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 미천한 것, 별 볼일 없는 것, 인간도 아닌 것들의 가치와 의미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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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줄 곧 수행하는 낯선 것의 드러냄과 그래서 익숙해 진 것들의 다시 낯선 것으로의 되돌리기 작업이다. 보지 못하던 것, 생각지 못하던 것, 알지 못하던 것의 실체를 선명하게 드러내어 그 존재성을 부각하고 그것에 잠재된 진실의 의미를 확인함으로써 우리들이 상실하거나 잃어버린 감각을 깨우는 기획이다.
하찮고, 비루하며, 보잘것없어 그 존재마저 지워버리려 하는 것들, 그럼에도 그 정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낯섦과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 이들‘불온한’것들의‘있음’에 대한, 그 실재함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존재론’인 까닭은 “존재하는가와 무관하게 표상되는 명사적 실체”인 존재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산엔 곰이 한 마리도 없어” 라는 말이 곰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지만 이 경우에도 곰은 곰이라는 존재자임이 분명하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설혹 우리들이 보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으려하며 그 존재자의 존재를 부인하더라도 존재하는 존재자들, 바로 이 알 수 없어 불온한 존재자들을 새롭게 보아야 하는 이유의 이야기다. 이들 표상으로 ‘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우스(oncomouse)’,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precariat)’등 여섯의 불온한 것들을 통해 우리들의 감각적 타성을 벗어버리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불온하다고 느끼는 것은 눈앞에 있지만 무엇 때문에 저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 정체를 알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을 때 발생한다. 또한 불온성은 그 부정의 대상이 나를 덮쳐올 것 같은 불안, 즉 내가 선 자리와 내가 가진 것을 잠식하리라는 예감에서 오는 불안과 당혹의 감정이다. 이 불편한 감정,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그것을 억압하고 급기야는 폭력을 휘둘러 공격한다. 자본가에게 비정규직 노동자가 불온하게 인식되어 공권력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 최근의 한진중공업 사태와 같은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 불온한 것은 무엇일까? 이처럼 이 책은 우리의 통념적 감각을 바꾸는 작업, 인간의 혁명을 말하고 있다.

불온한 것의 처음을 장식하는 대상은‘장애자’이다. 정상인들은 왜 장애자를 불온하게 여길까? 비하와 동정의 양가감정을 수반하는 거부의 시선, 이 시선 속에서 장애자는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것이 되었고 그래서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대상이 되었다. 여기엔 인간의 위대함과 탁월성을 기초로하는 존재의 사유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고 이는 곧 장애자는 인간의 위대함을 훼손하고 잠식하는‘결함’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인간의 자랑스런 통념 속으로 밀고 들어와 인간을 그 비루하고 소소한 세계로 끌어들이기에 불온한 것이 된다. 인간이란 것이 과연 이처럼 위대하고 탁월한 것일까? 이 터무니없는 토대는 덜 위대한 것, 덜 탁월한 것인 2류, 3류를 만들어내고, 다시금 배제시키고 지워버리는 작업을 출현시킨다. 이 존재론적 서열화는 우리가 갈라서고 대결하여 끊어버려야 할 사슬일 것이다.

장애자만이 누군가에 의지하여 생존하는 존재일까?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자로서의 장애자는 ‘폐를 끼치는 자’이다. 버스에 장애자가 타고 내리는 것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정상인들은 이런 불편함과 불화로 자신들을 끌어내리는 장애자를 비난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기꺼이 해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재벌이나 권력자는 아마 남에게 가장 커다란 폐를 끼치는 자들일 것이다. 수많은 노동자가 과로하며 생산을 해주지 않는다면, 수많은 사람이 내주는 세금에 기대어 그 세금으로 관료들이나 졸개들을 거느릴 수 없다면 그들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귀찮은 일을 기꺼이 감수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 나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기꺼이 해주는 누군가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자가 조금이라도 노동을 줄이면 호통하는 자본가의 뻔뻔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여기에는 폐를 끼치는 것을 지우는 것으로 돈에 대한 환상이 있다. 돈을 주는 순간 폐를 끼쳤다는 사실을 잊는다. 또한 돈을 주기 이전부터 줄 생각으로 자신이 끼치는 폐를 지워버린다. 자신이 지은 신세를 교환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자신이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 일을 시키면서도(이득이 없다면 고용시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미래의 지불 가능성으로 현재의 모든 폐를 지우는 것이다. 이것은 돈이 많은 자들은 항상 타인에 기대어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장애자다. 모든 인간은 장애자인 것이다. 모든 존재자는 수많은 다른 존재자에 기대어 폐를 끼치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우린 운명적으로 장애자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린 동등하다. 기대어 있음을 보지 못하는데서 기인하는 오인이자 환상인 장애자에 대한 몰이해는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장애자’가 이처럼 의타적 존재로서의 인간 보편의 운명을 통해 존재자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고 있다면, ‘박테리아’는 생성과 면역이라는 매개어를 통해 ‘공생과 공존의 가능성’에 대한 이해를 깨운다.
‘미토콘드리아’처럼 잡아먹힌 것에 잠식됨으로써 변성된, 잡아먹은 것의 새로운 신체가 출현하는 탄생지점을 포착하는 것이다. 생성이란 이렇듯 “어떤 만남이나 충돌에 의해 하나의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한편 나의 내부에 속하는 것과 외부에 속하는 것을 구별하는 면역이 항상 외부를 구별하고 배제하는 메커니즘만 작동한다면 우린 아마 먹이를 먹는다는 것이 불가능 할 것이다. 질병이 숙주와 기생체가 서로 적응하는 과정이라면 치유란 서로의 공생 내지 공존 가능성의 시작이라는 것과 같이 외부적인 것과 공생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될 것이다. 배제하고 추방하는 비위생적 치안이란 호소는 생물학적으로도 비이성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사이보그’에서는 유기체와 기계의 결합, 인간의 외연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경계를 부수어 버리는 자기 소멸의 존재자를 얘기한다. 이것은 확장되어 오늘의 무선통신의 세계와 결합한 인간, 접속과 변환에 의해 자기가 소멸하는 능력에 의해 규정되는 네트의 바다, 실제적인 소통은 없으며 오직 오염과 감염, 변형과 변조만 있는 신체를 말하며, ‘온코마우스’에서는 목적론적 사유로 인해 수단이 되어버린 새로운 신체의 존재자가 된, 즉 상품으로서 만들어지는 신체, 생명복제시대의 윤리, 타자를 수단화하는 비정한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를 비판한다.
이것은 생물학적 성이 남녀라는 인간의 형상을 모델로 하는 함수의 이항성에 매몰된 이성의 눈가림으로 인해‘페티시스트’라는 사물에의 사랑을 왜곡하는 ‘화폐에 대한 페티시즘’으로 연결되어 사물성은 사라지고 화폐에 대한 미친 욕망에 휘둘리는 화폐가치라는 과시성 상품에 의존하는 천박한 남근주의적 욕망의 비판이 된다.

끝으로 불안정을 의미하는 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의 합성어인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어떤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계약직 노동자, 파견직 노동자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신체와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정 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있다. 범람하는 노동자, 이들을 양산하여 값싼 노동력을 상시적으로 착취하려는 시장자본주의는 오히려 이 불명하고 애매모호한 계급의 불온성에 역습을 당 할 수도 있다. 이성이나 정신이 다가설 수 없는 무능력의 지대, 목적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근본적 저항의 지대인 오이코스의 반란은 지속될 것이다. 아니 지속되어야만 한다. “익숙한 것을 다시 낯선 것으로 만드는‘미친 감각’”, 그래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충돌하여 새로운 개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작업, 공생과 공존의 화합을 만들어가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된다. 불온한 것들이라 밀어내는 것들, 그 거북함으로 보지 않고 외면하려는 것들을 통해서 우린 보다 완전한 종족이 되어 가지 않겠는가? 낯설고 불편한 것들과의 만남을 기꺼이 새로운 삶의 기회로 긍정하고 그것들의 존재 자체를 평온한 삶의 전제조건으로 긍정하는 곳으로 안내하는 이 책은 제거와 추방을 행하는 지배질서의 오인을 멋지게 규명하고 있다. 우리의 통념을 기막히게 전복시키며 잃어버린 보편적 진실에 대한 감각을 살려내는 이 존재론적 사유는 적대하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친구가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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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Thirty - 젊은 작가 7인의 상상 이상의 서른 이야기
김언수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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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나이 삼십, 내겐 이 시절이 어떤 것이었나를 기억해보게 된다. 그리곤 젊은 작가들이 그려내고 있는 서른처럼 경계에선 고통의 치열함이 있었는지를 비교해보게 된다. 그래서 오늘의‘30’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인식을 이해하는 시간이 되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처럼 온통 흑색의 혼돈일지는 예상치 못했다. 한 없이 허방을 딛고 공허하며 죽음의 그늘만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암흑을 말하니 빛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장난 같은 것을 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른 살, 삼십대의 나이가 이렇게 서툴고 강렬한 삶의 통증에 휘청거려야만 하는 것인지 낯설기만 하다.

강물에 몸을 던지고, 몇 푼의 돈 때문에 살인에 휘말리고, 순회 살인에, 유령이 된 불륜녀의 죽음이 떠돌며, 생의 기억을 팔아 쾌락과 죽음을 사고, 자살을 위해 심산의 고시원을 찾아들기도 하며, 자살이 상품이 된 공간을 떠도는 그야말로 서른의 삶이 온통 죽음의 세계로 도배 되어있다.
이들이 회피하는 것이 삶 자체인가? 아니면 삶의 배경이 되는 것들, 인간이 만들어 낸 무수한 질서들, 다가가야 할 세계에 대한 미지의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한 것인가? 세뇌된 욕망의 충족될 수 없는 허기를 알아차린 것 때문일까?

오늘의 서른은 지금 이렇게 혹독하고도 잔인한 시공에 놓여있는 것인가?! 안락과 지배와 권위와 부와 물질만을 선이라고 가르쳐 온 이 사회의 반작용이 아닐까? 망국적 교육열, 타자는 경쟁해서 물리칠 대상이거나 복속시켜야 할 존재라는 기이한 개인주의에 몰입해왔던 시대의 몽매함에 세뇌된 이 사회의 정신 때문이 아닐까? 먼저 손을 내밀지 모르는 사람들, 사랑도 단지 몸이 따라가는 감각적 쾌락일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 돈은 도덕성위에 존재하는 신앙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 인간도 역시 다른 모든 사물과 자연처럼 상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이긴 하다. 이것이 거대한 질서를 형성하고 시스템화 되어 스스로들을 숨 막히는 경주의 대열로 몰아세우는 것이 맞다.

그러나 우린 반성할 줄 알고, 끊임없이 저항 할 수 있으며, 자신의 내적 평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견고하게 짜인 무수한 사회의 네트워크들, 자신들의 영역을 항구화하려는 누적된 질서들이 삼십이란 나이에겐 더없이 버거운 장벽이지만 세상에 그 어떤 것이 영구적이던가? 단 한 순간도 변하지 않고 정체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찰나의 멈춤도 없이 변화하지 않는가?
무한히 계속 될 것만 같은 생의 공포? 이것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욱 깊어진다.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정의에 따라 이 공포는 다른 것들로 대체 될 수 있다. 어떤 세상의 질서에 편입되기만 하려는 삼십은 공포만 느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부모 세대들이 숭배하라고 가르친 것들의 많은 허상들을 내 던지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일곱 작가의 글 중, 유독 하나의 작품만이 내 시선을 오래 머물게 했는데, ‘정용준’의 『그들과 여기까지』이다. 아마 유일하게 닫혔던 마음이 열리고, 타인이 내미는 손의 의미를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자살을 결심한 청년의 생존 연장의 이유가 하찮을 정도로 당연하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사소한 것으로 지탱되는 것일 게다. 그리고 ‘김성중’의 『국경의 시장』이나, ‘박화영’의 『자살 관광 특구』에서 공히 느껴지는 거래할 수 없는 것을 거래하는 환상의 공간인 오늘, 이 위태로운 세계에 대한 그 시니컬한 관조가 마음 깊은 곳에 파문을 일으킨다.

이십의 삶, 삼십의 삶, 사십의 삶, 오십의 삶, 육십 그리고 노년의 삶, 그 본질이 무엇이 다를까? 그 허망함과 어처구니없음, 욕망의 좌절, 엉뚱한 곳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모두 같은 일이지 않을까? 삼십, 삶을 이렇게 치열하게, 강박적으로만 볼 이유는 없지 않을까. 죽음이 있음으로서 삶이란 말이 가능하듯이 모든 것에는 다른 세계가 있기 마련이다. 서른을 말하는 이 소설집을 읽게 되면서 내 아이들이 부대끼는 세상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였구나 하는 시린 통증을 느낀다. 그들이 경계에 서서 위태로운 걸음을 더 이상 걷지 않는 세상을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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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어의 성립 - 서구어가 일본 근대를 만나 새로운 언어가 되기까지
야나부 아키라 지음, 김옥희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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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는 구체성을 띤 것이던 어떤 관념적인 추상성을 함축하는 것이던 그것을 통해 우린 그것에 해당하는 개념이나 이미지를 떠 올린다.
형체가 있는 사물일지라도 보지 못한 것을 지칭하는 단어를 들으면 우린 단어와 사물을 선뜻 연결하지 못한다. 연상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인데, 하물며 경험하지도 느낄 수도 없는 추상적 관념어야말로 그 의미 그대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서구의 문명이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동아시아에 본격적으로 밀려들어 온 것을 일본의 메이지(明治)유신을 기점으로 보면 150년 가까운 시간이 된다. 우리의 경우는 이러한 일본의 근대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식되었으니 일본과는 다소 다른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이 낯선 세계의 사물들과 관념의 이해를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했는데, 한 번도 있었던 적이 없고, 느낀 적도 없는, 아니 생각해 본적도 없는 관념의 세계와 사물이니 당연히 자국의 언어에 그런 의미를 그대로 대체할 단어가 있을 리 없다. 당대의 번역어는 이처럼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는 과정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시대상, 문화적 배경, 사람들의 정신적 구조 등을 반영하는 산물이었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 이질적인 서구문명을 표상하는 언어를 어떻게 일본의, 동아시아의 언어로 반영하는 가의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그래서 그 반영과 성립의 과정을 통해서 번역어에 침윤된 문화적 욕망의 재생산의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일례로 18세기 일본에는‘society’라는 특정의 목적을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광의의 공동체라는 개념이 있지 않았으며, ‘Individual'처럼 인간 개체에 대한 자율적 존재로서의 개인이란 인식이 존재할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 단어를 동일한 의미를 가진 자국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실로 난감한 일이었으며, 결국 새로운 조어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진행되어야 했는데, 바로 이 신조어의 제작과 자국의 언어적 습관에 정착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여러 문화적 정신구조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대표하는 단어로 사회, 개인을 비롯해 「존재, 미, 연애, 근대, 권리, 자연, 자유, 그(그녀)」등 열 개의 단어를 통해 이들 단어가 어떻게 번역어로 조성되고 살아남아 오늘에 기계적으로 치환되는 언어가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어떤 단어가 이질적인 사회에 지식으로 들어올지라도 그 구체적인 용례가 여전히 부족한 상태에서 그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다. ‘교제’나 ‘세상’과 같은 이미 사용하던 단어를 society 의 초기번역어로 사용하지만 이들 기존의 단어로 소사이어티의 의미를 온전히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던‘사(社)’와‘회(會)’의 합성을 통해 사회(社會)라는 신조어가 번역어로 정착되는 것처럼 두 글자의 고유의 의미는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단어를 만드는 것이다. 이 신조어는 이처럼 의미를 대응시키지 않음으로써 원어와의 의미의 어긋남을 회피하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대 일본인들의 한자어에 대한 일종의‘카세트 효과’가 반영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왠지 어감이 좀 더 고상하고 고급스러운 것과 같은 막연한 느낌, 사실은 텅 빈 보석함(카세트)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괜찮은 것이 들어 있을 것 같다는 매혹과 같은 현혹이라는 것이다. 이것에는 아주 중대한 시사점이 있다. 교제나 세상과 같은 말을 제치고 본래의 사의 어감도 회의 어감도 없는 사회라는 번역어가 살아남은 것에는 막연히 관련 있을 것이라는 믿음, 의미 반영의 미흡함이 오히려 본래의 의미를 채워 넣을 수 있다는 빈 공간의 역설이라는 발견이다.

또한 기존에 사용하던 일상 속 단어의 의미를 확장하여 바꾸고 그것을 통해 현실 자체를 바꾸고자 하는 것은 이미 현실의 무게를 짊어진 단어로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히려 의미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유행하고 남용되어 다의(多意)적이 되고, 이 다의적이라는 의미 없음으로 인해 그것에 표면적 의미를 부여하여 이면적 의미와 결합하여 번역어로서의 의미를 완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태로 형성된 대표적 번역어로‘근대(近代)’를 설명하고 있는데, modern이 지니고 있던 “시대의 구분중 하나”라는 표면적 의미 외에 가치로서의 시대적 개념인 이면적 의미를 떠맡게 된 것은 하나의 본보기다.

한편 또 다른 카세트효과의 일종으로 beauty의 번역어인‘미(美)’에 대한 소개는 흥미롭다. 『금각사』와 『가면의 고백』으로 잘 알려진‘미시마 유키오’의 미의 트릭을 예로 들고 있는데, 대외적 대화나 평론에서는 미의 개념을 한없이 폄하하고 비난하다가 정작 자신의 소설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이중 행위를 함으로써 모호함과 알 수 없음이라는 인위적인 카세트효과를 불러 미에 대한 우월감을 과시하여 고상한 언어로 고착화시킨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구태여 허영과 유사한 의식으로 간단히 정의하고 있지만 ‘사카이 나오키’가 그의 저술『번역과 주체』에서 말한 일종의 ‘문화적 본질주의’라는 전체주의적 요소를 발견할 수 도 있다. 이것은 감정이 무매개적으로 공유됨으로써 공감의 일체화가 이루어지는 전체성으로의 합일의 사례처럼 보이며, 공유된 심미적 정서로 통합된 공동체와 국가의 통합체로서의 관점으로 충분히 해석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이 책의 한계로 보인다. 비평적 관점을 가지고 있으나 표피적인 판단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카세트효과를 야기한 그 근원의 심층에는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책의 주제로 돌아가서 번역어의 문자 그대로 성립과정의 유형을 통해 정신문화적 현상을 탐색할 수 도 있다. 자국 언어의 고유한 특성으로 인한 한계에서 비롯된‘존재(存在:being)’와 같은 단어들이나, 기존의 단어가 지닌 의미와의 모순을 일으키는‘자연(自然: nature)’이나 부정이 오히려 자체의 의미를 덮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 '자유(自由;liberty)'와 같은 단어가 그 예이다. 추상적 의미를 지닌 기본적 동사는 명사화하기 힘들다는 언어적 한계로 인해, be동사의 진행형인 being의 직역인 ‘있음’을 기초로하여 ‘있음론’의 활용이 아니라 ‘존재론’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있음’이 아니라 ‘존재’가 번역어로 살아남는 것이다. 자유의 경우는 ‘제멋대로 구는’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었었으나 liberty의 번역어로 자유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부정적 카세트효과가 이용되는 양상도 발견된다.

특히 자연은 “저절로 그렇게 된 모습”이라는 ‘자연스럽다. ’의 의미는 지니고 있었으나 nature가 지닌 “정신적이 아닌 외적 경험 대상의 총체, 즉 물체계 및 물체계의 여러 현상”이란 뜻은 없었다.
이것은 자연이 nature의 번역어가 되었다고 곧바로 nature의 의미를 제대로 갖게 된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결국 일본문학이 이러한 몰이해(기존의 자연에 대한 인식)로 인하여 소재의 이상화를 배격한다는 구실 하에 ‘자연을 그대로 쓴다’라는 왜곡된 도입으로 이어진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일본 자연주의 문학을 발흥하게 했으며 이것을 곧 극사실주의 문학인 사소설로 이어지게 한‘다야마 가타이’로부터 번역어 성립과정에서 발견되는 왜곡, 오해, 허영이라는 의식의 총체를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들이 무심코 별다른 저항 없이 사용하는 이들 단어들이 이러한 번역어로서의 성립과정을 겪고 살아남은 언어라는 이해는 우리가 놓치고 있던 관점을 일깨운다. 가장 의미적 접근이 잘 된 적절한 단어가 번역어로 성립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나, 빈약한 의미의 비대칭의 언어가 의미를 채워감으로써 완성되어간다는 것, 한자어 중심의 표현으로 자국 고유의 표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 등의 지적은 우리의 언어 사용에 반성과 귀중한 참조점이 되어 준다. 근대화가 이들 서구문명의 번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번역된 근대’라 불리듯이 서구에 대한 무분별한 동일화의 욕망과 상실한 주체성의 반영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번역된 단어 하나하나가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담아내는 것으로서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가 반성해야 할 언어 습관이 떠오른다. 한자어의 조합을 통해 신조어로서 번역어를 만들어 낸 일본인들과 달리 최근의 우리는 영어를 그대로 우리의 언어로 이식하고 있다. 이것은 역시 일본의 서구에 대한 동일화의 욕망, 주체의 상실을 반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정신을 서구의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그것이 될 수 있다는 문화국민주의적 퇴보라 할 수 있다. 언어란 하루 아침에 자기의 것으로 정착되지 않는다. 어쩌면 속 빈 카세트에 의미를 채워 넣어 완성적인 진짜 보석함으로 만들어가는 일본인들의 일견 허영심 속에 진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어는 자국의 정신이다. 이 책이 비록 문화적 본질과 주체의 탐구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문화로서의 외국어를 자국의 언어로 해석하려는 과정의 치열함을 통해 어떻게 정신으로서의 문화가 변화해나가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일본, 동아시아의 근대를 언어와 문화라는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귀한 계기가 되어주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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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7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9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도권 둘레길 여행 바이블 - 지친 일상을 쾌적하게 바꾸는 참살이 여행
이상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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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고층빌딩과 수많은 사람들, 차량들이 만들어내는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이질적인 소음에 시달리고, 꽉 짜여 무력감을 야기하는 단조로운 일상의 지루함과 피곤에 쪄들어 있는 나를 느낄 때면 어딘가를 무작정 걷고 싶은 충동으로 헐떡이곤 한다. 메마른 아스팔트와 시멘트길이나 인공적인 장소가 아닌 그 어떤 곳, 마냥 홀로 걷다가 사위를 둘러보고 또는 가던 길 멈추고 나무나 바위에 앉아 무념의 여유를 자연과 호흡하고 싶은 그런 욕구에 시달리곤 한다.
그렇다고 인파가 즐비한 유명한 산이나 계곡, 관광지를 찾아 나설 마음은 추호도 없으며, 어딘가를 올라 세상을 저 아래로 내려다보며 호연지기 같은 걸 느끼고픈 허영도 없으니 마땅히 이 모호한 심사를 받아 줄 장소가 흔쾌히 그려지지 않곤 했다.

이런 내게 사는 곳 가까이에 언제라도 다가가 내 몸과 정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도보 길을 안내해 주는 이 책은 마치 내 마음 속의 간절한 정화의 욕망을 알기라도 한 듯한, 좀 과장하자면 성스런 경전과도 같은 고마움이라 할 수 있다. 그저 작은 준비로 배낭 하나 둘러메고 가볍게 향할 수 있는 자연과 어우러진 길, 도심에서 수 십 미터만 벗어나도 자연 속에 있는 듯한 길, 구태여 산 정상과 같은 목표를 가질 필요가 없는 길, 그저 무념무상 터벅터벅 내 발걸음과 흙이 마찰하는 소리만을 들리는 그런 길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었으니 그리 과장이랄 것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초행길일 밖에 없는 내게 소개되는 서울과 수도권에 개설된 수십의 둘레길, 게다가 둘레길 마다 저마다 고유의 특색을 지닌 코스들에 접근할 수 있는 진입 경로로부터, 둘레길 내비게이션이랄 만큼 혹여 경로에 잘 못 들어설까 꼼꼼하고 상세하게 기술된 안내는 길눈 어두운 나 같은 이에게는 진정 완벽한 트레킹 지침서가 아닐 수 없다. 열 세 개의 코스로 이뤄진 남양주 소재 다산길이나, 무려 스물한 개 코스로 구성된 북한산 둘레길처럼 각 둘레길마다 너 댓개의 코스로 구성되어 비교적 평지인 곳, 약간의 구릉이 있는 곳, 강변길이 이어진 곳, 사찰과 유적 등 역사와 이야기가 흐르는 곳, 숲과 호수와 계곡이 있는 곳 등 둘레길마다 고유의 성격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어 내 감정의 느낌에 따른 선택이 가능토록 설명되어 있다는 것도 아주 유용한 정보라 할 수 있다.

지속적인 체력단련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내겐 둘레길의 코스별 거리나 소요시간, 요구되는 걷기의 난이도는 매우 중요한 정보가 아닐 수 없다. 가볍게 운동화신고 별다른 의복을 준비하지 않았는데 등산화나 트레킹 전문화가 요구된다거나 스틱, 여벌의 옷 등이 필요하게 되면 난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소개되고 있는 일백여 남짓한 코스마다 별 한개 두 개 등 난이도의 표시와 코스의 고저 등 중요한 특징, 정확한 코스연장과 음료나 휴식처 유무는 내 자신의 능력에 기초한 선택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내 성향과 체질에 맞게 느껴지는, 호감이 가는 몇 개의 둘레길 코스가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난이도에 별 세 개가 표시된 북한산 둘레길 제14구간인‘산너미길’은 왠지 체력적 자신감이 붙고 나면 찾아야지 하고 미루게 되고, 북한산 생태 숲이 있는 별 하나짜리 4구간‘솔샘길’은 마음에 새기게 된다.

특히 북악산 툴레길은 방송매체에서도 수차례 소개되었음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건만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백사실계곡을 지나 홍치문으로 이어지는 2코스는 인상적인 자연의 풍광과 미술관, 이국적 카페까지 어울려 하시라도 달려가고픈 심정으로 유혹한다. 또한 다산 정약용선생의 유적지에 이르는 다산실 2코스의 폐철로와 연꽃마을로 이어지는 여정 또한 매력적으로 다가오며, 경기도 시흥 늠내길 제4코스인 옛길은 여우고개, 소래산 마애상, 청룡약수터와 어울려 각각에 서린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려 올 것만 같은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이외에도 군포의 진산이라는 수리산 자락에 펼쳐진 일명 바람고개길(수릿길)이나 화성시에 있는 융건릉둘레길의 솔숲은 마냥 낭만적인 정취로 유혹해댄다. 예술의 향기를 느끼고 싶을 때, 자연 속에서 한껏 고독의 멋을 부리고 싶을 때, 옛 선현들의 그윽한 향취에 물들고 싶을 때, 그저 자연의 숲과 강이 발산하는 순수함에 깃들고 싶을 때, 그러한 다종의 느낌에 따라 내가 하시라도 내 딛을 수 있는 길들이 나를 위한 길처럼 손짓하고 있다는 매혹에 젖어든다.

이제 내겐 나를 해소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변명의 구실이 사라졌다. 언제라도 마냥 걸으며 자연의 신비로운 기운을 온 몸으로 느끼고 싶었던 욕망의 길이 내게 펼쳐졌으니 말이다. 그저 갇혀있어 막혀있던 내 숨통이 그야말로 탁 트일 것만 같다. 아마 이 책은 내 배낭에 담겨 의기소침하고 표정을 빼앗아 갈 때면 나를 위한 위로와 충전의 길을 동행할 것 같다. 절로 마음이 상쾌해지고 의욕이 솟는 어떤 즐거움이 몰려온다. 겸손함으로 시작하는 작가의 말에도 불구하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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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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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배출해대는 욕망의 찌꺼기가 쌓아 올린 거대한 쓰레기 더미, 그것이 하도 추해서 강의 물안개가 피어올라 자꾸 가리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무대인 꽃섬을 헤매는 내내, “생명이 없는 물질은 우아한 것으로 만들어져 공장을 나오지만, 인간은 거기서 부패하고 타락한다.”라는‘E.F.슈마허’가 들려준 한 구절이 뇌 속을 맴돈다. 기술, 조직, 정치가 한 몸이 되어 인간성을 거역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침식해서 타자의 욕망을 획득하기위해 물질적 낭비를 반복케 하고 비생산적 소비의 열중 속에 파멸해가는 우리의 우매함을 말이다.

과시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이란, 게임기의 슈퍼마리오처럼 “무수하게 반복되는 행진이며 최대의 성취에 이른다 할지라도 언제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영원한 갈증의 쳇바퀴란 걸 영악한 인간이 모를 리 없지만, 스스로를 끝장내기 위해 달려가는 길이 단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만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기만적 눈가림을 하는 모습은 지성(知性), 아니 이성(理性)의 무능력만을 확인하게 한다.

쓰레기가 만들어 낸 동네, 도시가 버린 그 쓰레기 속에서 삶이란 걸 일구는 사람들이 있던 곳, 그러나 이젠 특권층의 골프장이 들어서고 꽃단장이 되어 자신들의 더러운 욕망과 폭력의 현장을 기억의 표면에서 지워버린 듯이 태연해 보이는 어느 장소가 떠오른다. 소설이 내 시간에 대항해서 망각하고 있었던 배제된 역사의 기억들, 그 차이의 리듬을 새롭게 생성해내게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다 버린 것만 모여드는 곳, 그리고 버려진 쓰레기처럼 사회에서 떠밀려든 사람들의 생활터전인 꽃섬이라 부르는 쓰레기의 산, 이 반어적 이름 탓인지 아니면 소설을 견인하는 두 소년, 딱부리와 땜통의 순결함 때문인지 명치끝에 무엇이 걸린 것 같은 느낌에 한동안 사로잡혀있기도 했다. 쓰레기더미로부터 그들의 경계 밖에서 소용될 물질을 찾아내기 위해 흉측스러운 썩은 냄새와 파리 떼, 뿌연 연탄재에 파묻혀 호미질을 하는 작업자들, 그것에조차 이권이 도사리고 있어 구분하고 차별하는 흉물스런 인간들의 초라한 현장의 냄새가 내 코 속에도 확 침입해 든 것처럼 생생하다.

이러한 쓰레기장의 배경으로서의 장치가 시사하는 황폐하고 더러운 인간 세상과 대비되어 두 소년의 피난처이자 비밀장소인 일명 본부와 신들린 여인 빼빼엄마가 향하는 허물어진 당집과 당나무, 그리고 푸른 불빛으로 나타나는 영귀(靈鬼)인 김서방네가 안내하는 피안(彼岸)은 이제라도 돌아가야 할 당위로서의 인간세상, 순결함의 신성한 이상향으로서의 어떤 그리움으로 다가와 기울어졌던 마음의 균형을 잡아준다.

쓰레기동네가 지닌 그 버려짐의 외로운 기운 탓인지, 어른들의 어울림으로 형제가 되어버린 딱부리와 땜통, 두 소년이 바라보던 여울목을 비추던 달빛처럼 그들의 발 길이 닿는 곳은 추한 것들이 감춰지고 주변의 사물들을 친근하게 다가오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천막교회를 찾아 라면상자를 전달하고 쓰레기동네의 추레한 아이들을 앞세우고 사진을 찍어대는 선량한 도시인들의 그 이중적 가면조차 이들의 소박한 기쁨과 계획에 가려지고, 도시의 휘황찬란한 소비의 광란, 그 폭력적 권위도 둘이 비워대는 자장면 곱빼기 한 그릇과 게임기의 뿅뿅 소리에 묻혀버린다.

쓰레기장의 더러움이 자신들이 사는 도시로 행여나 옮을까봐, 그리고 사회에서 버린 이들 인간들까지 소독해서 아예 없애버리려는 듯 낮게 비행하며 살포하는 소독약, 모든 것이 과잉이다. 끊임없는 권력욕, 명예욕, 물욕, 그칠 줄 모르는 그 도달할 수 없는 요원한 만족이란 걸 향해 질주한다. 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만족이라는 효용의 극대화를 신봉하는 이 반(反)이성적 신념의 우리 세계, 역사의 교훈, 아니 자연사의 교훈은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가! 혼자서 그리 오래 가는 종(種)은 없다고 말이다.  결국 우리가 스스로를 끝장내 버릴 것인지? 우리가 가진 지성이 과연 특별하다면 그것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김서방네 영귀가 “사람들이 그길로 가다가 모두 망쳐버렸다. 지름길인 줄 알고 갔지만 호되게 값을 치를 게다.”라고 안타깝게 막아서는 그 진리의 말처럼.

쓰레기가 뿜어내는 메탄가스가 마침내 폭발해서 판자촌과 소년을 활활 태우고 잿더미만 남기듯이 우리는 이미 극히 불안전한 세상으로 너무 멀리 치달았는지 모른다. 필요치 않음에도 너무 많이 가지려 하고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 댓가로 얼마나 귀중한 것들을 잃고 있는지를 거듭 거듭 반추하게 된다. 그래서 소설은 궁극에는 우리들의 아이들이 푸른 대지위에서 서로 어울려 뛰 놀 수 없게 된다면 우리 뒤에 과연 무엇이 남을까? 하고 절망어린 물음에 대한 공감을 우리네와 이 사회에 요청하는 것 같다.

소박한 장소와 사람들, 그 낯익은 일상들을 통해 오늘 우리네 마음에 담긴 것들이 무엇인지, 그러나 정작 채워지지 못한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잊고 있는 것은 또 무엇들인지를 생각게 한다. 무심코 바라본 강 건너 과거가 된 그곳, 매연인지 욕망의 무로(霧露)탓인지 그 흐릿함이 꿈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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