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
멜라니 킹 지음, 이민정 옮김 / 사람의무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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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류의 “근원적인 공포와 집착의 대상”인 삶의 소멸로서의 죽음이란 부조리는 그 알 수 없는 세계, 무지로 인한 호기심으로 기이한 행동과 생각을 만들어 낸다. 또한 삶과 죽음을 가르는 그 경계, 대체 언제 인간은 완전히 죽은 것인가에 대한 정의조차 애매하기 그지없어, 시대의 사회전반을 지배하는 철학적 문화적 사고에 따라, 나아가 발전된 기술의 상황에 따라 달리 정의되고 있으니 인간의 상상력으로 정의할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쨌든 1768년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은“영혼과 육신의 분리”라고 죽음에 대한 거친 정의를 남겼다가, 2007년 판에서는 “모든 생물이 종국에 경험하게 되는 생명이 완전히 중단되는 현상”이라고 조금은 신중한 정의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역시 모호하기 짝이 없긴 마찬가지다. ‘생명이 완전히 중단되는 현상’이란 이 말은 사실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 현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심박과 호흡의 완전 중단? 인공호흡법과 생명유지기술로 인해 이 정의도 “반사행동과 인지, 고통이나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 완전히 결여된 상태”라는 새로운 사망의 척도에 갈아치워졌다. 그럼 이를 통제하는 뇌간의 손상이나 괴멸로 진단되면 죽은 것인가? 여전히 PVS(식물인간)진단을 이끌어 낼만한 임상 실험 방법이 없는 오늘의 의료계나 뇌사판정의 오류를 보더라도 이 역시 죽음에 대한 완전한 판단이 되지 못한다.

하물며 1세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대의학 이전의 세상에서 이 죽음에 대한 진단은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구별의 신뢰성을 저하시킨다. 그래서였던지 죽었다고 판단하여 매장한 사람들이 깨어나는 끔찍한 사례가 빈번했던 모양이다. 단단하게 못질된 관속에서 몸부림쳤던 흔적들, 이후 이를 방지하기 위해 완전한 부패로 죽음을 확인하기 위한 사체대기소가 만들어지고, 절명의 판단을 위한 엽기적인 진단법이 시도되거나, 깨어나면 흔들어댈 종을 연결하는 등 기발한 아이디어의 관들과 묘지들이 제작, 설치되었다니 오늘의 시선으로 보면 우습기조차 하다.

그러나 이 희극 같은 사망의 진단과 매장의 모습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집착이나 죽음의 두려움을 읽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매장된 사체의 도난이나 훼손과 같은 산 자들의 탐욕까지 더해지면 망자와 가족들로서는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죽음이란 이 알 수 없는 공포에 대한 호기심은 역설적이게도 산 자들의 더없이 훌륭한 생존 수단이자 삶의 수호자로 활용되기에 이른다.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필요와 욕망실현의 대상이라는 모순성을 아울러 갖는다. 의대 해부학 재료로 사체가 밀매되고, 조형예술작품으로 둔갑하기도 하며, 부위별로 약재로 판매되는가하면, 영적 효험이나 미신적 상징물로 보존되고 거래되기도 한다. 죽음의 훼손과 경외라는 이율배반적인 이러한 인식과 행동에는 기막힌 공리주의적, 과학적 합리주의 윤리관이 스며있다. 게다가 교활한 인간의 탐욕까지도. 이처럼 인간이‘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실로 얄궂다.

이러한 탐욕에는 권력의 과시와 명예의 보존과 같은 비물질적 욕망은 물론 삶의 연장과 부의 축적과 같은 물질적 갈망까지 삶의 전 영역에 이른다. 죽음조차 산 자의 이기심에 활용되는 것인데, 망자는 죽어서도 자신의 육신을 편히 쉬지 못하는 것이다.
‘대지에서 나온 이 대지로 돌아간다.’는 말은 오늘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 고대사회부터 이미 인간은 이 말이 공허한 말인지 알았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남아메리카, 중국사회의 시체 방부기술은 죽어서도 부패하지 않고 영원하겠다는 믿음의 미라를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스탈린이 자신의 권력유지를 수단으로 레닌의 사체를 방부처리하여 전시함으로써 소비에트 시민의 체제불만의 시선을 돌리려 한 것이나, 마오쩌둥, 김일성의 방부처리 보존은 이러한 대표적 사례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고대의 미라는 파헤쳐져 각종 질병에 효험이 있다는 약재로 둔갑하여 갈리고 빻아져 호사가들의 위장 속으로 들어갔으니 영원을 기대했던 미라들은 죽어서도 그리 편한 여정은 못하고 있으니, 영혼을 연장시켜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인간들에 대한 연민이 앞선다. 여기에 자신의 유골이나 사체의 재를 이용하여 다이몬드로 가공하여 보존하거나 회화의 재료로 그림에 남아있도록 하는 행위들이 산업화되어 죽음을 상품화하는 시대에 이르렀으니 가히 죽음에 대한 인간의 의식은 더 이상 고전적인 인식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내용인즉 추모(追慕)라는 그럴듯한 진지함이 있어 보이지만, 영원성에 대한 집착이외에 무엇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 죽음이란 부조리에 대한 공포는 오만한 과학을 등에 업고 “불가피한 것만은 아니다”라고 외쳐대기까지 한다. “얼마간의 자금과 적절한 장치, 질소 용액만 있으면 피해갈 수 있다?” 영생주의자들은 냉동보존을 하고 냉동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유리상태의 보존기술을 말하는가하면, 뇌만 보존시키는 신경보존술과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을 초월하는‘포스트 휴먼’이란 기계와 인간이 복합되고 조합된 인간을 통한 영생을 기도하기까지 한다. 결국 죽음에 대한 삶의 단절을 회피하기 위한 탐욕스런 집착이 인간을 질기게 잡아끌고 있다는 말이 된다. 존재자로 체감하는 현재성을 상실한 인간이 과연 인간일까? 현재성의 미학을 상실한 괴물이 아닐까? “삶의 연장이란 곧 고통의 연장이자 죽음의 배가를 의미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삶이란 죽음으로 인해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닐까?

존엄사(안락사)와 사망진단에 대한 의학적, 윤리적 재성찰을 통한 생명에 대한 존엄성의 강조, 인류사회의 매장문화와 장례의식이 지니는 영적의미는 물론 은폐된 속세 욕망들의 실체들, 미라 제작술과 방부처리 및 표본화 기술에 내재한 풍부한 역사적, 종교적 의미와 사례들,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서의 연옥을 말하기 시작한 기독교의 사후세계를 이용한 사기술책, 신기술의 발전에 따른 죽음의 재발견 등 그야말로 다종다양한 죽음에 깃든 인간의 역사를 이 책은 경쾌한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매양 일상에서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죽음을 잊어서도 안 된다. 죽음은 우리의 삶을 겸허하고 소중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죽음의 역사를 훑어보는 여정으로부터 조금은 넓고 포용력 있는 시선을 갖게 해주는 저술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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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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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질 무렵, 가을의 낙엽이 쓸쓸히 구르는 평온한 호숫가를 바라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왠지 가슴에 아릿하고 시린 무엇이 날아들어 애잔함이 휘감아 도는 듯하다.
삶이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무수한 성취를 향한 여정도, 사랑도, 욕망도...,걷잡을 수 없는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던 정염(情炎)도..., 이러한 것들이 지나가버리고 알 지 못했던, 알 수 없었던 인생의 모습들을 바라보는 그림이, 이야기가 흐른다. 세상을 지나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고 그 아내의 이야기이도 하다.

프랑스의 작은 도시 ‘라빌디외’에 인생의 진실이란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발다비우’란 인물이 발을 들여놓으면서 삶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라빌디외에 견사(絹絲)산업을 일으키려는 발다비우의 권유에 따라 정숙함과 아름다움을 지닌 아내 ‘엘렌’의 지고한 사랑을 받는‘에르베 종쿠르’는 이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소재의 원천을 만드는 근동지역의 수입에 의존하던 누에알에 전염병이 돌면서 돌파구를 찾던 중, 세상의 끝이라고 여기던 일본으로부터 밀수입을 결의하게 된다.
            

소설의 이야기 구조는 인간의 삶처럼 지극히 단순한 반복이자 순환이다. 그러나 이렇듯 일정한 반복 속에 동일한 순간이 존재하지 않듯이 아주 사소하고 작은 우연이 인연과 필연을 만들어내고, 거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인생의 이야기들이 담긴다. 프랑스에서 아시아의 동쪽 끝으로 가는 여정은 동유럽을 경유하고 시베리아와 바이칼 호수를 지나 중국 국경지대를 거쳐 일본에 이르는 실로 엄청난 대장정이다. 서구로부터 개방 압력이 거세어지던 19세기 중엽의 일본은 누에알의 유출을 차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라 케이’라는 일본인의 도움으로 누에알을 입수하게 되면서, 그의 곁에 있던 동양의 신비를 간직한 아름다운 소녀의 미소에 매혹된다. 그리곤 동일한 경로를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대장정, 밀무역의 여정이 거듭되면서 에르베 종쿠르는 동양의 소녀, 비단결 같이 부드러운 소녀의 감촉과 미소에 빠져든다. 일본의 내전(內戰) 소식이 전해지고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장정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욕망이란 열정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 폭풍 같은 그리움의 열병은 지나가기 전에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이 정염에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 엘렌의 심정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마침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장정에 오르는 에르베 종쿠르를 향한 엘렌의 간절함에 묻어난 한 마디에 모두 담겨있다.

“돌아오겠다고 약속해요”

         

그 어떤 장황한 말보다 이 한 마디에 남편에게 휘몰아치는 한줄기 바람 같은 욕망을 뛰어넘는 삶의 관용과 사랑의 진정함이 있다. 그래서 한 남자의 삶의 이야기 속에서 오히려 깊고 곧게 흐르는 여인의 아련한 사랑의 갈망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에르베 종쿠르의 온 정신과 육체를 감아 도는 세상의 끝에 있는 소녀의 편지인 듯 한 일본어로 씌어진 7장의 서신에는 여인 엘렌의 절절한 욕망과 사랑의 그리움이 넘실댄다.

「당신은 갑자기 어느 곳에선가 제 입술의 온기를 느끼게 될 거예요. 눈을 감고 계세요. 제 입술이 당신의 어디에 닿게 될 지 알 수 없도록. 눈을 뜨지 마세요. 이제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곧 제 입술의 감촉을 느끼게 될 거예요. 갑자기. ....中略 ... 사모하는 주인님. 지금 이 순간은 영원히 지속될 거예요.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사람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 그것은 광풍처럼 몰아치던 그 어느 순간들의 아린 사랑의 추억들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며 한 남자의 삶을 온전히 보듬어 주었던 아내의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그녀가 희구하던 사랑을 알게 되는 것 역시 어쩌지 못하는 인생의 그러함 일 것이다.

「그는 바람 부는 날이면 종종 공원을 가로질러 호숫가로 산책을 나가 호수에 일렁이는 잔물결을 몇 시간 동안이나 바라보곤 했다. 호수의 물결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무늬를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불어오는 것은 한줄기 바람에 불과해도 마치 수천 줄기의 바람이 거울 같은 호수 표면을 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방에서 바람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장관이었다. 너무나 가벼운, 어디서 불어오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바람.」

호수의 물결이 만들어내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의 다채로운 무늬, 그것은 한줄기 바람으로 시작되지만 인생에 무수한 변주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바람에 우리의 삶은 비록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풍요로운 것일 것이다. 비단의 부드러운 관능적 이미지와 아련한 사랑의 열망이 세상을 스쳐지나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에 담겨 가을의 정취 물씬 나는 낭만적 향기로 물들인다. 어느 가을날 인적 없는 호숫가를 거닐며 무심한 듯 수면을 바라보는 나를 떠 올리게 된다. 내 사랑들을, 그리고 닿을 수 없는 인생을...

짧은 문장으로 구성된 한 편의 낭만 시(詩)같은 이 소설이 그리는 인생의 이야기에 젖어들어 한동안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심정에 머문다. 『Silk(비단)』란 제목으로‘키이라 나이틀리’, ‘마이클 피트’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모양이다. 영상에 담긴 이 비릿한 사랑과 욕망과 삶의 이야기도 나를 유혹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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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미
티에리 종케 지음, 조동섭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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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독특하게도 두 개의 서체로 기술되어 있다. 굵은 서체로 써진‘너’에 대한 이야기와 보통체로 써진 시간의 흐름에 따른 유연한 서사는 제각기 다른 길을 걷는다. 어떤 연결점도 없어 보이는 서로 다른 인간들만 보인다. 단지 폐쇄된 공간에 어떤 인간이 길들여지고 있다는 막연한 유사성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될 뿐.

누군가가 쫓기고 그 집요한 추적 끝에 생포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까지는 성실한 집중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 까닭도, 또 왜 동물실험을 하듯 사람을 매어놓고 길들이는 작업처럼 보이는지도 암흑을 더듬듯 오리무중이다. 이러한 구성과 추리기법은 꽤나 낯섦에도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저명한 성형외과 의사인‘리샤르 라파르그’와 호젓한 그의 저택이 그려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이브’가 있는 2층 방에서는 불빛과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평온하다기보다는 어둠과 석연찮은 기운이 덮여있으며, 역겨운 고통마저 느껴진다. 정신병원에 갇혀있는‘비비안’의 병문안, 이를 안타까워하고 애틋해하는 리샤르, 광기에 젖어있는 비비안을 병문안 한 이후에는 여지없이 이브를 잔혹한 변태매춘에 내몰고 그 학대받는 장면을 옆방에서 응시하며 리샤르는 쾌감을 맛본다. 그러나 이 행동의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을 알아차리고 연민을 보내기 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하다.

또 하나의 시선은 은행털이 중 경관을 살해하고 도주하는‘알렉스’라는 이십대 청년을 쫓는다.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공개수배를 피해 은둔하고 있는 자.
여기에 굵은 글씨로 써진 소름끼치고 음습한 너에 대한 이야기가 환각처럼 더해진다. 발가벗겨진 채 쇠사슬에 매여 있는 남자. 한 점 빛없는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 얼굴을 볼 수 없는 자에 의해 2년에 걸친 정신의 개조와 신체적 순응의 집요한 작업으로 길들여진다.
거미줄을 처 놓고 자신은 어딘가에 숨어 엿보며 먹이가 걸려들면 서서히 말아 보관하고 조금씩 먹어치우는 독거미처럼 완전한 무기력 상태로 몰아넣고 사슬에 묶인 먹이를 찾아온다. 이 사악하고 잔인한 괴물을 청년은 '미갈(Mygale: 독거미)'이라 부른다.

동일 시점의 두 시선, 그리고 시점이 역행하는 또 다른 시선, 이렇게 세 시선의 이야기가 점점 급박하게 어떤 실마리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이 알 수 없었던 병적이고 기괴한 사실을 야기했던 사건의 실체에 이르면‘복수’, 아비의 끓어오르는 분노와 원한이 있으며, 정신과 육체를 개조당한 청년의 공포와 당혹감, 삶의 좌절에 대한 증오어린‘복수’, 이렇게 두 종류의 복수가 놓여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좌절과 고통, 그것은 범인을 향한 냉혹한 과정으로 이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가슴으로 철저하게 진행되는 복수의 절차들, 미갈, 괴물로 변해버릴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에게서 그가 도달하기 위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목격하게 된다.

복수를 위해 메스를 들이대고, 한 인간의 삶을 온전히 앗아가려 하는 순간, 그 인간 또한 자신을 상실하여야 한다. 이미 괴물이 자신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결국 복수란 고통의 해결이 아니고 새로운 고통의 획득이 되어버린다. 촘촘히 얽힌 거미줄처럼 무수한 암시와 복선들이 직조되어 역겨움과 혐오,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감성을 압박해 온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흥분과 강박감이 책장 넘김을 재촉한다. 상식을 뒤 엎어버리는 기이할 정도의 독창성, 그리고 수용하기 버거울 정도의 잔혹과 사악함과 세련미 넘치는 우아함까지 아울러 갖춰 기묘한 매혹에 빠져들게 한다. 흔해빠진 영미식 복수 추리극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환상적 미묘함이 있다. 소설 읽고 행복했다는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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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성커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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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중국의 개방화와 자본주의 물결을 거세게 흡입하고 있는 상징적 도시인 선전(深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가부장적이고 남성 우월적인 전통과 서구의 개인적 자유와 평등적 사고는 사적(私的) 영역에서 수많은 잡음과 갈등, 신념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을 터이다. 특히, 사적 영역 중에서도 가장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성(sex)과 젠더(gender), 그리고 사랑의 가치에 대한 변화가 일으키는 사회적 파장은 결코 간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 중심에 서있는 여성의 성적 개방화를 비롯한 성적 지위의 생태변화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남성 중심의 성적 권력관계를 구성하는 결혼제도는 물론 각종 남성 중심의 성문화와 사회적 기율, 제도적 장치들과 충돌하게 된다. 이는 성(性)을 사적 영역에만 머물 수 없게 하는 사회적인, 공적 영역의 문제로 견인되게 한다.

작가‘성커이’는 이러한 성 권력의 변화가 오늘의 중국사회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성 권력의 약화를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남성들은 이 새로운 성 질서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 것인지, 또한 신장된 성 권력을 가지게 된 여성들은 또 어떻게 조화하고 균형을 갖추어 나아가야 하는지를 조명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수동적 성으로서의 여성은 더 이상 남성을 기다리는 억압된 성으로서의 여성으로 남아있지 않다. 자신의 감성과 욕망을 실현하는데 적극적이고, 사랑이 충족되지 않는 결합은 언제든지 털어버리고 해체시켜버린다. 이러한 새로운 섹슈얼리티에 기초한 사랑관은 미처 적응하지 못한 남성들, 여전히 권위적이고 전통적인 남성 우월적 성을 떨쳐내지 못한 남자들을 분노와 좌절,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더구나 섹스는 이제 생산적 기능을 떨쳐버렸다. 성적 결합 없는 재생산이 가능하게 되면서 이제 성은 완전한 해방을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여성에게 섹스는 더 이상 구속이 아니며 자기 사랑의 확인이며 본능적 욕구의 실현 수단일 뿐이다. 결국 남성은 여성을 전통적인 성으로 구속할 수 없게 되면서 그동안 누려왔던 남성의 성적 자유를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즉, 남녀 간의 성적 평등이란 혁명적인 세상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간에 이르렀다 할 수 있다. 이 엄청난 권력의 변화는 진행 중이며, 완전한 평등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상처 받는 사람들을 가공해 낼 것이다.

여성의 성은 한 남성의 소유로서 존재해왔다. 그러나 이 소유된 성이란 관념은 해체되고 있다. 소설의 여주인공인‘줘이나’는 혼전에 이미 성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정부 관리인‘첸진’과 오랜 성관계를 지속하지만 출신지역이나 신분상의 열등성, 그리고 약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적 언행이 남자로부터 가해지고 깊은 상처를 받는다. 그럼에도 사랑하기에 결혼한다. 그러나 주방일은 여성의 의무이며 남자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가부장적 권위의식과 수동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요구, 거듭되는 인공유산은 갈등을 심화시킨다. 여기에 재혼한 여성‘위안시린’과, 이혼녀로서 성적 자유를 주장하는 ‘쑤만’이란 여성이 등장하여 기존 남성편향의 성 권력의 모순과 위선에 저항한다.

급기야 줘이나는 태국 여행 중에 만난 변호사‘좡옌’에게서 억눌렸던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발견하고 여성에 대한 섬세한 배려라는 균형 잡힌 매너에 빠져든다. 물론 남편 첸진에 대한 죄의식으로 갈등하지만 이혼을 요구하기에 이르며, 이혼 절차를 밟는 기간 중에 좡옌과의 열정적인 섹스에 탐닉한다. 한편 위안시린이라는 여성은 근육질의 흑인과 잠자리를 통해 눌렸던 욕정을 해소하며, 쑤만은 여러 남자들로부터 구속받지 않은 자유로운 성을 추구한다.
이에 대비하여 사업적 접대와 출장 등에서 매춘 여성들과의 성 관계를 가진다던가, 사회의 우월적 지위를 통해 성 접촉을 하는 위안시린의 남편을 통해 기성 사회가 남성 중심의 성 환경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줘이나가 그녀의 정부(情夫)인 좡옌이 출장 중에 여성으로부터 마사지 서비스를 받은 것을 계기로 감정적 충돌을 일으키는 것도 이러한 왜곡된 성의 구조를 강조한다.

여기에 더해 작가는 의미심장한 문제를 제기한다. 여성의 성적 지위가 향상됨으로써 위협받고 있는 결혼제도가 그것이다. 오늘날 서로간의 사랑이 의심되고 확인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바로 이혼이란 절차로 이어지고 가족이 해체되어버린다는 점이다. 그 의혹과 불신의 원인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줘이나의 경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푸념이자 남편에 대한 조롱인데, ‘성적 무능력’, 즉 여성의 성적 주도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남자들의 자기중심적 성 관념에 대한 불만이 도사리고 있다. 위안시린이나 쑤만의 불만도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오늘날 여성들의 사회진출, 직업인으로서 경제적 독립은 물론 오히려 남성보다 우월한 경제적 지위를 가지거나, 가질 수만 있다면 굳이 결혼이란 제도의 구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줘이나의 경우 정부인 좡옌의 도움으로 직업을 유지하고 있어, 그녀에게 첫 성 경험을 안긴 남자를 만나 완벽한 성적 희열에 도취되어 있음에도 좡옌과의 이별을 망설이는 것이나, 쑤만의 높은 경제적 능력이 남자들과의 잠자리를 주도하는 것이 그런 예이다. 결국 이처럼 여성의 성적 지위 향상은 기존의 남성 우월적 성 권력에 의하여 짜여 진 사회 시스템의 재편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처럼 변화된 섹슈얼리티에 대해 남성들의 인식전환은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을 전해주는 사건이 있는데, 성병에 걸린 위안시린과 그녀의 남편‘마샤오허’와 사이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만취한 위안시린이 남편에게 외도한 사실을 말하고 그래서 성병에 걸렸음을 고백하는 것인데, 이것은 신뢰의 배반이라고 길길이 뛰며 이혼을 요구하는 구실이 된다. 그러나 이혼합의 시간을 지연시키던 위안시린은 종합검진결과 성병의 증세가 나타나지 않자 삼십만 위안을 요구하며 남편의 겁박을 오히려 역공한다. 공장운영을 하는 마샤오허로서 이러한 거금은 사업의 파탄을 의미하며 아내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구걸하는 위치로 역전되는 것이다. 이때 위안시린이 하늘하늘한 잠자리 가운을 걸치고는 눈길한번 주지 않고 육감적인 몸을 흔들며 성의 우월자로서 남편을 냉담하게 외면하는 것은 바로 권력 재편의 멋진 상징적 장면이 된다.

자칫 성 권력의 재편, 남성과 여성의 성적 평등을 말하기 위해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성의 추구를 말하는 것으로 왜곡될지도 모르겠다. 실로 오랜 인간의 역사 속에서 남성의 지배적인 성 구조와 종속된 성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관념으로 굳어진 것들을 변경하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성을 소유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존중하고 독립적 주체성을 지닌 동등한 성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고 성적 본능의 추구만이 인간의 삶 전반이나 결혼과 가족과 같은 인류지속적 본질적 가치들을 지닌 제도들을 파괴할 도덕적 우위를 지닐 수는 없는 것이다.
소설의 대단원에 이르러 줘이나가 첸진 어머니의 임종에 같이 함으로써 가족이란, 부부란 어떤 것인지, 때론 갈등하기도 하지만 사랑하고, 위로하며 위로받기도 하는 것, 행복이란 고통과 함께하는 것임을 자각케 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비로소 첸진 역시 성적 평등자로서 줘이나를 존중하고 이해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섹슈얼리티 시대에 요구되는 균형과 조화의 성을 발견케 한다.

이 소설은 분명 문제작이다. 등장하는 여인들의 성적 일탈을 둘러싼 당위에 대해서 엄청난 반향이 있을 것 같다. 또한 남성들이 당연시하는 오늘의 성 구조와 체계에 대한 모순이나, 부부간, 가족 내에서의 남성의 역할에 대한 논의도 분분할 것이다. 특히 결혼했으면 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는 식의 전통적 결혼관계가 배우자와의 사랑이 없다면 미련없이 결혼을 깨어버린다는 당사자의 판단에만 의존하는 식의 내적인 인간간계인 '앤서니 기든스'가 말한 '순수한 관계(Pure Relationship)'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도 첨예한 물음이 될 것이다.
줘이나의‘평평한 가슴(小說 原題: 水乳)’이란 현대의 외형적 조형미에 대한 반감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새로운 욕구와 새로운 불안들을 만들어내는 오늘의 개방된 기획사회를 탁월하게 성찰해내고 있다. 소설적 완성도는 물론 주제의식과 가치 제안적 역량이 그 어느 중국 문학보다 높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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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과 소멸, 늙음과 젊음, 그 환상적 관능의 서사시 

   - 『잠자는 미녀』 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 대해서

언젠가는 임박한 죽음을 느끼게 되는, 설혹 여기까지는 아닐지언정 신체의 노쇠함, 노년에 접어들었음을 자각하는 나이가 될 것이다. 최근의 경험보다는 어렸던 시절, 먼 시절의 기억이 더욱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런 때가 올 것이다. 그래서 살아온 날들 속에서 꿈틀대던 욕망이 깃든 추억들을 반추하며 그 어떤 표정들을 지을 것이다. 그 표정들을 만들어내는 감정이란 어떤 것일까? 안타까움, 아쉬움, 그리움처럼 나이 들어 할 수 없게 되는 많은 것들로 인한 비참함, 수치심, 자괴감 같은 것들일까? 아니면 삶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 나아가서 거부를 통한 도전일까? 그때 나에게는 정말 어떠한 것들이 절실하게 되는 것일까? 과연 늙음은 죽음에 대한 수동적 겸허만을 미덕으로 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쉴 새 없이 스쳐지나간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 두 문호가 각기 쓴 『잠자는 미녀』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란 작품은 이러한 의문에 답변을 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진솔하고 대담하게 말하고 있다. 마르케스의 작품은 야스나리의 오마주에 가깝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의 시작페이지에는 『잠자는 미녀』의 한 문장이 실려 있다. 또한 ‘잠자고 있는 젊은 아가씨’라는 소재 역시 그대로 차용하고 있으며, 주인공인 노인이 잠자는 여자를 바라보며 젊음과 여성에 대한 감각적 느낌을 구술하는 것 역시 다름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유사하다. 더구나 이 대가들의 말년인 노년기에 쓰였다는 점에서 소설 속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은 더욱 진실성을 띤다.
  
야스나리가 만들어 낸 67세의 노인‘에구치’, 마르케스가 숨을 불어넣은 ‘서글픈 언덕’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90세의 노인. 본인들의 의지나 의사와는 무관하게 남성성을 상실해가는 성(性)의 구분이 그야말로 의미를 잃어버리는 단지‘노인’이라는 외부적 시선이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누군가가 사람의 나이란 ‘그 사람에 관한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익명의 예언자’라고 말했듯이 나이가 들어 노인이라는 한 꾸러미에 담기게 된다는 것은 쇠퇴를 포괄하는 어떤 범주의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야스나리의 에구치는 성적 능력을 잃지 않은 늙은 남자의 욕망으로부터 살아있음에 대한 확인에 그치지만 마르케스의 노인은 새로운 사랑의 시작으로까지 나아간다. 문화적 배경은 제법 끈질기게 인간 본능의 표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그러나 사그라지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 욕정이라는 이 불가해한 본성이 늙음에 대한 사회적 시선, 즉 통념적 고정관념과 충돌하는 것은 모든 인간적 고뇌이자 난문제이다.

에구치는 동료의 소개로‘잠자는 미녀의 집’이라는 진기한 여관을 소개받는다. ‘안심 할 수 있는 손님’, 즉 남자가 아닌 노쇠한 노인만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나신(裸身)의 젊은 아가씨와 동침할 수 있는 장소이다. 잠들어 있는 미모의 젊은 아가씨를 시각, 촉각, 후각을 동원해 탐하는 에구치의 노인성은 과거의 기억들로 연결된다. 그 기억들은 여인들과의 추억이며, 혼전에 처녀성을 상실한 둘째 딸아이로, 그리곤 마침내 어머니에 대한 생래적 귀환으로 맺어진다.

싱싱한 젊음의 육체, 어린 여체가 발산하는 내음, 입술, 벌어진 입 속에 드러나 이와 혀, 머릿결, 탄력적 피부가 전해주는 촉감..., 노추(老醜)와 배덕(背德), 마성(魔性)이 휘몰아치고, 억제된 관능이 환상적 희열을 고조시킨다. 남자를 잃은 노인들의 애처로움과 달리 여전히 남성을 지닌 에구치 노인의 감성은 붉은 비로드 커튼이 쳐진 은밀한 밀실이란 공간 안에서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소멸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그래서 에구치란 인간의 보편적 욕정을 보는 우리의 시선은 더욱 난해해진다.

죽음 같은 깊은 잠에 들고 싶다는 에구치의 소원에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음을 보게 된다. 노년의 에로티시즘, 즉 죽음과 성, 그리고 어머니의 자궁으로 이어지는 이 환상적 관능의 서사시는 삶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경유지대인 그 회색지대를 이해하게 해주고 고뇌를 쓰다듬어 준다.

반면 마르케스의 노인은 보다 적극적인 삶을 추구한다. 자신의 아흔 살 생일을 자축하기 위해 성적 희열, 일락(逸樂)을 선물한다. 매음굴에 처녀를 주문하는 노인의 욕망은 에구치의 출발과 다르다. 또한 다섯 차례에 걸쳐 매번 다른 아가씨와 동침하는 에구치와는 달리 그는 단지 열네 살 소녀에 대한 사랑으로 치닫는다. 환희와 열정, 희열이 뒤엉킨 새로운 사랑, 삶의 역설적 복귀이다.
잠자는 여인들은 그녀들의 상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이는 노인들의 수치심과 교묘하게 교차한다. 또한‘죽은 듯이 자’는 여체는 살아있는 생명이지만 또한 죽음이기도 하다. 이러한 도식이야말로 노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더할 수 없는 장치일 것이다.

대문호인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이것이 내가 쓰고 싶었던 바로 그 소설”이었다고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에 매혹되었듯이, 그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또한 노년의 고독과 에로스와 죽음의 관계성을 이해시켜준 걸작중의 걸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케스의 작품은 수년전에 읽었던 것이지만 그의 작품의 기원이 된 야스나리의 작품을 당시에는 읽을 수가 없었다. 몇 년 후에야 『잠자는 미녀』가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는데, 그나마 조기 품절되고, 다시금 초판 2쇄가 얼마 전 출간되었음에도 이 역시 일시에 품절되어 구하는데 애를 먹었다. 어렵사리 손에 넣고 나니 그 독서 맛이 여느 작품보다 더욱 깊다. 이 여운을 오래 지속시키고 싶은 탓에 작품의 본격적인 감상을 미루고 있다. 이 두 거장의 작품은 오랜 감동과 이해를 내게 보존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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