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스웜 -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세상을 뒤바꾼 가장 영리한 집단
피터 밀러 지음, 이한음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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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집생활을 하는 사회성 높은 곤충이나, 새나 물고기와 같은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의 행동은 우리 사람들의 눈에 그저 신비스럽기 그지없을 때가 있다. 먹이가 있는 곳의 최단경로를 찾아내는 개미나, 최적의 거주지를 선택하고 판단하는 벌의 행동, 일시에 날아오르고 멋지게 V자 대형을 이루고 날아가는 새 떼의 우아하기까지 한 군무(群舞), 엄청난 높이로 정교하게 쌓아 올려 진 흰개미의 흙 탑 등은 그네들에게 무언가 인간을 능가하는 지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까지 갖게 한다.

사실 우리 사람의 직관이라는 선입견으로 보게 되면 그들의 일사불란한 행동은 마치 탁월한 지능을 갖춘 강력한 리더에 의해 정교하게 계획, 설계되고, 물샐 틈 없는 감시체계 속에 실행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오랜 시간 관찰을 해보면 어떤 명령에 의해 움직일 수 없음을 이내 발견하게 되는데, 광활한 대지위에 않아있던 수천의 새들이 동시에 날아오르는 것은 특정한 누군가의 지시가 전달되어 그 전달이 1킬로미터 떨어진 동료에게 이르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또한 개미들이 먹이를 찾으러 군체(群體)를 떠나 특정 장소로 가는 경로를 누가 알려주는 것인가 하면 결코 알려주는 개체도 없으며, 지시자도 없다는 것을 이내 발견하게 된다. 아무도 알려주는 이나 지시자가 없음에도 어떻게 완벽한 시스템처럼 조직화되고 과업이 완성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원리와 속성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이득이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궁금증의 비밀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이 저술은 매혹적이지만, 그 비밀이 발상의 전환은 물론 창의적 적용을 통해 우리 인간사회의 고민을 해결하는 지혜까지 선사하고 있어 지적쾌락에 더해 복잡계를 이루는 오늘의 사회를 이해케 하여 실용적 이익까지 거두게 하는 영리한 저작이라 할 수 있다.
개미의 먹이 찾기 이동경로에서 복잡해진 영업 네트워크 구축방법을 찾아내고, 꿀벌의 거주지 선택에서 집단지능과 지식의 다양성이 만들어내는 지혜를, 그리고 새떼의 군무에서 로봇지능의 알고리즘으로 발전케 하는 것처럼 발상을 자극하는 무궁무진한 원천적 지혜들을 발견하게 된다.

먹이가 있는 곳에 가려면 몇 갈래의 길이 있지만, 개미가 지나는 곳에는 페로몬이 남는다. 짧은 경로를 지나온 곳은 긴 경로로 간 개미의 밀도보다 시간적으로 빠르기 때문에 페로몬이 다른 경로보다 짙게 되고 그 짙은 페로몬은 개미들을 안내한다. 결국 점진적으로 개미들은 가장 짧은 경로로 모여든다는 것이다. 단지 개체의 본능적인 행동방식이 의미 있는 집단행동이 되는 것으로, 그저 개체 자신의 행동일 뿐이지만 집단으로서는 조직화된 행동이 되는 것과 같다. 여기서‘자기 조직화’가 창발하는 조직구성을 위한 방법론적 힌트를 획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한편 새로운 거주지의 마련을 위해 벌들이 하는 선택의 과정은 흥분을 자아낼 정도이다. 몇 곳의 장소를 물색한 정찰벌들의 반복되는 춤을 보고 후보지를 지지하는 벌들의 비율이 적정수준에 이르기까지 검토와 지지자가 늘어남으로써 최상의 결과를 선택하는 벌 무리의 지혜는 소위 '대중의 지혜(wisdom crowds)'가 영리함을 능가하는 단적인 실례가 된다. 갈수록 거대해지는 기업조직에서 다수의 구성원들이 하는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탁월한 예측이 될 수 있으며, 다수가 발하는 다양함이 영리함을 능가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예증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집단의 다양성을 “2+2”와 같이 단순한 과제에 적용하는 것은 어리석을 것이다. 게다가“거만한 지도자, 다양성이 부족한 구성원, 외부 정보의 경시”와 같은 불행한 특징들이 조직될 경우에는 오히려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게 되기도 하며, 전체 시스템을 보지 못하고 개인의 국지적 부문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시스템의 복잡성을 외면하여 재앙을 초래하기도 한다. 우호적인 경쟁, 지식의 다양성은 추구하여야하지만 환원적 편견이나 집단사고(groupthink)와 같은 우는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분산지능이 망(network)의 자기 치유적 기능을 위해 어떻게 효율적으로 발휘되며, ‘간접협동’이라는 독특한 영리함을 보이는 흰개미의 개체 수준의 단순한 규칙의 고수가 자기환경에 전략적이고 전술적인 대응책인가와,‘적응모방’이라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라는 지극히 단순한 알고리즘이 그 멋진 새들의 집단비행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실험과 연구사례의 설명은 정보공유 체계의 잇점, 로봇 지능개발 분야의 적용처럼 우리세계에 기발한 아이디어와 전략을 제공하기도 한다.
체커게임이나 스워머 노이드(swormer-noid)와 같이 개체의 단순한 행동의 경험 누적만으로 조직이나 집단의 의미있는 패턴을 구사하게 할 수 있다는 발상은 바로 이 저술이 통찰하고 지향하는 지성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긍정적인 시사도 있지만 메뚜기 떼와 같이 대규모로 인간의 작물에 손실을 끼치는 부정적 행동에서도 우린 지혜를 찾아낼 수 있다. 결코 군집 생활을 하지 않는 메뚜기가 어떻게 재앙을 일으키는 약탈적 무리로 변하는 것일까? 이유는 메뚜기의 근육질 뒷다리가 자극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개체가 지나친 밀도로 과밀상태임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 잡아먹으려는 행동과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행동의 촉발, 즉 생존을 위해서는 계속 움직여야 한다는 충동이 거대한 떼를 형성하여 인간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는 약탈자가 되는 것인데, 단지 메뚜기 뒷다리의 사소하고 하찮은 자극이 엄청난 결과로 이어지는 자연시스템의 한 사례이다. 이와 같은 예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연례 성지순례일에 발생했는데, ‘자마라트’라는 세 기둥에 의식을 치루기 위해 수십만의 행렬이 일시에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앞 사람의 1분도 안 되는 지체가 대(大)행렬의 순간적인 정체로 수 백 명이 압사한 사건이다. 사건은 불규칙한 흐름의 패턴, 군중의 밀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시정되었는데, 이때 메뚜기의 행동연구는 훌륭한 모델이 된다. 또한 직접적으로는 메뚜기‘떼’로의 전환을 예방하는 방책으로 밀도의 역치수준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발견도 가능케 한다.

극도로 복잡해져만 가는 네트워크(網)사회라 할 수 있는 오늘의 현대사회는 이처럼 어디선가의 작은 문제가 사회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다. 시골길 어느 고압선에 나뭇가지의 작은 접촉이 대도시의 정전을 유발하고, 산업전체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기도 하며, 예기치 못한 대형 자연재해는 인간사회를 혼란에 빠뜨려 순간 사회기간망을 무용지물로 만들기도 한다. 너무 복잡해서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했는지, 무슨 문제인지를 파악하는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개미사회의 자기조직화나 분산지능, 자기 치유적 기능,  꿀벌의 지식 다양성에 대한 양(Positive)의 되먹임 행동, 단지 이웃과의 상호작용이라는 단순 알고리즘에서 우린 이들을 해결할 해법을 발견하게 된다. 하찮은 미물, 무심코 보여지는 새와 물고기의 움직임에서, 바로 생물의 진화라는 자연 시스템에서 상상치도 못했던 지혜를 보게 된다. 영업, 물류, 조직 등 비즈니스 문제를 비롯한 현대 사회의 난제들을 해결하는 해법이 명쾌하게 설명된 그야말로 탁월한 혁신 전략 총서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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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 얽힌 몇 가지 에피소드


작품 면면이 저항적이고 비딱함이 뚝뚝 묻어나는‘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라는 2010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몇 가지 주목되는 일화가 이 작가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왜 작품의 제재들이 그럴까하는 의문을 부분적으로 해소시켜줄 것 같다.

마리오의 인생 전반에 아마 결정적이고도 커다란 영향이 되었을 사건이라 할 수 있으리라. 고모 훌리아(Julia urqui di illanes)와의 결혼이다.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29살 유부녀와 19살 조카의 결혼은 페루 상류계층이었던 이들 사회에서는 도덕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버거운 사건임에 분명했다. 뛰어난 가문을 가진 미모의 여성인 고모와 미소년 마리오의 사랑은 그의 자전적 소설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에서와 같이 감각의 떨림, 밤의 신화가 아니었을까?

1955년 결혼하여 1964년 마리오의 배신으로 헤어지기까지 10년간 이어진 이들 부부생활을 엿보게 하는 몇 몇 사진을 보면 훌리아가 주도하는 그들의 관계를 추측케 하는데, 그녀가 1988년 출간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와 함께한 나의 인생』이란 자서전에서 마리오의 작가적 역량이 꽃을 피우게 하는 절대적 존재였음을 주장하는 것처럼 그녀의 헌신적인 지원은 그의 사회진출에 중대한 기반이었던 것 같다.

이후 두 번째 아내인 파트리샤(patricia Llosa)의 출현이 이들을 갈라놓았으니 훌리아의 증오와 상처는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어쨌건 이 결혼 생활은 『새엄마 찬양』이나 『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라는 작품에서 변조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할 수 있는데, 결코 배신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여신으로서 숭배되었던 대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또 하나 마리오와 남미문학의 거두로 잘 알려진‘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erquez)’와 치고받은 사건은 폭소를 자아낸다. 마르케스와 요사는 부부가 함께 어울릴 정도로 친근한 사이였는데, 요사가 한동안 스웨덴 여성과 바람이 나자 요사의 아내인 파트리샤를 위로하던 마르케스부부에 적의를 갖게 되었고, 급기야 요사가 마르케스에 주먹을 날려 그의 눈에 시퍼런 멍과 상처를 남긴 사건은 1976년 남미사회를 시끌벅적하게 하였을 정도로 대형 스캔들이었던 모양이다. 이 자유로운 영혼(?)의 여성에 대한 소유욕은 그야말로 그의 작품 속 작중 인물처럼 집요한 것 아니었을까? [사진: 멍든 마르케스]

이후 마르케스와 요사의 사이는 원수지간으로 변하였고, 2002년 마르케스가 자서전의 추천사를 요사에게 요청하면서 근 30년간의 오해를 풀었다고 하니, 이 에피소드는 거장들을 인간적 친근함으로 다가오게 한다. 성 모럴에서부터 종교, 정치,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주류의 정신에 예리한 반란과 저항의 성향이 그의 사생활과 오버랩되어 미소를 머금게 한다. 매력적인 소년이 75세의 노작가의 얼굴에 남아있는 것 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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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18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는 에피소드에요. 요즈음 제가 요사에 대한 모든 정보를 필리아님으로부터 얻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필리아 2010-10-19 08:50   좋아요 0 | URL
훌리아의 자서전이 출간되면 꽤 인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감사합니다~~

릴케 현상 2010-10-19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정말 재미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 2010-10-19 08:52   좋아요 0 | URL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마르케스의 미소짓는 얼굴이 재미있잖아요..ㅋㅋ,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1-05-25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를 읽다가
이 페이퍼를 읽게 되었어요. 정말 재미있는 에피소드네요.
특히 훌리아의 실물을 보게되다니요.
마르케스의 눈탱이 밤탱이도 ㅎㅎ
요사의 다른 책들도 더더 읽고 싶게 만들어요.
 
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 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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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술을 인식할 때에는 소위 칸트가 말하듯이 잠시 선악의 코드, 참과 거짓과 같은 윤리적 코드를 꺼두도록 습관화 되어있다는 얘기가 어느 정도는 맞을게다.‘뒤상’의 도발적인 <변기>와 같은 작품이 사실 일반 사무실에 있거나 용도 그대로 가정의 화장실에 있다면 그것이 무슨 예술작품일 수 있겠는가. 미술 전시장에 놓이고, 수식됨으로써 예술로 읽히도록 강요되는 것이 아닐까? 광기와 적나라함, 그리고 엽기적 몽상과 병적인 감각의 그림을 짧은 생애에 수없이 남긴‘에곤 실레’에 바치는 오마주 같은‘바르가스 요사’의 이 작품 역시 문학이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외설을 피하고 있다 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

이 다분히 병적인 화가의 그림 한 점 한 점이 허구의 이야기에 실려, 소위 건강한 정신이라는 판에 박히고 빈곤한 상상력과 획일화된 것들을 전복하고 인간의 사고를 옥죄는 사상과 가치들의 허위를 마구 찔러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금지된 상상력을 자극하고, 감추어진 것들을 파헤쳐 충족되지 못했던, 역설적이게도 병적이고 추잡함이라고 하는 것들을 드러냄으로써 비로소 풍요로운 인간의 정신세계를 완성하고자 하는 반란이 바로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은‘리고베르트’라는 환상과 편집광적인 남자의 비밀노트를 우리들이 훔쳐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작중 인물들이 노골적으로 성애장면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면, 마치 작품 전체가 관음증에 걸린 현대인을 배려(?)한 듯이 상상의 관능적 쾌락으로 안내되고 있다.

기원전 6세기 로마의 타키누스왕과 그의 아들에게 겁탈당하고 이를 고발한 후 자살한 여인인‘루크레시아’라는 정절과 정숙한 유부녀의 표상인 이름을 지닌 리고베르토의 아내, 그리고 의붓아들인‘폰치토’와 리고베르토, 이들 세 사람이 만들어내는 고통과 쾌락의 몽환적 세계가 펼쳐진다.[사진: Man Ray(만레이), La Prière, 1930]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세계, 내게 기쁨과 고통을 안겨주는 세계는 ~(中略)~ 상상력과 욕망과 예술적인 기교로 탄생한 인물들이 존재하는 세계, 내가 수년 동안 끈기와 애정을 가지고 모아온 그림, 책, 판화에 담긴 세계”라는 리고베르토의 관점은 그대로 소설이 표현하는 세계이다. 이처럼 미신과 편집광적이며 환상으로 넘쳐나는 남편의 세계를 이해하고 공유하던 루크레시아의 생활은‘순수함의 결정체’처럼 보이지만“천사의 탈을 쓴 독사”와 다름없는 초등학생인 의붓아들 폰치토의 함정으로 파괴되고, 이혼 후 독립된 일상을 살아가지만, 다중 인격체 같은 아이의 거침없는 기만에 저항하지 못한다. 이렇게 소설은 리고베르토와 루크레시아, 그리고 폰치토와 루크레시아라는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는데, 폰치토와의 이야기는‘에곤 실레’의 그림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으며, 리고베르토와의 이야기는‘관능의 미학’이란 전체의 주제를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루크레시아의 첫 연인이었던‘모데스토(일명 플루토)’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저질러보는 것, 세속적인 삶이 충동에 충실해지는 것”으로서의 뉴욕과 파리, 베네치아의 화려한 경로에서 보여주는 성희(性戱)가 보여줄 수 있는 상상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직설적인 묘사는 부도덕을 넘어서는 도덕적 상승의 최고의 경지라고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성애(性愛)의 장면 모두는 루크레시아가 리고베르토의 요구에 의해 침실에서 들려주는 것이고, 그 들려지는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관능의 쾌락은 성적 감각을 고조시키는 수단이 되고 있다. “욕망이 질투심을 밀어내는”경지, 과연 그것, 쾌락의 지고한 경지가 소위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도덕의 최고라는 말이라면 일견 논리적이지만 우리의 감성이 수긍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춘화(春畵)가 연상되는‘우타마로’의 판화 두 점이 내려다보는 리고베르토와 루크레시아의 관능의 내음과 음색이 가득한 침실, 한결같이 치마를 걷어 올리고 이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실레 그림에 집착하는 폰치토의 불경스럽기만 한 대화는 ‘만레이’의 사진,‘구스타프 쿠르베’의 음부를 드러낸 나신의 그림, 여인들의 향기를 그려보려고 시도했던‘클림트’의 <다나에>, 더구나‘아인란트’나 ‘로제 바이양’, 성의학자‘허벌록 엘리스’까지 인용되면서‘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부류의 변태적 성애를 일찌감치 넘어서버린다. 그런데 이 작품이 그리 단순치만은 않은 것은 종교에서부터, 페미니즘, 상류사회단체들의 위선과 모순, 기만성을 비롯해 보편성을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주류적 사고를 처참할 정도로 조롱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쾌락의 지고(至高)인 성희의 찬양은 바로 솔직하지 못한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회의와 도덕성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의 다른 표상임을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과연 무슨 이유로 이 무료한 우주에서 비틀거리는 팽이처럼 맴돌고 있단 말인가!”이 성적 쾌락에 관한 백과전적인 관능적 기억과 환상의 노트가 누비고 다니는 실제와 허구의 상상력에 자극되고 마비되느라 시종 경직되었던 감각세포들이 고생 꽤나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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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16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엄마 찬양'을 앞부분 몇장 정도 보았어요. 말씀하시는 내용이 서로 비슷하네요. 이게 연작인건가요?

필리아 2010-10-18 22:10   좋아요 0 | URL
연작은 아닌것 같구요, 작가가 에로티즘에 천착한 것 같습니다. 특히 회화를 통한 이야기 전개가 대다수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보이네요...//새엄마~,리고베르토~,나쁜소녀~ 세 작품이 동일인물들로 구성되었다는 걸 보면 연작의 특성도 있는것 같구요...
 
피플 붓다
한승원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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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사는 것일까? 이 난해하고 고통스러운 질문에 대한 답이라 할까?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은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세상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으로 창조해 가는 것”, 그래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인지를 엿보게 해주는 이 작품에서 깨달은 이의 자유롭고 거침없는 충만한 생명력으로 눈이 환히 열리고, 왠지 모를 가슴 뿌듯한 만족감이 휘감아 도는 감동에 젖어든다.

장학사와 교장이셨던 할아버지, 그러나 주변 이들의 시선에는 비천하기만 해 보이는‘염장이’로 죽은 이들을 씻기며 살아간다. 그리고 손자‘상호’는 베트남 어머니를 둔 절름발이 고3 소년으로 아이들로부터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한다. 이렇게 보면 소설의 축을 구성하는 이 두 사람에게서 사랑과 희망, 삶의 가치와 같은 미덕을 발견 할 수 있기나 할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빚에 쫓겨 도피한 부모를 대신해 소년 상호는 이렇게 할아버지와 단 둘의 생활을 이어간다.

할아버지의 고물자전거와 그 뒤에 항상 실려다니는 꽹가리, 기력을 잃고 아픈 독거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침과 뜸을 떠주기도 하고, 나무 그늘아래 노인들에게 소리를 들려주며, 손수 마련한 쑥물로 주검을 정성으로 씻기는‘우주의 청소부’, 할아버지 안교장은 미래가 확보되지 않는 모든 존재를 소멸시키는 시간의 잔인함을 이해한 자이다. 그래서 줄곧 하여왔던 교육계에서 졸업을 하자 다른 새로운 일, 즉 자신만의 미래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새내기로서 실천의 길을 걷는다.“나는 낙엽이다. 떨어져 내려 어린 나무들의 뿌리를 덮어주고 있다가 점차 썩어 거름이 되어”주는 길....
손자 상호에게 그런 염장이 할아버지는 짓궂은 아이들이 그를 조롱하고 비하하는 이유이며, 신체의 취약성과 피부색의 차이는 반복되는 괴롭힘의 대상이 되고, 이들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는 무력감은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소설은 이 두 사람의 삶을 매개하며, 또한 인생 덕목의 가치를 상징하는 억불 바위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억불산 자락아래에 있는 그네들 집에서 바라보는 자비로운 성상의 얼굴을 한 바위의 성스러움과 의기는 이들에게 의지이자 꿈과 희망의 가르침이다. 만인을 구제한다는 억불(億佛 ; People Buddha), 억불을 닮고자 하는 소년에게 할아버지의 모습, 무언의 삶의 행위에서 억불과 닮은 할아버지를 발견한다. 한 때 부와 권력을 가진 뭇 남성들과의 편력이란 사람들의 몰이해로 외면당하는‘송미녀’라는 노파의 병든 몸에 뜸을 떠주며 방치되고 포기된 그녀에게 사랑을 통한 삶의 의미라는 연민을 선물하며, 제자들과 베풂의 덕으로 모인 돈은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 소용하는 염장이의 삶은 억불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 작품이 더욱 매력적인 것은 소년 상호의 세상에 나가기 위한 홀로 섬의 과정에 스며든 이야기들, 그리고 할아버지 안교장의 우주의 시원, 생명력의 본질에 대한 거침없는 철학적 담론들이라 할 수 있다.
악동들의 해코지, 인생 진로의 선택, 빙충맞은 자신을 응원해주는 2년 후배인 누님같은 순영과의 풋풋하고 순박한 사랑으로 설레는 모습이나, 억불바위를 오름으로서 의지와 삶의 목표를 확인하고 마침내 괴롭히던 녀석과 맞장을 뜸으로써 유약한 소년시절을 졸업하고 새로운 인생의 길로 나아가는 일련의 성장기는 손자의 우물 속으로 자신의 시간을 흘려보내는 할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후원의 손길과 결합하여 인간의 성장에 대한 우리네의 관점을 한층 성숙시켜 준다. 
 

더구나 우주 성장의 시원(始原)으로서 여인의 배꼽이 의미하는 원초적 유혹과 인간성의 유지에 있어서 성적 쾌미의 가치, 산난초 꽃의 적갈색의 음험한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던 연꽃, 혹은 환혹의 구멍, 그 젊은 날의 송미녀의 허방 노릇에 대한 찬양은 여신(女神), 아니 숭고한 억불의 경지에까지 올려놓는다. 하~아, 미녀의 허방은 억불의 자비라! 그리곤 염장이라는 죽음을 씻는 이의 허무의 마주함은 생명력을 더 자유롭고 헌걸차게 키워나가는 것으로서, 죽음의 이해가 곧 성숙한 삶의 요소임을 역설하기도 한다.

이처럼 염장이 할아버지의 모습은 억불의 현신(現身)이며,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모습으로 읽히기도 한다. 또한‘알베르 카뮈’『페스트(흑사병)』의 주인공 의사‘리외’처럼 각박하고 쓸쓸한 세상을 치유하는 사랑과 희망, 자유의 화신(化身)이기도 하다.

한편, 자신의 성장을 확인키 위해 상호가 떠나는 다산 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무전여행의 여정에서 백련사 방장스님과의 조우 장면은‘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중 장돌뱅이 허생원과 동이의 오마주가 아닐까 하는 재미를 주는데,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었다는“그 늙은 스님의 갸름한 얼굴 윤곽, 쌍꺼풀 진 눈매,...”, “혹시 그 스님이 내 외할머니를 버린 그 한국군인 아니었을까”하며 ‘사랑과 배반의 슬프면서도 오묘한 역사’를 떠올리는 것은 이 소설의 사유가 달리는 그 폭과 깊이의 여정을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승원 선생의 그 어떤 작품보다 관능적이지만 또한 그 어느 작품보다 숭엄함과 경외를 느끼게 한다.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은 결국 한 길이며, 한사코 느긋하게 무늬를 따라 순조롭게 풀어내야 하는 것이 삶의 순리이며, 줄곧 하던 일을 졸업하면 반드시 새내기가 되어야 한다는, 정말 “찬란한 슬픔의 봄”같으며, “고귀한 순정의 눈물 같은” 인생교본의 결정체라 하여야 할 것이다. 오묘하게 가슴을 저리게 하는 감동이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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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고는 폭로적이고 저열한 이야기의 재미로 낄낄대는 부류가 있고, 불쾌감이나 분노를 서로 다른 의미에서 느끼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화끈거리는 자괴감으로 경제정의와 민주주의의 실천에 대해 깨달음이 있는 부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사실 도덕불감증에 걸린 물신주의의 이 사회에서 작가가 기대하는 야만의 역설을 이해하는 층이 얼마나 될지 조바심이 들뿐 아니라, 아마 재벌과 사회권력층의 비리를 훔쳐보는 관음증적 쾌락에 머물러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도 지워버릴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신자유주의 질서에 포획된 작금의 우리사회는 경제권력을 배제하고서는 정치를 말 할 수 없는 세계이며, 실제 시장경제만능의 자유주의와 경쟁논리의 기반위에 오늘의 정치가 놓여있다 해도 그른 말이 아니다. 다만, 작가는 정치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섰으니 이제 더 이상 경제민주주의의 실현을 뒤로 미룰 수 없다는 관점에서 펜을 들었음을 선언하고, 경제의 민주주의, 즉 경제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의 야만성을 생살 그대로 드러내 보여, 그 적나라한 야만의 역설 속에서 진실을 캐내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소설의 중심 사건은 재벌그룹의 탈법과 불법 하에 자행되는 재산상속을 통한 그룹승계, 자산축적으로, 이를 위한 막대한 비자금의 조성, 정계, 관계, 법조계는 물론 언론, 대학까지에 이르는 전방위적 물적 로비의 추악한 양태이다. 그리곤 탐욕을 지켜내기 위해 벌이는 재벌과 그 충견들의 썩은 내 나는 활약상이 천박한 이야기로 화려하게 장식되고 있다. 작중(作中) 재계 1위의 태봉그룹 임원인 1급 로비스트‘박재우’라는 인물을 경쟁그룹인 일광그룹에서 비밀리에 스카웃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정관계 등 전방위 로비에서 실기(失機)하는 탓에 일광의 총수가 형사처벌을 피하지 못했다는 판단에서 대대적인 로비관리조직을 구축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소위‘돈 싫다는 놈’없더라는 물신주의 최고의 신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자(者)일수록 뇌물의 경로를 중시하는데 이를 위해 탈 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공직사회의 핵심인물들을 조직에 흡수하는 것이고, 또한 민형사상의 법적 문제를 틀어막기 위해서 검사를 거액으로 스카웃하고, 대학은 사회의 이해관계가 없어 적대적 행위를 할 수 있기에 기부를 통해 행동을 틀어쥐는 행태로 이어진다. 결국 돈 앞에서는 진실과 거짓도 없으며, 선악의 구분도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탈(脫)도덕, 아니 무(無)도덕이라는 자본권력의 실체, 천박한 이 땅의 자본주의의 본 모습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 천명에 이르는 핵심 로비대상 망을 완성하고, 회장의 직할부대인‘문화개척센터’핵심측근 3인이 회장으로부터 각기 수고의 보상으로 30억원에서 50억원의 특별스톡옵션을 건네받는 장면은 그야말로 노동의 과실이 자본가의 약탈적 잉여로 전환되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을 보여준다. 오직 이기적인 탐욕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떠한 윤리적, 규범적 논리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작가는 이들 자본가 충견들의 입을 통해 돈에 환장하는 인간들의 심리상태를 마음껏 조롱한다. 제아무리 도덕군자같은 얼굴하고 있더라도 그 뒤에는 여지없이 천박한 탐욕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소설의 절정은 불법 재산상속과 그룹승계를 완료하였을 때 불거진 일광의 탈법행위에 대한 시민단체와 소수 지식인의 비판인데, 1조원에 이르는 비자금으로 도배질을 당한 정관계와 법조계가 비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고, 신문지상에 비판의 글을 게재한 대학교수는 재임용에서 탈락하거나, 정의의 심판을 요구하는 검사는 조직에서 버려지는 기이한 현실이 정당화되는 파렴치한 이 사회가 조명되고 있다.
재벌들에 대한 법의 판결문에 항상 등장하는‘국가경제와 사회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라는 터무니없는 구절처럼 사실 웃기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이건 한국사회에 만 있는 아주 독특한 법 윤리인데, 수조원의 불법, 편법, 탈법적 비자금의 축적과 재산상속이 처벌되지 않고 유야무야, 흐지부지 처리되고, 곧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것이다.

노예처럼 일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대다수 근로자의 고혈인 노동의 과실이 정당한 분배에 소용되지 않고 재벌과 그의 충견들, 부도덕하고 부패한 공직자와 권력자의 자본축적으로 전환되는 것은 아마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도 정의와는 한참이나 이격되었음을 인지할 것이다. 그러나 허연 탐욕의 침을 질질 흘려대는 충견들이 말하듯이 약간의 물질에 영혼을 파는 오늘의 상품화된 인간들은 자신들이 바로 노예임을 결코 알 지 못한다는 지적은 적확하고 또 명백한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이는“소비의 양식이 일상생활에서 계급의식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피에르 부르디외’지적처럼,‘아파트, 자동차, 적당한 교외의 휴식과 여행’을 확보하자 마치 자신이 스스로를 피지배자로 인식하기보다는 문화적 혜택을 누리는 계급으로 오인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대중의 우매함을 깔깔대며 비웃는 것이기도 하다.
 

더구나 국민총생산, 대외교역규모가 증가했다고 국가경제 발전이 이루어진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이 논리가 얼마나 기만적인지는 민중이 느끼는 삶의 질은 갈수록 하락하고 있음이 증명하고 있다. 노동잉여가 근로자에게 흘러가지 않고 소수의 자본가에게 탈법적으로 누적되는 시스템에서는 제아무리 국가경제가 신장하더라도 시민의 삶은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소설은 이러한 부정과 부패를 억제하고 투명한 경제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 시민단체의 역할과 시민의 적극적 참여를 역설하고 있다. 기업의 투명한 경영체계와 정당한 자원배분시스템, 공직사회의 윤리와 기강, 언론 및 대학 등 사회발언의 지배적 권력 등의 오,남용, 왜곡에 대한 시민의 감시체계가 역동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진정한 민주사회로의 성숙을 위한 필수적 수단이라고 말이다.

사회 환원과 분배, 그리고 사회정의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펄쩍 뛰는 이 땅의 천민자본주의의 체질이 그네들 스스로 변화할 가능성은 손톱만큼도 없다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천문학적인 비자금이 모아지고 사금고에 차명계좌에 부동산에 해외자산에 은폐되어 축적되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를 비호하는 도덕이 실종된 공직사회의 네트워크 역시 여전히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들의 계급을 인식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대중들은 자발적인 복종과 거수기의 노릇으로 알량한 생계를 이어가며 불의를 옹호하고, 자신을 해치는 시스템을 위해 싸운다. 낯부끄러운 자괴감과 이기주의적 부패자본사회로 변해만 가는 이 사회의 거짓과 악함 그리고 도덕적 불쾌감의 실체를 그네들의 무식하고 파렴치한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적나라한 패담(悖談)까지 무릅쓰며 세상에 드러내야 했던 진실의 언어에서 노 작가의 안타까움과 괴로움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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