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 열린책들 세계문학 255
알베르 카뮈 지음, 박언주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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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실존은 굴욕적이다." -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에서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간의 대면에서 태어난다. (...)

비합리성, 인간의 향수, 그리고 이 둘의 대면에서..." - 47쪽에서

 

산다는 것은 진정 쉽지 않다. 그럼에도 살아가고 있다. 어떤 순간, 산다는 것의 이 습관같은 삶에 진저리 처질 때가 있다. 일상의 하찮음, 삶의 의미 부재, 고통의 무용함 등이 육신을 훑고 지나 갈 때면 마치 낯선 곳에 멍하니 서 있는 듯한 자신에 흠칫 놀라곤 한다. 삶의 유한함이 몰고 온 ''라는 개체와 이 세계의 불화(不和), 그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 가슴 깊이 밀고 들어오는 느낌에 전율한다. 세계에 대한 이러한 공허와 분노가 치밀어 두리번거리며 방황하는 정신, 아니 의지를 다스리려 할 때면 카뮈의 이 에세이를 집어 들고 대체 어떻게  "희망의 전적인 부재, 계속적인 거부, 그리고 의식적인 불만을 전제"하면서 삶에 열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지를 반복하며 곱씹게 된다.

 

세계는 전혀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세계는 내 이해의 바깥에 있다. 카뮈는 말한다.  "만약 인간 사고에 대한 단 하나의 유의미한 역사를 써야 한다면, 그것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후회와 무기력의 역사"일 것이라고. 인간의 몸인 내 육신은 죽음 앞에서 뒷걸음질 치지만 육체는 돌이킬 수 없는 전진을 계속하고 있다. 이 모순, 그럼에도 이 한계를 회피하기 위해 희망을, 삶을 초월하고 이상화하며, 혹은 삶을 배반하는 위대한 이념, 내세에 대한 희망과 같은 속임수에 내 삶을 걸지 못한다.

 

그래서 해독 불가능하고 한계가 정해져있는 세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하나의 원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 세계와 나는 불화한다. 그러니 선택지는 명확하다. 벗어나거나 버티는 것, 자살하거나 아니면 희망 없는 상태에서 고집스럽게 버텨내며 살아가는 것 중에서 골라야 한다. 나는 습관처럼 살고 있다. 매번 이 끔찍한 균열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는 원상복귀하고 마는 것이다. 여전히 나와 세계는 적의로 가득하다. 이 부조리를 끌어안고, 공허한 미래의 약속인 희망이라는 어휘를 떠나보낸 나는 '죽음의 초대를 삶의 원칙으로' 바꾸어 놓은 카뮈의 반항, 열정, 자유의 정신세계를 다시금 펼쳐들고 밑줄 그으며 문장을 거듭 거듭 읽어본다.

 

부조리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명철한 이성"임을 모르지 않지만, 동경이나 희구, 희망이라는 미래는 내게 없음을 알면서 현실, 바로 지금의 삶에 고집스레 열정을 쏟아내는, 그 자체로 행복을 견인하는 것은 끊임없는 비약과 구원으로의 도피, 유혹을 낳는다. 카뮈가 그려낸 '리외'라는 인물을 안다. 어찌할 수 없는 재앙,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직면했을 때, 그가 묵묵히 하나하나의 생명을 위해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안다. 온통 고통과 인내를 수반하는 자기 몫의 삶을 다하는 것, 아마 세계와 한 인간 삶의 간극인 부조리에 대한 인식을 지니며 명징한 자기 이해를 수행하는 숭고함으로 내게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아름다움과 용기, 지성을 아는 것이 곧 내 삶의 방식으로 전용되지 않는다. 공허와 습관을 반복하는 무기력을 끊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거대한 바위를 산비탈로 굴러 올리기를 반복해야하는 형벌을 수행하는 '시지프', 그의 모든 힘, 열정을 쏟아 부어도 아무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다. 인간 삶의 전형적인 모습일 것이다. 카뮈는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팽팽하게 긴장한 육체의 반복적인 노력의 행위에서 부조리한 인간의 위대한 열정을 발굴해 낸다.

 

산 정상으로 바위를 올려놓았을 때 비탈로 다시금 굴러 내려간다. 시지프는 굴러 올리기 위해 아래로 되돌아간다. 그때 순전히 '인간적인 확신'으로 돌보다 더 단단하고 강한 시지프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조건(인간 조건의 한계)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음을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은 가득 채워진다." 반항하는 인간, 인간 조건에 경멸을 보낼 수 있을 때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없음을, 그것이 삶의 행복일 수 있음을 상상해낸다.

 

한편으로 부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열광하는 것, 이것이 부조리한 창조자 앞에 펼쳐진 길이라고 한다. 허무에 자기만의 색깔을 입힐 수 있는 것, 자신의 조건에 맞서는 끈질긴 반항과 성과 없는 노력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집요함, 이것이 인간의 유일한 위엄임을 깊이 마음에 새겨 넣는다. 진실의 한계에 대한 정확한 판단, 그 절도와 힘을 생각해 본다. 카프카 (Das Schloss)의 인물 '측량기사 K'의 죽음을 깨우쳐 가는 무시무시한 배움의 과정을 삶이라 부르는 그 감동 어린 얼굴을 그려보게 본다. 모순 속에서 믿음을 길어내는 그 의지로 충만한 인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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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팅 - 정신분석과 문학 무의식의 저널 Umbr(a)
알렌카 주판치치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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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결코 도달할 수 없을지 모르는 어떤 것으로의 통로이며, 주이상스를

기록하는 증상, 실재의 귀환을 위한 공간을 기록하고 열어주는 행위이다."

- 59쪽에서

 

 

이 책은 글쓰기가 불가피하게 노정하는 틈새, 그 결여를 통해 드러나는 '분리된 주체'로 맺어지는 "쓰기와 정신분석을 연결시키는 개념의 길을 닦는 개간작업"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글 혹은 문학의 문자가 재현해 내지 못하는 무엇이 있다. 바로 그 무엇이 봉합되지 못한 분리된 주체이며, 이것을 읽어내는 것이 정신분석이고, 이를 통해 실재와 조우를 가능케 하여 충실한 삶의 이해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담론이라 하겠다.

 

사실 이러한 연결 노력이 아니더라도 글쓰기, 특히 문학 작품이란 어떤 일관성과 이해를 원하는 본질적인 심리적 요구에 따라 사람들이 인식하고 작동시키는 정신과정이라는 점에 인식을 같이한다. 그럼에도 '정신분석적 독해''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무의식적 환상, 원초적 장면, 어린 시절 기억 등등', 작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서 풀어내는 "완전한 예상 가능성을 함축하는 지루하고 이론적으로 빈약한 환원적이고, 고작 정신분석 진리를 확증하는 데 이용될 뿐(110~111, 축약 발췌 인용)"이라고 비판되기도 한다. 이 책 라이팅: 정신분석과 문학에 대한 내 읽기는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겠다.

 

아마 이러한 비판에 대한 가장 치열한 논의가 진행된 글은 '-미셸 라바테'가 쓴 문학해석에 저항하는 문자: 라깡의 문학비평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신분석적 해석은 "텍스트의 고유성을 교조적으로 공식에 환원시키는 위험"이 있다고 비판한 '데리다'"상식의 심리에 기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텍스트에서 반복되는 기표들, 그 언어학적 결절점에 주목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라깡의 서로 다른 견해이다. -미셸은 우리가 텍스트를 읽는 가능한 방법으로서 다음과 같이 데리다를 반박한다. "아무도 일정한 텍스트의 요소들로 환원시키거나 번역하거나 축소시키지 않고 읽을 수 없"으며, "텍스트의 풍요로움이라는 순수성은 언제나 주제, 구조, 플롯이나 서사등과 같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델, 사례와 개념적 도구들이 필요한 것은 불가피한 것 아니겠는가라고 주장한다. 물론 기원과 가정의 결과처럼 환원적인 해석이 아닌 정신분석적 이해를 가지고서.

 

"문학은 구멍과 삭제로 만들어졌다." -126쪽에서

 

핵심은 이것일 것이다. 정신분석과 글쓰기 혹은 문학과의 연결지점, 즉 문자, 써진 글에서 읽어 낼 것이 무엇인가? 가 될 것 같다. 라깡은 "텍스트의 표면에 명시된 의도들의 핵심을 거스르면서 가능한 문자적으로 충실하게 읽"어야 한다고 했다. '캐서린 밀로'가 쓴 왜 작가인가는 이 사안의 적절한 답변으로 보인다. 드러나서는 안 될 자신의 욕망이 노출될 두려움으로 라깡에게 보내지 못한 엽서의 일화로 시작하여,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V. 스타인의 황홀경의 첫 장면, 이른바 '원초적 장면'이라 부를 수 있는 롤 스타인의 모습에서 일종의 근본적 부재를 읽어낸다. 그리곤 "그것은 부재 언어, 구멍 언어"라고, 다른 말들이 그 안에 묻혀 있는 구멍, 여기서 분리된 주체의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것, 그 욕망의 근원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재현 불가능한 '실재', 상징계와 상상계를 잇는 구멍과 삭제이지 않을까? 문학은 이처럼 정신분석과 이어진다는 것일 게다.

 

이 책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트레이시 맥널티'제약의 작동: 상징적 삶의 미학을 향하여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이 매력적으로 다가 온 첫 번째 이유는 성문법, 혹은 쓰기가 상징계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가설의 치밀한 입증 여정 때문이다. "모세의 일신종교-유대인의 십계명-가 근본적 부재와 결여를 도입했다."는 것, 즉 이전의 토템구조와 같은 상상적 권위와 동일시하거나 복종하는 것이 아닌, 즉 대타자의 결여된 중심을 통과해가야 할 것을 규정해 놓은 상징계의 제도로 나아갔다는 증명이다.

 

희생거부, 신성의 육화현신 금지와 같은 이 율령이 전능한 아버지, 즉 초자아적 성격을 비워 냄으로써 대타자의 논리적 장소를 텅 비게 했다는 것이며, 이는 욕망의 주체가 등장하는 공간을 열었다는 것이다. 신이 뒤로 물러남으로써 인간 주체의 충만한 등장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정신분석이 쓰기와 연결되어야 하는 필연적 성취가 아니겠는가라는 결정적 수긍의 지점이라 하겠다. 이것은 칸트의 '무한의 부정적 전시'로서의 쓰기에 닿아, 성문법(쓰기)이 상상계의 유혹에 저항하고 그 유혹이 권장하는 권력에의 복종을 거부하는, 이성적 능력의 자유로운 행사의 길을 열었음을 길어 올린다. 비로소 우리는 쓰기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스스로 고양시키는 초월 능력의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매혹의 둘째 이유는 실험 문학집단 울리포(잠재적 문학의 작업실)의 형식적 강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쓰기를 통해, "엄격하게 형식적인 (실험적)강제가 갖는 해방적 잠재성"의 차원에 대한 발굴로서, "문자의 실천에 내포된 창조적 강제와의 투쟁 속에서 모색하고 유지되는 주체의 출현"에 대한 발견이라 하겠다. 결국 욕망과 자유의 행사 속에서 주체를 유지시키려는 이 야심적 실험에서 인간 삶의 충만한 다양성을 헤아릴 수 있음의 새로운 이해의 획득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마도 수동적 저항의 역설이라 할 수 있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특이하고 기묘한 문장 하나를 통해 "가시적이고 실감나게 묘사 가능한 아무것도 없지만 뭔가가 일어난" , 그것 본원의 줄기를 따라감으로써, 이 불확정성과 미결정성의 문자가 야기하는 제3의 영역, 그 상징적 공간을 열어 의미의 본질에 이르게 하는 '알렌카 주판치치'가 쓴 바틀비의 자리는 정신분석과 문학의 연결을 총합적으로 아우르는 정신분석비평의 멋진 보기라 해도 될 것 같다.

 

우리 인간들은 글을 통해 실재를 쫓으려하지만, 이 재현은 필연적으로 결여를 낳는다. 바로 이 결여, 틈새가 잔여물로 남겨진 실재를, 상징계를 통해 발굴하게 한다. 정신분석은 문학, 그 무의식의 주체인 실재를, 주체의 고유성을 식별하는 틈새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포착할 수 없는 사물의 현전을 환기시키고 발언 불가능한 그 실재를. 정신분석을 통해 우리는 문학의 공간, 언어의 순수성을 약속하는 공간을 배우게 된다. 두고두고 참조할 문학 비평서이자 정신분석이론의 실천적 기능을 다원적으로 이해케 하는 저술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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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사고의 전환 - 상상, 감정, 직관을 활용하는 건설적 사고
바바라 J. 세이어베이컨 지음, 김아영 옮김 / 글로벌콘텐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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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는 단 한 번도 보편적 기준을 가져 본 적이 없다.” - 87

 

 

옳다고 믿고 있는 것들, 다시 말해 도덕적 진리라 부르는 것에서부터 일상 속에서 행하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올바름이라는 믿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은 자기 신념에 대해 어떤 보편적이고 이성적 기준에 의해 참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인식 주체로서 본질, 또는 보편성이라는 것이 자신의 내부에 존재한다는 전제와, 이를 논리적 추론이라는 이성을 통해 타당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구 유럽 사회의 뿌리 깊은 철학적 사유, 이성-논리에 입각한 비판적 사고는 편견 없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신념이라는 믿음이 깔려있다. 서유럽 사상의 이러한 이미지를 대표하는 것이 로댕(Rodin)<생각하는 사람>이다. 사회 공동체와는 무관하게 홀로 고독하게 독립된 개인의 논리적 추론, 관념적 사유 행위를 통해 진실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과연 이 사유가 도달한 최종적 선택이 보편적 진실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일까?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이러한 지배적인 지식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전통적인 비판적 사고란 어떤 논증을 비판하고 정당성을 제시하고 무엇이 좋은 추론인지 혹은 옳은 답변인지를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이성-논리 중심의 사고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이 주류 세계의 비판적 사고 모델은 각 개인을 인식론적 주체로 설명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영혼에 귀를 기울이면 알고 있는 것이 기억에서 나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근거 없는 환상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결코 올바른 앎, 보편적 진실이란 것은 독자적 개인의 관조, 논리적 추론이라는 도구만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지식이 우리 일상과 분리되어 그 자체로 별스럽게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바라 세이어-베이컨은 지식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서구 유럽의 재력 있는 백인 남성들이 만들어 낸 신화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 책은 바로 이렇듯 역사적으로 보편적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잘못된 가정에 기반한 진리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깨어나 진리에 대한 인식 방법들을 이성-논리라는 도구 뿐 아니라 직관, 감정, 상상 등을 병렬적으로 인식하는 건설적 사고로 전환키 위해 전통적인 비판적 사고가 지니는 우려 지점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하여 현대 실용주의 및 비판 철학, 젠더, 차이, 해체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여성주의 철학을 통해 독단적 인식 주체로부터 탈피하여, 목소리의 통합, 자아의 재발견, 개인적 지식과 전문적 지식의 통합을 시도하는 사회적 관계 내의 인간으로서 앎을 구축하는 건설적 사고 이론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여, 당신은 당신이 전혀 모르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입니까?”

- ‘메논의 역설’, 59

 

이 문장은 미덕이 무엇인가 고민하자는 소크라테스의 제안에 메논이 한 질문이다. 미덕이 무엇인지 자신은 모른다고 주장한 소크라테스의 선언에 대한 모순의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모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이 독단적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 <대화>편을 쓴 플라톤이 인간에게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믿음에 기초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즉 영혼불멸의 지식이 실재하기에 그 정보를 퍼 올리기만 하는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바탕에 있다. 인식 주체가 타인과 관계를 지닌 사회적 존재임을 무시한 독자적 존재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지식이란 인간 영혼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상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발상이다. 이것이 오늘의 비판적 사고의 뿌리이다.

 

아마 <대화>편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소크라테스가 타인이 논리에 맞설 기회를 박탈한 채 진행하는 자기 논리의 선택만이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배타적 양자택일의 논리주의라는 이분법적 관점, 이와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이라는 언어학적 논리 형식 또한 권위에 의존한 보편적 본질의 개인 내부 탐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인간을 다양한 관계 속에 있는 존재라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더구나 인간의 오류 가능성이나 한계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지식은 일상과 분리되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모든 사람들은 특정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 내재한다. 특정 방식으로만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특정 몸 안에 체화된, 실수 할 수 있으며 한계가 있는 존재들이다.”

- 벤하비브(Benhabib), 89

 

 

이것은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물음을 제기한다. 우리가 세계를 보아 아는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정말 그 대상의 실재인가라는 의문이다. 칸트, 쇼펜하우어는 우리는 실재를 알 수 없다고 하며 표상과 실재의 간극을 말하였다. 즉 칸트의 물자체나,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진실은 현상의 세계와 다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책의 저자인 세이어-베이컨 인간의 의식 밖에 분리되어 존재하는 실재에 대한 견해를 옹호하지 않는(334)” 실용주의자임을 선언한다.

 

관념과 사물, 의식과 현실, 주체와 객체 사이에 신뢰할만한 연관성이 없는 관념의 베일에 갇힌 완전한 주관주의를 지양(止揚)하고, 개념은 생동적 삶과 관련되어 상상 가능한 것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보이는 일련의 과정(94)”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써 현실의 관점에 의지하고, 인간 행동의 기능으로써 진리의 관점에 의지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측면 탓에 실용주의는 상대주의로 진리에 무심함이라 비난되곤 하지만, 퍼스, 제임스, 듀이로 대표되는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이를 반박한다.

 

진리란 실제 상황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관계일 뿐(104)”이라는 주장처럼 반박 불가능한 불변의 절대적 진리란 것은 존재치 않는다는 것이. 진리란 무엇이 우리를 이끄는 방법으로 적절하지, 무엇이 경험적 요구의 집합과 결합하여 어느 것도 빠지지 않는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되는지 개연성을 점검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절대주의의 관점은 오류 가능성과 과학적 우월성, 인식론적 주관주의와 같은 독단적이고 배타적이며 차별적인 것이라 비판한다. 아마 퍼스(Peirce)’의 데카르트 보편적 회의론 비판은 주관주의적 절대주의, 즉 비판적 사고에 대한 유효한 반박이 될 것이다. 회의적으로 여긴다는 것은 의심할 무엇인가를 상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선 믿음을 전제한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이미 믿음이 전제된 것을 회의하는 이 같은 모순의 관념론은 결국 자아와 세계에 대한 논의를 신에 의지하는 것, 혹은 불가지로 끝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건설적 사고의 추구라는 사회적 관계를 지닌 다양한 인간의 지식을 토대로 하는 지식은 진리라는 개념어 대신에 보증된 주장 가능성이라는 잠재성을 염두에 둔 용어를 주장한다. 특정 탐구에 대한 모든 특정 결론들이 지속적으로 재 논의되도록 함으로써, 그것이 연구의 대상이 되는 분야의 일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자기수정적 절차를 통해서야만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주장은 잠정적이며 수정 가능해야 할 것이고, 진리에 대한 모든 주장 또한 보증된 주장 가능성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현재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 진리인지 확인할 수 없다. 우리는 신의 시선으로 진리를 탐독할 수 없다. 진리를 확신할 수 있는 독단적인 인식적 행위 주체가 존재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 109

 

나는 지식의 이러한 유동적이고 유연하며 적응이 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관점에 동의한다. 오늘의 비판적 사고란 학문적 공동체, 전문가로 구성된 교육받은 엘리트 공동체의 이성적 탐구만이 진실추구 담론 세계를 지배하는 배타성이 무수한 목소리들의 통합을 간과하여 상호 의존적 민주적 공동체의 의지를 반영치 못하는 인식형태를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오늘 한국 사회의 정치, 문화적 극한 갈등과 혐오는 다양한 관점들을 면밀히 검토하도록 장려하거나 자신의 논점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도록 가르치지 않는 한국식 교육의 조잡함 때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무오류의 절대적 독단론이 판치는 아집의 인간들만이 양육되는 이 땅의 현실은 반성적 사고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랄 수 있다.

 

교육 철학자 이 지적하듯이 지적 겸손, 판단의 보류, 지적 용기와 선의, 성실성, 지적 인내. 자신감 신장(135)”은 반성적 사고를 위해 갖추어야 할 기질이자 덕목이다. 우리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며 보수적이고 비이성적이다. 따라서 반성적 사고라는 어려움을 느끼거나 당혹스럽거나 의심을 품을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행동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지적한 시스템 2의 뇌를 작동시키는, 즉 노력이 요구되는 사유 작업을 많은 인간이 알지 못한다. 진리는 저절로 논리 구조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사람들의 무수한 관점과 필요와 추구하는 맥락을 바탕으로 상황을 이해하려는 능동적인 노력으로부터 발견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비판 사고를 건설적 사고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는 이 책의 논지가 실용주의적, 제한적 상대주의적이며, 관계적 인식론, 감정과 배려, 직관이라는 다양한 사고의 도구를 말하는 것은 이성적 추론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결론을 도출하고자 하는 독립된 개인들에 초점을 맞춘 비판적 사고의 한계와 오류가능성을 직시하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사회 공동체에 의해 내재되고 체화된 사회적 존재임을 벗어날 수 없다.

 

건설적 사고 이론은 앎의 주체를 다양한 도구를 활용하여 지식을 구축하는 내재되고 체화된 사회적 존재로 상정한다. 우리의 지식은 사회적 교류와 이성은 물론 직관, 감정, 상상 등 다양한 앎의 도구를 통해 구축되는 것이다. 독립 주체의 주관적 지식, 이 배타적인 비판 사고는 너무도 많은 견해들을 배제시키고 소외시킨다. 정신의 우월성을 신봉하는 논리적 이성에 대한 독단적 믿음은 권위를 토대로 한다. 이것은 타자에게 강요하는 힘으로 발현되곤 한다. 여기에는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한 배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재되고 체화된 존재인 인간의 추론 능력에 의해서 보증된 것들이 전지전능한 진리라는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권위에 의해 무언가를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잘못될 가능성이 치솟는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젠더와 차이, 해체 이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여성주의적 관점 또한 건설적 사고의 도구들인 직관, 감정, 상상, 배려 등의 지식 참여를 당위성을 입증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일례로 정신분석학자인 여성주의 언어철학자인 이리가레이(Iragaray. L.)’ 여성이 됨으로써 스스로 담론의 객체로 종속시키는 것, 남성은 누군가를 대상화하고, 이들 대상에 반동함으로써 남성 자신을 공고히 해왔다는주장이나, 리치(Rich. A.), 버틀러(Butler. J.), 해러웨이 등 젠더 해체주의자들의 남녀의 젠더 성향을 이성애로 규정하는 것을 의심하거나 비판하지 않음을 비판(238)”하는 것은 이 세계의 주류 담론이 주장하는 주체 개념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배제되고 타자화 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에 대한 방법적 주체의 요구라 할 수 있다.

 

사실 해러웨이의 젠더 해체를 위한 사이보그를 활용한 성별화 착시에 대한 비판은 실용주의적 현실에 입각할 때 저자의 옹호에 모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교육철학자 보르도(Bordo)’의 지적처럼 실제 우리의 현실적 사회에서 젠더는 특수성과 위상을 지닌 필요한 범주라 할 수 있다. 해러웨이의 포스트모던적 몸의 형상에 대한 책임 거부는 우리의 신체를 더 이상 몸으로 여기기 어렵게 한다. 경계의 완화를 강조하는 형상변형체관점은 분명 젠더의 위상을 불분명하게 하고 제한적이고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며, 인간의 역사를 통해 자연적으로 부여받은 인격을 항상 모호하게 만든다.(245)”고 비판 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항상 어딘가에 위치하고 제약을 받는 존재이지 않은가?

왜 성별의 축()만을 해체하려 드는가?(Bordo)’ 비판에 있어서 항상 선택적 입장을 취하는 여성주의 관점의 비판은 인종과 계급과 관련한 논의를 담론세계에서 지워버려 세계의 무수한 제약들을 배제시키려는 독단이자 폭력이라 의심받기도 한다. 만약 인간 경험의 극단적 변이들을 충분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관점만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거의 모든 사회 비판이 방법론적으로 부정하고, 관념을 왜곡한다는 점에서 혐의가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 이것은 젠더를 해체하여 여성 혐오의 전통적인 남성 중심의 비판적 사고의 비판을 위해 다시금 차별의 폭력을 주장하는 것으로 오인될 이유가 될 수 있다.

 

물론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인종과 계급의 배제라는 차별을 지적한 로데(Lorde)기득권의 도구는 결코 기득권의 집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 그들은 결코 진정한 변화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는 주장도 있지만, 다르게 인식되는 우리 인간들의 표상에 대한 포용이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우리가 기준 또는 지식이라 여기는 것들은 오류 가능성을 항시 내재하며 제한적이고 맥락의 영향을 믿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남성 중심의 이성-논리에 의한 전통적인 비판적 사고의 오류 가능성과 한계를 넘어 이것의 편향 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교육 심리학적, 여성주의적 비판 이론들을 넘나들며 자기성찰과 자기비판, 그리고 타인의 관념과 견해를 수용할 수 있는 건설적 사고의 구축을 위한 빼어난 관계적 인식론에 대한 제언인 이 저술은 이성뿐 아니라 상상, 감정, 직관, 배려 등 또한 지식 형성의 당위적 도구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갈수록 나만이 진리라고 하는 편협함에 기초한 혐오와 갈등의 세계가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고루하며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관계 및 의사소통 기술, 직관과 감정에 전념하는 능력, 상상력의 발달과 추론 능력을 포괄하는 건설적 사고로 전환해야 할 터이다. 세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양식들과 공통점을 인식할 수 있는 주의력과 능력을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교육체제도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획일적인 정답 맞추기식 교육에서 타자와 공감을 가능케 하는 상상력과 감성을 자극하는 인지 능력의 확장을 위한 교육처럼 사고방식의 형성, 즉 마음 습관을 형성하는 사고의 장()으로서 변화하는 것이다. 건설적 사고는 담론의 세계에서 소외된 인간들을 비롯해 진리의 도구에서 배제된 감정과 직관, 상상까지 확장한 반성적, 비판적 사고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단지 현학적인 사유 도구의 확장을 위한 이론의 장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지식의 인식 주체로서 요구되는 자질, 즉 내적 모순과 모호함에 대한 관대함과 타자에 대한 애정과 공감의 관심이라는 능력을 요구하는 실천적 사유의 제언이다. 타인을 수용하고 자신을 비판한다는 것은 아주 고통스럽고 힘겨운 일임에 분명하지만, 각자의 다름에 대한 이해와 그에 요구되는 시간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안정적인 자아의식을 형성하기 위해서 우린 끊임없이 타자와 교류,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퀼팅비(quilting bee)의 은유를 통해 공동체라는 관계적 인식론을 토대로 한 건설적 사고에 대한 이 위대한 저술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결단코 필요한 앎에 대한 방법론적 모델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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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오이디푸스와 가족, 나는 아이가 아니다 가족특강 시리즈 3
신근영 지음 / 북튜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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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오늘 한국사회의 가족주의가 지닌 문제를 성찰하는 <가족특강> 시리즈의 세 째 권이다. 영화 기생충을 토대로 핵가족의 오직 소비와 화폐의 욕망만 내재화한 가족 이기주의의 자기파멸적 구조와 실체를 보여준 고미숙의 기생충과 가족에 이은 두 번째 읽기이다. 사회 구성원인 개개인의 삶의 태도와 양식이 만들어지는 그 근원 장소가 바로 '가족'이기에, 특히 '엄마-아버지-아이'라는 구조로 이뤄진, 근대에 이르러 새롭게 구성된 가족의 작동방식, 배치구조 등 그 성격을 탐사하는 것은 인간 개인과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근간이 된다.

 

미시적으로는 왜 오늘 한국 사람들은 사랑을 할 줄 모르는가, 왜 혼밥을 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곤혹스러워하는가, 더구나 "가족은 건드리지 마라, 다른 거 가지고 딴지 걸고 그러는 건 다 참지만, 가족은 안 된다."며 가족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고 선언하는가? 좀 거대 담론으로 나아가면 배타적 경쟁주의, 폐쇄적 이기주의에 의한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무 공감의 고착화, 나아가 자본주의의 무한 욕망이라는 불가능한 추구의 작동원에 가족주의가 놓여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이라 할 것이다.

 

1. 오이디푸스 가족 너머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안티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분열증 1를 저본(底本)으로 하여 오늘의 가족이 왜, "욕망의 배치가 구성되고 펼쳐지는 장소"인지, 그리고 이 욕망이 바로 자본주의가 굴러가게 되는 힘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이라는 비극적 신화인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인간의 억압된 무의식 세계를 설명하는 상징적 도구라 할 만큼 대중적인 소재이다. 이는 근친상간의 욕망을 포기해야만, 즉 자연 상태를 억압해서 극복해야만 비로소 문명인, 하나의 인간이 된다는 것이고, 결국 억압되고 포기된 근원적 욕망을 지닌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 프로이트가 본 무의식의 모습이다.

 

이것, 이 달성되지 못한 욕망을 우리는 결핍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자신 안에 어떤 결핍을 필연적으로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사실 이 결핍이란 것이 죽을 때까지 충족될 수 없는 것임은 포기된 욕망이 결코 달성될 수 없는 까닭이다.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모든 욕망의 출발지는 가족이고, 아이의 출발은 가족이다."라는 정리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오이디푸스적 무의식은 가족적 경험으로 작동되는 것이라는 프로이트를 넘어 '안티(Anti;)-오이디푸스'의 삶을 상상한다. "욕망이란 가족 경험으로 환원, 축소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비가족적으로 작동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삶의 기본 층위가 무의식이자 욕망이라는 프로이트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는 엄마, 아빠를 엄마와 아빠로 본 적이 없다."라며 무의식이 문명인인 인간의 전유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욕망-기계'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관점이다. 무의식이 가족적 경험 이전의 것이 됨으로써 욕망이 억압과 결핍의 언어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된다. 가족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근원지라는 오명을 벗어나 그 폐쇄적 이기심의 자기 파멸성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욕망을 '자아의 욕망'이나 '나의 욕망'과 같은 전체로서의 욕망을 거부하고 '부분대상', 즉 입의 욕망, 코의 욕망, 눈의 욕망과 같이 다종다양한 흐름인 '애벌레 자아'인 욕망-기계들의 작동으로 본다.

 




이 욕망-기계들, , , , , 항문, ...은 저마다의 끊임없는 활동, 곧 나름의 '생산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눈은 빛과 짝짓고, 코는 공기와 짝지어 숨을 쉬며, 몸 안에 모든 것들은 다 뭔가와 짝짓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짝짓기를 못하는 순간 그것을 죽음이라 한다. 이 말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나 아닌 다른 것과 짝짓기 하는 과정이고 이것이 욕망-기계라는 것이다. 욕망이란 이처럼 '결핍의 갈망이 아니라 생산의 욕구'라는 것이다.

 

이 짝짓기, 생산의 과정이 곧 생명의 원리, 혹은 존재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부분대상들이 다 탈각되고 오직 성기로 집중된 오이디푸스적 발달 단계는 욕망을 거세 콤플렉스로 축소시켜 탐욕, 무한 소비의 욕망을 정당화시키지만, 이 결핍 충족을 향한 욕망이 아니라 부분대상인 욕망-기계들의 생산과정으로 파악하게 되면, 바깥, 타자를 통해서만 자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자아, 가족의 열림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내 가족, 내 핏줄, 빗장을 걸어 잠근 문 안의 가족은 이러한 생명원리 측면에서 결코 바람직한 전략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주적 욕망을 가족적 경험으로 축소시켜 결핍에 시달리는 욕망으로 추락시킨 오이디푸스 가족, 바로 오늘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는 새로운 지향을 모색해야 할 당위성, 무한 욕망의 구렁텅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자본주의적 현실을 타개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2. '소파 위의 편집증자'에서 '분열자의 산책'으로

 

단순화해서 표현하자면 신경증이나 편집증은 에고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러한 자아의 욕망이 비대해져 그 충족되지 않는 결핍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을 양산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분열증은 애초 자아, 에고가 없는 사람들이기에 발산되고 해체되기에 갇혀 거대해진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소파 위의 편집증자란 저마다 짝짓기로 분주한 부분대상을 모두 탈각시키고 하나로 집중된 욕망의 탐닉자.

 

반면에 분열자란 부분 대상들, 욕망-기계들이 짝짓고 하나의 흐름에서 다른 흐름으로 마구 섞여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 마치 자연을 산책하는, 나도 너도 없는 그저 온 몸으로 햇빛을 받고 바람을 받으며 자연과 인간의 구분을 잊은 채 우주의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는 그런 존재적 층위의 기분이다. 오로지 욕망-기계들의 생산, 짝짓기 과정만 있는, 여기에 그 어떤 결핍이 존재하겠는가? 그런데 이런 상태를 반복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것이 바로 가족이란 것이다. 다른 욕망-기계들의 작동을 제지하고 오직 결핍만을 장착시키는 욕망은 그래서 끝없는 채움, 획득과 소유의 메커니즘에 속박되게 한다.

 

자본주의는 바로 여기에 기초한다. 존재적 결핍감을 느끼게 하는 체제, 결핍을 채우려고 쇼핑하고 노동하고 상품을 만들고 끊임없이 화폐를 축적하게 만드는 이 신경증적이고 편집증적인 에고의 장소, 결핍을 내부화시키는 장소가 바로 가족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처럼 "욕망을 가족 안에 가둬놓는 작업을 통해서만 활성화 된다." 사람들 모두 자신들은 탐욕스럽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결핍된 존재라고 항변한다. "난 부족해, 난 없어, 그러니 가져야 해, 더 가져야 해", 더 깊은 결핍감으로 몰아넣는 자본의 기본적 속성은 소유를 갈망하게 한다. 관계의 독점, 배타적 관계는 그래서 오늘 한국 가족주의의 핵심이 된다.

 

관계에 대한 독점적 욕망, 인정 욕망, 이 소유의 욕망, 일종의 '저장 증후군적 욕망'에는 만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한국사회의 갈등을 야기하는 그 근원에는 이 무한한 욕망, 이기적 탐욕이 있다는 것이다. 폐쇄된 관계, 독점적이고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타자와 함께하는, 타자로부터 비롯되는 관계, 그 유대와 연대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자아, 가족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고작 작은 아이에서 큰 아이가 될 뿐인 이러한 미숙함과 결핍의 성장에서, 생산하는, 만물과 교접하는 분열자의 산책, 바로 그 길을 향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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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3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필리아 2022-05-03 14:10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그레이스님, <안티 오이디푸스>의 1장부터 들뢰즈와 가타리는 표현적 무의식에 종속된 오늘의 사람들을 힐난하듯 ‘욕망적 생산‘으로 시작하죠. 아마 구별하려는 권력에 기초한 결핍의 욕망 너머의 진실을 봐! 라는 듯 회심에 찬 전복을 시작하는 것이죠. 아마 <안티 오이디푸스>는 항상 곁에 두고 우리들의 사고가 사회적 소음에 질식하려 할 때마다 꺼내 읽어야 하는 책일 거예요. 유쾌한 시간 되십시요~
 
무도회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1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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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의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불유쾌함, 마치 속내를 들킨 것 같은 혐오와 불안한 수용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삶의 그러함의 이야기들이란 느낌이다. 사람의 숨길 수 없는 본성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사실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타인들의 욕망, 혹은 내 것일 수도 있는 이것들을 보려는 유혹을 물리치는 것도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다. 아마 이 소설집은 이러한 측면에서 그 소임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네 꼭지의 단편 소설로 구성된 이 선집은 유대계 우크라이나 출신의 프랑스 작가인 이렌 네미롭스키(1903.2.11~1942.8.17)’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스윗 프랑세즈: Suite Francaise에 앞서 그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전초전이 될 듯싶다. 표제작인 무도회는 그야말로 야생적 본능, 새로운 물질세계로 접어든 인간의 체 정비되지 않은 벌거숭이 욕망들의 충돌이 빚어내는 삶의 우발적이고 유희적인 모습의 적나라함일 것이다.

 

아마 수록된 네 작품에서 무도회는 단연 충동들의 격렬함이 도드라진다. 열네 살 사춘기에 들어 선 소녀 앙투아네트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이 소설은 당대의 내면화된 사회적 욕망이 인간들을 얼마나 거칠게 휩쓸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가난한 은행 직원 캉프와 결혼한 로진에게 좁아터진 싸구려 주택에서의 삶은 희망 없는 자기 연민의 고통만을 불러온다. 이런 찌든 삶에 어느 날 갑자기 큰돈이 들어오며 억눌렸던 욕망이 분출하기 시작한다.

 

목욕할 때 빼고는 빼는 법이 없는 다이아몬드 팔찌를 번쩍거리며...” - 17

 

여자는 빈곤했던 과거를 지우고 상류 계층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부와 명예를 과시하고픈 욕망으로 가득 차있다. 타인의 욕망에 대한 이해가 들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여전히 전통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소시민의 의식에는 아이의 개성화를 위한 교육적 이해가 들어서지 못한다. 부모의 전통적 권위에 순응하지 못하는 앙투아네트는 로진의 욕망에 위협이 되는 존재에 불과하다. 두 욕망이 충돌하기 시작한다.

 

성인들 세계에 대한 동경, 어린 여자아이의 성적 과시의 욕구는 엄마의 과시 욕구에 의해 거듭 좌절된다. 캉프와 로진 부부는 명망 있는 부자들과 귀족들을 초대하여 자신들이 상류 계층의 일원임을 승인받는 파티를 준비한다. 일면식도 없는 초대 손님들의 명단과 그 주소를 쓰는 장면은 이들의 속물근성과 천박한 욕망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준다. 소설은 앙투아네트의 전혀 우발적 행동에 의해 야기된 파티 당일의 정경에 맞추어진다. 독자는 썩은 미소를 지을 준비가 되었기에 로진의 발작적인 증오심, 자기 연민의 훌쩍거림과 앙투아네트가 짓는 회심의 미소를 보며 인간 삶의 비속함을 다시금 확인케 된다.


 



초기작인 무도회와 달리 작가의 시선이 조금은 넓어진 1940년 작인 로즈 씨 이야기는 내게 인상적으로 남은 작품이다. 자신의 이해(利害)에 의해서만 세상을 보는 데 익숙했던 한 남자의 믿음과 그 전환적 사건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전통적인 여성적 삶의 행복에서 인생 전반으로 확장되어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시선이 확장된 듯하다. 더는 자기 연민, 욕망의 좌절을 보듬고 핥아대는 나르시시즘에 머물지 않는다.

 

주인공은 오늘의 전형적인 인간 상()과 닮아 있다. 미래를 위해 계획하고 부를 축적하고 보존하는 데 일념(一念)하는, 나이가 쉰이 넘었지만 그의 아름다운 뺨에는 기름기가 흘렀고, 목소리는 날카롭고 권위적(89)”인 그런 남자이다. 젊은 시절 분위기에 이끌려 결혼을 약속했지만 자기 삶에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의 번잡함이 끼어드는 것이 두려워 도주하기까지 한 독신자, 전쟁을 예견하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 노르웨이에 투자하고, 가장 안전할 것 같은 노르망디 지역으로 가치 있는 재산을 옮겨놓기까지 한다.

 

삶이란 우연의 연속이다. 전쟁은 노르웨이를 강타하고, 노르망디는 전쟁터가 된다. 평온함을 예견했던 노르망디의 삶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되고 동쪽을 향한 피난길에 오르지만, 피난 행렬에 막힌 차량은 더디게 움직인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음식과 물을 구하기 위해 기사에게 차량을 맡기고 인가를 찾았지만 아무것도 구하지 못한다. 차량은 그 사이 기사와 함께 사라지고 도보 행렬에 섞인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경계로 살아 온 그에게 한 청년이 무람없이 다가와 말을 건다. 모르는 이와 결코 대화하는 법이 없던 남자는 키 크고 건장한 청년이 고된 피난길의 쓸모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상대를 맞이한다. 이기심에서 시작된 이 동행은 군에 입대하겠다는 열여덟 살 청년과의 대화에서 그의 인생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작은 균열을 일으킨다. 청년은 피난길에서 약자들을 돕고, 먹을거리를 구해 나누어주기도 하며, 걷기 힘들어하는 그를 부축해 걷기도 한다. 그 와중에 청년은 손목시계를 잃어버린다.

 

저런, (...) 잘 난체하는 늙은 여자를 돕는답시고..., 자전거도 그렇게 도둑맞았겠군. 자네는 살아가면서 늘 도둑맞을거야.” “! 저만 그러지 않을 거예요.” -112

 

폭탄이 떨어질 때 청년은 남자를 감싸 안아 그를 보호한다. 청년은 커다란 부상을 입고 행군은 이어지지만 두 사람은 더는 걷지 못할 만큼의 상처로 주저앉는다. 늙은 남자와 청년은 루아르 강()에 비추는 햇빛을 바라보며 재산이나 목숨까지 초월하는 평온함과 무심함(114)”을 느낀다. 루아르 강을 건너던 한 차량 안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자신과 청년의 탑승을 제안하지만 자리는 남자를 태울 공간에 불과하다. 청년과 동승할 수 없는 탑승을 거절한다. 다리를 건너지 못하면 기다리는 건 죽음, 생의 끝이었다. 그를 변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생이란 무엇일까? 생이란 정말 우연한 유희에 불과한 것인가?

 

삶을 꿰뚫는 인문학자 고미숙의 문장이 떠오른다. (1)‘생명 차원에서의 연대, 세상을 향해 나가도록 힘차게 응원해주는 관계, 길을 나서는 베이스캠프, 생명의 플랫폼으로 변환하는 길을 모색하라는 제안이었다. 손가락이 타인, 세상을 향할 때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늙은 남자 로즈가 변했을 때 세계는 그를 응원하는 구원이 되어 줄지도.


이 작품과 같은 시기에 발표된 다른 젊은 여자는 제목처럼 두 여자가 등장한다. 주제는 다르지만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라는 구조는 마치 로즈 씨 이야기의 쌍둥이 작품 같다. 촌구석의 물건도 별반 없는 가게를 찾은 열여섯 살 질베르트는 자신이 찾는 물건이 없음을 이내 알아차리지만 밖에는 눈이 내리고 그녀는 주인 마들렌의 제안으로 가게에 머무르며 대화를 이어간다. 무언가 회상하기에 딱 그만인 배경 속에서 마들렌은 1차 대전 중 겪었던 강렬한 기억을 술회한다.

 

폭격으로 부상당한 한 프랑스군을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숨겨주고 간호하며, 그의 생명 연장을 위해 매 순간 기도하던, 어떤 한 마디의 문장으로 표현 할 수 없는 애틋함의 기억이다. 독일군 점령지역에서 프랑스군을 보호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행위이다. 아마도 마들렌에게 그 나흘이란 짧은 순간은 그녀에게 천국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홀로 살 수 있다는 것은 그 찰나의 시간이 한 인간에겐 영원한 삶을 의미했을 것이다. 질베르트가 이 얘기 속에서 느끼는 부드럽고 복잡한 자존감의 확인은 역시 어렴풋한 사랑의 불멸성을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Irene Nemirovsky (1903.2~1942.8



작가 이렌 네미롭스키가 아우슈비츠에서 비참하게 살해되던 해인 1942년에 쓰인 작품인 그날 밤 또한 삶의 선택에 직면한 그 순간, 영겁(永劫)같은 찰나에 마주하는 환희, 다른 젊은 여자의 마들렌의 술회와 그 궤를 같이하는 작품으로 읽힌다. 다만 작가가 다가 올 운명을 예견했던 것 아니었을까 하는 마음에서 주인공 카미유에게 동생 알베르트가  외치는 마지막 문장이 예사롭지만은 않다.

 

언니가 가엾다고? ! 천만에! 가여운 건 언니가 아니야.” -141

 

물론 이 문장은 사랑하던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어린 딸 니콜과 함께 외롭게 혼자 살며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여동생 알베르트의 집을 찾아 자신의 슬픈 처지의 한탄에 대한 반응이다. 카미유는 왜 난 너처럼 남자 없이, 홀로, 조용히 지내지 못했을까? 넌 네가 얼마나 행복하지 알기나 하니?(125)” 라며 사랑은 끔찍한 거짓놀음에 불과함을 토로한다.

 

이때 동석한 알베르트의 친구인 블랑슈는 말한다. 모든 결혼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고, 단지 삶이 끔찍한 것이라고. 그런데 또 다른 친구 마르셀이 말한다. 삶이란 우연이 아니라 본능의 문제라고. 우리는 늘 이 세상에서 가장 격렬하게 욕망하는 걸 얻게 되는 것일 뿐,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는 가장 큰 벌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은 돌고 돌아 처음의 소설 무도회의 주제로 다시 회귀한다. 비록 역겹고 혐오스러운 욕망일지언정 우린 그 욕망의 사랑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감히 우리가 삶의 진면목을 어찌 알 수 있으리




(1)인용출처: 고미숙 , 기생충과 가족, 북튜브 2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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