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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일기 - 인목대비 서궁에 갇히다 ㅣ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5
작자 미상, 조재현 옮김 / 서해문집 / 2003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역사의 기록을 읽다보면 매양 떠오르는 생각이란 아, 반복이구나! 하는 현재와 그 닮음,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인간 종에 대한 수치심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 기록물을 읽는 자로서 혹여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 내심을 투사하여 왜곡된 이해를 파생시키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경계하게 되는 마음이다. 사실 이 책 『계축일기(癸丑日記)』는 객관적 사료(史料)로서 많은 의혹을 지니고 있다. 오히려 『한중록』, 『인현왕후전』과 함께 조선시대 ‘삼대 궁중문학’으로 불리듯, 하나의 궁중 비사(秘史)로 바라보는 시선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기록이 사실로서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사(正史)로 바라볼 수 없는 여러 한계를 지닌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작자 미상의 기록물이라는 점과 ‘일기(日記)’라는 제목과 달리 기록된 내용이 종료되는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일괄적으로 정리된 기록이라는 점은 사실성을 저해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작자에 대해서는 대비 측근 내인 설, 인목대비 자작 설, 정명공주와 내인 합작설이 있으나 학계의 통설은 내인 작성 설인 것 같다. 통설이지 이 추정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즉 인조반정에 성공한 서인 세력에서 인목대비를 모셨던 내인들의 목소리를 빌어 광해군(光海君)을 모욕하기 위한 방편으로 작성 되었을 수 도 있으니, 400년 전 그 사정을 과연 누가 알겠는가?
2권 1책으로 구성된 『계축일기(癸丑日記),이하 ‘일기’로 표기함.』는 “만력(萬曆) 임인(壬寅)년(1602년, 선조35년)에 중전께 태기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로 시작되어 “다 이야기하려 하면 신천지가 다하고 후천지가 새로 일어난들 다 할 수 있겠는가?”라며, 사무친 사연을 모두 기록하기에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는 문장으로 맺는다. 즉 1602년부터 1623년까지, 선조 만년에서 인조반정에 이르는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쟁과 당쟁으로 얼룩진 시대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참상을 막 벗어나 상흔의 복구를 도모하여야 하는, 어느 시기보다 단결, 합심하여야 하는 상황이었음에 당대의 정치세계는 파당에 의한 권력욕으로 상대 파당에 대한 적의가 극도로 고조되어 있었다.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가 잉태함으로써 이 당파간의 갈등은 극한으로 치닫는 양상을 보여준다. ‘일기’의 시작부터 작자는 광해군의 장인인 유자신이 인목왕후를 놀라게 하여 낙태시키려했으며, 그 세부적 추태의 양상들을 기록하여 상대 파당에 대한 비열성과 혐오의 감정을 여과없이 노출하고 있다. 그러나 대군이 아니라 공주가 탄생하자 유자신이 간신히 축하예물을 올렸다는 기록은 적대 감정에 휩싸여 사실성보다는 추정된 혐오감에 포획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즉 사료라는 객관적 이성에 기초하여 쓰겠다는 의지가 애초에 없는 감정의 기록물로서 보게 한다.
선조의 첫 번째 왕후인 의인왕후는 후사 없이 죽었으며, 다시 맞아들인 왕후, 즉 계비가 인목왕후이다. 광해군은 정비인 의인왕후의 자식이 아닌 후궁 공빈 김씨의 둘 째 자식이었기에 인목왕후의 자식이 지니게 되는 적통성은 광해군과 그의 추종 세력에게는 불안 요소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1608년 선조가 죽자 광해군이 즉위(卽位)하게 됨으로써 곪았던 권력 쟁투는 표면화되어 상대 파당에 대한 잔혹한 보복성 공격이 본격화된다. 일기는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졌던 인목대비(仁穆大妃)와 그 내인, 상궁들이 겪어야 했던 처절한 일상의 기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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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파당(派黨)은 이황과 조식 중심의 동인(東人)과 이이와 성혼 중심의 서인(西人)으로 나뉘어 있다가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다시 북인은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분열한다. 대북과 소북의 분열은 일종의 동일 집단의 내부분열이랄 수 있다. 어제의 동료이며 벗이라는 교유관계는 사생결단(死生決斷)식의 증오 대결로 변질된다. 권력 욕심에는 오직 이기심, 탐욕만이 최고의 가치가 된다. 이들의 싸움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자신들의 이익을 포장하기 위해 적절한 법규와 관례, 제도를 도덕적 표현에 싸서 상대를 향해 내뱉는 꼴까지 역사는, 인간은 한 치도 변하지 않았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인목대비의 둘째 자식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의 대결이라는 분열된 어제의 내집단간의 반목은 아마 조선조 역사에 있어서 가장 처참하고 잔혹한 것이었다 해도 그릇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어느 파당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를 떠난 인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 즉 도덕적 인간에 대한 회의적 시선을 낳는다. 일기의 사실성(事實性)을 폄훼하더라도 1613년에 유자신을 필두로 이이첨, 정인홍이 주축이 된 대북이 인목대비의 부친인 김제남에게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역모죄를 씌워 참살함으로써 시작되는 계축화옥(癸丑禍獄)은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을 비롯해 영창대군. 소북파 일원을 말살하려는 피의 향연을 빚어낸다.
역모에 대한 자백, 허위 자백인 것인데, 여기에 동원되는 회유와 협박, 각종 고문, 증거와 증인의 조작과 공모의 내용들에 시선이 따라가다 보면 오늘 정치세력이 된 검찰 권력이 상대 세력에 대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의적으로 검찰 수사권을 남용하는 것과 중첩되어 독자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실제 대비전과는 소통은 물론 일면식도 없는 자를 구슬러 “마치 제가 본 것처럼 말하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는 탄식처럼 음해는 물론 혐의를 씌운 내인,상궁들 앞에 그들의 부모를 꿇려놓고 자신들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죽일 것을 을러대는 장면이나, 자결을 택할 만큼의 모질고 악착같은 형벌의 고통스런 묘사들은 가해자들인 권력의 욕심과 불안의 심리를 그대로 드러낸다.
또한 영창대군(당시 7세에 불과함)을 내놓으라고 인목대비를 위협 재촉하는 광해군의 서신과 대비의 답장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불안을 읽을 수 있어 여기에 그 일부를 옮겨본다.
인목대비의 글: 세상에 다시없을 큰 변을 만나 내 아비와 첫째 동생을 죽이시더니 이제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 대군은 아직 내 슬하를 떠나지 못하는 7,8세 어린 아이이라오. 동서도 분간 못하는 어린 것을 어찌하려오? (...)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어른의 죄가 가당키나 하리까?
광해군의 글: 아무려면 아이가 무얼 안다고 설마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대궐 밖으로 피접하는 일은 옛날부터 자주 있는 일이나, (...) 무슨 해로운 일이 있겠습니까? 근심 마소서.
광해군의 글: 지금이라도 보내 주신다고 하면 살릴 수 있습니다만, 이렇게 막고 내보내지 않으시면 영창대군은 살지 못하오리다!
이러한 글이 대비와 광해군 사이를 수차례 오가며 위협과 겁박이 지속되다가 마침내 대비전의 상궁과 내인들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협박이 가해지고, 생존한 친가의 어미의 목숨마저 위협하자 마침내 이들 대비 전(殿) 식솔들이 대비를 설득하여 영창대군을 내놓기에 이른다. 아마 이 장면은 살해당할 줄 알며 어린 자식을 내주어야 만 하는 어미의 애끓는 고통으로 차마 인간으로 쉬이 읽어 내기 곤혹스러워 치를 떨게 된다.
21세기 민주화되었다고 하는 한국 사회에서도 이러한 양태를 여전히 반복한다. 언론에 심문내용을 흘려 전직 대통령을 모욕하고, 기어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수구 정치배들이 또다시 이러한 작태, 야만적 행위를 거듭하려 하고 있다.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없는 인간들, 결국 이 맹목적 혐오와 증오는 자기 더러운 탐욕을 은폐하는 무지에 터 잡은 악(惡)의 발현 이상이 아니리라.
영창대군의 유배와 죽음을 대비에게 알리지 않는 광해군의 처사에서부터 30여 명의 대비전 내인과 상궁들을 대비 음해와 위협의 수단으로 처형을 반복하여 살아남은 내인들을 죽음과 고문의 공포로 지속적으로 몰아넣는 행위, 급기야 서궁(西宮)에 유폐시켜 외부와의 모든 물적, 인적 통로를 차단, 대비의 죽음을 종용하는 매일의 그 집요하고 악착스런 괴롭힘의 내용들 또한 인간 도덕성에 대한 회의를 몰고 온다. 주변 측근들을 먼저 윽박지르고 위협하여 본존을 겁박하는 이러한 양태 또한 지금에도 똑같이 자행되는 검찰과 수구집단의 전형적 수법이다.
그 극악함은 대비에게 충성하였다고 끌려가 참살당한 상궁과 내인들의 종복까지 끌어내 죽이려는 대북파들의 겁박에 오랜 유폐로 쇠약해진 대비가 광해군을 향해 하소연하는 글이 있다. “내인 삼십 여인을 다 죽였으니 궁중이 비어 까막까치와 도깨비만 꾀어 있는데, 죽은 내인의 종까지 끌어내면 나 혼자는 무서워 살지 못하겠소이다.” 광해군은 끝없이 죽음을 재촉하고 요구한다. 마지막 씨까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이러한 비극적 정치 보복의 역사가 근절되지 않고 수백 년이 흐른 지금에도 반복하는 이 땅의 정치배들이 만일 이 기록을 읽는다면 어떤 말들을 뱉어낼까? 불의한 권력은 항시 자신들의 불안을 상대에게 떠넘기려 한다. 그 불안을 상대 집단을 죽이는 것으로, 가두는 것으로, 기를 꺾기 위해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으로 넘기려 한다. 동료 인간의 죽음에 환호작약하는 황색 언론들, 추악한 정치 검찰들, 온통 오물 냄새로 뒤범벅된 정치배들, 이에 기생하는 기회주의적 담론가들, 이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악의 내면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 것일까? 작자는 말미에 담담하게 이렇게 적고 있다. “세상에 이런 만고성사(萬古盛事)가 있었다.”고.
서인의 인조반정으로 닫혔던 서궁의 문이 열리고 대비는 10 년여에 걸친 죽음의 위협에서 풀려난다. 광해군은 두 차례의 왜란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복구하고, 명과 새로운 후금 사이에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는가 하면, 백성의 안위나 국가 제도의 정비 등에도 탁월한 업적을 남긴 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붕당(朋黨), 즉 파당간의 극렬한 대립, 정치적 폭력을 관리하는 데 실패했으며, 형과 동생, 윗전인 대비의 잔혹한 유폐 등 심각한 도덕성의 실종은 그의 지위에 대한 정당성을 훼손시킨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럼에도 『계축일기(癸丑日記)』에서 증오의 언어로 적시된 광해군의 부왕 선조 독살과 형 임해군 살해, 선조의 여인들과 간통을 일삼았다는 음증(淫蒸)의 주장처럼 확인되지 않는 음해성 소문을 실제인 양 기술하고 있듯 그 진위여부에 대한 많은 의혹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의혹의 과제들은 역사가의 몫일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피바람의 반복을 북파들이 피해갈 수 없었음은 구태여 거론할 것도 없다.
반복되는 보복, 그 잔혹함은 피의 반복을 부른다. 한 줌의 권력을 위해 세상을 분열시키고 자기 이익을 탐하는 이러한 구태를 언제나 멈출 수 있을까? 아마 이 궁중 비사의 기록들을 읽다보면 실로 많은 도덕적 회의에 사로잡히게 된다. 또한 정치와 권력이란 대체 무엇인지, 동료 인간을 무참히 살해할 만큼 제어 할 수 없는 욕망인 것인지, 결국 인간 세계는 이 짓을 영원히 반복할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혹은 극도의 이기적 동물인 것인지를 살피게 된다,
6.18일자 네이버 뉴스 헤드라인 포탈 페이지는 “전임 정부에서는 안했나”라며 ‘보복정치’를 공식화하는 활자들로 장식되어있다. 검찰의 수사가 자신의 사적 욕구를 실현하는 보복적 도구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참담함을, 이 용렬하고 몽매한 권력이 또다시 반복되는 현실이 수치스럽기 그지없다. 이 짓을 대체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지, 시민대중은 이러한 정치 양태를 언제나 방관할 것인지, 이 점진적인 권력의 사유화와 도덕적 무감증이 우리를, 이 사회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