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지 오웰 지음, 김욱동 옮김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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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하게 읽힌 작품 중 하나여서, 또한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인용되는 작품 중에 아마도 순위권에 들 정도로 그 노출의 빈도가 높은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 출판사 비채가 출간한 김욱동 교수의 번역 판본을 접하면서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이 작품의 감상을 생각하게 된다.
이 소설이 어떻게 한국사회에 유독 많은 번역 판본을 갖게 되었는지는 아이러니이지만 추정되는 이유가 있긴 하다. 우리사회에 처음으로 번역 소개된 1950년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 대결이 첨예한 장이었으며, 소위 우익은 이 소설을 소비에트연방으로 상징되는 공산주의의 패악과 실패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미에서 활용한 것이었고, 좌익은 노동자가 끊임없이 자본가에 의해 착취당하는 삶의 현실을 설명하는 효과적 도구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극렬한 이념의 갈등이 낳은 참으로 모순되는 좌우의 아전인수는 이 작품을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은 읽어야 되는 권장도서가 되는데 서로 이의가 없었다. 여기서 하나의 문학 작품이 작가의 의도를 떠나 얼마나 다양한 관점으로 읽히고 서로 다른 해석을 갖게 하는지, 바로 이것이 문학특성의 일면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게 하는 것이다.

소설은 장원농장의 주인인 인간‘존스’로부터 동물들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착취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려는 동물의 반란과 이후 동물들의 공동자치, 그리고는 권력의 갈등과 지배권력의 등장, 다시금 반복되는 계급사회와 노동력 착취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무력한 동물들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사실 너무도 극명한 플롯으로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인간과 인간사회, 그리고 사회주의를 나아가서 당대 소비에트연맹(구 소련)을 상징하는 동물들과 동물농장을 통해 후기산업자본사회의 노동자인 대다수 시민들의 비참한 삶의 현실과 부와 권력의 비열한 기만을 폭로하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견 스탈린의 소비에트연맹 건설이란 특정 사회에 초점을 맞추어 소설의 인물과 사건들을 실제의 인물들과 사건의 연장으로 해석하면 그야말로 단순명료해져서 정작 작품의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의도들을 놓치고 말게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소비에트공산주의의 초기 권력투쟁이나 자본주의 사회와의 갈등과 기만적 협력이라는 협소한 틀에 고정시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단지 하나의 가능한 독해로서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지, 마치‘조지 오웰’이, 이 작품을 하나의 단순한 맥락으로만 썼다고 주장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자본권력이 무산계급인 노동자의 노동력 착취기반에 서있음으로서 이 구조는 여하한 방식으로 개선하여야 할 당위성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 소재는 하나의 구성요소일 뿐이지 소설의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권력을 획득하고 권력을 유지 존속키 위해 계층을 다시금 분리하는 인간 사회의 구조적 본성에 대한 성찰이라는 보다 포괄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발단은 농장동물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메이저 영감이란 돼지의 훈시로 착취대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평등, 동물다운 동물(인간다운 인간의 은유)의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기본 권리에 대한 자각과 선동이다. 즉, 자본권력에 억압되어 착취만 당하는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혁명을 통해 개인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이론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시작은 당대의 무산계급인 노동자에 대한 사회주의의 염원으로 시작되지만, 이 후 돼지‘나폴레온’이 정적(政敵)인‘스노볼’을 무참히 쫒아내는 것과 같이 스탈린과 트로츠키를 연상하게 하지만, 이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으로서의 권력에 대한 본성의 발현이라 보는 것이 오히려 현대적인 해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권력이 획득되었을 때, 또한 이의 유지존속을 위해 인간이 하는 행동에 대한 일련의 통찰로 보면 권력자의 정당성 확보와 특권의식의 발효, 시민의 공포심을 자극하고, 두려워하는 요소를 통해 언로를 차단하거나 반대의견을 묵살하는 사악한 논리전술을 볼 수 있다. 동물들의 회의(懷疑)와 반대가 예상되는 정책을 권력자의 의도대로 실현코자 할 경우, 동물들이 끔찍스럽게 싫어하는 인간‘존스’나 추방된 ‘스노볼’의 망령을 떠올리게 하여 아무도 이의를 말 할 수 없게 하는 형식이다. “존스가 다시 돌아오는 거요! ~ 여러분 중에 존스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자는 아마 하나도 없겠지요?”이의를 달면 반동이 되는데 어느 누가 의견을 말 할 수 있겠는가? 한국사회에도 똑같은 패턴을 가지고 보수집권당이 한결같이 사용하는 전술이 있는데, 서민의 복지를 이야기하거나 정당한 배분과 같이 평등을 말하면 여지없이 빨갱이라고 몰아세우는 것과 같다. 빨갱이에 동조하면 반역이 되고마는 희한한 왜곡전술인데 권력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가장 천박하고 사악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동물농장은 권력의 탐욕, 사악함, 타락의 과정을 말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경쟁자를 숙청하고 추방하는 방법, 반대세력을 굴복시키는 방법, 추방된 정적을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법, 권력을 부의 축적수단으로 이용하는 방법, 특권화하고 계급화하는 수단과 과정 등 인간사회의 평등한 공동체의 구축이란 이처럼 어렵고 도달하는데 고통스러운 장애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랄 수도 있다. 소설에는 시종일관 시니컬한, 상황의 변화에 냉담함 혹은 무관심을 지속하는‘벤저민 영감’이란 당나귀가 있다. 이 자는 인간인 존스의 농장시절이나, 돼지 나폴레온의 농장시절이나 “굶주림과 고통과 실망은 변하지 않는 삶의 법칙”이라고 단순한 체제의 변화만으로는 시민 생활의 긍정적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네발달린 짐승인 돼지가 이윽고는 두발로 서서 인간의 흉내를 내기에 이르는데, 결국은 권력이 지향하는 것은 소유, 즉 물질을 향한, 그리고 차별을 통한 권위의 확보를 지향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소설의 결말은 인간사회에 하층계급이 있다면 동물농장에는 하층동물이 있으며, 더 열심히 일하면서 식량을 적게 배급받는 사회의 실현이라는 권력의 독재화, 전제화라는 권력이 부패한 상황에서는 어떠한 체제도 기만과 허위, 실패를 야기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해석을 한다면 소비에트공산주의의 위선과 실패를 고발했다고 하겠지만, 이젠 보다 폭넓은 읽기를 위한 독해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번역 판본에는 「문학과 정치」라는 김욱동교수의 동물농장과 조지오웰에 대한 해설이라 할 수 있는 평론이 80여 쪽 수록되어있어, 작가 오웰의 문학과 정치사상은 물론 소설 동물농장에 대한 심화된 읽기와 연구가 가능토록 지원되고 있다. 또한 소설의 본문에는 풍부하고 세심하게 주석들이 설명되고 있어 은유된 시대상과 결부하여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도록 되어있다. 이것이 자유로운 독서의 이해를 방해할 수 있음은 물론이지만, 이를 배경지식으로 참고한다면 초행길인 독서자에게는 유용한 안내자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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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엠 넘버 포 1 - 로리언에서 온 그와의 운명적 만남 로리언레거시 시리즈 1
피타커스 로어 지음, 이수영 옮김 / 세계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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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와일라잇’과는 또 다른 매혹적 판타지로맨스라고 하여야 할 것 같다. 드넓은 우주의 외계 생명체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가능성은 항상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는가? 고도의 문명과 초능력을 지닌 우리의 모습과 닮은 멋지고 아름다운 외모의 외계인과 사랑에 빠지고, 그(그녀)의 고통과 희망을 이해하게 된다면, 아마 멋지고 환상적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낯설고 두려운 경계심도 함께하지 않을까? 스토리가 얼마나 달콤하고 맛깔스러운지, 게다가 심장을 옥죄는 긴장감과 유쾌하기도 하지만 공포의 전쟁과 맞닥뜨린 초능력의 액션, 그리고 간간이 우리의 지성을 일깨우는 인류의 자기반성을 은유하거나 역사적 인식에 대한 무지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등 반짝이는 지적환기까지 완벽한 구성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오늘의 지구인들처럼 자기파멸적인 생태계의 파괴로 생물의 존속이 불가능하게 된‘모가도어’행성의 자원획득을 위한 야만적이고 무참한 침공이 지구의 문명보다 이만오천년정도 성숙한 행성‘로리언’에 가해지자 이를 피해 9명의 아이(가드)가 그들과 동수의 보호자(세판)와 지구로 탈출한다. 아이들은 세판들의 보호 하에 유산되어오는 잠재된 초능력을 키워, 그들을 멸종시키려는 모가도어인에 대항 할 정도의 힘을 단련하기위해 지구의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숨어 지낸다.

아홉 명의 아이들은 각기 넘버 원(one)에서 넘버 나인(nine)까지 일련의 번호를 가지고 있으며, 반드시 번호의 순서대로만 살해가 가능토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한 명의 가드가 모가도어인에게 살해 될 때마다 아이들의 발목에 하나의 원(circle)이 타는 고통과 함께 새겨진다. 넘버 원, 투, 쓰리가 살해되었다. 이제 넘버 포다. ‘나’, 넘버 포(No.4)는 추적을 피해 계속하여 보호자인‘헨리’와 함께 이주를 지속한다.

헨리와 넘버 포가 위장하여 새롭게 정착한 곳은 오하이오주의 작은 도시‘파라다이스’, 새로이 이주하는 곳마다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야 하는 도피자의 신분은 열여덟 살의 넘버 포에게는 힘겹기만 하다. 소설의 주 무대는 영애덜트(Young Adult)작품답게 넘버포가 전학 간 고등학교이며, 신선하고 사랑스러운 젊음의 생기가 넘쳐흐른다. 서로 끌리듯이 관심을 갖게 되는 넘버 포(존 스미스)와‘세라’의 달짝지근하고 향긋한 사랑의 내음이 시종 소설을 휘감아 돈다.
그러나 열정이란 감성에만 싸여있을 수 없는 것은 모가도어인의 추적이 차츰 좁혀져 오고 있다는 징후 때문이다. 드디어 넘버 포에게 첫 레거시(Legacy;잠재 초능력)로 루멘(Lumen;자체 發光, 發熱)이 나타나고, 점진적으로 염력의 능력까지 키우게 된다.

세라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보호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신분을 노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보호자인 헨리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떠 날 수 없어 위험의 거리는 가까워지기만 한다. 모든 생물이 학살되고 파괴되던 그들의 행성 로리언의 무참한 광경, 생존과 힘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도피는 무력감과 좌절로 내 몰기만 한다.
하지만“모든 걸 잃고 끝났을 때, 모든 게 암울하고 끔찍하게 느껴질 때도 언제나 희망은 있는 법이다.”라는 헨리의 희생을 무릅쓴 보호와 애정어린 자극의 언어, 세라의 사랑은 용기와 희망의 의지를 깨워준다.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동반한 액션, 황홀할 정도로 감미로운 사랑의 장면들이 정교하게 얽힌 구성 못지않게 오늘의 우리 지구, 자연의“생명을 빼앗아 그 힘으로 다른 것들을 죽이고, 생명을 파괴함으로써 정신을 조종하는”생존방식이나 어리석은 역사를 반복하는 우매함을 상징하는 듯한 모가도어인의 야만성은 자칫 공허할 수 있는 소설의 지적 균형감각을 지탱해준다.

소설의 압권은 넘버 포와 헨리, 그리고 동료들과 모가도어인과의 초능력이 부딪치는 공포의 장면인데 아마 곧 공개될 “카루소 감독과 마이클 베이”가 제작한 영화로 확인 하고플 정도의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다. “아이 엠 넘버 포(나는 넘버 포다!)”란 자긍심 넘치는 표현처럼 소설 또한 여느 판타지문학에 견주어 손색없는 완벽한 흥미와 생동감, 활력이 넘쳐흐른다. 아마 소설의 프롤로그의 암시로 보아 넘버포의 활약은 후속작의 예견을 가능케 한다. 혹 로리언은 우리 인류의 진짜 조상이 아닐까? 아니면 그들이 바로 인류의 창조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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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그 매혹적인 예술
에릭 부스 지음, 강주헌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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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돈으로 평가되는 상품이 되고, 20세기 들어서는 예술행사는 특권층의 사치품으로 전락했다는 주장이 사실과 그리 괴리된 말은 아닐 것이다. 특히 자기표현이 예술의 목적 그자체로 부각되면서 특별히 고상하고 추상적인 방법으로 변질되었고, 또한 제도화되어 계층을 구별 짓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어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 즉 생득적 권리로부터 멀어졌다. 그렇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예술은 없어도 상관없는 것이니, 삶에 실제로 유용한 것인가? 하는 의문에 회의적인 존재가 된 것이 사실이다. 말로는 예술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화가의 소품 한 점도 일반대중이 구입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재화를 요구하고, 교향악이나 오페라 공연은 언감생심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해득하려면 상응하는 교육과 안목을 가져야 하는데, 일반 대중에게는 사치스러운 투자이니 접근은 애초에 차단되고 만다. ‘부르디외’말마따나“계급적 에토스를 숨긴 문화적 구별짓기”의 자연스러운 도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술은 일상의 삶에서 극단적으로 이탈된 존재가 되어, 인간의 삶 자체였던 예술행위 본래의 기능인 공동체의 결속과 사회규범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으니 오늘의 대중이 예술을 일개 사치품, 사치행위로 간주하는 것을 그릇되다 할 수 만은 없게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처럼 예술 본연의 의미가 퇴색되고 정치적 의미부여가 강화되는가하면 표현방법, 도구의 변질이 지속됨에도 인간의 원초적 충동이나 표현과 같은 개인적 욕망은 변한 것이 없다. 즉 개인적 의미 찾기나 사물의 탐구, 자기만의 작품을 남기고자하는 욕구는 본능적인, 생래적인 것이니 예술이 인간을 떠난 적은 없었다고 해야 하는 모순이 남는다. 그러나 사회의 정치경제적 지배논리에 억눌려 인간 본연의 능력이 압도당하고 있을 뿐, 사람의 예술적 본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니 결코 모순이랄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에릭 부스’는 이 감추어지고 발현되지 못한 예술의 감각을 일상에서 발견하고 깨워내서 삶의 열정을 키워내고 창조적이고 아름다우며 풍부한 감성의 세계를 만들어내자고 예술가로서, 사업가로서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예술적 삶을 위한 방법과 과정, 그 방향을 진정한 언어로 알려준다.

예술은“이미 존재하는 재료를 바탕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것”, 즉 의미 있는 세계를 만들려는 노력으로서‘제2의 존재 방식’을 찾는 것이라고 한다. 삶은 고되고 피로한 과정이다. 이 존재자로서의 고통, 일상의 궤도를 맴도는 존재에게 새로운 감정, 생각, 새로운 세계관을 펼쳐보여 줄 수 있는 예술행위를 통해 내적인 정화를 갖고 상상력을 키우는 과정은 일상적 경험의 세계에서 얼마든지 성취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위해 예술행위를 습관처럼 살아온 예술가로서의 세상보기를 가르쳐준다. 우리의 일상적 주변을 의미있는 세계로 만드는 법을, 그래서 일상이 얼마나 매혹적인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얼마나 경이롭고 위대함이 가득한 세상인지를 깨우치게 한다.
예술행위를 하기위한 세 가지 방법으로 그는 세상 만들기, 세상 탐구하기, 세상 읽기를 제시하고 있다.

우선, 세상 만들기란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즉 타자의 창조물과 만나는 과정에서 서로의 내적인 속성이 하나가 되어 여러 재료를 질서있고 조화롭게 조정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진실을 만들어가는 입구를 조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타자에게 적극적으로 뛰어듦으로서 타자(사물)에 담긴 의미를 찾는 세상 탐구하기가 진행되며 이는 낯 선 세계를 알게 되는 기회를 낳는다. 그리곤 지극히 평범한 삶의 한 부분에서조차 삶의 중요한 의미를 찾으려는 태도로 세상 읽기에 나서면 상징적 의미로 가득 찬 세상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감춰진 예술적 능력이 발현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의 실천을 위한 예술의 내적 기술로 열망, 관찰, 비유, 문제의 재구성, 적극적 참여라는 다섯 가지의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지만 눈에 띠지 않는 기술이 설명되는데, 식물의 굴성(tropism)처럼 인간의 본능으로 존재하는 예술행위의 에너지원인‘열망’의 실천으로서 순수한 환희에 넘친 때 묻지 않은 감탄, “와!”하는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는 탄성이야말로 내면에서 무언가 일어났음을 의미 하고 무언가를 열고 무언가를 조절한 순수한 참여, 바로 예술 행위를 자극하는 충동이며, 새로운 세계를 향한 반응이 시작된다는 통찰은 이후의 보석같은 체험적 지혜들처럼 마음에 직접적인 체득의 이해를 번쩍하는 깨우침으로 스며들게 한다.
“감탄이 감동하는 능력을 점화하고 열망이 예술행위를 끌어가는 엔진이라면 반응은 1단 기어쯤 된다.”

또한 예술가는 주의력을 기본으로 삼고, 관찰력을 섬세한 도구로 활용한다고 하면서, 행위를 하는 동안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중요한 것으로 눈여겨보는‘관찰’,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주기까지 하는 예술행위로서의 기초적 태도를 꼼꼼히 알려주기도 한다. 우리를 옭아매는 기존의 게슈탈트(gestalt)를 과감하고 가차 없이 파괴하고 재정리해서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할 기회를 갖는 것, 즉 무언가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배움을 향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으로 예술 행위는 미지의 것을 향해 가는 통로라는 점을 깨우치게 해주기도 한다.

상징으로서의 은유에서 비롯하여 현실의 무게와 요구에서 해방된 놀이의 세계가 지니는 적극성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일상에서 우리들이 예술과 만나고 예술적 발견을 해 낼 수 있도록 조언을 아낌없이 베풀고 있는 이 저작은 실로 새로운 세상보기라는 커다란 선물을 안겨준다.
일상이 온통 예술의 세계로, 아름다운 상상의 공간으로, 그러면서 생활의 영위 수단들에까지 흥분을 감출 수 없는 관점의 혁명을 각성케 하여준다. 내 삶을 예술의 세계로 바꿔놓는 순간, 내 안에 잠재한 예술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순간 아마 세상은 매혹의 빛으로 가득해질지도 모르겠다. 진정 다양한 영감을 제공하는 창조적 길라잡이요, 인생 지침서이자,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등 예술세계에 입문하거나 활동하는 이들에게 조차 탁월하고 진지한 선배의 숭엄한 가르침을 귀동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세상을 배우고 일상에서 예술을 이해하며 실천하는 명쾌한 지혜의 보고(寶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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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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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과 수익을 기반으로 한 용어,‘비즈니스’, 순수한 인간의 이기심이외의 모든 동기는 고려할 가치도 없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시장을 대표할 만한 상징으로 가히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이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오늘, 우리들 사회의 자기이해에 대한 진술인 이 작품의 도덕적 냉소는 반복되는 통증임에도 좀처럼 치유되지가 않는다.
매춘(賣春), 그러니까 봄(몸)을 팔아 돈을 버는 행위이니 분명 비즈니스다. 그러니 봄을 파는 여성은‘비즈니스 우먼’인 게고, 이런 비즈니스 세계에 감상이나 연민과 같은 감각이란 필요 없는 것인데, 상대의 섬세한 동작에 몸이 가늘게 떨려오는 감각은 정말 위험한 신호라 할 것이다. 게다가 신도시 개발에 발군의 능력을 자랑하는‘비즈니스 맨’을 자처하는 국제적 감각의 수완 좋은 시장(市長), 이에 한 몫 하는 교활한 권력자와 자본가인 비즈니스맨들의 부정한 재산을 훔쳐내는 도둑님이라는 비즈니스맨까지 모두 “삶의 유일한 전략”은 비즈니스라고 외친다.

소설은 이처럼 비즈니스 맨, 비즈니스 우먼들만이 가득한 오늘의 세상을 전형적인 천민자본주의의 집약지로 21세기형 꿈의 도시,‘ㅁ市’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는 민활하고 유능한 사냥꾼들이 모여 사는 신도시와 사냥꾼의 대열에서 추방당하여 인간-쓰레기가 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구도시가 부정적인 신자유주의 소비지향의 시장경제 사회인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식재하고 있다. 폴란드의 저명한 사회학자‘바우만’은 이러한 사회, 즉 작금의 인간사회를「유동하는 세계의 지옥」이라 하였던가! 사냥꾼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사냥감이 되거나 아니면 추방당하거나, 그래서 대열을 이탈하지 않으려고 죽도록 뛰어다니는 경계에 놓인 우리들은 오직 약육강식의 정글 속을 헤쳐 나가는 전사로 양육되고 이 장엄한 비즈니스전략을 세습시키려고 모두들 안달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식의 과외비를 벌기위해 오욕이 가득한 화류항(花柳港)으로 나가는 어미”가 되어야 하는 비열한 세계가 여기 있다. 사법고시에 실패하고 사회의 밑바닥을 욕망이 해제된 채 무기력한 노인처럼 살아가는 남편과 같은 세상을 자신의 아이만큼은 세습시키고 싶지 않다는 열망, 고작 세습되는 천박한 자본 귀족들이 던져주는 조악한 권력과 부를 움켜쥐는 것일 뿐인 그러한 세계를 주겠다고. 너도나도 꿈 같은 소비의 자유를 누리겠다고, 비즈니스의 세계가 마치 유토피아를 담보해주는 양, 사랑도, 연민도, 아니 사람 그 자체까지 상품, 비즈니스 거래의 대상으로 내어주는 모멸과 수치만이 깊은 세상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사랑과 결혼까지 비즈니스인 사회를 당연이라 하는 불온한 세계, 세상의 모든 가치가 오직“자본의 요람에 들어간 세계”, 세상이 이쯤 하니“윤리도 효율성의 보장을 받아야”한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것이다. 돈 많은 속물들, 그리고 부조리한 세상의 덕택으로 권력을 차지한 어설픈 오늘의 귀족들이 짧은 시간에 내면화하지 못한 문화예술이란 것만큼 계급을 구별짓는 수단은 없을 게다. 사진작가라는 그럴듯한 예술의 포장은 천박한 부자와의 원활한 비즈니스, 결혼을 위한 훌륭한 수단이 되어주지만, 결국 비즈니스의 속성이란 그렇듯이 수익과 효율성이 상실되면 버려지는 것 아닌가. 아이의 외국어고 진학을 위한 고액의 과외비를 위해 몸을 파는‘나’의 대학동창인‘주리’의 자기파멸은 비즈니스의 네거티브(negative)한 순환을 그대로 보여준다.

끝 간 데 없는 이 세계에서 화대(花代)로 열악한 가계를 채우는 여인이 있는가하면, 비즈니스 세계의 논리를 수용치 못해 그 사냥꾼의 대열을 이탈한 남자, 신도시의 부자들을 터는 도둑인‘타잔’이 비즈니스세계를 맘껏 유린하며 소설의 축을 구성한다. 게다가 신시가지가 번성할수록 쓰레기 하치와 소각장이 있는 구시가지의 쓰레기는 늘어나는 이 기이한 균형(?)의 현상, 인간쓰레기(잉여인간)가 되었든, 오물이 되었든 21세기형 꿈의 도시라는 ㅁ시(市)의 구시가지는 퇴락한 짐승의 마을로 변해간다. 비즈니스의 세계에 뛰어들지 못하는 순간 더 이상 사냥꾼일 수 없다. 짐승의 마을로 들어가 사냥꾼들의 먹이가 되거나 세상에서 사라지는 길 뿐. 그러나 수완 좋다던 비즈니스맨 시장도, 도둑님 타잔도, 사랑도 비즈니스라는 여인도, 봄을 파는 유부녀인 비즈니스우먼도 결국 이 자기파멸의 욕망을 은폐한 자학과 자조의 언어가 내재한 자기모멸과 자기파괴를 피하지 못한다. 그래 우리들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깊고 깊은 물신적인 시장(市場;market)이란 수렁 속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비즈니스 순환의 종착이 올 때까지 어리석게도 자각하지 못한다. “여기서 도망쳐야 해!”이 역설적인 비즈니스의 사슬을 끊어내고서야 우리는 모처럼의 평온을 누릴 수 있을 게다. 우리 사회의 낯부끄러운 자괴감, 우매함, 이에 더해 도덕적 불쾌감까지 명민하게 그려낸 역작이다. 자본의 폭력이 난무하는 이 왜곡되고 부정적인 사회의 구조적인 오류는 거듭 반복되어 진술되어야 할 것이다. 자기 꼬리를 잘라먹고 사는 뱀과 같은 사회, 자신이 뜯어먹던 타자성의 마지막 풀까지 먹어치우고는 굶어죽는 이 자본만능의 치명적 결과를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냉정하고 섬세하게 들여다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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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신검시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8편의 단편소설이 하나의 리듬과 이미지를 가지고 구성된 휴머니티가 물씬 풍기는 기이하고 정교한 구성의 추리문학이다.
전(全)편에 등장하는 ‘구라이시’라는 검시관의 탁월한 현장검시능력과 고집스러울 정도의 기존 질서에 대한 무시가 어울려 만들어낸 그의 별명이 ‘종신 검시관’이다. 조직 내 누구도 그의 지위와 자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치 않을 정도의 묵시적 인정을 의미한다.

발견된 사체의 자살과 타살의 구분이 모호한 사건에 주인공 ‘구라이시’는 현장에 출동한다. 그리고는 명쾌한 구분을 해낸다.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그리고 상상하지 못한 증거와 사유를 밝혀내는 완벽한 검시본능의 인물....
검시관의 조수 ‘이치노세’의 불륜 상대역이 교살된 사건으로 시작되는「붉은 명함」에서부터 작가는 심상치 않다. 일반적인 추리소설이 갖는 냉정함과 이성적 접근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한때 탐닉했던 여성의 죽음에 갈등과 연민과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미스터리는 미스터리이다. 주인공 ‘구라이시’의 명석한 현장검증이 유쾌하고 명석하게 뒤따르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각 단편들의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인간적이다. 추리소설에서 중심인물로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유형의 인물들이다. 경찰관도 검사까지도 인간애가 물씬 풍긴다. 「눈앞의 밀실」에서는 말단의 지방기자와 그의 상사아내가 동행하여 현장잠복을 한다는 코믹한 배경과 정교한 시간의 구성 속에 발생한 살인으로 흥미 있는 추리의 세계로 독자를 견인한다. 평범함 속에 짓궂은 작가의 유머가 숨겨져 있다.

아, 구라이시를 잠깐 잊었다. 현장검시에서는 냉철하고 고집스러운 행동을 일삼는 사람, 주변 동료와 갈등을 제조하는 사람으로, 그래서 더욱 검시관의 임무수행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또 다른 단편 「전별」에서 45년의 경찰생활을 끝내고 물러나는 수사부장에게 마지막으로 정말 인간미 물씬 묻어나는 멋진 멘트를 날린다. 수사부장은 생모에게 버려져 입양되어 키워졌다. 그의 생모에 대한 죽음을 자신의 은퇴시점에서 이해하게 되는데, 생모의 사체(死體)를 처리했던 ‘구라이시’는 수사부장의 노모(老母)가 자살한 것인지, 실족사 한 것인지를 조사한다.
수사부장의 전별식장에서 걸어 나오는 그에게 구라이시는 “자랑스러운 아들을 가진 어머니는 자살하지 않는다.”고 속삭인다.

구라이시의 깊이 있고 따뜻한 인간애는 한 달 정도의 부하직원으로 스쳐갔던 여경(女警), 더구나 경찰을 그만둔 지 10여년이 지나 사체로 발견되자 이의 현장검시에서 ‘살인’이다! 라고 의도적인 실책을 만들어내는 자기명예의 희생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자살이 명확함에도 옛 부하의 죽음을 보다 명확히 하고 동료로서의 최선을 보여주기 위한 대규모의 탐문인력을 동원하기위해 짐짓 ‘타살’로 몰아 부치기도 한다. 자살의 동인(動因)이 명확해지자 자신의 실수라고 선언한다. 아 멋진 인간!

속물적 출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 자신의 임무에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는 사람, 그래서 그는 부하와 동료로부터 ‘구라이시학교’의 ‘교장선생님’이다. 우리네들은 일천한 삶의 구실을 핑계로 비굴함을 일상으로 이해하지만 이를 멋들어지게 돌파하는 사람, 진정한 리더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이 소설에는 이에 못지않은 구성요소가 또 하나 있다.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흥미로운 사유의 게임이다. 인간 삶의 통찰과 함께 추리소설이 가지는 묘미를 적절히 버무려 놓은 걸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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