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사소설 살림지식총서 232
안영희 지음 / 살림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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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자신의 사생활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고백하는’ 양식의 소설인 사소설(私小說)은 내겐 기이하고 혐오스런 느낌을 주었다고 해야겠다. 자기의 실제경험을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소위 리얼리티를 진정한 문학이라고 하는 소신인데, 이게 거북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2011년 수상작이 사소설인 『고역열차』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은 1920년대의 서구 자연주의 문학이 왜곡되어 이해된 일본문학의 특수한 형태가 왜 21세기 일본의 현대문학 시장에서 다시금 부상하게 되었는가하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부랴부랴 사소설의 탄생 배경과 사소설의 요소와 특성, 일본인의 의식과의 연관성 등에 대한 궁금증의 해결로 나가게 했다. 소설의 화자는 곧 작가인 소설, 경험 사실을 소설적 형태로 서술한 것, 그렇다보니 작가의 경험을 한 치도 넘어서지 못하기에 갈등구조나 해결방식, 절정과 대단원에 이르는 소설의 양식을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로 인해 삶의 균형을 상실하는 수많은 사건들을 허구가 아닌 현실에서 체험하여야 하다보니 사소설 작가들의 인생이란 밑바닥 삶과 소외되고 저열한 생활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처럼 개인의 지루하기 그지없는 사생활을 들려주는 얘기가 독자에게 대체 어떤 의미를 주기에 문학으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일까? 사실 한국의 현대문학에서는 이러한 유형의 작품은 발붙이기 어려운 장르라 할 수 있다. 타인의 개인사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으며, 고작 험난하고 비참하며 비루한 일상을 읽어야 할 동기유발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인들과 그들의 사회는 온통 빠져들고 칭송한다. 이것은 일본인 고유의 정서와 인식과 사소설이 지니는 속성과의 강한 유대관계를 의미한다. 근대 서구 자연주의문학이 일본에 유입되면서 사소설이라는 변태적 리얼리즘 문학으로 정착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며, 일견 퇴행적인 문학양식이 여전히 그 생명이 단절되지 않고 오히려 지지받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사소설의 탄생

사소설이란 장르의 개막은 일본의 자연주의 시작과 궤적을 같이하는 모양이다. 사실의 충실한 재현과 노골적인 묘사를 원칙으로 하는 자연주의가 천황의 강력한 지배하에 놓인 1900년대의 일본사회에서 “구시대의 비판이 사회와의 대결”이라는 방식으로 나가지 못하고, “신변으로 시야를 좁힌 관조의 리얼리즘”으로 안착된 것은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다. 결국 일본의 자연주의는 개인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표출, 즉 사생활을 중시하는 고백문학의 탄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적나라한 자기고백, 소설의 묘사는 어떠한 것도 진실이어야만 한다는 신념은 당대 일본문학계의 주류가 되기에 이른 모양인데, 이의 대표적 작품이자 사소설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1907년에 발표된‘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의 『이불(蒲團)』이다. 도키오라는 중년 작가가 자신의 집에 기숙하는 여 제자를 향한 비밀스런 애욕을 그린 작품으로 결코 충족할 수 없는 남자의 욕망이 그야말로 노골적으로 서술된 이야기다. 이것은 작가 자신의 실제 현실의 그대로의 재현으로서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리얼리즘 소설이 아니라 단지 사생활을 소재로 작가 자신의 내면을 그린 이야기다.

여기서 일본 사소설의 고유한 특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철저하게 사회와 격리된 사적 생활의 기술에 머문다는 점이다. 다야마 가타이의 변형된 자연주의에 매료되어 사소설의 양식을 확정시킨 작가 중 한명인 ‘이와노 호메이’의 『오부작』은 사회성을 배제한 채 온전히 자전으로서 자신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드려내고 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사생활을 모델로 소설을 쓴 이유는 “생활과 예술 그리고 사상이 합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생활이 그대로 예술이 되기를 원했고 자신의 사상과 문학을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구현하려 했다고 하니, 망상도 이쯤 되면 할 말을 잃어버리게 한다.

사소설 작가와 일본인의 의식구조

1.

이처럼 자기 사생활을 소설이란 구조에 담아내려다보니 감동을 주어야 하는 자기 폭로에 한계를 느끼는 것은 불가피한 귀결이다. 소재의 고갈이 극명하게 다가오는 것인데, 그렇다보니 밑바닥 삶과 자극적 사건을 몸소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따라서 사소설 작가들 대다수는 어린 시절부터 비참한 환경에서 성장하고 철저하게 고립된 생활을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설혹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소설을 쓰는 작가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상적 균형이 수시로 파괴되는 것이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 현실의 무참한 폭로라는 비애를 감수하면서 사소설을 쓰는 작가이기 위해서는 이 폭로로 인해 자신이 더 이상 침몰하지 않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올해 아쿠타가와상 수상자인 ‘니시무라 겐타’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중졸의 학력에 날품팔이의 무력한 노동자이며, 성범죄자의 아들이다. “그들은 출발시점부터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생활 실격자’”였으며, 픽션과 같은 외출복은 필요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 빈번하게 번역판이 출간되는 사소설 『인간 실격』의 작가‘다자이 오사무’는 유산계급의 자식이었으니, 이 자는 거꾸로 사소설의 소재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파멸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의 소설처럼 반복되는 자살과 사창가 여인과의 도피 등, 자기 예술의 승화를 위해 극단의 생활을 추구했으며, 궁극에는 이 기이한 예술의 모순을 마감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여 해결하는 길 이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하면서 그들은 왜 써야 했을까? 소외되고 고립된 그들로서는 누구 내 말 좀 들어줘요.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고, 뭔가를 쓰는 것은 피난처이자 자기 위안이었을 것이다. 특히 이 쓴다는 것은 타인과 직접 대면하고 말하기 어려워하는 일본인 고유의 습성 탓에 상대적으로 쉽게 느낀다는 것이며, 자기 객관화 능력이 떨어지는 일종의 어리광, 나르시시즘이라는 일본인 전형의 인격구조 탓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한 고백행위라는 작가의 자기희생 행위를 칭찬하는 일본인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인식구조도 한 몫 한다. 그러나 글을 쓰기 위해 불행한 처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단조로운 일상으로 인한 소재고갈을 뛰어 넘기 위해 끊임없이 불행한 생활이라는 자기 연출에 내몰리게 한다. 자신의 사적 생활 영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소설의 한계는 문학이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게 한다.

2.

어쨌거나 이 자폐증적 요소를 지닌 사소설은 일본의 문화코드와 분명 연관되어 있다. 일본의 대중 영상물을 보면 공통된 특징을 발견하게 되는데, 유독‘엿보기’를 즐긴다는 것이다. 일본처럼 TV, 신문, 잡지에서 루머나 유명인의 사생활을 화제로 많이 다루는 나라가 없다고 한다. 자신인 ‘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타인인 내가 그것을 살짝 엿봄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교사하는 심정이 잠재해 있으며, 사소설은 바로 이러한 공공연한 엿보기를 충족시켜 준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도 이러한 일본 문화의 영향에 노출됨에 따라 무분별한 관음증이 각종 미디어를 휩쓸고 있다. 어쩜 이러한 현상이 일본문학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사소설의 ‘사실성’이라는 소설 속에 그려진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은 일본인에게 사실에 충실한 작가라는 신뢰를 준다는 것인데, 이것은 작가와 동일한 인물인 소설 속 주인공에 친밀감을 갖게 하고 나아가 ‘자기 동일화’로 더욱 빠져들게 한다. 특히 사실을 숭상하고 허구를 배척하는 일본사회의 특수성은 사소설의 자전적이고 현실의 생활기반 중심의 이야기가 본능적으로 수용되는데 거부감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사소설은 사회에서 도피하여 사적 공간에 머묾으로써 정치사회적 무관심에 놓이고 자기 내면에만 골몰하며 자기연민에 빠진 인간을 양산한다. 결국 사소설이 개인사를 얘기함으로써 반사회적 의식을 시사하더라도 예술을 관철하기 위해 자기 현실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치 전도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글쓰기인 이상 자기 파멸적, 멸망의 문학이란 오명을 피하기도 쉽지 않다.

고백문학, 일기문학, 수기문학으로서 작가가 화자인 사소설은 작가의 시선이 주인공과 객관적 거리를 가지지 못함으로써 자기반성이 불가능한 문학이다. 반성이 없으니 변화가 없고 때문에 발전이 없다는 일본 현대문학의 거장‘미시마 유키오’의 지적처럼 “자유로운 인격의 발전” 혹은 “자신이 책임지는 자율적 개인의 인격형성”이라는 가치와 갈등을 일으킨다.
허구를 배제하고 사실을 추구하는 기이한 소설, 객관적 거리감을 상실한 문학인 사소설이 일본문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배경은 일본인들의 정신구조와 관련하여 이처럼 비상한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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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역열차 - 144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니시무라 겐타 지음, 양억관 옮김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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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이 그들의 삶의 목표라 할 수 있는 욕망들을 추구하며 내외적인 적대적 요소들과 무수한 갈등을 일으키고, 그것에 도달하려는 용기와 좌절, 그리고 희망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통해 우린 인생의 또 다른 진실을 찾기도 하고, 마음의 정화를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이러한 현대소설의 양식과 사뭇 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자기 삶에 대해 이렇다 할 의욕도, 희망도 없어 보이고, 삶의 균형을 깨는 요인들이라 이해하기에는 열악하기 그지없는 것들에 증오하는 태도의 인물로부터 고착화된 의기소침과 좌절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열패감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인지 쓸쓸하고 우울하다는 분위기 이상의 무엇에 도달하기가 여의치 않다.

마치‘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인간 실격』의 주인공이 부활한 것만 같은 인상을 받는다. 작가 자신의 신변에서 일어난 일상의 이야기를 수기처럼 써내려간 사소설(私小說)의 리얼리티가 극적 재미를 기대했던 독자를 배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개인사에서 인간과 세상의 보편적인 무엇을 발견하거나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그것이 교감하는데 낯설다는 것이다. 또한 대단원을 향한 휘몰아치는 갈등과 그 해결이라는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 하지만 사소설로서는 작가 인생의 대전환이나 혹은 죽음과 같은 극적인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니 이것이 박탈당한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이 수월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은근히 시선을 붙잡는 마력이 있다.

1.
마흔이 넘은 작가가 자신의 청년기 기억을 술회하고 있다. 성범죄자인 아버지, 가족에 보내는 사회의 시선, 그것은 수치심과 굴욕감에 포획되게 하고 보통사람들의 사회, 그 평범함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된다. 가까스로 중학교를 마치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사회란 것은 막노동 이외에는 존재치 않는다. 항만에서 냉동 창고 하역작업의 막 일꾼으로 생활을 견뎌가지만‘간타’란 이 인물은 이조차 시큰둥하다. 하루 노동하곤 끼니를 구할 돈이 없어지면 다시 노동에 나선다. 그에게 목표란 것, 삶의 균형이란 것의 의식이 없다. 그러니 깨지고 말고 할 평형 상태란 것이 없다. 먹고 마시고 싸는 원초적 본능의 충족만이 전부다.

세상에 대한 낙심과 자신에 대한 혐오에 기초하는 좌절은 이렇게 희망의 기대를 지워버린다. 이러한 간타의 일상이 하역작업에서 동갑내기의 전문대학생을 만나면서 변화하는데, 타인과의 친근한 대화에 굶주렸던 그로서는 그를 만나는 즐거움으로 성실한 일용직 노동자의 대열에 서는 것이다. 이것은 술과 매음굴을 찾을 수 있는 금전에 대한 약간의 여유를 덤으로 주고, 창고 내에서 일하는 자의 점심 특혜와 지게차 운전기능을 습득할 기회가 된다. 그러나 희망을 제거한 인간에게 이를 실천할 용기나 열정이 있을 리가 없으니, 그에게 주어질 것은 다시금 단순 하역 노동자로의 복귀다.

한편 전문대생의 여자 친구인 대학생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가 그에게는 지적 허영이라는 역겨움으로만 인식되고, 열등감을 일깨운다. 이것은 그와 그들을 구분하는 일종의 구별 짓기로 이해되고 분노를 터뜨리는 구실이 된다. 이 사건은 유일한 친구를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고, 보통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다가 가는데 실패했다는 말이 된다. 열아홉 살 중졸 학력의 청년이 성범죄자의 아들이란 무게를 떨쳐내고 세상으로 나오는 것, 그가 삶의 욕망을 찾으려고 단단한 세상 경계의 벽을 깨기까지에는 평범한 우리들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고역의 시간이 필요 했을 터이다. 그러나 여전히 하루벌이 일용 노동자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그의 작업복 뒷주머니에 지니고 있던 사소설 작가 ‘후지사와 세이조’의 작품 복사물이 어느 순간 깨어났기에‘고역 열차’라는 신산한 삶의 얘기를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2. 
소설 『고역 열차』는 이처럼 열아홉 살 하역노동자로서의 삶의 기억인 「고역 열차」라는 미완의 이야기를 완성하려는 듯이 마흔이 넘은 사소설 작가로서의 삶인「나락에 떨어져 소매에 눈물 적실 때」라는 제목으로 비로소 욕망에 갈등하는 보통사람의 세상에 들어선 자를 얘기한다. 문학계의 파벌이나 인정이 개입하지 않은 그야말로 공정한 심사로 정평이 난 문학상으로서‘가와바타(川端)상’을 상정하고, 자신의 작품이 최종 후보작에 오르자 그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동종업자들의 자의적 평가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에도 불구하고 수상의 영광에 대한 기대를 떨쳐내지 못하는 헛된 집착의 비참함에 사로잡힌 자신에 대한 혐오, 자기부정과 합리화의 갈등을 보여준다.

달관한 척하면서 체념을 강요하지만 영예에 대한 희망, 그 명성을 얻지 못하면 일생 후회할 것만 같은 안타까움에 시달리는 것인데, “무작정 대접 받고 싶었다. 수많은 여성 독자들의, 설령 일회성의 무의미한 소통이라도 좋으니 어쨌든 하룻밤만은 속 일 수 있을 만한 인기를 얻고 싶었다.”는 고백은 코끝을 찡하게 울리는 감동을 준다. 소설가로서 인생을 마치고 싶어 하는 사소설 작가의 염원, 지니지 못했던 삶의 균형을 향한 작은 욕망이 현실의 아쿠타가와(芥川)상으로 전해졌으니 그가 비로소 세상에서 갖게 된 희망, 꿈의 실현으로 괜스레 덩달아 긍정으로서의 삶을 느끼게 된 것처럼 고무되는 것이다. 욕망 없는 세계에서 그를 건져준 사소설의 세계, 은근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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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힘 - 매혹적인 스토리텔링의 조건
이창용 외 지음 / 황금물고기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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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힘’을 말하는 책이 혹시라도 정작 이야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낭패일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이 문자 그대로‘이야기’의 위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득하고 있지 못했다면, 그래서 책에 몰입케 하는 데 실패했다면 아마 소감을 남기려는 의지는 저 멀리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 외려 이『이야기의 힘』이 전해주려는 우리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에 홀딱 빠져버렸다는 말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에는 어떤 힘이 있기에 이렇게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일까? 이 책은 바로 이 이야기란 사람에게 대체 무엇이며, 모든 인간으로부터 공감을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조건, 나아가 그런 이야기들이란 어떤 형식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다. 스토리텔링의 상업주의적, 소위 마케팅 테크닉을 전달하는 비즈니스 계발서 따위는 아니다. 물론 이야기의 힘을 응용하여 명성이나 성공적인 부를 쌓은 브랜드, 상품, 서비스의 사례를 볼 수 있으니 ‘이야기’의 총합적 개론서쯤이라 해야 할까?

이야기란 무엇인가? 왜 우리들은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일까? 이야기가 인간에게 필요했던 것은 기억을 잡아두고, 대화의 거리와 말의 벽을 넘어 다른 사람의 가슴으로 스며들어 마음을 변화시켜주며, 추상적 설명보다 구체적 이야기가 훨씬 이해하기 수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인간에게 전하려는 것, 삶을 풀어가는 것, 삶을 이해하기 위한 장치로서 이용한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인간에게 공감을 일으키고 마음과 행동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고 매료되는 이야기, 훌륭한 스토리는 어떤 조건과 양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이야기일 때 비로소 이야기 고유의 힘을 발휘한다.
                 
“이야기는 욕망이 주도한다.”는 시나리오 닥터인‘로버트 맥기’의 말은 한 문장으로 정련된 이야기에 대한 최고의 정의로 와 닿는다. 인류가 수천년간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고 납득시켜온 것은 바로 인간은 균형을 잃었을 때 그것을 되돌리고자 분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 깨어진 균형을 찾기 위해 무엇을 필요로 하고 갈망하는지, 즉 욕망의 성취를 향한 여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 속 인물이 그 깨진 균형을 찾기 위해, 자신의 부정적 내면이 되었든 외부의 그 무엇이 되었든 적대적 환경과 맞서 싸우며 삶의 본질을 깨닫고 용기를 얻으며 희망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변화하며 새롭게 태어나기도 한다.

이야기의 인물이 추구하는 목표, 그 욕망의 대상은 독자, 관객, 청중들 각자가 “자기 삶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 원하는 바로 그것의 은유인 것”이다. 결국 이야기의 재료는 주인공이 끊임없이 바라는 욕망과 그 반대세력 사이의 간극이다. 우린 이 간극, 세상이 내어주지 않는 욕망 성취를 방해하는 힘과의 분투에 매혹되며 몰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서 방향을 찾고, 알려주지 않은 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우리들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이야기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도 있으며,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고, 현실 속에서 이루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도 불러일으킨다. 우린 이야기를 통해 무엇인가를 공유하며 함께 참여하고 변화를 가지려 하는 것이라 하겠다.

아마도 이 책의 백미(白眉)라 할 것인데, 이처럼 인간 삶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그 수많은 형태의 삶의 이야기들을 훌륭하게 쓰거나 구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 만들기’라는 소설, 시나리오, 그 밖의 스토리에 대한 단계별 작법이다.
한편의 단막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하여 유명 영화, 방송 드라마의 사례를 곁들여 가며, 삶의 균형이 무너진 주인공이 그 균형을 회복하고자 여려 적대적인 것들과 맞서면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해 나가는 장면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주인공의 성격 설정에서부터 시간과 배경의 설정, 삶의 적대자와 장애물 등 대립구조 만드는 법, 그리고 최고조에 이른 갈등, 즉 “갈등의 힘이 뚜렷할수록 그것을 풀어내는 스토리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는 글쓰기의 준공리를 지켜내는 방식, 갈등해소와 복선의 활용, 화자의 철학과 가치관이 드러나는 핵심으로서의 결말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절로 훌륭한 스토리텔러가 된 듯한 자신감을 갖게 할 정도이다.

“이야기에는 무의식적 욕망, 금기된 것들의 욕망, 하지 못한 것들, 혹은 할 수 있는 것들”과 같은 우리의 근원에 대한 것들을 담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무한한 욕망과 관련되어 감성을 자극하고 공감대를 형성시켜준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부족한 것들, 다시 말해 욕망의 대상인 것들, 사랑? 미성숙? 부정적 태도? 등등 그것을 채워주는 이야기들은 지금도 무수히 만들어져 우리들 삶을 끊임없이 자극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우리들을 더 가치 있고 선하며 도덕적 상승감에 연결시켜주는 한 우린 이야기의 힘에 매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야기는 이처럼 일회적으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추동력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동안 접했던 소설, 영화와 드라마, 오페라의 스토리를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 일종의 분석적 이해력이 생긴다고 해야 할까. 또한 재미있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치기어린 자신감도 얻게 되며, 오늘날의 각종 소통수단들과 대화 도구를 통해 효과적 의사 전달에 대한 감각도 깨우치게 된다면 지나친 이해일까? 결국 삶의 원형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본질에 대한 탐구인 이 책은 본격적 이야기의 시대인 오늘에 신선하고 적절한 이야기 문화의 안내서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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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방 모중석 스릴러 클럽 29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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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내적 욕망에서부터 외부환경과의 갈등으로 수시로 그 균형을 잃어버리고 고통과 고뇌로 슬퍼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울어진 균형을 되찾기 위해 용기를 내어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잃어버린 길은 무엇인지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 여정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어서 좌절하기도 하지만 희망을 저버리지 않기도 한다. 이처럼 삶이란 그것이 사랑이건, 재물이건, 어떤 지적 탐구를 수반하는 정신작용이건 성취하고자 하는 대상에 이르려는 장애물과의 욕망의 투쟁이고 이의 균형이다.

특히 삶의 균형을 해치는 고통 중에서 가족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라는 유대감의 상실만큼 인간을 고립시키고 좌절케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들이 성장해가는 데 절대적인 후원자이다. 혹여 마음이 다치지 않을까, 신체에 손상이 생기지 않을까, 그릇된 길로 들어서지 않을까, 그들이 미래의 성숙한 인간으로 가는 여정에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이와 부모의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부모의 관심과 아이의 관심사에 괴리가 생기고 그 간극은 미세하게 벌어지기만 한다.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어떻게 그 간극을 좁힐 것인가? 어디까지 개입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정답이 없는 양육의 딜레마에 봉착한다.

소설은 바로 이 난해한 위치에 들어섰을 때, 부모와 아이의 신뢰와 사랑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 아이들이 마음에 상처를 지니게 되었을 때 부모가 할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대처하며, 싸우게 되는지를 추적한다. 그리고 부모의 개입과 아이의 프라이버시 존중과의 경계에서 무엇이 선(善)일 수 있는지를 생각게 한다. 또한 내 자식을 보호하기 위한 행위가 남의 자식에게 위해가 되는 것일 경우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무심히 뱉어낸 어른의 한 마디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가 되는지 우린 목격하게 된다.

사소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문제들이 다양한 모습을 띤 중산층 가정들에 렌즈를 맞춤으로써 잃어버린 균형을 복원하기 위해 달려가는 인간의 용기와 사랑이 세련된 감수성, 독자의 강박적 긴장을 쥐락펴락하는 정교한 플롯의 구성, 치열한 갈등과 대립의 흥분 속에 온통 녹아 흐른다.
미스터리, 서스펜스, 극적 아이러니까지 총동원되어 호기심과 감정의 자극을 첫 장부터 마지막장에 이르기까지 쉴 새 없이 흐르는 이야기에 탈진할 정도의 재미로 독자를 몰아 부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얼굴의 형상을 완전히 짓뭉개 버리는 이들의 무참한 폭력살인, 게다가 알려지지 않는 살해동기와 신원을 알 수 없는 피해자까지 더해지고, 사건의 초등수사과정에서 드러나는 풋내기 여성 수사반장과 무능한 담당형사와의 첨예하고 혐오감을 자극할 정도의 수사권 갈등, 그리고 10대 아이들을 둔 중산층 가정들의 팽팽한 양육갈등, 이웃집 아이의 자살, 여자아이의 성적 정체성을 모독하는 선생의 감정적 언사가 만들어 낸 정신적 폭력 등 무수한 갈등들이 걷잡을 수 없이 모여들어 그야말로 부글거리는 감정의 도가니에 빠져들게 한다.

특히 홀로 침잠하는 아이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부모로서의 보호, 즉 개입의 문제와 관련하여 아이의 컴퓨터에 실시간 감시 장치인 스파이로봇을 설치하는 것은 과잉보호이며, 아이의 프라이버시 침해인가, 아니면 위험에 처해있을지도 모를 아이를 구원하기 위한 부모로서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인가라는 답 없는 문제의 제기부터 복선으로 작동하는 무수한 인스턴트 그리고 SNS 메시지, 시스템 엿보기 장치에 이르는 오남용되고 있는 정보통신기술의 소재까지 진중한 주제와 신선한 소재의 믹스는 작품의 풍미를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

살해된 여성들의 관계가 파악되고, 살해 동기와 살인자의 신분이 드러나는 마지막의 여정에 이르면 무심히 던진 한 마디가 얼마나 우연이란 증폭의 기제를 타고 인간의 삶을 암흑의 구렁텅이에 처박아댈 수 있는지에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자식의 보호를 위해 때론 부도덕을 불사하는 더없이 이기적으로 변하는 부모들의 편협성, 예기치 않은 우발적 피해가 삶의 행복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그 무서운 잔혹성의 실체를 보게 되기도 한다. 인간이 어찌 삶을 예측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불확실하며 우연함에 의해 조성되는 것이 삶일지라도 우린 그 우연을 만들어 낼 작은 요소들에 관심과 사랑과 신뢰를 보냄으로써, 그리고 비록 깨진 균형일지언정 되찾으려는 용기를 잃지 않을 때 소중한 것들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갈등 구조들과 치밀하게 얽힌 사건들의 인과관계가 밝혀지는 대 결말은 가히 최고조의 카타르시를 경험하게 한다. 이 소설이야말로 스릴러가 가족소설과 결합 할 수 있는 가능한 상상의 끝이라면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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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교양사상서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정영하 옮김 / 산수야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자유(自由;liberty), 어렵고도 쉬운 말이다. 인간 개체의 생래적 본성 같기도 하지만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개체의 집단이 행사하는 자유까지 고려하면 이처럼 경계가 애매한 표현도 없기 때문이다. 사전적 의미를 보면 구속이나 억압에 반대되는 어휘이고, 법률이 되었든 그 어느 것이 되었든 외부적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위, 또는 자연 및 사회의 객관적 필연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활용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개인적 자유를, 후자는 사회 등 외부 환경 하에서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결국 이 둘은 어디선가 충돌하고 소음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J.S.밀은 이처럼 개인의 자유가 사회와 맞닥뜨리게 되면서 불가피하거나 불가결하게 침해받거나 통제되는 현상에 부당성과 불법성이 개입될 수 있음을 보았으며, 이에 대한 경계, 그 한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직관했던 것 같다. 따라서 『자유론』은 “개인에 대해 사회가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본질과 한계”라는 시민적, 사회적 자유에 대한 논지를 핵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이며, 사회는 그 자유의 어느 지점에서 권력을 행사하여야 하는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오늘의 사회는 거대한 정부와 다양한 사회집단, 게다가 민간기업조차 대규모화되면서 개인과 이들 집단과의 마찰의 형태는 엄청날 정도로 다양하며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억압하려는 권력화 된 집단들이 무수히 증가하여 그 어느 시대보다 시민적 자유는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자유의 자기중심적 발현으로 인해 공동체의 건강성이나 사회적 안정에 해악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시민과 사회적 자유에 대한 최초의 담론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오늘의 우리에게 개인적 자유와 권력의 한계에 대한 판단의 귀중한 가치 기준을 제공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에 간섭하는 것은 언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밀은 공리주의자답게 “사회 전체의 부를 감소시키는 것이나, 전체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것”은 사회가 간섭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라 주장한다. 이는‘벤담’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절대적 공리주의에서 조금 후퇴한 논리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행복의 크기를 침해하지 않는 한, 오히려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호되고 지켜져야 한다는 자유지상주의적 견해라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밀은 자신만의 공리를 내세운다. 개인의 자유재량에 일임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보아 이익일 경우, 사회가 통제하면 오히려 개인보다 더 큰 해악이 발생할 경우, 사회가 단지 간접적 이해관계만을 갖는 경우의 개인의 자유는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와 간접적 이해관계를 갖는 자유는 왠지 개인의 절대적 자유로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보인다. 개인이 직접적으로 특정한 타인에게 행한 것이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 결합(결사)의 자유는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자유 형태가 될 것이다.

왜 언론 출판의 자유 등 간접적 이해관계의 자유는 절대적 자유이어야 하는가?

인간의 내부 의식세계의 영역에 있는 양심의 자유, 사상과 감정의 자유, 기호의 자유와 행복추구의 자유가 절대 불가침의 자유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지성은 없다. 그런데 사상의 자유와는 유사하지만 언론, 출판의 자유는 개인 일신상의 내면에 머물지 않고 공중을 향해 드러나는 자유이기에 의도하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불특정인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개인을 넘어 타인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러한 자유에 절대 불가침의 권능을 부여하면 해악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떨쳐내기 어렵다. 그러나 밀의 논리는 의외로 간결하고 명확하다. 그 첫째 이유는 어느 누구의 의견도 ‘절대무오류’의 진리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억압하려 애쓰는 의견이 잘못된 의견이라고 단정할 정도로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세상은 절대로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는다는 맹목적 신뢰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으며, 시대라는 것도 개인 못지않게 잘못을 저질러 왔으며, 절대적 확실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정하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진리 일 수 있음을 차단하는 형국이 되어버려 전체의 행복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둘째는 억압되는 의견이 설혹 잘못된 것일지라도 지배적 의견이란 항상 완전한 진리가 아니기에 일부 진리를 포함할 수 있으며, 셋째는 이미 일반에 널리 인정된 진리가 있을지라도 활발한 논쟁이 허용되지 않을 경우 대다수는 편견을 품어 합리적 근거를 이해하고 실감하는 일을 잃어버리게 되며, 끝으로 참된 진실로 향하는 전제인 비판을 통한 완전한 진리의 추구를 방해하여 인류의 인성과 행동에 미치는 결정적 영향력을 상실시켜 진리의 확신을 미완에 그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통제되고 억압된다면 개인들은 누구의 비위도 거슬리지 않으려는 기회주의적 태도로 결코 진리를 이야기하려 하지 않거나, 두려워 정신적 발전이 전면적으로 위축되고 이성이 겁에 질려 사상의 발전은커녕 획일화로 인한 편협한 세상으로 퇴보하게 되고 말 것이다.

자유와 개성, 그리고 개인주의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충분히 자유롭게 비교해본 결과, 즉 자유와 다양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결코 진리를 발견 할 수 없으며, 이 다양성은 개성을 창조하고 발전시킨다. 개성의 시대라고 부추기는 오늘은 자유의 기초위에 서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개성이란 것이 자제력을 상실하고 오직 욕망과 충동으로 치달아 좋지 못한 행위로까지 비난받기도 한다. 균형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인데, 그렇다면 개성은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일까?

공리주의적 논리를 역설적으로 적용하였을 경우 그 개성이 공중에게 어떤 어리석고 저속하며 타락적인 해를 주는 것일지라도 존중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을 볼 권리, 싫은 것을 피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아닐까? J.S.밀도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위는 도덕적 벌과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데 동의하지만, 단지 비호의적 판단인 악평과 긴밀하게 결부되어있는 불편일 뿐인 만큼 감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태도는 오늘날 개인주의로 고착화되어 공동체의 의식을 저해하고 이기적 개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타락이란 오명으로 연결되어 오히려 시민의 권리를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밀의 주장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과거의 진리가 새로운 시대의 진리에 부정되기도 한다. 진리는 공리적으로만 판단 할 것이 아니다. 여기엔 중대한 함정이 있어 보인다. 공동체의‘연대의식’이라는 자연적 의무나 합의를 필요로 하는 자발적 의무를 넘어서는 의무에 적대하게 되는 것이다. 자유에서 출발한 개성도 사회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욕망의 과잉으로 내 닫게 되면 우린 그것에 무언가 간섭을 해야 하지 않을까? 칸트의 말처럼 인간을 쾌락, 즉 전체의 행복의 도구로만 보는 그런 자유의 정의는 왠지 도덕적으로 수용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결 어

근대적 시민의 자유에 대한 최초의 정의에 나선 이 책은 이와 같이 사상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인간의 개성이 자유의 필수 요소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이유와 개인과 사회적 권위의 경계와 한계, 시민적 자유의 공리적 권위를 지니는 원리의 실질적 적용에서의 문제라는 주제로 사회와 국가, 개인의 자유에 대한 다층적 사례와 분석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을 살며 부딪치는 각양의 정의의 문제에는 자유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있다. 인간 정신의 진보를 위한 진리의 발견이라는 본질적이며 인간사회 전반의 기초를 이루는 자유의 기준에 대한 밀의 공리는 세상을 보다 신중하고 입체적인 관점에서 생각토록 견인한다.

다른 의견이 존재한다는 것은 대단히 유용한 것이다. 잘못되고 버려진 의견이 진리일수도 있으며, 진리성을 명확히 이해하고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잘못과 싸우는 것이 필수불가결의 조건인 것이다. 모든 학문이나 종교적 진리조차 치열한 공박과 싸움에서 비로소 참된 의미로 접근해왔다. 논쟁이 가라앉는 것은 의견의 통일이 될 수 있지만 의견의 다양성의 범위가 좁아져 진실과 진리의 방향을 상실 할 수 있다. 더구나 진리는 두 편이 나누어 가지는 경우도 있다. 서로가 진리의 한 부분에 불과해서 반대의견을 통해 보충되고 완전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유의 정의를 넘어 개방적이고 진리에 대해 열린 자세를 취하는 위대한 지성으로부터 배우게 되는 자유와 정의, 진리의 탐구는 시민적 자유, 사회적 자유라는 정치철학 그 이상의 엄숙한 삶의 태도를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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