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의 생각에는 명령이란 것에 대해 어떤 숙명적인 굴종의 정신이 보입니다.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수행하는 행위자는 그 명령의 선악과 관련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어떠한 관련성도 없는 별개의 사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수행 행위와 행위자를 구분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이러한 텅 빈 자아, 진정한 사유가 불가능한 이들의 개념 없음과 망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선 한국사회에는 이와 관련한 아주 뚜렷한 오래되지 않은 사례가 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과 그의 심복인 장세동은 이를테면 명령자와 수행자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수없는 증인들과 증거에도 불구하고 수행자는 자신이 저지른 범행을 결코 자인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한나 아렌트가 전범 재판에서 나치의 유태인 처형 운반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태도로부터 발견한 것, 즉 명령 수행자가 지니는 인간 실존성을 결여한 사유의 전적인 부재, 즉 사유의 진정한 불가능성의 지대인 악의 평범성과 동일한 선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어떠한 죄책감도 없으며, 단지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나는 유태인을 저주하는 사악하고 악의 가득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이죠. 자신은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명령과 명령 수행자의 관계에서 그 책임에 대한 짧지만 위대한 기술(記述)이 있습니다. 불가리아 태생의 스페인계 유대인인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인 엘리아스 카네티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이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가 그랬을 리 없다.’며 자신들이 한 짓의 흔적을 마음속에서 찾으려 하지만 그것을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명령 수행자가 자신들의 행동으로부터 이처럼 놀라울 정도로 영향을 받지 않으며, 심지어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후회도 마음속에 새김도 없는 이유입니다. 왜 인간의 마음에 이런 양상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명령의 본질 때문이랍니다. 명령은 그 명령을 받아들이고 수행해야 하는 사람에게 가시를 남깁니다. 이 낯선 이물질인 가시가 마음속에 새겨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낯선 것, 가시로부터 벗어나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가시에게 명령이 지닌 죄책감을 떠맡깁니다. 즉 자신이 아니라 가시에게 명령이 지닌 불의나 부당함을 넘기는 것이지요, 결국 가시야말로 진짜 범죄 행위자가 되는 것입니다. 카네티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낯설고 이질적인 명령일수록 죄책감은 자아와 분리, 더욱 독자적인 된 가시의 것이 되는 것이라고 말이죠. 이렇게 죄의식과 자아가 분리되어 있기에 악으로서의 명령을 수행한 자들은 한결같이 행위와 자신을 일체화 시키지 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명령에 따라 행동했던 사람들은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공동생활을 하는 인간들에게 심히 위험한 요소입니다.

 

인간에게는 진정 부당하거나 불의한 명령과 대결하고 그 횡포를 뿌리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것일까요? 단지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만이 유일한 것일까요? 아마 어느 누구도 이처럼 명령의 무조건적 수행만 하게 된다면 그런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요? 공포와 죽음만이 휩쓰는 독재 권력이 지배하는 지옥 아니겠어요?

 

한국 작가 천운영생강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고문경관 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지요. 이 자는 권력의 시녀가 되어 대공수사기관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고문기술을 발휘하여 민주투쟁을 하는 학생들, 노동자들을 짐승처럼 다루는 독보적인 백정이 됩니다. 그런데 이 자는 대통령과 국가의 안위를 위한 충성스런 명령 수행자였을 뿐이라며 자신은 정의를 수호한 일꾼이라고 주장합니다. 특히 무고한 청년, 시민들을 무심하고 죄의식 없이 고문, 살해하며 자신과 자기 가족의 안위에 대해서는 끔찍한 인간인 것이죠.  고문기술자 이라는 인간은 카네티가 말하는 가시에 죄의식을 저당 잡힌 것이죠. 아마 자신의 생존을 위한 인간의 무의식적 처분이었을 거예요.

 

그들은 모두 똑같은 목소리로 항변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조직에서 시키는 일, 권력이 명령한 일을 수행하는 것, 그것이 설혹 불의이고 위법이며 반인륜적일지언정 그런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알려 하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아니 그러한 구분에 대한 인식조차 이 사회는 요구치 않았고, 권력을 향해 달려가도록 채찍질하는 것이 이 사회 아니었느냐고 말입니다.

 

아이히만도, 고문기술자 안도, 장세동도, 이들 모두 그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친절하기까지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 명령권자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수행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핍박하며 심지어 죽음에 내몰기까지 했습니다.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은 그 어떠한 범죄행위도 스스럼없이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천운영의 소설에서 명령의 맹목적 수행자는 천박하기는 하지만 결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닙니다. 아이히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한결같이 사유하는 인간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타인에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오히려 두 번째일 만큼 사유의 진정한 불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명령은 결코 숙명이 아닙니다. 결코 복종하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는 인간을 명령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저항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령이 주어졌으니 안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더구나 자신의 삶의 지속성을 위해 이행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는 이 세상을 결코 지탱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지금의 한국사회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처럼 인식될지 모르겠지만 당대의 많은 젊은이들과 노동자 시민들의 피와 죽음이라는 명령의 거부, 저항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굴종을 요구하는 명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시는 한 번 슬쩍 치면 떨어져 나가는 그러한 것이 되는 명령이 되어야 합니다. ‘()과 사고(思考)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은 결코 반박될 수 없는 진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맹목적 추종은 모든 것을 퇴행시키는 전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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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2-07-06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중과 권력이 새단장해서 나왔군요!

필리아 2022-07-06 09:48   좋아요 0 | URL
지금 판매되는 책이 2010.10 개정판이네요. 훌륭한 저작이지요. ^*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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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 신기한 기적처럼 작동하지만 이해하는 사람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막론하고 단 한 명도 없다. 우리 정신은 양자 역학의 역설과 모순을 감당할 수 없다. (...) 만지작거리고 노리개로 쓸 뿐 결코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 253

 

알지 못하며 이용하는 것이 어디 위의 문장처럼 양자역학 뿐 이겠는가? 리볼버 권총을 손에 쥔 세 살 아이 같은 아찔한 위기의 장면들이 인간의 역사를 가로지른다. 책은 화학, 물리학, 수학이 문학적 예술의 언어로 버무려져 그 주체였던 인물들을 통해 욕망의 우연적 과실(果實), 이 세계에 대한 이해를 묘사해보려는 집요한 탐구의 역사를 빚어내고 있다. 그것은 인간 정신의 한계, 지적 파열의 순간에 대한 성찰이다.

 

다섯 편의 픽션+논픽션으로 구성되어 바로 오늘의 인간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정신, 그 거대한 전환적 이정표가 되었던 과학적 사건과 인물들을 중심으로 천재와 광기의 영역을 파고든다. 그 시작은 나치의 강제수용소 벽돌을 물들인 프러시안 블루로 불렸던 고운 파란색, 치명적 독가스인 치클론 AB가 남긴 흔적이다.

 

이것은 18세기 고급의 화려한 안료를 얻으려는 실험의 부산물이다, 극미량의 황산을 입힌 스푼으로 프러시안 블루를 휘저어 탄생한 비소계 안료, ‘에메랄드 그린은 나폴레옹 숙소에 칠해짐으로써 성분의 유해성을 알지 못했던 황제와 그의 가솔들이 서서히 초토화되었음은 물론이다. 분명 창조적 노력의 결실이지만 알지 못하는 사용이 무엇을 초래하는지에 한 사례일 것이다. 첫 편인 프러시안 블루는 이처럼 화학 물질의 발견과 추출을 둘러싼 영광과 분노의 역사이다.

 

오늘날 인류의 먹거리 증산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공기 중 질소 채취에 성공한 유대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다. 천연 비료를 대체케 한 이 연구는 그에게 노벨상을 선사했지만, 1차 대전 최초의 독가스 공격이었던 이프르 전투에서 화학전을 지휘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로부터 전과를 인정받아 전쟁부 화학부서 책임자가 되기도 했으며, 2차 대전에는 자신의 활약으로 탄생한 시안화물 살충제, 즉 치클론 가스가 동족을 살해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인간을 산업적 규모로 몰살할 수단을 고안하고 우쭐대던 과학 맹신자의 뒤늦은 죄책감을 읽는 것은 안타까움이다.

 




슈바르츠실트 특이점, 심장의 심장, 우리가 이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이들 세 편은 인간 지성의 한계, 그 지적 파열의 지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의 주제를 살필 수 있을 것 같다.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은 독일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카를 슈바르츠실트 무한한 중력으로 공간이 휘어져 스스로를 감싸고 우주의 나머지 부분과 영원히 단절되는 맹점, 불가지(不可知)”의 발견에 대한 이야기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 원리를 발표하고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인 19151222, 전쟁의 참호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든다. 일반 상대성 방정식의 정확한 해()를 기록한 흙먼지 묻은 편지의 주인공, 이 천재 수학자 슈바르츠실트는 특이점’,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억누를 수 없는 힘으로 그의 모든 생각에 어둠을 드리우는, 형태도 차원도 없는 공허를 본 것이다. 그것은 한번 넘으면 무지막지하게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는, 어떤 표시도 경계도 없는 찰나의 지점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심연, 훗날 학계는 이를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이라 명명한다. 이것은 저자 벵하민 라바투트에 의해 이러한 물음을 낳는다.

 

물질이 이런 종류의 괴물을 낳는다면 그것은 인간 정신과도 상관관계가 있을까?

인간 의지가 충분히 집중되면, 수백만 명의 정신이 하나의 정신 공간에 압축되어

하나의 목적에 동원되면 특이점에 비길만한 일이 벌어질까?” -71

 

메타버스, 인공지능, 오늘의 세계는 자신들이 지향하는 것이 도달했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함에도 마치 천상의 낙원이 열릴 것처럼 질주한다. 인간 정신이 이렇듯 압축 동원되면, 그 선, 특이점을 넘어섰을 때 바라던 인간의 희망이 성취될까? 특이점 너머의 세계는 암흑, 공허, 영혼의 그림자만 있을 뿐이라고 그토록 신봉하는 수학, 물리학이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이 무모한 질주의 동력인 이기적 욕망, 자본이란 신의 추구는 분명히 바른 길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심장의 심장역시 슈바르츠실트의 심연과 그리 멀지 않다. 아마도 1958~1973 세대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명석한 수학자였던 모양이다. 수학의 거성으로 불리는 알렉산더 그로텐디크의 탁월한 추상 능력이 발견한 수학적 우주의 핵심에 자리 잡은 기이한 실체, ‘심장의 심장에 대한 문학적 단편이랄 수 있다. 희미하디 희미한 미광 말고는 아는 것이 없는,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무수한 이론들을 묶을 수 있는 은밀한 뿌리를 밝혀내려 했던 인간의 돌연한 도피와 은둔의 삶을 지펴내고 있다. 그는 대체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소외된 자들에 대한 아낌없는 베풂과 단식과 헐벗음의 길을 걸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슈바르츠실트와 같이 그 공허의 심연을 보았기에 동료 인간에게, 인류에게 보내려했던 연민 아니었을까?

 

우리가 이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슈뢰딩거의 우주 입자, 원자 내부 현상을 지배하는 규칙을 둘러싼 갈등과 마침내 배타와 적대와 동시에 상보적인 그 불가해의 세계에 대한 선언, 우연을 가지고 노는 천수(千手)여신의 변덕에서 탄생한 놀랍고도 희한한 이 세상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결정론 종말의 이야기다.

 

양자 물체에는 본질적 성질이 전혀 없다. (...) 측정되기 전에는 어떤 성질도 없다.

(...)입자를 실재하는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측정 행위다. - 223~224

 

어느 시인의 말처럼 과학과 문학의 언어가, 우리 의식의 뿌리에 질긴 방식으로 얽혀있다고 느꼈듯이 이 단편은 행렬과 파동의 방정식이 두 천재 물리학자의 감성적 직관, 그 원초적 삶의 감각들과 조우하며 아름다운 문학의 언어들로 번역되어 세계의 근원, ‘실재라는 모호하고 불가해한 인간 한계에 대한 겸허한 이해로 안내한다. 19271024일은 어쩌면 인류의 사상적 거대한 전환점이라 할 것이다.

 

이날, 폴 디랙, 볼프강 파울리, 막스 플랑크, 마리 퀴리. 헨드릭 로런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닐스보어... 최고의 천재들이 한 자리에 모여, 물리학은 실재가 아니라 우리가 실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에만 관여해야 한다며 전통과의 가차 없는 결별을 선언했던, 훗날 코펜하겐 해석으로 불리는 인간 사고의 대혁명이 있었던 날이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말한다.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객관적이고 초연한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과 맺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오늘의 과학이 치달으려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윤리적으로 성찰토록, 우주 자연, 인간이라는 자연과의 관계를 잊지 말라는 주문 아니겠는가?

 

책을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단편 밤의 정원사는 아름다운 한 편의 에세이에 가깝다. 앞 선 네 편의 글들을 포괄적으로 정리하는, 그러면서 오래되어 썩어가는 할머니가 아끼던 한 그루의 나무와 훼손되지 않고 듬성듬성 남아있는 작은 숲과 호수가 있는 자신의 정원, 한 때 수학자였던 밤의 정원사와의 나지막한 대화를 들려준다. 밤의 정원사는 수학이 우리 세상을 무시무시하게 변화시키리라는 돌연한 깨달음과 함께 은거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우리 안에 있는 인간성의 진짜 의미를 점차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악화되는 세상에 대해서.

 

하이젠베르크도, 슈뢰딩거도 아인슈타인도, 그 어느 누구도 인류 삶을 지배하는 많은 수식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세계를 이해하는 인간 존재가 더는 없다는 말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 가뭄, 질병, 역병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레몬 나무가 어떻게 죽는지 아느냐는 물음이 등장한다. 마지막 봄이 되면 거대한 꽃송이가 대기에 향기를 가득 채우고, 엄청난 열매를 맺고는 그 과잉의 결실로 쓰러져 죽는다는 것이다. 이 메타포는 우리에게 심원한 울림을 전달한다.

 

죽음을 앞둔 풍요, 이 야릇한 광경, 과숙(過熟)의 과시는 오늘의 인류를 개체들을 향한 자문의 요구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은 과학 천재들,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 욕망의 집요한 추구와 결실로서의 파괴와 죽음, 낙천적 희망과 무지의 그림자 지대를 거닐며 인간 인식의 한계를 가히 최고의 미적 언어로 그려낸 물질계의 승화된 문학예술이요, 정신사의 걸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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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소사(Xosas)족의 자멸

-   집단의 맹목적 광신과 권력의 교활함에 대해서



인류의 위대한 정신, ‘엘리아스 카네티가 쓴 군중과 권력은 군중의 물리학, 권력의 정신분석에 대한 독보적인 역작이다. 이 책의 한 장()군중의 역사에는 1856년에서 1857년에 발생한 남아프리카의 한 부족 전체가 최면에 걸린 듯 자멸을 향했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이 이야기가 내게 준 강인한 암시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실과 너무도 닮아있는 낯익은 광경이라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적, 혹은 먹잇감을 손에 넣은 권력은 세계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며, 자신 이외의 그 어떠한 존재도 미물, 벌레, 음식거리 이상이 되지 못하기에 부동의 오만함을 즐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란 군중의 맹목적 추종이라는 우매함과 반대자에 대한 거리낌 없는 죽음의 실행이며, 군중 전체로 권력의 욕망을 확산 주입시킬 반복된 소문을 지속할 매체와의 동거이다.

 

사실 한국 사회는 조중동 황색 미디어를 비롯한 기득권 박탈에 반감을 가진 매체들이 5년 내내 끈질기게 반복한 흑색선전과 왜곡이 광범위해져 결국 몽매한 군중 전체에게 심리적 진실로 무의식적으로 안착시켜 온 것이 작금의 결과일 것이다. 이야기의 실질적 내용에 앞서 군중에 대해 보수적 관점에서 군중의 심리를 파헤쳤던 귀스타브 르봉의 정의를 잠시 살피고 가기로 한다.

 

르봉은 군중은 예외 없이 정신적으로 무척 열등하다.”고 강력하고도 확신에 찬 어조로 단언했다. , 군중에게는 의식을 지닌 개성은 사라지고 개인의 감정과 생각이 집단화되어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매우 뚜렷한 집단정신이 형성된 인간의 무리라고 말이다. 군중 구성원은 모두가 지닌 평범성을 공유하며, 독자적 의식이 사라지고 의지력과 분별력을 잃는다. 그리곤 무의식 활동의 우세, 감정과 생각을 똑같은 방향으로 유도하는 암시와 전염, 암시받은 대로 즉시 행동하려는 경향(1)을 가진다고 말했다. 이러한 앎을 전제로 이야기로 들어가 본다.

 

18565월 크소사(Xosas)족의 한 어린 소녀가 물을 깃기위해 집 주변에 흐르는 시냇가에서 마주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소녀는 낯선 사람들을 발견하고 부족의 예언자인 삼촌 움흘라카자에게 시냇가의 이야기를 전한다. 움흘라카자는 시냇가에서 낯선 이들로부터 어떤 의식을 수행할 것을 요구받는데, 그것은 죽은 자들을 위한 희생 제물로 황소를 받칠 것이며, 나흘 이후 자신들에게 다시 오라는 명령이다. 이 최초의 명령에는 어떤 목적도 발설되지 않은 맹목적 실행의 완수라는 권위적 명령만이 있는데, 마을의 예언자는 이를 저항 없이 수행한다.

 

나흘 후, 명령대로 다시 찾은 시냇가에서 움흘라카자는 낫선 이들 중에서 몇 해 전 죽은 형을 발견하고, 나머지 사람들도 부족의 누구였는지를 알아차린다. 죽은 자들의 혼령이다. 죽은 자들은 비로소 목적을 말하는데, 크소사족을 돕기 위해 바다 건너 저편에서 왔으며, 무적의 힘으로 영국인을 몰아내겠으니, 움흘라카자는 부족의 추장들과 그들 사이의 중개자 노릇을 하여야 하며, 이 조언을 받아들일 경우 놀라운 이적들이 발생하리라 말한다.

 

영매(靈媒)가 되어 움흘라카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살 찐 소들을 죽여서 먹어야 한다고 말하고, 영계(靈界)로부터 전해진 이 이야기는 크소사족 사이에 급속하게 퍼진다. 소문을 잽싸게 나르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유별난 특성이다. 마치 자신이 제일 먼저 정보를 손에 넣었음을 과시하려는 듯이. 부족의 대추장 크렐리는 몹시 기뻐했다. 이것이 크렐리의 공작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대추장은 지체 없이 혼()들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부족의 각 추장들에게 영계에서 전달된 명령에 조력할 것을 요청한다. 부족의 미래에 대한 예언, 죽은 자들의 입을 빌려 제시된 비전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즉 입증을 요구할 대상이 없기에) 자기 생명의 안전을 위협받는 상태에 몰리게 된다. 군중은 예외 없이 멍청하다는 르봉의 말을 입증하듯 전 부족민들은 광기에 휩싸여 자신들의 가축을 도축하고 한 톨의 곡식마저도 모조리 없애기 시작한다.

 

이때 가세하는 상황의 묘사가 있다. 예언자를 통한 계시들이 신속하게 늘어갔다.”는 것이다. 오늘로 말하자면 황색 미디어들의 줄기찬 반복적 주입이다. 신들린 수많은 사람들은 시냇가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인간사를 주관하는 혼령들의 목소리라 선언하며, 점점 많은 소들이 살육되고 희생물은 계속 늘어난다. 이러한 여론 몰이의 숨겨진 의도를 간파하거나, 이에 동조하기를 주저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깨달은 자들은 탈출하거나 마지못해 동조하거나를 선택하여야 한다.

 

이 요구는 살상과 죽음의 요구라는 자기 실존의 위협이라는 실체를 띠고 있음에도 부족민에게는 위대한 인물들과 현명한 인물들이 부활하여 성실한 후손들의 기쁨과 함께 하리라(2)는 낙관적 희망의 기대로 인식될 뿐이다. 의지력과 분별력을 상실한 군중의 정신은 자신의 오염을 지각하지 못한다. 바로 광기이다. 문명을 떠받치던 도덕적 세력이 영향력을 상실하면 분별력 없고 난폭한 군중이 등장해서 그 문명을 해체한 것이 인류 역사(3)라고 했다.


 



권력은 이러한 역사적, 심리적 인식을 꿰뚫고 있다. 혼령들이 약속한 예언의 날이 다가올 때까지 공식 자료는 “1857년 한 해 동안 크소사 지역의 인구가 105,000명에서 37,000명으로 줄어들어, 대략 68,000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 기록에는 권력을 손에 넣은 자의 잔혹, 오만, 경멸(), 탐욕, 교활함이 모두 담겨있으며, 군중의 특성, 즉 군중이라는 다수가 지니는 힘의 과신과 그로인한 본능의 억제로 풀려난 야만성, 그리고 소문의 무지막지한 전염성과 파급력, 피암시성과 최면성이라는 맹목적 믿음의 상호작용이 불러오는 상승작용으로서의 자기 파멸성이다.

르봉이 군중 심리에서 열거한 군중의 감정과 도덕성중 몇 가지만 더듬어 보자. 군중은 순간에 일시적으로 받는 자극의 영향 아래 있을 뿐이며. 비판적 사고능력을 상실하고 모든 것을 무작정 맹신한다.” 이러한 군중의 상상력으로 사건이 왜곡되기 시작하면 전설이 만들어지고, 사소한 사건조차 곧 커다란 사건으로 변형된다. 논리적으로 아무런 관련 없는 일련의 새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군중은 일관성을 따질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반복되는 이러한 집단 환각 메커니즘이란 항상 이런 식이다.

 

이 이야기에는 많은 정치적 앎에 대한 교훈이 있다. 화려한 언어적 수사로 꾸며진 명령에는 음흉한 목적이 있다는 것, 군중의 반목과 사회적 갈등을 조작하는 것, 그래서 자신들의 증가와 승리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 자신들의 예언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군중을 조작하는 군중결집체로서 작동하는 폐쇄된 군중집단(검찰, 황색언론기업, 등등-이야기에서는 시냇가 낯선 사람들)을 이용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명령을 악착같이 반복하며 재촉하여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군중의 살상, 죽음의 전가라는 것이다. 파멸로 이끄는 무책임한 권력인지를 판단 할 수 있는 것은 군중 개체이다. 군중에 휘말리면 사고(思考)는 흔적없이 사라진다.

 

사실 권력은 시냇가 낯선 사람들, 죽은 자의 욕망이다. 때문에 이 욕망의 주체인 권력은 교만과 무지를 그 태생적 본성으로 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새로운 권력에게 국민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손에 넣은 것은 단지 언제든 씹어 삼킬 먹잇감에 불과하니까. 그들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저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타자에 대한 무심과 거들먹거리는 걸음은 모두 타당한 이해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외적 유사관계만 보이면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터무니없고 맹랑한 추론방식, 허망한 환상일수록 꼬이는 군중의 맹목적 열정이라는 토대, 이 단순한 무지가 대중을 휩쓸면 그것은 곧 퇴행과 자멸의 길일 것이다. 크소사족을 닮은 한국의 군중사회와 권력의 실상을 생각게 한 오래된 그러나 너무도 현실을 자극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出 處 :

(1) 귀스타브 르봉 . 군중 심리2022.1, 현대지성 , 39

(2) 엘리아스 카네티 , 군중과 권력2012. 바다출판사 , 255~265

(3) 귀스타브 르봉, 위와 동일,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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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물고 달아난 도둑고양이 - 시의 길을 따라 걷는 죽음의 풍경
송기호 지음 / 싱긋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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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 아흔이 넘은 아버지를 어느 시점부터 인식하게 되었다. 대부분 거실에 깔아놓은 침구에 누워계시려 한다. 시간의 무서움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존재들로부터 생의 활기를 빼앗아가고 봉인된 죽음의 안식(安息)을 받아들이라고 재촉하는 것만 같다. 부쩍 죽음이라는 실존적 필연성이 가까이 다가옴을 느끼는 시절이다.

 

내 삶의 자취와 남은 생에 대한 의미를, 그리고 죽음의 수용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인지를, 즉 삶과 죽음을 오가는 사념에 빠지게 된다. 시간을 물고 달아난 도둑고양이는 이러한 인간 운명에 대한 고뇌어린 환유(換喩).

 

죽음은 강 건너에서 (탐욕스런 눈으로) 환하게 불이 켜진 삶의 집을

들여다보는 도둑고양이 같다.” -15

 

영미(英美) () 아흔 여 편과 함께 죽음에 대한 사유의 지대를 거닐며 저자는 책을 읽고 있는 산 자들에게 삶의 축복과 행복의 존엄함을, 죽음이라는 필멸의 운명에 도사린 그 음험하게 보이는 비밀이란 무엇인지를 직시하게 한다. 미국의 여성 시인 에밀리 디킨스누구도 그것에(죽음) 어느 것도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며, 봉인된 절망”, “장엄한 고뇌라 노래했다.

 

그런가하면 셰익스피어는 소네트에서 죽음이란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삶에 대한 더욱 커다란 사랑을 할 것이라며 아래와 같이 쓰기도 했다.

 

모든 것 안식 속에 봉인하는 죽음의 다른 자아인

검은 밤이 곧 앗아가 버리는 황혼을.

 

........ 中略 ........

 

그대 이것 알아채고 사랑 더욱 커져

머지않아 이별할 것을 더욱 사랑하리라. (소네트 73),

 

책은 삶과 분리되지 않은 죽음의 이해에서부터 죽음의 예감, 묘지의 풍경들, 죽고 난 이후의 남겨진 자들의 슬픔, 그리고 삶을 위한 조언으로 죽음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향한 점진적 접근의 단계를 밟고 있다. 이들 필멸의 운명을 노래한 시편들을 통해 저자는 삶을 죽음이라는 소멸의 상자에 봉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선명한 아름다움의 깨달음, 이를 통해 삶의 의미라는 귀중한 가치를 찾을 수 있도록 하려는 실천적 각성을 나누고자 한다.

 

사람들은 몸이 죽고 나서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살아있으리라 믿기도 한다. 그러나 몸은 소멸하고, 그 몸으로서 경험 할 수 있는 것들을 더는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죽음임을 부정할 수 없다. 종교적 내세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야 삶은 하나의 경유 지대이니 그들에게 죽음의 두려움이란 어리석은 감정에 불과할 터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는 두려움에 대한 그 강박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죽은 이의 장례식에서 옷깃을 여미며, 묘지를 둘러보며 모두에게 기다리는 보편적 운명,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셰익스피어가 measure for measure에서 지겹고 혐오스런 세상살이도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에 비하면 천국이라 외쳤듯이 살아있음은 죽음이란 무지의 세계보다 낫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죽음의 그림자를 누구도 피할 길이 없으니, 이를 상상하며, 죽음의 불안을 다스리고, 삶의 기쁨을 확인하려한다. 그것은 미국 시인 반 다이크(Henry Van Dyke, 1852~1933)’의 시(), 내 시야에서 사라졌네처럼 사라짐과 나타남의 변주로, 삶과 죽음이란 내용과 형식의 차이에 불과함으로 사유되기도 하고, ‘메리 프라이(Mary Elizabeth Frye, 1905~2004)’내 무덤에 서서 울지 말아요와 같이 나는 천 가락 불어오는 바람 / (...) / 부드러운 가을비라오.”라며 우주 자연에 깃든 새로운 존재일 것을 노래하기도 한다.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이 필연적 실존적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지혜의 탐구로서 시는 영원한 삶의 수단이었으리라. 소개되는 시들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지속적인 의미의 추구이며, 이로서 매 순간 삶의 향유, 오래 머물지 않는 삶의 그 소중함을 깨운다. 때로는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한 어린 자식이기도 하고, 젊은 형제 자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기도 하다.

 

이들 애가(哀歌)를 읽다보면 사랑하던 이를 상실한 사람들이 가슴에 묻는 무너져내리는 슬픔을 통해 산 자로서의 어떤 의무감을 느끼기도 한다.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앤 브론테, 세 자매들의 각 대표작인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와일드 펠 홀의 소작인에 대한 독서의 욕망과 더불어 동생들을 연이어 잃은 맏언니 샬럿 브론테의 시 앤 브론테의 죽음에 부쳐를 읽으며, 일상에 붙들려 소원해진 형제, 자매, 벗들을 향한 연민으로 갑작스레 울컥하기도 한다.

 

가을, 혹은 황혼을 떠올리면 무언가를 끝낸 후의 평온한 휴식의 시간에 대한 기대로 이어진다. 가을빛이 그토록 선명하고 강렬한 것은 곧 꺼지게 될 빛이 아주 잠깐 온 힘을 다해 타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가 올 가을빛이 내게도 그토록 강렬한 것일 수 있을까? 노동자 시인 카니가 노래한 가을 Autumn의 시()처럼, 삶의 모든 나날을 성실한 노동으로 보낸 후 그 보상으로 한 시간 평온한 휴식을허락해 주기를 소망할 수 있는 삶을 살아왔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죽음은 삶의 발명품이다. (...) 생명의 존재 조건으로 죽음이 있는 것이다.” -246

 

삶은 언제나 죽음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우리네 삶이란 것은 누군가와 무언가의 죽음에 의존하지 않고 유지되지 못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삶 자체가 죽음에 의존하는 것임을 긍정할 수 있다면 죽음이란 감추어진 비밀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자주 잊거나, 외면하거나,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실일 뿐임을 깨닫게 된다.

 

나는 캐나다의 시인 로버트 윌리엄 서비스의 시 Death and Life의 생명과 탄생의 죽음이라는 수레바퀴의 그 흔쾌한 수용을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

 

메이와 내가 사랑을 나눈 곳은

묘지의 섬뜩한 어둠 속이었네.

 

........ 中略 ........

 

나 또한 죽어 누워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질 때.

지나가는 두 여인이

내 위에서 약혼을 맹세하기 바라네 (Death and Life)

 

삶의 행복이 누군가의 죽음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이 깨달음의 시는 우주 자연 속의 한 개체인 나를 우주 순환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의 하나의 순환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해준다. 이 책은 소중한 이들을 잃은 산 자들에게 위로를, 죽음의 그림자를 앞 둔 이들에게 평온한 안식의 이치를 나지막이 들려주고, 산 자들에게는 겸허함과 흔쾌한 생의 만끽을, 그 축복을 들려준다. 어쩌면 이 아름다운 시들의 목소리와 그로부터 울려 퍼지는 삶과 죽음의 이해에 대한 문학적 산책의 여정은 한 번뿐인 우리네 삶의 의미를 더욱 강렬하게 선사해 줄 것이다.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순환하는 자연 속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것도 좋으리라.”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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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루나 +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 옛날 옛적 판교에서 + 책이 된 남자 + 신께서는 아이들 + 후루룩 쩝접 맛있는
서윤빈 외 지음 / 허블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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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리뷰는 '5회 한국과학문학상우수상 수상작인 김혜윤 ,

블랙박스와의 인터뷰에 대한 것입니다.


누군가 듣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죠. 존재하지 않았던 진실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109

 

자본가에게 비정규직 노동자가 불편하듯, 정상성의 통념이라는 범주에서 작은 다름이 발견되면 그 낯섦에 비하, 불편, 억압, 그리고 불온함을 씌워 배제하고 지워버리는 작업을 한다, 그리곤 그 대상들에 존재론적 서열을 매겨 구별, 분리하고, 급기야는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까지 한다.

 

사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존재론적 현상, 내부와 외부를 가르고 배제하는 메커니즘의 부당성, 비도덕성을 기술하며 장애자. 성소수자, 사이보그, 프레카리아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도덕적 당위를 논하기는 쉽다. 그러나 막상 이들과 맞닥뜨렸을 때,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 올 때면 불편한 감정과 동정심이란 양가감정을 오가는 당혹감과 낯선 거부감을 떨쳐내지 못하는 우리들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소설은 바로 이 지점, 우리들이 부인하지 못하는 도덕적 감정의 결함을 관통하며, 보지 않으려하고 듣지 않기 위해 지워버리고 배제하려 했던 유령이 된 존재들의 실체를 선명하게 드러내어 그 존재성을 부각하고, 그것에 잠재된 진실의 의미를 확인함으로써 우리들의 잃어버린 감각을 깨운다. 작품의 배경은 오염으로 망가진 지구를 대체하는 인공 중력장치에 의해 생태 공간을 유지하는 계획 콜로니라는 우주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구술사(oral-history) 수업을 처음 들었던 때, 나는 성립 콜로니대학의 바이오데이터학과 학부생이었다.” 전공 필수 과목도 아닌 강의, 수강하는 학생도 거의 없는 개인적이고 혼란스러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일을 배우는 강의에 사로잡혔던 자신을 소개한다. 누군가를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제출하는 수업 과제를 제출하지 못했던 라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 침묵하는 교수에게 자신을 길러준 보호자였던 로티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것은 삶의 바깥에 위치함으로써 목소리가 기록되지도 않으며, 경험을 말할 기회도, 그것을 서사화할 수 도 없었던 존재자들의 이야기다. 이 구술은 단지 값싼 연민이나 동정심을 자극하는 감상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이 비()존재가 불쑥 다가오는 감정의 불편함, 당혹스러움이 유발하는 불온함에 대한 지각의 자기 인식이다. 사고로 전뇌화 사이보그가 되어 몸체를 블랙박스에 담은 로티의 불완전한 표현과 소통의 불완전성이 갑갑함과 피로의 부담으로 느껴졌을 때 로티(블랙박스)를 탁탁치거나 전원을 영영 꺼버리는 상상으로 고백되듯이, 불쾌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의식을 지닌 존재를 향해 내뿜는 자기 안의 잔인함과 비겁한 감정의 직시이며 반성적 깨달음이기도 하다.

 

사회 가장 자리에 있는 자들의 동료 인간에 대한 연민은 결코 자연스런 것이 아니다. 라나는 로티와의 삶에서 오는 피로감을 이렇게 표현한다. 지긋지긋한 날들이 뚝 분질러질 수만 있다면, 내 몸의 한 구석을 찢어 이 몸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하고 말이다. 이때 같이 청소를 하며 공감과 우정을 나누어 오던 엘리는 라나에게 떠나라고, 자신의 일당 전부를 쥐어주며 정상성의 광채가 빛나는 곳, 갈망을 채워 줄 새로운 콜로니를 선택할 기회를 잡으라고 자신의 외로움과 박탈감이라는 희생을 무릅쓴 위로어린 용기를 준다.

 

라나는 이 선택이 지닌 의미를 아마 알았을 것이다. 비록 슬픔과 죄책감, 수치심을 꿰뚫고 올라오는 갈망이라고 용서받을 수 없는 자기욕망을 얘기하지만, 두 번 다시 주어지질 않을 기회임을, 또한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세계에 들려주기를 바라는 요청임을. 라나는 새로운 콜로니의 이민자 정책프로그램의 지원으로 대학을 마치고 리서치 전문 회사에 들어간다. 그리고 콜로니 거주민의 인공 중력에 대한 체감 정도를 조사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되지만 보고서제출을 준비하던 중 바이오데이터(BD)가 없는 존재들에 대한 리서치가 없음을 발견한다.

 

라나는 생체데이터가 없는 존재에 대한 인터뷰 항목을 만들어야 됨을 주장하지만 팀장은 그런 경우가 몇 명이나 되냐며, 불필요한 황당한 발상임이라며 힐난한다. 콜로니 1만 명당 200명으로 추정되는 사이보그, 2%는 무시해도 된다고 윽박지르는 것이다. 만일 한국 사회의 경우 2020년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등록장애인 2633,000명인 전인구 대비 5.1%의 의견을 소수의 목소리라 정책에서 배제한다면 이것이 정당하다 할 수 있겠는가?

 

 

김혜윤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본문 87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를 비문명적 불법시위라며 정상과 비정상으로 갈라치기하며, 약자의 지위를 묵살하는 무지에 터 잡은 오만이 버젓이 행해지는 정치배의 작태와 동일한 시선이다. 이는 자신의 못나고 비루한 신체의 정상성과 다른 장애인의 신체는 결함이며, 그 하찮은 정상성을 잠식하는 결여된 신체에 대한 거부와 배제의 시선이다. 이동권 보장이라는 사회적 제도와 장치의 요구, 의지의 요구에 대한 혐오인데, 과연 타인에 대한 의존 없이 그 어느 인간이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인간 모두는 누군가가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기꺼이 해주고 있기에 살아 갈 수 있음을 망각하거나, 생각하지 못하는 이 단순한 이치조차 깨닫지 못하는 만연한 지적 게으름 탓일 것이다. 우리 인간은 운명적으로 장애자인 것을.

 

라나는 사이보그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한다. 특정 직군에 할당되어 저마다의 일을 수행하는 사이보그의 상황과 적절한 질문과 태도를 연습하고 겸허하게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한다. 이들과의 인터뷰에서 라나는 새로운 사실을 듣게 된다. 콜로니의 회전 속도를 조정하여 최적의 중력을 발생시키려 할 때 미세한 차이가 발생하고, 거주민들은 느끼지 못하는 그 사소한 차이가 인간들에게 사고로 이어지고 있음을, 인간의 추락사고 3분의 1 이상이 과중력과 관련된 사고임을 듣게 된다. 배제되었던 존재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서, 즉 상호 동등함과 존중의 태도가 일체감, 신뢰를 형성하는 기반임을 라나는 느끼고 확신한다.

 

내 이야기를 들으러 와줘서 고맙습니다. 라나.”, 고마워해야할 사람은 진정 누구인가? 정상성의 세계에서 바깥으로 내쳐진 인간의 몫인가? 배제되고 지워진 존재가, 목소리를 낼 아무런 매체도 없는 존재가 하여야 하는 것이겠는가? 정상인이라 자처하는 자들, 사회적 약자를 배재한 주체가 해야 하는 것일 테다. 결국 과중력의 문제점을 다룬 보고서는 제출되지만 그 반응은 사이보그 진술 신빙성의 의심, 인터뷰 방법론의 문제제기, 보고서 작성자에 대한 인신 공격성 비난이고, 산업 스파이라는 날조 씌우기다. 구술사 교수에게 들려주는 라나의 구술 과제는 이렇게 맺는다. 이때 교수는 답한다. 세상을 뒤흔들만한 이야기들에도 세상은 그렇게 생각만큼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만 이러한 이야기들이 이야기를 요청받은 사람의 안에 얼마나 깊이 고여 있는지를, 자신도 몰랐던 사실이 분명해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유기체와 기계의 결합, 인간의 외연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경계를 부수어 버리는 자기 소멸의 존재자인 사이보그를 소재로 하여 우리 사회의 유령처럼 지워져 존재함에도 존재하지 않은 자들에 보내는 미친 감각을 일깨워, 잃어버린 보편적 진실에 대한 감각을 되살린다. 아마 화자인 라나의 반복되는 다짐의 언어, 아주 단단한 무언가를 부수고 있다.”는 문장처럼, 쉽사리 깨지지 않는 인간 정신의 무능력의 지대, 굳어버린 구별짓기라는 저항의 지대를 깨부수는 작업을 그칠 수 없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진실이 존재함을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하는 마지막 물음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감히 우리라는 말로 이 문장에 편승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는 않겠지만, 결코 들으려하는 자세를 멈추지 않으리라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계속 써져야 한다. 거북함으로 외면한 존재들, 그들의 목소리 있음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만남을 기꺼이 함으로써 새로운 세상, 삶의 기회로 긍정하는 마음을 잃지 않을 것임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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