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겨진 베일 (워터프루프북) 쏜살 문고
조지 엘리엇 지음, 정윤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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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인 피를 지불해야 하며,

우리 신경의 미세한 조직에까지 아로새겨야 한다.” - 78

 

 

누군가를 애타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의 속내가 온통 비밀에 싸여 있어서 우리들의 상상력이 그것에 지배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들 마치의 작가, ‘조지 엘리엇은 알려진 만큼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한 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이다. 아마 이 짧은 소설(노벨레)은 갈증을 어느 만큼은 채워 줄 듯 싶다. 벗겨진 베일(The Lifted Veil)은 한 여성의 감추어진 마음의 장막이 벗겨지고 드러나는 내면의 추악함과 경망스러움, 허위를 통해 꽁꽁 감추어진 인간 영혼의 이중성, 그 음울한 심연(深淵) 들여다보기이다.

 

화자인 주인공 래티머는 병약한, 그러나 시적 본성을 지닌 내면적 청년이다. 그에게 어느 날 갑작스런 영감이 발작처럼 찾아오고 사람들의 머릿속 생각과 감각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사실 이 비정상적 감각은 그에게 고통이다. 인간들의 표면적 태도와 행위, 말씨의 이면인 조악하고 이기심과 변덕스러움으로 뒤섞여있는 속내를 불가피하게 수용하여야 하는 까닭이다. 그에게 인간의 외면이란 서서히 발효되는 커다란 두엄 더미를 뒤덮고 있는 그럴싸한 포장지(34)”로 보일 뿐이다.

 

래티머는 이복형인 앨프리드와 약혼을 염두에 둔 버사 그랜트라는 여성을 보게 되고, 그녀의 생각과 감정을 읽어보려 하지만 예외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는 기호로 된 거미줄에 차단되고 만다. 결국 이 알 수 없음이라는 무지와 두려움은 흥미를 자아내고 더욱 매력적인 존재로, 그에게 시적 열정의 우상이 된다. 버사 또한 결혼할 남자의 동생을 자극하여 질투와 욕망으로 들끓게 한다. 어리고 병약해서 마치 애정조차 느낄 수 없다는 듯이 형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그를 쓰다듬으며 달콤한 고문을 지속한다.

 

래티머는 혼란스럽다. 그녀에 대한 사랑의 희망과 거절의 두려움 사이의 줄타기는 극대화된 육감의 공포로 달뜨게 한다. 청년은 여자에게 자신을 상징하는, 시적 본능의 상징인 오팔을 선물하고 그녀가 그것을 손에 장식할지 지켜본다. 화려하게 치장된 손가락과 팔과 목과 귀 어디에도 그의 오팔은 보이지 않는다. 래티머는 버사에게 자신이 준 선물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고 힐난한다. 여자는 자신의 금목걸이 줄을 잡고서 가슴에 품고 있던 오팔을 들어올린다. 버사의 교활한 책략이 베일에 싸인 탓에 래티머는 읽지 못한다.


 

2022 민음북클럽 에디션



형 앨프리드와 버사의 결혼이 예정된 즈음의 어느 날 사냥 중 사고로 앨프리드는 세상을 저버리고 만다. 18개월 남짓의 시간이 지나고 병약하고 몽상적인 청년 래티머는 버사와 결혼하게 된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은행가인 래티머의 아버지는 버사가 자식의 부족한 면을 채우며 그를 가꾸어나가리라는 믿음에 이 둘의 결혼에 더할 나위없는 기쁨을 표시한다. 그의 병약함과 유약성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버사에 비해 부족한 인간이라 조롱하지만 신혼의 열정에 들뜬 래티머는 이에 무감각 상태로 대응한다.

 

오랜 세월 내내 같은 실수를 반복했음에도 결국 인간 영혼은 가시로 가득한 황야를 피와 도움을 간청하는 눈물로 물들이며 걸어가야 한다.” -49

 

래티머는 참혹한 불행’, 극단적으로 처참해질 미래를 준비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벗겨진 버사의 베일로 인해 드러난 그녀의 내면, 편협과 옹졸한 책략, 단순한 허위로 뭉쳐진 내면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비밀에 싸여 미지의 관념을 만들어내던 환상은 온전한 거짓, 위선이었음이다. 계획적인 교태와 용의주도한 이기심, 베일을 벗어던진 여자는 감추었던 더러운 영혼을 드러낸다. 래티머는 그녀를 향했던 믿음을 완전히 거두어들인다.

 

그는 비정상적인 통찰력과 예지력이 빚어낸 이 지각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마침내 버사와의 참담한 7년의 결혼 생활 끝에 타인의 속마음을 침범하는 대신에 자신의 고독한 미래를 곱씹기 시작한다. 아마도 내면을 꿰뚫어 본들 변함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오래된 이중성이 살아남은 이유를 넘어설 수 없음의 깨달음일 것이다. 사실 타인의 속내를 속속들이 안다는 것은 저주일지도 모를 일이다.

 

화자의 일방적인 시점으로 이어지던 이야기에 대한 독자의 의심 - 버사의 교활성, 천박성에 대한 래티머의 반감 등 - 은 이윽고 완전히 박살난다. 아내인 버사의 시종 아처 부인의 죽음과 잠깐의 소생을 위한 실험에서 발설되는 악마적 반전은 인간의 심리, 아득하게 은폐된 심연의 그 복잡 미묘한 양식을 줄기차게 묘사해대는 이 작품의 음울하다 못해 불쾌감까지 스며드는 기묘한 이끌림에서 풀려나게 한다.

 

어쩌면 이 작품은 조지 엘리엇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인간 심연의 실재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보았으니 어쩔 겁니까? 인간들의 그 편협한 사고와 미약한 배려, 반쯤 지친 연민에 대해서 잘 알았지요? 너무 깊숙이 타인의 정신을 헤집으려 해도, 그렇다고 신비의 환상에 빠질 것도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인간 영혼의 갈증과 그 충동에 대한 심리 탐사의 이 이야기는 눈에 보이는 욕망의 위력과 베일에 싸인 내면을 거닐며 피와 도움을 간청하는 눈물로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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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세계에서 목적 찾기 - 우주를 이끄는 손길은 없어도 우리는 의미를 찾아 나선다
랠프 루이스 지음, 류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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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에게 왜 나쁜 일이 일어나느냐는 물음의 틀은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가?’ 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 - 378

 

 

이 문장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어떤 고의적 의도가 있었다고 자기 지시적으로 추론하는 습관을 표상하는 인간의 흔해빠진 자기중심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 사고의 요구이다. 엿 같은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비일비재하게 늘 일어나는 일의 한 조각일 뿐, 자연 법칙은 누구에게나 똑 같은 것이다. 즉 나쁘다고 판단되는 일의 인과관계에 뭔가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무엇인가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데에는 어떤 목적 또는 미리 착상된 설계가 있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못하고 인과관계가 있음을 부지런히 찾아 나선다. 무작위적이라는 믿음이 불안을 증폭시키기에 안정감을 확보하기 위해 왜곡된 실재, 비합리적 믿음에 매달리게 된다. 인간의 오래되고 가장 흔한 직관적 오류와 무의식적 편향이라는 인지적 오류로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다.

 

무작위적이고 사소한 인자들에 의해 임의적으로 운명이 결정될 때 사람들은 소원 빌기식 사고, 심리적 방어 메커니즘들에 의존한다.” - 24(서문)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목적론적 사고의 망상에 놓여있는 본질들을 들여다보고 그 믿음의 근원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심오한 척하는 헛소리(pseudo-profound bullshit)’ 대신에 과학-이성에 의한 세속적 휴머니스트의 세계관을 종합하여 일관되고 삶을 긍정하는 세계관으로 안내하고자 하는 고뇌어린 비판적, 회의적 사유이다. 저자 랠프 루이스는 유대-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는 공동체에서 성장하고 그러한 배경에서 살아가는 명망 있는 정신의학자이다. 그의 아내가 암 진단을 받고 힘겨운 삶의 투쟁에 들어섰을 때 그는 자신의 이성적 믿음이 흔들리고 소위 소원 빌기식 심리적 방어 메커니즘에 포획될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우주의 알지 못하는 초월적 힘에 대한 의지가 스멀스멀 피어올랐음이다.

 

저자는 삶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초월적 신이나 우주적 힘에 대한 믿음에 매달리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말기 암과 같은 죽음의 두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정신건강에는 사실에 대한 부정과 회피가 필요하며, 이것은 당사자가 삶에 대처하는 인간적 능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좌절될 때 그 불행을 감당할 수 없는 좌절로 인해 인간을 더욱 피폐하게 할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오히려 이 세계, 이 우주의 무작위성, 무상성이라는 실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은 이러한 불확실성과 무위의 우주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도덕적 가치를 일궈 낼 수 있는가를 탐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뇌는 믿음 엔진이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 본능이 앞장서고 지성은 뒤를 따를 뿐이다.”라고 말했다. 우리 인간들은 지성과 합리성을 허물어뜨리는 수많은 직관적 추리들과 감정적 인자들에 쉽게 흔들린다. 이것은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인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우리들 자신들은 의식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저절로 빠르게 작동하며 자발적 통제 없는 사고인 시스템 1의 직관적이고 의도된 감정 인식을 믿음으로 삼는다고 말했던 것과 상통한다. 다시 말해 우리들은 이렇게 확보된 믿음이 실재를 정확하게 표상한다고 여기며, 설사 그것이 잘못된 표상이어도 결코 이를 인식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과학사학자인 마이클 셔머는 인간은 자연에서 보고 생각하는 패턴들로부터 의미를 만들어낸 진화된 패턴 인식 기계(55)”라 했듯이, 자기가 인식한 패턴이 진짜인지 의심하는 경향보다 어떻게든 패턴을 짚어내는 경향을 진화시킨 것, 목적론적 추리라는 아무 인과관계도 없는 것에 강박적으로 의도된 목적성을 기입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무 목적도 없는 우주에 목적을 부여하거나, 무작위적 DNA 돌연변이의 변칙성으로 발생한 암의 발생에 특별한 목적성을 이유로 대려는 것과 같다.

 

자연의 법칙들에 어떤 지향성이 떠받치고 있다는 끈질긴 믿음은 패턴과 목적을 분간하지 못하는 이 같은 주관적 지각, 사후예지 편향에 기초하고 있다. 어쩌다 우연의 일치를 발견하면 그 감정적 울림에 경도되어 초자연적 행위자의 목적이 행해졌다고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지시적인 느낌에 압도당하곤 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인용된 무수한 목적론적이고 직관적 인식에 의존함으로써 야기되는 왜곡된 믿음들의 이론적이고 실증적인 사례들을 열거하지는 않겠다. 다시 말해 이 목적론적 믿음에 터 잡은 종교의 원동력이 삼고 있는 인간의 편향적 경향성, 이 망상은 이성적으로 논파되지 않기에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 믿음에 기초하는 신앙(102)”을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목적론적 논증과 설계 논증에 놓인 믿음을 반박하기 위해 양자 물리학, 진화생물학, 행동 심리학적 증거 등을 통해 어떻게 자발적으로 아무 인도함 없이 우주와 우리의 세계가 존재 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혼돈 또는 완전한 무()에서 존재가 발생할 수 있었는지, 그 무작위성을 증명한다. 아마 이러한 과학적 입증에 있어서 다중우주나 우주의 총 알짜 에너지가 ‘0’이라든가, 양자 진동뿐 아니라 복잡계 탄생에 대한 떠오름이라는 외부의 원인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전체를 이룰 때 새롭게 생성되는 상호에 의한 법칙들로 인한 계의 상승작용을 설명한다. 우리는 자기 조직하는 복잡 적응계다. 의식은 세포 개별들의 상호작용과 시공간적 관계가 낳은 떠오름의 한 산물임을 수긍할 수 있게 된다.

 

 

우주에는 목적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있다.

 

항상 종교는 과학-이성에 목적 없는 우주에서 어떻게 도덕성이 나오는가? 하고 반박하려한다. 책의 중심 주제가 이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자기를 인식하며 강한 목적 감각과 보살피는 능력을 가진 인간 존재는 사실 무심하고 무작위적인 우주에서 자발적이고 인도함 없는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진화해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실 우주 자체에 정해진 목적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흥미로운 생각거리이거나 논쟁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무관심을 표명한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사고와 행동 전반을 장악하는 인식 시스템에 관한 문제이기에, 나아가 이것이 우리의 도덕성에 관여하여 사회적 관계의 성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종교의 폐해를 말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불관용, 무자비함, 전쟁의 부추김, 종교적 사회통제, 가부장적 권력 수단화, 부패화와 악용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면에 연민이나 인간 조건의 통찰력 제공, 불안에 대한 위로와 안정과 같은 긍정적 유산도 있다. 죽음과 내세에 대한 추상적이고 숭고한 믿음에 뿌리 내린 감각과 개체 감각을 근본적으로 거스르는 인간 뇌의 자기중심적 작동이나 이러한 우주 내재적 목적성이라는 믿음에 깔려있는 비현실적 낙관주의의 일례를 새삼스레 나열한들 불확실성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이 주관적 편향성의 욕구는 결코 자기 착각을 돌아보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의 부정, 즉 사후에도 살아남는 영혼의 영원한 본질성에 대한 믿음은 에 대한 감각을 진화시켜 온 인간의 케케묵은 착각, 진화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믿음 자체는 에너지 절약기이고 복잡한 세상에서의 생존과 번성을 위한 유효한 처리기이기 때문에 믿음 체계가 교란되는 것은 에너지의 배분을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복합적 착각에 대한 근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습관의 피조물이며 인간 본성의 많은 측면들이 상당히 굳어져 있다. 이러한 비합리적 왜곡의 상에 기초해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경우 발생하는 것들이 바로 차별과 혐오, 국수주의, 권위주의와 같은 파당적 분리주의이고 공감의 차단이다. 종교적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일체감을 박탈하고 사람으로 보지 않도록 하는 전략은 곧 무비판적 믿음 체계, 융통성 없는 과도한 믿음 체계에 의존하고 있는 까닭이다.

 

무작위적 세계성에 기초한다고 해서 도덕성이 부재할 까닭이 없다. 오히려 세속주의 수준과 평화로움 및 연민 사이에는 상당히 확고한 상관성이 존재하며, 인류는 이렇게 생물학적 진화와 함께 문화적 공진화를 함께 해왔다. 이러한 세속적 휴머니즘을 옹호하지 않으며, 비판적 사고나 회의주의를 방해, 비난해 온 것이 종교이고, 전체주의, 우파의 포퓰리즘(나치즘, 파시즘 등)임을 역사는 증언한다. 극단적 믿음들이 활개 치는 세계는 순응과 위세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곤 한다.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수구 우파가 즐겨 사용하는 혐오 표현, 표적 위협, 중상모략, 괴롭힘은 이러한 망상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 엄격한 비판적 사고를 수용하지 못하는 비합리성과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지적하는 제 1시스템적 사고의 오류에 매몰된 왜곡된 믿음은 그래서 공동체를 파멸로 쉽사리 빠져들게 한다.

 

도덕성은 자연적 도덕 감각이 세월 따라 그냥인간의 문화와 함께 진화해 온 것이다.(334)” 단지 인간인 우리들이 우주에 목적을 지각하는 까닭은 우리 자신이 그저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일 뿐이다. 우주에 대한 가장 끔찍한 사실은 우주가 적대적이어서가 아니라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믿음에 아무리 모순 있음을 지적한들 그들을 자기 통제의 과장된 느낌에서 풀어내지 못할 것임을 인간의 고질적 본성 탓에 불가능 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존재로부터 당위가 유래한다. 가치란 여느 행위가 개별 생물의 생존 또는 종 전체에 대해 상대적으로 가지는 이로움이다.” -292

 

책은 도덕 덕목들 마다 진화 및 심리학, 현대 신경 생리학을 거닐며 그 자연적 형성의 과정들을 목격하게 한다. 협력과 연민의 진화, ‘자기 보호 이타성으로부터 진화한 공감적 괴로움, 죄책감, 수치심, 평판, 혐오감 등 감정적 신경망의 진화로부터 도덕성 판단 가치로 진화하는 여정을 확인할 수도 있다. 특히 '글 눈(literacy)'의 확대처럼 타인이 사는 삶과 타인이 처한 상황에 대한 지식과 상상력을 넓혀주는 문화적 진보를 통한 내집단 개념의 확장이 꾸준히 공감 범위를 확장시켜주고 있음을 확인 할 수 도 있다.

 

우리는 의미를 찾는 종()이다. 인생의 의미란 우리 스스로 만든 무엇이며 의미를 만들도록 하는 것은 내면에서 부여하는 동기 및 사회적 본능이다. 우리는 불확실성, 복잡성, 무상함, 불완전성, 통제의 한계라는 어쩔 도리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378)” 이 광대한 무심하고 무작위적 우주의 한 조각 배에 떼 지어 살고 있는 보잘것 없는 존재임을 인정함으로써 서로 보살펴주고 타인에게 연민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통제력은 허약하기 그지없으며 수시로 오류와 왜곡을 하기 일쑤인 불완전한 시스템이다.

 

우리의 세계에 의도된 이유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일어나는 무작위적 우주의 불확실성을 우리는 견뎌내야 할 뿐이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파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도덕적 후퇴를 경계하며, 비판적 사고와 회의적 사고를 절대적으로 키워나가야 한다. 어떤 믿음에 기초할지는 인간 개체 각자의 결정일 뿐이지만 이것은 세계의 도덕성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이 책은 종교와 과학-이성에 대한 믿음의 논증이라기보다는 우리 인간들의 삶을 어떻게 더욱 의미 있고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가, 그 가치에 대한 사고의 제안이랄 수도 있다.

 

또한 우리의 취약한 인지 능력의 경향을 파악하여 엄중한 비판적 사고와 과학적 추리를 쫓아 불확실성의 세계를 견뎌내기 위한 인간 본성에 대한 종합 결정판이라 할 수 도 있을 것이며, 반증 가능성을 열어 둔, 즉 거짓임을 증명할 가능성을 열어 둔 과학-이성의 세속적 휴머니즘 세계관을 하나로 종합해 낸 인간 인식론에 대한 역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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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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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에는 소설의 내용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참고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좋습니다정 그러시다면.... 들어보겠습니다삼십 분 드리겠습니다.” -드라마,13

 

이 작은 체호프의 소설선집 표제작을 단편 드라마로 배치한 것은 아마 체호프의 작품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지니기에 맞춤인 까닭일 것이다. 누군가가 상대의 사정에 대한 고려 없이 자신에게만 열중하여 그칠 줄 모르는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 급작스럽게 몰려오는 참을 수 없는 지루함과 의미 없음이 격렬함으로 딱하고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는 경우가 있다. 대개는 그저 마음속으로 짜증을 삭이지만 말이다.

 

주인공 파벨 바실리비치는 유명한 작가인 듯하다. 그에게 한 여인이 자신이 쓴 희곡을 들고 와 읽고 작품을 검증해 주기를 부탁한다. 내키지 않지만 간절한 부탁에 두툼한 노트를 받아들고 한 번 읽어보겠다고 하지만 여인은 바로 지금 자신이 낭독할 테니 듣고 판단해 줄 것을 다시금 요청한다. 영감도 없고 이해할 수 도 없으며 하품만 연신 나오는 하찮은 이야기들이 그칠 줄 모르고 낭독되고 있다.  오 맙소사! 십분만 더 이 고통이 계속된다면 비명을 지르게 될거야....., 참을 수 없구나!(16)”  파벨은 가슴속으로부터 치솟는 비명을 지르며 묵직한 문진을 집어들고....,  배심원들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냉소적이고 지극히 간결한 이 마지막 문장으로 이야기는 종료된다. 입이 절로 씰룩거리게 하는 공감의 웃음이 터져 나오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수록된 여섯 편 중 예외적으로 긴 단편작인 베짱이는 자기 욕망의 이상을 늘 새롭고, 지적 허영의 무리에서 찾으려 하는 올가 이브노브나라는 여인이 삶에서 진정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부한 소재로 이끌어감에도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속도감, 상황의 짧은 순간의 스치듯 변화하는 표정과 언어로 강렬하게 담아내고 있는 인상적인 작품이다. 올가의 남편 오시프 드이모프는 의사이자 9등 문관으로 보잘것 없는 수입을 버는, 그러나 성실한 인물로서 주변에 재능있고 점잖은 지인들이 있는 사람이다.

 

반면 올가는 문학, 미술, 음악 등의 나름 저명한 인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며, 이 모든 예술 방면에 자신이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하지만 정작 어느 것에도 재능을 지니지 못한 낭만적 허영으로 그득한 여인이다. 드이모프는 이러한 아내의 분주한 활동과 소비를 지원하기 위해 생계 벌이와 학문적 열정을 묵묵히 수행한다. 올가는 여러 사교 활동 중 금발의 미남 청년 화가인 랴보프스키와 불륜을 맺으며 남편을 자신의 자유로운 연애 활동의 수단이자, 평온한 배경으로 활용할 뿐이다. 여자는 허영의 모임에서 으스대듯 말하곤 한다 그 남자(남편)는 자신의 관용으로 나를 억압하고 있어!”라고.  랴보브스키와의 지속되는 불륜에 대한 자기 양심의 목소리를 남편의 억압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사실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민음북클럽 에디션; 안톤 체호프 단편선


어느 날 드이모프는 아내 올가에게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었음을, 병리학 강의를 맡게 될 수도 있음을 자랑스레 말하지만 올가는 랴보브스키와 만날 상상에 빠져 건성으로, 무심한 반응을 보인다. 아내의 불륜, 올가의 기만을 인식하기 시작하지만 그는 디프테리아에 전염되어 눕고 만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 드이모프의 친구 코로스텔료프는 올가를 향해 혼자 말이듯 중얼거린다. 이렇게 무모한 인간들은 정말이지 재판을 받아야 해.(76)”  그가 왜 전염되었는지 올가에게 알고 싶은지 묻는다. 아내의 허영을 위해 쉴 새 없이 벌이로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선량하기만 하고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은 채 고통 받고 누워있는 친구로 인한 분노이다.

 

남편이야말로 올가가 선망하는 고귀한 지성인인  선하고 순수한 사랑을 담은 영혼, 불을 밝히고 뒤져봐도 못 찾아낼 대단한 학자(81,82)”였음을 올가는 코스텔료프를 통해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뒤늦게 남편의 비범함과 위대함을 깨닫고 누워있는 병실로 달려가지만 그는 이미 시신이 되어있다. 기회는 사라지고 없다. 사실 시사하는 주제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갖지 못한 저 먼 곳에 손을 뻗지만, 소중한 것은 늘 자기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들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곤 항상 뒤늦은 후회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선집 제일 끝에 배치된 내기는 이 같은 인간적 한계에 도사린 어리석음이라는 눈 먼 욕망과 그에 대한 혐오, 이것, 즉 삶의 의미의 무상성, 공허함에 대한 극단의 얘기일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범죄자의 사형과 종신형에 대한 윤리적 논쟁에서 비롯된다. 모임의 주최자인 부자 은행가는 말한다. 사형은 단 숨에 죽이지만 종신형은 서서히 죽이기에 사형이 더 인간적인 처벌이라 주장한다.  반면에 한 변호사는 둘 다 비윤리적이라고 반박한다. 생명의 박탈이라는 권리는 국가가 되었던 그 무엇이 되었건 인간생명을 죽일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흥분한 은행가는 변호사에게 즉석에서 내기를 건다. 만일 15년간 갇혀 지낸다면 당신에게 200만 루블의 거금을 주겠다고.

 

내기에 합의한 변호사는 은행가의 집 정원에 지어진 작은 장소에 엄중한 감시와 함께 감금된다. 변호사는 첫 해에 가벼운 소설책들을 요구한다. 둘 째 해는 고전 서적들을, 오년 째에는 술을, 육년 반이 되었을 때에는 외국어와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고, 십 년 째는 복음서만을, 그리곤 종교사와 신학 서적들을, 마지막 이년 동안은 자연과학, 의학, 화학 등 엄청난 책들을 읽는다. 은행가는 세월이 감에 따라 여러 투자에 실패하고 재정 상태가 악화되어, 변호사가 15년을 모두 채워 200만 루블 지급 의무를 지게 될 것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이윽고 약속된 마지막 날이 가까워 오자 그를 몰래 죽여 부담을 영원히 소멸시키기로 다짐한다.

 

이윽고 살해하기 위해 감금된 자가 있는 곳에 잠입하기 위해 상황을 살핀다. 수인(囚人;변호사)은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다. 그러나 그 몰골은 더부룩한 수염을 달아놓은 해골, 살가죽을 입혀 놓은 노인처럼 쇠락한 인간이다. 가볍게 죽일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들어갔을 때 책상 위에 뭔가 빼곡하게 써진 종이를 발견한다. 15년에 걸친 왕성한 독서가 수인에게 준 것은 무엇일까?

 

지칠 줄 모르는 인간의 사고 능력으로 몇 세기에 걸쳐 이룩해 낸 모든 것들이 그의 두개골 속에서 작은 언덕으로 쌓였을(127)” , 그것은 그 모두가 시시하고 무상하며 신기루처럼 공허하고 기만적인 것일 뿐이라는 깨달음이다.  이 세상의 모든 행복과 지혜를 경멸한다!”,  책 속에서 지상의 축복이라 불리는 모든 것을 경멸하게 된 것이고,  꿈꾸듯 갈망하던 약속된 200만 루블이 하찮아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권리를 박탈하기 위해 약속 기한이 도래하기 전에 스스로 나갈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살해하려 잠입한 은행가가 읽은 것은 그의 물욕과 삶의 방식에 대한 혐오와 자괴감에 대한 거울이었음이다.  그는 잠든 수인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그냥 돌아선다. 1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재화에 대한 욕망을 갈구했던 인간이나, 자기 재화를 위해 타인을 죽일 결심을 하는 인간에 대한 이 강렬한 우화는 삶의 의미를 찾겠다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허무함과 함께 어떤 우주적 부조리함의 심연을 거닌 느낌을 선사한다 체호프의 소설은 간명하고 기지가 빛나는 촌철살인의 삶에 대한 해명이 번뜩인다. 이야기는 재미있고, 주제는 깔끔하고 선명하다.  어쩌면 그의 모든 작품들은 작가이자 개업 의사로 생계를 위한 분주함을 떨쳐내지 못했던 자기 연민이 승화되어 빚어진 위대한 생의 철학적 산물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단편거울의 주인공 넬리가 바라보는 꿈 속 거울에 반영되는 비(非)실존적 풍경들, 잿빛 풍경 속에 전개되는 인간사란 단지 죽음에 대한 어리석고 불필요한 서문(序文),96쪽"에 불과한 것, 그것인지도.

 

문학이라는 벌 통 속엔 제가 짜낸 꿀 한 방울도 들어있지요....” - 드라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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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5-27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에디션 선택했어요. 민음사에서 나온 체호프가 있어서요.^^
마지막 문장 위트있네요^^

필리아 2022-05-27 18:47   좋아요 1 | URL
저는 + ‘조지 엘리엇‘하고, ‘그림 형제‘를 선택했어요. 작가를 대표할 만한 엑기스를 잘 모은것 같아요. 항상 따뜻한 댓글 고맙습니다~ 그레이스님, 즐겁고 유쾌한 주말 보내세요 :)
 
제멜바이스 / Y 교수와의 인터뷰 제안들 13
루이페르디낭 셀린 지음, 김예령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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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독특한 이력 못지않게 소설 제멜바이스는 본명 루이페르디낭 데투슈(Louis-Ferdinand Destouches, 1894~1961)’, 필명 셀린1924년 의학 박사학위 논문이다. 그런데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필리프 솔레르스(Philippe Sollers; 1936~ )’셀린의 탄생이라는 글에서 서사시풍의 문체로 작성된 이 희한한 논문이라 표현하였듯이 엄중한 학위 심사를 위한 의학논문이라 보기에는 여간 수상쩍은 것이 아니다.

 

또한 셀린은 1936년 재판본 서문을 시작하며 이것은 제멜바이스의 삶에 관한 참혹한 전기이다.(29)”라고 선언한다. 어쨌든 이 글은 희한한 학위 논문이며, 참혹한 전기이자 서사시이기도 하다. 사실 장르를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나는 이 논문을 그저 실화소설로 읽으련다. 그래서 작품이라는 예술에 붙이는 명사로 호칭하기로 한다.

 

이 작품은 인습과 위선, 태만한 이성이 인간의 상식으로 굳어진 상상의 고집이 되어 얼마나 집요하게 진실을 외면하며, 맹목적 어리석음과 폭력성을 동반하는지 감염 예방의학의 선구를 연 헝가리 출신의 의사 필리프 이그나즈 제멜바이스의 일대기를 통해 그 멍청하고 심술궂기까지 한 인간들과 그 사회를 냉소적이고 강렬한 문장들로 쏟아 놓는다.

 

비단 이 책은 외롭게 고군분투하다 가장 낮은 죽음으로 허물어진 한 의사와 의학계만의 실상을 더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참화가 계속됨에도 한 치의 진전도 없는, 그러나 끈덕지게 계속되고 있는 인간 정신의 절대적 게으름에 대한 신랄한 비평이다. 상식이라는 전통에 얽매여 정신의 감미로운 무력함과 행복한 지각의 감옥(133)”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대체 무엇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광인이 시작되는 곳에서 인간은 끝난다.” -139

 

제멜바이스의 박사학위 논문 또한 작가 셀린의 그것처럼 음악적 영감과 가치를 띤 식물들의 삶이라는 시적 열정 넘치는 독특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심사 주재교수이던 스코다는 애제자를 위해 “‘의약과 감정이라는 미묘한 주제에 대해 치밀한 논증을 하라고 요청(65)”했을 뿐 1844년 봄, 심사 당일 의학박사 학위를 승인했다. 이후 그는 병리해부학 교수인 카를 폰 로키탄스키(1804~1878)’와 진단학에 공로를 세운 체코출신의 의학교수 조셉 스코다(1805~1881)’의 옹호 하에 의사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외과의들의 지적 태만과 허영심에 대해 제멜스키의 회의(懷疑)가 보여주는 다음의 문장은 그네들이 얼마나 의료적 진정성에 무심했는지의 일례라 할 수 있다. 아니 인간 사회 전반의 실상이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감염을 둘러싸고 외과의들은 “‘아주 걸쭉한 농포’, ‘양질의 농포’.... 따위의 표현을 사용하는 재주 자랑 놀이에 빠져, 단지 거창한 말을 입은 숙명주의요, 무력감의 반향일 따름이었다. (...) 하나같이 진정성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69)”고 말하는 것이다.

 

환자가 왜 견디지 못하고 죽은 것인지 원인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그저 수술만 계속하며 의학 용어만을 주절거리는 그 허위의 정신들에 혐오감만을 느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반응은 곧 진실이라는 빛의 길로 들어섰음을 작가는 읽어낸다. 18461월 마침내 제멜바이스는 스코다의 추천에 의해 산부인과 교수가 되어 조정(朝廷)에 강력한 끈을 가지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탐욕과 권위를 유지하던 클린이라는 인물의 조교수로 배치된다.


 



자만심만 가득하고 수하 조교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무능한 권위주의자인 클린은 제멜바이스에게 온갖 종류의 질투와 집결된 어리석음으로 위험한 갈등을 지속적으로 촉발한다. 당시 산부인과 병동은 산욕열로 사망하는 임산부의 비율이 폭발적인 상황이었으며, 오히려 병동에 입원하지 못해 거리에서 분만하는 산모들이 훨씬 안전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 클린의 산부인과 병동은 장례의 문장들로 이루어진 육중한 장막이라는 은유 바로 그것이었음이다. 산부인과 의료진들 -인습에 길들여진 경건하고 비굴한 자들 - 의 의식이란 산욕열이 서민층 아낙네들이 모성의 삶에 들어오면서 종종 치러야 했던 일종의 고통스런 조공이라 여기(77)”는데 만족하고 있었으니, 임산부들의 출산은 곧 죽음과 동의어에 가까운 것이었다.

 

여기서 셀린은 지적한다. 숙명이라 불리는 이 주변 환경의 강박 한가운데 버티어 서고, 무엇인가를 감행하고, 그러면서 자신을 휩쓸어가려는 공동의 운명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힘을 제 안에서 발견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79)” 는 것이다. 좀처럼 이 인습적 타성, 시대를 휘감아 도는 상식이라는 숙명을 넘어서려는 자는 오히려 주변의 돌팔매를 얻어맞기 일쑤인 것이 인간 사회라는 말이다.

 

최고의 지성이란 자들이 제멜바이스의 발견을 인정하고 적용하기까지 4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 이들은 만장일치로 증오심에 사로잡혀 제공된 이 거대한 진보를 거부했다.“ -103

 

제멜바이스는 시신 해부실습 중 메스에 찔려 그 여파로 동료 의사가 사망하자 이를 추적 하여 산모들의 사망 원인이 되었던 산욕열과 이 병이 일치함을 느낀다. 시체로부터의 감염이 산욕열의 병인이라는 가설이다. 당시 조직학의 수준은 현미경 수준 포착 염색법을 알지 못했기에 세균을 보지 못하였으니, 논리적 추론에 의한 병인의 확인 이상은 불가능했기에 이를 입증하는 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곧바로 산모들을 수술하는 모든 의료진에게 손을 씻은 후 접촉할 것을 요구하지만 클린은 질투와 무지로 그를 반박하고 급기야 내치기까지 한다. 이 작품은 제멜바이스의 이러한 감염 예방을 위한 병인 규명과 당대 의료 지성들의 거친 위선과 몰이해, 진실 경멸이라는 어리석음과 공격성과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자칭 전문가라 하는 이들, 본연의 학문에서 이처럼 맹목적이고 어리석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기도 하지만, 이 같은 맹목성에 더해 거짓말과 멍청함, 비열함까지 갖추었음을 보는 것은 사실 인간에 대한 수치스러움이다. 셀린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온갖 질투와 허영이 고삐 풀린 듯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온다.(...) 훗날 인간 과오의 역사를 작성하게 된다면 아마도 이보다 막강한 과실의 예는 찾기 힘들 것(107)”이라고.

 

제멜바이스는 이런 배타적 시련 속에 고향 헝가리로 돌아오지만 그에게 가해지는 고립과 폭력 속에서 그의 불은 사그라들고 만다. 마지막까지 그를 도우려 했던 동료는 당시 프랑스 산부인과 계를 지배하던 난공불락의 권위자인 뒤부아를 찾아가지만 그는 세균 감염, 즉 감염 예방을 위한 의료진의 손 소독은 이미 폐기된 것이라며 적대감마저 보인다. 세상은 권위에 복종하고 인간의 정신은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만다.

 

알량한 이성이라는 사슬의 관습에 얌전히 용접된 채 주의 깊게 앉아있는 어린이 모양처럼 인습과 권위에 복종하면서 진실에는 사납게 달려들어 두드려 팬다. 작가는 다시 반복한다. 우리 인류의 운명에 적합한 양상을 선택할 줄 모르는 이에게 수치를!(130)”이라고. 마치 선량한 시민에게 폭력과 죽음을 휘두르던 어제의 살인자들이 오늘은 모럴리스트가 되어 뻔한 참회의 헛소리를 지껄이고는 다시금 끈덕지게 예전의 짓거리를 계속하는 작금의 한국 사회처럼 말이다. 여기에 교태어린 인간들은 과장된 아부의 헛소리를 읊어대며 죽음과의 협약에 공모한다. 이 뻔하디뻔한 공허한 노래를 반복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언제 그치려나? 지상 표면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지하철에 담아 비스듬한 레일을 급속으로 달려가도록 하는 것이 감응(affects;情動)’의 문체임을 역설하던 셀린의 비굴하고 무관심하며 무기력하기만한 인간과 인간 세계에 대한 이 신랄한 비평은 인간의 비속성, 그 실체를 음울하게 확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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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의 끝 쏜살 문고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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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의 나이에 발표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첫 작품집 쾌락과 나날(Les Plaisirs et les Jours)중 네 편의 단편 소설을 뽑아 구성한 작은 선집이다. 아마 좀처럼 읽어내기에 참담한 인내력을 요구하는 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앞서 고유한 문체나 독특한 정서 등 문학적 감응을 통한 통독의 내심으로 유혹하기에 그만인 작품들이라 하겠다.

 

원작품집의 작품 배치와 같이 처음과 마지막 작품인 실바니아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이하 발다사르로 표기)질투의 끝으로 동일한 편집 구성을 하고 있으며, 여기에 여성 주인공의 관능으로의 타락이라는 공통의 제재로 묶일 수 있는 비올랑트 혹은 사교계의 삶(이하 비올랑트로 표기)어느 아가씨의 고백이라는 두 편을 통해 어쩌면 그가 훗날 천착하게 되는 무의식의 심층, 정서적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소위 프루스트적 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인생이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 요란한 외침과 노여움에 가득 찬,

아무 뜻도 없는 이야기인 것을 - 셰익스피어, 맥베스55장에서

 

 

처음과 마지막 단편인 발다사르질투의 끝두 작품의 제재(題材)인 죽음과 질투는 각기 다르면서도 같은 감응을 선사하는데, 전자는 예고된 죽음에 친숙해져 있는, 즉 죽음의 유혹에 포획된 인물에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망, 길 떠나는 이들에 매혹적인 약속을 속삭이는 짙은 바다(41)”이지만, 후자에겐 고통과 미혹으로부터의 해방, 지난한 갈등을 해결하는 평온으로서의 종료이다. 각기 마지막 장면의 묘사는 1896쾌락과 나날의 서문을 쓴 아나톨 프랑스의 표현처럼 지는 해의 서글픈 찬란함이요, 신비하고 병적인 아름다움의 우아함을 느끼게 한다.

 

질투라는 감정은 샘내고 시기하는 천박한 심리적 망상이라기보다는 꽤나 매혹적인 인간의 지성, 세련되고 무엇보다 논리에 집착하는 상상의 지각처럼 보인다. 발다사르의 경우 자신의 다가 온 죽음에 불현 듯 시라쿠사의 공녀 피아를 경쟁자인 카스트루치오로부터 빼앗아 곁에 두고 싶은 강박적 이기심으로 발현되고, 질투의 끝오노레는 연인 프랑수아즈(손느 부인)’에 대한 단 한 마디의 소문 - 그자 말로는 손느 부인이 아주 격정적이라더군...!” - 에 의해 연인의 부정(不貞)에 대한 상상으로 빚어진 것이다.

 

특히 오노레의 뇌리에서 맴도는 떨어내지 못하는 상상의 연속은 치밀한 논리적 추론을 하는 이성과 매우 닮아있다. 이것이 죽음과 연결되는 것은 어쩌면 인간 에너지의 극한 소모, 불가해한 고통의 수반인 때문인 것만 같다. 발다사르 또한 죽음의 임박에서 피아에 대한 무리한 사랑의 요구인 영혼과 기억의 웅변 역시 그 어느 때의 말보다 빼어난 지성이다. 프루스트는 삶의 열정으로서 질투에 어린 숙명적 한계를 보았던 것만 같다.


 



비올랑트는 채워지지 않은 감각적 쾌락, 이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세계를 향해 고향 스티리아를 떠나 궁중 사교계로 향하여 관능을 추구하는 의지박약한 한 여인의 일생을 술회한다. 곧 사교계에서 절대적 지위를 누리며 숭앙받는 예술작품이 되지만 욕망의 덧없음, 권태로움으로 삶의 활기를 잃어버리기에 이른다. 원하던 물질적 삶에 대한 배움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오겠다던 스티리아 성의 집사이자 그녀의 가정교사 오귀스탱과의 약속은 끝없이 미뤄진다.

 

일면 교훈적인 어조로 구성된 오귀스탱이 비올랑트에게 하는 조언은 사교계 인물들이 추구하는 쾌락의 본질을 꿰뚫는다. 훌륭한 것에 마음을 쓰면 바로 그 훌륭함 때문에 ... 싫어하는 사람들의 세계가 사교계이며, 이것들이 사랑하지 않는 음악, 사색, 고독, 들녂(자연)..”의 상실이 곧 권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권태가 야기하는 염증과 경멸마저 무너뜨리는 습관이라는 타성의 힘이 인간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불행과 행복을 분리하는 힘, 인간 욕망의 취약성을 복잡한 허영심과 섬세한 고뇌로 수놓은 젊은 작품이다.

 

반면에 관능적 욕망에 허물어지는 여자라는 비올랑트와 닮은 듯한 제재를 가진 어느 아가씨의 고백은 내게 이 작품집에서 가장 뛰어난 이야기로 읽힌다.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겨누었지만 서툰 발사로 즉사하지 못하고 일주일의 삶이 남은 여자의 자살에 이르게 된 과정의 술회이다. 아마 이 소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가장 많이 떠올리게 하는 이유로 더 집중하고 애착을 갖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여자는 어린 시절 엄마의 따뜻한 사랑, 고귀할 만큼 지극한 사랑의 기억이 깊숙이 배어있는 레주블리(Les Oublis; 망각)’라는 장소에서의 엄마와의 달콤한 감동적 해후와 이별의 감미로운 인상들을 얘기한다. 여자에게 엄마는 신성이며, 고양된 영혼이고 지고(至高)한 순수이다. 즉 시간을 가로질러 과거와 현재가 만나 강렬한 매혹의 순간을 기억, 체험하는 이 여정에서 마르셀의 어머니에 대한 반복되는 집착의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된다. 무의식에 침전되어 있던 매혹적인 기억들의 시간. 그리고 끔찍한 경악의 순간들을.

 

타락과 천진난만이 교차하고 모성의 자애와 자연의 잔인함이 교대하며 인간에게 안기는 생의 고통들이 지극히 섬세한 관찰의 문장으로 우아하게 독자의 가슴에 스며들게 한다. 혹자는 질투의 끝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스완의 오데트에 대한 질투, 마르셀의 알베르틴에 대한 질투라는 동일점을 시사하는 전 단계적 읽기의 대표작이라 소개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 작은 프루스트의 소설선집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기에 앞선 사전 읽기의 텍스트라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과 욕망, 질투와 회한, 삶과 죽음에 대한 흥미로운 문학적 주제들을 풍성하게 담아낸 젊고 활력 넘치는 소설 그 자체로의 가치를 결코 폄훼할 수 없는 저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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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5-22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읽어야겠어요.
이제는,
프루스트!^^

필리아 2022-05-22 10:45   좋아요 1 | URL
네, 책의 유혹이 그치질 않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