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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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있음. 아직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이 리뷰의 중반 이후는 읽지마세요~]

 

나뭇가지처럼 얽힌 수로에 에워싸인 소도시, ‘야나쿠라’. 비가 흩뿌리고 빗물에 젖은 수로변의 집들이 어우러져 한층 을씨년스러움을 더한다. 소설 전체에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사물들은 제 형태를 찾지 못하고 어떤 환상의 공간을 떠 올리게 한다. 이 환상적 분위기는 물이 지니는 태초의 공포로 서서히 내 무의식의 심연을 잠식한다. 그래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워진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 환상의 세계인지. 물의 도시 야나쿠라는 이렇게 모호한 느낌의 공간으로 다가온다.

 

대중음악 기획자인‘다몬’은 스승,‘교이치로’의 요청으로 야나쿠라에 도착하고, 스승으로부터 연쇄적인 노인들의 실종과 그리고 어느 날 갑작스레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복귀한 그들의 기이한 사건을 듣게된다. 여기에 학창시절을 같이했던 스승의 딸인 ‘아이코’와, 지역신문 기자인‘다카야스’가 합류하여 이 기이한 현상의 이면(裏面)을 쫓는다. 아이코는 수년 전 실종되었다가 불현듯 돌아온 작은아버지 내외의 모습에서 동일한 인간이 아니리라는 막연한 의구심을 술회하고, 다카야스가 녹음한 복귀 노인들과의 인터뷰 내용 속에서 공통되게 들리는 특이한 소리는 어떤 낯선 존재의 전조(前兆)로 의심되기에 이른다.

 

교이치로가 애정으로 기르는 고양이는 야나쿠로의 옛 유명 시인의 이름과 관련되어 은닉된 사연의 개체가 되고, 사건의 배후에 있는 미지의 주체를 매개하는 어떤 영물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고양이가 물어 온 인간 신체의 한 부분, 귀, 코..., 그러나 정말의 인체가 아니지만 너무도 인간의 그것과 똑 같은 것을 어딘가에서 물어뜯어 온 흔적을 지니고 있다. 이야기는 괴이함과 낯선 거북함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미지(未知)의 존재를 추적하기 위해 이들은 도시에 숨겨진 역사를 찾기 위해 도서관으로, 신문사의 옛 취재 기록을, 도시의 숨겨진 어떤 비밀을 간직한 듯한 인물을 찾아 진실의 존재로 다가가려 한다. 그러나 이미 거대한 힘은 이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액질의 투명한 물질이 도서관을 휩싸고, 급기야는 도시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자취를 감춘다.

 

다분히 환상적이다. 이 비현실적 공간에 남은 네 사람의 공포는 그대로 독자인 내게 전달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은 사라진 인간들이 재생되는 장소의 발견과 개구리 알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미완성상태의 인간의 얼굴들을 목격하게 된다. 아마 이것을 이미지화하면 어지간한 호러장면은 저리가라고 할 정도일 것이다. 역겨움을 동반한 급격한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다. 실종된 사람들의 복귀를 설명하는 이 괴이한 전경은 현실과 환상이 겹쳐진 설명 불가능한 시공이다. 복귀한 사람들은 과연 인간인가? 실종되기 전의 사람과 동일한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카야스마저 사라지고 그 역시 재생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들은 이렇게 현실의 존재자인 자신들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해할 수 없는 시공으로 회수되는 것을‘도둑맞는다.’고 표현한다.

 

이미 기억을 도둑맞았던 사람들, 그들이 정작 도둑맞은 것은 기억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이렇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새에 회수와 재생을 반복하고 있다면, 즉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면, 결코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와의 동일성을 주장할 수 없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기억이란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는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요, 지금 눈앞에 보인다고 해서 실재라고 말 할 수도 없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찾아 헤매는 진실이란 이 처럼 보이지 않는, 도저히 기억 할 수 없는 시공을 초월한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천천히 찾아드는 정적(靜寂)” 그리고 “내 부름에 응답하는 것 같은 절대적인 목소리”, “누구도 제지 할 수 없는, 태곳적부터 존재해온 거대한 의사(意思)의 목소리”, 그 미지의 힘에 겸허해진다. 공포의 힘이라서가 아니라 내 존재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마침내 소설의 마지막 읽기를 마치고 나면 자아(自我)의 저 밑바닥 어두운 곳의 진실을 체험하고 난 듯한 의연한 기분이 된 것을 문득 깨닫는다. 마음의 고향, 진화의 저 앞선 시기의 조상들이 살던 물속을 한바탕 헤맸기에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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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침 一針 - 달아난 마음을 되돌리는 고전의 바늘 끝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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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세상이 온통 소란스럽다. 여기저기 말, 말, 말. 침묵의 미덕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머금는 것 없이 토해내기 바쁘다. 쉴 새 없이 떠든다. 무책임한 언어가 난무한다.”온축(蘊蓄)의 시간 없이 알지도 못하면서 죄다 떠들기에 바쁘다. 그 말들이 시끄럽고 입에서 구린내가 난다. 제 허물, 제 부족을 감추자니 시끄럽기만 하다. 민간인 불법 사찰문제로 정국이 요동을 친다. 이를 가리려니 궁색함과 파렴치가 말이 되어 더욱 분노와 갈등을 키운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정신이란 것, 진정함이란 것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듯 하기만 하다. 이런 우리들, 이 사회에, 정신이 번뜩 돌아 올 만큼의 진짜배기 말, 새길수록 자기를 되돌아보게 하고, 진실과 진리를 확인토록 해주는 예리한 일침은 시의적절하다.

 

더구나 혐오와 구차스럽기만 한 현 정치의 쇄신을 내걸고 치러지는 선거가 목전에 다가서면서 말의 속내를 알아채는 변별력과 세상사의 부당위(不當爲)에 대한 비판력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어 지금에 대해 말”한다. 건강한 사회의 복원을 위한 더할 나위없는 세상의 이치들, 교훈들로 우리의 인식력을 더욱 밝게 뜨게 도와주는 말들이다. 그래서 정작 지녀야 할 우리들의 마음에 침잠해있던 진실의 외침을 생각게 하고, 이 마음을 어떻게 일궈내야 하는지를 공부하며, 그를 통해 사회와 세상의 당위를 비로소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과연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지 곰곰 따져 보아야 할 일이다. 생각이라고 다 같은 생각이 아니다. 사상염려(思想念慮), 사유(惟)와 사색(索)의 생각, 이미지로 떠오른 상상(像)과 연상(聯)의 생각, 그리고 잡념(雜)과 염원(願)의 생각, 무엇인가에 짓눌리는 우려(憂), 염려(念)의 생각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가만히 적막 속에 침잠해 마음의 근원을 들여다 본적이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사실 뜬생각만이 난무했지 제대로 된 생각을 해 보았던 기억이 가물가물할 것이다. 간위적막(艱危寂寞), 적막해야 마음의 근원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비로소 진짜의 말, 내 정신을 손상시키지 않은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맑게 헹궈 내어 고요 속에 침잠해야 드러내는 것, 담박영정(淡泊寧靜)의 시간이 필요하다. 공허한 소리를 쉴 새 없이 떠드는 대신 침묵이 필요한 이유는 그래서이다.

 

이러하지 못하고 공허하고 가벼운 소리들로 제각기 자신의 목소리만 높인다. TV속 정책토론을 보아도, 하물며 연예인들의 허접한 잡담조차에서도 남의 얘기는 듣지 않는다. 음사(淫辭), 피사(詖辭), 둔사(遁辭), 사사(邪辭)만 난무한다. 방탕하고, 치우치고, 회피하며, 사특한 말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하니 서로 믿지 못한다. 사회는 신뢰가 실종되고 저마다 이명비한(耳鳴鼻鼾)한다. “이명은 저는 듣고 남은 못 듣는다. 코 골기는 남은 듣지만 저는 못 듣는다. 분명히 있는데 한 쪽은 모른다.”는 얘기다. 즉, 남 잘한 것은 못보고 제 잘못은 질끈 눈감는 오늘의 우리들을 빗대는 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잘못되고 버려진 의견이 진리일수도 있으며, 진리성을 명확히 이해하고 느끼기 위해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은 대단히 유용하다”고 썼다. 이처럼 한국 사회의 사상적 빈곤은 바로 이 듣지 않고, 온축되지 못한 얄팍한 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이익선생의 성호학파의 토론 방식을 들려주는데, 이택법(麗澤法)이다. 두 개의 연못이 맞닿아 서로 물을 대며 보완하듯이 토론이란 서로 듣고 다른 것에 귀를 여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하지 못해서 우리사회에 표출되는 모습들은 실로 다양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오직 자신의 지위와 부, 명예만을 얻으면 된다는 경쟁 일변의 이기심만을 가르친다. 아이들은 이러한 비뚤어진 부모의 가치관을 통해 타자는 적대자이고 타자의 언어에는 무관심할 것을 주입한다. 이렇게 자신만의 언어에 갇힌 아이들은 학교에서 선생의 말을 듣지 않고, 동료를 짓밟는 것에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학교폭력의 급증, 교사 권위의 한없는 추락, 눈에 뵈는 게 없는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한다. 모두 자기의 이익만을 쫓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다. 자기 이익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니 인(仁)이고 의(義)를 찾는 것은 무능하고 한물간 사람의 얘기가 되어버린다. 이것이 없으니 어떤 일이고 자기의 이익에 반하면 아무도 승복하지 않는다. 시장만능, 물질지상의 소비주의를 강력하게 조장하는 자본가들, 재벌들, 권력자들은 이렇게 개인들을 파편화시켜 진실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원자화된 개인들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헛소리와 환영에 취하여 일생을 끌려 다닌다. 자신의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채. 교자이의(敎子以義)가 정말 아쉬운 현실이다.

 

이러한 관점을 우리의 정치사회의 현실로 돌리면 그 아둔하고 탐욕스럽기만 한 기득 세력의 아집이 드러난다. 교주고슬(膠柱鼓瑟), 거문고의 줄이 잘 맞았을 때 기러기발을 아예 아교로 붙여놓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해 보겠다는 심산을 일컫는 말이다. 한 번 맞았으니 그대로 쓰자는 것이다. 온도도 바뀌고 습도도 바뀌며 환경은 무수히 변화하여 더 이상 줄이 맞지 않는데도 변화할 수 가 없다. 보수기득권자들의 짓거리가 이러하다. 그러니 사회는 난맥상을 보이고 이 어긋난 줄로 소음만 무성해진다. 이건 초짜들의 짓이다. 거문고 줄을 풀어 다시 매야 한다. 해현갱장(解弦更張)해야 하는 것이다. 잘못되면 지킬수록 헤매게 되고 마침내 영 딴 곳에 도착하는 것이다. 변하지 않고, 화합하지 않으며,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독단은 기필코 참혹의 결말을 초래한다.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면서도 일말의 도덕적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는 지금의 권력은 연암 박지원의 「호질(虎叱」에 나오는 북곽선생(北郭先生), 못된 짓을 하면서 그럴 법한 언사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위선적 지식인을 말하는 발총유자(發塚儒者), 바로 그것이라 할 것이다. 이번에 드러난 민간인에 대한 불법 사찰은 권력의 도덕적 타락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물이 줄자 서서히 바위가 수면 위로 드러나듯이(水落石出), 이들이 저지른 흑막이 걷혀 추악한 진상이 노출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전 정권이 하였다며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고 항변한다.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를 하고서는 다른 이도 했으니 나는 괜찮다? 국민이 괜찮지 않다! 이 무례함. 국민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다. 단순히 정당간의 시시비비 문제가 아니다. 그러면 국민은 무엇인가? 국민은 전 정권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같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국민의 인권을 파괴한 행위에 대해 일말의 반성도 할 줄 모르는 이들의 고식지계(姑息之計)가 역겹고 분노가 이는 것이다.

 

이 처럼 이 책은 혹독한 자기반성과 비판의 인식들로 가득 차 있다. 말년의 J.J.루소가 그의 저서『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사람들은“남을 가르치기 위해 공부를 할 뿐 자기의 내면을 밝히려고 하지 않는다.”면서 비로소 고독, 즉 고요의 세계에서 이성과 양심의 승인을 얻은 마음의 목소리를 찾았듯이, 생각하는 법, 마음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법을 환기시켜주는가 하면, 이로부터 발의된 진짜의 말을 배우는 법과 진창에 빠진 세상의 무지와 불의를 옛 선현들의 가르침을 통해 깨우치게 한다. 백 여 개의 사자성어를 중심으로 관련 시구와 경전, 그 밖의 문헌들을 통해 잃어버린 나, 그리고 우리의 정신을 화들짝 깨어낸다. 이것이야말로 생각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당위의 사회와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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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라토 칸타빌레 (구) 문지 스펙트럼 1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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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히 제한적인 직접의 묘사와 어떠한 설명 혹은 해명도 없는 소설이다. 인물의 실체는 오직 독자의 해석력과 추론능력에 의존하고, 그래서 기술되지 않은 공백은 독자가 메워나가야 할 몫이다. 이 과정 때문에 인색하다 할 정도로 간략한 문장은 상상의 느낌으로 엄청난 이야기로 불어나고, 그것이 매혹하는 힘을 갖게 되는 소설이다.

 

“복도 쪽으로 열려 있는 출입문께에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 어슴푸레한 침실을 더 어둡게 만들 것이다. 안 데바레드는 헝클어진 현실의 금발을 손으로 가볍게 쓸어 넘기리라. 이번엔, 그 여자도 사과를 할 것이다. 대꾸가 없을 것이다. ”

 

이 문장은 부정(不貞)을 품은 여인의 심리와 이를 알아챈 남편의 고통스런 관용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그림자의 실체나 대꾸의 주체에 대한 어떠한 묘사도 없고, 사과의 객체를 설명하는 내용이 없지만 책을 읽는 이로써 그 의미의 여백을 채워 나가게 하는 묘미가 있다.

 

소설의 시작도 이와 같이 밑도 끝도 없는 상황의 묘사에서 시작된다. 피아노 레슨 장면, ‘모데라토 칸타빌레’를 두고 아이와 아이의 엄마, 그리고 피아노 선생의 공허하고 짜증스런 대화가 반복된다.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여자는 소리의 현장으로 다가선다.

 

운집한 사람들, 경찰차와 경찰들,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여인, 여인의 입가에 흐른 피에 아랑곳 없이 옆에 누워 미친 듯이 절규하는 남자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이 외에 이 상황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없다. 그러나 죽음에 이를 만큼의 어떤 지고의 사랑이 빚어낸 극적 결과라는 이미지를 그리게 된다. 이 모호한 이미지가 소설을 끌고 가는 모티브이기에 아이의 엄마, 소도시 유력 사업가의 아내인 ‘안 데바라드’의 내면을 휘저은 것이 무엇인지 우린 극히 간결한 이 묘사에 내재될 수 있는 의미들을 부여하고 해석하는 상상의 읽기를 하게 된다.

 

이 작품에 대한‘마르그리트 뒤라스’, 작가 본인의 말처럼 억제된 표현, 거울의 반사 같은 간접적 묘사를 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하게 되면 억압되어 절제된 문장들이 숨기고 있는 관능에 몽롱하게 빠져들게 된다. 아이의 피아노 레슨에 보호자로서 동행하는 행위조차 더 없이 상류층의 현숙한 여인이 반복적인 일상의 단조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알게 되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연인을 안고 얼굴을 부비며 울부짖는 남자가 여자에게 죽음으로 완성된 사랑으로 스며든 것으로 이해했으리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사랑 때문에 죽음을 택함으로써 그 욕망이 일상성으로 진부화되는 것을 막는 완전한 사랑의 재현으로 내면화 된 것이다. 여자의 일탈적 욕망은 그녀의 거주지인 상류층이 있는 지역의 반대편에 있는 노동자들의 거리와 그곳의 카페로 발걸음을 하게하고, 그곳에서‘쇼뱅’이라는 남자와 함께하게 된다. 이 만남의 주제는 죽은 여자와 그녀를 애타게 부르며 절규하는 남자의 이야기에 할애된다. 삶과 죽음이 서로 스며들 정도의 완전한 사랑의 얘기로. 두 사람은 이 가공된 절대적 사랑의 시공 속으로 몰입되어 간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현실의 실제적인 재현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기를 원할 정도의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체험하려는 방식으로서 수행 될 뿐이다. 이렇게 지독할 만큼 절제된 감정은 오히려 가공할 정도의 엄청난 격렬함, 미칠 듯한 간절한 무엇이 되어 잠자던 감성을 깨운다.

 

결국 본능의 욕구란 것을 억제하고 엄격하게 통제하여 가리겠다는 우리들의 위선과 기만은 이 소설이 취하고 있는 간결함과 직접적 묘사의 회피와 여백 가득한 공상적 재현의 사랑이란 내용을 통해 역설적으로 더욱 드러나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곤 절대적 사랑이란 이처럼 환상 속의 것으로만 완결되어 현실에서 과연 도달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절제미의 진수를 보여주는 사랑과 욕망의 공백 가득한 몽상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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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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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란 도화지에 수 천대의 오토바이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했던” 소년의 승천(?) 이야기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 아니 이 사회에서 그 존재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무시했던 존재들을 비로소 보이는, 관심의 영역으로 인식하게 하고자 했던 오토바이 폭주족 소년의 분노의 울부짖음이다.

우린 낯선 무엇인가 눈앞에 있지만 무엇 때문에 저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 그 부정의 대상이 내 생활영역에 들어 올 것 같으면 불편해하고 그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을 떨어내려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말하려하는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알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이 알 수 없음, 대상에 대한 무지(無知)는 당혹스러움과 거북한 무엇이 된다. 그리곤 배제의 낙인을 찍어버리고 그것에‘불온한 것’이라 명명한다. 사회의 경계에서 내쳐야 하는 것들, 급기야 억압하고 폭력을 휘둘러 그 존재를 지워버리려 한다. 우리 사회에는 이렇게 불온 한 것들이 되어 주류 사회의 경계 밖으로 밀려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타자가 무수하다. 장애자가 그렇고, 프레카리아트가 그렇고, 이 소설의 주인공들인 십대의 폭주족 소년 소녀들이 그렇다. 이들이 주류 사회에 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존재자의 지위에서 지워버리려 하는 것일까?


소설은 바로 이 낯설고 불편해서 주류사회에서 추방되고 제거되어 버려 잊혀진 존재, 십대의 폭주족 소년을 통해서 분류하고 구별하여 존재를 서열화하는 우리들의 비루한 통념적 감각을 일깨운다. 십대 소녀가 고속터미널 화장실로 뛰어든다. 화장실 변기에는 터진 양수가 흐르고 뒤이어 앙칼진 생명의 울음소리가 길과 길이 만나는 그 무심한 광장에 울려 퍼진다. 무관심과 혼돈의 공간으로 이만큼 적절한 장소도 없을 것이다. 소년‘제이’는 이렇게 세상과 대면한다. 그러나 길러주던 여인마저 자기의 절망과 함께 사라지고 재개발사업이란 도시의 폭력 속에 외톨이가 된 채 소년은 남겨진다. 주류가 정상이라고 정의 한 것에 위배되는 한 바로 영역 밖의 세상으로 추방된다. 고아원이란 곳으로.

‘길’, 영역을 나누는 경계에서 태어난 아이는 그 위태로운 지대의 안에서 곧바로 바깥으로 내쳐진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자신의 인생을 예감한다. “앞으로도 계속 길에서 살게 될 것 같다는.”


이 예감을 완성하는 첫 번째 전환점은 고아원 인근의 개 농장과 버섯 재배사의 화재사건이랄 수 있다. 개를 방치하고 달아난 인간, 불길을 피해 산 속으로 숨어든 개들, 이것들을 포획해 한 몫 잡으려는 개 잡이들, 소년은 여기서 인간의 폭력적 범주화를 목격한다. “죄, 잘못, 인간, 동물,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구분하는 게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잘난 척을 하는 거에요. 내가 인간이다.” 이 항변은, “고통을 외면하는 거에요.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 거에요. 세상의 모든 죄악은 거기서 시작해요.”라며 구별짓기, 서열화, 범주화로 인해 야기되는 우리의 무능한 감각에 문제가 있음을 발설하는 것이다. 타자의 읽기에 무관심한 우리의 이기심과 오만, 현대인의 나르시시즘에 분노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제이로 하여금 고아원을 뛰쳐나오게 하는데, 소년을 맞이해 줄 세상이 없다. 아니 있다. 동류를 알아보는 그 범주화의 원시적 눈 때문에 그에게 말을 거는 소녀,‘목란(Mulan)'이 있다. 가출한 십대들, 가정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외면된 이들의 본능만 난무하는 세계의 경험은 그가 목란과 재회 할 때까지 방치된 소수자, 약자들의 세계의 적나라함, 리더로 군림하기 위한 기교를 체득하는 시간이 된다. 이제 길 위의 삶에 대한 예감을 완성하는 목란의‘가와사키 오토바이’가 등장하고, 소년 제이는 그들, 폭주족 무리의 리더가 된다. 바로 여기서 우리들의 초상, 할리 데이비슨을 모는 경찰 경위가 이들에 대한 비하와 동정의 양가감정을 수반하는 거부의 시선, 바로 그것으로 등장한다. 정말 가소롭고 희극적인 모습이다. 소설이 조롱하는 이 희화된 인물로 인해 낯짝이 화끈거린다.


폭주족 무리를 단속하던 의경이 숨지고, 이는 곧 주류에 대한 도전, 그래서 이 존재들의 말살을 위해 국가의 합법적 폭력기관이 나선다. 광복절 전야 대폭주의 정보를 움켜쥔 경찰은 이 불온한 것들을 때려잡기 위해 총동원된다. 이 행렬이 강북에서 강남을 잇는 한남대교를 들어 설 때, 주류의 대행자인 경찰간부의 다급하고 경망스런 발악이 들려온다. “강남으로 가게 놔뒀다간 다들 각오해!” 대체 국가가, 사회가 누굴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배제된 이들 타자에게, 아니 어떤 인간이던지 타자 없이 단 한순간이라도 존재 할 수 있단 말인가? 한 술 더 떠서 압구정동 피부과 의사, 골프숍 운영 사업가등 지킬 박사들이 BMW, 야마하, 할리데이비슨 등 고급 기종의 오토바이를 몰고 나타나 폭주족 박멸에 경찰력과 함께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역겨운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대변한다. 과연 주류라고 하는 존재들이 이들 장애자와 십대 폭주족을 비난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은 치킨 배달부이고, 자장면 배달부이며 퀵 운송업체 직원이고, 사회 약자들의 자식일 뿐이다. 그들에게조차 우리 역시 폐를 끼치고 사는 것 아닌가? 아마 가진 자들이 가장 많이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사는 자들일 것이다. 수많은 노동자가 과로하며 생산해주고, 누군가가 귀찮은 일을 기꺼이 감수해주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 아닌가? 모든 존재자는 수많은 다른 존재자에 기대어 살 수 밖에 없다. 우린 운명적으로 장애자인 것이다. 누가 누굴 차별하고 서열화 한다는 말인가? 낯설고 불편한 것들은 적대하고 갈등할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껴안고 보듬어 동등한 일원으로 함께해야할 존재자들이다. 우리의 잃어버린 보편적 진실에 대한 감각을 살려내는 한 편의 멋진 존재론적 사유를 이끄는 작품이다. 불온한 것들의 ‘있음’, 그 ‘실재함’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성수대교에서 승천했다는 제이, 그가 우리들, 주류사회가 망각했던 불온한 것들의 존재 목록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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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여행법 - 소설을 사랑하기에 그곳으로 떠나다
함정임 글.사진 / 예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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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그대로의 의미인‘여행’하는 방법에 대한 책일까? 아닐 수도 있고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다. 소설 속 무대인 도시의 거리와 풍경이란 특정 장소로 이동하고 그 감상을 말하고 있으니 여행기이다. 그러나 소설들을 읽고 그 소설의 주인공과 작가들의 영혼이 배어있을 공간을 시간을 초월하여 음미하고 그 감각을 깨워내는 작업이기에 단순히 여행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책의 제목을 해석하려 할수록 그 제목이 지닌 의미에 수긍을 하게 된다. 소설가(小說家)만이 하는 여행, 지극히 문학적(예술적) 행보라는 얘기다. 그래서 수십 편의 작가와 작품에 대한 ‘함정임’의 소설 여행 담론은 허구의 소설 작품을 현실의 공간, 바로 지금 여기라는 실체감으로 끌어오는 살아있는 서평이 되어 죽은 문장들에 숨을 불어넣어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그렇다. 이 책은 소설가의 애정이 곳곳에서 숨 쉬는 서평모음이다. 그 애정들이 우리들의 것과 아주 닮은 것이 많아서 그녀의 소설 사랑에 동화되어 버린다. 30여 편의 소설과 작가들의 작품을 축으로 하여 다양한 관계성에 얽힌 작품들의 비교문학적 소개로 거의 100여 편에 이르는 작품들의 맛깔스런 감상을 더불어 맛볼 수가 있다. 일례로 천명관의 작품을 얘기할 때에는 김영하와 김애란의 작품이 같이 등장하고, 애드거 앨런 포를 말할 때는 보들레르와 플로베르가 얘기되며, 헤밍웨이를 따라가다 보면 코리네 호프만과 카렌 블릭센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그녀의 감상들은 하나의 작품에서 여럿의 작품으로 확장되어 풍부한 이야기 거리들을 쏟아내고, 소설이 단순히 문학 작품의 의미 이상의 어떤 충일함으로 가득차서 다가오게 한다.


특히 이 책에 새로운 규정을 가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데, 소설의 공간적 무대를 같이 거닐며 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혹은 작가의 분신이 되어 그 이미지가 체화된 상태에서 서평을 쓴다는 의미에서 장소적 공간의 어떤 정서적 내면화로 인한 애정이랄 수 있는‘토포필리아(topophilia)적 서평’이란 지위를 부여하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장소적 애정에만 머무는 것이라면 여행기에 불과하겠지만 문학이 있고, 삶의 철학과 인문학적 식견이 같이 넘실댄다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서평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사실 영국, 프랑스, 터키, 그리스, 아일랜드, 미국, 페루, 아프리카 등 소설 속 무대가 된 지역을 모두 돌아다니며 읽고 쓴다는 것이 사치스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책은 뉴요커인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의 첫 대목으로부터 시작된다. 언젠가 맞이할 멋진 죽음의 장소, 그리고 자아 찾기라는 인간의 성찰을 얘기하면서 저자의 여행 변과 교묘히 쌍을 이루며 작품과 도시의 얘기를 풀어간다. 그리곤 허먼 벨빌이 그려낸 독특한 인물인 <필경사 바틀비>를 통해 소설은 인간의 조건을 묻는 것, 즉 인간학으로서의 소설론을 전개하기도 한다. 많은 작가들과 작품이 소개되고 있지만 내 눈을 유혹하는 것들은 아무래도 내가 읽고 감동을 받았거나 공감을 했던 작품들, 혹은 그 작가의 문장이나 글쓰기를 흠모하게 된 작가들의 얘기에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카뮈가 그렇고 키냐르와 칼비노가 그렇다. 그 중에서도 ‘파스칼 키냐르’는 삶에 대한 내 의식과 가장 깊게 공명하는 작가인데, 그의 출생지인‘르 아브르’의 예술적 혼이 깃든 야외의 풍광과 삶의 궤적이 작품, 《옛날에 대하여》의 문장들과 조응하여 다시금‘아연실색’의 기운에 침잠하게도 한다.


또한 카뮈의 산문인 <티파사에서의 결혼>에 대한 저자의 감상은 그의 마지막 삶의 고장이었던‘루르마랭’과 묘지 곁에 놓고 온 명함의 인연이 어우러져 애틋함이 그대로 전달되어 온다. 그것은 나에게 잔뜩 쌓여 어딘가 놓여있을 그의‘결혼’에 관한 산문집을 찾아내는 수고를 하게하고, 어렵사리 헤집어 마치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듯 흐뭇한 기분에 빠져들게도 한다. 그런가하면 시각적, 일상적 환상으로 환상을 구분했던 칼비노를 통해 네르발과 모파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도 하고, 바로 그 환상이란 “잡히지 않는 것,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언어로 표현해 하나의 질을 내고, 형상을 창조해 내는 것”으로서의 소설의 본질을 이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한편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 시작하여 페루의 작가 바르가스 요사로 이어지고 요사의 관능이 넘치는 문학은 뒤라스와 에르노의 열정과 에로티시즘에 가닿는다. 장소에서 정서(情緖)로, 그리고 정서의 심연으로 깊이를 더해가며 삶 속으로 파고드는 저자의 소설 이야기는 그렇게 묘한 그리움과 생명력으로 우리의 가슴에 “자국을 남기며 공명을 일으킨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나면 책 속에 서술된 작가들과 작품들을 정리하고 읽어야 할 작품 목록에 기입하느라고 분주해진다. 이처럼 이 책은 문학작품을 다양한 층위에서 읽을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도 하고, 독자 자신의 감상과 비교하면서 비판과 새로운 관점을 더하는 시간이 되도록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류의 삶과 그 형식의 탐구가 바로 소설이라는 저자의 정의처럼 문학작품들, 소설들에 더욱 애정을 갖게 된다. 그러고 보니 마치 소설 예찬(?)론 같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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