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는 테크놀로지 - 과학기술학자들 '기술'을 성찰하다
손화철 외 지음 / 동아시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오늘의 우리들은 과학기술의 존재 없이 밥알 한 톨이라도 먹을 수 있을까? ‘과학기술’에 대한 어떠한 인식도 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이처럼 그 존재 없이는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 바로 기술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어느덧 공기와 같은 인간존재의‘배경’이 되어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긍정적 혜택만 주는 것은 아니며, 생명의료 윤리의 문제에서부터 인간성의 훼손, 기술에의 종속이라는 자유의 박탈 등 부정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독특하게도『‘욕망하는’테크놀로지』라는 제목처럼, 과학기술이 마치 생명체라고 주장하는 듯한, 이 저술을 구성하는 28편의 과학기술시론은 인간과 기술, 기술과 사회, 기술의 현재와 미래의 관계라는 성찰을 통해 과학기술의 정체와 특징을 탁월한 이론과 예화로 전달해 주고 있다.
기술은 “인간이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는 태도”라고 정의하였던‘하이데거’의 말처럼, 형체가 있는 인공물로서, 이것이 만들어내는 무형의 서비스와 노하우, 그리고 인공물과 같은 대상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기초가 되는 공학 지식을 의미하는 기술에 더해, 인공물이 만들어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꾸려는‘의지’까지를 포함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기술은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바꾸려는 의지가 각인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오늘의 기술들은 서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거대한 기술시스템을 형성하고 있으며, 한 두 사람의 의지만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결국 기술은 그 자체의 내적 논리에 따라 발전하고, 자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기술철학자‘자크 엘륄’의“현대 기술이 자율적이 되었다!”는 상징적 표현처럼 “인간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사용하는 것이 맞긴 한데, 발전시키지 않을 자유도, 사용하지 않을 자유도 인간에게 없다면 인간은 기술의 주인인가? 하인인가?”하는 질문이 절로 터져 나올 밖에 없는 것이다.

근대이후, 인간의 오만이 만들어낸 자연의 지배 욕구는, 그 자연에 인간 자신마저 포함되어 스스로 지배의 대상이 된 꼴이 되고 말았다. 과학기술을 통한 눈부신 성취 뒤에는 공허함과, 권태만이 남아 있을 뿐이고, 스스로 대상으로 전락했으니 주체는 없어지고 의지만 남은 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기술시스템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거대 기술시스템은 효율성의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여기에 인간의 가치나 필요는 효율성의 논리 앞에 무력하고,“인간이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 할 자유밖에 남지 않았.”음의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러한 기술과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은 기술결정론, 사회결정론, 사회구성주의론 등 과학기술학 및 기술철학자들의 다양한 통찰들을 기반으로 하여 기술의 윤리와 도덕성, 기술의 정치성, 기술의 인간사회에 대한 영향과 책임에 대한 화려한 사색이 풍부하게 수 놓여 지고 있다. 일례로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의 기술의 정치성에 대한‘뉴욕 존스비치 공원’진입로에 놓인 고가도로가 흑인이 이용하는 버스의 통행을 막기 위해 낮게 설계되었다는 예화나, 숙련노동자의 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전자동 수치제어 공작기계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지적은 기술의 새로운 범주로의 확장된 이해와 시각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또한 세탁기와 같은 가사기술이나 휴대전화가 과연 인간을 보다 자유롭게 한 것일까? 하는 질문의 답변 역시 낭만적인 긍정만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기대행동의 패턴을 변화시킴으로써 새롭게 인간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부지기수로 등장하는데, 체외수정의 생식보조기술이나 피임기술 역시 여성을 출산이라는 우연적 위험에서 해방시키기는커녕, 사회적 맥락을 달리함으로서 기술을 사용하라는 압력에 시달리게 하는 것과 같이 암묵적으로 기술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전제에 지배당하게 하고 말았다는 것과 같다.

특히 기술후발국으로서 세계 경쟁시장에서의 생존이라는 명분하에 기술개발에 윤리적, 법적, 사회적 영향은 물론 사회적 합의를 무시하는 한국의 끔직한 현실을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기술의 잠재적 혜택만 부각하고 불확실한 위험은 축소하거나 무시하며,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거나, 과학기술 발전의 당위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 국익을 무시하는 반역행위처럼 취급되는 후진적 현실이 궁극에 얼마나 막대한 폐해를 야기하는지 우리 과학기술의 현주소를 반성케도 한다.

기술의 발전이 인류에게 편리와 자유의 확장, 그리고 엄청난 물질적 혜택과 성취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술발전의 신화만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기술은 인간의 자율성을 넘어선다고 경고한다. 인터넷이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선사하였지만, 중독과 같은 그 자유에 도리어 묶이게 하는 측면도 있다. 나아가 최근의 “언제 어디에나 동시에 존재”한다는 ‘유비쿼터스’의 환경은 우리가 피부로 느끼거나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기술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확산된다. 아마 ‘조지오웰’의 『1984년』에 등장하는‘빅브라더(Big Brothers)’들이 통치하는 ‘제레미 벤담’의 전자‘파놉티콘’의 감시사회로의 이행도 우려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기술이 제공하는 기회만을 강조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다양한 문제에 꼼작 없이 갇히는 신세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저작은 기술의 철학적,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조명된 화려한 통찰들로 오늘의 기술사회에 대한 냉정하고 진지한 성찰을 가능케 한다. 과학기술학에 낯선 독자들에게조차 익숙한 언어로 새롭고, 다채로운 이론적 배경과 지식으로 무장하여 지혜롭게 과학기술의 면모를 이해시키고 있다. 또한 과학기술 지상주의나 이와는 반대로 사회결정론과 같은 편협된 주장을 페기하고, 균형된 시각을 지니기 위한 노력의 흔적들이 더욱이 기술철학과 과학기술학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접하는 대중에게 고마운 저술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기술이 자체의 힘으로 도덕적인 사회를 만든다거나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주장하는 과학기술자, 엔지니어, 사회집단을 향한 기술의 책임에 대한 교훈들은 더 이상 다루기 쉬운 도구가 아닌 기술에 대한 명철한 통찰 이상의 조언이랄 수 있다. “인간을 닦달하는 테크놀로지”, 존재자 중심의 사유가 극에 달한 것이 바로 현대기술이라는 하이데거의 지적은 어찌 보면 인간소외의 미래사회를 향한 우울한 예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작 면허 프로젝트 - 드로잉 기초부터 그림일기까지, 삶을 다독이는 자기 치유의 그림 그리기
대니 그레고리 지음, 김영수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자신만의 이야기를 쓸 때면 머리에 떠 오른 그 상상의 이미지를 글 옆에 그려 넣어 남기고 싶은 욕망이 일곤 했다. 이와는 반대로 눈앞에 펼쳐진 어떤 이미지를 빠르게 그려서 이를 글로 연결시키고 싶을 때도 있곤 했다. 그러나 번번이 그리기 능력이 젬병인 자신을 원망하고 아쉬워하는 것이 전부이었던 터에 이 저작은 그야말로 나에게는 맞춤인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보이는 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려야 할지, 그림공부라곤 어린 시절 미술시간에 의무적으로 수행했던 기억이 전부인 내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이고, 시도조차 엄청난 두려움이라 해야 할 것이었다. 이제 우리들 삶의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은, 대학졸업하고 번듯하다는 직장에 들어가고 그 조직에서 성장하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이자 의당 그러해야하는 것이 삶이라고 여겼던 사람, 저자인‘대니얼 그레고리’의 진솔한 그의 이야기를 통한 그림그리기의 설명, 조언은 자신감과 긍정, 그리고 용기를, 나아가 순수한 마음으로 어떤 저항도 없이 그리기를 따라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 책은 성인이 되어 그림그리기에 첫 도전을 하는, 아니 “세상을 다양하게 보고 느끼며 그걸 설명하기 위한 연결고리를 짓는 일”에 처음 나서는 우리들에게 어려운 첫 걸음을 떼게 해 준다. 나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는 친절한 초보적 설명에서부터 혹 포기하려는 마음까지 다잡아주고, 한편으론 자극하며, 용기를 잃지 않고 꾸준히 완성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길을 안내한다.

이처럼 그림 그리기의 길잡이는 물론 저자의 성숙한 삶의 조언들과 어울려 엄격함과 사랑을 가진 한 명의 미술선생님이 옆에서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래서“자신의 참 모습을 부정하고 창조의 불씨를” 계속 억누르며, 결국 일상의 무기력함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더 없이 편협해진 우리들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강력하고 찬란하고 놀라운 창조력을 깨워준다.
잘 나가는 대형광고기획사의 간부직, 그러나 “더 이상‘관리감독 아래’있지도‘성공의 사다리’를 오르지도 않는” 자신의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새로운 행보는 매일의 얽매인 일상에서 주춤거리는 우리에게 우리들의 가치, 능력을 깨우치게 해 준다. 
드로잉 하기, 그림일기 만들기, 충격주기, 예민해지기, 극복하기, 평가하기, 정체성 찾기, 확장하기에 이르는 일련의 그림그리기에 대한 치밀하고, 세심한 실기에 대한 설명들은 경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어, 정말 책에서 도망칠 수 없을 정도로 붙들어 준다.

어느덧 나는 펜을 들고 그의 지시에 따라 드로잉 연습에 착수한다. 내게 이러한 용기를 부여하는 책이라니! 내겐 아무런 이의도 저항감도 일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신뢰케 하는 그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따라가고자 하는 의지가 솟구친다.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다. 지금 보는 것과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뜻이다. ~ 선입견을 버리고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다.” 정말 그렇다는 것을 느끼면서 “세상을 좀 더 자세히 관찰 할 수 있게 훈련”이 되는 자신을 발견케 된다. 그렇다고 내내 친절하지만은 않다. “친절함과 위로는 때론 최악의 승객”이 되는 법. 포기하려 들면 그는 우리를 마구 자극해댄다. 이 책을 손에 들면 누구나 자신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단 숨에 읽어버리고 책장에 치워둘 책이 아니다. 내겐 고마운 삶의 스승으로 나의 그림그리기가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오를 때까지 귀중한 길잡이가 되어 줄 터이다.

“삶을 더 명확하게 보게 되면 그림도 더 잘 그릴 수 있게 된다.” 정말 멋진 말이지 않은가? 삶을 다독이는 치유의 그림그리기라는 이 책의 부제는 정말의 사실이다. 지금도 나는, 나의 집 거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아마 화성인에게 인간 사회를 이해시키는 데에는 최고의 참고서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외계인에게 보여 주기위한 것이 이 글의 본질이 아닌 이상 ‘일’에 매여 있는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그리 훌륭한 영감을 던져주는 데는 이르지 못한 느낌이다.

21세기 인간사회가 만들어낸 거시적 산업의 흐름을 내다볼 수 있는 직업군을 대표하는 물류산업에서 생산공장, 로켓과학, 직업상담, 그림, 회계, 송전공학, 항공산업 등 일견 빼어난 선택과 “일이 삶의 의미를 준다는 그 엄청난 주장을 파헤쳐 보고 싶었다.”는 당찬 의도와는 사뭇 다른 이방인의 시선만 담겨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당혹스럽기조차 하다. 그래서 그 속에 있어 익숙한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세세히 묘사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소위 직업사회에 발을 담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유치한 접근으로 보일 밖에 없다.

다만, ‘프루스트’식, 아니 ‘보통’식 연상 작용에 의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단상의 독특한 연결이 창출하는 때론 시니컬하고, 때론 해학적인 사색을 만나는 즐거움은 여전하다. 각 산업에 대한 속성을 풀어나가는 지루한 여정을 따라가는 따분함이 있지만, 순간순간 던져지는 이러한 의외의 사유에서 냉정함, 미소, 진정함의 발견으로 공감의 머리를 끄덕여지게 하는 매력을 발견 할 수 있다.
일례로 물류산업의 거대한 창고를 보고는 “적어도 산업화된 세계에서는 우리 인간이 수천 년의 노력 끝에 마침내 다음 끼니를 어디서 찾아 먹을까 안달하는 일로부터 벗어난 유일한 동물이 되었음을 보여준다.”는 것과 같이‘창고’에서‘끼니로부터 해방된 인간’을 떠올리는 탁월한 사고의 진행을 보는 흥미로움 같은 것이다.

사실 우리들은 왜 일을 하거나 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은 어리석기조차 해 보인다. 현대사회에서 일이란 곧 생존을 위한 수단을 의미하기에(물론 일 하지 않아도 먹고 즐기는 예외계층이 존재하기는 한다.) 여기에 성취감 같은 구차한 이유를 붙여보아야 궁색한 답변밖에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가능하면 우리는 일에서 행복과 즐거움과 같은 만족감을 찾으려한다.
저자는 “경제적 요구는 사람을 노예나 동물과 같은 수준에 놓는 것, 그래서 만족과 보수를 받는 자리는 구조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인류사회를 2000년간이나 지배해 온‘일’에 대한‘아리스토텔레스’의 식견을 설명하면서, 일이 형벌이나 속죄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처음이라고 알려준다.

그렇다면 근대이전의 일과 오늘의 일은 무언가 다른 것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현대인들의 정신과 행동을 설명하는 무엇인가 있다는 것인데, ‘보통’은 18세기 부르주아 사상가들이 그리스 철학자가 여가와 동일시했던 만족을 일의 영역으로 옮겨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일에서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갈망은 지위나 돈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완강하게 우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는 최면은 왠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아마도 이 저작의 마지막 구절중 하나인 “우리의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는 해 줄 것이다.”라는 단순한 한마디가 오히려 정직해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획일적으로 일을 정의하는 것처럼 편협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이 글에 소개되는 화가처럼 “평소의 우리 모습보다 더 우아하고 지적인 대상을 창조하기 위하여 기꺼이 희생하는 인간 본성의 비실용적인 측면”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함에도 우린 일이란 것에 내몰려 외형적으로는 사회에 순응하여 고분고분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분노도 쌓여가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이러한 이해하기 힘든 분노는 비스킷 공장의 관심인 비스킷에 부여되는 중요성과 그 물건들의 요구에 부응하느라 애를 쓰는 인간들이 상대적으로 무시당하는 것과 같은 가치의 불균형에서 무수히 양산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우린 일에서 풀려나기는 힘든데, 무언가 일의 속성에서 위안을 만들어 내야 하지 않을까. ‘일’은,

「완벽에 대한 희망을 투자할 수 있는 완벽한 거품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우리의 가없는 불안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 가지 목표로 집중시켜줄 것이다. 우리에게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 줄 것이다. 식탁에 먹을 것을 올려 놓아줄 것이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 줄 것이다.   - P 368 中에서」

이 저술이 본원적으로는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일’에 대한 다양한 고통스러운 심리적 적응과 우아한 정신적 특징을 말하고 있지만, 소개되는 직업들마다에서 발견하는 감동과 경외의 이야기들도 풍부한 소재들로 흥미로움을 제공하는데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또한,‘보통’의 한국독자들에 대한 배려인 듯, ‘한국’의 이미지를 수시로 차용하는 친절함이 겸연쩍지만 반가운 읽기를 지원한다. 또한,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데는 날로 세련되고 전문가가 되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의 감정적 안정조차도 믿음직한 수단을 찾지 못해 헤매는 우리에게 일에 대해 모처럼의 작은 사유의 틈을 제공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희뿌연 안개 속, 먹 빛 땅거미가 드리운 수리봉 활공장 절벽을 향해 내달리는 승민의 질주, 그리고 비상, 활공하며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는 수명의 모습에서 진정 온전한 자유, “모든 족쇄로부터 풀려난”존재들을 바라보게 된다. 꽉 틀어 막혔던 그 무언가가 팍하고 터져버리는 듯한 해소를 느낀다.

비열함과 혹독한 공간의 묘사에서 조차 아름다움과 쫓아가야 할 아련한 낙관이 있다. 신선한 소재, 정교한 플롯의 구성, 탄탄한 문장과 해학이 넘치는 언어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막힌 표현들이 어우러진 근래 보기 드문 걸작이다.

작품의 무대는 희망병원, 정신병원의 이름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희망병원에서 일어나는 유린은 희망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 폐쇄적이고 사악한 공간이 탈출을 부추기는 것은 결과적으로 희망을 찾아 비상케하고 있으니 옳은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작은 이름하나에서조차 작가의 치밀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가위만 보면 공황장애를 일으키는 주인공‘이수명’, 시력장애인‘류승민’, 25살 동갑내기인 이들의 대비되는 행동양식은 소설의 흥미를 배가시킨다. 정신병원의 은어들 또한 작품의 리얼리티를 제고하고, 등장인물들의 별명은 캐릭터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대변한다.

정신병원이란 폐쇄공간은 사회에 어떻게 인식되는 공간일까?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둔갑시키는 공간?,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로서의 공간?, 악인들을 위한 선인들의 실험 공간?....
이러한 공간들의 이미지를 확립시켜주는 환자들의 사연, 병원 의료진의 조악한 구성 면모, 간호사, 보조원, 작업자들이라 불리는 이들 저마다의 직업적 태도는 치유의 공간으로서의‘병원’이란 곳과는 너무도 멀다. 폭력과 격리, 약물치료, 전기충격에 이르는 순응하는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즉흥적 처방행위만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땅거미가 깔리는 어둑한 날이면 병동의 주민들은 “뭐든 저질러 버리거나 숨거나”를 택일해야 한다. 먹 빛 어둠에 대한 두려움은 삶의 태생적 공포이리라. 그래서 그들은 미쳐버리거나 조용히 숨어버린다. 또한 “병동은 각자의 영화가 동시 상영되는 극장이었다.”처럼 그들의 심리와 세계가 수다스럽지 않은 나직한 목소리로 더욱 명료하게 전달된다.

거침없는 행동으로 곤혹을 겪는 승민을 바라보는 소극적 행위자로서의 수명의 시선은 또 다른 자아에 대한 연민이자 동경이다. “삶에 잠복한‘상실의 날’에 대한 두려움”, “버린 육신 안에 꿈의 지대를 만들어 놓고 그 곳으로 피신해버린 것”인지도 모르는 이는 바로 그들이자 자신이다. 몸이 묶여 병원에 끌려 들어가던 날, 수명은 “다시 세상으로부터 쫓겨나고 말았다는 박탈감, 철문 안에는 적어도 바깥세상보다 안전한 세계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란 배반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인생으로부터 자신이 쫓겨난 날을 명확하게 진단하는 수명이지만 자신의 억누르고 있는 기억에 저항할 용기는 여전히 없다. 좌충우돌 모든 장애물과 부딪치는 승민의 바깥세상을 향한 날개짓에서 수명은 회피할 수 없는 자유의 창구를 본다.

한편, 해프닝으로 끝나는 보트장 탈출 장면의 묘사는 가히 언어표현의 압권이다. 광란의 질주를 해대는 보트에서 수명은 “목젖에서 휘파람 부는 소리가 올라왔다. 척추가 위아래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했다.”고 한다. 그리곤 30노트, 35노트, 40노트...“신경절을 타고 심장을 향해 번지는 뜨거운 압통, 자작나무 숲에서 느꼈던 그 통증이었다. 수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흉 벽에 쩍쩍 금이 가는 느낌이었다.”탄성이 절로 기어 나온다. 정말 내 가슴이 쩍 쩍 갈라질 정도의 카타르시스가 있다.
아마도 이 감정의 다른 표출 아니었을까?
“비가 내리듯 별똥별이 떨어지고 갖가지 별들이 궁륭(穹窿)을 이루는 바다. 별들의 바다. 아름다웠어. 숨이 막힐 만큼, 그대로 죽고 싶을 만큼. 신기하게도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심장이 정지한 것처럼 고요해 지더라.”

죽음에 초연 해질 때, 그 잔잔한 삶의 평온 말이다. 그래서 수명의 조명탄 불빛을 향해 수리봉을 내 달리는 승민의 질주와 “상승기류를 타고 거침없이 비상하는”그 모습은 완벽한 자유,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날고 있는 동안 온전히 나야. (중략) 그냥 나, 모든 족쇄로부터 풀려난 자유로운 존재, 바로 나.”
‘정신보건심판위원회’, 이 이야기는 수명의 자유를 향한 진술이다. “제게도 자유를 향한 활공장이 필요했습니다.”그리고 몸 속 어딘가에서 마개 하나가 뽑히곤, 식어가는 가슴 밑에선 새들이 파닥거림을 느끼는 수명의 그 길고 긴 잠복된 두려움의 해방에서 세상과의 화해를 비로소 보게 된다.

작품의 모든 곳에 감동이 있고, 재미가 있으며, 진지함이 배어있고, 질펀한 입담과 전문성을 잃지 않은 묘사, 정교한 소설적 장치들이 녹아있다. 그야말로 매혹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을 침몰시키는 숫한 운명에 맞서는 우리들에게 정말의 진한 감동을 전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금 - 세계 경제를 비추는 거울
도시마 이쓰오 지음, 김정환 옮김, 강호원 해제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금의 시세가 어떻게 정해지는지, 어떤 요인들이 금값을 춤추게 하는지에 대해서 일자무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구나 금이 국가경제와 금융시장과 대체 무슨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무관심을 빙자한 몰지각의 다름 아니었음이니, 이 저술이 금시장과 경제현상에 대해서 내게 전해 준 지식은 그야말로 광명 그 자체라 아니할 수 없다.

금 가격 형성의 배경에서 금시장을 움직이는 세계의 선수들, 국가들, 그리고 향후의 금시장에 변화를 가져올 변수들과 전망은 작금의 경제상황과 치솟는 금값의 이유, 중국이 자신들의 외환보유고에서 달러의 비중을 낮추겠다는 속셈, 미국 달러화의 약세와 원유가와 금값의 관계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저자는 2008년 거세게 몰아닥친 미국發 서브프라임 위기의 원흉은 과소저축, 과잉소비라는 미국 경제의 적자체질이라고 단언한다. 선물거래로 인한 고객의 리스크를 떠안아 주는 대신 대가를 받는 옵션상품의 남발, 그리고 신용이 취약한 대상에 대한 명의 대여료격인 스왑(swap)과 이의 리스크 전가를 위한 보증기관과 또 다른 전가의 연쇄, 주택담보대출채권 같은 증권화로 인한 비약적인 유동성의 증가 등 속 빈 강정들이 만들어 낸 도미노식 파산은 바로 3조 달러가 넘는 미국의 부채를 대변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로 인한 신용경색, 즉 미국 경제에 대한 불신은 달러의 약세를 초래하고, 이 불안한 화폐를 대체할 수단, 즉, 리스크를 헤지(hedge)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금이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그 희소가치로 2000년간 인류의 화폐교환수단으로서‘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산’의 역할을 수행한 금에 대한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세계의 기축 통화인 달러화의 신뢰하락은 물론 미국 금융시장과 거의 직접 연동하는 유럽의 금융이 무사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또한 2008년 원유가의 급등은 인플레이션의 우려와 함께 이를 헤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금 수요가 급증했단다. 최근 금값이 왜 이렇게 오른 거지? 하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된다.

금의 연간 세계 총생산량은 2500톤에 불과하다고 한다. 더구나 채굴여건은 심해나 수천 미터 지하까지 내려가야 하는 것처럼 악화되어만 가고, 채굴비용 역시 증가하여 채산성 악화로 그 생산량은 점점 감소하는 추세이다. 이처럼 금은 수요가 늘어난다고 해서 공급량을 같이 늘릴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즉, 공급 가격 탄력성이 낮다. 가격이 상승해도 물량이 증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금 가격의 폭등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기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금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요인들을 야기하는 주체는 어디일까? 유럽중앙은행들은 외환보유액의 50~60퍼센트 가까운 공적 보유금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이들이 1990년 이후 시장에 매각을 위해 쏟아낸 금으로 금값은 하락을 면치 못했고, 급기야 워싱턴협정으로 총 매각량을 규제하여 진정시켜왔을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또한 “‘아부다비투자청’에 시장전체가 저격당해 패닉상태에 빠진다.”다 할 정도의 오일머니의 위력 또한 엄청난 모양이다.

이에 더해 세계금생산량의 4분의1인 연간 600톤을 소비하는 인도, 2009년 2분기 현재 2조 2000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이 자신들의 과잉유동성을 흡수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로화와 더불어 금을 외환 포트폴리오의 한 포지션으로 가져가려는 정책이나, 연간 장신구 수요만 300톤에 이르는 수요는 이제 상품시장에서 중국이 가격결정 요인의 핵심적 지위로 부상하고 있다 해도 잘못된 판단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금 가격과 거시경제의 움직임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풍부하고 다양한 예화와 설명이 금시장에 대한 어떠한 개념도 없었던 문외한도 이해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월하고 세심하게 안내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금화본위제, 금지금본위제 등 금본위제의 개념에서부터 선물거래, 옵션, 스왑 , 인덱스 등에 대한 알기 쉬운 설명을 곁들인 자연스런 경제개념과의 연계, 금 가격 하락 시나리오와 같은 가격판단에 대한 조언은 물론 부동산과 금과의 보유자산으로서의 가치 비교까지 개인의 투자접근에 대한 가이드까지 금(Gold)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주고 있다 할 수 있다.

아마 이 저술의 핵심이자 우리경제에 있어서 가장 주의 깊게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서브프라임 위기 이후인 오늘의 국면에서 세계 각국의 행동에 대한 통찰일 것이다. 세계 경제 구도는 2008년을 정점으로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할 수 있다. 저자는 보호주의 확대와 거시경제의 축소균형, 지역별 블록화가 가속화 될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또한 달러와 유로의 가치를 받쳐줄 닻(anchor)으로서, 기축통화의 후견인으로서 금의 부상도 중대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결국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로 허덕이는 미국 경제의 불신용으로 비롯된 달러화의 추락은 각국이 공유 할 수 있는 공통의 가치척도를 암중모색하게 하고 있으며, 기축통화로서 위치를 확보하려는 중국의 행보는 동일 경제권에 있는 한국경제로서는 도외시 할 수 없는 동향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미국 상원 은행위원회의 “미국은 금을 매각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금은‘궁극의 통화(ultimate currency)’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말과 같이, 금은 각국 통화의 가치와 신용을 담보하는 근본적 요소가 되고 있다. 이러한 기조 하에 불과 400톤에 불과했던 중국인민은행의 공적 보유금을 1000톤 이상으로 늘렸으며, 지금에도 꾸준히 증가시키고 있는 것은 국제경제 속에서 자국 통화의 가치를 담보하려는 야심을 엿보게 한다. 그럼 한국은행 금 보관 창고는 어떨까? 텅 비어있단다. 외환보유액 세계 6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14.3톤이란다. 저마다 자국의 공적금보유량을 늘리고, 국부(國富)라 할 수 있는 금의 수출이나 유출을 억제하는데 비해 우리의 노력은 전혀 없는 것 같다. 1998년 IMF 위기 극복이라는 명분으로 서민들이 탈탈 털어 거두어 낸 금의 양이 무려 250톤이라고 한다. 이것을 런던금시장에 내다 팔아 빚을 갚았으니, 새삼 비감함이 몰려온다.

“금융시장이 세계 동시 주가하락이나, 주가, 채권, 환율의 동시 하락사태에 빠지면‘분산이 효과가 없는’상황이 빈발한다.”미국 경제에 종속되어 있다시피 한 한국경제로서는 더더욱 국가경제의 리스크 헤지 수단으로써, 원화의 신뢰구축 차원에서도, 공적보유금의 점진적 증대를 도모하여야 할 것 같다. 이 저술에는‘상하이 금 거래소 창설’, 금EFT상장을 위한 행정적 ,법적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우리 경제관료, 금융관계자는 물론 국민 대중 모두에게 유익한 경제지식은 물론 보다 확장된 시각에서 세계경제와 우리 경제의 현실을 직시하게 해준다.
“한 나라의 공적 자금 운용은 단순히 연간 수익을 추구할 뿐 아니라 국가 경제 안전 보장이라는 관점에서 '유사시의 자산'도 장기적으로 보유해야 한다.” 곱씹어 둘 조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