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물 검역소
강지영 지음 / 시작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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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하고 유쾌한 소설이다. 무엇보다 재미로 치자면 둘째가라면 조금 억울하다 할 만한 이야기다. 역사기록으로 추정하면 주인공 함복배가 출생한 시기는 1609년이 되고 벨테브레(박연)의 표류시점인 1628년과 소설이 끝나는 시기가 하멜일행이 또다시 제주에 표류하는 1653년이니 조선 중기 45년간의 세월을 담고 있다 할 수 있다.

배내 벙어리인줄로만 알았던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그저 울고 싶지 않았기에 울지 않았고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말하지 않았을 뿐이라며, 열 살이 되던 어느 날 문득 말문을 틔우는 기이한 주인공의 모습처럼,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불과 몇 쪽에 펼쳐지는 반전부터가 이 작품이 예사스럽지 않음을 암시한다.
한양 과거시험장에서의 자리다툼의 해프닝을 시작으로 말단으로 급제하여 제주도 ‘신문물검역소’라는 희한한 이름의 관청으로 부임하는 과정도 어설프기 짝이 없어 주인공 함복배의 인물됨을 한 눈에 알아버리게 한다.

재미의 삼박자는 바로 이 우스꽝스런 명칭의 ‘신문물검역소’와 표류한 서양인 벨테브레(박연)를 중심으로 한, 신문명에 대한 해학이 하나이고, 주인공과 제주관찰사 이상도의 여식 ‘연지’와의 러브라인, 그리고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의외성의 소재로 구성되어있다 할 수 있겠다.
어수룩하기 그지없는 약관(弱冠)의 신문물검역소장 함복배의 좌충우돌하는 인생기록이기도 하지만, 양반과 상놈, 지위의 귀천, 인종의 배타 등을 모두 불식시켜버리는 그의 포용력에서 작가가 말하고픈 인본주의와 평등을 읽을 수도 있다.
그리고 타자, 코길이에서부터 미호, 박연에 이르는 연민과 사랑의 의식은 비록 모두에게서 이해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 자라나는 관심과 이해가 주변의 사람들을,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서사구조의 중추가 되는 혼례를 앞둔 처녀들만 살해되는 연쇄적인 살인사건은 등장인물들 모두를 범인으로 의심케 할 정도로 치밀한 크라임스릴러로 변신케 한다. 또한 21세기 오늘에도 경기(驚氣)를 할 남녀추니가 등장하는가하면 ‘기방 창(倡)’에서 벌어지는 반라의 정사와 마조히즘은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흡입해대는 강한 추동력으로 작동한다.  또한 불아자(不峩者), 곤도미(困導敉), 만앙경(曼坱景)하는 신문물의 그럴듯한 탐색과 함복배의 머리에 갓 대신 씌워진 불아자에서 조선시대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흥겨운 작업 중 하나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흥겨움과 기이함이 발산하는 매혹, 청춘남녀의 그 기묘한 줄다리기식 사랑, 그리고 욕망의 끝이 보여주는 그 적나라한 범죄의 세상까지 아우르면서 우리를 17세기 조선의 제주로 상상력을 이끈다. 능수능란한 작가다. 코믹과 멜로, 서스펜스를 자유자재로 버무려내는 작가의 스토리역량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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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죄인들 문지 푸른 문학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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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질긴 게 사람 목숨이다. 라는 어린 시절 어른들이 혀를 차대며 하던 말이 떠오른다. 한결같이 궁상스럽고 구질구질하게 연명하는 이들이 그렇게 끈질기게 살아갈 이유가 뭐가 있는지 끊어질듯 가늘게 그러나 오래도록 살았다. 아직은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사람의 사랑에 대해 알지 못했던, 그리고 미숙함과 무지함으로 그 구차한 삶을 그만 청산하지 못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반백년을 넘어서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욱 두렵고 싫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와 나란히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같은 크기만큼 깊어진 것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작품의 화자(話者)인 일곱 살 계집아이‘동화(冬花)’의 말처럼 “내가 사람이라는 것이 징글징글할 만큼 질긴 목숨을 타고났다는 것이, 나는 괜히 기분 나쁘고 싫기만 했다.”는 그 생명력이 사실 가증스럽기만 할 때가 있다.
    

이 처럼 찌들고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로 부터도 소외된 움막집과 축사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 모두가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모습이란 것을 어느 때 부터인가 알게 되었고, 아무리 닦아도 흐려터지기만 한‘거울’처럼 사람이란 비밀스럽고 의뭉스러우며 위태로운 존재라는 것도 알아버렸다.

곁에 있어주어야 할 것만 같은 사람이었기에, 그리고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아빠와 함께했다는 엄마의 고백을 들으며 자란 어린아이의 불안이 느껴진다. 훌쩍 떠나버린 엄마, 아파트를 지으러 떠났다는 아빠가 맡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할머니 밑에서 살아가는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생존의 방식이란 아마 독한 년이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골방에 누워만 있는 전신불수의 할아버지, 외팔이 방앗간 할마, 초라한 구멍가게의 하얀 백태가 낀 눈을 한 옥천 할마, 움막에 살며 노예처럼 담배 잎을 수확하는 간질병 장대아저씨, 아비도 없는 아이를 배어 학교에서 쫓겨나 마을로 돌아온 정수언니, 아들을 먼저 보내고 실성한 인자 아줌마, 양은대야 공장장하고 바람나 집을 나간 춘자 고모, 얼굴이 사란 진 것만 같은 태식이 삼촌의 아내...그리고 축사에 사는 양은대야 공장의 비밀스런 노동자들....
“넌 얼굴이 못생겨서 공순이나 되어야겠구나.”하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하는 아이에게 세상의 저주 말고 무엇이 남아있을 수 있을까.

진정“천년만년 재수 없게”라는 말이 찰싹 들러붙어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그런 사람들만 무성하다. 그러나 모질게도 이들의 구질구질한 삶은 길기기만 하다. 그러니 아무리 핥아대도 사라지지 않는 수저에 새겨진 목숨‘수(壽)’자가 왜 혐오스럽지 않았을까. 온통 백랍을 칠해 놓은 듯 흐려터지기만 한 마을의 거울들이 사람들의 그 의뭉함과 겹쳐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불가항력의 세상인 듯만 하다. 그럼에도 우린 그네들 속에서 그네들과 울고 웃으며, 세월을 이겨나간다. 어느 순간 뿌옇기만 했던 거울이 선명하게 보일 때가 오듯이.
“살고 보니 백년이 하루다...백년이 하루다...”하는 옥천 할마의 마지막 운명의 한마디처럼.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던 질기디 질긴 사람의 목숨은 떠나간다.

 

엄동설한 속에 피어난 꽃, 동화의 꾸밈없는 시선과 우리네 어느 고향의 언어로 소박하게 빚어낸 이 작품은 그렇게 우리들의 가슴에 조용히 들어앉는다. 가난을 비참하지만은 않게, 음흉한 사람의 속을 사악하지만은 않게, 기형적인 사람들을 마냥 기이하지만은 않게 하는 평온하고 아련한 추억의 이야기가 되어 들려온다. 그래 마냥 지속 될 것만 같던 상처와 불운, 좌절과 절망감도 어느 순간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우린 그래서 살아가는 것일 게다. 모처럼 번잡한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는 기분을 갖는다. 작가의 사랑이 그득 배어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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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선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1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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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된 지 160년이 지난, 이젠 낡은 이데올로기로 간주되는 『공산당 선언』을 다시금 손에 들게 된 것은 ‘칼 포퍼’의 저술 『All life is problem solving』에서‘마르크스’에 대해 냉소주의라는 비난을 우연히 읽게 된 것이 계기라 할 수 있다. ‘포퍼’의 미국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무한한 찬송가에는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낙관주의에 기인한다. 더구나 인류사회에 마르크스가 말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는 존재한 적이 없다는 그의 확신에 찬 1992년 독일‘슈피겔’지와의 인터뷰 내용은 이 땅의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이에게서 광기를 보게 했다.

설혹 이미 지나간 과거사가 되어버린, 소련 붕괴와 동구의 몰락이‘공산주의’의 실패를 목격하게 하였지만, 그것이 곧 자본주의의 완결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현실적 문제를 은폐하는 수많은 기제 속에서 우리의 인간성을 여전히 훼손하는 문제들을 함축하고”있음은 주지의 사실이 아닌가. 그렇다고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르크스가 자본주의가 내재하고 있는 태생적인 관계에 대한 문제제기의 방법을 가르쳐 주리라는 것이고, ‘비판’의 방향이 될 수 있는 사상으로서 긴요한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실 마르크스의 예언처럼 자본주의가 자기모순에 의한 파국을 맞기는커녕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정치경제체제로 확산되었음을 부인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인류가 그 이상의 체제를 발견해 내지 못하고, 또한 실현시킬만한 역량을 가지지 못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170쪽 분량의 이 작은 책자는‘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과,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주의의 원칙』, 그리고 『공산당 선언』의 중판(重版) 및 유럽 각국에 출간된 번역본에 게재된 그들의 서문, 역자인 ‘이진우’박사의「해제」로 구성되어 있다.
『공산당 선언』의 핵심골자는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그 유명한 첫 문장과, ‘사적 소유의 폐지’라는 것처럼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내용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자본의 논리로 야기되는 인간소외에 대한 고뇌의 흔적과 인간해방의 문제를 얼마나 철저하게 사유하고 있는가를 확인 할 수 있다.

한편, 권말에 수록된 이진우 박사의「해제」는 마르크스의 생애에서부터, 헤겔을 근원으로 하는 그의 철학적 사상적 기원, 공산주의의 이념과 시민사회의 해부, 공산주의선언의 현대적 의미에 이르는 탁월한 논평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적 이해를 심화시켜준다.
산업화로 인한 자본주의 도래가 경제적 효용은 증진시켰으나 인간의 불평등을 해소시키지는 못했다. 오늘의 우리사회에서 빚어지는 계층 간의 위화는 물론, ‘부르디외’의 지적처럼 사회전반의 구별 짓기는 계속되고 있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러한 보이지 않는 차별에 놓여있 다. 시장(market)의 노예, 유행(mode)의 노예, 순간적 쾌락(moment)의 노예 말이다. 자신들의 실존 근거가 이미 자신들에게 있지 않고 남에게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이러한 근원적인‘사회적 불평등’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포퍼’의 낙관은 신빙성 있는 예언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이 책자는 왜곡된 인간, 억압받는 인간, 불의를 당하는 인간, 즉 무(無)의 존재로 전락한 오늘의 우리들에게 현실 속에서 정의로운 가치와 이념을 생각게 하는 하나의 사상적 기초가 되는데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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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디자인 산책>을 리뷰해주세요.
핀란드 디자인 산책 디자인 산책 시리즈 1
안애경 지음 / 나무수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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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쳐들면 마주하는 푸른 어둠이 내린 헬싱키의 겨울 산책길이 몽환적 매력으로 다가온다. 검은 어둠을 비추는 헬싱키시립극장, 핀란디아 홀의 푸르고 차가운 빛이 절제된 아름다움, 세상과 그대로 어우러져 두드러지지 않은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얼음의 투명함이 발하는 시린 푸른빛에서 자연에 대한 핀란드 사람들의 경외와 겸허함을 읽는다면, 그리고 자연과 닮은, 아니 자연과의 일체화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가진 그네들을 발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일 정도이다.

핀란드의 디자인은 이처럼 자연의 모습이고, 자연을 소재로 하며,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겸손함을 담고 있다. 책을 장식하고 있는 단순함과 투명함 속에 그 절제된 미를 드러내는 사진들이 고독안에서 자신의 열정을 이끄는 저자의 디자인 산책길과 함께 무언의 하모니를 이루어 낸다.
공공건축물, 도시계획, 작은 찻잔, 스탠드를 비롯한 소품에서 패션의류, 그리고 농기구 등 일상의 재료들에 이르기까지 물질의 낭비, 자연의 남용, 과장된 현란함과 허영이 배제된 자연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교감, 진중함을 품고 있는 핀란드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절제된 침묵’속에 담긴 그 우아한 아름다움이 결코 화려하지 않음에도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자연의 얼굴, 바로 인간 본연의 삶이 스며있기 때문일까?  고목(枯木)을 활용한 조각, 버려진 의류를 활용하여 멋진 빈티지 의류로 재탄생시키고, 옛 건물, 작은 설치물 하나에도 인간과 자연의 조화, 문화와 철학을 담아내는 그들의 정신에서 그 어느 곳보다 세련된 미(美)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리네들이 쏟아내는 과잉의 물질과 욕망, 무분별이란 천박함과 대조되어 더욱 절실한 공감이 된다.
자연을 넘지 않는 핀란드인이 만들어내는 세상에서 저자는 인간 삶의 ‘그러해야 함’의 방편을 찾아낸 것 같다. “물질보다는 정신과 마음을 우선으로 하는 풍토를 가진 문화”그래서 그네들이 표현하는 디자인의 내면에 더더욱 마음이 끌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도시 마스터플랜을 재정비하는 데만 30년”, 도시의 변화는 다음 세대를 위한 변화라는 그들의 신중함과, 무엇이든 시작하기 전에 배경에 대한 충분한 검토를 거친 후 그 이유가 타당하고 합리적이라는 판단이 서야 비로소 다음단계로 이행한다는 저자의 설명에서, 그들은 “도시계획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풍부한 문화와 철학을 담아내고”있음을 본다.
“인간적인 도시의 모습, 인간의 삶이 담긴 도시, 도시계획이란 무언가를 채워놓은 것이 아니라 시민을 위해서 어딘가를 어떻게 비워 두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판단하는 일”이라는 그들의 생각이 우리네의 경제적 효용 우선이라는 탐욕의 기승과 비교되어 더더욱 부끄럽고 민망함이 밀려들게 한다.

또한 자연과 벗하며 노동의 대가를 스스로 확인하며 살아가는 그네들의 안목과, 비움의 시간으로서 손작업과 노동의 시간을 즐기는 등불하나 없는 원시의 여름휴가 생활이 마냥 부러워진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만이 흐르고, 겉모습으로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모두 평등하고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그들의 숭고한 정신이 책을 수놓는다.
광화문 도로 한복판에 나무와 녹지를 몰아내고 어색한 사적 놀이터를 만드는 한국인의 경솔함과 천박함이 더더욱 “도시의 혼돈과 혼돈의 질서”를 부추긴다. 결코 겸손과 거리가 먼 이 도시 디자인과 도로 한복판으로 넘쳐흐르는 물과 그곳에서 사적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은 대체 무엇일까? 하는 저자의 당혹감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핀란드의 디자인이 내면화하고 있는 자연환경에서 가능한 생각과 실천의 내용을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담아내고 있다. 오래된 것을 새것으로 바꾸기 보다는 그 기본의 유지에 더 고민하고, 격리와 어울림의 자연스런 조화를 만들어내는, 그리고 작은 빛으로도 빛나는 어둠의 존재, 자연의 존재, 곧 절제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생각게 하는 지혜로운 성찰과 사색의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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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과학과 사회 5
파스칼 피크 외 지음, 배영란 옮김 / 알마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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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앞서 이 질문을 우리가 사유하여야 할 가치란 무엇인가? 가 외려 보다 근원적인 질문처럼 여겨진다. 생물학적, 고인류학적, 철학적 답변 등 이미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무수한 변주곡들이 존재 할 것이다. 이 난해한 정체성을 규명하는 것이 인간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어떠한 효용이 있기는 한 것인가.
오늘의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자연의 내부에 깊숙이 들어가 그 근원을 조작하고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초래하는 우려할 만한 징후들에 불안과 공포가 섞인 경고와 자성의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연의 한 부분에 불과한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대한 인식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결국 이것은 인간이 자연과 차별되는 무엇을 지닌 예외적 존재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질문이 되고,‘인간은 무엇인가?’하는 동일한 질문으로 회귀하게 된다.
그렇다. 이 질문은 인간 삶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의 과학적 오만과 사상적 기만이 과연 타당성이 있는가하는 검토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이 저작에 수록된 생물학자, 고인류학자, 철학자 3인이 이 본원적 질문에 가지는 답변은 그래서 인류의 행위에 대한 나름의 가치기준이 될 수 있고, 향후의 행보에 유용한 좌표로서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생물학자는 인간을 무엇이라고 정의할까? 신경생물학자인 ‘장디디에 뱅상’은 뜻밖의 답을 하고 있다. 독립영양생물과 종속영양생물로 분류되는 자연계에 ‘인류영양생물’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추가를 주장한다. 모든 자연계의 생물과 달리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양분을 얻고 산다.”는 의미에서 별도의 분류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일견 공감할 수 있지만, 이러한 세분을 하게 되면 여타 생물들의 독특한 특성을 전부 반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마 지금의 분류체계는 붕괴되고 말지 않을까. 왠지 인간의 차별성에만 시선을 맞춘 석연찮은 오만함만 느껴진다.
그리곤 인간의 성장 특성 중 대량의 뉴런 생산과 시냅스 생성을 통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예로부터 가장 견고한 기관인‘프시케(psyche;영혼)’를 가진 유일한 동물이란 결론을 내린다. 영혼?, 과학과는 거리가 먼 이 추상적 언어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한편, 또 한사람의 자연과학자인, 고인류학자인‘파스칼 피크’는 인간의 기원에 관한 문제로부터 자연계에서의 인간의 지위를 성찰한다. 특히 신체적 측면의 진화인 '사람화(hominisation)'를 통한 인류기원에 대한 탐색을 진행하며, 700만 년 전 아프리카 어딘가에 살았던 우리 진화형제들의 마지막 공통조상에 대한 불확실성을 쫒고, ‘인간이 그렇게 독보적 존재는 아니다.’라고 결론짓는다. 인간만의 독특한 행동양식이라는 전쟁, 성적금지, 공격과 화해, 정치,도덕,거짓말, 자의식, 웃음과 울음...은 비교동물행동학의 연구결과 다른 영장류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인간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존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처럼 두 자연과학자의 인간의 독보적 존재성에 대한 상반된 견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다지 명쾌한 대답으로 다가오지 않으며,‘인간의 미래 지속성’에 대해 오늘의 우리들 태도를 결정하는데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나 이 저작물의 가치를 격상시키는 현대 인식론의 거두인‘미셸 세르’의 담론에 이르면 많은 비판적 여지를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탁월한 통찰력에 기인하는 인간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 이 난해한 질문의 근원에 접근하고 있음을 발견케 된다.

그는 두 자연과학자들의 접근과 같은 엄청나게 긴 특정 시간동안 차례로 나타난 우발적 정황들에 관해 언급하는 거대담론은 지양(止揚)한다. 실제 진행되어왔던, 그리고 진행되고 있는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사람화에 주목한다.
그는 우선 “물질이란 무엇인가?”고 묻는다. 이에 대해 물질(원자에너지)의 발견, 대량살상무기, 인류를 죽음의 공포에 몰아넣는 인간 자신의 재능과 의지가 초래한 인류와 문명의 죽음이라는 위험에 빠진 지구에서 인간은 멸종했는가? 라는 반문으로 물질의 발견을 해낸 인간의 탁월성을 뚝뚝 떨어뜨린다. 이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보건 환경, 질병치료의 개선 등 죽음에의 종속성을 넘어 존재와 출생에 변화”를 만들어내고, 고전적 의미의 진화처럼 자연계에 어떠한 힘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연의 변이를 제어하는 인간의 현 모습을 투영한다. 인간은 스스로 “특수한 생태적 환경을 벗어나 포괄적인 공간에 진입”하였다는 것이다. 즉, 끈질긴 진화와 길고긴 적응의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인간은 적응의 시간을 단축하여 시간의 층위를 환상적으로 압축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히 이 저작의 꽃이랄 수 있는 기막힌 사례(事例)적 질문이 던져지는데, “인간은 왜 옷을 입을까?”하는 것이다. 수치심의 회피?, 약점의 커버? ... 등등 수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인간은 단지 “옷을 벗는 것의 기이한 이점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빨리 벗고 빨리 입기 위해 옷을 입는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독보성에 있어서 획기적인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동물의 표피나 털과 같은 고집스런 해법이 아니라‘착용과 해체’의 재량권이라는 자연의 보수성을 초월하는 고도의 적응력이며, 동물들에게 지난한 시간을 요구하는‘기관의 변화’를 ‘도구’라는‘착탈식 기관’으로 변경한 것이다.
바로변화와 시간’에 주목한 인간은 도구라는 기술을 통해 죽음과 시간의 엄청난 절약을 이룩하였으며, 궁극에는 “자연의 시간을 사용하고 자연의 변화에 복종하면서‘탄생(nature)'을 지휘”하게 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급기야“인간은 수 십 억년 동안 인간과 무관하게 행해진 우발적 진화의 주요요소를 이성과 증가의 방식으로 다스리고”, 기술적 혁신이란 짧은 시간에 압축해내는 능력을 보여준다. 이제 인간은 “시간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었으며, 자신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러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들의 기나긴 기억 속으로 들어가고, 자신들의 본성(nature)을 간파하곤, 자신들의 문화(culture)를 만들어 낸다. 그러니 “인간은 자가(스스로) 진화의 길을 가는 생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 묻는다.
인간은 셀 수 없이 많은 급격한 적응과정을 자신의 용도에 맞게 압축하였으며, 이런 “인간은 그 자신의 원인”이 되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현재를 만들고, 자신의 변화에 맞서 싸워왔으며, 자연의 진화와 적응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자신들만의 독특한 진화를 지속하여 우주의 시간과 자신들의 역사를 공존시켜왔다. 겹겹이 집어넣은 시간의 압축은 기나긴 체험시간을 절약해 주었으며, “변이의 체험 시간을 영(Zero)”으로 만들어낸 인간은 자연과 슬기로운 계약을 해 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연계에서 유일하게 시간의 압축을 이해하고 착탈식 도구라는 독특한 진화방식으로 자신들의 몸을 해방시킨 생물이며, 이젠 그 자신이 자신의 원인이 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옳다면 인류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삶의 지속성을 가능케 할 것만 같다. 그러나 과연 2500여년에 불과한 인간의 이성을 신뢰할 만한 충분한 시간의 탐색이라 할 수 있을까?  아무튼‘미셸 세르’의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연과 인간의‘시간’에 주목한 그의 통찰력은 새로운 상상력과 지성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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