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 시골 의사 책세상 세계문학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종대 옮김 / 책세상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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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는 자신의 글을 그의 삶의 현실에 투영하지 말 것을, 즉 일치하지 않음을 주장했지만, 그가 살던 현실의 시공간에 밀착하지 않고서는 그가 쓴 소설들을 읽어 낼 방법이 없다. 단편 변신은 자본주의로 인한 인간의 전락(轉落)이라거나 의식과 존재 분열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의 묘사라는 독해들이 있다. 나는 이 같은 피상적 시선으로 그레고르 잠자라는 존재의 이야기를 그 분명함을 지우는 보편성의 읽기로는 지속적으로 따라갈 수가 없음을 안다.

 

이 작품은 구체성을 띤 20세기 프라하에 사는 유대인, 독일 주류 사회의 일원으로 묻혀 살기위해 그들을 모방해야만 살아 갈 수 있었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 하에서 읽기시작 했을 때 비로소 온통 안개 속 같았던 문장의 의미가 표면에 떠오르는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함으로써만 서구 백인의 시선으로 흐려놓은 추상적 독법을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커다란 갑충으로 변한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발견한 자신의 몸은 보편적 인간의 현대성 속에서의 추락한 존재도 아니며, 정신분열적 고통의 상징도 아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 초에 유대인을 향한 주류의 담론으로 형성된 퇴화론에 주목해야 한다. 유럽인 자신들과 구별하기 힘든 이방인인 유대인이 자신들의 일상에 깊이 침투하자 이에 대한 팽배한 불안은 차별의 이미지를 만들어 그들에게 씌우기 시작했다. 병들거나 변형되거나 성별의 경계가 불분명한 퇴화된 인종이라는 타자성이 그 전형적 클리셰다. 이 타자화 도식은 유대인의 윤리적 도덕적 형상으로 이어져 그들의 동화(同化)를 차단하고 경계했던 것이 당대의 현실이다.

 

당대를 장악하고 있던 이러한 비틀린 인종, 몸 담론을 카프카는 실제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일상에서 겪는 차별의 언어였다. 특히 그는 자신의 신경증, 소화불량 등 육체적 허약함을 의식하고 체조연습, 수영, 노젓기 등을 통해 주류가 가하는 편견을 극복하려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111112일 일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내 몸의 상태가 나의 발전에 주된 방해물이 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중략) 나는 계속되는 실패에 익숙해져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전제하면 그레고리의 갑충 변신은 퇴화의 담론을 거부없이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소설의 어느 곳에서도 변한 몸에 대한 원인이나 목적, 의미에 대한 묘사나 설득력 있는 서술이 없는 이유가 해명된다.

 

대신 소설은 이러한 생물학적 물질적 변화의 설명이 아니라 이것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관찰과 사유를 풀어 놓은 것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게 되면, 갑충으로 변화된 몸, 퇴화된 몸은 주류 사회에 동화하려 했으나 실패한 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실패한 몸이 됨으로써 비로소 가짜를 벗어던지고 본연의 삶, 순수한 자신의 몸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몸이 된다. 설혹 그것이 죽음까지 무릅써야하는 온 몸으로 느끼며 밀고 나가야 하는 절박함, 그 자체일지언정 말이다. 이것이 카프카의 소설을 생명의 예술이라 부르게 되는 바로 그 이유일 것이며, 상실한 정체성 회복과 삶의 주체적 자기를 발견하는 긍정의 서사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갑충의 몸은 벌거벗은 몸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회적 문화적 껍질을 벗어던진 몸으로서 사회적 위상을 상실하고 인간사회에서 이탈한 존재가 되는 것은 일종의 카프카적 사유 실험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은 이것의 진행 여정이다. 갑충이 되어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출장을 위해 기차 시간에 맞추어 나가지도 못한다. 아니나 다를까 누이동생부터 어머니, 아버지가 차례로 출근하지 않는 아들 방을 두드리며 그레고르를 채근하고, 이어서 직장 지배인이 방문하여, 그레고르를 비난하는 말을 쏟아놓는다. 이제보니 이상하게 변덕을 부리고 그걸 이상한 방식으로 시위 하는군요.(21)”라며 유대인을 향한 주류시선의 전형적 클리셰를 풀어놓는다. 이어 거래처 수금 문제와 연관하여 그의 지각에 의혹을 표명했던 사장의 말이나, 당신의 일자리는 고정직이 아니에요!”라는 지위의 불안정성까지 발설한다.

 


5년간 지각 한 번 없이 성실한 능력있는 직원의 단 한 차례의 지각에 득달같이 달려와 퍼붓는 이들로부터 자아상과 타자상의 커다란 불일치, 보이지 않았던 막대한 간극이 드러난다. 주류사회에 편입되어 동화된 존재, 유럽인이라는 자아상은 터무니없는 것이며, 그 환상은 붕괴한다. 그의 직업에 대한 우리말 번역어에 대한 지적이 있다. 대개 외근사원 또는 외판원으로 번역된 원어는 여행자(der Reisende)'의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이것은 살고있는 사회에 소속되지 못하는 방랑하는 유대인에 대한 또 하나의 상징어로 써졌다는 것이다. 변신 전의 그레고르 잠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 그것이다.

 

1장은 이같이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 그 자체가 지닌 사회적 시선과 자기 이해와의 불일치를 관찰토록 하였다면, 2장에서는 폐쇄된 자기 공간에서 지내는 갑충으로서 그레고르의 내면 독백에 의존한 심리세계가 주로 그려진다. 그의 목소리는 찍찍거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서서히 의사소통 세계에서 언어에 의한 소통 가능성을 상실해가고, 누이동생이 갖다 주는 쓰레기 같은 음식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부각하며 벌거벗은 존재로서 감당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배열한다. 유대인은 주류사회에 등장해서는 안 되는 몸이라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그 동화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직장은 물론 가족 모두에게서 배제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현실 그것이다.

 

또한 갑충 그레고르의 독백 즉 사유가 진행되는 폐쇄된 공간은 누이동생의 의도에 따라 텅 빈 동굴 같은 공간이 됨으로써 그의 점차 약화되는 시력처럼 그를 둘러싼 환경 모두가 퇴화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동물로서의 그레고르는 천장에 매달려 있기를 좋아하게 되며 신체적 안정감과 함께, 숨을 훨씬 편하게 쉴 수 있는 자기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의 느낌에 젖어든다. 점차 직업과 가족 양쪽 모두에게 착취당하던 삶으로부터 벗어난 해방감, 평온함을 만끽하기 시작한다. 벽과 천장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면서 끈적끈적한 흔적을 남기며 그는 자신의 온 몸으로 글을 쓴다. 온 몸으로 느끼면서 행하는 글쓰기, 일종의 행위 예술이다, 이 역시 카프카다운 은유이다. 껍질, 사회적 외피를 벗어던짐으로써 되찾은 퇴화라고 경멸되는 고유의 정체성, 이때 주류의 소통매체와 그들의 시선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에 몰두할 수 있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장에 이르러 기생적 역할이 전환되어 직업이라는 돈 벌이에 나서야 한 가족들의 생계수단으로 받아들인 하숙생들의 앞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여동생의 연주 음악에 홀린 듯, 이미 예술적 존재로 변화한 그레고르는 금지된 문턱을 넘어 거실로 기어 나온다. 이 장면은 아마도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대목이라 할 수 있는데, 이미 사회와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가 된 그가 위험에 노출된 최악의 순간이면서 예술적 감각으로 충만된 최고조로 고양된 감각에 취한, 해방과 구원의 분위기가 교차하는 의미심장한 광경이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무의식적인 위험에 대한 무관심, 즉 해탈의 순간은 그를 발견한 하숙생들과 아버지에 의해 비극적 폭력으로 전환된다.

 

아들을 방으로 몰아 대기 위해 쉿 쉿 거리는 동물을 향한 소리, 그리고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을 상징하듯 그를 향해 던졌던 사과가 살 속에 박혀 썩어가는 몸, 더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납작하게 말라가는 몸은 죽음의 수용, 자기 죄업에 대한 인정의 행위였을 것이다. 주류 사회의 편입을 위한 무기력한 몸부림은 자신의 예술적 삶의 불가능이었으며, 이 불가능을 선택함으로써 일상적 직업을 지닌 가족 부양자로서의 삶을 놓은 것에 대한 죄의식은 결코 그에게 함께 할 수 없는 것이었음이다. 이렇게 정리 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변신은 그레고르의 탈출구였지만, 이것은 주변세계로부터의 고립이었으며, 자기만의 길은 삶을 죽음으로 이끌 수밖에 없었다는 카프카의 불가피한 신념이었다고.

 

그래서 그의 죽음에는 슬픔도, 비탄도 가족조차의 애도도 없다. 그레고르는 그의 내적 일치 속에서 평온하게 죽은 것이므로. 그가 죽자 가족들이 산책에 나서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부모 세대가 찾지 못한 탈출구를 찾으려는 시도라 할 수 있으며, 작가 자신의 전업 작가로서 허용되지 않는 삶의 현실에 대한 자기 삶의 완성에 대한 갈망의 욕구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자기실존, 인간의 자유를 향한 이 처절한 몸의 사유는 그래서 더욱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물론 이 같이 시대에 대한 담론에 밀착한 독해로서만 읽힐 때 간과되는 것들이 있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성()의 실패에 대한 장면들이다. 이 작품에서도 자신이 만들어 벽에 부착한 액자에 끼워넣은 모피를 입은 여인의 사진에 배를 바짝 붙여 그것을 치워버리지 못하게 하는 행위나, 속옷차림으로 쓰러지면서 아버지에 안기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아버지에 의해 억압된 실현되지 못한 성의 문제는 또 다른 당대의 문화적 세대적 갈등의 담론에 다가가게 한다. 이처럼 이 소설은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접근의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이의 감상에서 발견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세상 번역본에는 단편 시골의사가 함께 수록되어있는데, 이 작품은 바로 성의 실패와 관련한 전형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억압으로 통제된 가면의 삶과 순수하게 날뛰는 욕망, 그 본연의 삶을 방황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고통의 형상이 말()과 어여쁜 하녀 로자, 망상처럼 나타난 남자,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와 벌어진 분홍빛 상처가 교차하며 응축된 밀도로 그려지고 있다. 짧지만 강렬한 작품이다. 실패함으로써 성공한다는 카프카의 작품을 읽는 것은 주기적으로 찾게 되는 어떤 유혹이다. 블가능 속을 헤매고 싶은 은폐되고 억압된 내 무의식의 분출 욕망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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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890 쏜살 문고
오스카 와일드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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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은 최후의 연기까지 끝마쳤어. (...)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을 떠다니며 그것에 사랑스러움을 불어넣은 유령, (...) 그녀가 현실의 삶을 건드린 바로 그 순간 삶은 훼손되었고, 그녀 자신도 훼손되었지. 그래서 죽은 거야.” -121

 

 

소설 속 이 문장은 삶이 곧 예술인 삶, ‘예술은 인생 최고의 위안이라 말한 테오필 고티에의 유미주의(唯美主義)의 현현, 바로 그것일 것이다. 세기말적 퇴폐주의 대표작에서 예외 없이 거론되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이를 확인하여 주듯 무거운 향내가 뚝뚝 묻어나는 병적 고백과 황홀경에 관한 신비주의적 감각(162)”을 삶의 의미로 하였던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판본에 대해 먼저 얘기하는 것을 잊었다. 기존의 판본들은 수많은 도덕적 시비 속에서 대대적인 두 번의 수정과 삭제 끝에 출간된 1891년 이후의 원고들이다. 이 책의 제목에 ‘1890’이란 년도의 표기가 달라붙은 까닭은 공식 출간되기 전에 잡지 월간 리핀콧에 게재되었던 1890년 최초의 원고를 판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기존의 결정판이라 불리는 소설에서 볼 수 없는 단어들과 문장들이 실려 있다.

 

도리언 그레이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책으로 “‘카튈 사라쟁의 소설 라울의 비밀(Le Secret de Raoul)1891년 이후 출간된 책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렇게 삭제된 단어만 500여개가 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본래의 의미는 사라져 두루뭉술하게 수정된 문장도 즐비하다. 화가 홀워드 바질이 친구 헨리 워튼 경(해리로 불림)’에 전시회에 도리언의 초상을 전시하지 않겠다며 그 이유를 말하는 구절인 긋는 선마다 사랑이 깃들었고, 붓이 닿을 때마다 열정이 묻어났어.”와 같은 문장 역시 기존의 판본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듯이 이렇게 사라지거나 수정된 문장들로 인해 소설 본래의 색채를 상당히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1890년 최초의 판본은 독자들에게 탐미주의 그 원형을 더욱 매혹적으로 탐닉할 수 있게 해준다.

 

거칠게 표현한다면 바질의 친구인 헨리 워튼 경은 젊음의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도리언을 예술지상주의자로 인도하는 교사(敎唆)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젊음과 쾌락, 도덕적 이상의 쓸모없음을 역설하며, 제어되지 않는 열정과 갈망의 발산으로 청년의 영혼을 인공적 아름다움의 세계, 병적인 감수성으로 이끈다. 그가 도리언에게 준 라울의 비밀이라는 책은 몽상과 병적인 꿈의 세계로 불멸의 아름다움, 삶을 대체한 예술적 삶이라는 광적 허기에 도취하게 한다.

 

이 예술로서의 삶에 대한 관점은 도리언이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던 셰익스피어 연극배우인 시빌 베인의 죽음을 해석하는 문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사건에는 훌륭한 비극에 걸맞을 법한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있어요. 나는 이 비극에 일조했으면서 아무런 상처도 입지 못했(117)”다고 해리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한편 이는 모두(冒頭)의 인용 구절처럼 역설적으로 현실적 삶이 예술적 삶을 깨울 때의 비극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삶이 예술의 열정처럼 열정과 위안, 희열, 아름답기만 한 것일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유미주의적 구현이 헨리 경의 과학적 실험이라는 것이다. 도리언은 그의 연구 대상이고, 그것은 그에게 풍성하고 유익한 연구 결과(77)”를 선사할 것이라는 의도에 있음이다.

 



헨리 경이 도리언에게 보낸 감각의 삶을 신비주의적 묘사로 채운 책, 라울의 비밀에 도리언이 중독되어 삶의 지향 점으로 삼는 것, 몽상과 병적 꿈, 자신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스스로 정신적 타락에 흥미를 느끼며, 삶 자체가 모든 예술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예술, 다른 예술 또한 삶을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158)”는 믿음을 무의식 속에 이입시키는 것이다. 이와 병행하여 바질의 도리언에 대한 사랑, 예술적 영감이 모두 투여된 초상화가 도리언의 죄악과 수치심을 대신하여 반영하는 거울상이 되고, 그의 페르소나 변화의 영원한 증거물이 되어 변치 않는 젊음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며, 병적 아름다움의 열정을 거침없이 발산하는 도덕적 담보가 되어주는 것은 위태로운 비극의 도래를 내정한다.

 

이 예술지상주의적 삶에 대한 신념이 헨리 경의 방관적 지성과 도리언의 실천적 행위를 오가며 그 실체를 보여주는 장면들은 지겨울 만큼 지면을 많이 차지한다. 이것은 삶의 형식으로서 예술의 필요성을 역설하는가하면, 삶의 재창조를 위한 동력으로서 쾌락주의의 구원을 웅변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사회는 성대한 의식에 어울리는 위엄과 비현실성을 갖추어야하고, 낭만극의 위선에 낭만극의 매력인 위트와 아름다움을 결합해야 한다. 위선이 그렇게 나쁜가?(174)” 라며 삶의 방편으로서 위선과 삶의 불필요로써 도덕성을 무시하기까지 한다. 판단이야 독자의 몫이겠지만, 이 허기로 가득한 열정의 광기가 과연 삶의 동력, 의미가 될 수 있을지?

 

내정된 비극은 기어이 도달하는데, 그림이 자신을 망가트렸다고 바질에게 자신을 포획한 병적 죄악의 원인을 초상화, 그리고 화가에 돌리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가슴에 칼이 박힌 야회복 차림으로 주름투성이의 메마른 얼굴을 한 시신(231)”의 귀결보다는 실험을 끝내듯 헨리 경이 발설하는 문장은 그야말로 얄궂기 그지없다. 삶의 우연성에 대한 서정적 일상성에 대한 평범성은 왠지 시대적 지성의 교활성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소설이 그만을 살려 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살아남는 자들의 세계에 대해서?

 

이 작품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작가의 삶을 멈추게 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회의 도덕적 관용이 수용하지 못하던 소설은 한 인간의 삶, 소명인 글쓰기를 훼손하고 만다. 감옥과 노역, 그리고 비참한 죽음만을 가져온 현실적 비극을 초래한, 마치 예술에 현실이 틈입할 때의 그 노골적인 폭력성과 비논리성을 입증하려는 듯 말이다. 진정한 삶이란 정말 무엇인지? 때론 허무하고 공허하며 기만적이기만 한 세계에서 도덕적인 편견을 전시하려고 이 세상에 온 게 아니(81)”라는 헨리 경의 주장처럼 필멸이라는 부조리한 삶을 극복하겠다는 하나의 믿음으로서 예술을 살다 간 위대한 작가의 용기 있는 실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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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튈 사라쟁(Catulle Sarrazin)의 소설 라울의 비밀(Le Secret de Raoul)- 나는 실제하는 작가와 작품인가하고 열심히 찾아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작가와 소설은 오스카 와일드가 가공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다만, ‘조리스 카를 위스망(Joris-Karl Huysmans)’거꾸로의 유사성으로 이를 은폐하여 다르게 표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비평계의 중론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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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문화 - 내부자가 된 외부자 교유서가 어제의책
피터 게이 지음, 조한욱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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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뺨을 하고 활기차게 걷는 미소년의 무한한 미적 활력과 번영처럼 보이던 한 시대의 문학, 철학, 정치, 미술, 건축 등을 아우르며, 그 표면적 화려함 이면의 비이성적 퇴행을 읽는 거대한 문화사적 비평이다. 이 위대한 문화 해독을 읽으며 어떻게 대중과 지성의 무리가 자신들 삶의 무대를 폭력과 살해가 일반화되는 전체주의 사회로 돌진케 하는지 그 상호성과 혼돈을 목격하게 된다.

 

책의 진술들은 그 풍성함과 우아함, 그리고 냉철함과 명료함의 지성으로 가득하다. 토마스 만, 그로피우스, 브레히트 등 강렬한 창의성을 번뜩이던 수많은 천재 예술인들이 명멸하던 시대,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918년 제국주의를 마감하는 혁명으로 시작된 새로운 정체를 꿈꾼 바이마르 공화국의 가장 처절한 정치적 혼란, 민주주의 실험장에서 빚어졌다는 점이다. 폭넓게 대중의 마음에 침윤된 반이성과 맹목적 숭배의 종교적이라 할 독일인들의 광신적 몰입은 오늘의 우리에게 예리한 칼날처럼 다가온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18119, 빌헬름 2세의 독일 제국의 1차 대전 패배에 따른 피로감과 적대감 속에서 새로운 독일을 향한 출발의 희망으로 시작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1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분출했던 무수한 이상(理想)들의 외침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희망, 독일 최초의 의회민주주의를 성취하려했던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주의 실험의 장은 1933130, 정말 하찮은 키치에 불과했던 아돌프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면서 죽음이 창궐하는 암흑, 지옥의 개막으로 수명을 다한다.

 

문화는 사회와 연속적이고 긴밀하게 상호작용을 하고 있으며,

정치 현실의 표현이자 비판이었다.” -232

 

이 책은 제목처럼 특정한 시대의 문화를 성찰하는 문화사(文化史)이다. 그러나 주체들이 발설하는 표현 행위인 문화는 소시민 대중의 관심의 대상이며, 그것의 발흥과 열광은 곧 정치이다. 문화가 담고 있는 정신에서 정치를 배제하는 것은 실로 어불성설일 것이다. 한 무식한 정치배가 문학이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는 말처럼 반지성적 언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화와 정치의 상호작용의 방향성은 항상 일관된 것이 아니다. 문화가 선도하고 정치가 그에 반응하는가 하면 문화가 고작 정치의 시녀가 되어 정치를 반영하는 거울에 머물기도 한다. 어쩌면 이러한 선도와 거울의 양면성의 역학 관계를 관찰하는 시선의 중요성은 하나의 의도이기도 할 것이다.

 

민주주의 실험, 그 진통

 

우선 바이마르 혁명 정부의 출범기인 191811월부터 4 년간의 처절한 혼돈의 시대를 다루는 제 1탄생의 진통15년이라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시대적 배경이다. 1918년의 혁명은 그런저런 혁명(so-called revolution)’, 또는 늙은 허깨비들이 다수를 이루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그 나물의 그 밥이었으며, 하나의 소극(笑劇), 허구(虛構)로 보이도록 만드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는 세력의 집요한 반동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과는 아주 동떨어진 왜곡인데,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주축이 된 공화국 정부에 적대감을 지닌 기득권 집단의 줄기찬 반동적 선전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까닭에 근거한다.

 

군주제 지지자. 광신적 군국주의자, 반유대주의자, 외국인 혐오주의 등 수구적 사고가 폭넓게 사회를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반감으로 무장된 이들의 정신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구나 급진적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스파르타쿠스단의 극좌세력과 제국주의, 군국주의자를 세력으로 하는 극우 집단의 극심한 갈등이 놓여있었다. 이 혐오와 갈등은 극우 집단의 광범위한 암살로 인해 기득권 세력인 보수우익의 승리로 끝난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들의 암살로 피살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혼란기의 한 산물이다.

 

1차 대전, 전쟁의 야욕과 패전, 그리고 베르사이유 조약이라는 자기 영토의 상실과 막대한 배상금의 부담 등 국가적 손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제국주의자들, 군국주의자들은 그 어떠한 죄의식이나 수치심이라는 각성은커녕 오히려 그 책임을 바이마르 정부에 넘기며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공화국의 주축 세력인 사회민주주의당이 최대다수당이긴 했으나 총 의석의 3분의 1도 갖지 못하고 군국주의자로 구성된 카톨릭중앙당, 부르주아 세력인 민주당, 제국주의자들인 국가인민당등과 연합정권을 구성하여야 했으니 실질적 지배권을 갖지 못한 것이 하나의 큰 이유였기 때문이다.

 

이 때의 지성의 분위기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전하고 있다. 대학교수, 기업인, 정치 엘리트들은 제국의 가치를 민주주의와 교환하기를 꺼렸다.” 이것은 바이마르의 운명은 사실 볼 것도 없다는 말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공화국의 출현은 역사적 필연이라 생각했음에도 공화국을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그 미래또한 믿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지식인들의 이러한 인식은 모든 문화 엘리트들 작품의 근간을 이룬다. 문학, 사상, 건축, 연극, 영화에 이르는 당대 문화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것들이 표현하려했던 것의 본질적 형태가 드러날 것이다. 이 저작의 단연 돋보이는, 저자의 의도이자 지향점일 것이다.


 



감상적 영웅주의, 그리고 반()이성의 확산

 

그것은 반이성이요, 반지성의 광범위한 점령, 아마 이러한 자기기만을 시대의 물결 속에서 빠져나와 바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설혹 존재할지라도 금세 그 조류 속에 묻혀 버리고, 관심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기에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목소리가 되지 못함을 발견하게 된다. 오만과 기만, 탐욕스러움과 무지가 거들먹거리며 횡행하는, 호도된 진실만이 세상의 주류가 되어 대중을 세뇌하기 때문이다. 이제 잡설은 여기서 그치기로하고 그 무진장한 문화예술의 실험장이요, 각축장이 되었던 바이마르의 일견 화려한 문화의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그것은 먼저 책의 두 번째 장()이성의 공동체, 즉 지식인 집단들의 지향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순서가 될 것 같다. 대표적인 연구소를 중심으로 그들의 정신, 이성(理性)이 왜 그 세계의 실질적 동력이 될 수 없었는가의 문제이다. 우선 바이마르의 가장 특징적 정신으로 논의되는 바르부르크 연구소의 이성의 능력에 대한 철저한 믿음의 실천이다. 에른스트 카시러, 에르빈 파노프스키, 파울 레만과 같은 석학들로 구성된 이 연구소의 업적들이 사회의 내부에 침투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정권의 내부에 영향을 미치는 데 한계를 지닌 기관이었음이다.

 

프로이트의 베를린 정신분석연구소 또한 당시 의학계와 정신병리학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배제된 외부자로 적대시 되었으며,. 대중의 시선은 이러한 적대감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이에 못지않았다. 그 전도유망함에도 불구하고 외부자로 배척되었다는 것이다. 호르크 하이머, 에리히 프롬, 테오도르 아도르노 등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 또한 강력한 지성 집단이었음에도 결코 내부자와 연결되지 못하는 외부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강력한 지식인 집단인 바이마르 정신의 정수들이 공무의 핵심에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독하듯이 이들 지성은 실제로 내부자가 되지 못하면서 단지 그들과 관계를 쌓으면서 때때로 영향을 미치는 데 불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중에 폭넓게 뿌리내린 반()유대주의적이며 반이성적 정서와 반민주주의, 반사회주의 성향 때문이랄 수 있다.

 

당시의 대중적 지성들, 즉 내부자인 대학과 정부관료, 주류 언론의 분위기를 묘사한 글을 보면, 전문가의 차가운 정확성보다는 우아하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선택하겠다.”라거나, 과학적 연구의 차가운 실증주의에 경멸을 표하였고, 분석이 아니라 생동하는 직관을 통한 위인과 역사적 순간에 대한 몰두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설이 된 황제, 플루타르크에 등장하는 영웅들에 대한 신비의 갈망에 젖어있었음이다.

 

이 책의 최고 진술이랄 수 있는 3비밀스런 독일, 4전체성의 갈망라이너 마리아 릴케토마스 만’, ‘호프만슈탈’, ‘하이데거에 이르는 문학과 철학, 나아가 건축과 예술 전반이 시대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거울에 불과했음을 설득력 있게 전개한다. 즉 시류에 영합하는 문화예술이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릴케는 시대가 요구하는 우상의 필요성에 의해 조작된 인물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어른이 없는 세대의 우상에 불과했으며, 그는 지나친 수사, 과장된 주장, 감수성, 유사철학과 비슷한 신비주의, 직관적 방법으로 점철된 순전히 주류 우파의 비평 덕을 입은 기이한 열정에 환호하는, 즉 대중의 실체를 증명하는 자기도취의 찬미였을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릴케를 비롯한 당대의 시는 독일을 파멸시킨 도구 중 하나였다(144)”고 저자는 결론짓는다.

 

독일 사회는 이미 극도의 피로감에 젖어들고 정치적 냉소주의에 빠져든다. 우파를 이루는 군국주의, 제국주의, 부르주아 등 주류집단의 비이성주의가 몰고 온 바이마르 흔들기의 혼란은 소시민 대중에게 정치 거부, 옛 정신 습관으로의 회귀를 부르짖게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1918토마스 만은 이를 확인하듯 나는 비정치적 인간이며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비정치 인간의 고찰이라는 600페이지짜리 책을 발표한다. 더구나 이러한 시류에 부응하기위해 프리드리히 대제의 영광을 칭송하는 회귀적 논문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독일과 독일문화의 이 퇴행적 행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문명적 지성을 대표하는 정치가인 그의 형 하인리히 만의 문학의 반정치적 행위의 비판에 반발하며 이같이 반론을 쓰기도 했다. 정치는 인간을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완고하고 비인간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나는 정치에 대한 믿음을 혐오한다.”. 그가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지지자로 전향한 것은 때늦은 1920년대 후반의 일이다. 당시 독일 사회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깊이 반이성주의에 빠져있었는지에 대한 실증적 사례로 토마스 만이라는 지성인만큼 명료한 증거는 없을 것이다

 

사회 구성원이 공공의 이익을 지향해야 한다는  일반의지는 오늘에는 시민들이 지닌 당연한 이해일 것이다, 허나 1920년대의 독일인에게는 이러한 시민적 소양으로서의 일반의지는 대개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모든 개개인은 저마다 완강하리만큼 편파적이었으며, 지방색과 편협성, 자기들이 속한 무리의 신념에만 몰두하는 그 반지성에 대한 각성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나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로 알려진 퇴니스와 같은 반이성과 전체주의를 선창하던 부류들의 고의적이며 치명적인 사고를 여기서 나열하는 것은 배제하겠다. 다만 아래와 같은 하이데거의 흉측스러움을 묘사한 문장으로 갈음한다.

 

피로써 사고하고,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숭배하며, 살인을 찬양하고 실행하였을 뿐 아니라 죽음 자체인 삶을 취한 듯 포용함으로써 이성을 영원히 근절시키기를 희망(174)” 하는 나치 찬양의 글은 역겨움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이에 뒤지지 않는 당대에 명성을 떨친 슈팽글러의 글은 더욱 가관이다. 권력은 전체에 속한다. 개인은 전체에 봉사한다. 전체가 주인이다.”, 이것이 1920년대 독일사회의 시민대중과 지성이 열광하던 문장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다가오게 하고 있는지 알았을까? 아마 결코 알지 못했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맹목적으로 열광하는 무지, 바로 반지성이다.

 

과거의 향수, 영웅숭배, 변명적 왜곡과 완전한 허위의 무비판적 수용, 악명 높은 자해 신화가 대중 전반의 의식을 차지한 독일 사회, 각성이 있었을까? 그러나 모두에 언급했듯 누군가의 표현을 해독하고 그것의 의지를 알아내는 일은 대중지성과는 먼 것이다. 소시민들은 이성, 즉 직관을 넘어서 앎을 추구토록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뿐더러 하지도 못한다.

 

시대의 징후적 해석, 1924마의 산

 



바이마르에 대해 중요한 징후적 의미를 갖는 사실주의 소설 마의 산은 이 책의 각 장에서 반복적으로 소환되며 바이마르의 대중 지성을 읽는 이정표로 제시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주창했던 정치가 하인리히 만을 형으로 둔 토마스 만의 목소리는 대중의 시선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기도 한 까닭이다. 오늘날 그의 작품을 해독하는 이들 사이에 서로 다른 논평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단순한 인물 한스 카스토르프를 통해 낭만주의와 귀족주의의 향수와 죽음에 대한 사랑과 같은 야만성을 읽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것은 토마스 만 자신의 설명이다.

 

이 소설의 불쾌한 퇴행성에도 불구하고, 성장소설이라는 표면 뒤에 쓰여진 상징적 의미들은 시대정신의 세심한 묘사를 읽어내고 현재의 각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각성의 시대로 불리는 1924년의 문을 연 작품인 까닭이다. 잠행성 질병을 숨기기도 하고 일부러 드러내기도 하는힘차게 걸어 다니는 붉은 뺨의 환자들이나, 평화를 역겨워하고 죽음의 무도회가 준비되었으며, 표면적으로는 번영하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부패한 요양소처럼 당대의 현실을 상징하는 배경 속에서 자유주의자와 반이성주의자, 문명적 지식인을 대변하는 인물들이 열연케 하고 있음을 우리는 선연하게 읽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결론을 굳이 기술하지는 않겠지만 소설은 감정적 군국주의자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에 전념하는 길에 도착하는 인물을 통해 이성적 공화주의자가 아닌 모호한, 즉 각성은 각성이지만 미완의 무엇이라는 여지를 남겨둔다.

 

그러나 이러한 각성의 시대에서 왜 급격하게 다시금 반이성적 혼돈의 시대로 이전된 것일까? 이들 지성은 무엇에 저항하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왜 공화국에 반감을 떨쳐내지 못했던 것일까? 공화국은 민주주의와 과학, 합리적 이성이라는 현대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계급과 권위의 타파, 비이성과 신비주의로부터 벗어난 이성에 대한 반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시대가 내건 이러한 표상들을 피상적이고 편의적으로만 수용한 개인들의 욕망의 목소리는 곧 혼돈과 퇴행을 의미했으며, 이렇게 분열된 시민 집단은 공동체로의 통합에 대한 절박한 필요성으로 표출되어 전체성의 갈망이 되었다, 물론 이렇게 결속과 통합의 갈망이라는 퇴행이 절대 다수이기는 했지만 이성을, 과학의 사용을, 허무주의가 아니라 건설을 통해 현대성을 수용하려는 인물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우하우스를 창립한 그로피우스는 이 소수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겐 반쪽짜리 추구로 보인다.  경제적 필요와 미학적 필요 모두를 충족시킴으로써 전체성을 충족해야 하며...”처럼 이들을 강박적으로 묶어놓는 것, 즉 전체성이라는 악령의 그림자를 떨쳐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편화의 비극은 기계나 작업의 세분화에 의해 초래된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물질주의적 심리상태와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비현실적이고 결함 많은 관계에 의해 초래된 것(201)”이라는 선언처럼 당대의 현실을 제대로 판단하고 있기도 했다.

 

표현주의 그리고 전체주의로

 

책은 표현주의에 대해서도 비상하리만큼 분량을 할애하는 데, 노동자들의 동정을 담은 그림을 그린 케테 콜비츠’, ‘오토 딕스’, ‘리프 크네히트등의 일련의 표현주의 화가들만을 겨냥하여 문화적 볼셰비키운운하는 것은 조잡한 적대감일 뿐 실상은 에밀 놀테등 사악한 반유대주의처럼 국수주의적 전체주의도 표현주의의 대표였기에 표현주의를 어느 일방의 이데올로기로 이해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다. 표현주의는 모든 종류의 정치와 양립하는 현실의 돌파구, 신비로움에 대한 애착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의 주제어를 지목하라 한다면 그 답으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반역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것은 바이마르 시대를 관통하는 표현주의 예술 작품들의 공통 주제였다는 것이다. 191811월 혁명은 부권에 대한 반역이며, 폭군같은 아버지와 자유를 갈망하는 아들의 대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문학과 연극 작품을 통해 이 반역은 순전히 주관적이고 반이성적인 의미만 있었을 뿐이며, 한마디로 이성적 질서의 살해였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새로운 각성의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왜 독일사회는 급격하게 반혁명, 반공화국, 반민주주의로 선회하였는가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베르사이유의 불평등 조약의 책임을 비록 바이마르 정부에 떠넘기는 후안무치를 보였지만 보수 우익집단을 그 죄업의 족쇄로부터 풀려나게 한 1925년의 로카르노 조약 체결이다. 독일이 당당한 독립적 위치로 프랑스 및 인접국들과 대등한 협상의 지위를 지니게 한 사건이다.

 

다시 질병의 징조를 숨긴 붉은 뺨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거대 산업 카르텔을 소유한 반동적인 우익 거물이 언론 산업 제국까지 거머쥐며 반혁명의 기치를 대중에 전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중 일간지와 영화사, 출판의 판로 독점 등 모든 선전 창구를 독식하고 증오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영웅 찬미와 정치적 혼란의 의도적 조성은 민주적 역량을 갖지 못한 맹목적 소시민 대중의 정신 상태는 공화국에 대한 환멸이 더해지고 회의와 좌절, 냉소주의에 도달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극한적 정치적 분열과 극악하고 상스러운 논쟁만이 난무하는 혼돈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제 평화를 택해야 한다는 말은 진부하고 금지된 말이 되었으며, 죽음에 도취된 청년들은 모두가 우익이 되어 나치에 잠식된다. 이들은 부친을 살해한 아들을 자처했지만 실은 누가 아버지이고 아들인지의 문제에 이르면 극히 전도된 언어임을 1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아들이며 노쇠한 전체주의적 망령, 그 퇴행 속으로 눈을 감고 돌진한 청년들이야말로 살해되어야 할 아버지였다는 것을,

 

영도자를 향한 맹목적 추종, 영웅숭배에 집착하였던 이들은 현실의 곤란성, 그 위험, 그 가혹한 법칙을 결코 파악하지 못했으며,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한 알 능력도 지니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한 시대가 무능력과 무지로 야기되는 공포와 의혹, 비이성이 뒤섞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 총체적 불협화음의 현장을 거닐다보면 어느새 21세기 한국사회, 바로 지금에 도착해 있는, 그 동일 유사성에 전율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맺으며: “공포와 테러와 무책임과 기회상실과 수치스러운 배반의 이야기

 

1920년대의 바이마르를 무수한 문화적 창조가 실험되던 황금의 시대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 책은 그 문화가 정치와 어떻게 교섭하면서 충돌하는지, 그 문화가 담지하고 있었던 시대적 의미는 무엇이었는지를 포착해내는 거장의 냉철한 통찰력이 빛을 발하는 명 저술이다. 또 한편으로는 100여 년 전, 1930년 전후의 시기에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종말을 앞당긴 고질적인 대중의 어리석음이라는 질병, 소시민들의 만연한 무지가 폭넓게 그 사회를 휩쓸었을 때, 한 나라의 역사적 멸망, 세계적 최악의 사건이 어떤 토양에서 출현하는 것인지를 목격케 하는 인류사적 비평이기도 하다.

 

히틀러라는 보잘것없던 존재가 허위와 음모를 통해 수상에 취임하게 되고, 이후 희대의 폭력과 살해의 괴물이 되는 현장, 그 실체를 논평한 글이다. 나는 이 글에서 기시감(旣視感)에 전율하게 되었는데, 인간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그 동일한 대중적 실패의 확인이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독일 사회의 언어를 21세기 한국사회의 언어로 대체하면 그 섬뜩한 미래가 그려진다.

 

극우의 상징, 나치의 목소리가 지금 여기서 들린다는 아이러니라니...., 입을 닫은 지성으로 불리던 자들의 기회주의만이 꿈틀대고, 겁먹은 우익 정치꾼들은 아부에 여념 없는, 게다가 맹목적으로 환호하는 몽매한 소시민들까지...역사는 끊임없이 여기저기서 그 행위를 무한 반복하며 인간을 실험한다. 21세기 한국의 대중과 지성은 독일의 1933년과 과연 다른 생각과 행동을 낳을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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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cho 2023-12-18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꼭 뵙고 싶습니다.
 
아이, 로봇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우리교육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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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으로 묶여 로봇공학 윤리 3원칙이 각기 현실과 마주했을 때 발생하는 미묘한 상황들을 통해 인간 사회의 이해를 요청한 10편의 단편 소설이 1950년에 발표 된 이래, 70여 년의 시간이 지났다. 더구나, 로봇공학 제 1원칙이 실린 단편 로비, 소녀를 사랑한 로봇1940년에 발표되었으니 80여 년 전에 아이작 아시모프라는 천재 작가는 인간 사회에 도래할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세상, 이 공존이 빚어낼 과학기술의 윤리적 문제를 현실의 과제로 인식했다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미 인공지능(AI)과 결합한 로봇이 현실임에도 오늘의 인간 사회는 이에 대해 한 걸음의 기술적 진보도 내딛지 못하고, 고작 이 윤리원칙만을 외워대며, 그 산업적 이익에만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수록된 단편들의 면면은 인간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로봇과 마주하는 윤리적 상충에 대한 사례들이며 이에 대한 물리적, 심리적 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학의 윤리, 공학과 기술 윤리의 실천적 방안들을 찾아내야 한다. 때문에 현대의 고전이 된 아이, 로봇 (I, ROBOT)은 읽어야 할 이유가 되고도 남을 것 이다.

 

단편 로비, 소녀를 사랑한 로봇에는 글로리아라는 소녀의 유모 로봇인 로비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로봇공학의 제 1원칙, 로봇이 인간에 해를 입히는 건 불가능하다는 원칙, 1원칙을 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기기 전에 로봇이 완전히 멈춰 버린다는 것을 위기에 처한 글로리아를 구해내는 로비의 희생적 행위로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정의하는 최초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스피디-술래잡기 로봇로봇공학 3원칙이 모두 정리되어 발설되는 최초의 작품일 것이다. 인간의 명령과 그 명령의 수행 행위가 로봇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했을 때, 로봇 행위의 교란을 보여주는 사례인데, 80도가 넘는 태양열이 지표면에 내리쬐는 수성이 배경이다. 셀레늄을 채취하는 작업을 수행하라는 명령과 채취장소가 화산 폭발의 징후로 자신의 몸체를 녹일 수 있는 일산화탄소의 분출이라는 윤리원칙의 상충 현장이다. 소설의 장면은 근처에서 오도가도 하지 못하고 주변을 끝없이 맴도는 로봇 스피디(SPD 13)의 행위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은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제2원칙과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제3원칙이 평형 상태를 이룸으로써 야기된 이상 행위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1원칙이 발동하도록 하는 사건을 야기함으로써 로봇을 구하는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은 이처럼 윤리원칙의 상충과 교란을 일으키는 사례들을 예시하며, 과학이 소홀할 수 있는 기술윤리의 디테일을 성찰토록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큐티-생각하는 로봇, 데이브, 부하를 거느린 로봇, 네스터 10-자존심 때문에 사라진 로봇, 이들 세 편의 단편은 사유하는 로봇이 야기할 에피소드들인데, 논리적 사고를 하도록 구성된 로봇 QT 1호의 인간 존재에 대한 무시, 인간이 없을 때 변질되는 로봇의 주체적 역량 발현 욕구를 보여주는 로봇 DV5, 특히 알렉스 프로야스감독에 의해 아이, 로봇 (I, ROBOT이라는 영화의 중심 에피소드로 오마주된 네스터 10-자존심 때문에 사라진 로봇은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로봇공학 1원칙을 새겨 넣지 않은 변종 로봇의 의도적인 거짓말이 빚어내는 충격을 보여주며, 1원칙의 불완전성과 그 엄중함을 경고한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로봇의 사고는 인간 사고의 형식과 정서를 학습하며 이를 토대로 행동한다는 가설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기계 논리와 인간의 이성은 다르다고 반박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사고력을 지닌 존재, 의식적이든 아니든 남에게 지배당하는 걸 싫어하며, 더구나 열등한 존재, 혹은 열등하다고 간주되는 존재에게 지배당할 때는 싫어하는 마음이 훨씬 강해진다.(203)”는 사례로써 로봇 네스터 10는 자신의 우월성과 인간의 열등함을 느끼는 존재가 제 1원칙을 얼마나 불완전한 것으로 드러내는 가를 입증한다.

 

이 작품은 그가 일반 로봇 62대의 행렬에 숨어들었을 때, 외형이 동일한 구별 불가능한 로봇에서 이 변종 로봇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줌으로써, 1원칙이라는 로봇에 강제된 반응 구현의 중요성을 다시금 환기한다. 행위 실험을 통해 결국에는 이 존재를 구별해내지만 이때 로봇 네스터 10호의 아래와 같은 답변은 윤리원칙과 지적존재로서 자신의 정체성의 격렬한 갈등 그것이다.

 

사라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저는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제가 발견되었다고...주인님은 생각할 겁니다..... 창피합니다.... 저는 지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인님은 저보다 약하고.... 느린데...” -238

 

이어지는 단편 브레인-개구쟁이 천재는 로봇공학 3원칙이 강제된 슈퍼컴퓨터가 인간의 죽음과 그 존재의 파괴가능성과 마주했을 때의 일례이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이것이 인간적 정서, 소위 인격이라는 것을 갖추었을 때, 기계가 유머를 지닌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토록 한다. 주어진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인간이 죽어야 하는 것일 때, 현실을 도피하는 방법으로서 유머를 이용하는 슈퍼컴퓨터 브레인이 딜레마를 탈출하는 방법을 감상하도록 한다.

 

AI는 과연 어떤 형태로 설계, 구축되어야 하는 것일까? 오늘의 공학기술자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을까? 이 문제는 양자 두뇌의 로봇(AI 컴퓨터를 아우르는 의미로서)이 자체 진화를 거듭할수록 인간 전문가는 그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지적 간격이 벌어진다는 실질적 과제를 던진다. 어쩌면 이 소설집의 후반부에 게재된 두 편의 소설 바이어리- 대도시 시장이 된 로봇, 그리고 피할 수 있는 갈등은 이처럼 외형이 구분 불가능할 만큼 인간화된 로봇과 인공지능 슈퍼컴퓨터가 지배하는 세계의 긍정적 답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이러한 낙관적 미래에 동의하지 않는다.

 

특이점이 온다며 인공지능, 생체공학적 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기술의 시대를 외친 레이 커즈와일과 같은 낙관주의자들의 부류가 오늘날 기술혁명의 주류이듯, 소설 속 2044년처럼 세상 전체를 움직이는 힘이 기계에서 나오게 될지는 모르지만, 생물학적 신체를 지니고 온갖 다층적인 정서를 표현하고 감각하는 인간들에게 발생하는 사건은 엄정해보이지만 궁극적인 윤리원칙으로서는 여전히 불완전한 기술윤리에 대한 인류적 논의와 합의 과정의 숙고와 필요를 느끼게 한다.

 


321, 바이어리, 대도시 시장이 된 로봇중에서


로봇의 주인인 인간을 죽이려는 미친 인간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를 막는 방법이 그 미친 인간을 죽이는 것 말고는 어떠한 방법도 없을 때, 로봇은 1원칙을 지키기 위해 제1원칙을 어겨야 하는 상황에 봉착한다. 기계는 스스로 학습한다. 이렇게 제1원칙을 준수할 수 없어 파괴하는 행위는 윤리 원칙 자체의 강제성을 흐리게 만든다. 결국 사유하는 로봇은 자신들보다 열등한 인간 존재를 향한 윤리 원칙의 고수가 아무런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은 그들의 논리적 연산 속도에 견주어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단편 피할 수 있는 갈등에서 로봇 심리학자 수잔 캘빈은 초대형 컴퓨터의 사소한 불일치, 오류는 인간의 오래된 본성, 그 이기심에 근거한 입력 데이터의 조작적 오류이며, 컴퓨터는 이처럼 왜곡되는 데이터의 경향조차 자신의 보전을 위해 포함하여 해석하고 인류의 궁극적 선을 지향할 것이라며, 인간의 어긋남조차도 포용할 것이라고 낙관적 견해를 제시한다. 여기에는 굳건한 제1원칙의 고수를 전제로 하고 있다. 나아가 작가는 제1원칙을 확장해서 인간을 인류로 그 대상을 확대하여 개선된 정의를 내놓고 있다.   로봇은 인류가 위험에 처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로봇공학 O원칙’, 즉 최고의 원칙을 제시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에게 유익한 일이라든가, 직접적 위해가 가지 않을 것이라며 진행한 것들이 종국에는 인류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는 것들을 우리들은 무수히 목격해왔다. 생명연장, 치명적 질병에 대한 효과적 처리, 지식의 총합적이고 효율적 이용 등등을 위해 기계적 신체, 두뇌 임플란트, 인간-기계 융합, 초지능 슈퍼컴퓨터 등등의 선한 목적의 당위적 요구를 주장하며 기술적 윤리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즈니스적 효율성의 추구에 윤리라는 대 원칙이 외면될 때, 그 도래할 종국은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무엇인지, 인간 세계는 어떠한 미래를 감당할 수 있는지,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무엇이어야 하며, 기계는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 이 오래된 소설집이 21세기에 거듭 소환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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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 글은 푸른숲 출판사에서 제공한 중국 중견 작가 위화의 소설 원청가제본 도서의 지원에 의해 작성된 것임을 밝혀둡니다또한 소설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표현되고 있으니 

이 점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소설은 청나라의 쇠망(衰亡)과 더불어 그치지 않는 전란(戰亂), 토비(土匪)와 패잔병들의 민초를 향한 살인과 방화, 약탈, 강간이 기승을 부리던 20세기 초엽을 배경으로 하여, 명멸하는 인간들의 시린 삶을 쫓으며, 그네들을 살아가게 하는, 또는 목숨까지 바치게 하는 의미란 무엇인지를 한 인간의 온전한 한 세대를 관통하며 인생을 풀어 놓는다.

 

이 작품 역시 국내에 많은 작품들로 친근해진 작가 위화(余華)만의 고유한 분위기, 소설의 주제와 드러내려하는 의미가 어떠하든 고즈넉한 가을 길을 걷는 듯 고독이라는 단독성의 인간에 대한 깊숙한 연민의 시선을 느끼게 한다. 한 인간의 삶의 여정이라는 줄기 속에 시대라는 소용돌이의 시간에 새겨진 인간들의 잔인함, 우매함, 교활함, 비루함의 면면이 자연스럽게 융해되어 인물의 삶에 오롯이 집중케 한다. 아마 위화만의 재주일 것이다.

 

이야기는 린샹푸(林祥福)’라는 인물의 묘사로 시작된다. 그가 소유한 1,000여무에 이르는 비옥한 땅, 명성이 자자한 사업(목공소), 중국 남부 소도시 시진 근방 100여리에 미치는 선명한 존재감, 그러나 그의 내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단지 북쪽에서 내려왔다고만 확신한다고. 소설은 이 인물의 삶의 행적(行跡)을 따라가며 시대의 음울(陰鬱)에 넋 놓고 빠져들게 될 정도로 서사적 수려함에 침잠케 한다.

 

훌륭한 교육과 지혜로운 보살핌 속에서 성장한 황허강 북부지역 마을의 성년으로 성장한 린샹푸를 우연이라는 필연적 사건으로 밀어 넣는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저택, 자신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는 두 남녀를 집안으로 맞이하고 그네들에게 하루 밤의 거처를 제공하면서 매파(媒婆)의 수많은 선 자리에서 닿지 않았던 인연의 여인을 맞이하게 되는 인생의 사건이다. 남매라고 자신들의 관계를 설명했던 두 남녀는 다음 날 남자는 경성(북경)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홀로 떠나야하니 잠시만 여동생 샤오메이(小美)’가 머물 수 있게 도와달라는 부탁으로 린샹푸는 이를 관대하게 수용한다.

 

남자는 돌아오지 않고 린샹푸는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닌 샤오메이와 같이하게 되며, 이윽고 그녀가 자신의 아내라는 믿음이 된다. 부모로 물려받고 성실하게 전답을 일군 보상으로 축적한 금괴와 집과 전답의 문서가 있는 은닉한 상자를 보여주며 부부의 미래를 꿈꾸지만, 어느 날 여자는 금괴의 절반을 가지고 사라져버린 후 돌아오지 않는다. 한 계절이 지나고 농사일과 목공의 배움을 마치고 귀가한 날 집 안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베틀 소리에 샤오메이가 돌아 왔음을 직감한다. 여자는 배가 불어 그의 아이를 잉태했음을 알린다. 남자는 여자의 허물을 용서하고 정식 혼례를 치루며 여자와 자신의 아이와 함께하는 단란한 가정을 꿈꾼다.

 

그러나 여자는 딸아이를 출산하고 한 달여가 지난 어느 날 아이만 남겨둔 채 다시금 사라지고 만다. 남자는 여자를 찾기 위해, 아이의 엄마를 찾기 위해, 예전 자신의 집 앞에서 들려오던 그네들의 고향이라는 원청’, 남쪽 지방의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해 떠난다. 원청!, 어딘가에 있을 장소, 그곳을 향한 여정, 그리고 그 부재하는 장소와 현실의 시진이라는 장소는 지명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과 정신을 이끄는 공간이 된다.

 

소설 초입의 이 서사는 끝 장에 이르러 그도 알지 못했던 머묾의 장소가 된 시진의 의미를 샤오메이의 시선으로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여인의 아린 마음, 폭설 속의 차디찬 대지에 꿇어앉아 머리를 숙인 채 기도하는 여인의 속죄의 형상, 그리고 같은 공간에서 닿지 않는 두 사람의 교차로 인생의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한다. 우연과 필연의 상호 인과성의 그 미세한 어긋남, 인생이란 이런 것들의 연속이란 듯이.

 

긴 여정은 시작만 있고 끝이 없었다. 린샹푸는 걷다가 멈추고 멈췄다가 걷기를 반복하며 가을을 보내고 겨울로 들어섰다.  그는 툭하면 생각에 빠졌다.  앞으로 나아가는 몸과 달리 생각은 자꾸 뒤로 돌아가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시진은 오히려 선명하게 떠올랐다.”   -558

 

딸아이의 엄마를 찾겠다는 남자의 이정표 없는 발걸음이 시진이라는 마을에 닿았을 때 들려오는 샤오메이와 같은 빠른 말과 억양의 낯익음은 목적지인 원청이 아니지만 그의 걸음을 돌려 세워 발을 묶는다. 가슴에 품은 돌도 안 된 어린 딸의 젖동냥을 위해 한 손에 든 한 냥의 엽전을 내밀며 제발 불쌍한 제 딸에게 젖 좀 먹여주십시오.”라며 지독한 한파가 몰아치는 눈 속에서 집집을 돌며 젖을 구걸하는 남자의 모습은 먹먹하다 못해 울음이 비어져 나오게 하는 정경이다.


남자는 시진에 정착하기로 한다. 이때 그에게 내민 따뜻한 인간애, 2년 전에 그곳에 정착했다는 천융량과 리메이롄 부부가 그의 딸아이에게 물려 준 젖과 폭설로 단절된 엄동설한에 자신들의 목숨 일부와 같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죽 한 그릇은 또 하나의 인연으로 인생의 중대한 토대가 된다. 린샹푸는 천용량의 함께 자신의 목공 기술로 폭설과 돌풍으로 망가진 시진의 망가진 집들의 창호와 문을 수리해주며 목재와 가구 판매 사업의 기반을 다지고 지역의 부자로 일어선다. 린샹푸는 100여 집 넘는 곳에서 젖동냥을 받았다는 의미로서 딸의 이름을 린바이자(林百家)’로 짓는다. 린바이자는 리메이롄의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한다.

 

그러나 시대는 토비들의 창궐과 국민혁명군, 북양군 관병 등 지역 토호 세력들의 그칠 줄 모르는 전쟁으로 인민의 삶이란 피난과 도주, 살인과 강간, 약탈의 희생을 피할 수 없는 시련의 시간이었다. 린샹푸와 천용량, 시진의 상업세력 대표이자 지역 인민의 존경받는 리더인 구이민 등의 생활 기반에도 이러한 위태로운 현실의 암운은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토비의 인질로 납치되는 린바이자, 린바이자를 구해내기 위해 천씨 가문의 장자인 자신의 몸값이 더 비싸니 대신 끌어가라는 천야오우의 희생,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인질들을 휘갈기는 채찍질과 히죽거리는 토비들의 잔혹하다 못해 처참하기까지 폭력과 살상의 장면들, 토비를 소탕한다는 명목 하에 출정하는 관군의 부패상, 패전한 북양군 관병들의 시진에서의 후안무치한 패덕(悖德)의 행위들은 무능력하고 부패한 국가의 인민에게 닥쳐오는 실체를 날것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은 인민들의 자구책으로 이어지지만, 혼돈의 시기에 인간을 사로잡는 유언비어와 이에 망동하는 인간들의 그 이기심이 빚어내는 어리석음의 자멸적 행동까지 소설은 부각하지 않으면서 너무도 천연(天然)하게 인간의 생애에 풀어 놓는다. 이러한 시대의 혼돈 상은 시진과 강을 사이에 둔 완무당 지역을 배경으로 수로를 활용해 활동하는 토비의 극악한 살인과 파괴 행위로 많은 지면에 걸쳐 펄쳐지고 있는데, 한 마을 600명의 주민 중 246명이 살해되고 수많은 여성들의 강간과 잿더미가 된 마을의 형상으로 표상되고 있다.

 

“200여명의 피가 허공으로 솟구쳐 타작마당 사방의 나뭇잎을 적셨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선혈은 타작마당의 흙을 붉게 물들이고 노인의 백발과 아이의 동공, 여인의 창백한 얼굴도 붉게 물들였다.”   -355

 

아마 이 소설의 궁극적 백미(白眉)는 소설의 후반부에 다시금 소환되는 린샹푸가 폭설이 내리는 시진에 도달하여 딸아이의 젖동냥을 하던 17년 전의 시점에 놓인 샤오메이의 시선으로 술회되는 또 하나의 일생에 대한 쌉싸름하고 애달픈 사랑의 기록이다. 린샹푸의 집 앞을 서성거리던 두 남녀 아창과 샤오메이의 관계와 그들의 사랑, 그리고 린샹푸와 샤오메이 자신과의 관계성이 지녔던 감정들, 그리고 출산과 도주, 시진에서의 삶과 자신을 찾아 존재하지 않는 원청을 찾아 시진에 도달한 남자와 딸에 대한 아픔과 연민, 그리고 씻기지 않는 죄의식이 의식의 수면 아래에 끊임없이 흐르는 물줄기처럼 우리네 감정을 적셔댄다.

 

여기서 원청은 샤오메이의 목소리로 다시금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것은 린샹푸와 딸의 끝없는 유랑과 방황이며, 아픔의 언어이다. 소설은 역사와 같은 거대한 담론을 끌어들이지 않으며, 시대의 인민의 삶을 말하며, 인간 삶의 행로의 분기점마다 다가오는 그 우연과 필연의 인과성, 이에 깃든 생의 기쁨과 슬픔, 갈망과 기만에 도사린 불가피성, 베풂과 환대, 용기와 복수, 희생과 죄의 구원을 향한 성스러운 참회의 이야기들이 우아하게 어우러져 가히 마법적인 인간 드라마를 감동적으로 선사한다.

 

사랑하는 이가 있는 곳, 그러나 어딘지 알지 못하는 곳, 부재하는 장소이자 유랑과 방황의 공간이며 아픔인 곳,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그 실재하는 장소를 표상하는 대명사 원청은 오랜 동안 기억 될 것 같다. 어느 누구도 이 책의 첫 장을 읽기 시작했다면 결코 책장을 덮지 못할 것 같다. 명멸하는 인간들의 운명을 쫓는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 무엇의 견고한 유혹을 떨쳐 낼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일 것이다. 위화의 대표작 인생(活着)을 잇는 그의 문학에 또 하나의 획을 긋는 걸작이라 하면 지나친 수사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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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토비(土匪) '장도끼'의 운명이 시사하는 것


소설에는 시진 지역의 강 건너 완무당을 무대로활동하는  극악한 토비의 우두머리인  '장도끼'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자신의 쾌락과 잇속을 위해 한 마을의 인민을 무참히 도륙하는 데 거리낌 없는 인간이다.  이 자가 천융량의 무장한 마을 사람들과 혈전에서 칼날에 의해 눈이 다치며 패퇴하는 장면과 함께 자신의 부하들에 의해 결박되어 버려지고, 자신의 본업이었던 점장이로 길거리에 앉아 인민을 현혹하는 교활한 모습이 있다. 


고작 인간의 사주팔자와 이에 은닉된 지중간을 자유로이 해석하는 반복된 행위로 인간 운명의 예언자처럼 행세하는 정경이다.  마치 작금의 천O 이라는 인간이 한 국가를 쥐락펴락하는 혹세무민의 한심한 작태와 오버랩되며 갈등과 혼돈으로 내모는 그 비열함과 우둔함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 자의 행적을 작가 위화는 상당한 분량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그 운명의 끝,  꽂은 칼날이 궁극에 어디에 다시 꽂히는지를 살필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마도 필연임을 말하려 했던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제아무리 운명을 살핀다고 해봤자 자기 운명에 다가오는 칼을 빗겨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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