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중석 스릴러 클럽 33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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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선 영원히 묻고 답하여야만 되는 문제일 것이다. 사적 자유와 공적 통제, 개인의 이익과 공적 질서의 대립, 가족연대와 공공선의 갈등 말이다. 형제자매와 부모와 자식이라는 혈연으로 묶인 가족 공동체와 사회라는 공동체를 위한 질서의 수호는 서로 도덕과 정의, 사랑과 유대라는 덕목의 치열한 교전을 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내 부모를, 내 자식을, 내 형제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 순간만큼은 정의도, 도덕성도, 법과 질서도, 그 어떠한 위협과 권력의 압력에도 대항하려 한다. 그러나...그들의 부모와 자식과 형제에 의해 회복할 수 없는 상처와 생명까지 잃어야 했던 사람들의 호소에 반한다.

 

사실 이 물음은 사회학, 도덕 철학 등은 물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학 작품들이 반복해온 주제이다. 그럼에도 이 질문의 영역에 빠지게 된 사람들이 다시금 물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은 어쩜 사람의 이성만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층위(層位)의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할런 코벤’은 이것을 다시 묻고 다시 썼다. 그래서 인간이 회피 할 수 없는 본원적 욕망에 고통스러운 연민의 실체들을 투영하면서‘사랑의 연대(連帶)’는 우리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대처가 아니냐고. 아마 이것조차 우리들이 인정 할 수 없다면 삶이 어떻게 지탱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 같다.

 

이야기는 참혹하게 살해된 사체로 발견된 두 명의 아이를 비롯한 20 년 전 여름 캠프 숲속에서 사라져버린 아이들의 사건을 축으로 하여, 공적 질서 수호자로서의 상징적 인물인,‘폴 코플랜드’ 카운티 검사의 혐오스러운 사적 이익과의 첨예한 갈등을 대척점에 놓고 있다. 사회적 약자인 매춘부 여성에 성폭력을 가한 두 명의 청년을 심판하는 검사 코플랜드와 자식들을 유죄 판결에서 구해내려는 부모들의 무자비할 정도의 저항은 소설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 줄기인 네 명의 아이들을 삼켜버린 숲 속 사건이 현재화 되어 코플랜드의 앞에 나타남으로써 그의 행보를 과거의 아픔으로 이끈다. 살해된 것으로 알았던 실종자중의 한 명이 20년 전에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었으며, 이제는 또 누군가에 의해 피살되어 시체(屍體)공시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더구나 사체를 확인하기 위해 출두한 노부부는 자신들의 자식임을 부정하고, 동일인임을 확신하는 코플랜드는 당시 사체를 찾지 못했던 그들과 같이 사라져 버린 자신의 동생 ‘카밀’의 생존가능성과 함께 사건의 이면에 잠자고 있는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공적 대리인인 검사 코플랜드는 사건 인물들과 가족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개인적 이익을 보호하려는, 즉 사적 유대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 소설이 묻고, 답하고자 하는 물음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공공의 선을 위해 어느 누구보다 질서에 복종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이 과연 가족이라는 사적 관계를 외면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탐색토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동생 카밀의 실종 이후 삽을 들고 숲으로 들어가 땅을 파헤치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기억과 함께, 아내의 죽음 이후 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준 횡령으로 피소된 남편의 구제를 호소하는 처제의 위증 부탁 장면으로 극화된다. 그는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까...

 

한편, 이 소설이 책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정교하게 짜여 사유를 요구하는 이 같은 주제라기보다는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배후에 대한 베일에 가려진 진실에 대한 점진적인 접근의 지속적인 기대라 할 수 있다. 결국 점진적인 드러냄에서 사라져버렸던 아이들과 그네들 부모의 소스라치게 놀랄만한 이기심과 부도덕성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스릴러 고유의 신경중추를 지속적으로 흥분시키는 재미는 주제적 물음으로 회귀한다. 바로 급격히 상승하는 이야기의 속도와 함께 진전되는 내용과 형식미가 주제적 의미와 물 흐르듯이 연결되어 절로 곤혹스러웠던 우리네들의 질문에 답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무사히 그 숲을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코플랜드가 하는 이 상징적 독백은 실로 모든 것에 대한 응답일 것이다. 아마 우리 사람들은 이 연대의 숲, 추악의 숲, 욕망의 숲, 증오의 숲인 세상을 영원히 심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에 포획된 채...그것이 사람의 삶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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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들의 세계사 보르헤스 전집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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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가 자신의 소설세계를 처음으로 알린 작품집이다. 그만의 독특한 글쓰기의 초기 작품들이어서 이후의 그것들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디딤대가 된다. 그의 작업은 예전의 누군가가 쓴 글을 시대의 정신으로 다시 쓰는, 오늘의 언어로, 현재의 환경으로 옮겨놓는 글쓰기이다. 또한 보통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일상어를 벗어나지 않는 어휘, 평이(平易)한 문장에 대한 의지반영으로 더욱 친근한 이야기들이 되어 다양한 인간들의 읽기와 독해를 가능케 한다. 그의 말처럼 써진 글은 글쓴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읽는 사람의 고유한 글이라는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은 소위 마술적 사실주의로 대변되는 그의 작품세계에는 이르지 못했거나 옅은 전망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는 초기작들이지만 그의 또 다른 특징인 다시 쓰기라는 상호텍스트성의 원형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떠한 부족함도 없다. 여기에는 새롭게 쓰인 소설이 마치 이제껏 없었던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이란 생각에 대한 강한 거부의 의사가 있다. 이것은 새로운 글이란 것도 예전의 사람들이 이미 한 말을 변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오랜 시간 전에 누군가가 쓴 글을 오늘의 자기 언어로 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창작이 아니겠는가 하는 신념이라 할 것이다.

 

『불한당들의 세계사』라는 표제처럼 수록된 단편들은 문자 그대로 역사 속에 그야말로‘불한당’- 도둑놈, 사기꾼, 해적, 살인자들 등등 - 이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시 쓴 글이다. 그러나 이 인물들이 암약하는 세상에서 그들이 죽음에 이르는 가면의 벗겨짐 이전까지 항상 불한당으로 지목되는 것은 아니다. 한 예를 들면, 이 소설집에 마력처럼 몰입하게 하는 원동력으로써, 책의 가장 앞에 있는 작품, 「잔혹한 구세주 라자루스 모렐」의 대상 인물인‘모렐’의 개인사가 보여주는 세상의 터무니없음이다. 희대의 말(馬)도둑이자 잔인성으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다. 흑인 노예상(商)으로 사업영역을 넓히는 것인데, 이 방법이 또한 걸작이다. 노예의 도망을 부추기고 도망한 노예를 다시금 타 지역의 백인에게 팔아넘김으로써 그 수익을 서로 나누어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약속이 지켜질리 없는 것이지만, 노예해방을 부르짖던 남북의 대치라는 혼란스런 시대 상황에 따라 모렐은 정치적으로 노예해방 운동자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잔혹한 강도이자 가장 부도덕한 인신매매(人身賣買)범이 오히려 도덕적 정치인의 선도자가 되는 것, 곧 세계는 불한당들의 역사라는 아이러니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처럼 세계를 획일적인 불한당의 역사라거나 아이러니의 세계로만 의식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 각지에 처박혀 있던 이야기들이 보르헤스의 재구성, 재편집이라는 이 희한한 글쓰기에 의해 이미 풍자가 되고 조롱이 되는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바로 보르헤스의 이 행위 자체에서 어쩜 상당한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죽은 아들에 대한 상심으로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귀부인의 애틋한 모성을 이용하여 뻔뻔하게 살아 돌아온 자식으로 행세하는 사기꾼 ‘톰 카스트로’의 이야기, 일본 사무라이 전설의 한 토막을 다시 쓴 ‘무례한 예절 선생’의 불명예스런 죽음의 이야기, 이야기 속에 다시 쓰기에 대한 작가의 주장이 스며들어 “우리들이 기거하고 있는 지상은 하나의 실수, 덧없는 패러디”임을 선언하는 ‘위장한 염색업자 하킴’의 이야기 등은 인간세상에서 혐오감은“본질적인 미덕”인 것이 아닌가하고 묻는다.

 

그리고 짧은 이야기 속에서 작가의 뻔히 보이는(이것도 작가의 의도) 숨바꼭질 같은 유머가 빛나는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라는 작품이 있는데, 절묘한 반전과 그 음울한 유쾌함이 거의 절대적으로 각인이 될 만큼 감성을 자극한다. 거들먹거리고 젠체하며 마을의 절대자로 행세하던 자가 여러 마을을 휩쓸던 상대가 눈앞에 나타나자 비겁하고 초라하게 도망치는 것과는 달리 보이지 않을 만큼 무시되던 존재였던 화자(話者)에 의해 소리 없이 처리되고, 정말의 승자가 누구였는지를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넌지시 암시하는 기교에는 그만 슬그머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게 한다. “그날 밤 루하네라(강자가 차지하던 마을 최고의 여성)가 나의 집에 묵으로 왔고”라는, 사실 이 반전의 문장이 소설의 처음에 있었음을 깨닫는 허를 찌르는 술수 탓에 작가의 재치가 더욱 좋아지는 것이다. 문학에 있어서의 문제는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하는 데 있지 않고 기존의 이야기를 어떤 방법으로 재편성, 재해석하느냐에 있는가, 즉 문학의 절망적 본질에 대한 탁월한 탐구를 비로소 접한 즐거움은 이처럼 기대 이상의 것들로 그득한 포만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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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협 나남문학번역선 12
하하키기 호세이 지음, 정혜자 옮김 / 나남출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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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로부터 독립된 지 67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는 일제 부역자들의 후손이 대물림하여 기득권을 유지한 채 지배계급으로 횡행(橫行)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회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원인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내부적으로는 민족을 반역한 자들을 처단하지 못했기 때문이요, 외적으로는 가해자인 일본의 역사 은폐와 왜곡, 반성 없는 자세로 인한 역사 청산의 미완(未完) 때문이라 할 것이다. 결국 부정과 악덕, 폭력과 패악(悖惡)질이 시간의 망각작용과 증거와 증인들의 사멸(死滅)로 청산이 점점 어렵게 되고 있는 것이다.

 

왜놈들에 기생하여 동족을 짓밟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자들은 부와 권력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고, 이러한 부정의 계승은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막론하고 나만 잘되면 된다는 이 기형적인 행태가 모든 사회문화적 관계를 구성하고 있다해도 무지한 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1947년에 이어 1948년에 시도되었던 반민특위(反民族行爲處罰特委)가 바로 미군정을 통해 그대로 사회 지배권력을 승계한 일제부역자들과 이승만등의 탐욕스런 권력자들의 파렴치한 방해에 의해 동족을 배반한 반역자를 비롯한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하게 된 것은 한국사회가 앞으로도 짊어지고 가야할 통한의 오욕이고 부정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1940년 독일 나치정권의 괴뢰정권이 된 프랑스 비시정권을 전쟁 종료 후 과단성 있게 처단한 프랑스사회와 명료한 대조를 이룬다. 동족 프랑스인을 배반한 비시정권의 수장인‘패탱’이하 각료들과 반민족 행위자를 철저하게 처벌한 프랑스는 오늘날 과거사의 문제를 우리처럼 되뇌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동족을 짓밟았던 부역자들은 더 이상 같은 사회에서 호흡할 수 없다는 단호한 프랑스인들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평에 앞서 이렇게 거친 울화와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것은 일본인이 쓴 이 소설이 바로 일제 부역자와 일본이 의도적으로 망각하고 은폐하려는 역사인식에 대한 환기(喚起)인 이유에서 이다.

 

침략국이자 약탈국이었으며, 침탈과 폭력의 가해자였음에도 역사의 진실을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바로 그 나라의 작가가 피해자인 한국인의 시선에서 자신들의 은폐된 역사를 성찰하고 있다는 것은 그 인식의 한계야 어떻든 예상치 못한 신선함이고 용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예술로서 하나의 문학 작품이기에 역사비평이라는 광활한 대지를 거닐 수는 없지만, 혼돈의 역사 속에서 고통스럽게 떠돌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조명을 통해 비도덕적 세상에서 도덕적 질서를 찾으려는 영혼의 분투를 발견케 함으로써 도덕적 상상력을 확대시키고 일깨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병약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제의 탄광부로 강제 징용된 열일곱 청년의‘참혹한 생존기(生存記錄)’라고 하여야 할 것 같다. 강점된 피지배민인 조선인들에 가해지는 형언할 수 없는 유린과 폭행, 살해가 끊임없이 사악하게 자행된다. 하루 열여덟시간의 지하 갱에서의 목숨을 건 사투, 이 중노동과 부실하고 조악한 식사, 그리고 부족하고 불편한 잠, 다시 이어지는 채찍질과 무참히 가해지는 폭력에 조선인들의 생명은 하나씩 꺼져 들어간다. 일본인 감독관의 심복이 되어 동족을 감시하고 더 악질적으로 괴롭히는 조선인 부역자들의 잔혹성, 그래서 살기 위한 무모한 탈주가 이어지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붙잡힌 이들은 비밀스럽게 주검이 되어 사라진다.

 

일본인 감독관의 변절의 회유를 거부한 청년‘하시근’은 막장 채탄부로서 더욱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고 탈주를 시도한다. 탈주의 길목을 지키고 있던 일본인 보조감독관을 부득이하게 살해하고 청년은 조선인 노파의 도움을 받아 죽음의 현장인 탄광 도주에 성공한다. 그리곤 동포들의 도움을 받아 부두 건설현장의 노동자가 되고 해방이 되어 해협 너머 고향에 돌아 갈 날을 꿈꾼다. 조선인 동료들의 비난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전쟁미망인(未亡人)인 일본 여성‘치즈’와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은 일본 패망과 함께 고국 조선의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이내 두 사람의 행로는 엇갈리고 반세기의 망각과 이별이 된다.

 

소설은 이렇게 가해자들의 잔악성을 수반한 비도덕적 행위와 비참하게 방황하는 영혼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역사의 배경 지식으로 독자들에게 이해를 요청한다. 그리곤 반세기가 지나 탄광 앞에 높게 쌓아올려진 폐석더미를 치워 역사의 진실을 없애버리려는 일본인들의 추악한 은폐 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해협을 다시 건너는 하시근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무엇을 잊고 있는지, 또한 역사란 무엇인지를 생각게 한다. 왜놈들에 의해 강제 노역으로 시달리는 동족을 배반하고 오히려 왜놈의 악행을 대행하던 부역자들은 동족의 피로 축적한 부를 통해 버젓이 사회 지배층이 되어 거들먹거리고, 자신들의 과거 악행의 증거를 영원히 가리려 한다. 강제 징용되어 이국의 탄광에서 죽어간 조선인들의 유골이 묻혀있는 방치된 탄광폐석더미를 치워버리려 한들 존재했던 역사의 진실이 없어질 수 있을까?

 

어떠한 반성은커녕 악행의 흔적 제거에 급급한 뻔뻔한 일제의 부역자들과 일본인들, 반복되는 얘기지만 민족을 배반한 파렴치한들과 그들의 행위를 처단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무능한 현실이 빚어내고 있는 모습이다. 한편 작가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탈주 중 불가피하게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본인 감독관에 대한 하시근의 죄의식을 부각한다. 그리곤 그 역시 광기에 사로잡힌 일본이란 국가의 한 낱 소시민이었음에 연민을 보내고, 약자에 대해 가했던 그네들의 폭력적인 연대를 미화하기도 한다. 아마 이것은 일본인 작가의 심리적 한계였을 것이다. 여기서 도덕적 정의에 대해 우린 갈등하게 된다. 내게 죽음을 요구하는 괴물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행동은 비도덕적이라 지탄받아야 하는 것인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라보는 탄광의 폐석더미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미관을 저해하고 지워버려야 할 흔적인가 하면 피와 죽음의 증거, 역사의 진실을 품고 있는 귀중한 터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진실을 묻어버리려고 한들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산 자들의 유지가 계속되는 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역사를 무시하는 것은 존재했던 20세기의 한 토막을 빈 공간이 되게 하는 것이다. 역사의 공동화(空洞化)이다. 반성과 정리를 회피하기 위해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비워버린 민족은 미래의 전망을 왜곡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왜곡은 갈등과 분노를 낳고 반목과 분열, 적대를 강화하게 한다. 한국과 일본은 이처럼 하나의 진실에 다른 관점을 투영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또 하나의 내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청산하지 못한 민족을 배반한 일제 부역자들의 처단 말이다. 이것을 해내지 못하고 부정이 정의가 되고 권력이 되어버린 한국사회의 미래는 끝없이 불온하고 부패할 것이다. 일본인이 써낸 오욕의 역사, 은폐된 역사의 드러내기가 다시금 우리가 잊고 지냈던 진실의 의미를 깨우치게 한다. 화해와 화합을 위해, 미래의 밝은 전망을 위해 제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과거사의 청산은 필히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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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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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자연의 깊숙한 곳, 밀림 속 미지의 어둠, 문명이란 인간의 백치 같은 탐욕이 미치지 않은 곳, 그곳에 퍼부어지는 포탄 세례는 정말이지 광기이고 애처로운 익살이며, 터무니없는 공포일 것이다. 이것은 알 수 없는 무엇에 대한 탐색의 열망을 실천하는 인간들에게 칭송의 시선을 보내는 인간의 오랜 심리적 동인의 본질과 연결되는 무엇일 것이다. 암흑의 진실에 근접하려는 인간의 욕망, 그것에서는 왠지모를 죽음의 색깔과 또 인간 필멸(必滅)의 냄새가 감돌지 아니하는가?

 

광활한 아프리카 대륙의 오지(奧地), 그 암흑의 심연에 대한 탐험의 매혹적 갈망에는 이미 오만이 가득하다. 문명이라는 서구 백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텅 빈 공간, 임자 없는 공간, 누군가에 의해 이해되어야 하는 공간이라는 생각 말이다. ‘말로’라는 인물이 곧 이러한 욕망으로 가득한 인간이다. 콩고 원시 밀림의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의 오지 운반선 선장으로 부임한다. 그곳에는 다른 어떤 곳을 합친 것보다 많은 상아를 모아 보내는‘커츠’라는 경외의 인물이 있다. “식물과 물과 정적(靜寂)으로 구성된 기이한 숲의 세계”, 그 압도적인 암흑의 실체에 완전히 동화되어 어둠 같은 존재가 되어 그 세계를 지배하고 군림하는 신화 속 인물이 된 인간.

 

소설은 낡은 운반선에 의탁해 말로라는 인물이 커츠라는 그들 세계의 영웅을 찾아가는 여정과 그와의 짧은 만남, 그의 죽음을 통해 이해하게 되는 삶의 기만과 암흑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의 정신세계를 들려준다. 문명의 공간에서 벗어나 암흑의 공간 깊숙이 들어가 궁극적인 인간의 열망, 자기의 본원을 찾으려는 응전의 세계가 비의(秘儀)의 주술처럼 흐른다. 그러나 그 실체, 사실이란 “금고를 터는 도둑놈에서처럼 도덕적 목표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시체 썩는 냄새 확 풍기는 그런 욕망일 뿐이다.

 

커츠를 향해가는 여정에서 백인들이 원주민들과 그들의 땅에 가하는 무지한 폭력의 장면들에 대해 말하는 말로의 시선은 마치 서구의 제국주의적 파렴치와 무례를 혐오하고 비난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단지 행위의 잔혹성과 무지에 대한 얕은 연민 이상으로 해독하기에는 저항을 일으킨다. 즉 아무런 방어의 의지도 없는 검은 인간들에 대한 약탈자의 야만성에 대한 본질적 반성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원주민들을 적이니 죄인이니, 일꾼이니 하는 우습기조차한 규정에 대해 반감을 표시한다거나, 커츠의 움막주위에 걸린 원주민들의 잘린 머리들에 명명된‘반항자’라는 터무니없는 표현의 고발에서 구태여 서구의 제국주의적 쾌락에 대한 본원적 회의와 자성(自省)을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말로라는 인물을 통해 탐색되는 서구 백인의 자신들 외에 대한 시각의 통찰은 비범한 곳이 있다. 즉 타자에 대한 사물화를 인식하는 점이다. 그 예는 자신을 도와 키잡이를 하던 검은 인간이 창에 맞아 죽은 후에 하는 자기중심적 연민의 발설에서 발견 할 수 있다.

키잡이 검둥이가 죽자 “일종의 유대관계가” 비로소 생겨나났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의 죽음으로써 “관계가 갑자기 깨지자 비로소 나는 그런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던 거야.”라는 말처럼 검은 인간이 도구적 수단, 이용물에 불과했으나 다소의 감정적 공감의 대상이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아마 물화(物化)에 대한 문학상 최초의 인식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감정 유대, 공감이 상실되고 단지 이익의 거래 대상으로 변질된 타자에 대한 오늘의 인식은 이처럼 영토주의적 탐욕이 은폐된 것이 아닐까하는 이해 말이다.

 

이러한 타자, 자기외의 대상에 대한 무관심이 빚어내는 냉혹성, 자기애의 열중이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곧 커츠란 인물에 대한 탐구일 것이다. 우월한 문명적 도구로 원주민을 제압하고 어두운 밀림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인물의 죽음에 이르러 나타난 표정은 바로 암흑의 핵심, 그처럼 도달하려 했던 삶의 열망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항거의 어조, 진실의 끔찍한 표정”, “열망과 증오가 기이하게 뒤섞여”, “고통으로 가득하고 만물의 덧없음이나 심지어는 고통 자체의 덧없음에 대한 무관심한 경멸로 가득한 형상 없는 회색 비전”이 그것이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며 나지막이 외치는 “무서워라!”라는 한마디는 완벽하게 압축된 지혜와 진실인 것이다. 커츠의 이 말이야말로 암흑의 문턱에서 서성대던 말로라는 인물에게 삶의 구원을 허용한 진실의 언어였을 것이다. 오지와 텅 빈 공간에 대한 오만, 타자에 대한 물화, 이들 탐욕의 열망을 정의하는 한마디, 암흑의 핵심, 어둠의 심연에 대한 진실의 소리.

 

- 蛇足

사실 이 소설을 많은 비평가들은 정치적 주제로 해석하고, 서구 제국주의의 비판적 문장으로 독해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배경을 하나의 거대한 은유, 즉 인간의 삶에 대한 본원적 욕망의 탐색에 집중하면 그렇게 초라한 주제적 논의를 탈피 할 수 있을 것 같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백경)』의 선장 ‘에이허브’는 ‘커츠’와, 수부‘이시마엘’을 ‘말로’로 대입하면 죽음과 구원의 이미지는 더욱 선명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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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반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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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도시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돈과 욕정과 행복을 보장하리라는 존재하지 않는 천국으로, 아니 죄악의 공간으로. 그곳에서 마주하는 것들은 서로에게 생채기를 남기고 증오와 분노가 되어 복수의 고통으로 번민하게 한다.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는 발길질이 먼저 가해지는 곳, 가진 것 없는 영혼에게는 멸시와 모욕을 뱉어내는 곳,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육체는 개 취급도 받기 어려운 곳이란 이해를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의 어두운 내면에는 광포한 분노가 은둔하게 되지 않겠는가?

 

시커먼 탄가루가 수북한 화물칸에서 뛰어내리다 휘청거리는 시골 청년이 있다. 홍수가 휩쓸고 간 고향을 등지고 살기위해 도시에 발을 내딛은 사람의 몰골은 이미 남루함으로 거지꼴이다. 그가 처음 대면하는 것은 도로가에 웅크린 채 싸늘하게 식어버린 하나의 육체이고, 굶주림에 본능적으로 향한 곳은 부두가 폭력배들의 술판이다. 고기 한 점은 지독한 모멸의 감수와 집단적인 구타의 댓가라는 잔혹한 도시의 얼굴을 알려준다.

 

청년에게 쌀(米)은 곧 생존의 안위이고, 고향의 향기이며, 영혼의 어루만짐이다. 굶지 않을 수 있는 생명, 존재의 원천. 부두에서 쌀을 나르는 수레들이 향하는 곳을 정처없이 따라간 곳에는 미곡상회가 있고 얼이 빠진 청년은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그랬다. 그곳이 그의 영혼이 정착할 수 있는 곳일 밖에. 먹여만 준다면 땅바닥에서 자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공짜로 얻는 노동력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쌀집 주인은 청년을 거두고, 엄청난 선심을 베푼 것이라 가진 자의 자기기만을 망각한다.

허나 “연민과 온정은 비 온 후 길바닥에 고인 물처럼 얕고 피상적이며, 바람이 불고 햇볕이 비치면 금방 사라지는 것”임을 청년‘우룽’은 모르지 않는다.

 

문득 소설의 배경이 되는‘청베이(城北)’ 와장가(街)의 지명이 작가의 다른 작품, <성북(城北)지대>를 떠올리게 한다. 절망과 무기력에 절고 상처받은 사람들, 그리고 성숙하지 못한 갈등과 혼란의 사회가 귀 기울여주고 보듬어주지 못했던 그 시대상의 처연함이 중첩된다. 자신의 몸뚱아리를 과신하는 쌀집의 첫째 딸 쯔윈, 약자에게 거침없는 모욕과 냉소를 보내는 둘째 딸 치윈은 우룽에게 무한의 복수심을 쌓는, 도시의 본성인 증오와 폭력의 정당한 명분을 확신시킬 뿐이다. 화냥질의 댓가로 씨를 알 수 없는 처녀 임신을 한 첫째 딸의 허물을 위장하기 위해 우룽은 쌀집 사위가 되지만, 장인은 사위의 살해를 청부하기까지 한다. 자신들의 허세와 기만을 위한 이용물 이상이 아닌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이야기는 우룽의 몸 곳곳에 새겨지는 정말의 흉측한 상처들의 여정으로 들어간다. 청부업자가 남긴 발가락 절단, 쯔윈이 물어뜯어 놓은 발, 장인이 쑤셔놓은 실명한 한 쪽 눈, 마침내 죄의 씨앗인 쯔윈의 자식이 망가뜨린 나머지 눈, 그리곤 매독으로 썩어가는 몸통이다. 도시의 사람들이 그에게 상처를 남길 때마다 고집스럽게 집착했던 쌀집이 그의 것이 되지만 그가 느끼는 것은 여전한 방황과 혼돈일 뿐이다. "쌀집의 방들도 흔들렸다. 이곳 역시 기차간 하나에 불과했다. 기차가 광야에서 천천히 움직일 때 우룽 자신도 여전히 떠돌고 있었다. ~ 기차가 날 어디로 데리고 갈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를 버티게 한 분노와 증오, 복수심의 귀착은 무엇이었을까? 잔인함과 포악함으로 부두 폭력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기까지 하지만,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치윈의 시선처럼 “우룽의 영혼이 그 목합 안에서 광폭하게 요동치는 동시에 나지막이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누가 순수한 시골 청년에게 야수의 포악함을 주입했는가?

‘수퉁’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 이러한 문장을 썼다. “만일 꽃을 키우는 사람이 그 화초들 옆에서 귀를 기울여 들었다면 가지와 잎이 자라는 소리와 꽃봉오리가 마음껏 웃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우리가 바로 외면하고 소외시키며, 씻기지 않는 오욕으로 분노를 주입시키는 장본인들 아닌가? 조금만이라도 그들의 작고 힘없는 목소리를 경청한다면 증오와 적대가 아니라 화목과 행복이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든다. 돈과 욕정이 거칠게 춤추는 죄악의 도시로. 도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오늘 우리들의 연민과 온정이란 것이 고작 어떠한 것인지를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쌀이 수북이 쌓인 화물차에 실려 고향을 향한 마지막 길의 우룽이란 사람의 고독과 외로움, 그만이 간직했던 삶의 비밀들이 아득하게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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