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치유, 인간 - 삶이 흔들릴 때 신화가 건네는 치유의 말들
신동흔 지음 / 아카넷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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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네 마음은 항상 무엇인가로 들끓는다. 그것은 기쁨과 행복의 충만한 끓음일 때도 있지만, 무기력과 두려움, 슬픔과 공허의 혼란으로 내몰림이기도 하다. 내적 평화와 복락을 이루기란 얼마나 힘겨운지, 삶의 시선을 새롭게 일신하기에 너무도 고달파 좌절과 포기, 분노와 공격성으로 전락하기는 또 얼마나 쉬운지, 내 존재의 가없는 흔들림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우리네에게 한낱 이야기로서의 들려지던 신화와 전설, 설화로부터 우주자연의 섭리, 우리 안의 선과 악, 힘과 가치에 대한 '자기서사(story-in-depth of self)'를 발견케 하여 내 안에 공존하는 본원(本源)성을 목격토록 견인한다. 신화가 품고 있는 서사 속에서 인간의 이면적 심층에서 삶을 움직여 가는 존재의 본질을 통해 삶의 실체를 목도함으로써, 깊이 잠들어 있는 나의 내적 실존(實存)을 깨워지금의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사유토록 하는 것이다. 신화는 우리 존재의 본원을 비추는 마법의 거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저자 신동흔 교수는 창조, 자연, 영웅, 애정, 생사의 다섯 신화로 구분하여, 존재의 시원, 그리고 세계와 나와의 관계, 인간적 삶의 한계와 그 극복을 위한 투쟁, 세상과 타자와의 연결과 확장,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우리의 서사로 수용할 수 있는 지를 명상케 하고, 삶의 치유로서의 서사로 이해할 수 있는지의 여정을 안내한다.

 

한국의 신화와 전설은 물론 동서양을 막론한 세계의 신화를 오가며 대체 인간의 본원이란 무엇이며, 창조와 자연의 신화로서 그것들은 우리와 우주자연의 섭리가 어떻게 연결되고 상호 교섭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또한 영웅, 애정, 생사의 신화에서는 인간적 존재로서 서사를 바라봄으로써 역동하는 천변만화의 세계와 어떻게 투쟁하고 초극함으로써 내 존재의 거듭남의 길을, 생명적 섭리를, 존재적 숙명을 헤쳐 나갈 것인지를 깨우치게 돕는다.

 

아마 이 책의 덕목은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한국의 신화를 기반으로 우리의 오랜 이야기를 통해 를 돌아 볼 수 있음에 있을 것이다, 물론 잘 알려진 이집트와 그리스, 북유럽의 신화가 또 다른 절반을 차지하며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우리들의 실체, 그 자화상을 통해 삶의 갈래길에서 어느 길을 걸어야 할 지에 대한 신선한 이정표를 발견 할 수도 있다. 인간 존재를 비롯한 우주 자연의 창조에 대한 신화는 서양의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제주 창세 신화 <초감제>’가 있으며, 함경도 구전 신화인 <창세가>’도 있다. 거대한 창조신 미륵이 땅과 하늘이 뭉쳐진 혼돈의 세계를 분리하여 기둥을 받쳐 하늘을 만들고, 땅을 만든 이야기, 그리고 하늘을 향한 축원을 통해 내려진 생명 금벌레, 은벌레라는 원초적 생명체로부터 햇살과 이슬, , 바, 곡식과 열매 등 온갖 자연의 기운을 취해 인간을 만들어 낸 이야기다.

 

수성(獸性)을 지닌 미력한 물질성(物質性)의 존재인 벌레가 맞물린 인성(人性), 세상 만유와 연결된 존재인 바로 라는 존재는 과연 물성을 쫓는 존재인가, 신성(神性)을 쫓는 존재인가를 묻게 된다. 한편 우라노스에서 크로노스로 다시 제우스로 야생 자연의 폭력성, 신들의 투쟁사로부터 세계 질서 체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인간 존재의 운명적 서사를 길어 올리고, 우리는 창조적 파괴, 죽어야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의 그 근엄한 우주적 질서, 자연의 본성으로부터 내 존재의 살림이란 무엇인지를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대홍수 신화는 부조리와 타락으로 퇴행하는 인간에 대한 거듭남의 서사로서 동서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나무도령 이야기로 씻김, 재탄생의 신화가 전해져 온다고 한다.

 

그 내용은 제 욕심만 찾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본래의 자연성을 지키고 있던 유일한 존재인 나무도령만 대홍수에 살아남도록 하였던 신성을 어기고 물에 휩쓸려 죽어가는 소년을 구해 주었으나, 바로 그 소년이 나무도령을 배반하고 자리를 차지하려는 재앙으로 씻음과 재창조가 완수되지 못한 세계가 계속 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바로 지금의 세계는 선한 생명의 세계와 욕망과 배반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들의 세계는 이 둘이 공존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일까? 그리고 지금 우리들은 어떤 세계, 혹여 대홍수의 물결에 접어든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반성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바로 지금, 우리는 깊은 침잠과 재탄생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문명이란 이름의 광기, 이 방주, 혹은 열차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심란한 시대다. 이처럼 우리는 매양 나는 대체 누구인가를 묻는 존재다.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대체 내 앞에 길은 있는 건가? 라는 물음이 그치지 않는다. 황막한 세계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나는 이 부유가 근심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의 뿌리를 묻는 신화를 원형적 신화라 부른다.

 

<원천강 본물이>라는 신화가 있다. 산 사람은 갈 수 없는 본원적 세계, 그 근원의 강이 원천강이다. 주인공 오늘이가 이 존재의 뿌리를 찾아서 원천강을 찾아가는 여정의 이야기다. 여정에서 만나는 무수한 존재들은 자신들이 처한 삶의 곡절에 대한 물음의 답변을 오늘이에게 부탁한다. 여의주를 세 개씩이나 입에 물었으나 용으로 승천하지 못하는 이무기에서부터 그저 책만 읽는 두 남녀 등등,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존재의 우매함, 여의주는 입에 한 개면 족하다. 세 개가 필요 없는 것인데, 그 욕망의 무거움을 내재하고 있는 바로 자신인 여의주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빛나고 가벼워지기 위해서는 두 개의 여의주를 입에서 뱉어내야 하는 것, 꽃이 떨어져야 열매가 맺고 다시 새로운 꽃이 피어나는 그 단순한 자연의 이치를 우리는 망각하곤 한다. 가벼워지기. 오늘이가 만나는 존재들의 물음이 곧 존재에 대한 답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신화가 있다는 것을 말지 못했다. 새로운 앎이다.

 



영웅?, 세계에 결연히 맞서서 틀을 바꾸고자 한 예외적 인간들, 불굴의 투지와 도전을 통해 성취한 과업이 세상에 기여함으로써 집단의 존숭 대상이 될 때, 우리는 일컬어 영웅이라 부른다. 나는 이 적극적 힘과 용맹보다는 불굴의 투지와 도전성에 더욱 매료된다. 아마 코린토스의 왕이었던 시시포스가 지옥이라는 거칠고 험한 어둠의 세상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굴려 올리는 그 반복된 형벌을 수행함으로써 신적 질서에 도전하는,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그 맞섬이야말로 바로 영웅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던 반복된 과업들에 그 얼마나 진저리를 쳤던지 모른다. 이제 그것이 형벌이 아님을 안다. 삶이란 본디 그런 것임을, 나아가 그것이 삶의 축복임을, 살아서 움직일 수 있음, 그 자체로 강복(降福)임을 이젠 안다. 노예적 삶이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삶의 양태의 그 다양성은 그리 간단히 재단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영웅에 대한 신화 하나를 더 소개하련다. 북유럽 신화의 신이자 영웅인 오딘과 토르, 요즘 신세대가 열광하는 날 것으로 다가오는 그 야생적 면모의 주인공들이다. 망치 묠니르를 휘두르며 자연에 맞서는 길을 여는 존재. 우리에게 이 토르같은 신이 있다. 제주 작은 마을의 신이자 영웅인 궤네깃또, 대륙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제주 구좌읍 김녕마을의 신이 된 존재다. 너무 작은 곳의 신이라고? 신화의 사유 체계는 모든 곳이 세상의 중심이다. 그에게는 바로 그곳이 우주의 중심이었을 뿐이다. 자연에 맞서는 것은 고난의 여정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새로운 길을 위해 때론 맞서 싸워 이겨내야 한다. 우리의 신화를 발견케 하는 이 책의 미덕에 자꾸 감사하는 마음이다. 아마 더 깊은 독서로, 새로운 앎의 세계로 나가는 초석이 될 것 같다.

 

 

이제 오늘의 우리들 행위를 빈번하게 자극하는 어휘, ‘욕망에 대한 신화다. 나는 미노타우로스와 테세우스, 아리아드네가 열연하는 미궁(Labyrinthos)에서의 투쟁을 나의 서사로 품고 있다. 그래서 안개 낀 좁은 골목길의 베네치아를 사랑하는 지도 모르겠다. 크레타 섬의 왕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로 인해 야기된 사연 많은 신화다. 파시파에와 소의 교접 결과가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다. 즉 인간의 범람한 욕망이 만든 산물, 소유욕과 성욕, 지배욕이 합쳐진 욕망 덩어리다. 테세우스는 이 욕망을 제압하러 나선 존재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여 승리하지만 그는 조력자인 아리아드네의 손을 놓음으로써 자멸한다.

 

아리아드네의 실, 이성의 끈이자 사랑과 인간적 연결을 놓는 것, 즉 자기 안의 라비린토스를 소홀함으로써 무너지게 되는 비극적 신화다. 나는 이 신화에서 영웅과 이성과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내 안의 선악의 이중성을 반성적으로 돌아보는 모범으로 재생해 보곤 한다. 길을 잃고 헤맬 때면 내가 망각하고 있는 것, 외면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무엇인지, 신화는 이렇듯 자기 안의 실제를 반추케 함으로써 내적 존재를 확장해 가는 길잡이, 혹은 치유의 서사가 되어준다.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아마 저마다의 현실적 상황에 따라 더욱 시선이 가는 장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지금 사랑하는 연인과의 애정에 고심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미래의 갈래 길에 서서 삶의 운영을 고민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삶과 죽음, 필연적으로 도래할 죽음에 대한 상념과의 연결성에 대한 사유에 빠져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모든 현실적 고뇌를 새로운 거듭남으로 인도할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은 지면을 가득 채운 한국을 비롯한 동서양 신화들을 거닐며 자기만의 서사를 분명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안의 나와 싸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들 각자 고유한 서사를 지닌 존재자들이다. 하늘에 배반당하고 땅에 치여 휘청대기도 하고, 소유 욕망에 시달리며 더 큰 결여와 불화가 만든 문제에 부딪쳐 절망하고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자신에게는 죽음이란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것처럼 오만과 폭력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으며, 나이를 먹었으나 내적으로는 어린아이인 자녀서사에 갇혀 유아적 퇴행의 삶으로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존재일 수도 있다. 에로스는 황금 화살과 납 화살 두 개를 지니고 있다. 사랑과 사랑의 거부, 생명력과 스러지는 생명을 상징하는 삶과 죽음의 이중주’, 그는 곧 죽음의 상징 타나토스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는 결코 선한 존재도 악한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에로스가 선을 넘어 폭주하면 부지불식간에 타나토스로 탈바꿈하여 공격적이고 공허로 그득한 존재로 뒤바뀌기 일쑤인 것이 우리들이다


책은 한편으로는 황당하기 그지없고, 다른 한편으론 지엄하고 숭고하기 이를 데 없는 신화에 친근하게 다가가서 자기만의 서사를 발견하게 이끈다. 세계의 신화를 거울삼아 자기서사의 속성과 좌표를 살펴보고 나아갈 방향과 목표를 찾아보고자 하는 이들, 내 안의 나를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저술은 분명 나를 만나고 그 길을 이끌어 줄 것이다. 모처럼 이 책에 감히 추천한다는 문구를 남기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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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겨울빛
조지프 브로드스키 지음, 이경아 옮김 / 뮤진트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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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러시아 시인이 한 도시에 대해 우아한 찬가를 쓸 수 있도록 신적 속성이 자본의 무참한 탐욕에 의해 변용되지 않고 양태들을 제약토록 한 도시의 가라앉음이라는 예견된 재앙에 감사한다. 매 순간 해수면 아래로 조금씩 잠기는 그 근심이 어쩌면 내밀한 성소(聖所)보다 더 시간을 초월한 곳처럼 느껴지게 하는 베네치아의 물과 빛, 무수한 석상과 부조들, 안개 낀 좁은 골목길과 수면 위를 유영하는 곤돌라, 비논리적 욕망의 도시를 오늘에도 노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시적 정취 그득한 에세이는 베네치아의 시각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눈이 제일 먼저 인식하는 도시의 외면이 발산하는 이야기는 남들의 시선에 노출될 운명이라는 사실을 아는 도시라는 선언처럼 자기 존재가 품고 있는 무한한 반영에 담긴 이야기를 스스로 쏟아낸다. 17년간 겨울이면 찾아간 베네치아에 첫 걸음을 내딛던 이방인의 인상부터 시작되는 글은 안내자로 만난 여인의 돌아가는 발길조차 화려한 문장으로 써 내려간다. 나의 아리아드네는 고가의 향수로 만든 향기로운 실을 길게 늘어뜨린 채 사라졌다.”.

 

아마 그녀의 향기가 베네치아의 미로같은 좁은 골목길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그 유명한 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몽상은 그녀의 건축가 남편에 의해 끊어졌으니, 베네치아에서의 그의 걸음은 오히려 자유로워졌을 것이다. 물의 도시, 거울이 도처에서 반짝이며 존재함으로써 모든 것을 반영하는, 눈이 말 그대로 헤엄을 치는 도시이니 가히 시각의 도시라 할 만하다. 이 시각성, 반영은 우리의 콤플렉스와 불안을 부채질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을 에워싼 아름다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함으로 치장한다. 시인은 2주 만 살면 아마 재산이 거덜 날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이것은 도시를 구성하는 시각적 대상들인 대리석 레이스들, 상감 장식들, 기둥머리들,...소조물들,...케루빔들, 여인상 기둥들, 벽공들, 고딕과 무어 양식이 뒤섞인 창문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허영을 부추긴다. 특히 겨울의 베네치아를 묘사하는 문장은 무한한 신적 속성을 보는 듯한 몽상에 빠져들게 하고, 시간을 잊은 도시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게 한다.


일요일이면 헤아릴 수 없는 종소리에 눈을 뜨게 된다. 흡사 면 커튼 뒤 

진주빛 영롱한회색하늘에 뜬 은쟁반 위에서 커다란 도자기 세트가 진동을 

하는 것 같다. ...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 커피 향기와 기도 소리인,

진주가 가득 맺힌 실안개가 바깥에서 곧장 밀려들어온다.      -40

 

이렇게 도시에 의해 생겨난 자기 망각의 시간을 지냐다보면 시인은 불현 듯 수잔 손택과 동행한 베네치아에서의 한 일화로 이끌며, 바이올리니스트 올가 럿지와의 한담을 통해 그녀의 연인이었던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윤리적 변론을 듣게 한다. 파시스트의 선전자였으며 반()유대주의자였던 바람둥이를 변호하는 쓰레기 같은 시간에 대해서. 아마 에즈라 파운드의 ‘, 캔토스베네치아 빛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던 모양일 것이다.

 

이 불현듯한 침입의 글이 인간 양태(樣態)의 별난 현상을 생각나게 하여 짜증스럽기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시인은 도시 베네치아의 어디에서나 발견하게 되는 바실리스크, 스핑크스, 케르베루스, 미노타우르스. 켄타우루스, 키메라, 우리 종에 남아있는 진화의 유전적 기억을 보여주는 신화의 자취들을 열거하며, 물에서 튀어나온 이 도시, 바로 이곳에 부조와 석상으로 수많이 존재하는 이유, 곧 우리네 자화상을 드러내 보여주는 도시임을 입증하려 한다.

 

나는 결연하게 시인의 말에 동의하며,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인 안개 낀 베네치아의 골목길이 바로 다이달로스의 천재적 두뇌의 소산인 미궁(迷宮)처럼 여겨지고, 인간의 원형적 이야기를 품고 있는 신화, 곧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그대로 품고 있는 도시라는 증거를 더하고 싶어진다.

 

아마 망자의 섬인 산미켈레 성당으로 운하를 미끄러져 가는 곤돌라로부터 유독 에로틱한 감상을 나열하는 시인의 문장에서 나는 토마스 만의 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한 문장과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발라드가 유행하던 시절부터 하나도 변치 않고 그대로 전해 내려온 이 이상한 배는 ... 그냥 관처럼 보일 정도로 색깔이 너무도 특이하게 까맣다. 그것은 ...죽음 그 자체, 음울한 장례식을 생각나게해주는 타나토스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쓰고 있다. 아마 고르게 옻칠을 한 듯한 검은 수면과 완벽하게 합을 이루는 곤돌라의 에로티시즘은 야릇한 중성적 갈망을 상상하게 하게 하는 까닭일 것이다.

 

산자카리아의 프론토네 거리, 비발디가 세례 받았음을 적은 간판을 내건 분홍색 벽돌 교회, 라구나의 수면 위를 뽐내며 걸어가는 태양 빛, 벨리니의 아름다운 그림이 있는 마돈나 델 오르토대성당..., 수로처럼 거울 같은 표면이 된 보도를 자박거리며 걷는 밤의 산책과 닫힌 가게의 위에서 불을 밝히는 간판들의 자기애적 행위를 상상하다보면 이 도시가 왜 수많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고, 밀애와 이별이라는 양 극단의 장소로 적합한 장소인지를 수긍하게 된다.

 

태고의 분위기를 간직한 물과 빛의 낙원, 신화를 간직한 이 도시의 매력을 만끽한 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체험할 장소일 것만 같다. 소비에트 전체주의에 저항하며 강제노동과 감옥을 드나들던 저항시인, 198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시인의 시간과 이미지 속을 유영하게 된 것은 순전히 막상스 페르민알프레드 뮈세가 쓴 작품의 배경 덕분이다. 어쩌면 이들의 작품으로 베네치아에 관한 짧은 문학적 소품 하나가 쓰여 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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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바이올린 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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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바이올린의 선율이 들려오는 안개 낀 물의 도시 베네치아와, 바이올린의 장인 에라스무스의 주검을 실은 운하에 떠 있는 특이하게 검은 곤돌라의 타나토스적 아름다움으로부터 누군가의 마지막 여행을 음울하게 상상한다. 명치끝을 아리게 하는 슬픔, 그러나 마치 무언가를 알아차린 것만 같은 기쁨이 뒤 섞인 그런 정념에 휩싸인다. 


새벽안개가 미로같은 이 도시의 골목을 뒤덮고 섞어 놓을 때, 가장 놀랍고도 이상한 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나는 수면에 반짝이는 베네치아의 빛을 발견한 느낌에 흠칫 놀라기도 한다. 음악을 자신의 삶으로 옮기려는 지고한 예술적 지향에 온 존재를 내맡긴 두 천재의 이야기에 깃들어 있는 세상의 모든 고통들과 행복, 그리고 기쁨의 외침들에 귀 기울이며, 진정한 자유와 자기완성의 기쁨이란 무엇인가를, 자아의 감옥을 초극하는 주체적 체험으로서의 존재 양식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단 하나의 존재 이유만을 갖게 된, 자신의 생인 영혼을 음악으로 옮기는 것, 그것은 음악을 삶으로 옮기는 것이라는 바이올린 연주자 요하네스, 바이올린 제작 장인 에라스무스의 삶의 이야기는 사랑과 예술의 지고함, 시간의 인내를, 오랜 비극으로부터의 깨어남으로 어느덧 나를 인도하는 것만 같다.

 

장인(匠人) 에라스무스의 산마르코 광장(San Marco) 지척의 모세 거리의 한 저택벽에 걸린 검은 바이올린, 그가 사랑에 빠졌던 페렌치 공작의 딸 카를라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신적인 목소리를, 그녀만을 위해, 그녀의 목소리를 소유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제작한 흑단으로 제작한 바이올린은 내면에 의해 보증되는 자기창조로서의 존재양식과 자극의 무한 욕구에 종속된 소유양식의 폭력성을 절망적 대비를 통해 사랑과 예술의 존재 방식이란 무엇인지, 우리네가 쫓는 것의 실체를 드러내 보여주는 듯하다.

 


비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가 치는 날, 그는 완성된 바이올린을 시험하기로 결심한다. 카를라와 모든 것이 똑 같은 검은 바이올린의 울림이 확인되는 날, 카를라는 생사의 기로에서 싸우고 있었다. 아프기 시작한 그 흉한 밤에 카를라는 목소리를 잃고 끝내 사망한다. 사랑을 소유하려는 것, 음악을 물질에 가두려 한 행위가 사랑하는 여인을 영원히 잃고 자신마저 파괴하는 행위가 될 줄을 그는 알지 못했다.

 

단 한 번의 연주 뒤에 벽에 걸린 채 다시는 연주되지 않은 검은 바이올린, 에라스무스는 그 비극적 비밀과 함께 요하네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한다. 예술과 사랑, 아니 삶의 그 어떤 대상이든지 그 본성에 일치하는 행위의 일체성이라는 존재 지향성, 공존의 즐김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는 꽤나 어려운 이해가 되었음을 발견토록 하려는 것만 같다. 장례식에서 돌아와 분노에 휩싸여 바이올린을 땅에 내팽겨치는 요하네스의 행위와 그때 땅에 닿으며 깨지는 악기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은 어쩌면 소유로부터의 해방, 존재 자체로의 돌아감의 외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요하네스는 에라스무스와 검은 바이올린의 이야기를 애써 지우려 하며, 또한 천상에 들려온 듯 했던 여인의 목소리, 그가 작곡하려 했던 오페라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해 그는 31년이 결렸다. 마침내 완성한 음표들이 적힌 노트를 벽난로에 던짐으로써, 일생의 작품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비로소 자기 삶의 이야기와 결별 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허구적 혼합물과 뒤엉킨 자아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계는 자신을 확인하는 경험적 토대가 물질, 대상의 소유라고, 자신임을 확인하는 방법은 오직 소유라고 말한다. 그러하다보니 지식, 예술과 장인의 창작물조차 소유 양식이 자리 잡고, 자기실현의 장애물이 되어 아집과 소외와 굴종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그래서 세상에는 죽음과 폭력, 비극만이 휘몰아친다.

 

단 한 번 주어지는 인생이란 무대에서 펼쳐지는 생()의 의미를 무수한 성당들이 아침 삼종기도의 종을 울리고, 안개가 조금씩 피어오르는 사이로 아침 태양의 빛이 튀어 오르는 바다의 여왕인 도시, 베네치아의 신비로움과 함께 읽어나가는 두 천재의 이야기에 취한 읽기였다. 삶의 행복이란 진정 무엇인지, 그 고즈넉한 사랑과 예술의 이야기에 침잠케 하는 시적 언어들에 휘감기는 시간을 조금은 오래 붙잡고 싶어진다왠지 이 감응에서 깨어나기 싫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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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나의 병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27
하비에르 세르카스 지음, 김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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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카탈로니아 찬가로 촉발된 읽기로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두 번째 독서이다. 이 저작은 공화주의 정부의 출범과 함께 기득권 세력인 귀족 계층을 비롯한 교회권력, 군국주의자들은 새로운 정부체제가 지향하는 민주주의와 평등, 자유, 그리고 노동계급의 부상(浮上)에 계급적 위기를 느끼고 이들 체제를 파괴하기 위한 폭력과 내란을 획책하여 야기된 것이 1936~1939년의 내전이라는 전제를 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단순하게 기득권 세력의 복고(復古)를 위한 기획된 폭력으로 스페인 내전을 정의해버리면 오웰이 정의한 사회주의 혁명 전쟁의 의의가 희석되어버릴 수 있다. 노동자, 농민 등 인민 대중의 민주주의를 향한 혁명의 의미는 사라지고, 그야말로 자기 계급을 위한 세력들의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탐욕스런 계급 갈등의 저열한 폭력전쟁(暴力戰爭)으로 규정되고 만다. 따라서 전쟁 촉발의 동기를 무엇으로 이해하는 가의 문제는 정의(正義)에 대한 논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다른 관점,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로 옮기면 전쟁의 진정한 주체가 누구였는가의 물음으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후자의 물음으로 이 책을 읽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그래, ‘하비에르 세르카스의 이 저작은 전쟁의 실제 주체, 또는 기억되어야 할 존재자들에 대한 물음이다. 책은 장편소설이라고 장르를 규정하고 있는 듯하지만, 기술된 방법은 역사르포, 추적 기사에 가깝다. 즉 역사적 사건에 참여했던 생존하는 실존 인물들과 그네들과 관련된 자들의 인터뷰를 통한 증언의 기록물이며, 이것이 문학적 표현 방식에 의해 기술된 것이라 하는 것이 어쩌면 타당한 이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다시 대두되는 것이 기억과 기록의 진실 공방이다. 진정 사실은 무엇인가? 권력에 의해 조작 날조된 기록이 넘쳐나고, 기억은 왜곡되기 일쑤다. 그럼에도 현재를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찾아내야 하고, 그럼으로써 보다 좋은 공동체의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이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사회주의 혁명 세력들의 내부 분열과 자멸적인 폭력적 파괴를 보았으며, 이로인해 프랑코 등 이념적 잡종들의 연합인 파시스트로 집단화하는 우매한 대중적 무관심에 넌덜머리를 냈다면, 하비에르 세르카스는 팔랑헤로 지칭되는 파시스트 세력의 창설자이자 정치위원회 의장이었던 라파엘 산체스 마사스의 생존에 얽힌 비화의 진실성을 추적하며, 전쟁의 진정한 주인공들은 누구였는지, 역사가 망각한 사실은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하려 한다.

 

마사스의 생존 비화는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39130, 공화군에 의해 체포된 파시스트들은 처형되기 위해 스페인 국경지대 쿨옐의 한 수도원에 무리지어 대열을 짓고 있었다. 산체스 마사스는 무차별로 난사되는 총살로 쓰러지는 대열에서 도주하고, 비 내리는 진흙탕 속에 엎드려 수색하던 공화군의 시선을 피하다 총을 겨눈 한 명의 군인과 마주한다. 군인은 한동안 마사스를 바라보다 여긴 아무것도 없다며 그를 살려둔 채 돌아선다. 이후 마사스는 인적을 피해 도주하다 한 마을에 도착하여 보호를 요청하며, 그의 아들인 전후 스페인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불리는 라파엘 산체스 페를로시오가 전하는 숲 속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프랑코군의 승리와 함께 영웅이 되어 정치무대에 복귀했다는 이야기다.

 

사실 그저 그런 뻔한 영웅담의 한 토막이다. 그러나 이 전언의 진위 여부는 파악되어야 한다. 산체스 마사스 스스로가 조작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실제를 사실대로 진술한 얘기인지, 생존담은 사실일지라도 그 세부인 시선이 마주친 공화군 병사의 행위는 정말 있었던 일인지, 도주 중 그를 보호하며 함께했던 숲속의 친구들은 실존하는 사람들인지, 이 이야기가 왜 대중에게 폭넓게 알려져 있는지, 대체 무엇을 위해 이 생존비화가 역사적 사실로 전해지고 있는지를 그 의미를 밝혀내야 한다. 역사는 전후(戰後) 산체스 마사스를 진영에 대한 차별없는 정의로운 정치 귀족으로 기술하고 있는지를 규명해야 한다.

 

책은 이에 대한 지난한 추적기다. 폭력과 군사주의에 대한 신비로운 찬양, 천박한 근본주의, 조국과 카톨릭의 영원성을 주장하며, 공화주의 정부 이전의 엄격한 귀족적 우아함을 누리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팔랑헤의 핵심 이론가였던 파시스트 창설 인물의 추함을 가린 일화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작업이다. 옛 체제의 확고한 계급 제도에 대한 향수, 즉 자기 계급의 편익을 영구화하기 위해 국가를 폭력의 상태로 내몬 주역에게 덧칠해진 심미적이기까지한 일화와 이후의 행적에 담긴 실체를 파헤쳐야 하는 것이다. 면죄부가 주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이 영웅이 되어 역사의 무대에 서는 것이 정의가 될 수 있는 것인가?

 


팔랑헤의 주역인 이 인물은 오늘날 수구 정치집단이 사용하는 음모성 공작의 전범(典範)이라 할 수 있다. 의도적인 이데올로기적 혼선을 야기함으로써 폭력을 체계적으로 조장하는 술책. 실제 오웰이 지적하였듯이 온건한 좌파가 다수였던 공화주의 정부의 두 주축 세력이었던 통일사회당과 통일노동당은 팔랑헤의 바로 이 이념적 혼선을 책동한 파시스트 세력에 의해 극단적이고 참담한 적대자로 분열하여 자멸하고 만다. 사회당에 의해 프랑코의 제5열로 불린 노동당의 의용군으로 참전했던 오웰이 간신히 국경을 넘어 스페인을 탈출하는 것도 이러한 전술의 결과였을 것이다.


진실 추적 과정에 대한 소설적 구성과 내용은 건너뛰어도 될 것 같다. 그 과정에 밝혀지는 산체스 마사스의 정치와 작가로서 글쓰기 행위에 걸친 국민에 대한 정치적 책임의 희석화 행보, 귀족 계급으로서의 무기력과 퇴폐적 삶의 모습이 교차하며, 실제로 자신은 믿지도 않았던 구시대 가치를 찬양하며 배신과 비겁함을 행했으며, 국민을 야만적 대학살로 몰았으나 도덕적 책임을 회피한 채 세상으로부터 잊힌 존재가 됨으로써 야만적 책임을 졌던 인간을 확인한다.

 

나라를 미친듯한 피의 축제에 내몰리도록 유도한 인간이 영웅이 되는 시대는 정말 불의하다. 책은 하비에르 세르카스의 당초 구상대로 진행되지 못하며 집필 의욕이 꺾인다. 아마 책의 3스톡턴에서의 만남에 이르러 다분히 소설적 분위기가 살아나는데, 이러한 집필 좌절의 곤혹감에 몰려 있을 때 우연하게 스페인 해안 마을에 살고 있던 칠레 출신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를 인터뷰하는 기회를 얻는다. 아옌데 시절 칠레 혁명에 동참했고, 피노체트 시설에는 감옥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던 볼라뇨에게 하비에르는 아옌데의 몰락과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묻게 되고, 아옌데는 영웅이었다는 답변을 듣게 된다.

 

볼라뇨는 영웅은 사람을 죽이는 자가 아니라 죽이지 않는 자, 죽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자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영웅을 정의한다. 그리고 영웅의 행동에는 거의 언제나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본능적인 것이 있으며, 이것은 지속적일 수 없으며, 단지 예외적으로 어느 한 순간만 영웅일 수 있다고 답변한다. 이 대화는 집필이 좌절된 하비에르의 구상에 전환을 가져온다. 나라를 내전에 몰아넣은 자의 역사적 무책임성에 대한 물음에서 좌초되었던 글쓰기는 맹목적 본능에 압도되어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름없이 사라진 청년들의 행위에 주목하게 된다. 진정 역사의 영웅은 누구인가? 무명용사들, 고통에 신음하다 세상에 외면당한 채 사라져 간 그들의 얘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물음이다.

 

이미 죽은 친구들, 패배가 뻔한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 마치 전혀 존재치 않았던 것처럼 밤새 옛 동료의 넋과 두런거리며 잠자리를 설치는 외진 요양원에 누워 여생을 보내는 생존자들의 역사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볼라뇨는 스페인에서의 삶을 이어가기위해 캠핑카 공원의 경비원을 하던 일화를 소개한다. 그곳에서 만났던 미라예스라는 노인의 삶의 이야기를. 헷갈리는 사상이나 혁명적 열정이 아니라 단지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동정을 느껴 파시즘에 대항해 싸우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와 싸웠던 당시 청년의 이야기를.

 

나는 이 3부의 볼라뇨로부터 시작된 미라예스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는데, 아마 르포 기사 같았던 역사적 시간의 거슬러 올라가기라는 무거움에서 해방되어 인간적이고 심미적 향취가 물씬나는 서사의 등장에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주 슬프고 오래된 파소 도블레 가락의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며 그 가락을 입 속에서 흥얼거리는 미라예스를 관찰했던 일화는 산체스 마사스의 생존담을 추적하던 과정에서 마사스가 총살처형장에 가기 전에 그들을 감시하던 공화군 한 병사의 흥얼거리던 파소 도블레와의 막연한 일치의 놀람이다. 혹시 볼라뇨가 말하는 미라예스가 산체스 마사스를 못 본 척 해주었던 그 공화군 아닐까하는 기만적인 추정에 이른다. 그가 동일인물이 아니란 법이 어디 있는가?

 

야만을 물리치고 문명이 자기 손에 달려있음을 상상은 물론 어떤 자각도 없이 참전했던 젊은 무명용사를 찾아 하비에르는 조국도 아닌 다른 나라(프랑스)의 쓸쓸한 도시에 있는 빈민 복지 시설의 방 하나에 잊힌 채 살고 있는 미라예스를 찾아낸다. 하비에르는 미라예스에게 산체스 마사스의 얘기를 들려준다. 전쟁을 단지 이야기로 전하는 사람들에게만 소설처럼 들릴 거라는 하비에르의 얘기에 미라예스는 헤밍웨이를 예로 들며 철딱서니 없는 놈!“이라며 전쟁을 심미적 취향으로 변질시킨 문학을 비아냥댄다. 아마 하비에르가 미라예스의 입을 빌어 미국작가를 향해 뒤틀린 심사를 대변시킨 것인 것만 같아 슬며시 미소를 짓게 된다.

 

여기서 다시금 영웅론이 나오는데, 미라예스는 영웅들은 죽거나 살해될 때 영웅이 되는 것이라고, 진정한 영웅들은 전쟁터에서 죽는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영웅이란 없다고. 젊은 양반 모두 다 죽었어요, 모두 죽었어요, 죽었어, 죽었다고.” 이 대화는 내게 아주 오래 기억될 것 같은 감전과 같은 충격적 언어였다고 해야겠다. 나는 친구들 꿈을 꿉니다. 그때마다 죄책감을 느끼지요, 모두들 그때 모습 그대로 내게 인사를 건네요. 그때처럼 여전히 젊지요.”

 

그들이 왜 죽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진정 영웅들이었는데, 새로운 가치를 위해, 인간적 삶의 자유를 위해 본능적으로 뛰쳐나갔던 참된 존재들이었는데, 자기 이익을 위해 세상을 전쟁으로 내 몬 인간만을 기억한다. 진정 문명을 구하기 위해 나섰던 인간은 누구인가? 라고 소설은 내내 묻는다. 무명용사에 대한 헌사라 할 수 있는, 역사 기술(記述)의 문제를 제기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반정치적이며 반역사적이고 비인간적 권력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역사로부터 배움에 대한 사유는 그치지 않고 우리들의 주위를 맴돌고 있음에도 여전히 눈 감고 외면하는 무관심을 생각하게 된다. 이제 하비에르가 폄훼한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로 세 번째 스페인 내전 소재의 문학 작품읽기로 이어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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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1-15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탈로니아 찬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는 읽었습니다. 스페인내전도 읽었구요 이 책은 못 읽어봤네요. 가져갑니다.~♡

필리아 2023-01-16 09:18   좋아요 1 | URL
즐거운 독서와 함께 따뜻한 한 주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동북아, 니체를 만나다 -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동북아시아 사상의 전이와 재형성
김정현 외 지음 / 책세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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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적으로 사유하고... 시대정신, 지배적 이상과 대결하면서 거기에 돌파구를 내는, 그런 점에서 시대의 양심이 되는 자들이 많아지는 세계를 그리며. -필리아(2022.1.14.)

 

 

시대정신 또는 시대의 가치가 바뀌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 아닌가하는 목소리는 사실 매양 들려오는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습관적 문구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대로의 정치적, 문화사회적, 도덕적 가치체계가 새롭게 마주하게 되는 세계와 조화롭지 못한 이질감을 체감하게 되고, 이에 대한 정신적 돌파구를 찾으려하는 것은 생명의 유지존속이라는 본질을 지닌 존재들에게 당연한 의문이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러한 고민의 흔적들은 인간 정신사의 어떤 흐름의 족적을 남기며, 바로 지금의 가치가 형성된 근원적 사상이 무엇이었는지 드러내준다. 책은 한국을 비롯한 일본, 중국의 19세기 말, 20세기 초, 사회정치적 맥락과 깊은 연관을 맺게 된 정신사로서 니체의 독해와 수용과정의 연구를 통해 이 지역의 역사적 문명적 격변의 저류를 탐색하고 있다. 이로서 우리는 역사의 반성적 성찰과 그 구성원들의 정신에 흐르고 있는 지배적 사상을 목격할 수 있게 된다. 설혹 탐색과 연구, 근원이 된 텍스트나 아카이브의 해석 상 오류가 있었을지언정 그러한 실체로 수용되었기에 그 자체가 곧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일본의 니체 수용

 

어느 시점에 누가 어떤 관점에서 하나의 사상을 접하고 그것을 공개적 지면을 통해 자국에 소개하였는가는 결코 간과할 것이 아니다. 그것을 접한 사람의 다소(多少)를 떠나 사상적 관심과 비평의 촉발을 가늠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상의 확산이나 외면을 파악하는 단초(端初)가 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신학적 배경을 지닌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 유학생인 고니시 마스타로(小西增太郞)’1893<유럽의 대표적 두 명의 도덕사상가 프리드리히 니체 씨와 레오 톨스토이 백작의 견해비교>라는 글을 니콜라이 신학교 기관지인 심해에 게재한 것이 최초인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니체를 언급하는 최초의 이 글은 이후 일본에서 니체의 사상을 어떻게 수용하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변화를 관찰토록 하는데, 톨스토이 사상과 비교의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또한 도덕 사상이라는 틀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며, 특히 이 최초의 관점이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큼 전환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니시는 문학비평의 권위자인 모스크바 대학교 지도교수인 니콜라이 그롯의 제자이자 톨스토이와 도덕경을 함께 번역하며 교류를 쌓아갔던 인물이다.

 

한편 1890년대의 러시아는 주도적 이념적 경향이 없어진 이데올로기 진공상태였기에 러시아의 정치적 사회적 개혁의 필요성에 답하기 위한 정신적 갈망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이타주의적 도덕비판에 대해 당대의 지식층은 부정적 태도가 주류였으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그롯이라 할 수 있다. 주류 지식층의 이러한 부정적 니체의 시각 속에서 철학자 프레오브라젠스키1892<프리드리히 니체: 이타주의 도덕 비판>이라는 논문에서 상대주의적 가치로서의 도덕과 이타주의 내면에 숨겨진 허위를 주장한 니체에 공감하면서 니체로부터 새로운 이상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것으로 촉발된 주류의 비판론 중 하나가 그롯이 쓴 <우리시대의 도덕적 이상들: 프리드리히 니체와 레프 톨스토이>, 여기에서 그는 두 사상가를 영적 적대자로 비교하며 니체를 부도덕의 사도, 금욕주의와 이타주의의 기독교적 가치를 전복시키는 악마로 묘사한다. 반면 톨스토이는 종교적 가치의 담지자이며 도덕적 이상의 최종적 승리를 위한 도덕적 세계관의 대표자로 제시한다. 즉 고니시가 최초로 일본에 소개한 니체는 이러한 그롯의 도덕적 가치관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의 필터를 낀 니체, 부정적 니체, 톨스토이의 도덕적 이상주의를 내세우기 위한 반면교사로서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니시는 니체와 톨스토이를 도덕 개혁론자로 공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욕망에 대한 견해차이가 도덕과 종교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낳게 되었음을 파악하고 새로운 세계를 위해 도덕 개량정신의 개량을 주장했다. 특히 <유럽에서의 덕의 사상의 두 대표자>라는 논문에서 니체의 글을 길게 인용하며, ‘인간 개량과 같은 우승열패를 인정하고 강자를 두둔하는 초인의 필요성과 톨스토이의 편파적 유심론과의 균형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상의 최초 수용기인 고니시 이후에 니체의 일본 수용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로서 도쿄제국대학 철학과 출신의 다카야마 조규니체를 위대한 문명비평가로 평가하면서 강대한 개인의 의지의 힘이 드러나는 곳에는 반드시 영원한 생명이 있다.”, 개인주의와 생명주의를 결부시키며 미적 생활론이라는 본능의 만족이 곧 미적 생활이라며 일본의 제국주의적 사상의 기틀을 제공한다.

 

조규의 이러한 사상적 토대가 소위 일본주의로 불리는 야마토(大和) 민족의 포부 및 이상을 표명하는 일본의 국민적 실행 도덕의 원리 기초다. 이것은 후일 사회진화론과 결합하여 윤리적 제국주의 이론으로 변질되고, 일본 제국주의의 양면성, 즉 사회적 이중성이라는 기묘한 사회공익론을 낳는다. 중요한 것은 국가이고 국가의 이익이 합치되는 행위만이 선이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국의 이익을 희생시켜도 된다는 제국주의 정당론으로 나아간다. 세계 문명 및 정치 참여를 위해서 타국을 점령하는 것은 침략적 의미가 아니라 문명화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일본은 서구의 침략적 팽창주의와는 다른 아세아 국가들의 개혁 유도 촉진을 돕는 자연적 팽창주의라고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주장하기도 한다.

 

니체가 제국주의 윤리의 사상 기반을 제공한 사상가로 변질되어 수용된 것이다. 수용 초기에는 반도덕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어 부정적 이미지를 씌우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로 지역 패권자임을 인식하기 무섭게 낙인은 찬양으로 급속하게 전환된다. 사실 니체 사상의 실체를 수용한 것이라기보다는 텍스트의 수많은 문장과 논의에서 하나의 논리적 틀을 길어오는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라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일본인 개인의 자유와 인권 보장을 니체로부터 배우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아시아 패권 장악이라는 침략주의적 야만성을 정당화하는 논리 또한 니체를 기반하고 있는 일본의 이중성을 바라보면서 오늘 니체의 철학을 읽는 나는 당대 일본인들의 실로 어처구니없는 그 교활한 무지의 역사와 정신에 헛웃음만을 짓는다.


2. 중국의 니체 수용

 

중국의 니체 수용의 과정에서는 독특한 점이 발견되는데, 니체 당사자도 부정했고, ‘디르크 존슨과 같은 니체 연구자들이 진화론과의 친화성을 부정했음에도 이에 못지않은 진화론과 니체의 친연성에 대한 연구가 수용 초기 중국학자들에게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21세기 사람으로서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점이다.

 

서구 열강에 굴욕적인 개항과 조계와 같은 조차지를 내놓아야 하는 치욕의 삶을 살아가야 했던 중국인이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이론적 수단이 된 헉슬리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열광했다는 것이다. 국가의 집단적 힘을 기르기 위해서 그 구성원인 개인, 국민의 소양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관점인데, 수천 년 노예로 길들여져 온 의존과 복종의 정신을 깨부수고 스스로 자유로운 존재임을 인식하는 자유의지의 존재로 부상해야 한다는 사고다. 사회진화론자인 량치차오의 민주주의 실현은 부정하면서 국민의 계몽, 경쟁을 통한 사회개량을 주창했던 엉터리 같은 이들 초기의 과정은 여기서 줄이기로 하고, 1907년 니체의 견해를 직간접적으로 시사한 루쉰(魯迅)’의 최초의 논문을 통해 니체의 중국 현지화와 이론적 해석에 관심을 집중해보도록 하겠다.

 

루쉰은 량치차오의 사회진화론 사상을 반성적으로 비판하면서, 인간적 각성이 없으면 중국이 일본과 같은 강대국이 되더라도 수성(獸性)의 일면을 벗어날 수 없다.”, 개인의 주체성과 의지 확립, 정신적 인간의 세움(立人)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니체의 초인 사상에 공감을 표시했다. 다시 말해 루쉰은 니체를 통해 국민정신 개조의 사상자원을 얻어 중국 국민성 개조라는 새로운 과제를 열었다.

 

중국 역사의 대변혁의 시기인 1915년부터 시작된 신문화운동으로 시작된 5.4운동 전후의 시기인 1918년부터 1925년은 반봉건, 반전통의 목소리와 함께 국민개조 운동이 본격화된 시기라 할 수 있다. 시대의 각성자, 니체의 초인을 닮은 광인일기에서부터 루쉰은 니체의 패턴을 그의 작품의 중심축으로 하였다. 중국 전통 가치의 죽음 선언, 광인일기의 문장에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서문 3절의 문장은 물론 많은 구절들이 흡사할 만큼 모든 가치의 재평가, 의식의 완전한 전환, 국민의 후진성이라는 말인(末人)의 전형성을 비판하며 국민의 무감각과 무지를 비판했다. 이밖에도 들풀(草野)은 판박이처럼 중국화 된 차라투스트라로 불릴 만큼 니체의 정신적 기질을 통해 니체 철학사상을 구국과 존망을 위한 중국 사회의 실천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대중이 읽어야 하는 소설 작품이 읽히지 않았다. 중국 인민은 전통과 노예적 삶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았을뿐더러 자신들의 가치 재평가와 전통에 반항하는 사상, 고독하고 절망적인 정서로 그득한 소설은 대중이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더구나 마오둔(茅盾)’ 같은 기성의 작가는 광인일기기발하고 괴팍한것이라며 폄훼하기까지 했다. 루쉰의 니체 수용과 대중 전파는 일본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임을 알 수 있다. 필터를 낀 제2, 3의 왜곡된 이해가 아니라 제1,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독자적 수용이라는 점이다.


 



루쉰의 니체 패턴을 거부하던 초기의 중국 대중과 달리 점차 북경대를 비롯한 대학생, 해외 유학 엘리트, 지방 청년층에까지 독자층이 점차 확대되면서 루쉰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높아지고, 1923년 이후 루쉰은 경전적 인물로 자리잡기에 이른다. 루쉰의 책 두 가지만 있으면 서점을 열어도 얼마든지 장사가 된다.”고 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커지면서 중국의 니체 루쉰이라는 인식이 형성되고, 새로운 가치와 문화 개혁에 대한 대중적 이해가 넓어졌다는 점이다.

 

이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주목하게 하는 부분인데, 일본의 수용이 신학과 철학계로부터의 수용이었는데 반해, 중국은 문학의 대중화를 통한 인식의 대중적 개혁이었다는 점이다. 일본은 엘리트 지배계층의 사회 국가적 차원의 이념적 도구였다는 점에서 위에서 아래로의 수직적 주입과정이라 하겠지만 중국은 아래인 대중의 점진적 수평적 확산이라는 점에서 그 수용의 과정은 판이하게 다르다 할 수 있으며, 이는 니체의 독법에 깃든 이해와 어떤 관계가 있음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한다.

 

니체의 중국화 확장에 루쉰만큼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 니체의 중국화 과정에 획기적 역할을 한 현대문학의 대가인 선총원(沈從文)’이다. 루쉰과 접촉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자신의 사상을 니체의 개인 중심의 과대고립주의라 하였으며, 末人들의 우매함과 봉건적 예교에 대한 본질적 거부와 비판이었다. 그는 중국인의 병(中國人的病)에서 중국인의 병은 봉건적 전제와 봉건문화의 통치하에서 자유로운 사색, 자유로운 연구, 자유로운 창조의 주체 정신이 결여된 것이라며, 무지와 미신에 매여 있는 인민의 삶을 비판했다.

 

선총원은 사회 공리적 측면에서의 니체의 수용을 예술적 심미와 생명관으로 니체를 발전, 중국화를 추진한 인물이다. 어떤 의미에서 중국은 일본의 그것과는 다른 진정한 니체 정신의 폭넓고 깊은 이해에 기반을 둔 점진적 평등적 확산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3. 식민지 조선의 니체 수용

 

20세기 전후의 시기란 유럽은 물론 지구촌 전체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서구는 산업사회로의 전환이후 야기된 물질문명에 대한 회의와 자본적 질서의 주도자로서 소비기지의 개척이라는 제국주의적 야욕으로 세계적 갈등을 만들어내는 장본인이었으며, 동북아 지역은 이러한 도전에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던 혼돈의 시기였다.

 

또한 메이지 유신을 통한 근대화와 산업화와 함께 지역 팽창의 욕망으로 부풀었던 일본의 주도적 세계질서의 참여나, 오랜 전통적 질서와의 고별과 새로운 질서의 수립을 스스로 사유할 수 있었던 중국과는 달리 식민지 조선은 그 어떠한 질서에도 주체적으로 참여, 사유할 수 없었던 한계를 지닌 소외된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은 갑오경장, 동학혁명 등을 겪으며 민권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시야가 싹트기 시작했으며, 일본에 의한 강제병합에 의한 민족적 반성의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인민 개체의 관점에서 일본에 의해 간접적으로 유입된 근대화와 이를 산업화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물질자본의 수용에 노출되어 착취되는 현실을 모를 수는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니체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당대의 일본과 중국과 나란히 논의한다는 것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하겠다.

 

이처럼 식민지 조선에 니체가 처음 소개된 것도 제국주의 윤리라는 일본의 극우 국수주의자인 우키타 가즈타미(浮田和民)’가 쓴 <윤리총화>4개장이 번역되어 1909서북학회월보에 소개된 것이 처음이지만 이것이 어떤 반향을 가져온 것인지 이 책은 설명하고 있지 않다. 아마 기록의 의미 이상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지식계층의 논의가 시작된 것은 일본 유학생들이 발간한 학지광(學之光)1914최승구사회진화론의 맥락과 생명주의와 문화주의의 영향이 중층으로 얽힌 식민지 지식인 문제를 드러낸 것이 처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후 재일유학생인 주종건, 현상윤, 이광수, 전영택 등 다섯 명이 니체를 논의한 것이 전부였던 모양이다. 우생학적 인종주의 및 제국주의 합리화 논리의 기반인 사회진화론을 맥락으로 했다는 것도 이들이 일본 지식계층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음의 반증일 것이며, 고작 그것으로부터 침략적 서양에 저항하기 위해 강자가 되기 위한 실력 양성이었다는 논의도 사실 실소를 멈추지 못하게 한다. 어쩌면 당시 일본의 평범한 대중들이 지나며 주절거리는 일반적 목소리 이상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가?

 

더구나 이들의 자각이란 것도 고작 이쿠다 조코(生田長江)’가 쓴 근대사상 16(近代思想16)이라는 루소, 니체, 토스토옙스키, 입센, 다윈, 졸라, 플로베르 등의 사상을 소개한 책에 기반한 조잡한 제3차 번안된 인식에 불과했으며, 일본에 수용된 서양 사상에 대한 이해가 전부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에는 최승구의 발표된 글을 통해 자아의 혁명 가능성 모색이라며 식민지 청년의 저항의식을 과장하여 소개하고 있지만, 일본이 러시아 필터를 낀 니체를 이해하였듯이 일본의 필터를 낀 니체와 서구 사상의 이해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현상윤의 새로 태어나기 위한 조선의 강력주의 주장이나 주종건의 니체적 개체의 자아실현, 이광수의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이 주창한 국가주의적 사회진화론에 토대를 둔 약육강식의 원칙에 대한 운영의 논의처럼 왜곡된 니체의 수용, 즉 강자의 특권에 대한 경도는 이후 이들의 행보가 반민족적인 민족 배신으로 드러나듯 식민지 조선의 수용이라 할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식민지 조선이 아닌 일본 본토에 있는 유학생의 지식인 흉내에 불과한 것이라 폄훼하는 것이 그리 잘못된 인식은 아니지 않겠는가? 책은 이들의 글을 기반으로 식민지 청년들의 문제인식이라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과장된 수사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된다.

 

오늘날에도 니체는 이러한 곡해와 왜곡, 니체의 원서(혹은 자기말로 완역된 1차 번역서 포함)를 읽어보지도 못하고 남의 말을 귀동냥한 것으로 마치 니체를 아는 것처럼 주절거리는 사람들의 오류가 그대로 전해지는 형국을 무수히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무지를 위장한 겉핥기식 이해가 어떤 사상의 수용으로 이해되는 것은 냉정한 인식이라 할 수 없지 않을까? 동북아 3개국이 하나의 사상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역사적 과정을 한 권의 책을 통해 탐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이 책의 저자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쉬운 것은 저자들도 언급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자료 조사와 연구가 아직 일천한 단계에 머물러 중국과 일본의 수용사에 비교할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우리는 정신적 결핍에 놓여있다. 마치 1890년대의 러시아가 이념적 진공상태에 놓여 거듭되는 반란과 혁명으로 인민이 신음하던 시기와 겹치는 것은 나만의 환각인 것일까? 철학 부재의 시대, 사상 결여의 시대, 정치리더와 그 일꾼들의 사상적 무지는 마치 나침반을 잃은 배의 좌초를 예견케 하듯 정말 우려스럽기만 하다. 일본의 수용, 중국의 수용에서 우리는 그네들이 자신들의 윤리적 가치를 정립하기 위해 어떠한 과정을 겪었는지, 그네들이 어떤 지적 노력에 참여했는지는 아마 바로 지금 중요한 시사점이 될 것이다.

 

동일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루쉰이 니체의 영원회귀를 어떻게 그의 문학에 남겨놓았는지, 그것이 중국 인민대중의 정신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루쉰 전집을 다시 책장에서 끄집어낸다. 그리고 번역본이 거의 없다시피한 선총원의 유일한 단편집을 읽는다. 니체의 초인과 새로운 윤리를 어떻게 구현하려 하고 있는지. 몇 차례 이 저술 동북아, 니체를 만나다를 샅샅이 읽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 같다. 뜻 깊은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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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3-01-15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선총원은 다작을 했다고 들었는데 번역서가 한 권이라니, 뭔가 이유가 있을까 싶네요.

안녕하세요? 읽
고 가다가, 인사 남깁니다.
일요일 오후 평안하게 잘 보내시길 바래요.

필리아 2023-01-15 17:53   좋아요 1 | URL
네, 다작을 하셨는데 오랜동안 금서로 묶여있었던 모양 이구요, 국내에서도 그리 주목하지 못했던 듯합니다. 주말 밤 평안히 보내시고, 즐거운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초원 2023-01-15 21:0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금서로 묶였던 일이야 그랬지 싶지만, 국내에서는 왜 그럴까요. 루쉰의 기회만큼은 아니어도 더 번역되길 바라봅니다.
저도 검색해보니<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와 <자연의 아들> 자서전 밖에 없네요.

매번 잘 읽고 있습니다. 필리아님 도 즐거운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