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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세계에서 목적 찾기 - 우주를 이끄는 손길은 없어도 우리는 의미를 찾아 나선다
랠프 루이스 지음, 류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4월
평점 :
“‘착한 사람에게 왜 나쁜 일이 일어나느냐’는 물음의 틀은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가?’ 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 - 378쪽
이 문장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어떤 고의적 의도가 있었다고 자기 지시적으로 추론하는 습관을 표상하는 인간의 흔해빠진 자기중심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 사고의 요구이다. ‘엿 같은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비일비재하게 늘 일어나는 일의 한 조각일 뿐, 자연 법칙은 누구에게나 똑 같은 것이다. 즉 나쁘다고 판단되는 일의 인과관계에 뭔가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무엇인가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데에는 어떤 목적 또는 미리 착상된 설계가 있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못하고 인과관계가 있음을 부지런히 찾아 나선다. 이 무작위적이라는 믿음이 불안을 증폭시키기에 안정감을 확보하기 위해 왜곡된 실재, 비합리적 믿음에 매달리게 된다. 인간의 오래되고 가장 흔한 직관적 오류와 무의식적 편향이라는 인지적 오류로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다.
“무작위적이고 사소한 인자들에 의해 임의적으로 운명이 결정될 때 사람들은 소원 빌기식 사고, 심리적 방어 메커니즘들에 의존한다.” - 24쪽 (서문中)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목적론적 사고’의 망상에 놓여있는 본질들을 들여다보고 그 믿음의 근원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심오한 척하는 헛소리(pseudo-profound bullshit)’ 대신에 ‘과학-이성’에 의한 세속적 휴머니스트의 세계관을 종합하여 일관되고 삶을 긍정하는 세계관으로 안내하고자 하는 고뇌어린 비판적, 회의적 사유이다. 저자 ‘랠프 루이스’는 유대-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는 공동체에서 성장하고 그러한 배경에서 살아가는 명망 있는 정신의학자이다. 그의 아내가 암 진단을 받고 힘겨운 삶의 투쟁에 들어섰을 때 그는 자신의 이성적 믿음이 흔들리고 소위 ‘소원 빌기식’ 심리적 방어 메커니즘에 포획될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우주의 알지 못하는 초월적 힘에 대한 의지가 스멀스멀 피어올랐음이다.
저자는 삶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초월적 신이나 우주적 힘에 대한 믿음에 매달리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말기 암과 같은 죽음의 두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정신건강에는 사실에 대한 부정과 회피가 필요하며, 이것은 당사자가 삶에 대처하는 인간적 능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좌절될 때 그 불행을 감당할 수 없는 좌절로 인해 인간을 더욱 피폐하게 할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오히려 이 세계, 이 우주의 무작위성, 무상성이라는 실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은 이러한 불확실성과 무위의 우주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도덕적 가치를 일궈 낼 수 있는가를 탐사하는 것이다.
■ 우리가 가진 뇌는 믿음 엔진이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본능이 앞장서고 지성은 뒤를 따를 뿐이다.”라고 말했다. 우리 인간들은 지성과 합리성을 허물어뜨리는 수많은 직관적 추리들과 감정적 인자들에 쉽게 흔들린다. 이것은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인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우리들 자신들은 의식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저절로 빠르게 작동하며 자발적 통제 없는 사고인 시스템 1의 직관적이고 의도된 감정 인식을 믿음으로 삼는다고 말했던 것과 상통한다. 다시 말해 우리들은 이렇게 확보된 믿음이 실재를 정확하게 표상한다고 여기며, 설사 그것이 잘못된 표상이어도 결코 이를 인식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과학사학자인 ‘마이클 셔머’는 인간은 “자연에서 보고 생각하는 패턴들로부터 의미를 만들어낸 진화된 패턴 인식 기계(55쪽)”라 했듯이, 자기가 인식한 패턴이 진짜인지 의심하는 경향보다 어떻게든 패턴을 짚어내는 경향을 진화시킨 것, 즉 ‘목적론적 추리’라는 아무 인과관계도 없는 것에 강박적으로 의도된 목적성을 기입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무 목적도 없는 우주에 목적을 부여하거나, 무작위적 DNA 돌연변이의 변칙성으로 발생한 암의 발생에 특별한 목적성을 이유로 대려는 것과 같다.
자연의 법칙들에 어떤 지향성이 떠받치고 있다는 끈질긴 믿음은 패턴과 목적을 분간하지 못하는 이 같은 주관적 지각, 사후예지 편향에 기초하고 있다. 어쩌다 우연의 일치를 발견하면 그 감정적 울림에 경도되어 초자연적 행위자의 목적이 행해졌다고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지시적인 느낌에 압도당하곤 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인용된 무수한 목적론적이고 직관적 인식에 의존함으로써 야기되는 왜곡된 믿음들의 이론적이고 실증적인 사례들을 열거하지는 않겠다. 다시 말해 이 목적론적 믿음에 터 잡은 종교의 원동력이 삼고 있는 인간의 편향적 경향성, 이 망상은 이성적으로 논파되지 않기에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 믿음에 기초하는 신앙(102쪽)”을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0531/pimg_7290341033429569.jpg)
저자는 이러한 목적론적 논증과 설계 논증에 놓인 믿음을 반박하기 위해 양자 물리학, 진화생물학, 행동 심리학적 증거 등을 통해 어떻게 자발적으로 아무 인도함 없이 우주와 우리의 세계가 존재 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혼돈 또는 완전한 무(無)에서 존재가 발생할 수 있었는지, 그 무작위성을 증명한다. 아마 이러한 과학적 입증에 있어서 다중우주나 우주의 총 알짜 에너지가 ‘0’이라든가, 양자 진동뿐 아니라 복잡계 탄생에 대한 ‘떠오름’이라는 외부의 원인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전체를 이룰 때 새롭게 생성되는 상호에 의한 법칙들로 인한 계의 상승작용을 설명한다. 우리는 자기 조직하는 복잡 적응계다. 의식은 세포 개별들의 상호작용과 시공간적 관계가 낳은 떠오름의 한 산물임을 수긍할 수 있게 된다.
■ 우주에는 목적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있다.
항상 종교는 과학-이성에 목적 없는 우주에서 어떻게 도덕성이 나오는가? 하고 반박하려한다. 책의 중심 주제가 이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자기를 인식하며 강한 목적 감각과 보살피는 능력을 가진 인간 존재는 사실 무심하고 무작위적인 우주에서 자발적이고 인도함 없는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진화해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실 우주 자체에 정해진 목적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흥미로운 생각거리이거나 논쟁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무관심을 표명한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사고와 행동 전반을 장악하는 인식 시스템에 관한 문제이기에, 나아가 이것이 우리의 도덕성에 관여하여 사회적 관계의 성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종교의 폐해를 말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불관용, 무자비함, 전쟁의 부추김, 종교적 사회통제, 가부장적 권력 수단화, 부패화와 악용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면에 연민이나 인간 조건의 통찰력 제공, 불안에 대한 위로와 안정과 같은 긍정적 유산도 있다. 죽음과 내세에 대한 추상적이고 숭고한 믿음에 뿌리 내린 감각과 개체 감각을 근본적으로 거스르는 인간 뇌의 자기중심적 작동이나 이러한 우주 내재적 목적성이라는 믿음에 깔려있는 비현실적 낙관주의의 일례를 새삼스레 나열한들 불확실성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이 주관적 편향성의 욕구는 결코 자기 착각을 돌아보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의 부정, 즉 사후에도 살아남는 영혼의 영원한 본질성에 대한 믿음은 ‘나’에 대한 감각을 진화시켜 온 인간의 케케묵은 착각, 진화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믿음 자체는 에너지 절약기이고 복잡한 세상에서의 생존과 번성을 위한 유효한 처리기이기 때문에 믿음 체계가 교란되는 것은 에너지의 배분을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복합적 착각에 대한 근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습관의 피조물이며 인간 본성의 많은 측면들이 상당히 굳어져 있다. 이러한 비합리적 왜곡의 상에 기초해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경우 발생하는 것들이 바로 차별과 혐오, 국수주의, 권위주의와 같은 파당적 분리주의이고 공감의 차단이다. 종교적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일체감을 박탈하고 사람으로 보지 않도록 하는 전략은 곧 무비판적 믿음 체계, 융통성 없는 과도한 믿음 체계에 의존하고 있는 까닭이다.
무작위적 세계성에 기초한다고 해서 도덕성이 부재할 까닭이 없다. 오히려 세속주의 수준과 평화로움 및 연민 사이에는 상당히 확고한 상관성이 존재하며, 인류는 이렇게 생물학적 진화와 함께 문화적 공진화를 함께 해왔다. 이러한 세속적 휴머니즘을 옹호하지 않으며, 비판적 사고나 회의주의를 방해, 비난해 온 것이 종교이고, 전체주의, 우파의 포퓰리즘(나치즘, 파시즘 등)임을 역사는 증언한다. 극단적 믿음들이 활개 치는 세계는 순응과 위세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곤 한다.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수구 우파가 즐겨 사용하는 혐오 표현, 표적 위협, 중상모략, 괴롭힘은 이러한 망상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 엄격한 비판적 사고를 수용하지 못하는 비합리성과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지적하는 제 1시스템적 사고의 오류에 매몰된 왜곡된 믿음은 그래서 공동체를 파멸로 쉽사리 빠져들게 한다.
도덕성은 “자연적 도덕 감각이 세월 따라 ‘그냥’ 인간의 문화와 함께 진화해 온 것이다.(334쪽)” 단지 인간인 우리들이 우주에 목적을 지각하는 까닭은 우리 자신이 그저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일 뿐이다. 우주에 대한 가장 끔찍한 사실은 우주가 적대적이어서가 아니라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믿음에 아무리 모순 있음을 지적한들 그들을 자기 통제의 과장된 느낌에서 풀어내지 못할 것임을 인간의 고질적 본성 탓에 불가능 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존재로부터 당위가 유래한다. 가치란 여느 행위가 개별 생물의 생존 또는 종 전체에 대해 상대적으로 가지는 이로움이다.” -292쪽
책은 도덕 덕목들 마다 진화 및 심리학, 현대 신경 생리학을 거닐며 그 자연적 형성의 과정들을 목격하게 한다. 협력과 연민의 진화, ‘자기 보호 이타성’으로부터 진화한 공감적 괴로움, 죄책감, 수치심, 평판, 혐오감 등 감정적 신경망의 진화로부터 도덕성 판단 가치로 진화하는 여정을 확인할 수도 있다. 특히 '글 눈(literacy)'의 확대처럼 타인이 사는 삶과 타인이 처한 상황에 대한 지식과 상상력을 넓혀주는 문화적 진보를 통한 내집단 개념의 확장이 꾸준히 공감 범위를 확장시켜주고 있음을 확인 할 수 도 있다.
우리는 의미를 찾는 종(種)이다. “인생의 의미란 우리 스스로 만든 무엇이며 의미를 만들도록 하는 것은 내면에서 부여하는 동기 및 사회적 본능이다. 우리는 불확실성, 복잡성, 무상함, 불완전성, 통제의 한계라는 어쩔 도리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378쪽)” 이 광대한 무심하고 무작위적 우주의 한 조각 배에 떼 지어 살고 있는 보잘것 없는 존재임을 인정함으로써 서로 보살펴주고 타인에게 연민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통제력은 허약하기 그지없으며 수시로 오류와 왜곡을 하기 일쑤인 불완전한 시스템이다.
우리의 세계에 의도된 이유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일어나는 무작위적 우주의 불확실성을 우리는 견뎌내야 할 뿐이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파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도덕적 후퇴를 경계하며, 비판적 사고와 회의적 사고를 절대적으로 키워나가야 한다. 어떤 믿음에 기초할지는 인간 개체 각자의 결정일 뿐이지만 이것은 세계의 도덕성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이 책은 종교와 과학-이성에 대한 믿음의 논증이라기보다는 우리 인간들의 삶을 어떻게 더욱 의미 있고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가, 그 가치에 대한 사고의 제안이랄 수도 있다.
또한 우리의 취약한 인지 능력의 경향을 파악하여 엄중한 비판적 사고와 과학적 추리를 쫓아 불확실성의 세계를 견뎌내기 위한 인간 본성에 대한 종합 결정판이라 할 수 도 있을 것이며, 반증 가능성을 열어 둔, 즉 거짓임을 증명할 가능성을 열어 둔 과학-이성의 세속적 휴머니즘 세계관을 하나로 종합해 낸 인간 인식론에 대한 역작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