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과학의 대중적 저술가이자 유튜브 최대 과학채널 쿠르츠게작트의 설립자인

'필리프 데트머'가 저술한 Immune(면역)의 리뷰로서, 도서출판 사이언스북스에서 

제공한 가제본 도서를 기초로 쓰여졌습니다.



참조 : 이미지를 클릭하면 관련 동영상으로 연결됩니다.


책은 단세포 생물이 다세포 생물이 되어 5억년 이상 시간을 누적하며 진화시켜온 대략 40조 개의 세포가 유기적 상호작용으로 축조된 인간 신체의 생존 유지 장치인 면역계의 정교하고 기발한 시스템을 대중적 언어로 지펴낸, 자기 앎에 대한 탁월한 저술임을 어떤 언어로도 부정하기 어려운 역작이. 어쩌면 인간 신체에 대한 이 새로운 앎, 무지로부터의 작은 해방이 가져오는 흥분 탓이겠지만 내 의식이 무수한 나래를 펴며 자꾸만 다른 사유의 영역으로 날아가게 한다.

 

면역체란 생명체의 보호와 유지 존속을 위해 진화과정에서 부딪힌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시켜온 엄청난 복잡성 시스템이다. 이 문제란 인간 몸을 자기 생존의 생태계로 인식하는 세균, 바이러스, 기생충 등(이들을 통틀어 병원체라 한다), 세계에 온통 퍼져있는 외부 적으로부터 인간 신체를 지키는 것이다. 즉 자신을 보호하고 계속 살 수 있게 해주는 생물학적 원리를 어떻게 표출하는 가의 문제는 자기 생존에 직결되는 것인 까닭이다.

 

병원체에게 인간의 신체는 위험을 줄이면서 영양을 섭취하고 생존과 번식을 위한 멋진 대상이다. 따라서 이들 빌붙으려는 존재들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곧 생존의 중요한 과제라는 점이다. 면역계는 바로 이러한 오랜 투쟁 속에서 살아남은 진화의 산물이며, 그만큼 정교해지고 치밀해졌다. 그 결과는 신체 속으로 침입하는 적을 특이적으로 인식하고 그 적에게만 효과적인 무기를 신속하게 대량 생산하는 능력과 한 번 침입했던 적의 모습을 항구적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자기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21)이다. 타자가 해를 끼칠지 말지와 무관하게 일단은 타자로 식별되면 무차별 공격을 하여 파괴하는 것이다. 타자는 죽음이다. 이를 부정하는 순간 생명체는 며칠도 못가 죽고 만다.

 

건강의 유지란 바로 이러한 면역계의 안정적 작동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40조 개에 이르는 인간 몸을 한군데도 빠짐없이 방어하는 것은 결코 간단치 않다. 면역계는 이 엄청난 세포 구조물의 방어체계로서 한 순간도 그 작동(경계)을 멈출 수가 없다. 멈춤은 곧 죽음이다. 사실 살아있다는 것은 적대 세력이 득실대는 곳에서의 쉴 새 없는 전쟁에서의 승리이다. 굴복은 멈춤이요 생명 작동의 중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체에 공급되는 에너지 모두를 면역계를 위해 사용할 수는 없다. 40조 개에 이르는 세포의 정상적이고 평온한 작동을 위한 영양 공급과 신체를 구성하는 각 조직과 기관의 일관된 작동 시스템을 감시, 운영하는 데 막대한 에너지가 소요되기에, 면역계는 빠듯한 예산으로 방어 전략을 구축했다. 그것은 선천 면역계와 후천 면역계로 기본 방어 전략과 특화된 방어 전략으로 이원화하여 침입자에 따른 각기 다른 방어 전략을 구사하여 낭비 요인을 제거한 것이다.

 

전문적이고 복잡한 용어를 피하고 난이도를 조절하여 독자가 재미와 지적 이해를 함께 쌓아갈 수 있도록 집필된 이 저술은 그 지식의 친밀하고 세밀한 안내로 거의 저절로 체화될 만큼 직관적이고 우아하기까지 하다. 아마 인간의 지식 습득에 대한 어떤 앎의 경로를 알고 있는 듯, 이해를 위해 동원되는 침입자, , 전쟁, 무기, 생물학적 로봇과 같은 상징을 동원한 비유법은 복잡하고 난해한 생물학적 지식을 그야말로 천재적 서술능력을 통해 명료하게 전달해준다.

 

인간 신체와 외부세계의 접점인 피부와 점막(기관지와 허파, 눈꺼풀, 입속, 콧속, 위장, 생식기관)을 비롯해 콧구멍, 귓구멍 등등은 침입자가 몸속으로 들어오려고 시도하는 장소다. 다시 말해 적대세력과의 경계인 피부와 이들 점막에는 천연 항생물질을 비롯한 염도, 약산성 등 미생물이 서식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뿐 아니라 매순간 100만개의 세포가 통제된 자살을 감행함으로써 침입 세균의 서식터전을 제거하기까지 한다.

 

아마 탄성을 지르게 되는 것은 하나의 상처로 시작되는 예화(例話)를 통해 면역계와 면역 세포들의 활동을 가히 숙련된 솜씨로,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도록 전달하는 점진적 세밀성을 지닌 강렬한 지식들 때문이다. 우리 신체의 선천 면역계는 외부 침입자(병원체)를 발견하면 즉시 행동에 돌입하는 체계이다. 적과 죽은 세포를 먹어치우며, 방어전략을 지휘하는 큰 포식 세포로부터 상처가 너무 깊을 경우 혈액 속에 떠돌던 중성구가 활성화되어 살인 병기로 둔갑, 자폭까지 마다치 않으며 병원체를 맹공하는 경로는 실감나는 한 편의 드라마 같을 정도로 흥미와 지식을 동시에 흡수케 한다.

 

이 면역 세포들 및 단백질 덩어리들이 활성화되고, 세균과의 전쟁터가 된 상처 부위로 어떻게 중성구가 경로를 찾아 도달하게 되는지, 360도 면역 감지 체계를 갖는 세포막과 일종의 면역계 언어인 아주 작은 단백질인 사이토카인을 생성 발산하는 큰 포식세포의 행위 등은 가히 경이로움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 몸에 발생하는 염증의 목적은 물론, 사이토카인 폭풍이라 불리는 면역계 통제 상실 증상 등 단백질 사이에 발생하는 일련의 생화학 반응에 이르는 해설은 인간 신체의 면역계를 실체적 이해로 견인한다.

 

나아가 단백질과 물 분자로 구성된 세포의 특징과 3D 퍼즐 조각처럼 존재하는 단백질의 특정화된 형태가 침입하는 세군과의 형태 차이를 인식함으로써 적대자를 멸실(滅失)시키는 작동 시스템은 진화적 신비에 어떤 경외감마저 일으킨다. 단백질 인식기 역할을 하는 선천 면역계의 수용체에서부터 우리 몸의 모든 체액에 가득 차 있는 약 1,500경에 이르는 보체계가 발휘하는 면역 기능들 또한 경이로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겹겹이 감시되고 활성화되는 면역계의 경로들을 따라가며 적의 존재 성격(바이러스인지, 세균인지, 기생충인지)을 알아내고, 후천적 면역계의 도움을 받을지 여부를 결정하는가 하면, 전쟁터 상황과 적의 존재를 알리는 전령인 가지세포의 비상한 이동, 면역 세포의 정보센터 역할을 하는 우리 몸에 존재하는 약 600개의 림프샘과 면역 슈퍼하이웨이라 할 수 있는 림프계(몸속 배관)’를 떠돌던 ‘T세포의 활성화와 항체 형성 세포의 변이 등은 우리 몸의 구성 기관은 물론 신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는다.


면역 세포의 필수 검정기관, 가슴샘 - 130


내겐 뜻밖의 새로운 앎이 된 가슴샘(흉선)’의 역할에 대한 지식은 면역계의 경이성과 함께 생명의 한계를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후천 면역계인 T세포는 선천 면역 세포들의 활성화 및 전략 지휘자 역할과 특정 침입자인 항원에 맞서는 항체를 만들어 적을 무력화시킨다. 이 세포는 한 가지 특이한 항원만을 인식하는 특이적 수용체를 갖도록 만들어져 적을 섬멸한다. 그런데 자기를 타자로 인식하는 경우를 제거하기 위해 이들 T세포를 검사, 훈련하는 곳이 바로 가슴샘이다. 여기서 졸업하는, 즉 특이적 수용체를 생성할 수 있으며, 다른 수용체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고, 자기를 타자로 인식하는 지 여부를 통과한 것은 2,000만개에 달하는 것 중 2%20~40만개에 불과하다. 항체로 변이하는 이 세포의 특징이 왜곡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가슴샘의 메커니즘은 절로 그 진화적 능력에 머리를 떨구게 한다.

 

가슴샘은 대략 85세 전후에 이르면 기능을 멈춘다고 한다. 인간의 생존에 절대적인 장기로서 언제 죽을지 결정하는 장기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 기능이 멈추면 이미 양성되어 배출된 T세포만으로 병원체에 저항하여야 하기에 감염성 질환이나 암에 지극히 취약해진다. 결국 생존을 위한 방어 체계가 사라지기에 인간의 신체는 죽음의 도래에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이 짧은 리뷰를 쓰는 순간에도 내 몸의 면역 체계는 끊임없이 침입하는 세균을 감시하고, 발견된 병원체들과 전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매혹적이고 역동적인 면역계의 활성화 및 작동 기작(機作)을 알아가며 내 호기심은 선천 면역계 역할의 목적인 자기와 타자의 철저한 구별단백질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생화학적 물질로서 세포를 생물학적 로봇기계로 정의하는 곳으로 향한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란, 아니 동물이란 본질적으로 타자를 공격, 파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인가에 대한 물음과 동물이란 한낱 생물학적 로봇인 단백질 형태의 끊임없는 변형과 조작에 불과한가라는 수없이 반복되는 논쟁적 물음의 제기이다. 단지 단백질의 생화학적 기작에 의한 흐름에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존재임에 쉽사리 굴복되지 않는 저항이 머리를 치켜든다. 타자에 대한 연민, 이성과 감성의 융합으로서의 정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나는 이러한 과학적 실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여야 하는지 지향할 곳 없는 심연에 빠져든다.

 

이러한 자가당착(自家撞着)적인 어리석은 물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평온과 안정성이라는 건강한 생()의 진작을 위한 자기 앎의 회복을 위해 쓰여진 이 책은 가히 독보적인 역작이라 할 정도의 생명(면역)의학에 대한 대중적 걸작이다. 오늘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욱 과학과 자본이 견고하게 유착된 의학이, 무지해진 인간 위에 더 한층 군림하며 앎의 주권 박탈을 강화하고 있다.

 

이렇게 자기 신체에 무지해진 대중은 각종 음모론과 당파적 이익을 위해 동원된 뒤틀린 의학 정보에 쉽사리 현혹되어 정작 필요한 삶의 건강을 위한 지혜를 상실하고, 진정한 자기 운명의 주인임을 망각한다. 인간의 신체 내에서 병원체인 COVID19가 행운을 누릴 때, 인간들은 자신들의 면역체계에 대한 앎 대신에 엉뚱하게도 정치적 패거리 놀이에 심취했다. 자신들의 몸을 잃어버린 줄 모르게 되면서 자기 탐구, 그 생리적 활성화를 위한 중요성을 알려고 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은 오늘의 사회가 얼마나 반()생명성을 가속화시키고 있는가의 반증일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삶의 질에 결정적 역할을 미치는 면역계에 대한 앎을 말하는 이 저술은 시의적절하고 또한 중대하다. 면역계는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 존재이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순간 목숨을 잃게 되는 결정적 생명장치이다. 정말 쾌락적 향연을 즐긴 듯한 충족감을 풍성히 안기는 기념비적 과학 저작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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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잡기록은 지난 방법서설 제1부에서 제3부에 이르는 감상글에 이은

4부에서 제6부까지에 대한 정리 및 소회이다.




정신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이 있다. ...지성에 의해 지각했던 것들까지 똑같이 의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발견하려 했던 것이 남아 있었으니, 그것은 확실히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오로지 의심하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었다. ...이것은 어떤 근거들에 의해서도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3부 까지가 철학 제 1원리를 도출하기까지의 방법에 대한 서술이었다면, 4부는 책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최초 사색의 결과와 그로부터 파생된 일반 규칙의 도출에 대한 사유의 진술이며, 5부에서는 인간 신체와 정신의 분리에 따른 이성이라는 보편적 도구의 인간 고유성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제 6부는 그의 자연학 저술들의 출판에 대해 가해질 교황청 비난의 공포에 대한 두려움, 그 불안 심리 및 방법서설을 포함한 자신의 자연학 저술들을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저술한 이유를 술회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방법서설의 철학적 고유성은 정신 작업 전체를 새롭게 시작하고자, 전통적인 고전 논리학을 극복하고 새로운 논리 방법을 고안하고자 하였던 제 1~3부에 걸친 격률과 도덕 규칙이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컨에서부터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로 이어지는 근대철학 전체의 문제였던 고전 논리학을 극복하는 새로운 인간 정신의 방법에 대한 요구는 그만큼 절실했다고 할 수 있다.

 

4

 

데카르트의 방법은 다름 아닌 반성적 인식, 관념에 대한 관념이라 할 수 있다. 즉 가장 완전한 방법이란 정신에 주어져 있는 가장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에 따라 어떻게 인도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방법은 지성의 자기 탐구요, 자기반성이다. 지성은 이로써 인식을 확장해 나아간다. 그는 이를 위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것은 절대로 그른 것으로 내던져 버리고 전혀 의심할 수 없는 무엇을 찾는 것이다.

 

참된 원리는 모든 의심의 위협 밖에 놓여 있으며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을 만큼 명백하고 확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의심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버렸을 때 그의 신념 속에 대체 무엇이 남았는가를 깨닫는다. 의심하고 부정하는 동안에도 자신은 의심하는 무엇이며 따라서 자신은 실존한다는 진리, 1의 철학의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 (Je Pense, done je suos/ cogito, ergo sum)” *1 참조

 

그런데 여기에는 관념 기원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만일 관념이 생각의 주체인 사유하는 나(Cogito)'보다 많은 능력을 지닌 것으로부터 왔다면 이것은 코기토의 능력 밖이다. 결국 관념이 코기토의 소관이 되려면 능력이 더 작은 것으로부터 와야만 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관념 기원의 문제는 자신 속에서 연역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신의 실존 문제를 통해 사유하는 나의 관념 속에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여 제1원리의 참됨을 의존한다. 이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순환논증인데, 증명되어야 할 것이 이미 그 증명에 전제 되어 있는 그야말로 하나마나한 논증인 까닭이다.

 

신의 실존은 나의 생각으로부터 증명된 것이고, 나의 생각은 신의 실존에 의해 보장받는다는 논리는 논증규칙의 위반이고 사실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은 것이다. 의존해야 할 논리가 이렇게 무너지면 그의 제 1 철학 원리도 의심을 극복한 명증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의 많은 비판적 사유들로 그의 코기토에 의심이 짙게 드리워지긴 했으나, 모든 의견에 대해 의심의 근거를 요구하는 방법적 회의는 참된 원리를 찾으려는 인간 사유에 귀중한 방향을 제시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제 1원리에 이르는 4가지 논리규칙으로부터 극히 명석하고 판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모두 진실이다.”라는 일반규칙은 인간 관념의 실재성을 이해하는 귀중한 지표로서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5~ 6

 

1 원리로부터 연역한 진리의 연쇄를 개괄적으로 제사하고 있는 제 5부는 데카르트의 이원론(二元論)과 신체에 대한 기계주의적 주장이 특별히 관철되는 장이라 할 수 있다. 그는 4부에서 이미 나는 하나의 실체로서 그 본질, 혹은 본성은 다만 생각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고, 존재하기 위한 어떤 장소도 필요하지 않으며, 어떠한 물질적 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나를 존재하도록 하고 있는 바의 정신은 물체(신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며, 정신은 정신으로서 존재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정신과 신체의 분리를 확언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물에 있어 제 1의 근본적 운동인 심장과 동맥의 운동은 신체와 분리된 정신의 조력을 받지 않는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시계추나 톱니바퀴의 힘, 위치 및 모양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기는 운동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기관의 배치와 그 성질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기는 기계적 운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신체의 모든 부분에 운동을 주는 동물의 정기(精氣) 또한 신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훌륭한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계적 성능에 불과하다고 확언하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인간이 이러한 기계적인 동물과 다른 것은 말()과 기호의 조립 사용이라는 이성이라는 보편적 도구를 지녔다는 점에 있다고 역설한다. 이는 동물이 신체를 구성하는 기관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라 이성이라는 인식 능력, 즉 정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이성적 정신은 물질의 힘으로부터 추출할 수 없음의 증거, 정신과 신체는 분리되었음의 명확하고 판명 가능한 참된 진리라는 것이다. 아마 오늘날 유일신을 신봉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이미 무너진 믿음일 것이다.

 

6부는 그의 자연학 저술에 대한 방법론의 진술과 일반적 원리 획득을 위한 온갖 특수문제의 실험을 통한 제 1원리의 발견과 그 연역의 가능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더욱 시선을 끄는 것은 갈릴레이에 대한 교황청의 심판이 가져온 불안 심리로 발표 예정이었던 그의 자연학 저술들에 혹여 잠재할지 모를 위험성이 가져올 두려움에 대한 변명과 그럼에도 자신의 학문은 참된 진리이기에 발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유들의 구구절절한 정당화 논리들의 술회이다.

 

출간을 미룰수록 그의 저술에 대한 세간의 의혹이 증폭되어 자칫 교황청의 도덕적 잣대를 넘어서지 못하는 불신의 내용이 있음을 자인하는 모양새를 회피하기 위해 부득이 출간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을 떨쳐내는 데는 미흡하였던지, 자신의 저술들을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저술하였음을 부연 설명한다. 대중이 사용하는 통속어인 프랑스어가 자연적 이성만을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더 올바르게 이해주리라는 생각과, 이들을 재판관으로 가지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로마 교황청의 특정인들과 일부 극단적 도덕주의자들의 비난을 피하고 대다수 시민의 지지를 통해 칼날을 피하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결 어


데카르트 자신은 신의 실존 증명과 코기토가 참임을 증명하는 데 순환논리를 사용함으로써(비록 데카르트 자신은 순환논리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존재 증명에 실패하지만, 이는 스피노자에 이르러 가장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인간 자신으로부터라는 자기 완결적 관념 형성 모델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어주었다. 즉 참된 관념의 형상이 어떤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본성 자체에 의존해 있다는 주장으로서, 관념에서 모든 외부적 원인을 배제하고 신의 관념을 초월적 타자가 아니라 지성이 제 능력 안에서 길어낼 수 있는 관념들 가운데 가장 완전한 관념으로서 설명해 내는 초석이 된다.

 

과학과 이성을 기초로하는 방법서설속 많은 사유가 오늘에 이르러 그 확신이 부정되거나 흔들리고 있지만, 그가 사유의 방법론으로 제시하는 이성의 윤리 규칙, 진리 추구 방법론은 여전히 인간 사고의 진보를 위해, 앎이라는 지혜의 발견을 위한 필요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인류 정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고귀한 인간 사유의 도전을 보는 것은 어떤 충만감과 함께 겸허함의 필요를 느끼게 한다. 오늘 우리들의 사회에는 정보가 난무한다. 진정한 앎, 참된 것이란 극한적 회의를 수반하는 사유의 처절함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지금의 사회에는 사유하는 존재들이 점점 쪼그라드는 것만 같다. 거짓이 횡행하는 사회는 이같은 처절한 사유 없음에서 자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 이 제1철학 원리 명제는 프랑스어로 저술되어 발표되었다. 따라서 코기토(Cogito)를 비롯한 라틴어 번역문장은 데카르트의 완전한 진술을 의미하지 못한다. 특히 그가 선언하듯 새로운 논리의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이를 삼단논법식의 해석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식의 해석은 오류라는 학계의 비판이 존재한다. 생각하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생각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동시적인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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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서설 (1),  의심과 명증성의 철학, 데카르트의 사유 방법

 

6부로 구성된 방법서설중,  제 1철학 원리가 등장하기까지 사유방법을 설명하는 제1~3부까지와 4~6부로 나누어 2회에 걸쳐 정리와 다를 바 없는 소회를 남긴다. 이 글은 그 첫 번째인 3부까지에 대한 잡기록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사유하는 나 (Cogito)’라는 인식주관이나 인격주체를 의미하는 명사화된 대중적 언어가 되어 회자되고 있음에도 정작 이 명제를 도출하는 방법론에 대한 검토는 발견하기 힘든 것 같다. 이 유명한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 (프랑스어; Je Pense, done je suos/라틴어; cogito, ergo sum)’는 총 6부로 구성된 방법서설의 제4부 초반에 등장한다. 즉 최초의 사색으로 도달한 진리인 데카르트 철학 제 1원리 명제에 이르기 까지 그가 인식 방법으로 채택한 사유 방법들을 설명하는 제1부에서 제3부까지의 자기 이성을 이끌었던 노력들의 결과가 4부에서 비로소 설명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그의 전혀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논증의 과실을 위해서 채택한 방법은 뒷전이 되고, 또한 제 5부와 6부에 걸친 자연학 - 굴절 광학, 기상학, 기하학- 과 이성 전반에 대한 논증 방법이나 원리 획득 방식은 마치 존재치도 않는 듯 대중 독자들의 시선에서 소외된 것만 같다. 물론 책의 모든 내용이 현실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진리를 찾아내기 위한 데카르트 특유의 규칙이나 격률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의심과 오류를 제거하고 앎의 진실에 이르는 유효한 사유방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1

 

개체의 형상(forms), 즉 본성 사이에는 이성의 다소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1부는 이성(理性)은 인간 개체 모두가 차별없이 지니고 있는 것이며, 인간을 다른 여타 대상물과 구분해주는, 즉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며, 진리 발견의 유일한 도구임을 명시한다. 만일 이성의 많고 적음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직 온갖 우유성(accidents; 비본질적이며 없어도 존재의 본질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성질) 사이에서나 발생할 뿐이지 절대적 다소란 있지 않다는 말이다. 결국 진리를 발견하는 도구로서 자기의 이성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 그리고 책 방법서설을 왜 집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서술이다. 데카르트는 인식 도구로서 정념이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이성이라는 의지적 주체가 정념을 통제 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는 인식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서 의심과 수학적 추리의 확실성과 명증성(明證性)’을 채택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경험적 이유가 놓여있는데, 자기 자신에 관한 사항에 있어서 우리들은 참으로 잘못되기 쉽다는 것, 또한 타인의 판단이 자신에게 형편이 좋은 것일 경우, 그것은 참으로 의심되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음에 기초한다. 즉 기존의 사상과 학문에 많은 의심과 잘못으로 시달렸고, 이들 지식을 얻고자 힘쓰면서 오히려 더욱더 무지(無知)를 발견했을 뿐 아무것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눈앞에 전개되는 정보들의 공허함에서 더욱 용이하게 드러난다. 사실 진실한 앎을 발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많은 세대의 가장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들에 연구되었음에도 논쟁의 여지없는,

의문의 여지없는 사항이 철학에는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 문장에는 동일한 문제에는 진실한 의견이란 단 하나밖에 없다는 당연한 믿음이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기존의 사상들 일체를 견고성 없는 거짓으로 간주하고 폐기하여, 완전히 새롭고 자신 속에서만 발견되는 학문에서 진리를 구하기로 하는 것이라 하겠다. 오늘의 우리들은 다양한 의견들 각각에 일부라도 진실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 속에서 독단론을 경계한다. 그는 선례(先例)와 습관에 의해서 믿어버렸던 사항들에서 믿음을 거두어들인다. 그리고는 자기 이성의 정신에만 온 힘을 기울여 진실을 거짓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법에 대한 극도의 열의를 보인다.

 

2

 

많은 사람에 의해 조립된 학문은 단순한 추리만큼도 진리에 접근하지 못한다.”

 

위의 인용 문장처럼 2부는 1부에서 주장했던 독단론적 사유 방식을 부언 정당화하며, 바탕으로 삼은 자기 이성의 논리 규칙 네 가지를 설명한다. 그는 건축과 도시 형성의 비유를 예시하며, 많은 장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건축물보다는 한 명의 건축가가 설계하고 완성한 건물이 훨씬 질서가 뛰어나며, 계획도시가 우연의 산물인 자연 형성 도시보다 높은 조화와 질서를 가졌듯이 한 사람의 탁월한 이성이 진리 접근을 위한 좋은 방법임을 강조한다. 획일성, 질서정연함, 법칙성, 규준성이라는 전체주의적 사고와 흡사하기까지 하다. 이는 스파르타 독재군주인 리쿠르고스의 단독 입법이 동일한 목적을 지향할 수 있었기에 번영했다고 부연하는 데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독단적 진리 접근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시하는 논리 채택의 규칙은 진실된 앎에 접근하는 사유방식으로 유용한 참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요약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의심하는 어떤 이유도 갖지 않을 만큼 명백한 정신에 나타나는 것만 판단에 받아들인다. 즉 명증적으로 진실인 것만 인정한다.

2. 음미하는 문제는 잘 풀기 위해 필요한 만큼 적은 부분으로 나눈다.

3. 사상의 사유 순서는 가장 단순하고 인식하기 쉬운 것부터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복잡한 것으로 나아간다.

4. 완전한 매거(枚擧: 하나하나 들어서 살핌)와 전체에 걸친 통람(銅藍)을 온갖 경우에 행한다.

 

이 논리 채택 규칙에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요소들로 득시글거린다. 세포 하나를 안다고 해서 인간의 총제적 시스템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부분의 합과 전체는 결코 같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일반화를 벗어나는지 판단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특수한 것들을 검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며, 더구나 명증적으로 진실인 것을 아는 것도 자의적이다. 데카르트는 이를 신의 존재 증명을 통해 인간 정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부분에 대한 진리성으로 의존한다. 비록 그가 계시를 진리 추구에서 배제하고 있으나 여전히 17세기라는 시대적 한계를 돌파하지 못한다. 어쨌든 그의 인식 논리 방법은 이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3

 

데카르트가 의존했던 진리 추구 방법론과 관련해서는 가장 중요한 챕터일 것 같다. 이성이 어떤 판단을 내리는 데서 미결정 상태에 놓여있을 경우 그는 잠정적으로 세 가지 도덕 격률을 설정하고 이를 철저하게 실행한다. 1격률은 사고활동에 대한 것이다. 어떤 일을 믿을 때와 믿고 있음을 알 때의 사고활동의 차이에 대한 지식, 극단적인 것에 대한 거부와 온건한 것의 선택이 갖는 인식적 유익성을 말한다.

 

2격률은 우유부단과 동요, 후회로부터 탈각(脫却)되기 위해 행동과 태도의 단호함과 방향의 항상성에 대한 규칙이다. 숲 속에 길 잃은 자의 행동처럼 같은 방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적어도 마지막에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예처럼 여러 방향을 갈팡질팡하다 숲 한 가운데 놓이는 것보다 분명 좋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3격률은 세계 질서보다 자기 욕망을 바꾸는 일에 힘쓰는 것이 오성이 제시하는 의지를 벗어나 지배할 수 없는 것을 배제하고 스스로의 사상에 절대적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성이라는 도구로서만 진리의 인식으로 전진한다는 것이며, 오직 단일한 유일성의 진리만을 인정한다. 이들 격률을 데카르트는 진리 추구의 신념으로 삼았음을 설명한다. 결국 알지 못하는 것, 의심스러운 것, 오류에 빠뜨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배제하고 오로지 명석하고 확실한 추리에 의해 확신하는 것만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2부와 3부는 데카르트의 사유 방법, 다시 말해 진리 발견의 방법론에 대한 설명이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절대 그른 것으로 내다버리고, 전혀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논증, 어떤 회의론자의 상정에도 흔들리지 않을만큼 견고한 진리를 찾아냈다고 자부하는 지식의 접근법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에서 지워버릴 때, 그는 이러한 사유를 하는 의 필연적 존재를 깨닫는다. 이것이 최초의 사색이다. 사실 이것은 순환논리를 닮았다. 존재자인 나의 인식이 바로 그 존재자가 하는 의심하는 존재라는 생각은 사유하는 나라는 인식주체의 최초 발설로 후대 사상의 주요 논제가 되었지만, 내게는 결코 명증하지도 판명가능하지도 않은 공허한 명제로만 여겨진다. 소박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이 세계에 대해 확고하고 참된 지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신()에서 인간 주체의 사유로 옮겨왔다는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인류의 사상적 개가(凱歌)일 것이다.


 

 

방법서설(2)에서 제4~6부 정리 감상 계속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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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블론드 1~2 - 전2권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엄일녀 옮김 / 복복서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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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적 시선이 지배하던 시대, 여성은 한낱 대중 욕망의 대상화된 상품이어야 하는 시대, 플래티넘 블론디로 탈색된 머리처럼 가공되어 소비될 수 있어야만 했던 한 여성의 삶이 쓸쓸하게 울려 퍼진다. 거장의 솜씨로 지펴낸 시니컬한 음성이 독자의 마음을 움켜쥐고 놓아주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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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 안전가옥 앤솔로지 9
최구실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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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의 행위가 무릇 타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을 배제하지 못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무심코 하는 발언이나 행동을 스스로 경계하고,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주의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가 점차 이 세계를 점령하는 인상이 짙어지고 있는 듯 하기만 하다. 대체 버젓이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어떤 존재인가? 빌런(villain;악당)을 제재로 하는 이 작품집을 손에 든 이유이다.

 

인간 뇌의 신경생리학적 구조에 기댄 샐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라는 작품부터 오늘 AI의 첨병역할로서 현실의 모든 물리적 세계를 재구성해 인간을 디지털 세계로 모델링한 세계로 급속하게 전환시키고 있는 메타버스의 윤리적 정치적 실체를 이야기하는 수정궁의 유령, 그리고 우상화된 연예인과 팬의 관계를 바라보는 우세계의 희망, 자연의 절대 지배자로 자임하는 인간의 오만과 편견을 우주 동화로 지펴낸 치킨 게임, 마지막으로 세계의 모든 타자들을 한낱 도구로 여기는 어느 투견업자의 패악질을 그리고 있는 송곳니까지, 이들 다섯 작품은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인간의 적나라한 자화상일 것이다.

작품집의 첫 편에 앞서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기쁨과 슬픔이 함께 하듯, 선과 악도 공존하며 서로의 거울 역할을 한다며, 우리는 항상 정의로운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걸까요?”라며 인간 악()의 보편성을 당위시하고 있다. 물론 인간의 저 밑바닥에 침잠해있는 심연의 어두운 그림자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중립적 표현들로 인간의 악과 그릇됨을 정당화하거나 혹은 본질을 흐리멍텅하게 하여 도덕적 기회주의적 성향과 자기기만적 존재임을 합리화하려는 의도에는 저항감을 느끼게 된다.

 

인간들마다 어떤 도덕적 믿음을 하고 있는가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러함에도 인간을 자연의 대상과 다른 대상들과 구분해주는 의지, 즉 도덕적 공과에 대한 개념의 선험적 능력을 지녔다는 칸트의 지적처럼, 인간은 선하고 악한 것, 옳거나 그른 것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다. 만일 이를 부정하게 되면 어떠한 악이나 그릇됨에 대해 도덕적 비난을 가할 원천 자체가 사라지고 만다. 결국 인간에게 도덕성이라는 것 자체를 박탈하여 혼돈이 휩쓰는 무법천지의 세상이 바른 세계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빌런을 선의(善意)로 해석하는 이들에게 나는 강한 불쾌감을 갖는다. 이러저러한 상황과 배경의 불가피성이 한 인간을 악한으로 만들었으니 그 존재에게 도덕적 처단이 아니라 연민과 동정, 관용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야릇한 논리를 내세우곤 한다. 더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에는 이분법에 대한 강한 회의가 있는데, 정말 우리네 믿음에 중립적인 지대가 존재하는 가에 대해 나는 반감을 표시하게 된다. 이를테면 계급과 지배이데올로기를 인정하면서 계급투쟁을 부인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는 본디 당파적인 존재임을 부정하는 것은 위선이요 기만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을 모두 인정하면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는 말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하나마나 한 말에 불과하다. 도덕이란 인간 의지의 선택으로 발생한 결과에 대한 규범이다.

 

김구일 작가의 단편 송곳니는 가장 직접적이고 저열한 빌런을 등장시키고 있다. 외딴 산골 지역에 투견을 길러 투견도박으로 더러운 부를 쌓는 인간의 잔악성이 진동하는 썩은 내와 함께 작품 전반을 채우고 있다. ‘수기라는 어린 소녀는 투견 우리에서 학대받고 신음하는 개들을 풀어주고 보호하기위해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악의 화신인 투견업자 서재형에 대항한다.

 

읽으면서 지역의 대표자로 선출되어 행세하는 현실의 한 인간을 떠올리게 된다. 분쟁있는 호텔을 사들여 은밀히 지하층에 도박장을 운영하며, 지상에서는 지역 유지행세를 하는 인간. 사람이라 보기 어려운 전형적인 악인이다. 자기 이익에 반하는 모든 타자는 폭력의 대상이며, 생명을 죽이는 것에 어떤 도덕적 의식조차 없다. 악을 선택한 인간, 아니 인간에 경멸을 표하기에 가장 적절한 모델인 존재로부터 작가는 성악설을 길어 올린다. 빌런은 단지 악한 존재이지 때론 선한 존재라는 말로 희석되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내 도덕적 신념과 가장 가까운 작품으로 느껴졌기에 그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에 상응하는 이유있는 빌런, 즉 악행에 정당화를 부여하려는 존재를 부각시키는 최구실 작가의 샐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스트레스나 트라우마가 되어 정신을 고통에 빠뜨리는 기억으로 기능하는 뇌 세포만이 파괴되어 긍정적 신호만으로 삶을 살아가는 인물에 대한 기만을 주제로 하는 것 같다.

 

김샐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변이 뇌세포를 가진 존재이고, 자신의 뇌세포를 연구하여,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세상의 인간들에게 고통을 지우고 정상적 삶의 존재로 회복시키려는 기억소거협회연구책임자다. 여기에 옛 동창생인 최은수가 연구원으로 입사하지만 김샐리는 친구를 기억하지 못한다. 최은수는 미국 유학시절 김샐리의 신경과학의 발견을 읽게되고, 최샐리가 되어 트라우마 증폭세포의 기습적 증식이란 논문을 써낸다. 두 인물의 성격과 행위를 바라보며 독자는 영구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그리고 이타적 행동만을 하는 김샐리와 인간의 고통을 실감하며 사는 최샐리를 통해 인간다운 삶이란 진정 무엇인지를 생각게 된다.

 

샐리야..., 내 이름 기억나?” 김샐리는 최샐리의 물음에 고개를 내젖는다. 뻥 뚫린 기억, 쪼그라든 뇌의 어설픈 기억, 그 긍정의 기억만 하는 뇌, 매양 행복하기만 한 인간의 이타적 삶이란 것이 친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라면 과연 그것이 진정한 기쁨이고 행복이겠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이것은 이에 저항하는 빌런 최샐리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동하며 도덕적 회색지대를 드러내려한다. 이러한 경우 두 인물 중 진짜 빌런은 누구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만일 행복 만능의 이타적 존재의 맹점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러한 맹점이 지닌 인간적 존엄성의 결여를 지적하는 것이라면 두 인 물 모두 빌런이라 할 도리밖에 없다. 결국 빌런에 대한 연민, 그 동기의 도덕성을 가지고 논의하여야 하는 까닭이다. 즉 동기가 애초에 그릇된 것이라면 모두 부도덕하다는 칸트의 도덕논리에 이른다. 결과주의냐, 동기주의냐는 여전히 고달픈 인간 의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 이상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항상 이러한 딜레마를 상정하고 도덕적 상대성을 주장하지만 도덕은 시대가 지니는 상황적 의식을 배제하지 못한다. 모든 시대와 장소에 한결같은 진리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빌런을 정의하려는, 도덕논리는 사실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단지 정서적 갈등의 문제일 뿐인 것 아닐까?

 

김상원 작가의 수정궁의 유령은 희망찬 미래 세계라는 메타버스, 가상의 공간 속 인간들의 분신이야말로 정신’, 그 자체인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며, 그 선점을 선전하는 디지털 세계에 잠재된 문제들을 수면위로 부상시킨다. 한 여성이 고글을 쓴 채 미친 듯 춤을 추면 사지와 몸통과 머리가 뒤틀린 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추적하는 추리물의 형식을 띠고 있다. 실재하는 인간은 본체로 불리고, 가상공간의 아바타는 실재처럼 설명된다.

 

본체가 사망한 아바타의 아이템이나 리플레이 영상까지 상업적 자산으로 거래되는 오직 경제적 효율만 존재하는 비정한 공간이다. 아바타와 실존하는 인간을 살해하는, 즉 가상의 이미지가 본체를 살해하는 괴물화된 디지털 세계를 그리고 있다. 메타버스가 지향하는 세계를 마치 유토피아처럼, 전통적 지식들의 세계를 전복하며 인간 욕망이 평등화된 세계를 주장하지만 실제, 현실이란 소수의 플랫폼 소유주와 돈을 추구하는 정보기술 독점자들의 추한 세계의 디지털화로의 이전일 뿐임을 회의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유머와 재치넘치는 문장들과 메타버스 세계에 넘쳐나는 쾌락과 도덕적 부패의 근원을 탐색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김달리 작가의 우세계는 희망과 엄성용 작가의 치킨 게임 또한 빌런이란 제재에 부합하고 있지만 서사의 축을 이루는 제재는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우세계...는 남자 영화배우 스타의 팬카페 구성원인 여성들의 시기와 질투, 소유 욕망의 진부한 다툼과 이를 이용하는 배우의 탐욕적 이해의 놀이에 대한 비극적 전경이다. 치킨 게임또한 흔한 자연의 지배자로 우뚝 선 인간의 오만과 편견을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돌연변이로서 인간지능을 초월하는 슈퍼 닭을 등장시킴으로써 인간 호모데우스를 농락한다.

 

사실 인간이라는 종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인류를 빌런이라 칭함으로써 빌런이란 의미를 지워버린다. 인간의 도덕적 경계를 범주화하는 용어가 대상의 전체에 미치면 실제로는 아무 뜻도 없는 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은 돋보인다. 즉 뛰어난 서사의 구성적 역량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재미만큼은 독보적이다. 그럼에도 너무 투명해서 마치 킬링타임용 영화 한 편을 본 인상과 유사한 기분이다. 아무튼 독특한 표제를 한 이 작품집은 요즘 범람하는 회색지대의 인간들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어 준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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