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를 위한 밤 데이브 거니 시리즈 2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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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나의 이야기에 이 만큼 완결성을 내재한 구성력을 갖춘 작품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쩜 행운일지도 모른다. 구태여 분류하자면 범죄 스릴러의 장르라고 하겠지만 ‘존 버든’의 소설은 이런 어정쩡한 구분을 넘어선다. 삶의 방향감각에 대해서, 인간과 사물, 어떤 대상에 대한 이해, 성 에너지와 같은 인간 내면의 독특한 심상들이 특정 사건의 해결을 향한 추리와 탐색이란 과정과 분리되지 않고 촘촘히 얽혀 뻔한 재미 이상의 진중한 무엇을 선사한다.

 

전작 <658,우연히>에서 느껴졌던 전직 뉴욕형사‘데이브 거니’의 자기 성찰과 삶의 정작 중요한 것들에 대한 이해로 다가서는 고뇌의 원천이 계속하여 저변에 흐르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취약한 정신세계를 조롱하는 지적도발 역시 이 작품의 세련됨을 더해준다.

소설 속에 인용되고 있는 노벨상 수상자인 영국의 극작가‘헤럴드 핀터’의 “인간의 마음속에서 생성되는 가장 큰 두려움은 말로 설명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것”이란 말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첫 페이지의 문장들은 그야말로 평온 속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담겨진 위협들로 엄청난 공포의 직면을 기대케 한다.

 

“뻔뻔한 년을 제거하는 작업은 여러모로 성공적이었다고 결론지어도 좋으리라. - 中略 - 거울 앞에 서서 미소 짓는 자신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또한 이 문장은 한 사람을 살해한 자의 도취적 독백과 모습을 암시함과 아울러, “제아무리 추리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를 쫓을 수 없었다.” 라는 한껏 고양된 자신감으로 아예 초장부터 도발해 댄다. 많은 하객들이 모인 결혼식에서 신부가 살해되었지만 현장에는 불가능한 단서들, 조작된 단서들 이외에는 흔적조차 없다. 다만 사건과 함께 사라진‘멕시코인 정원사’라 알려진‘헥터 플로레스’란 인물이 유일한 추적의 대상일 뿐이다. 이미 전작에서 경험한 답변이 불가능한 살인사건에의 봉착이란 동일한 플롯임에도 이 작품은 더욱 지적 깊이를 더한 복선들로 한 없이 몰입되게 한다.

 

소설의 키워드라 할 것들을 감히 정리해본다면 ‘섹스 중독’혹은 ‘성 에너지’, ‘경계 의식’혹은 ‘반사회적 인격 장애’, ‘잠복근무’혹은 , ‘감정적 이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어휘들은 소설 저변을 도도히 흐르는 이야기의 정체성이자 주제이고, 사람과 삶의 방식에 대한 빛나는 통찰적 언어들이라 해도 무방할 듯싶다. 성적 피해자였으나 가해자로서 폭력성을 습득하게 된 여자 아이들의 성 중독을 치료하겠다는 특수학교, 섹스 중독 치료분야의 권위자인 정신과의사가 소설의 배경을 가득 채우고, “다른 사람이 칼에 찔리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움찔하는 하는 것처럼” 친절하게도 인간의 불완전한 경계의식이야말로 타자에 대한 연민의 기초임을 설명하며 사이코패스들의 완벽한 경계의식을 통해 인간 본성의 본질을 생각게 한다. (사이코패스들은 움찔하지 않는 단다!)

 

특히 거의 작품을 지배하는 정의라 할 수 있는 “상대가 믿어주기를 바라는 사실을 그가 스스로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기술”이 바로 잠복근무임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감정적 이득으로 인해 시야를 흐릴 수 있음을 지적 하는 대목은 우리들의 삶의 방향감각과 이해에 대한 정곡을 가리키며, 동시에 사건 해결의 단서로 향하는 길목을 제대로 바라볼 것을 경고한다. 이를테면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자신이야말로 항상 부재중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자신의 생각이 맞기를 무의식중에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하나의 시선과 언어에서 삶의 본질에 대한 사유와 사건의 추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단서로 동시에 작동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 자체로 가공할 위력을 지닌 성(性) 에너지의 특징들을 통해서 사건의 완전무결성, 위험성, 왜곡의 현상들을 보여준다. “인간을 그토록 완전무결하게 집중시킬 수 있는 힘”으로써 성(SEX)은 인간의 고통과 욕망의 근저에 자리잡는다. 자 속칭 ‘개잡년’이라고 명명된 섹스중독의 여자들이 잇달아 살해되는 범죄의 본류를 따라가야 하는 험난한 수사는 감정적 이득으로 판단을 흐려서도 안 되며, 그 엄청난 파괴력과 집중성이라는 힘을 이해해야 하고, 인간의 가면이라는 태생적 본질을 망각해서도 안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이야기를 믿고 싶은 바로 그 마음이 우리를 파멸시키기에 인간의 상상력만큼이나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없으리라는 이해일 것이다. 이 소설이 가진 미덕들을 얘기하다보니 스토리가 소홀해졌지만, 소설을 지배하는 암흑의 심연이 발산하는 압도적인 흡인력은 거부하기가 버거울 정도로 폭력적이라는 말로 대체해야 할 것 같다. 재미와 사유를 동시에 잡아맨 걸작이라 아니 할 수 없다. 6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이 오히려 부족하다 할 정도로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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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중석 스릴러 클럽 32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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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생과 사, 선과 악, 그 경계를 찾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소설은 삶의 실제와 몽상적 시공을 오간다. 그런데 그 구분이 지극히 모호하다. 이승과 저승의 이원적 경계를 오락가락하는데, 그것이 대체 현실인지 죽음의 세계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나치게 은유의 세상을 살아 온 탓에 순수하게 바라 볼 수 없을 만큼 내 관념의 세계가 불순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표의된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을 혹여 정말의 의미는 따로 있다고 억척스레 해석하는데 익숙해진 이유일 것이다. 자고 일어나니 양쪽 관자놀이에 뿔이 자라나 있다면 이미 현실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뿔은 그저 심상(心象)일 뿐인 것인가? 악(惡)이 깃든 마음의 표상의 수단으로서? 아니 이 둘 모두는 아닐까? 현실의 악이자, 저승의 세계를 모두 포함하는 모순된 기표로서 말이다.

 

소설은 이처럼 모순의 세계를 넘나든다. 삶과 죽음, 선함과 악함이 마구 뒤섞여 살아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사람인지, 악마인지 분간할 수 없다. 이렇게 분간하려는 것이 오류는 아닌지, 사실 그 구분이란 본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악이란 것이 오롯이 악이지만은 아닌 것처럼. 그래서인지 뿔이 솟아난 남자‘이그’는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악인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인물이다. 사랑하던 연인‘메린’의 처참한 죽음이라는 상실을 지우지 못하고 있음에도 세상은 그에게서 메린의 살해용의자라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미래의 아이들을 말하던 두 사람의 사랑, 그 사랑을 앗아간 세상은 그에겐 이미 지옥이다. 지옥 같은 현실, 바로 죽음의 세계 아니던가?

 

소설은 사랑을 만들고 우정을 키워가며 사람의 본성을 알아가던 과거의 시간을 통해 인간에 내재된 악마성의 실체를 탐색한다. 자기중심적 사고, 오해, 잃을 것을 가진 자의 두려움, 집착, 소유욕..., 하찮은 욕망들이 발산하는 터무니없고 또한 형편없는 산물들. 뿔은 메린이 살해되는 현장을 들려주고, 살인자와 희생자, 동행자인 오랜 지기인 ‘리’와 연인 ‘메린’, 형 ‘테리’와의 기억들을 통해 신(神)의 자리를 대신한 악마의 선의를 역설(逆說)한다. 선과 악의 혼화(混和) 그리고 순환. 그런데 더럽게 종교적이다. 이 뿔 달린 악마가 죽은 연인의 십자가 목걸이에는 무력화하고 순화된다. 굳이 평하자면 이 소설의 오점이랄 수 있는데, 관대하게 보아 넘기려면 연인의 순결한 영혼의 상징이라고 할까? 결국 조금 유치하게 되어버리긴 하지만 아무튼 이것은 소설에서 중요한 중의적 도구로 사용된다.

 

십자가가 달린 메린의 목걸이, 이것은 사랑의 매개이며 또한 욕망의 매개체로 이그와 리, 메린의 육신을 돌아다닌다. 우상이다. 그러면서도 본질은 영원성을 말하는듯하다. 이들이 모두 이승을 떠났을 때에도 지상에 남아 누군가를 또 기다리는 걸 보면. 물질이 영원이라는 정신을 대체하는 것 아닌가? 사랑하는 여인이 어느 날 서로 다른 이성과의 경험을 위해 자신들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 것인지 확인하는 이별의 시간을 갖자고 한다. 분노한 남자는 그런 여자를 남겨두고 떠나버린다. 여자의 살에 대한 집착을 가진 이그의 친구, 리는 여자가 자신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이별이라고 여기지만 여자에겐 사랑하는 연인 이그를 위한 필연적 선택으로서의 이별일 뿐이다. 여기서 세상의 악은 자라난다. 분노는 살인을 부르고 거짓과 위선, 기만, 도피를 만들어낸다. 그리곤 세상은 저주와 죽음의 욕망만이 부글거린다.

 

소설은 또한 피살된 여자의 죽음에 기묘한 필연을 엮어 넣는다. 암(癌)에 점령당한 육신의 부패를 사랑하는 이에게 부담시키지 않기 위한 절절함의 당위성으로 말이다. 이렇게 되면 살인자의 행위는 악행이면서도 선행이기도 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처럼 선악의 구분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 오류이자 얼토당토않은 것이냐고 묻는 것일 게다. 삶이란 이렇듯 규정지을 수 없는 무엇들일 것이다. 분노와 악의가 설설 끓어댈 것 같은 악마가 더없이 인간적인 행보를 하는 것도 이미 분간 할 수 없는 본성의 본질을 역설(力說)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캄캄한 절망의 세계, 저주가 너울거리는 지옥의 세상에서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가 흐느끼는 절묘한 이야기에 인간의 본질을 탁월하게 담아낸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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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웃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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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에는 왠지 모르게 순수하고 투명한, 그리고 어느 것도 놓치지 않는 세심한 관찰력을 가진 작은 어린 여자아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우리네들의 삶과 세상이 그녀에게 모두 들켜버린 것 만 같은 그런 수치심 때문일까?

작품 어디에도 빈 수레들의 큰소리가 없다. 소란스럽지 않은 나지막한 소리에 거절과 두려움, 상처와 슬픔, 불안과 균형, 삶의 깨달음이 실려 있어 더 없이 그 이야기들의 진지함에 동화된다. 이렇듯 8편의 소설 모두에서 삶의 그 우연함과 몰염치함의 부조리에도 항상 평온이 깃들어 있고, 측은함과 연민이 애틋하게 배어있음을 본다.


“크게 되는 것만은 나의 의지였으니까.”라는 엄마의 중얼거림에서 삶의 자유로운 평화를 보는 것처럼, 출생과 성장의 비애로만 비추어지는 불쾌한 세상의 이야기들로 뻣뻣해져오던 몸이 이미터 사십 센티가 되어버린 엄마처럼 시원한 기분을 맞이하게 된다. 나와 엄마에 퍼진 그 훈기의 편안함이 그 모녀만이 아닌 나에게까지 전해져 오듯이. <나를 위해 웃다>

세상을 제 정신만으로 바라보는 것이 힘겨운 사람들, 사랑과 상실의 외로움으로 정신의 결을 반대 방향으로 바꾸는 사람들, 거절당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뒤 서서히 소모되어온 사람들, 꿈꾸지 않기에 적당히 살아 갈 수 있는 사람들, 삶 어딘가 늘 텅 비어버린 듯한 체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먼 길을 돌아와 비로소 가야할 길을 깨닫는 이들의 모습에 보내주는 그 따뜻한 기대와 긍정의 기운이 우리네 마음에도 어느덧 깃들게 한다.


“남자들이 끝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새벽. 죽고 싶을 때마다 대신 바라보려고 손목 아래 그려놓은 빨간 점선”을 내려다보는 세상 밖에선 그녀들의 두려움을 정말“선명한 정신으로 바라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손을 내밀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고 덥석 물어버리는 쪽에 언제나 마음이 더 끌”리는, 사람에 대한 그 이해와 관심이 너무 소중하고 탐나기까지 한다. <아프리카>


한편으로 론 “열두 평짜리 임대아파트와 미뉴에트 선율”의 어색한 조화, “보석을 손에 쥐어보면 그 속에 뜨거운 불길이 갇혀 있다”와 같은 일상에 대한 작가의 진솔한 성찰이 어디에까지 이르는지 보는 것 또한 분명 기분 좋은 독서에 일조한다.

위태로워 보이던 가족의 그 평범함에서, “품위”를 되뇌는 아버지의 자전거. 그리고 매연이 이는 거리와, “그 뒤에 앉은 엄마를 떠올릴 때면, (중략) 그게 아주 균형 잡힌 춤처럼 느껴지는”주인공의 시선에서 소중한 그 무엇들이 행복한 슬픔으로 남겨진다.<댄스댄스>


그리고 “매번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따라 불렀던 그 노래들. 늘 어딘가 텅 비어있는 듯하던 삶, 절름발이처럼 느껴지던 그 삶, 구겨져서 보이지 않던 그 삶의 노래는 <천막에서> 의 ‘나’처럼 내가 가야 할 곳을 깨닫는다. <휴일의 음악>


젊은 작가의 시선이 그리 녹록치 않다. 세상을 깊고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 엄숙하다고까지 할 성찰에서 깨끗하고 고귀한 품격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번잡함도 없다. 정면을 마주하고 오늘을 귀 기울여 듣고, 지금의 모습을 헤쳐 가는 그런 성숙함이 있다. 감히 만족스럽다는 말을 사용하고 싶다. 모나지 않은 조용한 숨결 속에 예리함을 넘어서는 탁월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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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시카고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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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몸처럼 아파야 진짜 ‘꿈’이라고요.”

 

꿈을 가슴에 가득 품고 있는 열두 살 소녀의 시리지만 빛 같은 이야기다. 또한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쇠락(衰落)하는 기지촌의 시퍼런 멍의 기록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알지 못하는 삶의 이야기, 단지 심심할 때만 동물원 구경하듯 바라보는 시선 밖의 이야기다. 어설프게 타인의 고통을 말하는 위선을 부끄럽게 하는 이야기이며, 슬프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소외된 골목이자, 공동묘지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온통 향긋한 장미꽃 향기가 “말 할 수 없는 감정들을 밝히 비추어주는” 빛처럼 흘러넘치는 정말의 이야기다. 그리고 소녀의 마음 속 거인을 품고 싶어질 만큼 사랑이 풍성한 이야기다!

 

소설의 프롤로그에는 “매일매일 유실”을 경험하고 있다는 조숙한 열일곱 살 소녀가 보이지만, 이내 시간은 소용돌이쳐 열두 살 소녀 ‘선희’의 시선이 자리 잡고, 이전을 앞둔 기지촌 골목의 풍경이 ‘모래 그림’처럼, 아니 지워지지 않고 허물어지 않을 기록이 되어 아릿하게 지면을 채운다. 마을에 미군부대가 들어온 직후부터 생긴 공동묘지에는 미군들에게 꽃을 파는 여인들, 그녀들과 그녀들이 낳은 아이들의 고통과 죽음이 지나온 시간만큼 켜켜이 쌓여 있다. 모래로 그린 그림 같은 삶, 매일매일 허물어지는 삶, 텅 빈 가슴을 부여잡고 죽을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 같은 삶들로 가득 채워진 골목, 그래서 그 허기를 메우기 위해 열두 살 소녀가 찾아드는 숲 속 공동묘지는 “자다 깨어 엄마!”하듯이 단단히 쥐고 싶은 그것이다.

 

“꽃의 스크럼 - 장미 묘목”

 

미군 기지의 이전(移轉)과 함께 골목의 클럽들과 상점들은 하나둘씩 떠나고, 마을의 풍경은 더욱 을씨년스러워진다. 세상의 시선은 비로소 골목을 찾아든다. 심심한 대중의 관음증을 채우기 위해 카메라 무리를 이룬 방송사 촬영팀이 들어와 ‘죽은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만들고, 더 이상 살(flesh)을 팔지 못해 꽃을 팔아 하루하루 먹고사는 할머니들에게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 마이크를 들이댄다. 어린애도 묻지 않을 몰염치한 말들을.

그래서 꿈꾸는 사람인 ‘체 게바라’가 그려진 셔츠를 입은 촬영팀에게 열두 살 소녀가 묻는다. “아저씨는 우리 골목 때문에 숨도 못 쉬게 마음이 아픈가요?” , “자기 몸처럼 아파야 진짜 꿈이라고요.”하고 말이다. 호기심, 관음증, 고작 일회성 연민으로 자신들의 외면을 위로하는 그런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어린애다운 항변일 것이다. 위선들, 수치를 모르는 뻔뻔함들...

 

공동묘지는 미군 기지가 떠나고 난 터의 골프장 건설을 위한 연결 도로로 파헤쳐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엄마와 그리고 죽은 여자들과 그녀들의 아이들이 묻힌 곳, “납작한 거북이 등”같은 세상의 끄트머리에서 우르르 떨어져 죽은 약한 자들이 자리한 쉼터의 약탈을 막기 위해 소녀는 장미 묘목을 심기 시작한다.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흙을 덮고 물을 길러 나르는 열두 살 아이의 고된 노동은 그 어떤 것보다 성(聖)스럽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의 폭력을 무위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 아닐까?

 

공동묘지를 빙 둘러 사방에 장미꽃이 빽빽하게 둘러쳐진 곳, 눈꽃 같은“하얀 장미꽃들이 향기로운 화관”을 쓰고 있는 풍경은 슬프고 가난한 자들의 무덤이 아니라 ‘천국’ 그것이었을 게다. 열일곱 살이 되어 펼쳐보려 했던 엄마의 일기에 담긴 간절하고 따뜻한 사랑의 언어들은 에필로그가 되어 시간을 다시 옮겨놓는다. “다른 사람들을 온 마음으로 가엾게 여기는 사람!”, “온 숲에 ‘무조건적으로’ 다 내리는 비 같은 사랑”이 읽는 이의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는 것이 시인의 마음 아니런가.  빛과 같은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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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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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신문의 경제섹션은 우리사회에서 저소득층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50%를 넘어섰다는 내용을 머릿기사로 장식했다. 급속하게 중산층 의식마저 하락하고 가난의 대중화로 치닫고 있다는 얘기다. 실로 정치 권력자에게 주어진 5년이란 시간은 무서운 것이다. 이렇게 고도로 양극화되고 빈곤을 촉진하는 탐욕스런 세력은 본 적이 없었다. 지금 한국은 빈곤의 보편화를 강력하게 추진 중인 듯하다. 극소수의 거부와 대다수의 빈민이라는 두 국민 정책이 이제 그 결실을 드러내고 있다. 현 정권은 성공했다. 아마 상위 1%만 모이는 그네들의 파티에선 연일 칭송이 잦을 것이다. 수고했습니다! 라고.

 

정권을 잡자마자 재벌 감세와 규제 완화부터 시작하고, 서민들의 소득세 감면 항목들을 삭제하거나 부과기준을 상향 조정함으로써 부자들을 위한 감세로 인해 부족해진 세수를 서민의 얄팍한 급여로 충당할 정도로 사악했다. 재벌을 살찌우면 샤워효과로 그 부의 상당부분이 아래로 흘러내려갈 것이라고 이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이래 이런 예는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는 것은 그 뻔뻔함의 정도를 짐작케 하기에 충분하다. 부자는 더욱 부를 늘려가기만 했을 뿐, 국민 대다수는 점점 가난해졌다. 실질 소득은 급격하게 감소하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땀을 뻘뻘 흘려 열심히 일해도 갈수록 먹고살기 아주 힘겨울 정도가 되고 있다. 육체와 정신적 손상으로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을 하면 할수록 가난해지는 이상한 구조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들에게“사회계약을 구성하는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말의 다름 아님이다. 사회에 대한 신뢰가 손상되기 시작했다면 과연 그 사회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할까? 잘못된 구조, 권력이 왜곡시켜버린 경제구조를 신속하게 교정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자각하고 직시하기는 하는 것일까? 나도 언젠가는 저 1%에 들어 갈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이 망상을 자극하는, 바보 상자들이 쏟아내는 미혹에 걸려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난을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우민화를 위한 각종 미디어 정책들 역시 성공적이다. 재벌들에게 이 정권은 이처럼 정말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도움을 준 것이다. 그 결과는 가난은 대중화되고 빈곤은 만성적이 되어감에도 마치 이것이 없는 것처럼 이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형태가 된다. 그렇다고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이와 같이 그 고유의 시각적 특성 때문에 경제적 우위에 있는 자들의 눈에 빈민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다. 계층의 구별 짓기가 이젠 완전 고착되는 단계에 들어서 서로 마주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의 눈앞에 서는 빈민들의 옷차림새는 실제와는 다른 것이기에 더더욱 알 수 없는 것이다. 상상력 부족의 시대! 마치 빈민들이 사라지고 있는 듯한 이 역설적인 현상은 ‘빈곤의 발견’을 더더욱 위장한다.

그러다보니‘게으르고 의존적이며 자식만 주렁주렁한 자들이 실업급여 창구를 메운다’는 어느 시장만능의 자유주의 신봉자가 하는 돼먹지 못한 말처럼 빈곤을 터무니없이 왜곡하고 몰염치에 이르는 양태까지 보이는 것일 게다.

 

“사람이 더 열심히 일해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가난해지고 빚만 늘어나는 구조”는 좀체 생각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저임금 노동에 참여해보라. 체험해 보라. 책은 바로 노동 현장, 만성적인 빈곤으로부터 헤어 날 수 없게 구조화된 저임금 노동 시장의 생생한 체험의 기록이다. 과연 게을러서 가난하고, 의존적이어서 빈곤해질 수밖에 없다는 보수 자유주의자들의 헛소리가 혹여 조금이라도 진실인지를 말이다.

아마 자유주의 신봉자가 뱉어낸 가증스런 그 말은 한 가정집에 청소용역을 할 때 주인 여자가 하는“정말 운동이 되죠?”라고 청소부에게 하는 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 청소가 운동이겠는 말이다. “완전 비대칭적이고 무자비하게 반복적이어서 근육과 뼈를 망가뜨리는” 중노동이 어찌 운동일 수 있겠는가? 몰지각과 중산층의 이 뻔뻔한 상상력은 오늘 우리들의 도덕적 인식능력이 얼마나 마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일례일 것이다.

 

책을 빌려 무지하고 탐욕으로 그득한 신자유주의 신봉자의 악질적 발언의 진위를 들여다보자. 한 몸을 의탁할 싸구려 주택의 보증금, 월세를 내기에도 빠듯한 시간당 임금으로 교통비, 공과금, 식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육신이 부서지고 골병이 들 정도로 노동을 해내도 가능할까 말까이다. 청소부로 웨이트리스로, 대형 할인점의 의류 점원으로, 노인병원의 조무사로 종횡하고, 이 하찮은 저임금 직업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모욕과 수모를 견뎌내야 하는가를 목격하는 것은 고통이란 단어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빈곤 속의 삶의 시작 조건은 모든 것을 결정” 할 정도로 그것을 탈피하는 것은 가능치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왜 그럴까? 먹고 살기 위한 기초 생활자금에도 모자라는 것이기에 그렇다. 저축? 웃기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을 자식만 주렁주렁 낳는 무책임한 사람들로 묘사한 신자유주의 꼴통의 말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지쳐 쓰러진 노동자가 무슨 재주로 자식들을 갖는다는 말인가? 자기 몸 하나도 간수하기 힘든데 말이다. 오히려 부자, 중산층들의 여유있는 삶에서나 가능한 얘기이다. 세 자녀에 대한 각종 정부 지원금과 육아 지원제도는 서민의 복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부자들을 위한 정책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빈민들은 아이를 낳을 기력도, 낳아 기를 능력도, 더구나 세 자녀씩이나 낳는다는 것은 그들 삶의 현실에서는 요원한 사치일 뿐일테니 말이다.

 

저자의 표현처럼 가난한 여성들은‘번식녀 계급’에 포함되지 못하는 것이다. 빈민은 더 이상 자녀를 생산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경제적 장막이 쳐져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일까?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게으른 것도 아니요, 자녀를 무책임하게 생산하는 자들도 아니며, 의존과는 멀어도 한참이나 먼 사람들이다. 그들의 세계는 통증이 지배하고 정말의 피땀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이다. 대체 알량한 실업급여를 기다리는 서민들과 실직자, 저임금 노동자를 무엇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인가!

신자유주의 찬사로 가득한 보수주의자의 황당한 서적들과 마주칠 때면 화장실 변기를 닦아 “대장균이 듬뿍 묻어있는 헝겊으로 부엌 싱크대를 그냥 한 번 쓱 닦아주기만” 하면 되는데 하고 소심한 생각에 머무는 청소부‘바버라’의 상상을 그대로 이 승냥이들의 낯짝에 문질러 주고 싶은 심정이 든다.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이란 생활임금에 턱없이 모자란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항변에 “아니오, 임금은 계속 오르고 있다”고 반론한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 탁상공론은 최하위층 임금이 얼마나 하찮게 오르고 있는지를 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더구나 서민들의 실제 경험과 공식적 지표로 정의되는 빈곤이 불일치하는 것은 가계경비를 산출하는 부적절한 방식에 있음에 주의를 가지지 않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식비를 근거로 산출하는 구시대적 집계 방식 같은 것들...

부서져라 일하고 끊임없이 직업을 찾아 헤매며, 파김치가 된 몸으로 하루 두 개의 직업을 오가도 살기 힘든 임금 구조는 노동의 가치 운운하는 세력들의 허위만을 입증 할 뿐이다. ‘노동의 배신’을 만들어내는 이 같은 사회가 지속 가능한 세상이 될 수 있겠는가?

워킹푸어가 사라지는 세상, 진정 노동이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이상주의자의 헛된 꿈에 불과 한 것일까? 저임금 노동현장에 뛰어 들어 그 배신의 속살을 비로소 발견하고 분개한 여성 저널리스트의 이 고발은 보이지 않는 가난, 빈곤을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저자의 비장한 마지막 문구, “넘어진 사람을 발로 차지 않겠다”는 다짐은 그 어떤 너절한 언어보다 엄중하게 우리들의 사회에 각성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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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8-27 0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변을 토하셨네요. 그리고 동감합니다. 저도 이 책 보면서 완전 분노했었는데, 정말 변해야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필리아 2012-08-27 14:52   좋아요 0 | URL
비판정신이 마비된 젊은이들을 양산하는 교육구조이다보니 보수 시장지상주의자의 노동자 모욕의 논리에도 아랑곳 없이 열광하는 한국의 주류 의식이 안타까워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