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결혼시대
왕하이링 지음, 홍순도 옮김 / 비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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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화, 근대화 등 서구의 자본주의적 물질주의를 단시간 내에 쉴 새 없이 흡수하고 있는 사회, 오늘의 중국이 거치고 앓아야 하는 일상의 갈등과 이해의 문제를‘결혼’이라는 화제에 담아 그 속성과 본질을 규명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삶의 성찰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유교적 봉건전통 문화와 서구의 물질적 합리주의 문화의 충돌, 농촌인구의 도시유입에 따른 사회적 갈등 등 우리의 70,80년대와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어 작품 속 인물들이 겪고 있는 홍역을 이해하는데 별도의 해석이 필요 없을 만큼 친근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배용준’, ‘김치’, 한국의 대중문화, 등속의 표현들이 잘사는 나라의 모델처럼 스치듯 지나가는 일화에서 이 작품의 통속적 취향을 엿볼 수 도 있는데, 오늘의 중국인들이 부딪는 현상이 아주 낯익은 것이라는 점에서 시시콜콜한 지나간 한국의 TV 드라마 속 장면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갈등하고 고통 받으며 때론 기뻐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들이 마치 한국인의 그것과 같은 동질감을 느끼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의사 엄마, 교수 아빠라는 선택된 가정에서 양육된‘샤오시’라는 도시 여성과, 오지 시골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지만 세칭 일류대를 졸업하고 잘나가는 IT기업의 촉망받는 사원인‘젠궈’와의 결혼생활을 플롯으로 하고 있다. 눈치 챌 수 있겠지만 이미 도농(都農)의 대비가 암시하듯이 이들의 일상이 순탄치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여전히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유교의 봉건적 관념이 젠궈라는 남성의 가계(家系)에 있어서는 굳건히 틀을 잡고 있다. 가부장적 질서, 남존여비, 여성의 자손번식자로서의 의무와 같은 전근대적 유산들과 관계에 의거한 청탁과 의존에 대한 의식 없음과 같은 무례함으로 대표되는 남자의 집안과 합리주의와 도시의 규격화된 일상, 근대적 이성주의에 기초한 도시 상류계층인 여자의 집안은 사사건건 마찰과 마주한다.

특히나 결혼이 사랑하는 두 젊은 남녀의 결합만이 아니라, 두 사람의 가족과의 결합이라는 인식과 대립하면서 이들 부부의 신랄한 갈등의 촉발은 끊임없이 양쪽 가계가 제공한다. 도시에서 출세한 아들이 가난한 시골의 부모와 형제, 친척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젠궈의 아버지는 사돈 집안의 도시에서의 영향력이 당연히 자신의 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샤오시는 이러한 시아버지의 무리한 요구에 반발하지만 번번이 수용하여야만 하고 고통을 감내하여야만 하는 수동적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노한다. 이야기의 중심을 관통하는 제재는 이렇듯 양가가 상징하는 도시와 농촌, 근대와 비근대의 쟁투를 담고 있지만, 이에 못지않은 또 다른 의미에서 선보이는 결혼관도 재미를 더한다.

출판사 직원인 샤오시와 그녀의 동료인‘젠자’라는 여성의 이성관과 결혼관인데, 대재벌 총수의 정부(情婦)로서 6년여를 보내지만 결코 자신과의 결혼을 거부하는 남자를 떨치고, 샤오시의 동생인 연하의 남성,‘샤오항’과의 사랑과 결혼을 향한 사회 관습과의 갈등과 이의 돌파를 위한 과정을 통해, 물질과 학벌과 같은 속물적 조건에 내둘리는 오늘의 젊은이들이 지니는 결혼관과 풍속을 해체하고, 결혼의 의미를 진중하게 정립한다. 또한 자신의 성취를 향해 철저했던 아내를 둔‘샤오시’의 아버지가 상처(喪妻)를 함으로서, 일생 한 끼의 식사에서부터 작은 보살핌등과 같은 아내로부터 내조를 받지 못했던 남자가 맞이하는 노년의 삶을 재조명함으로써 혼자된 노인들의 결혼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 감성적 접근은 물론 사회의 태도와 대중적 시선을 일깨우기도 한다.

일면식도 없는 남편의 형수(손위 동서)의 친정 할아버지의 상(喪)에 곡(哭)을 위해 마지못해 오지 산골로 찾아가지만, 그 사이 친정 엄마는 과로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단지 베이징이라는 도시의 잘 교육받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변에 과시하려는 시골 형수의 체면을 위해 반드시 가야한다는 남편의 채근에 못 이겨 이루어진 여정이었으니, 이 사건이 초래한 파국은 극단을 만들어 낸다. 이처럼 이 작품을 수놓는 두 남녀와 도농 가족 간의 에피소드들, 그리고 연상연하 커플, 노년의 삶을 통해 그네들이 당면한 시대의 충돌들을 유머와 재치 넘치는 문체로 그러나 진지함을 잃지 않은 노련한 의식을 담아 대중에게 사유의 기틀을 던진다.

이해와 배려의 과정, 물질을 넘어서는 사랑의 진정성, 자본의 중용적 가치라는 결말의 시사처럼 중국사회가 안고 있는 그네들로서는‘신(新)’결혼 시대의 통증은 수습되고 안착될 터이다. 그러나 우리사회가 선택한 배제와 배타, 물질숭배, 자본지상의 조건만이 남아있는 우울한 결혼시대는 오히려 구태(舊態)스럽고 케케묵은 이네들의 티격태격하는 신 결혼시대라는 과도기의 산물을 부럽게 한다. 오늘의 중국인들을 들여다보는 모처럼의 즐거운 계기가 되어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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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큐에게 물어라
야마모토 겐이치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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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말기인‘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지배하던 16세기, 다도(茶道)의 명인인‘센 리큐’라는 인물을 통한 다도의 미학, 그리고 이에 얽힌 사랑과 삶과 죽음의 서사시라 하여야 할까. 특히나 리큐(利休)다도의 정수(精髓)에 조선 여인의“처절한 아름다움과 범접할 수 없는 위엄, 그리고 우아함”이 놓여있음은 감성의 동요(動搖)를 일으키게 하고, 작품의 몰입을 재촉한다.

또한 익숙한 시간을 역행하는 구조는 주인공인 리큐의 사사(賜死)라는 최근의 사건으로부터 과거의 시간으로 안내하여 인물의 삶과 배경을 하나씩 드러냄으로써 한 인간이 추구하였던 미(美)의 본질과 그 진실의 심원에 더욱 매혹적으로 다가서게 한다. 그리곤 바로 그 정점에 천하제일의 다인(茶人)이 그토록 도달하려한 다도의 진수인 “깊은 산골 속에 돋아난 풀, 그에 깃든 생명의 빛”이자, “자연스러운 소박함 속에서 심원한 조화의 미”의 비밀과 근원을 발견케 한다.

한 꺼풀씩 벗겨지듯 드러나는 세월의 내밀한 과정에서조차‘녹유향합’이라는 열아홉 살 마주했던 그 강렬하고 선명한 숭고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구체화 할 뿐이다. 거기에는“소박한 풍정 속에서도 관능적인 풍윤함이 있는 독자적인 다도 세계”의 실재(實在)가 있고, “사람을 죽이는 한이 있어도 갖고 싶을 정도로 크나큰 아름다움”을 말하는 리큐 다도만의 본질이 있다.
문득,‘다도(茶道)’라는 소재 하나로 이 정도의 풍미 넘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 작가의 역량에 은근히 샘이 나기도 한다. 사실 작품 속 이방인들의 일본 다도에 대한 비판처럼 다다미 2,3장에 불과한 좁디좁은 방에 모여 작은 흙덩이에 불과한 다완(茶碗)을 들고 뻔한 칭찬을 해대며 맛없는 음료를 마시는 행위에 무어 그리 대단한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할 만큼 시시한 소재에서 말이다.

그러나 한 다도 명인의 삶의 역정을 통해 우리네 인생사를 구축하는 다양한 모습들, 다시 말해 한 순간이 지배하는 영겁의 진실,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이란 삼독(三毒)과 같은 사람의 본성에 내재하는 그 품격들이 격돌하는 사사로워 보이기만 하는 역사의 장면들을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최고의 권력자인‘히데요시’의 다두(茶頭)로서 세상의 존경을 받는‘리큐’라는 인물의 심미안(審美眼)의 본질, 화려한 서원다도와 소박한 와비다도를 승계하지만‘소박한 초암(草庵)속의 화사함’이란 그만의 다도 정신을 구성하는 이야기 속 사건들은 삶에 대한 예리하고 풍부한 해석을 품고 있다. 그래서 작품의 탁월한 서사적 재미를 뛰어넘는 인생에 대한 고귀한 사유를 외면키 어렵게 한다.

관백‘히데요시’가 ‘리큐’의 사사를 명령하는 죄목은 사실 변명에 가깝다. 사찰에 건립된 리큐의 목상이 불경스럽다는 것과, 다완을 비롯한 다기를 미적가치라는 명목을 통해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날카롭다는 뜻, 지나치게 날카로운 사람은 배척당한다.”는‘리(利)’라는 이름자나, 히데요시가 던지는 리큐의 내면을 관통하는, “ 너만큼 욕심과 색이 강한 사내는 달리 본 적이 없어.”, “ 마음속에 감춘 교만을 용납할 수 없었다.”는 것과 같은 말들의 반복과 같이 이미 처세, 아니 진정함에 대한 삶의 진실을 어겼다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의 결과라 해야 할 것이다.

한편 할거하는 지역의 쇼군들을 복속하거나,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 히데요시의 일화 등 역사적 사건들에 등장하는 행다(行茶)의 의례(儀禮)로 자연스럽게 다도의 효용이나 그네들의 삶으로 체화된 본질을 담아내는 의연한 문장들에서 절로 다도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읽게 된다. 한 낱 차를 마시는 형식례에서 사람을 꾀는 술책으로, 마음의 해방공간으로, 삶을 다스리는 호흡의 완급과, 생명의 우미한 광채까지 헤아리게 되며, 또한“아니꼬워 보이지 않을 만한 겸양”으로서의 고매함이란 어떤 것일지, “고담하고 처연할지라도 그곳에 활기찬 생명의 싹이 있어야 바람직”한 것이란 바로 무슨 형상일지, “똑같이 탐욕스러워도 사람에 따라 품성”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촘촘히 들어찬 삶의 태도와 근원을 읽게 한다.

다도와 그 다도를 일으킨 역사 속 다인(茶人)을 말하는 일본의 역사문화 소설에서 삶의 태도와 사람의 품격, 그리고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에 공감하는 것은 분명 문학이 주는 사유의 즐거움이 된다. 다만 그 역사는 특정한 하나의 민족이나 국가만의 역사일 수 없다는데 다른 시선이 놓여 질 수밖에 없다. 모두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히데요시가 조선정벌을 준비하던 시점이고, 더구나 조선의 다기, 조선 여인의 상품화와 약탈, 침략에 대한 향수 등이 소재로 등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다 노부나가’의 하룻밤 욕구를 채워주는 여성 역시 조선의 여인으로 설정하고 있다. 물론 문학작품에 민족주의적 보수성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편협한 비판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진정 한 편의 아름다운 회화(繪畵)같은 작품으로 그 섬세함과 수려한 문장들에 매혹되지만 한편의 씁쓸한 심정을 그저 놓아버리기만은 쉽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 될 것이다.

리큐의 아내 소온의 말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는데 몸은 달콤한 열을 띠”게하고, “그것이 더욱 서글프고 안타깝게”다가오는 작품이다. 아마 ‘탄탄한’작품이란 이 작품을 위해 만들어진 표현이리라. 삶의 열정과 이상을 다도 미학에 버무려낸 또 하나의 역사소설 걸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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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종말시계>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석유 종말시계 - '포브스' 수석기자가 전격 공개하는 21세기 충격 리포트
크리스토퍼 스타이너 지음, 박산호 옮김 / 시공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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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 연료인‘석유’의 고갈로 인한 인류의 암울한 미래상 또는 인류문명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2009년12월10일자 영국의 시사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 Economist』를 통하여‘국제에너지기구(IEA)’가 '피크 오일(peak oil)'이 2020년에 닥칠 것임을 공식 인정함에 따라, 우리들의 일상은 유가의 상승에 따라, 어떻게 변화 될 것인지, 경제, 정치, 사회에는 무슨 일들이 발생할지, 그래서 우리들은 어떻게 이 변화되는 환경에 대처하여야 할지, 또는 준비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미래 보고서라 할 수 있다.

기괴한 낙관론들에도 불구하고 석유는 고갈될 것이며, 그 고갈을 향한 총생산량의 감소로 가격은 불가피하게 엄청나게 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진실이다. 유가가 오르지만 저마다 자신의 경제적 능력이 수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과연 그 수용 가능한 유가의 수준이란 어느 수준일까? 이대로 가만히 앉아 지금의 10배로 뛰어오른 유가에도 우리의 산업기반과 가정경제가 버텨낼 수 있다고 보는가? 아마도 3~4배만 되어도 거의 모든 산업은 정지되고, 도로에 움직이는 차량은 극단적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물론 유가의 상승에 따라 기술, 정책, 산업 제반에서 이의 대책을 준비하고, 그 구체적 실행에 착수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싶다. (한국의 국가정책에서 이러한 대책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적이 없음) 석유의 공급부족이 결국 지혜로운(?) 인간들에게 일정한 조정기간을 거쳐 새로운 에너지 시스템과 산업을 창출할 것이고, 인류의 일상도 거기에 맞게 재구성 될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임기웅변의 대응책으로 이러한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도 터무니없거니와, 설혹 정밀하게 구성된 준비가 있더라도 오늘의 세계사회의 일상은 거의 모두 석유에 의존하고 있기에 그 새로운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간과 재원이 요구될 것이다. 아마도 기나긴 ‘조정기간’에 심각한 실업, 극심한 경제 불황, 상상을 초월하는 식량난 등 국제분쟁으로 인한 고통과 참담함은 실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우린 이러한 예측 가능한 시련을 극복키 위해 지금이라도 준비와 실행에 착수하여야 할 것이다.

이 저술은 이와 같은 곧 다가올 위기의 가능성에 대해 갤런(gal)당 유가(油價)의 추이에 따라, 불가피하게 변화되는 상황과 그에 대한 대처방안, 실제의 움직임을 분석, 예측, 설명하고 있다. 1 갤런 당 4달러에서 1 갤런 당 20달러에 이르기까지 9단계에 이르는 유가의 단계별 상승에 따른 인류사회에 미치는 파장은 실로 가공할만한 위협이 될 것이다. (*1갤런은 3.785리터)
4달러에 이미 주요 산유국의 절반이 생산을 줄이고 있으나, 여전히 소비에 열광하는 인간들은 절제와 위기의 심각성을 체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6달러에 이르면 이러한 인간사회는 아무런 대비도 없는 상황에서 이 변화의 촉발을 감지하기 시작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물론 유가의 상승이 부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유가가 10퍼센트 오를 때마다 교통사고 사망률이 2.3퍼센트 감소하고, 1달러 오를 때마다 비만관련 질병 사망자가 미국에서는 1,000명씩 감소할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경찰등 관용 차량의 사용은 절대적으로 감소할 것이며, 이는 시민과 경찰의 친화와 호감 증대, 범죄의 감소라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니 불행 중 다행이란 것이 이런 상황을 일컫는 것일 게다.
8달러에 이르면 드디어 석유를 이용하는 항공사 등 직접산업들의 대학살이 본격화 되고, 사람들은 이동 수단의 비용을 감당 할 수 없어 인구와 생활시설이 밀집된 도시로 집중될 것이며, 유흥과 여가시설 등은 대부분 문을 닫을 도리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개인이 사용하는 차량은 모두 멈추어 차고와 주차장에 먼지를 안고 서 있을 터이다. 대규모 실업과 석유에 기반하는 제품 물가의 기하학적 상승으로 가계가 절망에 떨 것은 자명하다.

이에 대해 이미 미국 등 선진 여러 나라들은 전기차와 전기차의 상용적 기반을 위하여 송전시스템 및 관련 기간망의 구축을 위한 실행에 착수하여 정부, 전력기관, 관련 산업분야가 일체가 되어 구체적 예산은 물론 실행일정에 따라 그 단계별 이행을 하고 있을 정도이다. 충격을 완화하고 삶의 지속성을 유지키 위한 진지한 노력을 벌써부터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10달러에 이르면 “진보와 기술에 대한 보루”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며, 플라스틱 사회는 영구히 종말을 고하게 될 것 이란다. 그러나 우매한 인간은 12달러가 되어서야“소득을 갉아먹는 에너지의 전성시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자각하게 된다니, 그 탐욕스러움은 자신들의 종말을 목전에 두고서야 깨달을 정도로 어리석은 모양이다.

교외 주택의 가치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대형할인점의 시대는 종지부를 찍고, 동네의 상점이 부활하며, 도심 주간고속도로는 영구적으로 철도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대도시는 더욱 조밀해 질것이다. 14달러에는 급증한 운임비를 감당할 수 없어 세계화는 역행하고, 해외의 생산기지는 자국으로 철수 하게 되며, 쓰레기처리 비용으로 신문지, 포장지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급기야 식품네트워크가 붕괴되고 지역농장 중심의 일상으로 회귀하는 16달러 시대, 그리고 대부분의 이동과 수송은 철도 네트워크에 의존하여야 하며,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미국의 군대도 전투기와 탱크, 함대의 에너지문제로 그 역할을 최소화하여야 하는 18달러 시대를 거쳐, 20달러 시대는 더 이상 석유를 이야기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두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저자는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지금이라도 이 엄청나게 긴 조정기간에 발생 할 고통과 시련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과시적 소비행위를 지양(止揚)하고, 절제의 미덕을 최선(最高의 善)으로 하는 겸허함의 자세로 전환하여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곤 석유 의존적 인류의 산업기반을 ‘전기’를 기반으로 하는 산업체제로 이전하는 준비와 실행에 착수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핵폐기물 처리에 문제를 지니고는 있지만 원자력 이상의 대안을 현재의 인류는 가지지 못하고 있는 이상 유력한 기간자원으로 육성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저술의 세부적 예측사례와 실행방안에는 미래 산업에 대한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방향들이 실재하고 있어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미래 대책을 위한 정책 컨설팅의 보고(寶庫)라고도 할 수 있다. 치솟는 유가는 분명 우리들의 집, 차, 지역, 상점, 직장 등 삶의 형태를 바꿔 놓을 것이다.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 그리고 후손들을 위해 어떤 세상을 넘겨줄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사유의 근원을 제공 한다.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임박한 우리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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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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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낯설지 않은 인물들, 뭔가 지나친 일과는 거리가 먼 우리들의 지극히 평범한 얼굴들, 바로‘나’들을 만나는 것만 같다. 그래서 수록된 작품들에서 근자의 자극성 짙은 젊은 작가들의 그것과는 다른 어떤 안식과 안도 그리고 가을 햇살이 튀어 오르는 잔잔한 호수의 물결 같은 마음의 진정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칼날 같은 비평가의 시선이 요구될 여지가 없다. 윤대녕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내 기억이고 나의 삶들이어서 긴장감을 상실한 채 나의 내면이 되어 가슴이 먹먹해져 올 뿐이다. 그렇다. 작품들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바람이 불고 있어 아프고, 하릴없이 그 바람 맞으며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 있어 아리다.”아마 마지막 수록작인 <여름, 여행>의 話者가 “가슴 속에서 무언가 뭉텅 빠져나간”,‘밀물 같은 그리움’을 되뇌는 심정과 같은 것이리라.

작품 속 인물들을 따라가다 나는 가만히 나의 기억들을 쫓는다. 아득히 돌아서 마주하는 그리움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 내 일처럼 고개를 끄덕이게 하던 <대설주의보>의 윤수와 해선에게서, 지나간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동대문 뒷길의 화랑과 아련한 한 장의 사진을 떠올리게 하는 <풀밭위의 점심>에서 평론가의 말처럼 “삶의 온갖 휘장을 걷어내고 난 뒤에 남는” 나의‘맨 얼굴’을 보게 된다.
익숙한 삶의 심리적 동요와 갈등들, 은폐되고 드러내지 못했던 그 감정의 찌꺼기들, 감히 표현되지 못했던 아련한 일상의 관계들이 애잔하게 떠돈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7편의 작품들 모두에서 진정한 원형의 사람, 삶을 구성하는 그 시시해 보이기만 하는 일상성의 진실을 읽으며, 우리 사람들의 삶을 표상하는 수많은 소설 작품들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가까이의 나와 우리를 느끼게 하는 작품은 흔치 않았다는 생각을 갖는다.
한 남자의 情婦로서의 삶을 끊어내기 위해 자해에 가까운 단절의 의식을 치루는 <보리>의 주인공, 수경의 안간 힘에서, “여름 한 낮 햇빛에 뜨겁게 타고 있는 빈 마당을”을 바라보며, 견디기 힘든 시원적 고독의 통증을 앓는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의 인물들에서 여리고, 다치기 쉬운 인간 본원의 아릿한 유대의 고통을 느낀다.

알고 있지만 비켜가던 사람들의 민낯으로 드러난 비릿한 자기연민의 사연들은, “알고 보면 서로 사정이 똑같더이다.”가 된다. 어느 한 계절이 다가 올 때면 애써 자신을 감추고 무덤덤한 낯 선 이야기만 하다 돌아서왔던 그녀에게 지금이라도 달려가고 싶고, “마음의 불이 식어가는”그래서 “나이 들어가는 남자의 떨림과 만성적 피로와 허무함”을 달래던 오랜 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도 불현 듯 가슴 가득히 그리움과 함께 몰려온다. 이별도, 해후도, 용서도, 미처 챙기지 못한 결백의 양심도, 외로움과 그리움까지도 정말의 우리의 감성과 우리의 문체로 다가온다.

우리의 지명(地名)들, 그 산하(山河)에 내린 눈과 비와 햇살을 오롯이 품고 있는 익숙한 자연의 모습들, 그 자연을 닮은 사람들, 바로 우리문학 고유의 애상과 서정성을 물씬 담고 있는 윤대녕의 이 소설집은 그대로 나와 우리와 일체가 되고, 허무와 공허, 잔인해 보이기만 하는 삶을 어루만져 준다.
한편의 이야기와 나의 회상을 반복하며 어느덧 7편을 끝낼 때의 그 휘감아 도는 적요한 느낌이 모처럼의 차분한 진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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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인간의 신비를 재발견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과학, 인간의 신비를 재발견하다 - 진화론에 가로막힌 과학
제임스 르 파누 지음, 안종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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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사회 전반의 사고를 포획하고 있는 3대 전환적 사고로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리고 다윈을 꼽는다. 저자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이론은 부실함이 이미 입증된 것이라 단정 짓고, 21세기에도 여전히 인간을 해독하는 사고인 진화론에 대해 명백한 오류를 지닌 과학이라 지적함으로써 물질주의적 기반의 과학은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이 저술의 전체를 유유히 흐르는 핵심적 사고는‘이중 실재’, 즉 인간의 이해에 있어서는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형성력의 존재를 인정해야한다는 논리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작용을 단지 두뇌의 전기적 화학적 작용의 단순한 결과로 말하는 것은 사실을 호도하는 물질중심 과학의 오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결과론적인 내용만 얘기할 경우 마치 그럴듯한 주장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플라톤과 기독교 이원론의 부활, 그리고 데카르트의 영혼설까지를 포함하여 기독교라는 제도종교의 복권이라는 의도가 있으며, 보다 궁극적인 의지는 진화론을 대체할 수 있는 인류미래를 위한 진정한 패러다임으로서‘지적 설계론’을 내세우는 것이다.

사실 책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은 과학적 접근처럼 보이지만, ‘신비’와 ‘영혼’이라는 단어의 위력을 설득키 위한 의사과학(擬似科學;pseudo)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들은 과학을 비판할 때 항상 신비주의와 영혼을 얘기하며 본질을 흐리게 하는 일관된 패턴을 사용한다.
또한 이 책이 아주 흥미로운 것은 ‘리처드 도킨스’의 저술 중 진화론에 입각한 시정(詩情)넘치는 과학을 이야기하는 『무지개를 풀며』에 대한 모방을 하고 있다는 점인데, 특히 영국 시인‘존 키츠’의 동일한(물론 반대의 의미로서)인용에서부터 유전자와 뇌과학이라는 정확히 일치하는 소재를 이용하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속내를 감추는 저자의 광신적 의지에 실소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다윈의 진화론이 오류로 점철된 비과학적 이론이라 비판하고 폄훼하며 조롱하는 논리는 그야말로 단순하다. 왜 진화의 과정을 볼 수 있는 증거, 즉 수 백 만년, 수 천 만년 전의 화석뼈가 발견되지 않느냐는 것이며, 또한 캄브리아기의 지층에서 발견되는 고생물 화석의 경우 전 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생물이 무진장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다윈의 점진적 진화이론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비판의 대상으로 인용하는 진화생물학자인‘스티븐 제이 굴드’는 진화양상은 대부분의 기간 동안 큰 변화 없는 안정기와 비교적 짧은 시간에 급속한 종분화가 이루어지는 분화기로 나뉜다는‘단속 평형설(punctuated equilibrium)'에서 입증하고 있음에 대해서 외면하는 것으로 대처하고 있으며, 화석뼈의 발견은 화학적, 물리적 현상을 이해하고 있다면 거의 억지에 가깝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와 같은 진화론의 공박을 지원하기위한 기반으로 게놈프로젝트와 두뇌지도가 사실상 실패한 과학으로 지금까지의 결과 이상의 과학적 성취는 불가능하다고 단언을 내리고 있다.
저자의 이 두 과학적 시도가 지니는 한계와 과학의 오만에 대한 경고가 타당성 있는 지적이라는 점에 공감한다. 인간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DNA의 서열들과 암호가 말하는 의미를 알았다고 해서 그 암호가 어떻게 인간의 개별 장기들을 만들고 영향을 주는지, 더구나 ‘조절 유전자’의 경우 파리, 쥐, 인간에게 완전히 동일함에도 다른 생물, 형태를 만들어내는 지를 설명치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뇌의 영역별 기능을 파악할 수 있다고 자만하였지만 뇌의 활성화 상태는 오히려 뇌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시스템화되어 움직이는 모습을 당혹스럽게 봐야 하는 결과거나, 동일한 사고와 판단의 상황에서 청년과 노인의 뇌 활동영역이 전혀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오히려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저작에 있어서 원형질적인 두뇌에서 일어나는 전기자극이 어떻게 엄청난 범위의 정신생활과 독특한 생각, 기억, 신념이라는 비물질적 형상화를 만들어 내는지에 대한 의문과 이를 위한 반증들은 과학으로서 보다는 철학적 숙고를 요하는 과제라 하는 것이 타당하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에 더해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 만능적 사고가 조성해 낸 오늘의 물화된 세상에 대한 폐해의 지적은 현대 과학에 대한 준엄한 비판으로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은 가설에서 출발하여 이를 입증하고 오류를 수정하며 진일보된 이론으로 정착하며, 진리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아닌가?
한계와 불가능이라는 단언적 선언이나 말하지 못함을 이유로 과학을 부정하는 논리는 올바른 도리는 분명 아닐 것이다. 과학이 반성하여야 할 부분은 이 저작의 지적을 넘어 근대산업사회가 시작된 이래 작금의 시장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저지르는 인간의 상품화처럼 사고의 대전환과 진정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요구는 수없이 지적되고 시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진화론을 전면부정하고 지적설계론을 부르짖을 일은 아닌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라는 비(非)물질계에 대한 성찰, 그리고 신유전자 프로젝트들의 겸허한 되돌아봄을 생각케 하는 저술임에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배려하는 척하면서 멸시하는 사이비 과학의 대표적 방법론을 구사하며, 진정한 과학에 동기를 부여해야 할 경이로운 감정 대신 그 사생아인‘신비주의’와‘초월성’과 손잡은 음흉한 엉터리 과학을 표방하고 있는 점은 안타까운 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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