 노무현을 대검찰청으로 소환한 날이다. 당시 조사를 지휘하던 자가 박근혜 정권의 민정수석이었던 우병우다. 이 정치검찰은 언론에 조사내용을 흘림으로써 조롱하고 모욕한다. 이 지배권력 동맹은 상고출신의 필부 외양을 지닌(180)” 사람에 대한 혐오와 반감, 그리고 공포를 지워버리고 싶어 했다. 모두 같은 대학 출신의 동문들로 이루어진 이들 간교하고 힘센 한국 지배계급 동맹(181)”은 그 경박함과 무례로, 씻기지 않는 모욕으로 정치적 타살을 아주 무감하게 자행했다. 이것이 한국 사회의 버젓한 민낯이다.

 

이후 한국의 지배동맹은 시민적 자발 조문행사를 촛불시위를 벌일지 모른다는 이유로 공권력을 이용해 조문을 방해하고, 분향소 주변 추모행사를 원천 봉쇄했다. 근처에 얼씬하는 사람은 잠재적 반정부 시위대로 간주하여 적대적으로 체포하는 무자비함을 감행했다. 이러한 지배권력 동맹인 언론, 사법(검찰), 수구정당이 강력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특권 집단이면서 오늘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끊임없이 친노, 친문의 감정정치를 비루한 언어들로 조롱(195)하고 폄훼하며 부도덕성을 감추지도 않고 파렴치함을 행사한다.

 

노동자 출신의 진보 정치인 노회찬이 자살한 다음날 <조선일보>는 그의 죽음 기사 옆에 지면을 가득 채운 환호하는 야구 선수 사진을 실음으로써 죽음마저도 조롱했다. 동료 인간의 죽음에 대한 무감각, 삶과 죽음에 대한 무지, 인간성과 언어 빈곤의 발로(216)”이다. 위악과 관종의 정신 상태, 무자비한 진영논리와 타인을 향한 적대만이 넘실댄다. <뉴욕타임스>노무현의 죽음이 정치 보복에 의한 것이며, 증오와 죽음의 정치가 확대 반복(173)”되리라고 썼다.

 

 

C. 잔인성이 장악한 한국의 사회 현상 - 여성 연예인의 죽음

 

최진실, 장자연, 설리, 구하라...,박지선, 이들은 모두 사회적 잔인성이 행한 타살, 자살이란 형식에 의해 사망한 여성 연예인들이다. 타자의 불행과 고통에서 쾌감을 얻는 인간들, 한국 사회가 이러한 위악성이 만연한 도덕적 불감증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장자연이란 여성 무명 연예인을 돈과 술수로 파괴했던 간악한 자들, 인간 소비의 잔인한 집단 행위(267)”에 가담한 악인들은 많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결코 밝혀지지 않았다. 가해자들이 공고하게 구축된 지배 동맹(언론, 검찰)의 일원들이었기에 애초에 찾아낼 수 없었다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삶의 적나라한 공개를 감수해야했던 이들 연예인의 죽음은 죽어서도 선정적 흥미의 대상으로 소비된다. 흥행성과 이익에 몰두하는 언론 미디어는 관성화되고 무뎌진 도덕적 감각으로 무장하곤 열정적으로 대중의 소비를 부추기며, 타자에 대한 관음적 평가에 놀랍도록 냉정하고 폭력적인 취향에 젖은 대중들은 맞장구치듯 게걸스럽게 소비한다. 그리곤 잊혀 진다. 이윤과 쾌락 추구를 향한 브레이크 없는 이 냉혹한 잔인성(147)”은 대체 어디서 분출되고 있는 것인가? 나인가? 너인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의 윤리 의식을 쪼그라들게 만드는 이것으로부터 우린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D. 결어 - 애도와 연민의 확장, 인간성 회복을 위해

 

OECD 회원국 중 독보적인 1위의 자살율을 영광스런 타이틀처럼 고수하는 나라, 이 사회는 옆 자리의 동료가 죽어도, 이웃의 자녀가 죽어도, 하물며 사회를 향한 명확한 메시지를 지닌 사회 정치적 타살에도 무심과 외면, 혐오와 경멸, 조롱과 모욕의 시선을 보내며 즐거워한다. 너무 만연해서 그런 것인가? 일회적, 피상적, 형식적 찰나의 호기심과 함께 증발되어 버린다. 그런데 왜 이 만연한 죽음의 현상을 교정하려 들지 않을까?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수준 낮은 풍자로 조롱하며 낄낄거리는 수구 정당 의원들의 부패한 도덕성에서부터 죽음에도 조롱과 조리돌림의 악플을 매다는 패덕(悖德)의 관심종자들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는 성찰성과 도덕적 제약을 상실한 듯하다. 이 사회적 잔인성을 향해 배려와 존중의 문화를 외쳐본들 공허한 울림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은 왜 이렇게 참담한 인간들이 되었을까? 너무도 만연해진 죽음들로 무감해진 것이라고만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미흡하다.

 

열사들의 죽음, 대통령의 죽음을 숭배하며 애도하는 것에 그 누가 시비하겠는가? 그러나 시비를 넘어 조롱과 혐오의 적대를 보내기까지 한다. 대중들은 2009523일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못 지켜줘서 미안합니다며 죄의식과 안타까움, 회한의 애도를 발하기 시작했다. 아마 순수한 인간적 연민의 표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이 애도의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소환하는 행태들을 보게 되고, 이는 반대 진영이 다시금 폄훼하고 경멸하는 빌미가 되어 한 인간의 죽음을 반복적으로 소비하는 저열한 부도덕을 재생산한다.

 

또한 인지자본주의의 과잉 확장, 점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정신과 육체노동의 간극 확대는 노동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가속화하고 이제 노동자의 죽음 따위는 더 이상 말해지지 않고 있다. 모든 가치가 물화되며 죽음 역시 그것(it)이라는 혐오의 대상으로만 얘기 될 뿐이다. 정당하게 말해져야 하고, 애도되어야 할 죽음들이 말해질 수 없는 세상이 되도록 조장하는 집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를 바로잡는 것은 인간의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방지법의 제정과 같은 제도적 실행이 될 수도 있으며, 언론에 대한 인권 보호 보도 지침의 엄격한 준수의 요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무소불위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파렴치한 검찰과 사법 권력의 철저한 개혁이기도 하며, 악플 문화에 대한 적절한 기술적, 법률적 대응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사회를 무참하게 지배해온 지배동맹의 해체, 기득권 해체를 요구하는 시민 대중의 강력한 연대이다. 정작 시민 대중의 70~80%를 대변하는 아무런 단체도, 정당도 없는 오늘의 형국이야말로 시급한 시민적 과제이다. 제도와 입법이 시민 대중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는 구조적 부패성을 시정해야 한다. 그래야 기득권을 척결 할 수 있다. 이것이 실현 될 때 우리 사회에 깊숙이 스며있는 죽음을 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시민의 각성이다. 그래야 적대하는 골 깊은 갈등이 무의미해지는 지대를 우리는 후손들에게 남겨 줄 수 있을 것이다. 시민의 죽음을 잔뜩 머금은 작금의 권력 정치에 우리의 삶을 담보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지 않은가?

 

이 책은 한국 사회를 장악한 사회적 타살의 실체를 날카롭게 통찰하여 시민의 잠든 도덕 인식을 깨어나게 하는 사회적, 정치학적 고투이자, 스러져간 동료 인간들에 대한 애도이며 시민대중을 향한 위로이다. 오늘의 우리들과 사회의 정치 현상을 이해하는 귀중한 거울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 군중과 권력, 2010년 바다출판

▲스탠리 코언(Stanley cohen)『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2009년 창비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Franco 'Bifo' Berardi)죽음의 스펙터클, 2016년 반비 

수전 손택(Susan Sontag)타인의 고통, 2007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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