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의 뿌리
이사야 벌린 지음, 석기용 옮김 / 필로소픽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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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유사한 신조를 지닌 사태가 광범위한 인간 무리와 지역에서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이것이 일순간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지만 점진적으로, 그러나 비교적 이전 시대의 흐름과는 달리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동인(動因)이 분명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인간 역사의 오랜 시간 중추적으로 이어져온 믿음에 많은 인간이 비로소 의심과 회의의 시선을 겨누게 되는 어느 순간이 오고야 만다. 아마 인류 역사에 있어 이러한 전복적 변환의 사태를 몰고 온 것이 낭만주의(Romanticism)’라 말하는 것이 이 책의 논지이다.

 

물론 낭만주의를 획일적이고 명료하게 정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저자는 말한다. 'XX주의(主義)'라는 하나의 범주에 몰아넣어 어떤 시기의 사회문화적 조류를 뭉뚱그리는 것은 사실 가당치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향하는 사상의 방향에서 공통적인 부분이라 할, 특히 그것이 너무도 이전과 다른 중대한 것일 경우, 그것을 하나의 전환적 사태로써 범주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고대에서 중세까지 거의 흔들림 없이 이어져온 서구 전통의 척추라 할 명제들, 즉 원리상 해답(진리)은 존재하며 알려질 수 있다는 것과 참된 가치인 해답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고 가르칠 수 있으며, 참인 명제들은 서로 양립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즉 세상과 인생은 직소퍼즐처럼 완벽하게 짜 맞추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성과 과학의 대두에 따른 계몽주의라 해서 이러한 전통적 이해와 다를 바가 없다. 다시 말해 낭만주의는 단순히 계몽주의의 반동으로 태동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계몽주의는 단지 해답들이 이전의 전통적 방식들 - 계시, 교리 등등 - 로는 획득되지 않으며, 오직 이성의 올바른 사용으로만 가능하다고 살짝 비튼 것일 뿐이다. 계몽주의라 해서 서구의 전통적 주류의 사고를 이탈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계몽주의가 서구의식의 대반동이며 대변혁인 낭만주의를 촉발했다. 계몽주의자는 말한다. 도덕에 관한 저술, 정치나 비평, 어쩌면 문예적인 저술마저도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기하학자의 솜씨로 이뤄낸다면 더 훌륭해질 것이다.”라고. 즉 패턴과 단일한 진리가 있다는 것이며, 이는 이성으로 규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보편타당성을 갖는 일반명제를 수립할 수 있고, 인간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의 해답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엄격한 논리적 관계 네트워크의 실재에 대한 믿음은 사실상 세상에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 자신도 계몽주의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은 바로 이러한 믿음에 심각한 파열을 만들어낸다. 그는 인과율을 의심하고, 외부 세계 존재의 앎에 대한 연역 불가능성을 지적하며 이성주의의 이상을 깨뜨렸다.

 

사람들은 이 세계가 둘 더하기 둘은 넷과 같이 이러한 것이 삶과 사유의 토대이며, 모든 것은 필연적 논리의 연쇄 산물에 불과하다는 이 고정되고 닫힌 체제에 숨 막히는 고통을 느끼게 된다. 계몽주의의 자연과학과 이성주의는 인간 정서를 차단해버림으로써 인간의 모든 반()과학적 열망과 욕망이라는 배설구를 이해하지 못했다. 계몽주의는 누천년을 지배해 온 궁극적 진리에 대한 믿음, 퍼즐식 사고방식에 결정적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어 준 셈이다.

 

. 독일, 낭만주의의 원천

 

저자는 이러한 전통적 사고방식과 계몽주의에 대한 반동의 발원지를 17~18세기 독일로 규정하고 있다. 즉 낭만주의는 독일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사야 벌린은 독일 지역에서 30년간 벌어진 프랑스군 중심의 외국 군대에 의한 대규모 살해와 초토화된 재기불능의 재난이 독일인들을 심각한 민족적 열등감으로 몰아넣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렇게 야기된 콤플렉스와 모욕감은 루터주의를 계승하는 경건주의의 토대 하에 자기 내면의 성채로 움츠려드는 은둔의 결과를 초래하고, 주변에 단단한 성벽을 쌓아올림으로써 자신의 취약한 외양의 노출을 축소하려 노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변국, 즉 프랑스를 비롯한 계몽주의(이성, 과학)에 대한 증오로 발산되었으며, 반문화, 반지성, 외국인혐오, 민족(지역)주의에 빠져들게 하였다는 것이다. 상처입은 국민적 감수성의 산물이자 국민적 모욕감의 산물로 낭만주의 운동의 뿌리가 내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계몽주의에 대한 반동이 다른 지역에서 공통적 의식으로 대두된 사례를 발견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부정하기 어려운 추정이라 할 수 있다. 하만, 레싱, 칸트, 헤르더, 피히테, 헤겔, 셸링, 실러, 휠덜린, 클라이스트, 노발리스, 슐레겔, 호프만에 이르는 엄청난 인물들만으로도 낭만주의의 원천이 독일이 아님을 반증하기 어렵다.

 

계몽주의에 대한 총체적 반항의 과정에 물꼬를 튼 인물인 요한 게오르크 하만은 어쩌면 독일 낭만주의의 시조라 해도 될지 모르겠다. 그는 책과 그림, 그리고 무수한 대화들을 과학적이고 일반적 명제로 분석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한다고 설파했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 다른 책과 공통으로 지닌 요소들, 즉 일반화된 것들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또한 서로 다른 화가들이 그린 그림에 어떤 원리가 적용되었는지는 굳이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가 책을 보고 그림을 보는 이유는 그것들이 전해주는 특유의 메시지, 특유의 실재에 반응하고 싶기 때문이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원리나 일반명제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능력이 풍요롭고 격렬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 즉 창조의 욕망에 대한 갈구이다. 계몽주의는 이 풍요로운 감각의 세계 대신에 창백한 대체물을 제공하려 했다. 계몽주의는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행위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의 약동, 개체성, 창조의 욕망을 일반화하고 분류하여 고정시키고 이로부터 이성적 배열을 추출하는 경향성에는 아무런 생명성도 없다는 것이다.

 

계몽주의는 살아있는 총체를 조각들로 쪼개는 정신적 살해 행위로 간주된다. 하만의 제자랄 수 있는 헤르더는 유럽 이성주의 몸통에 가장 무시무시한 단검을 찔러 넣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통일성의 부정, 조화의 부정, 이상들의 양립 가능성을 부정하며, 자기에게 보이는 대로의 진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만큼이나 타당한 진리라 주장했다. 사실 각각의 시대와 지역에는 그 나름의 서로 다른 내면적 이상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무수한 유무형의 세례가 뼛속까지 아로새겨져 있지 않은가?  한국이라는 영토에 살고있는 나는 독일에 살고있는 사람과 너무도 많이 다른 전통적 관습과 행동 양식을 지니고 있다. 양자를 일반화한다면 고작 인간 형체의 유사성이나 몇 가지 이해 가능한 일상적 양식일 것이다. 아마 두 사람은 많은 윤리적, 의례적, 정치적, 문화적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여기에 이성과 과학이 개입해서 무엇을 규명할 수 있을까? 이 둘의 삶의 방식을 일반 명제화 하면 둘 다 적응하지 못하고 고통을 겪을 것이다.  이제 서구 의식을 지배해왔던 영원의 철학이라는 신화는 전복된다.

 

. 독일 낭만주의자들


이 책의 가장 흥미있는 부분은 낭만주의자들에 대한 2 개장()에 걸친 논의이다.  절제된 낭만주의자들과 고삐 풀린 낭만주의자들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는 역동성과 상상력의 확장 정도, 그리고 시기적 전후에 따른 의미의 변화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1. 절제된 낭만주의

 

서구 세계의 감정, 사상, 행동 등 가치관에 급진적 전환을 가져온 낭만주의는 사실 온전히 낭만주의적이라 정의할 수 있는 예술가나 사상가와 같은 특정 인물로 규정할 수 있는 그런 순수한 신조가 아니다. 단지 어떤 속성이나 경향, 이상적 유형이라는 운동이나 신조의 양상으로 포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칸트는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한 유형의 지식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은 계몽주의자이다. 과학의 신봉자였으며, 논리와 염격을 좋아했다. 그러나 사물의 본성을 쫓았던 이전의 서구 사상의 전통과 달리 그는 사물의 본성 때문에 성이 난 사람이었으며, 특히 도덕철학에 있어서는 자유’, 선택하는 인간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는 점에서 낭만주의 아버지 중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칸트는 인간은 원형적으로 타고난 자유를 지니며, 이 자유가 자아의 특권을 제공하고 나 자신을 만든다고 믿었다. 자연과 달리 인간은 인과율에 지배를 받지 않으며, 자신이 소망하는 바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그의 저작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계몽은 타인의 굴레에서 자기를 해방하는 것이라 규정했듯이 자기 책임 행위를 강조했으며, 착취, 격하, 비인간화에 열렬하게 반대했다.

 

가치란 스스로 생성하는 무엇이라는 생각, 특정 행동 방침을 알고있는 인간 의식을 단언했다. 칸트를 결정적으로 낭만주의자로 이해케 하는 것은 결정론에 대한 극단적인 반감 때문이다. 자연에 의심의 여지없이 참되게 적용되는 이른바 인과율이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에 참되게 적용된다면 실제로 세상에는 도덕성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천명은 낭만주의의 핵심 골격을 이루는 불굴의 의지 사물의 구조같은 것은 없다는 끝없는 자기 창조의 표현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사야 벌린은 절제된 낭만주의자로 칸트 외에도 실러와 피히테를 꼽고 있는데, 실러의 자연을 딛고 일어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더 드높은 곳에 도달하는 인간에 대한 찬양은 그야말로 낭만주의의 본령이라 할 수 있다. 사회가 나쁘고, 합당한 도덕성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사회를 타도하고 파멸시켜 이상을 향해 돌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위대한 죄인은 이 낭만주의에서 탄생한다는 것이다. 아마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실러의 도적떼에 등장하는 도적 우두머리인 카를 무어같은 약탈, 방화범이 영웅적 지위로 격상되는 것은 자신의 이상에 전념하는 새로운 인간상의 대두를 의미한다.

 

마지막 인물로 피히테는 단지 자유라는 이름의 언급만으로도 그 앞에서 내 마음은 활짝 열리고 꽃이 피어오른다.”고 선언했듯이 칸트의 사도이다. 삶이란 본성의 초연한 사색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하였다. 앎이란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며 인간과 우주란 일종의 지속적 행위이지 사색으로 지식의 영역에 요구해 해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낭만주의는 이렇게 고취된 개인을 향해 나가가려는 거대한 충동의 출발을 한다.

 

-2. 고삐 풀린 낭만주의

 

낭만주의 화려한 분출이다. 이제 낭만주의는 고결한 운동의 핵심을 구축했다. 자아란 직접적 자각의 대상이 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연쇄적인 경험들을 가리키는 것, 바로 이런 것들로부터 인간의 성격과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 지는 것이라는 결론이다. 무언가 단일한 진리가 있으리라 믿지만 실상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특성이란 오로지 노력하고 시도하고 장애물에 덤벼들어 나 자신을 온전히 느끼게 될 때에만 체득될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던 자아라는 감각이 저항과 대치 국면에 뚜렷해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 것이다.

 

낭만주의의 개화기에 드디어 일반 독자에게도 친근한 낭만주의의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노스탤지어망상이다. 노스탤지어는 나는 언제나 고향으로 가고 있다.”는 노발리스의 자기 예술에 대한 답변처럼 무한한 동경이자 갈망이다. 그래서 이 때의 낭만주의 문학들은 이국적 사례를 찾아다니며, 온갖 종류의 환상을 탐닉한다. 그런데 망상은 이 노스탤지어와는 아주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본성의 확장, 걸림돌의 파괴, 그리고 자신의 해방으로 무한히 솟구쳐 올라가는 갈망을 향하는 것과 달리 비관적 형태를 띤다. 도달하려 하지만 이를 방해하는 어둠 속의 무엇, 일종의 냉담하고 적대적인 자연이다. 이건 허무이며 음모론의 발굴로 나아가는데, 숨어있는 음모를 수색하는 더 큰 개념을 발굴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은 19세기 내내 축적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카프카의 소설처럼 방향을 상실한 불안, 저변에 깔린 근심의 독특한 감각으로 출현하기도 하며, 술레겔이나 호프만의 소설처럼 악몽, 거대한 비인격적 힘의 충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마 거의 격렬하다고 할만큼 '호프만(E.T.A.Hoffmann)'사물의 본성이 존재하고 사물의 구조가 존재한다서구의식을 뿌리부터 거부하며, 인간을 가두는 그런 구조는 없다고 선언한다. 이제 낭만주의는 잠재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보다 더 실재적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물이 수시로 뒤바뀌며 진정한 심리적 망상들로 가득차 있는 이유이다. 희미한 감지, 파편, 암시, 신비한 조명이야말로 실재를 파악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환각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차단하고 있는 장벽을 부수고 단호히 빗장을 열어젖힌 우주에 대한 감각, 영속적 변형에 대한 감각을 생성하는 것이다. 낭만주의는 급기야 논리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족쇄풀린 자유로운 의지를 마음껏 구가한다. 낭만주의는 사물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이 토대를 공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낭만주의는 실재에 대한 참된 지식이 있다는 오래된 생각에 대항해 벌이는 전쟁이다.

 

낭만주의란 결국 인간이 적응해야하는 패턴이란 없으며 오직 우주의 끝없는 자기 창조만이 있을 뿐이다. 라는 생각, 사물을 모종의 관념화나 계획에 순응하는 것들로 바라보려는 자기 탐닉적 형태의 자멸적 어리석음에 대한 저항이다. 사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고정해두려고 주도면밀하게 실행하려 하지만 늘 새로운 심연이 펼쳐지고 헛수고가 되기 일쑤인 경험을 하기 마련이다. 쉼 없는 흐름을 멈춰 세우려는 시도, 가둘 수 없는 것을 가두려는 노력, 존재하지도 않는 진리를 추구하려는 시도에서 얻게 되는 것은 비현실과 환상뿐이라는 것이다.

 

. 마무리하며

 

이제 사회를 이성적으로 분류하려는 모든 시도가 얼마나 얄팍한 짓거리에 불과한 것인지 드러났다. 과학, 공리주의, 기계류의 사용이 국가를 대신해 주지 않는다.”는 국가에 대한 천명처럼 낭만주의는 무한히 활동적이며 살아있는 총체로서 국가를 정의한다. 이는 객관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인간적 환상에 대한 경멸이다. 낭만주의는 이처럼 규칙과 법률과 예의범절과 지극히 꼼꼼하게 잘 조직된 삶의 형식을 날려버리라고 외친다. 이러한 극단까지 밀고 나가면 인간적 이상의 심각한 대립의 결과만 초래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는 낭만주의는 삶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이며 고양된 이성적 자기 이해의 촉구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바로 이들 낭만주의자들이 세워놓은 자유주의적 양식, 다원성과 삶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 고양된 이성적 자기 이해와 같은 생각들로 구성되어있다. 이는 바로 지금을 사는 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 이들 낭만주의자를 상속받고 있으며, 우리 안에 이러한 사상, 신조를 품고 있다. 우리들 모두는 이들 낭만주의의 광기를 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단지 거대한 인과적 과정을 구성하는 하나의 조각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별개 차원의 소외된 존재도 아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서로 소통하고 사는 존재들이다. 다른 인간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무런 공통의 가치도 없다면 우리는 아마 인간이 되지 못할 것이다. 결국은 타협해야 한다. 아마 우리는 불완전한 평형을 보존하며 아슬아슬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점점 더 많이 자기 이해가 요구되는 사회이다. 무엇이 이 불안한 평형을 유지하는 관념, 행동이 될 수 있을까? 아무튼 이 낭만주의자들의 모종의 가치들은 삶의 위대한 지표의 하나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불굴의 의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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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0-07 2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

필리아 2022-10-07 22:03   좋아요 1 | URL
아~, mini74님 축하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편안한 연휴 되십시요~~

그레이스 2022-10-07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갖고 있으나 아직 읽지 않은 책이어서 안보고 좋아요만 누르고 나왔던 리뷰군요;;
당연히 필리아님은 잘 쓰셨을테니까!
축하드려요 ~~

필리아 2022-10-07 22:05   좋아요 2 | URL
좋은 리뷰로 책이 깊이를 더해주시는 그레이스님~
댓글 고맙습니다. 즐겁고 건강하신 연휴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양들의 침묵 (리커버 에디션)
토머스 해리스 지음, 공보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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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의 앳된 수사관 클라리스가  하키 마스크가 씌워진 채 체인으로 묶여있는 연쇄살인범 한니발 렉터와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은 그 낯설고 기괴하고 음습한 분위기로 인해 기억의 저장소에서 쉽사리 끄집어 내진다. 이 장면은 서로의 신뢰를 줄다리기하며 진실을 거래하는 그 미세한 심리적 긴장을 떠올리게 하고, 두 사람이 예사로운 지능의 소유자들이 아님을 동시에 상기토록 한다.

 

소설 원작이나 영화 모두 독자와 관람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덕에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은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지식이 지향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물음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성학 연구자인 정희진은 그의 책에서 정신의()인 렉터의 지식의 양()적 측면은 결코 윤리적 선악과 무관한 것임을 지적하며, 지식은 양이 아니라 가치라는 측면에서 검토되고 요구되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이 글을 통해 그간 나는 무지(無智)를 지식의 양적 측면에만 시각을 겨누는 헛다리짚기를 연속했다는 내 무지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각성만으로 충분했을 테지만 떠오른 김에 이 작품을 읽어보아야 마음이 후련해질 것 같았다.

 

렉터 박사는 소설 속에서 관찰과 면밀한 분석 능력을 비롯한 절대적 기억력을 지닌 정신과 의사로 묘사되고 있다. 클라리스 스탈링과 첫 대면에서 렉터는 스탈링이 사용한 스킨 크림의 이름과 향수를 뿌리지만 오늘은 뿌리지 않았음을 맞춘다. 신분증을 꺼내기 위해 핸드백을 열 때 얼핏 맡았을 뿐이라는 렉터의 대답은 그의 찰나(刹那)적 관찰능력과 기억력을 보여주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 FBI 행동과학부 잭 크로포드부장의 명령으로 훈련생인 스탈링을 범죄자 심리 설문이라는 명목 하에 렉터의 대담자로 투입시킨 것이지만 이미 여섯 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지속되고 있는 오리무중의 연쇄살인, 일명 버팔로 빌사건을 위한 일말의 단서라도 잡기 위한 전술이다.

 

살가죽이 벗겨진 채 강에 버려진 여성의 사체, 알코올 저장병에 담긴 깔끔하게 잘린 머리통, 얼굴 가죽을 뒤집어 쓴 렉터, 무심하고 일말의 죄의식도 지니지 않은 채 사람을 살해하는 장면 등을 읽으며 어떤 문학적 감흥을 생각한다는 것이 왠지 독자 자신이 낯선 존재인 것만 같이 여겨진다. 아마 열광하는 냉혹한 독자라는 이 모순어가 전혀 모순이 아닌 순간을 체험한다.

 

소설의 제목인 양들의 침묵은 스탈링의 어린 시절 고통스런 기억, 양들의 울음소리가 깨운 임박한 죽음들로부터의 도피, 그 한시적인 완결의 의미로 이해된다. 이것은 스탈링이 연쇄살인범 버팔로 빌의 단서를 얻기 위한 두 차례의 추가적 면담에서 정보의 거래 대가로 렉터의 요구에 의해 스탈링이 들려주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를 축적해 나간다. 스탈링의 성장기에 어린 렉터의 연민이었을까? 사실 이 소설의 커다란 흠집으로 보이는 것인데, 응급대원, 보안대원을 살해하는 방법이나 그의 처리에서 보이는 완전한 평정심은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을 발견할 수 없다. 더구나 스탈링의 첫 대면에서 옆방에 수감된 자가 스탈링을 향해 뱉어낸 추한 성적욕설에 대가로 자신의 심리적 수완을 발휘하여 바로 자살케 하는 것과 렉터의 연민은 결코 공존 가능한 감성이 아니기에 납득하는데 저항감을 느끼게 된다.


 



소설의 중심 제재는 버팔로 빌이라는 단서조차 찾을 수 없는 범인의 실체를 밝혀 체포하거나 사살하여 잔혹한 여성 연쇄살인 사건을 종결짓는 것이다. 이미 다수의 여성이 살해되었음에도 정부 고위층 인사나 언론의 진지한 관심이 동원되지 않은 사건이 테네시주 상원의원의 딸이 동일한 흔적을 남기고 피납되자 보이는 경찰관서, FBI, 고위층 인사들, 언론의 집중된 시선이다. 아마 작가는 이러한 기울어진 사회적 양상을 지적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실종된 상원의원의 딸이 살던 아파트를 수색하던 스탈링을 발견한 상원의원은 그녀를 도둑취급하며 모욕한다. 이때 렉터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속삭이는 스탈링의 말은 흥미롭다. 재수없는 상류층년. 이렇게 말하면 렉터 박사는 하층계급의 분노라며 즐거워하며 지적했을 것이다. 모유로 전해진 분노가 내면에 잠재돼 있는 탓이라며, 스탈링은 교육과 지성, 외모면에서 상원의원 마틴 루스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한 인간이 아니다. 단지 신분이라는 계층적 권위를 수단으로 사람에게 함부로 하는 권력화된 무지이며, 주변의 질서는 이에 뇌동(雷同)한다.

 

꼴불견인 세상의 흔한 일면이다. 스탈링과 크로포드를 시기한 렉터를 수감하고 있는 볼티모어 정신질환 범죄자 수감소장 칠턴은 도청장치를 통해 스탈링과 렉터의 대담을 엿듣고는 자신의 영예와 부를 위해 상원의원과 렉터의 직접 면담을 주선하며 사건을 미궁으로 치닫게 한다. FBI의 수사를 중지시키고 직접 자신의 딸을 구출해내겠다는 어미의 심정을 이용한 기만적인 장난에 이용되는 것이다. 여기에도 흔해빠진 교훈이랄 것이 있는데, 인간은 어떤 일이든 자신의 이해관계에 직결되는 일이 될 때 냉정하고 객관적인 지위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전문 집단의 노력과 역량을 폄훼하고 자기 이익을 우선시 할 때 그 결과는 대개는 실패요, 좌절이라는 것이다.

 

소설은 꽤나 다양한 기관이 등장하여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이든 무수한 집단들과의 협력과 공조가 뒤따르는 것임을 보여준다. 버려진 사체의 목에서 발견된 번데기의 특성을 규정하기 위해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의 곤충학자들이 밤을 새워 규명하고, 범죄 용의자를 추출하기 위해 사적 자유의 보장을 위해 마련된 보안상 차단된 병원 기록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모두 자연스레 기꺼이 협조하지 않는다. 어디서든 자신들의 이익과 권위 보호를 내세우며 경각에 달린 사람의 목숨 앞에서도 자기 권리의 우선을 내새우곤 한다. 그 알량한 것들 앞에서 우리는 항상 주춤거리기 일쑤다. 어쩌면 인간의 영원한 누추함일 것만 같다.

 

이제 다시 돌아와 지식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소설은 두 측면의 윤리적 방향을 달린다. 렉터의 지식은 결코 선의에 의해서 활용되지 않는다. 반면 스탈링의 지식은 선을 지향하고 타인의 이해와 공감을 향하고 있다. 지식의 양 측면에서 렉터 박사의 그것이 스탈링에 비해 월등하다. 그러나 그의 지식은 사회적 선을 추구하는 가치변화에 소용되지 않으며 자기 쾌락과 이익을 위해서일 뿐이다


그는 실제 범인인 “‘제임 검을 클라리스에게 어떤 방법으로 내줄지 생각 중이었고...” 에서처럼, 버팔로 빌의 실체를 놓고서도 자기 안위, 수감 조건의 완화 등을 거래 조건으로 내세운다. 오늘날 우리는 지식이 양적으로 부족해서 인간답지 못한 것이 아니다. 여기저기 석박사가 넘쳐나고, 지식인입네 하는 자들이 도처에서 허접하고 알량한 지식을 자랑하지만 정작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지식, 앎이란 가치 지향적인 것이며, 그 양은 사실 그다지 쓸모있는 것이 아니다. 구태여 여기서 지식을 오용하는, ()사회적으로 이용하는 자들과 사례를 너절하게 열거하는 낭비는 하지 않겠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렉터가 클라리스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발견한 하나의 무지를 지적하면서 맺는다.

 

당신이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양들은 한동안 축복처럼 침묵하겠지.

양들의 울음소리는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고,

그 울음은 아마 영원히 멈추지 않을 거야. ....

'어쩌면 같은 별들을 지향하고' 있을 테니.”     -502쪽


클라리스의 삶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교감과 예견을 표시하고는 두 사람이 같은 곳을 지향하고 있을 거라며 어떤 지적 동지애를 나타낸다. 결단코 같은 별을 지향하고 있지 못하다는 측면에서 이 소설의 작가는 지식을 양적 측면에서만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혹은 지식이란 본래 당파적인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식은 선한 가치를 지향할 때 그 의미가 존중되는 것일 게다. 여름 날 나기에는 이처럼 냉혹한 독서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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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카를라 3부작 1
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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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뱉어낸 말이나 실행에 옮긴 행위에 대한 정당화에 능숙하다. 이건 어떤 지식의 축적이나 외부 정보, 지식에 의해서도 변하지 않는 생존 본능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특히 그릇되어 타인을 비롯한 세계에 많은 손상을 끼쳤음에도 이에 대한 명확한 입증이 어려운 것일수록 그 정당화가 잘못된 믿음에 근거했다거나, 의도된 오직 이기심에 의한 것이었음을 인정받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토록 자기 정당화란 난공불락의 심리적 방어벽인 것 같다.

 

이 소설은 이중 스파이’, 즉 자신이 소속된 정보기관과 상대 기관인 양쪽으로부터 알아낸 첩보를 이용하여 정보화된 보고를 하는, 자신의 실체를 꽁꽁 숨긴 채 이중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첩보원을 색출하는 이야기다. 정당화라는 말에는 죄의식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다. 자신의 발언과 행위에 제기된 비난과 혐의를 제거하는 것이 정당화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 사이의 대화, 즉 소통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오랜 기간 이중 스파이로 암약해 온 존재를 찾아내기도 어려울뿐더러 찾아냈을지언정 죄를 자인(自認)받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란 예상이 가능해진다.

 

서커스(영국 정보부)에서 해임된 스마일리는 옛 상사인 레이콘의 저택에 안내되어 서커스와 러시아 정보부 양쪽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고있는 요원 타르에게 한 사건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러시아 첩보원의 포섭과 이의 승인을 요청하는 긴급 전언이 무시되었던 것과 이와 함께 당해 해당 정보가 러시아 정보부에 누설된 정황이다. 이로 인해 타르는 영국 정보원으로서 거의 성공한 성과가 누군가에 의해 좌절된 것에 의혹을 전하는 것이다.

 

레이콘은 서커스 내부의 진실 조사를 은밀히 수행해 줄 것을 스마일리에게 요구한다. 사실 이중스파이의 실체에 접근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복잡해 보이는 연결 관계, 중간 중간 삽입되는 역사적 사실들을 통한 등장인물들에 대한 성격과 관련 사건의 역할 등은 진부함에도 재미의 요소로서 충분히 서사적 소임을 다하고 있다. 아마 실제 첩보원으로 활약했던 작가의 경험이 녹아있어 그 디테일이 주는 현실감 때문일 것이다. 테임 닥터(세뇌요원)니 래그맨(연락책)이니 베이비시터(경계요원)니 하는 정보 요원이 사용함직한 은어들은 또한 분명 독자의 즐거움을 돕는다.

 

소설의 결말에 가서야 알게되는 스마일리의 아내에 대한 배반적 감정, 동료 요원인 빌 헤이든과 아내 앤과의 불륜 관계로 야기된 고통에 내재된 슬픔과 연민은 자신이 한 인물을 직시하는 것을 훼방하는 요인이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왜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을까라는 물음이 오직 자신의 처신으로만 향했을 때의 어둠 속의 풀어지지 않는 매듭이었음을,

 

레이콘과 장관의 밀명 하에 거대한 실패를 몰고 온 서커스의 수장이었던 컨트롤의 마지막 작전에 얽힌 과정을 복기한다. ‘컨트롤에 반감을 품고 있던 올러라인을 비롯한 빌 헤이든’, ‘블랜드‘, ’토비 이스터헤이스등 서커스의 현재 최고위직 요원들의 신상에서부터 예산의 사용과 그 시기, 각종 행정문서, 당직 일지, 해외 출장 일정, 영국 주재 러시아 정보국 요원의 행적 등등으로부터 시간상의 모순, 잘려진 일지와 명령자, 실패한 마지막 작전의 희생자가 된 동료의 상황 기록은 하나의 인물로 향한다.

 

컨트롤은 말년에 서커스 내부의 이중 스파이를 색출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자신의 충직한 부하인 스마일리를 보호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출장으로 보내 작전에 개입하는 상황을 사전에 차단했다. 그리고는 외곽 요원인 짐 프리도를 전향하려는 체코의 장군을 수송하는 작전에 파견한다. 하지만 이것은 서커스 내부의 이중 스파이에 의해 기획된 함정이었기에 짐은 총을 맞아 체포되고 작전은 외교적 갈등을 촉발하는 대실패로 종료된다.



 


소설은 오랜 첩보원 생활로 인한 자기희생에 대해 마땅한 보상을 기대하는 인물들의 입을 빌려 수장인 컨트롤을 몰아내고 권력과 그에 따른 몫을 차지하려는 순전한 이기심들의 모의였음을 드러낸다. 해외 요원으로 떠돌다 서커스 본부에 들어왔으나 이렇다 할 실권을 가진 보직에 임명되지 못한 인물들은 명예에 응당한 돈과 직위를 욕망한다. 올러라인을 포함한 4인방은 러시아에 대한 시사성 높은 정보를 내놓으며 요원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고 컨트롤을 정보에서 배제할 모의를 숙성시켜 나간다. 두더지(mole:이중 스파이의 은어)의 실체가 밝혀질 것에 대한 조바심은 이들의 계획을 정확하고 빠르게 관철시킨다.

 

이들의 목소리는 창밖의 현실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누군가 자신들의 양심을 긁는다면 아랑곳하지 않고 재규어 차를 타고 다니겠다는 것, 즉 실리를 쫓는 것에 어떠한 윤리적 구속도 차버리겠다는 선언이다. 명예를 지향하는 자는 기사작위를 얻고, 돈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돈이 주어진다. 그리고 비밀 무대에 숨어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쥐락펴락 싸움을 붙이며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일을 사랑하는 자가 된다. 이 소설이 냉전 시기의 한 가운데인 1974년 발표된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국가, 국민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를 중심축으로 하고 있기에 가능한 불온한 이유들이 된다. 그렇다고 오늘과 그리 멀리 떨어진 한 시기의 낭만적 배설(排泄)만은 아니다. 이러한 양태가 지금 이 사회에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까닭이다.

 

인간의 동기에 표준이라는 게 있는지 의심스러운 생각을 하는 스마일리를 읽으면서, 인간들이 내건 그럴듯한 명분들, 즉 정당화란 결국 사소하고 야비한 것으로 위축되는 꼴을 목격하게 된다. 양 쪽 정보의 비중을 가늠하며 두 세계를 농락하던 자는 규명되지만 이 소설은 커다랗게 뚫린 구멍을 남겨준다. 엇나간 대화와 의사소통 불가능성에 따른 상실감, 인간들 사이에 믿음과 사랑이란 것이 진정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그것이 단지 망상에 불과한 것인지와 같은 회한어린 물음을 던지는 까닭이다.

 

1991년 작가가 남긴 작품 후기의 한 마디는 작품 도처에 넓게 깔려있었음에도 미처 읽어내지 못했던 차별과 소외의 이야기다. 조국과 몸담고 있던 정보기관을 배신했던 4인방을 비롯한 요원들의 면면이다. 영국, 옥스퍼드로 대변되는 명문, 귀족, 엘리트 이외의 네덜란드, 체코, 폴란드, 아시아의 국가들로 상징되는 인종적 배제, 즉 사회계층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이들에 대한 차별 인식과 그 차원을 같이하여 은유되고 있는 국가의 무의식에 노정되는 이데올로기의 실패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마일리의 아내인 앤은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의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무수한 남자와 불륜의 도피행각을 벌인다. 이것은 정보기관인 서커스와 함께 자기 이익, 쾌락에 따라 지조없이 움직이는 불온한 정치적 윤리성을 은연히 암시한다. 이것은 정보부야말로 정치적 건강도를 보여주는 척도이며, 국가의 무의식을 실제로 표현하는 기관이라는 스마일리의 말에 가닿는다.

 

오늘 한국 사회는 국가정보원의 과거 기록을 털어내며 정치 보복에 혈안이 된 현 검찰정국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극히 불건강한 정치적 사태이며, 이들의 무의식에 새겨진 것이 오직 보복이라는 부도덕한 폭력성에 집착하고 있음의 반증일 것이다. 오늘 세계의 정보기관들은 외교적, 경제적으로 첨예해진 세계에서 자국 정책의 우위를 위한 정보 지원기관으로서의 역할에 치중하고 있다.

 

반면 이 사회는 내부 정치적 반대 세력을 보복하는 기반으로 위축시키는 퇴행을 일삼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시대의 실상을 허구화한 이 작품이 50년이 지나 21세기 한국 사회에 반복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는 것은 꽤나 우울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일으킨다. 소설은 단순한 첩보 스릴러물의 재미만을 추구하는 작품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내밀한 관찰기록이며, 국가 기구, 정치 조직에 대한 냉정한 풍자이다. 여느 스파이 소설과 달리 예외적으로 읽혀질 수 있는 장르의 범주를 뛰어넘는 걸작 문학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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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 정희진의 글쓰기 5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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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은 아는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다른 입장에 대한 탐구력이다.” -155

 

 

이 사회에 차고 넘치는 말들이 정작 소통을 방해하고 사회갈등의 주 원인이 되는 까닭에 대한 규명이며, 이를 넘어서기 위한 앎에 대한 지향을 역설하는 신랄한 비평 에세이다. 그것을 저자는 융합이라 표현하며, 지식의 필요성과 쓸모와 가치에 관한 질문과 논쟁하는 일(51)”, “인간 스스로 자신을 아는 과정(110)”이며, 의미의 도덕을 추구하는 마음가짐(16)”이라 정의한다.

 

우리는 어떤 언어로 말하고 있는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인간들의 언어로 우리의 현실을 말할 수 있는가는 중요한 물음이다. 또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부분적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즉 아는 것만을 보고, 모든 것을 하나의 잣대로만 평정하려는 무지의 폭력을 휘두르는 것에 대한 판단정지의 용기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마치 하나라는 양 이 사회를 거대한 돌처럼 변화없는 단일한 조직(160)”으로 인식하는 권력화된 무지,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모르면서 여론을 주도하고 지도자가 된 작금의 현실만큼 우리 공동체가 위험해졌다는 인식이 근접했던 적이 없다. 왜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을까? 저자는 이 파국의 시대를 재촉한 요인의 하나로 한국 사회의 낮은 문해력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 둘째는 지배자, 강자, 착취자의 언어인 문화권력, 즉 보편성이라는 언어의 폭력성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책에 열거된 세계 다르기 보기를 위한 쓰기에는 자유, 표절, 이성, 이분법, 미국주의, 환원주의, 구조적 모순 등 무수한 문제적 사유의 물음들이 담겨있지만, 어쩌면 문해력과 보편성이라는 두 주제어의 범주로 설명가능 할 것이다. 물론 그 총체적 단일 언어는 융합혹은 횡단의 정치로 수렴하겠지만 말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의식의 출발은 앎의 문제이다.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앎은 무의미하거나 대개는 사회악이다.” - 59

 

고작 편협하게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들의 관념의 변죽만 울려대며, 실상은 아는 것이 없는 까닭에 모든 문제 제기가 돌고 돌아 좌빨, 페미니스트, 틀딱 같은 차별과 혐오의 언어로 귀결된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현상이 하나의 출구로 빠지는 깔때기 이론을 환원주의라 한다. 이것에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 하나 밖에 없다는 편협성이 놓여있으며, 마치 그것이 보편성이라는 진리의식을 갖는다고 여기는 우매한 폭력성 또한 똬리를 틀고 있다. 지금 우리의 공동체를 불안한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권력이 말하는 보편적 가치란 이 깔때기 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지금의 권력은 스스로 자신을 아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체 어떤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겠다는 것인가? 부자 감세의 보편성? 공기업 민영화의 보편성? 사회안전망 해체의 보편성? 이처럼 보편적 가치의 대상도 문제지만 오늘의 세계는 불변하는 보편적 가치는 존재치 않는다. 기회의 평등? 이것은 불평등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보편적 가치를 적용할 수 있는 조건이 사람이 처해있는 위치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무수한 차별의 조건들이 현재하는 데, 보편적 가치란 그야말로 거짓의 언어, 무지한 대중 속이기의 잡설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자유를 부르짖기까지 하는데, 이건 정말 위험하기 그지없는 무서운 말이다.

 

자유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개념어이다. 경쟁사회, 소음과 먼지, 타인의 시선, 신분차별, 신자유주의...,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말이다. 자유는 결코 그냥 주어진 적이 없다. 모두 투쟁으로 쟁취해 얻어야 하는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서 그냥 부자유 상태로 산다.(28)” 그런데 자유, 자유를 외치는 윤정권의 자유는 개인적 차원의 자유이다. 내 뜻대로, 내 맘대로의 자유이기에 소름끼치는 것이다. 그런 자유는 혼자 있을 때 맘대로 하면 된다. 공동체에서 자신의 이런 자유를 행사하려하면 타인을 다치게 한다. 결국 이 자의 자유는 타인이라는 국민 대중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하겠다는 것의 표현일 뿐이다. 조물주라도 된 듯 생각대로 자유를 행사하게되면 그 삶은 오래지 않아 멸망하게 된다.


 



왜 이런 무지와 무능력이 이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이 되었을까? 저자는 분단(分斷)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이분법이 한국 사회를 장악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 이분법이 한국사회의 낮은 문해력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북, 반미, 친일 ... 이러한 언설을 생명줄로 삼는 반국가적 사회에서 어떻게 문해력을 논하겠는가?(95)”라는 한 문장이면 그 설명으로 족할 것이다. 앎의 궁극적 목적이란 배제없는 온전함(108)”이다. 경계와 선입견 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는 자유로운 가능성의 상태, 적어도 상상력이라도 갖추는 것이다.

 

문해력이 낮다는 말은 실제로 문해력이 낮다는 것과, 이해하지 않겠다는 맹목의 의미를 갖는다. 낮은 문해력은 소통에 장애를 일으킴으로써 사회갈등의 주 원인이 된다. 인터넷 검색창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은 이미 아는 것의 구체화이지 새로운 정보의 획득이 아니다. 모르는 것은 검색하지 못한다. 이 말은 자기 옹졸한 한 움큼의 지식을 굳게 하는, 즉 변화하지 않겠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지식도 품지 못한다. 더구나 긴 글이나 조금만 익숙지 않은 문장에도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기 무지는 외면하기 일쑤다. 문해력은 자신의 가치관과 무지에 대한 자기 인식의 문제라는 지적처럼, 나는 모른다는 겸허한 앎의 태도는 우리의 사회를 위해 중대하고도 또 중요한 출발점이다.

 

내 자신이 무지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정말 굉장히 어려운 노력을 요구한다. 공부가 중노동인 이유이다. 사유는 고통스럽고 외로운 노동이다. 이러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편협하고 속된 믿음을 만들어낸다. 일례로 1934년 한 일간지에 연재되던 일제 강점기 식민지민의 침해된 권리를 말하던 이상의 오감도(烏瞰圖)가 무슨 말인지 모를 시의 게재를 중단하라고 항의하던 독자들로 인해 연재를 이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역사는 이렇듯 독자의 수준이 만들어간다. 무지가 역사를 만들어내는 이 폭력성이 결국 자신들을 신음하게 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이 낮은 문해력이 문제인 이유이다.

 

낮은 문해력은 궁극적으로 좋은 지식 생산의 토양을 파괴한다. 지식 생산을 궤멸시키는 요인에는 표절도 한 몫하고 있는데, 마치 단순한 사적 윤리의 문제처럼 치부하고 마는 만연한 도덕 불감증이다. 표절은 윤리문제가 아니라 법적 문제로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공정거래를 해치는 가장 부정의한 도적질이라는 점이다.

 

표절로 받은 학위로 돈벌고 고용의 수혜를 입는 것이라면 이보다 악질적 행위가 있을 수 있는가의 물음이다. 보석 훔치는 것보다 훨씬 쉬운,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표절이라는 이 절도에 대해 이 사회는 왜 이리 무감하며, 표절자의 당당함은 어찌 가능한 것일까? 이 표절자가 버젓이 지식인 행사를 하다보니 이 사회의 지식 생산은 바닥을 해매고 천박함이 오히려 권력을 행사하며 양양거린다.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인지하는 방법은 쓰기와 과학적 실험이라는 방법 외에는 별 개 없다. 그래서 쓰기는 앎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쓰지 않고 베끼고 복사하는 세계에 진정한 지식은 결코 생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사회의 여론을 온통 지배했던 세 가지 사건을 예시하고 있는데, 저마다 다른 동기와 유형을 지닌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회는 이들 모두에 동일한 결론을 내린다. 다른 사건인데 결론이 같다는 것은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곧 하나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폭력의 다름 아니다.  사회변화, 차별받고 배제되는 약자들은 새로운 언어로, 지식의 재해석을 통해, 나아가 기존의 지식을 넘어 새로운 앎을 향한 경계넘기를 시도해야 한다. 그 방법론이 곧 새로운 지식 생산이 가능한 자기 무지의 고통스런 인식이다.

 

안다고 여기는 순간 그 어떤 지식 생산의 영역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지식이 생산되지 않을 경우 그 사회적 고통은 오롯이 현실에 대처할 수 없는 약자들의 몫이다.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고, 제시된 언어의 개념 내부에 도사린 차이를 드러내고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 우리는 앎을 위해 부단히 공부를 하여야 한다. 그 공부가 곧 문제의식이요, 융합이다. 역사는 공동체의 안목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 결과는 바로 그 공동체의 안목의 결과일 뿐이다.

 

이 책의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는 표제는 바로 이러한 앎, 융합의 출발을 함의한다. 이 책은 세상을 보는 열린 시각을 지니기 위한 그 지향의 제시로 가득하다. 지배이데올로기와 계급을 끊임없이 재생산하여 기득권을 항구화하려는 주류의 언어를 탈피하여 진정한 시민의 언어를 재창조하기 위한, 또한 우리네 좁아터진 앎에 훌륭한 채찍이 되어 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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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08-18 19: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 안녕하세요, 희진샘 이번 책 정말 필요한 말들로 이루어져있지요? 군더더기 없이 신랄한 비평(?) 리뷰를 읽으며 감동받고 갑니다..^^!!

필리아 2022-08-18 19:30   좋아요 1 | URL
네, 앎의 지평을 넓히려는 좋은 책입니다.
세대를 망라한 많은 이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공감의 말씀 고맙습니다. 공쟝쟝님 :)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듀나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8월
평점 :
절판


4차 산업 혁명의 물결이 아직은 미치지 않았던 시절, 11년 전인 2011년에 발표, 출간된 Sci-Fi 작품집이다. 작가의 통찰력이 발산하는 지적 묘미는 오늘에 더욱 그 의미에 생생하게 감응할 수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2022년에 이르는 십년 사이 포스트인본주의 기술의 윤리적 성찰을 요구하는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가 독서계를 달구기도 했으며, 이제는 이 작품집의 많은 소재들이 현실적 물음을 제기하는 실재적인 것이 되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이번의 개정 출간은 더욱 실감하는 새로운 성찰로 안내해줄 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들의 실체조차 여전히 모르는 인간들이 마치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그 한계를 망각하고 자행하는 행위에 대한 조롱일 수도 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물화(物化)된 인간의 기계주의적 사유에 대한 역설적 예찬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고작 자아나 의식이 하는 보잘것없는 이해 그 이상의 심연에 대한 겸허함으로의 회귀를 주창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진실이야 어찌되었든 이러한 본원적 의문을 던지는 그 자체만으로서 이 단편집은 흥미로움 덩어리라 할 수 있다.

 

우선 문학은 말할 것도 없이 사회학이나 철학을 비롯하여 종교, 문화인류학, 신경생물학 부분 등 인간의 불멸에 대한 희구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담론은 존재론적 논쟁을 지속적으로 야기한다. 해서 수록된 총 13편의 장단편(短篇), 단지 신체로서의 인간에 공생하는 의식이자 영혼이라는 존재를 통해 삶과 죽음, 즉 부조리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이원론적 산물인 디북은 세상과 생명에 대한 궁극의 진실을 말하고자 애를 쓴다.

 

보이지 않는 영혼에 실체라는 존재자를 설정함으로써 인간의 육신을 분리한다. 과연 분리될 수 있는가는 이 작품의 주제가 아닌 듯싶다. 인간의 의식을 구성하는 재료로서의 이 존재가 지구 생명체에 깃들어 공생함으로써 불필요하게 인간을 괴롭혔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이 존재들이 새로운 숙주인 자신들의 삶의 공간을 마련하고 생명체들을 떠나는 것은 곧 인간의 죽음, 아니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는 무념(無念)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처음부터 삶과 죽음은 결코 이렇게 기형적인 방식으로 묶여서는 안 되었다. 지구의 생명체들이여, 안녕.”이라고 유감을 외친다. 이원론적인 기독교의 종교적 색채가 물씬 풍기는데, 우리의 자아라는 것이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무의식, 잠재의식은 물론 감각기관을 비롯한 감성의 세계인 신체를 이탈한 정신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생각에 이르면 사실 공허한 얘기가 되어버리고 말지만, 출생의 기원이자 저 지옥이라 불리는 모체의 아득한 게헨나(Gehenna)의 세계, 암흑과 죽음의 공포를 그럴듯한 또 하나의 신화로 안내하는 사색으로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한편 죽음과 세금같은 작품은 짙은 현실 참여적 색채로 우리사회에 신랄한 풍자의 메스를 들이대는데 역시 경제적 효율, 공리주의를 잇는 절대 실용주의가 생명의 가치를 초월한 몰가치로 질주하는 오늘을 냉소적인 해학으로 지펴낸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지구촌의 경제적 과제를 해결하는, 어쩌면, 아니 가능성이 높은 암울한 우리의 미래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수명을, 개인의 삶과 죽음을 조작하고 통제하는 신()적 존재, 기관, 시스템..., 시스템이라는 자신들이 만든 기계에 기꺼이 복종하고 물질과 소비의 향유를 맞바꾸는 그런 사회의 도래 말이다.

 

이처럼 오늘의 인간을 지배하는 기계, 과학이라는 합리주의 만능의 사유는 심각한 결핍을 가지고 있음에도 결코 인정하려하지 않는데, 이러한 문제제기는 수록된 여러 작품에서 발견하게 된다. 소유권이라는 작품에서 죽은 자의 소유였으나 주인 없이 방치된 부양품(浮揚品)6살 소녀모습 텔렉 로봇의 자기 정체성의 발현이라는 우화를 통해 사랑과 같은 감성이 물질처럼 소유대상이 될 수 있는가라든가, 정원사에서는 외계의 작은 공간에서 정원을 가꾸는 한 생물학자의 오만에서 인간의 상상력이나 창조력이란 것은 부품이나 모듈을 짜 맞추는 재능 이상이 아님을,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정말 보잘것없는 것임을 드러내고 조소하며 안타까워한다.

 

이 소설집의 표제가 된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는 다소 이색적으로 느껴짐에도  링커 바이러스라는  범 우주 네트워크 환경통합 과정으로서 오늘의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로의 통합과 대비되어 인간 욕망의 무차별적 잔인성에 대한 기막힌 메타포로 소설적 감동의 여진이 제법 큰 작품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고립된 사회로서 북한의 등장이나 게걸스러운 육식동물로서의 장면들은 그 혐오스러움 만큼이나 극명하게 비관적인 오늘의 자본주의의 속성을 그려내고 있다.

 

이 링커 바이러스라는 단어는 안개 바다에서 다시금 등장하는데, 다윈 생태계가 단절되고 링커 생태계라는 새로운 진화체계로 이전된 변종의 세상으로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지옥을 탄생시키고 있다. 사실 모든 사회비판적 문학 작품에서 반복되는 주제라서 진부할 수 있음에도 SF적 요소는 다른 차원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 A,B,C.D,E & F, 메리고라운드와 같은 비교적 재치 넘치는 소재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있기도 하지만, 역시 작가 듀나의 비평적이고 사색적이며 기원적인 통찰을 요구하는 작품 세계는 이 소설집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통렬하고 준엄한 사유로 독자의 기대를 채워준다.

 

당신들은 죽음을 향해, 우리는 삶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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