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네지릭
기 드보르 지음, 이채영 옮김 / 필로소픽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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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생산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타클의 거대한 집적으로 나타난다. 직접 경험했던 모든 것이 표상 속으로 멀어진다. "

-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La Societe du Spectacle1 테제에서

강신주구경꾼 VS 주체오월의 봄 , 102쪽 재인용

 

마르크스의 자본론첫 문장을 강력하고 예리하게 벼려낸 이 패기만만한 '기 드보르(1931~1994)'의 현대 세계에 대한 표상 비판은 자본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표적으로 한 세기의 명문장으로 회자되고 있다. 1952'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을 만들고 1972년 자진 해체할 때까지 주도했던, 세계를 대상으로 투쟁했던 20세기 유일의 저항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의 회고록으로 이끌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기 드보르의 일생은 세상과의 지속적인 불화, 아니 적대감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타당한 이유를 지니고서 말이다. 스펙타클이라는 온실 속에 갇혀 지내며 자신이 갇힌 줄 모르는 현대사회의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상처를 내 돌아보게 하려는 시도로 점철된 삶이었다하면 왜곡된 이해가 될까?


 



회고록의 제목 '파네지릭(Panegyrique)' "비판과 비난을 배제하지 않는 찬사"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듯하다. 설혹 비난이 가해질지언정 기 드보르는 관심조차 없겠지만, 그는 그야말로 솔직해 지는 것이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동시대 사람들이 받아들인 가치를 단 한 번도 믿은 적이 없(17)" 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회고록은 여느 회고록과는 판이한 내용과 구성을 하고 있다. '페터 바이스'저항의 미학을 연상시킨다는 측면에서 기 드보르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글과 낙서, 지도와 포스터들, 그리고 사진들을 통해 최선을 다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모든 전략 비평의 본질은 정확히 행위자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빌어, 섣부른 공상이나 몽상과 같은 비평으로는 본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음을 시사하며 자신이 경험한 인생이란 정확히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서술해나간다. 빈털터리 집안, 물려받을 유산은 없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아르투르 크라방과 로트레아몽을 존경하는 인물로 새기며, "부르주아들이 일하는 천박함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25)" 산 덕 분에 인생의 중요한 것을, 즉 부재와 결핍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길거리에서 자랐단 말이다!" -아리스토파네스 기사들

 

그리고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극단적 허무주의가 지배하는 아주 매력적인 집단에 접근하게 됨으로써 "평범한 존재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27)"이 사라지고 말았음을, 그러나 어떠한 후회도 없는 삶이었다고 술회한다. 이렇게 이끈 것은 현대사이지 세상이 부정적으로 규정한 사람들이 아님을 확인한다. 결국 "파괴는 나의 베아트리체가 되었노라."라는 외침처럼 기존의 사회, 사회가 앞으로 되겠다고 선언했던 모든 것에 대한 적대적 입장이 1989년 이 회고록이 집필되던 시기에도 여전함을 밝힌다.

 

그의 주저(主著)스펙타클의 사회1테제를 모두(冒頭)에 인용한 까닭은 그가 지향했던, 또한 그가 세계와 불화했던 이유를 상징하기위해 인용했다. 따라서 그가 세상을 그토록 잘 꿰뚫어 보던 "내 가난한 동지들을 생생히 기억하며 파리의 밤, 모두 함께 모여 있던 그 때를" 되뇔 때면 알지 못하는 한 존재에 대한 종()의 우애를 느끼게 된다.

 

 

그림 속 낙서의 내용은 무엇일까? 기 드보르의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154쪽 부분 발췌

 


한편 자신의 삶 전체에 의심할 여지없이 영향을 끼친 것이 일찍이 터득한 술 마시는 버릇이었음을, 글쓰기란 흔치않은 행위로 남아야 했기에 "최고의 글을 발견해내기까지 오랫동안 술을 마셔야 했기 때문(48)"이라고 능청스런 변명을 담백하게 쏟아내기도 한다. 또한 그가 사회적 약자들, - 직업, 기술, 학문적 결핍을 지닌 자들, 인종적 소외자들, 성적 약자들 등 - 경계 밖에 선 자들과 함께 위선 가득한 세계의 안녕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자로서 행위 할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발견하게도 된다. 일례로 시인 '뮈세'를 경멸하며 그의 경솔하기 짝이 없는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는가/ 가슴이 까무잡잡한 안달루시아 여인을."이라 쓴 시에 "내가 어떻게 오는지 보세요.( Mira camo venggo yo)"라며 답한다. 아마도 바로 너희들 같은 추악한 위선자들이 만들어낸 것이지 않는가? 라는 혐오와 적대의 변이었을 것이다.

 

"전쟁을 지휘하면서 감당해야 했던 고통과 좌절은 계산으로 따질 수 없는 정도다." - 80

 

유독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귀감으로 한 소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데, 68혁명을 비롯한 크고 작은 봉기에서의 실패와 좌절에 대한 복기가 마음을 어지럽혔던 것 같다. 체포와 감금을 피해 상황 인터내셔널의 주역인 '라울 바네겜'의 오베르뉴 숲 깊숙한 집에서 머물던 풍경의 묘사에는 혁명 전선의 향수가 물씬 배어난다.

 

폭풍우 몰아치는 가운데 어디로 내려쳤는지 볼 수도 없는 번개 빛의 경이로운 순간을 '영원한 섬광'의 인상으로 기억한다. 자신들의 혁명에 대한 자부심의 찬사 아니었을까? 바람의 충격을 맨 앞에서 막아내는 나무들, 서로 의지하며 바람에 맞서는 나무들의 전경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동지들의 끈끈한 연대와 함께 기분 좋고 인상적인 고독의 나날을 형상화한다.

 

1972522일자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기 드보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기도 한다. "스펙타클의 사회저자는 늘 이목을 끌지 않으면서 반박할 수 없는 우두머리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서왔다....체제의 전복을 준비하는...(70)", 상황주의란 소비자본주의적 일상공간을 진정한 혁명적 실천의 장으로 만들어내려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표상과 관조의 세계에 매몰된 자본주의 물신세계가 빚어내는 항구적인 경제적 속박에서 휘청거리는 세계에 맞섰던 인간의 꾸밈없는 기록을 읽고 세월과 함께 변해가는 그의 사진들, 자료들을 읽다보면 왜 나는 행동하지 못하는가라는 느닷없는 자문을 하게 된다. 천천히 그의 관련 저서인 스펙타클의 사회를 떠올리며, 혹은 철학자 '강신주의 정치철학에서 발견하고 해석한 기 드보르를 염두에 두고 읽어나가면 훨씬 밀도 높은 감응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회고록은 1권과 2권으로 구성되어있다. 1권은 문자 그대로 서술로 된 회고록이며, 2권은 도상으로 된 증거 기록이라 할 수 있다. 3권도 있었으나 그가 불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94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참 고 1 '스펙타클'이란 문자 그대로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볼거리, 쇼를 의미한다. 그런데 오늘의 강력해진 자본주의는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를 사람들에게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이라면 반드시 볼 수밖에 없도록 하는 마력, 혹은 마력을 가진 것이다. 이를테면 사막이 아니더라도 사막이라 믿을 수 있게만 한다면 물 없이 살아 갈 수 없다는 갈증을 만들어내 생수를 사도록 만드는 것이 곧 스펙타클이다. 출처: 강신주 구경꾼 VS 주체'정치철학 1' 102~151쪽 내용 중 변조작성

 

참 고 2 사진 속 낙서 내용 : "최후의 관료가 최후의 자본가의 창자로 목을 매 죽는 날에야 비로소 인류는 행복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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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인가 헀더니 한 낮에는 마치 여름 날씨 같은 4, 어느 순간 여름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러한 외부 세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책에 대한 욕망은 다시금 자기 축적을 계속한다. '아니 에르노'가 욕망을 잠재우며 읽던 '시몬 드 보부아르'레 망다랭을 뒤적이다, 부재(不在)에 대한 치열한 응시를 담은 사진의 용도를 주어담는다.

 



사진은 쾌락을 위해 빠져나간 육체의 허물처럼, 그 잔존물인 옷가지, 구두, 악세사리의 자연스런 흐트러짐의 보존물이다. 유방암 치료 중이던 예순의 여인 '아니 에르노'와 연하의 연인 '마크 마리'의 공동의 작업물이다. 육체의 부재, 죽음의 징후들, 그 흔적물같은 사진을 찍고, 그를 확인하며 삶의 열정과 죽음의 공포에 대한 치열한 사유와 각축을 벌인다. 아마 리뷰로 남기게 될 것 같다.

 

이렇게 느닷없는 연상 작용으로 주어 모은 책들이 다시금 탑을 쌓아 올리기 시작한다. 치 쌓아 오르기 시작한 책의 제목을 보면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무관한 것들의 집합인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이것들은 분명 무언가의 자극들, 그 영향이 빚어낸 결과물들일 것이다. 물론 미디어 매체들이 뿜어내는 선전에 힘입은 것들도 있지만 어쨌거나 내 욕망의 산물들임에는 틀림없다.

 

'어빙 고프먼'자아 연출의 사회학은 벼르고 벼르던 책이다. 인간 관계의 다종 다양의 의례적 행위들에서 나타나는 선민의식의 치졸함이 내내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탓일 것이다. 상호작용 의례』를 읽고 난 후 한동안 잊었던 기억이 한 평범한 심리학 자기 계발서로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의 이 연극적 행위들, 인간 일상사에 내재된 미묘하고 흥미로운 탐사가 될 것 같다.

 

이 촉발은 여러 책으로 거듭 이어졌는데, 니체와 루소의 사유 중추에 대한 어떤 총체적 줄기를 내 독서의 중심 잡기를 위한 도움을 위해서 였다. '레지날드 J. 홀링데일'이 펴낸 니체'츠베탕 토도로프'덧없는 행복은 도덕성이라는 것을 다시금 살펴보는 기회가 되어주리라 믿으면서.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은 진리에 대한 내 믿음, 제한적 상대주의의 믿음을 확인하는 읽기라 할 수 있다. 단지 이성의 실패를 확인하는 읽기. 카너먼의 설득력있는 입증과 확인, 그리고 대중적 지지로 이어진 진실 추론에 직관의 영향을 더한 탐색을 아무튼 확인하고픈 마음에서 선택했다. 이렇게 정리하다보니 어떤 사유의 목소리들이 지닌 거대한 줄기를 정리하고 싶었던 소망의 실행이었던 것 같다


 '버넌 홀 2'서양문학 비평사또한 서구문학의 중추적 정신의 지향들을 정리한 책이다. 실재와 모방에 대한 문학 비평의 길고 긴, 그리고 공허하기까지 한 오만한 지성들의 싸움을 보며 자신들만의 건축물을 지으려는 어떤 힘을 향한 욕망에 대한 씁쓸함까지 느끼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시학은 이에 대한 참고 도서로, 그리고 플라톤의 실재와의 다름을 발견하기 위한 대조용 읽기였다.


구입한 소설 작품은 순전히 연상이 빚은 호기심의 이어짐일 뿐이다. '베르길리우스'아이네이스,' 매들린 밀러'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호머의 일리아드의 파생, 그 아류 작들이다. '어슐러 K. 르귄' 라비니아는 여성주의, 즉 배제된 진리의 복원 작업 일 것이다


알지 못했던 '이렌 네미롭스키'의 선집으로 기획된 6권 중 그 첫 번째 출간 작품인 무도회도 여성주의 작업과 그리 멀리 있는 소설이 아닐 것이다. 작가 사후에 수여된 르노도 상 유일의 수상작인 스윗 프랑세즈에 앞서 선보이는 맛보기에 가까운 네 편의 단편집이다. 표제작인 단편 무도회는 경박하기 그지없는 속물근성과 순수 욕망의 교차가 빛난다. 아마 오늘 중에 모두 읽어낼 듯 싶다. 요사이 시간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흐른다고 느껴진다. 어떤 생각의 중추를 건설해 내야 할텐데, 그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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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2-04-18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이 남기신 <식인 자본주의>를 읽어보다가 이 글에 인사를 남깁니다.

이 포스트 속 책 두께들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시선이 멈추네요. 무대로 연결되는 사회. 앞과 뒤, 그리고 무대 위까지, 이제 자기에 대한 탐구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 2022-04-18 18:42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드립니다, 저는 외려 그 어느 때보다 자기 비판적 성찰의 요구를 느낀답니다...
 
심리학이 불안에 답하다 - 감정을 다스리는 심리 수업
황양밍.장린린 지음, 권소현 옮김 / 미디어숲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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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살이가 매양 안녕하지만은 않다. 한결같이 아무 탈 없이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하지만은 않다는 얘기다. 이 안녕(安寧)하지 못한 감정의 표현을 아마 뭉뚱그려 불안(不安)이라 부르곤 한다. 편치 않고 조마조마하며 뒤숭숭한 감정에 휩싸이게 하여 삶의 정상성이 흔들리게 하는 감정이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여러 형태의 감정적 충돌, 직업적 회의와 무기력이 불러오는 앞날의 불투명성, 어떤 학과를 전공해야 할지 또는 어떤 일을 진정 좋아하는지 알 수 없는 정체감의 혼란이 야기하는 불안감, 선택의 후회로 인한 상실감 등 우리들의 삶에서 안정감을 빼앗는 양상들로 세상이 꽉 차 있는 듯 여겨지기까지 한다. 이 책은 이렇듯 삶에서 우리들의 내면을 괴롭히는 불안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감정, 선택, 성장, 직업, 관계’, 5개의 장(lesson)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조언한다.

 

이 세상에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불안해야 한다.” - 하이데거, 본문 20

 

그런데 하이데거의 말처럼 불안의 감정은 꼭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만일 매일이 안녕한 안정 상태라면 이 지대로부터 뛰쳐나갈 기회를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 즉 성장의 기회가 없는 안일의 건조함이 될지도 모른다. 결국 불안을 우리가 이해하는 내적 태도와 이것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곧 삶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불안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내면, 감정적 태도이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온 세상이 못으로 보인다.’고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느낌으로 세상을 식별한다는 얘기다. 사실 감정의 발생이란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외부적 요인이 아니기에 자신이 관리할 여지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우선 감정 관리의 전제는 감정을 판별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57)”고 말한다. 판별, 표현 할 수 있으려면 감정의 언어(어휘)가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실제 감정 능력이 높은 사람은 감정 개념을 많이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언제 어떤 개념을 사용해야 하는지도 안다고 한다. 감정을 표현할 다양한 어휘를 모르는데 어떻게 표현 할 수 있겠는가. 일례로 즐겁다는 느낌을 표현하는 어휘도 무궁무진하다. ‘미치도록 기쁘다’, ‘희열을 느낀다’, ‘고무적이다등등. 감정의 어휘를 더 많이 알수록 대뇌는 더 유연하게 행동을 예견하고 판단하여 삶의 문제에 더 잘 대처한다니 소홀히 취급할 조언이 아니다.

 

프랑스에는 라펠 두 비드(L'appelduvide)’라는 어휘가 있다고 한다. 갑자기 대뇌가 통제당하는 느낌,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충동에 휘청거릴 정도로 힘이 빠지는 기분을 표현한 단어라 한다. 이 감정을 명쾌하게 표현하는 사람은 원인을 통제할 수 있지만 모르는 이에게는 관리 가능한 감정이 아닐 것이다. 물론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이 감정 어휘 소유의 증가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 의심의 혼란스러움과 같이 다양한 원인이 있으며 이러한 다종의 요인들에 따른 감정 조절 능력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고 있지만 내게 어휘의 문제는 감정관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뷔리당의 당나귀(Buridan's ass)

 

우리의 의지력에는 스스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한다. 우리들의 많은 계획이 금세 흐지부지 되기 일쑤다. 눈앞의 즐거움과 편함, 익숙함에 장기적 이익을 포기하곤 낙담하는 일이 반복되곤 한다. 또는 욕망을 유혹하는 두 갈래의 선택에서 이도 저도 선택지 못하다가 모두 놓치고 씁쓸한 후회에 휩싸이기도 한다. ‘뷔리당의 당나귀 이 같이 선택과 결정에 장애를 보이다 낭패를 보는 현상을 건초더미와 물통을 두고 오도 가도 못하다 죽은 당나귀의 우화를 빌린 심리 법칙의 이름이다.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우리 마음에는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자가 없(94)”다고 말한다. 때문에 혼자 꿍꿍 앓지 말라는 것이다. 친구, 선배, 전문가등 외부의 도움을 활용하여 결정 장애 등 자신의 감정 통제력을 높이도록 하라고 조언한다. 더불어 일종의 습관화 전략을 통해 자신의 실행의도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도록 강제하는 방법도 실행 해 볼 수 있다고 조언한다.

 

반사실적 사고(Counterfactual thinking)와 사회적 시계(Social clock)

 

무릇 삶이란 선택 과정의 연속이다. 때문에 선택을 후회하는 일로 지난 일에 대한 회한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때 그곳에 입학()지원서를 낼 것을, 또는 그(그녀)와 계속 만나서 결실을 이루었다면,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성과를 낼 수 있었을 텐데, 등등 상실의 후회가 만만치 않다. 이처럼 발생 가능성은 있었거나 있지만, 사실 발생하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 머릿속으로 가설의 상황을 만들고 현실과 비교하는 것을 반사실적 사고라 한다.

 

만일 이러한 사고를 하고 있다면 당장 그치라는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사실에 연연하며 감정을 소모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세상과 비교하기는 자존감을 훼손할 뿐 결코 상실감을 보상해주지 않는다.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면 이러한 느낌은 누구든 통제, 관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의 성장 감정을 해치는 것으로 사회적 시계라는 것이 있다. 문화 체제 안에서 사람들에게 관습이 된 인생의 주기에 따라, 나이 대마다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강요당함에 따라 발생하는 심리적 불편함이다. ‘네 나이면 이미 사회적 안정을 이루었어. 대체 무슨 생각이냐?’, ‘도대체 그 나이에 연애도 못하고, 결혼은 할 거야?’, 이러한 사회적 시계에 맞춘 외부의 소음들이 우리를 불편하고 불안하게 한다. 다시 말해 시차의 발생을 마치 무슨 큰 문제라도 되는 양 구속하려 드는 것에 덩달아 초조해지고 울화가 치밀게 된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다음의 정보에 위안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간 저마다는 작은 시계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조금 늦거나 이를 수도 있는. 더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지 보라는 것이다. 불혹이 되어 영국 유학을 하여 학위를 따내곤 대학교 교수가 되기도 하며, 육십 살 이순(耳順)이 되어서 불후의 소설을 써낸 문호로 각광받기도 하는 것이다. 대학 동기들 모두 취업 등 사회에 진출하여 작은 성취를 이뤘을 때 열패감을 안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이가 이 경험을 토대로 늦었지만 걸출한 사업을 일궈내기도 한다. 자기만의 적절한 시기를 가지면 된다. 사회적 시계에 맞추어 초조해 할 것 없다는 얘기다. 결코 나이가 심리적 관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만을 기억하자.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자기 정체감을 빨리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146쪽 부분 발췌

 

부딪쳐야 한다. 세상과 부딪치는 경험이라는 다양한 시도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준다.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싫어하는지, 무얼 잘하는지, 무엇에는 서툰지, 이것은 우리에게 변화나 갈등에 대처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마주하고 재배치할 능력의 저변이 되어준다. 정체감의 혼미나 유예 상태를 벗어나 정체감의 성취를 확인하는 자아인지는 삶에서 아주 중대한 우리네 밑천이다.

 

낙인찍기((Effect of labelling), 그리고 생각의 게으름

 

요즘 부쩍 혐오의 언어가 난폭하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사람에게 꼬리표를 붙여 이에 따라다니는 속성에 타자를 종속시켜 함부로 하려는 나쁜 의도이다. 사람을 대략적으로 판단하여 그에 걸 맞는 프레임을 씌워 범주(카테고리)화 하는 것을 꼬리표 붙이기, 일명 낙인찍기라 한다. 간혹 가까운 친구들끼리 친밀도를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은 긍정적 꼬리표라 할 수 있겠지만 꼬리표 붙이기는 대부분이 부정적 성향을 갖는다.

 

특히 MTBI라는 성격 규정짓기 놀음이 유행하며 타자를 마구 범주화하여 통제하려 든다. 혐오의 세상이 되다보니 너나할 것 없이 생각 없는 프레임 씌우기로 고통을 겪는 청년들이 발생한다. 결국 꼬리표는 대개 타인이 붙이기에 내가 통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통제 밖에 있는 것은 심리적 결단을 내려야한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단호히 거절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외쳐라. ‘It's not your business.(상관없어, 꺼져)'라고.

 

어쩌면 이렇게 일반화하면 항의의 목소리가 많겠지만 이렇듯 타인을 카테고리화 하려는 사람들, 꼬리표를 붙여 낙인을 찍으려는 자들은 대부분 생각의 게으름을 감추는 위선의 수단으로 이들을 활용하곤 한다. 타인을 진심으로 알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또한 알기 위해서는 많은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소용되는 데 이것을 하기가 싫은 것이고,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은 직장이나 조직 사회에서 가짜 부지런함으로 분주함을 보이곤 한다.


173쪽 부분 발췌


분주하지만 성과가 없는, 가짜의 부지런한 자신에 도취되어 스스로 노력하는 자라고 감동한다. 부자들, 기득권에 붙어 논리를 제공하는 말콤 그래드웰같은 이의 1만 시간 전문가 성공 법칙 같은 음모론적 허위의 말들은 거짓임이 판명되었듯이 늦은 시간 야근하며 마치 일 중독자처럼 보이려는 자들은 자신의 생각 게으름을 은폐하려는 교활함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의 게으름을 떨쳐내야 한다. 단지 오랜 시간 일을 한다고 전문가가 되는 것도,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노력과 성실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 사유가 따르는 성실, 부지런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생 셔터만 누른다고 사진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번 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 인간관계

 

꼭 직장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 오랜 세월 매달려 있을 때, 불현듯 몰려오는 의미의 상실과 허탈감, 무기력과 피로감으로 낙망하게 되곤 한다. 이러한 심리적 현상을 직업적 탈진 상태인 번 아웃이라 부른다. 다가 올 미래의 삶이 온통 흐리멍덩하고 불안하게 여겨진다. 감정적 쇠진으로 동료들, 친구들, 가족들과 친화성이 상실되어 느닷없는 짜증에 온통 사로잡힌다. 이것은 하는 일의 성과에도 영향을 미치고 끝없이 삶의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감정과 싸우지 말라고 한다. 소명과 가치의식을 찾지 못하면 이렇게 소진되는 감정적 에너지를 관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매일의 일상에 조금씩 변화를 주기 위한 작은 계획들을 세우고 변화를 주거나, 불가피하게 행하여야 할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는 경우, 이것과 좋아하는 것을 샌드위치 만들 듯 교대로 해보라는 것이다. 점진적인 탈출을 도모하며 궁극의 전환적 목표에 도전하라고 한다. 사실 말처럼 손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벗어나야 하지 않는가? 아주 조그마한 변화가 분명 우리를 다른 시선, 새로운 성장의 길로 이끌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삶에서 마주하는 무수한 불안의 요소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벗어나며, 건강하고 유쾌한 긍정적 삶의 세계로 이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어떤 진심의 목소리가 느껴지는 심리학적 도움의 언어로 채워져 있다고 해야겠다. 우리들 관계의 갈등은 타인의 무시와 감정을 격화시키는 언어로 출발한다. 경청하지 않거나 마음대로 상대를 정의하는 덮어씌우기식 언어처럼 타인에 대한 존중의 결여이다. 세대 간 충돌이라고 다르지 않다. 문화와 가치관에 대한 부인이란 존중의 상실이다. 우리의 내부가 아닌 외부인 사회와 정치적 불쾌함이 야기하는 불안적 요소를 도외시 할 수는 없지만 많은 감정들이 내적 통제로 이겨낼 수 있음을 우리들은 또한 알고 있다. 때문에 우리 인간의 사회적 성장에서부터 직업과 관계에 도사린 불안의 감정을 극복하고 대처 방법을 제시하는 이 진지한 심리적 조언서는 분명 삶의 길을 선택하는 데 귀중한 좌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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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사와 비난이 엇갈리는 비평이 공존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 Ada, or Ardor: A Family Chronicle(에이다, 또는 열정: 어느 가족 연대기), 이후 에이다로 표기함의 국내 번역판이 존재하지 않는 아쉬움, 혹은 미련 때문에 이 조잡한 잡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나보코프 작품에 대한 대중적 몰이해는 소아성애의 소재로만 읽히는, 다시 말해 오독만 난무 하는 Lolita;롤리타정도로만 기억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Pale Fire(창백한 불꽃이 번역 출간되면서 독자들의 나보코프 작품에 대한 지적 모험심을 한 단계 상승시켜주기도 했습니다. 사실 Pale Fire(창백한 불꽃은 문학적 단어 놀이랄 수 있는 애너그램(anagram)에서부터 다층적 서사, 극도의 조밀한 암시 등 매우 복잡한 글쓰기로 독자를 좌절의 지점에 내몰기까지 하는 아주 도발적인 복잡한 소설이었습니다. 롤리타 또한 단순한 비극적 사랑과 집착으로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성애에 대한 묘사를 읽는 사람들은 위선적 이중성을 보이곤 합니다. 즉 대상화해서 소비하려는 욕망에만 매몰되어 알고 있는 편협성에 기초한 말만 중얼거리죠. 나보코프는 대중들의 Lolita;롤리타를 소비하는, 즉 독해하는 방식을 보고 고통스러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에이다; AdaLolita;롤리타를 오해한 사람들의 무지를 조롱하기 위해 집필되었다고 하기까지 한답니다. ‘에이다근친상간이라는 위반된 금기를 소재로 하고 있거든요. 에이다의 묘사는 대중적 표현으로 하자면 수위가 높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에이다; Ada는 그 감상을 단순 명쾌하게 기술할 수 없을 만큼 독해의 장애물이 무척이나 많은 소설입니다. 일단 연대기 자체도 구조의 혼란을 정리 할 수 있어야 하고, 호흡이 긴 문장을 따라가며 집중을 놓지 않을 것이 강요됩니다. 역시 애너그램, 대체 역사, 다층적 내러티브와 소설의 배경인 ‘Anti-Tera(안티 테라)’ 등 우주 해설까지 그야말로 환각과 공상 아닌 공상을 오가는 상상으로 한 마디로 녹초가 되게 하는 난해하다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프랑스 작가 에릭 오르세나두 해 여름;Deux E'te's에서 나보코프의 에이다;Ada번역의 열기로 채워진 섬의 분위기를 묘사하며, 섬의 어디에나 색정의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中略) 향긋한 냄새로 미루어 근처 어디에선가 교접이 한바탕 벌어지고 있으려니 짐작하고 있었다.”고 전하기도 하듯이, 에이다;Ada는 아름답고 어떤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기술한다면 테라와 안티-테라로 불리는 쌍둥이 행성을 배경으로 한 천재 남매 사이의 뜨거운 사랑에 얽힌 해설사라 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거주하는 세계는 안티-테라이지만 이들은 테라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죠. 에이다와 밴 빈이 주역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적 연대는 대략 19세기 후반인 1884년이 소설적 사건의 시기이고, 이들 주인공은 안티-테라라는 세계에서 극도의 부를 축적한 귀족의 신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실 두 남녀의 사랑의 불꽃을 위한 시간을 초월한 투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우주의 다차원 공간을 설명하는 물리학의 브레인(brane; )이론을 토대로 한 4차원의 갇힌 브레인의 상상을 통해 새로운 관찰자적 시점을 생각하게 하며, 무수한 학문적, 정치적, 과학적 제재들로 인해 복잡다단하게 설계된 퍼즐처럼 산개(散開된 장면들과 대사들을 맞추는 작업을 요구합니다. 어쩌면 제임스 조이스의 반향(反響)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19세기의 러시아 소설도 떠올리게 하는 정말 기이한 감응에 빠져들게 하는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가 혼용되어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단어 놀음까지 더해져 어학 역량이 천박한 사람인 저에게 이 작품의 이해는 한계를 가지게 합니다. 나보코프 문학의 관문이기도 한 문학적 언어 놀음과 퍼즐로 가득 찬 이 작품의 국내 번역을 기대하는 바람이 간절해집니다. 나보코프의 공식 완전판으로 불리는 단편 전집의 발간에 즈음한 독자의 아쉬움의 변()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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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닉
아니 에르노 지음, 조용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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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온통 불안정, 불균형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소란스러운 충동이 끊임없이 폭발을 부른다. 그러나 끊임없는 폭발에도 불구하고

충동은 진정되지 않는다.” - 조르주 바타유 , 에로티즘267, 민음사

 

번역된 제목 탐닉은 드러난 욕망의 실현인 적나라한 섹스의 묘사, 다시 말해 비본질적인 표면에 불과하다. 어쩌면 원제인 ‘se perdre'(상실)이 이 책 집필의 진정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작품의 시작에 앞서 아니 에르노는 이 책은 일종의 내적 필요에 의해 이 일기장을 공개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13)”고 밝히고 있으며, 아직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한 동일한 상실, 오직 글을 통해서만 그것을 진정으로 밝혀낼 수 있을 것(160)”이라고 쓰고 있듯이 욕망을 향한 끊임없는 기다림, 그 공허의 불안과 고통의 문제를 들여다보려는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이 내적 필요에 의해 써진 일기, 이야기의 충동은 우리 존재가 육체와 시간 속에 있다는 인간적 진실에 대응하기 위한 본능적 시도라는 피터 브룩스가 지적한 성애(性愛)와 앎을 향한 충동으로서 글쓰기의 밀접성의 전형적 실례로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은 꿈을 꾸고, 욕망을 그대로 옮기며, 해석하여 자신을 인간 주체로 구성하여 인식의 변화와 확장을 통해 단절된 욕망을 대신하여 삶의 충일함을 지속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보여 지기 때문이다.

 

이 지극히 사적인 일기의 내용은 프랑스 주재 소련 외교관인 35세의 매끈한 남성 S와의 14개월 남짓에 걸친 광적이기까지 한 성적 탐닉의 시간들과 이 기다림의 시간이 가져오는 질투와 불신을 오가는 고통, 그리고 관계 중단의 걱정, 욕망하는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게 될 때 다가올 예견된 열정의 단절에 대한 불안의 반복된 날것의 기록일 뿐이다. 그래서 이 단순하고 지루하게 반복된 내용의 연속, 그 어떠한 조작도 보탬도 없는 일기는 인간의 적나라한 내적 삶, 욕구와 열정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는 어떤 종교적이기까지 한 양상을 발견케 한다.

 

48세의 여자는 S와의 섹스를 끊임없이 갈망한다. S와 격렬한 육체적 결합의 시간은 오직 S'아니(Annie)'를 찾을 때 이루어진다. 그와 사랑을 나누는 함께하는 몇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그의 방문을 예고하는 전화를 기다리는 공허한 시간만이 지속된다. 이 기다림의 시간은 여자에게 끔찍함, 심리적으로 텅비고 울고 싶을 정도의 충족되지 않는 열정이 가져오는 고통이다. 이 욕망에 사로잡힌 여자는 자기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불안, 그가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방황한다.

 

여자의 모든 행위는 S로 하여금 계속하여 자신을 욕망케 하기 위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고급 원피스, 명품 백, 화장과 미장원 그리고 남자를 위한 고가의 선물, 그가 좋아하는 담배와 위스키, 대통령과의 만찬 참여와 같은 자신의 명예를 통한 S의 허영심 충족에 이르기까지 여자의 모든 몸짓은 다른 육체와의 결합 속에 나타났다가 곧바로 사라져버리는 굉장한 어떤 것에 대한 복종(또는 추구)(203)”이다. 그러나 이 충동과 끊임없는 폭발에도 불구하고 욕망은 진정되지 않는다. 다시금 반복되는 불안정과 불균형의 시달림, 이 열병은 그저 휩쓸리고 짓밟히는 것 이외에 어떠한 대안도 불가능하게 한다.


 



극도의 괴로움도 무릅쓰는 낭비, 견딜 수 없는 극도의 괴로움을 무릅쓴 극한 상황에서의 낭비를 간절히 욕구하는 일기 주인공의 행위들은 마치 죽음의 충동과도 닮아있다. 나의 경이롭고도 무서운 욕망과 죽음, 그리고 글쓰기의 근원이었다는 사실(13)”이었음을 자신에게 확인하는 문장은 이러한 생각을 확신시켜준다. 남자가 언제 자신을 찾을지를, 즉 욕망이 유예된 시간에 일기를 쓰며 여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다시 기다림과 열망이 가득 넘친다. 글은 욕망을 유지하게 한다.(112)”. 즉 글쓰기는 지체된 육체의 욕망을 대체하는 욕망의 실현이다.

 

이 욕망은 S와의 섹스에서 보다 완벽한 육체의 결합, 쾌락의 경계를 넓혀나가려는 시도들로 나타난다. 포르노 영화를 보고 사랑의 기교를 말하는 책을 읽으며 다양한 체위와 침대, 소파, 서재라는 장소에 이르기까지 에로티즘의 완벽 추구를 위한 삶으로 점철되어 있다. 오직 육체의 탐닉, 쾌락 추구이외에는 여자에게 아무런 의미조차도 지니지 못한다. S와 몸을 섞던 기억이 그녀에게서 떠나지 못하도록 유지하는 혼신을 기울인 노력만으로 삶을 채우고 있다. 사라져버릴 열정. 이 정체된 삶에서 아무것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160)”라는 문장처럼 글쓰기는 욕망의 열정을 내면에 가두는 작업이다.

 

S의 프랑스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임기를 마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 이것은 일기의 주인공에게 절박한 공포의 다름 아니다. 그녀의 욕망 추구를 가능케 하던 대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비가 오고 무거운 날씨. 이곳, 피렌체에서 죽을까봐 두려워진다. 더 이상 S를 보지 못할까봐 두렵고, 갑자기 모스크바로 떠났을지도 모른다.(234)” 이 불안은 번민과 눈물이 목구멍에 차오를 만큼의 절망과 광적인 고통을 야기한다. 여자는 이러한 번민의 순간에 브론스키의 사랑에 대한 불안으로 갈등하는 안나 카레니나에 자신을 대입한다.

 

조르주 바타유가 말했던가? 에로티즘은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불균형이며, 필연적으로 자신의 상실을 요구한다고 했듯이 이것은 이중의 의미로 여자를 존재적 물음에 빠뜨린다. S의 상실, 삶의 의미로서 사라져버리는 쾌락(욕망), 즉 욕망의 부재인 죽음으로서. 사회적 통념을 박살내는 이 열정적이고 격렬한 사랑의 시간에 대한 기록은 죽음이 있는 것처럼 사랑하고 글을 썼다.’는 작가의 말처럼 결코 천박하고 음란한 노출의 뻔뻔한 기록이 아니라,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도록 하는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탐구의 글쓰기라 할 것이다.

 

아마 화자로써 써내려갔던 자신의 일기를 이렇게 출간한 것은 자신이 청자(독자)가 되어 화자의 욕망을 들여다 보려는 전이(轉移)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의도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육체적 충동에 대한 이야기가 문학적 걸작으로 읽히는 이유는 아마도 감정의 진솔한 드러냄, 그 표현의 순수한 아름다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불연속적 개체인 인간은 항시 연속적 합일을 희구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지배하는 이 연속적 합일을 향한 충동에 시달리는 것이 또한 인간의 불가피한 삶의 형식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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