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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한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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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년대 한국의 청년들, 그리고 대중의 사상적 은사였던 이영희 선생을 왜 지금 다시 논의하여야만 하는가? 다시 말해 ‘의식화’로 대변되는 정신의 혁명, 대중의 깨어남이 요구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당위의 질문에 대하여 이 저술은『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으로 상징되는 잠자던 대중을 깨웠던, 즉‘깨어난 자들의 끊임없는 증식’을 통해,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던 독재의 암흑이란 철벽을 부수고 일궈냈던 민주화의 성취가 오늘에 다시금 어떠한 의미로 다가서는지를 세대와 분야를 아우르는 인물들의 담론으로 펼쳐내고 있다.

여기에는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는 억압되었으며, 밀실로 붙들려가 폭력에 시달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가는 민주주의의 실현은 요원하기만 하였던 악독한 독재정권이 지배하던 시절, 역사의식도 없으며, 세계사적 흐름을 읽지 못하던 무지몽매한 지배계급의 폐쇄적 폭압의 시대에나 필요했지 오늘에 새삼스레 대중의 집단적 각성, ‘의식화’의 논리를 꺼내드는 것은‘꼰대’들의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냉소도 있다. 더구나 온통 물화(物化)되어버린 사회, 당장 밥벌이라는 생존의 문제에 허덕이고 있는데 무슨‘자유’타령이냐, ‘자본주의에 편입’되기 위해 발버둥치기에도 모자란 형국이란 말이다. 라는 88만원 세대의 항변도 있다.

그러나 잠시라도 소위 자기 계발이란 것을 소홀히 하면 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으니‘자본의 도구’가 되는 종속을 택하는 것이 옳다는 이러한 단순화된 양자택일의 논리는 왠지 설득력을 갖추기엔 미흡하지 않은가? 당장은 안전한 자신의 보위가 되는 듯 보이지만, 이는 결국 부정의와 불평등, 비인간화, 인간소외를 고착화시키고 자본의 노예로 길들이려는 지배계층에 굴종하는 삶을 완성하는 것 이상이 아닐 것이다. 오늘의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무한경쟁 시장의 논리, 즉 시장만능의 이데올로기는 경쟁의 원리, 약육강식의 원리, 탐욕의 원리만 작동되고, 이를 위해서는 인권, 자유, 민주주의는 기꺼이 희생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미명하에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자유를 부인하던 군부독재 시절로 역진된 형국과 한 치의 차이도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감각, 무의식을 자처하고, 지배자들에게만 가치판단을 맡길 때, 어느덧 회복할 수 없이 잘 길들여진 비인간화된 노예의 삶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불평등, 억압, 배제와 차별이 고착화된 사회, 작은 물질에 자신의 자유를 내어준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완전한 사고 정지증’에 걸린 듯한 오늘의 사람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적 각성, 의식화가 지닌 의미의 오늘에서의 재해석을 필두로, 신자유주의적 세속(反)윤리의 틀을 벗어나 경쟁의 바깥으로 탈주하는 것으로서의 책 읽기,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의 이해를 통한 전쟁의 파렴치한 속성들 - 권력과 민중 격차의 극대화, 제국주의의, 계급원칙의 적나라한 불평등... -에서부터 “사대주의에 기초한 허구적 주류의식과 무지몽매함”으로 한국전쟁의 참화와 분단국가의 서러움을 겪고서도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날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의 또다른 냉전체제의 병리현상을 지적하기도 하며, 정말 기형적인 한국 기독교의 본말이 전도된 제도 종교로서의 비판과, “예수를, 진리를 이기적 욕망충족의 수단으로 착각”하여 “욕망에 마음을 굽히고 돈에 허리를 굽히는 행위가 사실상 우상숭배라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는”종교인에 대해 생각한다.

한편, 영어를 강조하는 상상력빈곤의 이 사회의 진정한 속셈인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영어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 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라는 통찰과, 창조적 사유의 자리가 없는 실용영어가 지니는 허위, 그리고 무엇보다 원어민 교육을 받아 혀 꼬부라진 그럴듯한 발음에도 정작 “비판적이고 포괄적인 사고력이 없는” 맹탕의 영어로 일그러진 한국인의 초상을 말한다. 그럴듯한 발음의 영어를 구사하지만 사유와 지식이 없는 무식한 영어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특히, 지식인에 대한 사회적 책무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은 이 저술과 이영희 선생의‘배우게 하는 사람’이라는 스승의 개념과 연결되어, 학벌세상의 승자인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을 향해 매운 회초리를 든다. 삶과 앎이 불일치하는 한국 지식 사회의 고질병은 물론, 탈근대적 과제와, 여전히 매우 질 낮은 민주주의와 같은 근대적 과제까지 중첩된 한국사회에서의 합당한 지식인의 역할을 논의한다. “현학의 하늘에서 대중의 땅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해야 한다는 권유”는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자각한 파리아(pariah,주변인)의 관점’그것으로서, 지식인의 계몽자로서의 기능을 강조한다.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와 시장지상주의를 밀어붙이는 이 정권은 점점 대중의 사회안전망을 축소하고 개인의 행복이나 복지가 모조리 개인의 책임이 되는 사회로 퇴행시키고 있다. 또한 교육은 “‘약자를 보호하자’가 아니라, 심지어‘강자가 어떻게 약자를 더 잘 먹을 수 있을까’를 가르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옛날 옛적부터 잘 먹고 잘산 놈들이 제 권리를 잠시 빼앗겼는데 도로 찾으려 일어나는, 반동이 일어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은 역사의 경험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평등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보편적 복지가 높아지고 생산성도 높아질 수 있도록 가치관, 인간관, 세계관을 개량하는데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눈앞의 풍요 속에 매몰되어 진정한 가치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악덕한 제도, 정치, 사상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저항적 인간을 목표로 하는 자기의식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이 저술은 그래서 지금에 다시 이영희를 말하고, 집단적 깨어남을 말하여야 하는 필연적 요구를 담고 있다. 오래전 대학신문사에서 독재정권의 말로를 지켜보고, 그리고 더욱 악질의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폭력의 시대에 이영희의 저작들을 읽고, 민주화운동을 취재하며 학우들과 울분을 토해내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더 이상 이러한 집단 의식화를 얘기하는 세상이 아니기를 바랐건만 소비지상의 물화된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으로 바뀐 대상이 30년 전으로 사회를 역진시키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 등 다방면의‘특수 지식인’들이 바로 이러한 각성을 위해 대중을 향한 노력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변혁은 반드시 올 것이란 말을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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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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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이고 낯선, 게다가 추상적이기까지 해서 좀체 접근이 쉽지 않은 시(詩)를 잘 알려진 현대 철학자들이 구축해 놓은 개념을 통해 명쾌한 이해의 언어로 전달해주는 일종의 철학적 시평(詩評)이자, 또 한편은 시를 배경으로 하여 세상을 폭넓게 사유할 수 있도록 어렵게만 여겨지던 현대철학 사상을 수월하게 풀이하여 인간 본성과 사회를 통찰하는 안목을 제고시켜주기 위한 저자의 대중을 향한 배려이자 의지라 할 수도 있겠다.

21명의 시인들의 시와 해당 작품이 함축하고 있는 세계를 동일 수의 철학자들이 저마다 포착한 사유의 문법을 이용하여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해석하고 있다. 즉 42명의 시인과 철학자가 만들어내는 일상적 세계의 동요(動搖)와 이성의 무능지대를 드러내는 인문학적 성찰의 만찬장이라 할 수 있다.
박노해, 기형도, 김남주 시인에서부터 유하, 박찬일, 김준태 시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들 시인들의 작품과 결합하여 네그리, 비트겐슈타인, 아렌트에서 벤야민, 호네트, 박동환이라는 걸출한 철학자들이 포획해 낸 세상 읽기의 향연이기도 하다.

가뜩이나 친숙한 세계가 아닌 원초적으로 낯선 세계를 표현하는 시를 난해한 철학으로 설명한다니 아예 도리질을 하게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철학이란, 바로 그 낯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조성해 낸 개념이기에 읽어내지 못했던 그 세계를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그래서 저자는 바로 이 철학의 새로운 개념들 하나마다 어느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상의 비유를 통해 친절한 설명을 해주고,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한 식견을 기초로 하여 낯선 언어들로 구성된 추상의 세계를 해독하게 해준다. 마치 친절한 개인교습을 받는 듯하다고 할 정도로 세심함과 독자와 밀착된 설명은 가히 이 저술의 본질이자 탁월한 장점이 된다.

인간이 지향하는 궁극적 꿈이란 무엇인가? 자유! 기쁨! 이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바로 이 자유와 기쁨의 희생이 강요되거나 억압하는 힘과 경쟁케 한다. 그것이 사랑이 되었든, 인간소외가 되었든, 정치적 박해가 되었든, 삶과 죽음의 본질이 되었든 말이다. 수록된 시(詩) 역시 사랑의 본질에 대한 탐색부터 삶의 절망, 인간자유를 구속하는 지배력의 저항, 인간의 성적 욕망, 자본주의의 속성, 타자성, 전체주의적 폭력, 물질주의의 한계성 등 원초적 본질들에 대한 다양한 구성을 하고 있어, 취향대로 골라 읽는 재미를 누릴 수도 있다.

금지와 금기, 즉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욕망을 통해 에로티즘, 존경, 결혼을 통찰한 ‘바타이유’의 철학은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빠스’를 읽으면서 ‘옥탑위의 빤스’를 떠올리는 박정대 시인의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으로 연결되고,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타자를 가장 강하게 느낀다”는 ‘레비나스’의 유아론을 넘어서 타자를 향한 철학으로 ‘원재훈’의 <은행나부 아래서 우산을 쓰고>가 설명되며, “사랑이란 그 자체가 비-관계, 탈-결합의 요소에 존재하는 이 역설적 둘의 실재성”이라고 사랑의 통념을 바꿔버린 ‘바디우’의 시선은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서 타자의 자유성으로부터 발생하는 질투의 본질을 탐색하기도 한다.

또한 근면이라는 덕목에만 충실한 개를 빗댄 김남주 시인의 <어떤 관료>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던” 인간의‘철저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가 지닌 악(惡)보다 흉악한 파멸성을 이야기하고, ‘최명란’의 <아우슈비츠 이후>라는 시를 통해서는‘아도르노’의『부정 변증법』의 핵심인‘동일성 사유’의 전체주의적 내적 논리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특히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욕망의 폐해들이 인간성의 파괴에 얼마나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는지는 ‘유하’의 <오징어>에서 발견되는 욕망의 집어등이나, ‘박찬일’의 <팔당대교 이야기>가 던지는 물화의 세계로 퇴보한 인간 상실의 처량한 현실로 대변되고 이들의 해석본인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나 ‘호네트’의 『물화-인정 이론적 탐구』는 매혹적인 읽기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렇게 시와 철학적 사유가 어울려 구성된 이 저술은 어렵게만 여겨지던 현대철학을 대중적 시선의 읽기로 친근하게 다가서게 하고, 나아가 사유의 깊이를 심화시키기 위한 관련 저술들의 소개로 인문학적 감수성을 더욱 일깨운다. 결국 어렵고 낯선 두 인문학적 가지를 기쁨과 행복, 자유라는 인간 이상으로의 접근하는 통로이자 존재로서 쉽게 이해케 해주는 장(場)이 된다.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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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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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 뿌웅~, 이 무슨 실없는 서두인가 하겠다. 사실 오랜만에 아랫배를 움켜잡고 비실비실 웃어 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지구상의 모든 감독들이 가지고 있는 목표와는 분명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단 하나의 미덕도 없는 완전한 실패작을 연출한 영화감독,‘인모’의 실소를 머금게 하는 신소리들이 들려주는 소위 ‘콩가루 집안’의 진솔한 이야기에 공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리 복잡할 것이 없다. 사람 사는 것이 별것이냐? 사람들이란“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다들 속으론 자기만의 병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진짜 삶은 미래에 있다고 버둥거리지만 남는 것은‘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니, 자신에게 허용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행복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일 게다. 비범했다는 ‘헤밍웨이’나, ‘그레이엄 그린’이 처음 한말이 “나는 버팔로 빌을 몰라요”라든가, “개가 불쌍해”라고 하지만, 우리 평범한 사람들 모두는 “맘마”가 처음한 말이 아니겠는가! 하는 웃기는 이 한마디에 실려 있는 작가다운 한 방에 모두 담겨있다 해도 지나친 독해는 아닐 것이다.

월세도 못내 쫓겨나는 신세가 된 마흔여덟의 실패한 영화감독 인모, 그래서 기어들어간 곳은 칠순의 노모가 사는 다 스러져가는 24평 연립주택 302호, 여기에는 전과 5범, 쉰 두 살의 백이십 킬로그램의 거구인 배다른 형, 오한모(일명 오함마)가 살고 있다. 엎친 데 덮친다고 남편에게 쫓겨난 여동생‘미연’이 중학생 조카까지 대동하고 살겠다고 모여든다. 후줄근한 중년의 삼남매가“이혼과 파산, 전과와 무능의 불명예만을 안고서” 집에서 떠난 지 이십여 년 만에 엄마 곁에 둥지를 튼 것이다.

인모가 입성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희대의 코미디로 연출 된다. “엄마! 인모새끼도 여기 들어와서 살겠대.”그리곤 오십 전후의 두 사내가 뒤엉켜 싸우는 꼴은 속절없이 킥킥거리게 한다. 물론 씁쓸한 여운을 선물하면서.
평균 나이 마흔아홉의 자식들을 위해 묵묵히 고기반찬을 연일 차려대는 엄마, 그런데 이 고기는 느닷없는 효력을 발생시킨다. 머리를 깎다가 슬쩍 스치는 미용사의 가슴에 “난 데 없는 발기”가 그렇고, “무참히 패배시킨 바로 그 세상과 맞서 싸우려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해석이 그것이다. 이처럼 해학 속에 삶의 진중한 의미가 넘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의 매력이 된다.

이복형, 이부여동생, 이들 중 적자라 할 수 있는 주인공 인모는 유일하게 대학을 나오고 가족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한 인물이다. 폭력과 강간으로 점철되어 감옥을 안방처럼 들락거린 형, 화냥기로 이혼을 밥먹 듯 하는 여동생, 외간 남자와 간통으로 이부 여동생까지 안고 들어왔던 엄마, 게다가 일평생 무능과 무지로 숱한 수모와 상처를 안고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로 구성된 가족, 그래서 이렇게 주절거린다. “불명예와 오명의 역사....도대체 내가 어떻게 가족에 대해 자부심과 애정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하고 몸서리치지만, 이들 모두는 바로 그 자신을 위해 희생하였던 인물들이다.

“이놈의 집구석에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인가?”고 외치지만, 진정 멀쩡하지 않은 사람이 자신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무슨 동네 똥개도 아니고...”했던 여동생은 성실한 남자를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형은 가족의 사랑을 일깨워준 조카를 구해내기 위해 맡아야 했던 불법오락실 두목의 뒤통수를 멋지게 때리고 사랑하는 미용사와 남국의 삶으로 떠난다. 부서진 희망을 부여잡고 자기만의 인생을 어루만지며 사는 것이 무릇 평범한 우리 인간들의 삶이라는 듯이.

한편 이 작품에는 버려진 낡은 헤밍웨이 전집이 작품 곳곳을 매개하고 있는데, 아마 헤밍웨이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노인과 바다』의 청새치,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의 제이크 번즈, 『무기여 잘 있거라』의 프레드릭 헨리, 등등의 인물들과 사물들, 그리고 헤밍웨이 자신까지를 통해 온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과 같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작품의 대미는 인모가 형 오함마에게 당한 오락실 두목에 끌려가 죽도록 얻어터지는 장면인데, 형이 있는 곳을 까발리려다 단지 붙잡아 온 이유를 듣지 않고 자신에게 매질을 가한 비논리적 행위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입을 다물어버리고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다. 아마 주인공 최초의 이타적 행위일 것이다. 결국 만신창이의 자신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옛 애인 캐서린을 지켜보며 “나는 한 인간의 삶은 오로지 이타적인 행동 속에서만 완성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돌보고 자신을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내어주는 삶..”이라며, 비로소 진짜 삶의 평범한 모습을 이해하는 것이다.

아마도 유쾌한 해학에 담아 지루하고 상투적인 듯한 보통사람들의 삶을 쓰다듬어 주려는 작가의 노력이자, 주인공 인모만큼의 삶을 산 작가가 우리 평범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비범하지 않은 평범의 진리이리라. 킥킥거리는 재미 속에서 삶의 진정성까지 깨닫게 해주는 즐거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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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자유를위한정치>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 - MB를 넘어,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
손호철 지음 / 해피스토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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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인권, 삶의 질, 폭력성 등 지난 40여 년간 민중이 쌓아 온 자유와 민주주의가 오히려 역진하는 작금의 우리사회에 대한 정치 사회적 진단과 대안의 모색, 그리고 현실정치에 대한 비평과 제언이라 할 수 있다.
지구촌 어디에도 없는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MB정부가 빚어내는 폐해가 이루 다 표현 할 길이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나열되고 있다.

우선 MB노믹스의 참모습을 국가주도의 70년대 삽질식‘발전주의’를 승계하고, 시장중심의 신자유주의라는 모순된 두 경향이 결합된 위험천만의 형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 바로 발전주의의 유산과 세계화라는 신자유주의의 최악의 조합이 가져온 1997년 김영삼 정부의 경제위기를 떠올리면 이 모순된 모습이 파생시키는 절망적 나락의 공포를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불통의 리더십’, ‘노가다 정치’, 민의를 무시하고 독선적인 불도저식 일방통행의 대표적 실정(失政)의 예가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의 수입결정으로 인한 국민과의 갈등인데, “광우병이 발생하더라도 우리 정부가 수입이나 검역을 중단 할 수 없도록 검역주도권을 완전히 포기한 비상식적”이고, 비현실적인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어떠한 국민적 설득과 이해의 요구도 없이 자행되는 이러한 일방통행은 ‘미디어법’의 강행 추진, 지속되는 반대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4대강 죽이기’사업을 진행시키는 독단과 같다. 여기에 더해 이와 같은 비판적 여론에 대해, “정책은 옳은데 홍보를 제대로 못하기 때문”이라고 전혀 민의를 듣지 않는 귀머거리 신념에는 이 정부에 대해 그만 할 말을 잊게 할 정도로 오만과 독선을 보게 된다. 

특히 극한적 신자자유주의를 지향함으로써 악화된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이로인한 사회적 갈등을 통제하기 위해 공권력에 의지하는 공안정치를 노골적으로 표방하고 나서는가 하면, 급기야는 살인적인 속도전에 의해‘용산참사’와 같은 국가폭력의 사태를 낳기도 한다. 실정에 대한 비판을 억압하기 위해서는 ‘사이비 모욕죄’신설, ‘휴대전화 감청 허용’, ‘집시법’의 개악 등 표현의 자유를 박탈하는 퇴행적 행태를 보이기까지 하고 있으며, 이른바‘이명박표 계급전쟁’을 공언하면서 세금이 경제발전의 장애라고 감세정책을 밀어붙이고, 노동조합의 활동을 규제하고, 대중심리를 이용하여 노동자를 노동귀족, 공기업을 철밥그릇 등으로 몰아 노동과 진보진영을 공격하는 등 신자유주의적 포퓰리즘으로 진보진영의 해체를 위한 공격을 노골화하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잘사는 사람과 점점 못사는 사람으로 분열시키는‘두 국민 정책’을 추구”하여, 금산(金産)분리완화, 총액출자 제한제 폐지, 감세(減稅)정책 등, 1% 강(强)부자들과 대기업을 위한 정책을 강력하게 드라이브하고 있다. 그러나 감세정책 1년 만에 통합 재정적자가 27조9550억 원에 이르고, 2010년 기획재정부 자료에 의하면 2007년 대비 세수 감소액만 14조4천억 원에 이르는 등 국가재정이 신음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부자들의 감세로 인한 부족 세수를 중산층(급여생활자, 자영업자 등)에게 전가하기 위해 비과세와 소득세 감면 혜택을 줄이는 등 그 무능과 몰염치가 극에 이르고 있다. 나아가 “행위의 의도와 내용 등 입법취지에 비춰보고 사회적 정의 관념에 부합하는가를 가려 처벌여부를 결정하는” ‘실질적 법치주의’는 실종되고, 법치주의를‘형식적 법치주의’로 전락시켜, 민주주의 인권에 대한 공격무기로 사용하는 ‘법치 파시즘’적 행태까지 보이고 있다.

우리사회가 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를 어느 한사람, 한 집단만의 책임으로 돌리기에는 물론 무리가 있다. 무능하고 비겁한 정치인도, 무지하고 무관심한 대중도,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권력자도,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자본가도, 부패한 관료도...모두가 자성하여야 할 것이다. “선(善)과 악(惡)의 가치가 전도(顚倒)된 사회”, 진실을 은폐하는 음흉한 대기업 대신에 진실을 밝히려는 자는 피고석에 앉혀 심판하고 처벌하는 정의가 상실된 사법형국, 사회적 약자의 직접적 폭력만 문제 삼고, 은폐된 구조적 폭력은 보지 않으려는 사악함은 이제 일상적이고 당연한 듯 되어있다. 이 위협적이고 위험한‘신자유주의 공안국가’를 어떻게 생명의 활기가 넘치며 모두가 함께 사는 사회, 국가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된 배경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져온 분배정책의 실패를 들고 있다. 즉, 두 정부는 표현되는 스타일과는 달리 성장 중심의 정책으로 분배정책을 방치하여 양극화를 심화시킨 책임을 면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쌍용자동차의 해외 매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쌍용차 노동투쟁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책임자인 당시 산자부장관이었던 현 민주당 대표의 비겁한 침묵과 같이 기만적인 패권주의를 질타하기도 한다.

한편 이 저술의 커다란 주제이자 정치적 균형과 사회 정의의 회복이라는 질서를 위해 진보신당, 민주노동당등과 같은 진보세력의 대연합과 자유주의적 보수정당인 민주당의 환골탈태를 지적한다. 여당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야권의 세력이 지금과 같은 분열된 형상으로 현 정국을 대처하기에는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의 자살골과 국민들의 견제 심리를 통해서나 먹고 살려는” 민주당의 전략부재와 자기반성 없는 자세, 지난 10년간 반서민적 성장정책에만 몰두해 온 실패를 엉뚱하게도 성장정책을 소홀히 해서 야기된 것이라고 헛 짚어대는 한심한 성찰, 이에 더해 민주당과는 일체의 연대도 부정하는 진보세력의 ‘좌익 소아병’등 야권 세력의 자세는 더없이 안타까운 형세가 아닐 수 없다.

또한 MB에 반대하는 것만이 마치 진보이고 민주인양 20년 전의 단순 논리로 지적 퇴화한 민주당의 反MB 대동단결만 외치는 구태는 민중들의 불안과 관련한 현실분석과 구체적 대안 제시와는 이격되어 궁극에는 자멸하고 말 것이라고까지 냉철한 자성을 촉구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민주당의 좌경화와 탈패권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결별하는 선행적 체질개혁은 진정한 진보세력의 대연합을 위한 중대한 조건임을 천명하고, 진보정당들의 연대를 향한 세밀하고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 더해‘안토니오 그람시’의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라는 인용을 통해 진보세력의 불비(不備)를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대중을 설득할 대안이 없으면 진보세력의 발전은 어렵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작금의 진보정당들, 자유주의적 보수 이념에 안존하고 있는 민주당 등 야권 세력에게 시사하는 의미는 자못 크다 할 것이다. 또한 ‘청빈과 비움’의 정치를 실천한 자기성찰의 지도자였던‘故 제정구의원’의 “정의와 연대의식은 동전의 양면이다. 연대 의식이 없는 정의란 전두환 정권처럼 추악한 불의와 폭력이 된다!”는 말은 우리 정치사회를 향해 그 방향을 제시해주는 깊이 새겨야 할 정언(正言)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MB정권 2년에 즈음하여 갈수록 퇴행하는 우리사회와 정치현황, 그리고 향후 진보 진영이 갖추어야 할 역량과 자세에 대한 냉철한 진단과 대안을 제시한 당대의 독보적 정치평론집인 이 저술은 그대로 우리사회에 필요한 공동체 정신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는 탁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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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대한 백과사전 - 눈보라 속에 남겨진 이상한 연애노트
사라 에밀리 미아노 지음, 권경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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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충격, 아니 진기한 구성이기도 하지만, 기존의 선형적인 시간적 관념에 익숙한 접근으로서는 당혹스럽고 이질적인 작품이 되기도 한다. 소위 근대적 이성과 시간관을 전복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지향하는 이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기억의 편린들을 따라가는 형식은 “‘W.G.제발트’를 위하여”라는 발문처럼 제발트의 <이민자들>이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연상케 한다. 한편, 폭설이 휘몰아치는 어느 날 찌그러진 픽업트럭에서 한 남자의 시신과, ‘눈에 대한 백과사전’이라는 원고뭉치가 발견되었으며 이를 버팔로 경찰청이 수사하고 있다는 신문기사는 이어지는 이상한 구성을 하고 있는 눈(snow)에 관한 시(詩),희곡, 한 소녀의 성장기, 과학적 진실과 정의, 편지 등을 사건의 단서라는 관점에서 접근케 한다. 사실 이러한 시선을 갖도록 하는 것은 다분히 작가적 의도라 할 수 있는데, 그만큼 주의 깊게 작가의 안내를 따르지 않으면 공감을 형성키 어렵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이 허구의 백과사전은 여럿의 테마가 반복되는 형태를 통해 그들이 갈등하고 하나의 힘으로 통합되는 과정을 어떠한 인위적인 서사를 통하지 않고 전달하려는 무의지의 의지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허나 굳이 하나의 연결된 서사로서 이 작품을 이야기 할 경우 ‘Truth(진실)’이 정점이 되어, 폭설에 갇혀 사망한 아내(도라)의 사건을 야기함으로써, 바로 '눈(snow)'이 야기하는 세상의 모든 의미의 수집을 표면화하고, 그 이면에 숨겨둔 진실을 쫓게 하는, 그래서 그 자리에 그 삶의 진솔한 이야기들이 발견케 되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도 있다.

또 하나의 읽기 방식을 제안한다면 일종의 제안 링크(link)라 할 수 있는 관련 어휘 및 각주로의 안내를 성실하게 따라가면 헝클어진 선형적 질서를 회복 하여 감성의 연결고리를 맺을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방식을 취하든지 이 작품은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서서히 누적되는 감정적 공감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미묘하고 정밀한 지적 정보에 연결시킴으로써 ‘눈의 결정(結晶)’이 지니는 신화적인 낭만과 과학적 이성, 그리고 이를 아우르는 예술적 개념으로서 승화시키고, 작품 전체를 마치 영혼의 언어를 듣는 것처럼 만들어버린다. 결국 “위대한 예술이란 모름지기 개별성들 안에 보편성을 함유한 홀로그래픽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그대로 실현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몇 토막의 서사적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이는 “삶을 조정하기 위해”애쓰는 화자의 분투로써, 또는 “고문처럼 깊은 고통을 주는” 사랑의 날카롭고 강렬한 고통과 삶의 섭리에 대한 이해를 갖추는 보조적 장치라 하는 것이 오히려 옳을 것이다. 소설이 말하려는 많은 형태의 애달픈 사랑 중에서‘양극성’이라는 인간의 어쩌지 못하는 충동, 즉 “극은 극을 열망하며, 순수한 불의 존재와 순수한 얼음의 존재는, 한번 흘끗 본 다음 잊어야 할 희열이라는 사실”은 작품전체를 애틋한 분위기로 몰아간다. 그래서 ‘조화롭지 못한 조화’에서‘완벽한 조화를 이룬 눈 결정의 가지’로 이르는 사랑의 본질을 향한 탐색은 지금껏 이야기되던 사랑의 담론들을 전혀 새로운 세상의 현상들로부터 획득케 한다. 이 기묘한 순백색 결정에 대한 지향, 바로 그 감성적 공명이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일런지도 모르겠다. 손을 뻗지만 닿지 않았던 그 사랑에 대한 이야기, 차마 말하지 못하였지만 비로소 전달되는 그 진실의 이야기들이 신비롭게 펼쳐지는 사랑의, 눈의 우아한 컬렉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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