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보스를 찾지 않는다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6
오타비오 카펠라니 지음, 이현경 옮김 / 들녘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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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B급영화를 보는듯한, 아니 노골적으로 그렇게 한 인상이 짙다. 마피아들의 수식 없는 냉혹한 살인 장면에도 불구하고 왠지 어설픈 코미디 분위기가 맴 돈다. 일부 평론에서 “무자비함과 시시껄렁함”이라 했던가. 딱 그렇다. 작품의 분위기, 얼개, 성향 등이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Inglourious Basterds) ’로 잘 알려진 감독‘쿠엔틴 타란티노’와 판박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타란티노 스타일(tarantino style)'이라고 불리는 복고적 분위기와 폭력, 그리고 수다스럽고 재미있으며, 통속적이고 각기 따로 놀던 인물들이 정교하게 얽히고 짜여지는 특성이 그대로 식재되어있다. 한편 내용은 ‘마리오 푸조’의 ‘대부(the godfather)’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말론 브란도’가 마피아 조직 최고 보스로 열연한 ‘돈 꼴레오네’역과 ‘알 파치노’를 일약 대스타로 만들어준 후계자 ‘마이클 꼴레오네’의 권력 장악을 위해 벌이는 냉정한 폭력의 무표정이 연상된다.

이 작품의 원제목은 “Chi é Lou Sciortino ?(루 쉬오르티노는 누구인가?)”이다. 번역 제목인 “아무도 보스를 찾지 않는다.”는 마피아 세계의 변화를 이야기하려 한 것 같은데, 오히려 독서를 방해하기만 한다. 단순하지만 원제목이 외려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할 수 있다. 소설은 이태리계 미국인‘쉬오르티노 패밀리’의 보스인 ‘돈 루 쉬오르티노’의 손자인‘루 쉬오르티노’의 마피아 세계의 체험 성장기록이자 작가의 추후 발표되는 일련의 마피아 코미디 작품에 대한 연속성을 내재하고 있다.

패밀리의 보스인 할아버지‘돈 루’는 돈 세탁의 방편으로 운영하는‘스타쉽 영화사’의 사장으로 마피아 보스로서의 훈련을 위해 손자 ‘루 쉬오르티노’를 로스엔젤레스로 보내지만 영화사는 불의의 폭탄테러 습격을 받게 되고, 고향 시칠리아의 카타니아로 안전을 위해 도피시킨다. 소설의 배경은 그래서 미국이 아니라 이태리의 시칠리아가 되고, 패밀리들 간의 암투가 전개된다. 여기에는 세력 장악을 위해서는 살인을 일상처럼 벌이는 사람들과 이기적인 가족애, 과시적 허영의 세계만 존재한다. 자신들의 구역에서 경찰관이 살해되지만 카타니아의 마피아 중간보스인 야심가‘살 스칼라(일명 살 삼촌)’는 살인자가, 사랑하는 조카가 좋아하는 이웃의 청년이란 이유만으로 사건을 조작하고, 이 엉뚱한 사건의 구성에‘루 쉬오르티노’를 하수인으로 개입시키면서 이해관계는 복잡하게 얽힌다.

한편, 소설 속 영화인 『플라스틱 러브』처럼 무심한 폭력과 저급한 드라마를 연출하는 것은, 다분히 세상을 향해 엿 먹으라고 하는 의도된 수작으로 보이는데, 지극히 통속적인 자극에 열광하는 현대인들의 상실된 감각, 사라진 정신세계를 조롱하는 한 방편이다. 이러한 키치(kitsch)적 요소들은‘살 삼촌’의 조카인 ‘토니’의 미장원에서 보이는 여성들의 허영심, 그리고‘바비큐 파티’는 물론 20세기 초‘알 카포네’부류의 갱(gang)을 연상시키는 복고적인 분위기, 소설 전반을 흐르는 욕설과 적나라하고 천박한 언어들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는 대중의 문화적 욕구를 비꼬는 장치로서 이 소설이 지향하는 핵심주제가 아닌가 한다.

 

이 작품은 스토리의 재미도 뛰어나지만 무수한 등장인물들과 독특한 매력을 지닌 인물들을 바라보는 즐거움 또한 대단하다 할 수 있다. 보스에 대한 충성과 묵묵히 방해세력을 처단하는‘핍피노’, 루와 사랑의 도피를 벌이는‘민디’, 그리고 토니, 닉, 레오나르 트렌트, 그레타 등 개성이 톡톡 튀는 인물들은 신구(新舊)의 의식세계를 극명하게 분리해주고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을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 구절인 ‘돈 루’의 “옛날은 없다고 말이야.~지금도 처음과 똑 같다고...”하는 과거와 다른 마피아의 현실에 대한 회한의 표현은 ‘돈 꼴레오네’가 말년에 직감하는 인생의 한계와 닮아 있어, 왠지 모를 서글픔과 비장함이 전달되기도 한다.

소설 한 편을 읽었다기보다는 장면 장면이 짜깁기된 듯 구성된 타란티노식 영화 한편을 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무심한 듯 저질러지는 살인과 솝 오페라(soap opera)식 스토리의 시시껍절함, 바로 그 자체가 매력적인 유별나게 특이함을 지닌 소설이다. 아마 이 작품으로‘카펠라니’도 국내에 꽤나 매니아 층을 형성시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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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킹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9-1 아서 왕 연대기 1
버나드 콘웰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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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틱하게 각색된 신화를 역사적 구체성과 사실성으로 재윤색한 기원후 5세기경 부족연맹 형태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헐리웃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지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유럽의 작은 섬나라 역사라는 인식 없이 아서왕, 랜슬럿, 귀니비어, 원탁의 기사와 같은 인물들과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여 할거된 군벌(warlord:軍閥)들의 지배력 확장을 위한 연합과 배반, 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시대상을 사실적 접근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특히 이 인물들의 알려진 특성이 역사적 진실이라는 잣대 앞에 여지없이 전복되고 재해석되고 있어 완벽하게 새로운 지식과 관점을 제공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영국의 고대민족인 켈트족 중 주류인‘브리튼’족이 형성하고 있는 부족연맹의 맹주인‘둠노니아(일명 캐멀롯)’왕국의 후계자‘모드레드’의 출생인 서력 480년 음산한 겨울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유럽대륙의 이민족인 색슨족의 침입이 반복되는 가운데, 둠노니아의 유서왕이 서거하자, 새로운 맹주로서의 지배권력을 확보하려는 동족간의 이전투구(泥田鬪狗)로 연맹은 이해관계에 따라 결속과 분열을 반복한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부분은 이 같은 고대국가로 형성되는 과도기인 5~6세기의 영국 역사를 비교적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며, 낯익은 역사적 인물들이 역사에서 어떤 의미와 영향을 가졌던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이다.

작품은 이러한 권력의 암중모색과 그치지 않는 군벌간의 전쟁에서 한때, 둠노니아 왕국의 후견자인 군주‘아서’의 장군이었던, 수도원의 수사‘데르벨’이 통일군주인‘브로흐바일’의 왕비‘이그레인’에게 들려주는 회고로서의 기록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당사자로서, 그리고 군벌들이 벌이는 탐욕과 질시, 사랑과 배신의 목격자로서의 증언이라는 수단은 사실성에 대한 신뢰를 제고키 위한 방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구나 소설 속의 인물들이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 실존 인물들이기에 역사소설로서의 높은 가치를 지닌 작품이라고 설득하는 듯하다.

실제 소설 속에서 그리고 있는 도시와 건축의 규모나 형태, 보통 2~300명이 치루는 전쟁의 묘사와 무기형태, 복식(服飾)과 부족들의 역사적 지배영역, 색슨과 프랑크족 등 이민족과의 혈전 등이 과장되지 않는 고증적 리얼리티를 가지고 기술되고 있어, 신화에 머물러있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화하려는 작가의 일관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특히나 이 작품의 매혹적인 요소로서 주술적 신앙으로서의‘드루이드’들이 등장하는데, 고대사회의 미신이 사람들의 정신사를 얼마나 광범위하게 지배하고 있었는지 재미있게 묘사되고 있다. 화자인 ‘데르벨 카다른’과 드루이드 중 최고의 주술사인‘멀린’의 제자‘니무에’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생의 굴레로 작용하는 드루이드와의 악연, 부족의 의사결정이나 전쟁의 부적으로서의 동행 등이 그것이다. 이에 더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아서’의 사랑스런 여인으로만 기억되는‘귀니비에’가 벌이는 도발적으로‘아서’를 유혹하는 장면이나, 잔혹한 기운, 속물적 근성 등은 통속적 환영들을 깨부순다. 또한 “충동과 열정의 사나이”, “권력과 도덕을 혼동하는” 불완전한 신념의 인물로 ‘아서’를 묘사하고 있거나, 프랑코족에 패망한 왕국‘아르모리카’의 왕자인 ‘란슬롯’을 비열하고 간교한 자로 그리고 있는 것 등은 그 전복적 내용으로 독서를 더욱 즐겁게 해준다.

원제목이 <<warlord chronicles>>, 즉 군벌의 이야기(연대기)이듯이 패권을 위해 벌이는‘포위스’의 ‘고르버디드’왕, ‘실루리아’의 ‘군들레우스’, ‘궨트’의 ‘테우드릭’왕, 그리고 기타 부족과 ‘아서’의 ‘둠노니아’와의 연횡과 반목이 만들어내는 인간들의 다양한 술책들과 행동들 역시 이 작품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3부작 중 그 1部인 본 작품의 대미로서 어떠한 지원세력도 없이 고립된 200명의 아서 군이 수천의 군들레우스 대군과 벌이는 일전은 가히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분노와 이기심, 사랑과 복수, 전쟁과 평화, 구 신앙과 신 종교의 충돌이 큰 물줄기를 이루며 인간의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 영원히 쉴 수 없을 것처럼 달려가는 한 때의 위대한 인물들과 나름의 족적을 남기고 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암흑과 혼란의 시대, 부족연맹에서 부족국가로 형성되어가는 영국사의 한 페이지가‘버나드 콘웰’의 집요한 노력과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으로 멋진 역사소설로 탄생하였다 할 수 있다. 2부작, 3부작의 출간이 조속히 기대되는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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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음부 을유세계문학전집 8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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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남미 국가들의 정체성이란 한국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40년 남짓의 시간이 흐른 오늘의 사회에서 바라볼 때, 정치적 자유나 남녀의 성적 평등이 월등하게 개선되었다고 하는 시각에 동의치 못하는 시각도 있을 수 있겠으나, 정치적 환경과는 달리 작금의 사회를 여성을 단순한 성적 노리개의 대상으로 양육하거나 인식하는 사회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의 관점은 여성의 성적 욕망의 제약에 대한 해방에 맞추어져 있어, 오늘의 시선으로는 그닥 매력적인 작품이라 하기에는 시대성이란 괴리가 있다. 다만, 당시 유행하던‘자크 라캉’에 경도된 사람들의 실험적 차용이 이루어진 작품의 대표적 예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수 있으며, 그 형식적 구성과 내용의 전개에 대한 기술적 방법론을 엿볼 수 있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작품은 주인공인 30대의 여성‘아니타’의 꿈과 일기와 대화를 오가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라캉이 이야기하는 '욕망하는 주체(desiring subject)'로서 대상화하는 이 소설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즉 욕망은 결여의 산물이듯이‘상실과 결핍의 무덤 위에서 욕망의 꿈이 피어난다.’는 식의 발상을 소설에 식재(植栽)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70년대 당시 아르헨티나의 정치문제와, 사회문화적 환경에 대한‘아니타’와 연인‘포지’의 논쟁들이 소재가 되는 것은 욕망의 충족을 방해하는 것으로서의 남성적, 폭력적 문화, 욕망의 규제자로서의 제도, 정치 환경을 은유하는 라캉 이론의 반영으로서, 이처럼 라캉의 욕망이론이 소설의 정신적 구조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거부(巨富)와 결혼하여 초야를 치룬 신부의 모습으로 소설이 시작되는데, 거칠게 성적으로 유린된 여성의 몸을 천천히 훑어가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당혹스럽게 다가온다. 전기가 흐르는 쇠 울타리로 둘러싸인 대 저택의 단지에 갇혀, 남성욕구의 배출구로 사육되는 여성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이는 멕시코로 망명하여 암 투병중인 주인공‘아니타’의 꿈 속 분신이다. 한편 미래사회의 섹스치료사로서 국가가 운영하는 일종의 공창(公娼) 'W218'을 등장시켜, 여성은 오로지 남성을 위한 섹스장치로서의 역할을 수행케 하는데, 이 역시 현실 속 주인공인 ‘아니타’의 무의식적 욕구의 한 표현으로 독자를 납득시킨다.

이 모두 남성 사회에 가두어진 성적 역할만으로 억압된 여성들을 상징하고 있는데, “결혼 초에 느꼈던 그런 쾌감이 지속되었더라도, 왜 내가 나중에 온종일 집안일에만 매달리면서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을까? 그 사람이 대가를 지불했어야만 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아름다웠던 것이고....”와 같이, 이에 대한 아니타의 저항이란 것도 사실은 성을 단지 대가(代價)라는 교환적 가치에 머물게 하고 있어 여성의 성적해방이란 지위로의 도약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여성의 주체적 자유로서의 성적 욕구를 지향하지만 “내가 그 어누 누구에게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오히려 불감증이란 열패감만을 노출한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자극, 현실의“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남자를 만나려고 하면서 절망감을 느낀단 말이야! 내가 그걸 생각하면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찾으려 하면, 그리고 또 지금처럼 정신을 집중하면, ~ 그 사람이 보인다.”고 하면서 끝없는 자극을 추구한다.

이는 기계적 섹스치료 장치로 훈련된 W218이 찾는 이상적 남성에 대한 갈망과 겹치는데, 그 理想의  남자인 'LKJS'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지만, 이내 그 사랑이 거짓임을 알게 되고, 남자에게 중상의 상해를 입힌다. 이러한 암시는 소설에서 시간을 달리하며 동일한 형태로 등장하는데, 거부인 무기상으로부터 탈출한 여배우인 여주인의, 탈출 동행자인 남자의 살해나, 현실의 연인 포지의 죽음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체제를 수호하려는 남성중심 사회에 대한 불신이며, 반감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곤 나아가서 역설이게도 수동적 섹스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성(性)을 불치의 인간들을 치유하는 성(聖)스러움으로 재탄생시킨다. 불치병자들을 구원하는 천사의 음부로서 말이다. 결국 여성의 성적 해방이란 이처럼 극단에서 극단을 오가는 위태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 균형이란 마치 정치와 같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감성적인 인형이 되려는 여성들을 양산하는 오늘의 사회에서 바라보면 오히려 이 소설의 시대성에 격세지감을 느끼게까지 된다.

【참고】이 작품에는 현실의 주인공인 '아니타'의 꿈의 분신으로 1930년대를 배경으로'여주인'이라는 이름없는 여배우가 등장하는데, 이는 작가의 미국 망명시절 접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헐리웃 여배우인 '헤디 라마(Hedy Lamarr)'를 모티브로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헤디 라마는 1930~1950년대 전 세계의 스크린을 데운 절세의 미모로 <Ecstasy> <Lady of the Tropics>등 50여 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우리에게도 <Samson and Delilah(삼손과 데리라)>로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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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눕는다 - 김사과 장편소설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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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나는 왜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떠올린다. 책 속에 고개를 본격적으로 처박아대기 시작한 것에는 분명 사연이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 내가 표현하듯이 비록 희망이나 행복 같은 것을 찾아 볼 수는 없으나, “나는 그 안에서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만큼은 세상의 흉물스러움이 직접 닿지 않았으며, 더구나 그곳에서는 같은 시선과 고민을 발견 할 수 있고, 어떤 해코지나 위협도 내게 미칠 수 없음을 알기에 평온을 누릴 수 있었다.

책에 코를 박고 가능한 직접의 그 추레함과 비루함들과 멀리하려 했던 나와 같은 인물을 우연히 소설 속에서 보게 되는 것은 기쁨이라기보다는 착잡함이 맞는 표현이 될 것이다.
주인공‘나’는 “근면하고 쾌활한 워킹 클래스”(일해야만 먹고사는 사람들)들이 성공이란 쾌락을 향해 어떠한 의구심도 없이 살아가는 것에 동화되지 못한다. 문학잡지에 소설한편을 발표한지 3년이 지났지만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는 그녀의 좌절은 이렇듯 끊임없이 물질에 경도된 사회의 공허하고 형식적이며 빈약한 정신세계를 어쩌지 못함에 있다. 게다가 한계라는 단어의 의미를 상실한 듯 세상은 온통 욕망이란 관념 덩어리로만 치닫고 있으며, 이를 이탈하는 존재는 정신병자가 되던, 고립되던, 생존의 가능성이 희박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한 없이 걷고 또 걷지만 그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좀체 세상에서 삶의 이유를 발견 해 낼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의 앞에 나타난 청년,‘풀(草)’은 고결한 삶의 방식을 담고 있을 것만 같은 영혼으로 다가온다. 단지 먹고살기 위한 약간의 일과 그냥 그려야 하기에 그림을 그리는 그의 세상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독학의 무명 화가인 풀이 그리는 그림은 제아무리 재능 있는 작품이라도 위선과 가식으로 들어찬 자기들만의 리그로 구성된 세상에선 아무것도 아닐 밖에 없다.

세상은 저네들의 견고한 성에 작은 흠집이라도 될까하여 아름다움으로만 무장된 진실이 비집고 들어오거나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는 결코 존재토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 사회의 가치인 성공의 쾌락을 향한 기차에 동참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아름다운 것들을 계속 볼 수 있다면”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지만 세상은 그렇게만 살 수는 없게 조직되어있다. 이러한 곳에서‘나와 풀’은 사랑을 통하여 서로의 존재에 대한 목적을 확인하지만,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굶어 죽지 못하고 자꾸 배가 고파서 짜증이 나는” 모순과 부조리함이 삶의 속성이고 진리임을 회피할 수 없음만을 알게 될 뿐.
“끝없이 이어지는 지금 이순간만을 바라보겠다는 약속”이 사랑이라서, 풀을 묶어두려 하지만, 삶은 나를 배반할 수밖에 없다. 삶은 돈을 요구하고, 풀은 그 돈을 벌기위해 나가야한다.

이 소설은 이렇듯 한 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듯하다. “안전한, 그러나 적당히 겁에 질린 평균적인 현대인”,그 가엾은 영혼들에게 보내는 진혼곡일지도.
회화공모전 입선으로 찾아간 갤러리에서 외려 전시된 그림보다는 차려진 파티음식이 맛있는 그 터무니없는 허위의 공간과 군상들, 바로 그러한 삶의 본질이 역겨워서 갤러리를 난장판으로 휘젓고, 초대된 한 문학시상식장에서‘나’의 도발은 어쩜“생생하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세상과의 타협이란 말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끝내 더 이상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없게 되면, 도저히 타협할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면 선택 할 수 있는 길은 단절 말고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질서의 흐름에 대항하는 자유의지가 치뤄야 하는 댓가란 참혹한 삶의 위협이라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처럼 너무도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 이 소설은 감각적인 스토리와 문장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곤혹스러움을 남긴다. 구역질나지만 매혹적인 이 세계의 아이러니, 바로 그것이 이유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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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미초 이야기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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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잔영이 남아있는 듯한 옛 거리를 걸으며, 그곳에 어려 있는 청춘의 기억들을 불러내고 이내 그 장면들에 잠기는 것은, 아마 세월에 더러워진 인간이 아닌 “천사처럼 청징하여 방탕의 흔적은 한조각도 찾을 수 없게” 자신도 모르게 교묘하게 각색되고 수정된 기억이 주는 위로 때문이 아닐까? 사실 애틋하고 아름답게만 그려지는 청춘의 기억들을 이렇게 냉정하게 표현하는 것이 김새는 일이기는 하지만, 삶의 시간이 꽤나 흐른 뒤에 그 서툴고 푸르게 빛나던 시절의 추억이 주는 풍성한 감성의 세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빼앗을 수 없는 커다란 축복일 것이다.

주인공‘이노’가 그려내는 청춘의 그 거침없고 화려한, 그리고 고이 간직하고픈 사라진 사람들과 거리들에 대한 기억의 편린들로 구성된 이 소설집은 우리들이 잃어버린 것들, 잊고 지내온 것들에 대한 뭉클한 그리움의 가치를 펼쳐놓는다.
메이지(明治)시대 화족(華族;일본 귀족)들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어주던‘이노 무에이(伊能夢影)’, 그 3代인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나의 이야기이다. 할아버지의 사진관과 데릴사위로 풍경사진을 찍으며, 장인의 인정을 소망하지만 세대간의 장벽이 가로서 있고, 그리고 물질의 풍요를 만끽하는 손자인‘이노’의 순수한 시선이 있다. 

첫 편인 가스미초 이야기에는 중간고사를 앞둔 고등학생의 치기어린, 그러나 풋풋하고 어설픈 사랑의 이야기가 사라져가는 대상들, 전통과 근대화로 풍요로워진 도심의 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소설의 제목이자 공간적 배경인 롯폰기. 아오야마에 둘러싸인 안개마을 가스미초(霞町)는 내 어린 시절, 4대문 안에 사는 서울 토박이라고 허세를 부리던 그 텃세가 떠올라, 이노 무리가 강 건너 천박한 아이들이라고 자신들에게 선민의식을 부여하는 시선과 겹쳐 그 생각 없던 순진무구함에 슬며시 미소가 돈다. 여기에는 이후의 단편들의 튼튼한 배경이 되는 신구의 공존, 결코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 변해가는 도쿄의 풍물, 그리고 사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현실의 기록, 즉 객관적 공인으로서의 사진관이 세월의 증거로서 자리를 차지한다. 그래서 사진관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소재이자 모든 이야기들의 매개체가 된다.

새로운 교통수단에 의해 퇴출당하는 마지막 전차의 운행을 안타까워하는 할아버지, 제자이자 사위인 이노의 아버지가 달려오는 전차를 향해 각자의 카메라를 누르는 장면은 뇌리에 찰칵하고 각인된 것처럼 인상 깊다. 역사의 한 페이지로서만 남는 순간이다. 주변의 익숙한 것들이 하나 둘 사라져갈 때 우린 문득 세월의 거친 속도를 느끼게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떠올리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리움에 대한 애틋함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그리움은 바라보는 사람까지 전염되게 하는데, 게이샤 출신으로 허리를 곳곳이 세우고 걷던 할머니의 아득한 로맨스에 대한 예기치 않은 목격은 “그처럼 아름다운 할머니의 뒷모습은 무대 위를 걸어가는 우타에몬(가부키 배우) 같았다.”하며 우아함과 이면에 서린 회한과 우수가 어울린 할머니와의 가부키 공연의 동행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기억은 할아버지의 아픈 사랑과 가족사의 비밀과 연결되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후두암으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입관에 첫사랑 노신사가 주었던 철 아닌 평지꽃을 어렵게 구해 넣어드리는 장면은 왠지 콧잔등을 시큰하게 한다.

한편, ‘해질 녁 터널’, ‘여우비’등의 단편에선 주인공 자신의 자유분방하고 허풍스런 여성 편력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완결된 구성으로서 완성도 높게 전달되는데, 청춘의 기억이란‘오래된 영화의 스틸 사진’이라 해서인가 신비로움으로 안내되는 청춘남녀의 사랑, 인간에 대한 편견이 불식되는 만남을 통한 한 뼘만큼의 성장이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 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빠져들게 된다. 각각의 작품이 이처럼 완벽한 서사와 주제를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음에도 거대한 한 편의 소설로서 어떠한 흐트러짐도 없이 다가오는 것은 이 소설이 가진 빼어난 유연함과 구성능력 탓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 전체에서 지속하여 뇌리에 남겨지는 상(像)이 있는데, 무명의 사진작가인 아버지가 처음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품으로 은행나무 열매를 줍고 있는 할아버지를 찍은 <노스승>이라는 작품의 이미지다. 생전에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사진에 유일하게 칭찬이랄 수 있는 “착한 사진”이라한 작품이기때문만이 아니라, 전사한 외삼촌을 향한 응어리진 할아버지 마음의 슬픔이, 그리고 “진실의 나무 열매를 찾아 헤매는 늙은 예술가와 그 모습을 포착한 제자의 시선”이 흐르고 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진관 스튜디오 등나무 의자에 앉아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열정을 다해 찍어준 졸업사진의 모습이 “말 그대로 살아있는 모습이었다.”라고 외치는 이노의 경외의 목소리에서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진실, 그리고 짙은 사랑의 향기를 맡게 된다.

가볍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임에도 진심이 어려 있고, 시리고 흐릿한 슬픔이 흐름에도 이들 모두를 뒤덮을 만큼의 장엄함이 묻어 있는 작품이란 느낌이다. 더구나 나(이노)의 정체성이나 연민에서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그 시큼한 인생을 보듬으려고“나의 가느다란 목줄기와 약간 굽은 어깨가 할아버지와 똑 같았다.”하는 독백은 사내의 소통이고, 삶의 이해이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인간의 사랑으로 다가온다. ‘아사다 지로’는 진정 청춘의 천분의 1초를 진심으로 그려내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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