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의 도덕의식과 물화(物化)의 관계에 대해서

작성: 필리아(비의식)

 

나는 올 한해의 한국사회에 더없는‘물화(物化)’의 심화라는 비판적 모티브를 더하고 싶어진다. 단지 국가의 진정한 리더를 선택하는 것에서조차 오직 정치공학적인 물질적 놀음과 마케팅적인 이벤트로 뒤덮는 혐오스러움이 미디어를 도배질해 정작 이 사회의 뿌리깊은 문제점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버린 것은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독서시장을 뜨겁게 달구다가 이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처럼 이 사회의 비판적 자기 성찰이 잊혀지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 다시금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올해의 책으로 올려놓는다. “정의로운 사회는 행복을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 만들 수도 없으며,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서로의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논의하는 문화”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정의의 실천적 사고라고 공정성, 불편부당성에 대한 도덕철학을 우리에게 생각게 했던 그가 공정성이라는 도덕규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도덕의식을 우리에게 상기시켰을 때 정말이지‘루카치’가 부활한 것처럼 꽤나 반가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바로 “특정 대상물의 관행과 가치평가를 변질시키는‘부패’라는 도덕의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시장만능의 경제적 논리가 인간의 모든 생활양식을 지배함에 따라 지금까지 도덕과 이의 사회 규범적 실천으로서의 법으로 존중받고 보호되던 영역들이 비도덕과 비법률적 영역으로, 즉 시장의 거래 대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100년 전‘루카치’가 주장한 “상품교환의 강제 아래서는 주체들의 행동에도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 변화는 주체의 주변 세계에 대한 관계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는 말과 매우 닮아있다. 이것은, 인간들은 계산적이기만한 교환과정에의 참여로 모든 대상물을 물화하는 해석습관에 사로잡히게 됨을 지적한 말이다. 결국 루카치 이후 사라져가던‘물화‘라는 비판적 언어에 숨을 불어넣은‘악셀 호네트’와 함께‘마이클 샌델’을 경청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샌델의 책은 “돈이 잠식하거나 밀어낼지 모르는 태도와 규범에 담긴 도덕적 중요성의 인식을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경고”의 의미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그 논의의 근원적 사고는 “시장이 인간 삶의 고유한 비시장적 규범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이 우리 인간과 인간사회를 어떻게 손상시키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곧 물화에 대한 현대적 환기이기도 하다. 상품 교환의 행위 영역에서 강제되는 모든 대상에 대한 물질적, 즉 교환, 거래 대상으로 측정하는 태도는 <<인정이론>>에서 호네트가 썼듯이 인간의 실존적 사실인‘인정의 태도’, 즉 자신의 기원에 대한 감을 상실한 인간들의 기억상실이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시장의 도덕적 한계, 이것은 온통 물화로 치달아 자신의 실존적 이해를 망각하고, 스스로 도덕적 영역을 비도덕화시켜 자신들의 건강성마저 훼손하는 한국인들과 한국사회의 현실을 깊이있게 들여다보게 해주는 절창이다. 내겐 그 어느 아름다운 시보다 샌델의 의식이 아름다웠으니 말이다. 먼저 우리들 자신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들의 모습이 지금 어떻게 보이는지, 어떤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이 작업을 하지 않고 법과 제도와 정치적 수장과 같은 형식을 바꾼다고 무엇인들 변화하겠는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올해의 책에 머물지 않고 인류사회가 물화를 끝내는 날까지 읽혀야 될 책이라 해도 과장되지 않을 것이다. 부패와 부정의 뿌리는 다름아닌 물화에 자리를 내준 우리들의 본모습인 '인정의 망각', 자기 기원의 상실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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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 김말봉 애정소설
김말봉 지음 / 지와사랑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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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말봉의 이 소설이 조선일보에 연재되던 1937년은 물론 1930년대의 시대상을 살펴볼 이유가 있다. 대체 일제 식민치하의 한국인들이 통속적 연애소설에 열광해야 했던가하는 이유와 이러한 소설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년대는 일제가 군국주의를 강화하던 시기이며, 더구나 작품이 발표되던 37년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해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식민지민은 무조건의 희생이 강요되고 삶은 더없이 피폐해졌으며, 민족말살정책이 고강도의 폭력을 동원하여 자행되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애정소설이라니? 하는 의문이 들법하다. 그러나 일제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새로운 알레고리라고 관대하게 바라본다면, 또한 식민지하에 이루어진 근대화가 낳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인습의 파괴에 대한 대결과 갈등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관점으로의 성숙으로 파악한다면 한국문학의 일대 진전이라고도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조금은 너그러운 이해로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신문의 상업화에 따른 전형적 대중통속 소설인 『찔레꽃』이 애욕과 순수사랑이 뒤얽힌 말초적 감성의 자극에 머물지 않고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윤리의 갈등, 자본에 예속되어가는 인간 삶의 자문(自問), 자작농의 소작농으로의 전락과 같은 사회구조적 모순 등을 가로지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30년대 후반에 이르러 「백치 아다다」의 작가 계용묵과 같은‘인생파 작가’들이 파고들던 물질적 소유양식과 정신적 삶의 주관성이 인간의 가치와 행복에 미치는 영향의 조망이 이 작품에서도 중요한 주제를 형성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당대의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이 이미 근대 자본주의로 인한 물화(物化)를 근대화의 모순으로 이해하고 고민하고 있었음을 포착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젊은이들의 애정관계에 끊임없이 작동하는 시대의 현상들을 사건화하면서 식민주의적 근대성이 뿜어내는 모순과 문제들을 발설하고 있다. 중심인물인 스물두 살‘정순’이 가계의 곤궁함을 책임지는 가장의 부담을 안고 은행장인 신흥귀족의 가정교사로 입주하게 되면서 겪는 사랑의 애환에 얽힌 지극히 속된, 진정 통속(通俗)적인 전개를 하고 있다. 돈의 권세를 신봉하는 은행장 조만호의 탐욕스러운 육욕에 대비되어 만성적 심장병으로 누워 남편의 바람기에 히스테리를 보이는 안주인은 남성중심적인 당대의 왜곡된 성문화를 대변하고, 이들의 부에 힘입어 일본의 대학을 졸업하고 세계여행을 다니는 아들 경구와 딸 경애는 삶의 곤궁함, 자본에 예속된 삶을 직시하는 정순과 또 다른 대척에 놓여있다.

 

정순과 혼인을 언약한 대학생 민수는 이러한 대립 구조에 사회구조의 변화를 나타내는 중요한 성격을 지니고 애정 전선에 변수 역할을 수행한다. 마을 유지로서 광대한 농토를 소유했던 그의 집안이 연이은 집안의 우환으로 가세가 기우는데, 구시대의 인습으로서 장례 등 제례의 허식과 허례로 인한 과잉의 체면치레를 하나의 원인으로 천명하고 있다. 결국 민수네 농토가 은행의 경매로 인해 기반을 잃고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농경사회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구조적 전환을 하는 시대적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것인데, 이 사건은 민수와 은행장 조만호와의 악연을 빚어낸다. 경매 기일의 연기를 요청하나 거절당하고, 민수의 연인인 정순의 사랑이 어긋나는 것도 바로 이 사회구조적 변화기에 처해있던 소시민들의 저항할 수 없는 근대화의 폭력성의 한 단면일 것이다.

 

자신의 딸보다 네 살이나 어린 가정교사 정순의 뽀얀 목덜미와 여체의 탐닉을 그리는 조만호의 심욕은 추함 그자체이다. 또한 그의 육욕을 채우는 대상으로서 기생 옥란의 물질적 욕망이나, 조만호의 병약한 아내의 죽음이후 자신의 딸을 이용하여 조만호를 갈취하는 침모(針母)의 기만성은 황금만능의 물질주의가 이미 식민지민들의 정신을 얼마나 깊숙이 갉아대고 있는지를 묘파(描破)해내고 있다.

즉 자본주의 물결과 같이 이식되기 시작한 식민사회의 근대화는 물질적 욕망의 끊임없는 부추김과 새로운 물질적 노예와 자본 계급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김말봉의 연애소설이야말로 당시 해체되던 경향주의 문학과 모더니즘 문학의 전환기라는 시대적 성향이 그대로 스며있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야기의 줄기인 사각, 오각, 육각으로 얼기설기 얽힌 남녀의 연애로부터 자유연애와 여성의 정조관념에 대한 파괴적 담론, 구세대에 의해 여전히 주장되는 가부장적 결혼관과의 충돌로부터 옅은 여성주의의 싹을 볼 수 있지만, 신식 여성이라는 조만호의 딸 경애나, 침모, 옥란 등의 발설에서 남성의 권위에 대한 종속적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시대정신의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자원봉사운동을 하려는 조만호의 아들 경구를 통해 계몽적 확신으로 분열된 주체를 봉합하려는 당대 지식인들의 진정성에 대한 회의를 대변하기도 하는 등 소설은 당대의 거의 모든 사회적 현상들을 녹여내고 있다. 다만 70여년이란 시간적 간극은 한국 현대소설의 초기에 보이는 미숙한 문장들과 구성들로 독자의 상상력을 침범하여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하는데, 작가의 주장이나 경향을 직접 소설 속에 발설하는 것이 한 예라고 하겠다. 어쨌든 다시금 출간되어 현대 독자들에게 1930년대 근대화에 매몰되어 있던 우리문학의 한 분류를 통해 당대의 시대정신을 엿볼 수 있게 된 것은 커다란 위안이고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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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권은 밤에게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3
이신조 지음 / 작가정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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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밤이란 꽤나 낯선 언어가 된지 오래된 것 같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의 적막과 소요의 묘한 대조, 시원(始原)으로의 회귀나 안온한 고요의 감동과는 동떨어진 삶의 세계에 익숙해진 탓이리라. 혹은 엄마의 자궁 속 그 태곳적 기억에서 벗어나 그 적요의 시간을 그리워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서서히 자연의 순환은 다시금 밤의 시공을 생각게 한다.

 

밤에 관한 이런 나의 단상과는 달리 소설에는 도시의 밤거리와 어둠의 방을 찾아 헤매는 아직은 소녀를 벗어나지 못한 스물두 살 여자가 있다. 할머니와 재가(再嫁)를 한 엄마의 집을 오가며 살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 그리고 엄마의 돌연한 죽음, 할머니의 별세는 어린 여자에게 세상과의 이른 만남을 불가피하게 했다. 화장품 하청 공장의 공원에서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계부의 요청으로 ‘아침 부동산’이라는 부동산사무소의 운영을 맡게 된다.

 

스물두 살의 여자와 부동산이 어긋난 삶의 모습 같기만 하지만, 그녀에게 의뢰된 집과 방들이란 이미지에 다가서면 그것은 곧 어둠이요, 평온이며, 위안의 장소로서 그리움, 회귀의 공간처럼 보여 더없이 적절한 만남으로만 여겨진다. 그래서 그녀가 불쑥 찾아들어 잠드는 허술한 단층의 빈집이나, 다세대주택 반지하방은 어둠과 밤의 공간이며, 엄마의 자궁처럼 그녀의 성장을 위한 장소가 된다.

 

‘집 임자는 따로 있는 거다’라는 말처럼 오랫동안 찾는 이 없던 빈 단층집을 계약하던 쌍둥이 노인 자매와 그녀들이 꾸며놓은‘나이트 룸’은 어둠의 평화로움으로 방황하는 영혼들의 심연을 위로하는 장소가 되고, 스물두 살 부동산 아가씨는 암흑의 응시에서 자신의 내면을 어루만진다.

한편 밤을 떠돌밖에 없는 가난한 고학생의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 그런 앳된 남자를 기웃거리기위해 도시의 밤거리를 걷는 여자의 연정, 알지 못하는 그리움, 동류에 대한 애틋함은 한 뼘만큼의 성장처럼 다가온다. 늦은 밤 남자와 찾은 반지하 방에서의 짧은 합일과 이별, 나이트 룸의 폐쇄는 그녀를 싸고 있던 껍질의 깨어짐을 알리는 신호였을까?

 

그녀의 허기진 마음을 달래는 인스턴트 음식들과 불어나 뚱뚱해 진 몸이 다시금 가냘픈 몸으로 돌아가는 날, 두터운 겨울외투와 초라한 미니 부츠를 벗어던지는 날, 엄마를 닮은 여인으로서의 자신을 믿게 되는 날, 자신의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깊이 잠들 수 있는 집을 느끼는 날을 이 도시가 허락할까?

한낱‘검은 덩어리’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던 자신에게 색을 입히고, 빛을 찾아주기 위해 상실과 상처, 자기연민에서 탈주하려는 그녀의 방황어린 발자취를 따라가는 독자의 마음은 이 살벌하고 무관심하며 소란스러운 도시가 과연 품어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작은 보살핌, 구원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옅은 희망의 가능성을 바라게도 된다. 스물둘의 여자아이가 지닌 상실의 애도를 아직도 경험하지 못한 나는 여전히 미숙한 채 머물러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래서 이제야 밤을, 어둠의 심연을 바라보게 되는 것일지도. 그렇담 나는 어떻게 밤을 통과해야 할까?...이 성장과 애도와 치유의 이야기가 알 수 없는 위로가 되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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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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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문학이 사람에게 선사할 수 있는 총체는 이런 것이다.’라는 소설의 전형(典型)이라 말하고 싶다. 자연 위에 군림하려는 무지하고 상상력이 부족한 인간의 오만성에 대한 따끔한 권언의 진중함이 작품 전체를 도도히 흐르는 가운데,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충돌과 화해와 적응의 지혜를 깨달아가는 노인의 연애 소설 읽기에서 사랑의 고통과 그것을 찾기 위한 분투, 그리고 글로부터 발견하는 앎에 대한 경외와 겸허의 이야기가 조우하며 인간과 삶과 자연의 본성에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이 깊고 깊은 주제의 내면에 흐르는 이야기 또한 걸작이어서 권력이라는 기회주의적이고, 오만하며 무지와 위선으로 가득한 인물의 희화(戱畵)나, 양키로 대변되는 문명이란 자연에 대한 무분별과 몰이해의 표상은 조셉 콘래드의『암흑의 핵심』을 연상시키고, 자연의 순리에 무자비하게 개입하려다 야기된 살쾡이의 인간을 향한 도전과 노인과의 죽음을 건 대결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숭엄하다할 쟁투를 떠올리게 한다.

 

권력의 폭력을 피해 도착한 곳은 아마존 유역‘엘 이딜리오’라는 정글을 개간한 이주민의 작은 마을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우기와 범람하는 강에 고립되어 극도의 궁핍과 곤궁함으로 아내를 잃고,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우림지역의 원주민인 수아르족에 의해 도움을 받고 그들의 자연과 융화하여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체화한다. 의도하지 않은 원시부족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행위로 인하여 부득이 그들을 떠나게 된 볼리바르는 다시금 엘 이딜리오의 강가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지만 거세게 침투해들어오는 문명은 노인이 된 볼리바르의 평온을 놔두지 않는다.

 

백인들의 자연에 대한 무지와 군림의 욕망은 인간들의 이 작은 마을에 일대 사건을 가져 오는데, 살쾡이의 어린 새끼를 포획했던 양키가 어미 살쾡이에게 보복을 당한 것이다. 양키의 죽음은 인간이 자연에 지켜야 하는 한계를 넘어선 교만에 대한 응징이다. 정글을, 자연의 질서를 가장 잘 안다는 이유만으로 노인은 마을의 읍장(뚱보 읍장 - 권력의 기만과 위선에 대한 조롱)을 비롯한 탐색대의 일원을 안내하는 임무를 불가피하게 떠안게 된다. 문명이란 권력으로 방자함이 하늘을 찌르는 읍장의 정글 탐색의 행로는 그야말로 가관이다. 자연에 대한 그 완벽한 무지와 어리석음은 인간의 초라한 상상력, 그것의 빈약함만을 드러낼 뿐이다. 살쾡이의 연이은 인간의 살해와 마을로 좁혀오는 공격성에 읍장과 탐색대는 노인에게 대적을 맡기고 줄행랑을 친다.

 

아마 이 소설의 절정은 이것이 될 것이다. 『노인과 바다』의 거대한 물고기와‘산티아고’의 생명을 담보로 한 싸움처럼 노인 볼리바르와 2미터가 넘는 암살쾡이와의 정면대결 장면이다. 물론 산티아고는 패배하지 않는 인간의 정신이라는 현대적 영웅을 말하고 있지만, 볼리바르와 살쾡이는 동등한 자연의 존재라는 공감이 선행된다. 인간과 정면 승부를 벌이려는 살쾡이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인지한 행위이며, 동물이 인간에게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통해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의미를 깨우치려 한다는 의미에서 두 소설의 사투는 전혀 다른 색깔을 지닌다. 그럼에도 두 싸움의 결과에서 우리는 문명에 따르는 정신적 공황에서의 해방,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겸허와 경외의 이해를 갖는다는 점에서 동일성을 느끼게 된다. 즉 우리가 인생을, 삶을,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되는가에 대한 어떤 본질적인 전환을 생각게 한다는 것이다.

 

사랑을 향한 인간들의 무수한 염원이 담긴 소설읽기로 소일하는 노인의 삶, 음절과 단어의 반복, 그리고 문장의 반복 읽기를 통해 읽어내는 소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상상의 어려움을 실로 대변한다. 노인의 인생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떠한 경험도 없는‘뜨거운 키스’, ‘수상도시 베네치아’와 같은 소설 속 언어들에서의 방황은 우리 인간의 속성, 본질을 그대로 말하는 것일 게다. 글을 읽는 다는 것은 새로움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 알아감의 즐거움은 겸허와 겸손을 바탕으로 한다. 자연, 생태계 또한 결코 인간의 교활하고 오만함으로 군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닐 것이다. 반복해 읽을수록 의미가 더욱 풍부해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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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부하기 그지없는 구태의 물음을 하는 것은 우리가 현대라 부르는 오늘의 사회, 즉 근대의 민족국가가 비로소 성립함으로서 ‘정치’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삶, 그 자체가 되었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최근 기득권 세력의 보수 행동대원인 모(某)의원이 한 소설가에게 그의 소설들이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고 시비를 걸었다는 기사는 이 글의 발단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소설가는 이런 시비가 바로 정치적이라며 반박했다고 하지만 그들의 논쟁 장(場)이 소위 SNS라는 단문의 표피적 공간이다 보니 구구절절 무지한 사람에게 설명하지 않은 까닭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미흡한 반박이라 할 것이다.

 

내가 아는 근대적 소설의 목적이란 독자들의 도덕적 상상력을 확대시켜 인간 욕망의 복잡성에 대하여 시민들이 좀 더 알게 되고, 그 자신과 국가에 더욱 적절한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설가들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도덕적 질서를 찾는 인간의 영혼 속에 존재하는 혼돈을 그려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대국가 체제 속에서 인간 개인의 삶이 그 국가가 장치해 놓은 정치적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개인의 행동과 언어, 심리적 상태와 욕망, 이념 등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미 정치를 떠나서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엘리엇(T.S.Eliot)’은 “어떤 것이 문학인가 아닌가는 미학적 관점에서 결정되지만, 그것이 위대한 문학인가 아닌가는 비(非)미학적 관점에서 판단된다.”고 말했다. 또한 ‘토마스 만’은 “인간의 운명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결정되리라”고 하였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정치적으로 규정되는 것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공적인 충돌 속에서 겪은 개인적 경험이 소설의 주제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촘촘히 얽혀 있는 국가정치의 신경망이 현대인의 정신과 육체를 규율하고 통치한다. 따라서 개인들은 당해 국가정치가 표방하는 어떤 이념에 사로잡힌 한도 내에서 행동한다. 그러한 개인들이 자기 삶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부도덕성과 불평등을 호소하고, 불의와 부당성의 제거를 위해 고통과 혼돈을 말하는 것, 즉 정치적 표현을 하지 말라고 한다면 이처럼 지독한 무지와 독단이 어디에 있겠는가?

 

요즘 벌어지는 한국의 TV속 토론광경을 지켜보면 대립하는 양측이 사용하는 언어가 마치 다른 것처럼 보이곤 한다.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상호 소통이 불가능한 지경이라는 것이다. 다른 언어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자, 나의 이러한 감상은 정치적이라고 할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들이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의 규칙들, 경계들을 말하고 있으며, 그 불통에 대해 울화가 치밀기 때문이다.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이들의 언어와 행동 밑에 깔린 동기는 개인의 동기 뿐 아니라 전체 사회와 국가, 문화의 동기들을 보여줌으로써 자기가 정당하다는 신념, 욕심의 충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곧 소설의 소재이고 소설이 말하는 것이다.

 

근자에 발표된 한국 소설들을 열거해 보자. 미군기지촌이 배경인 ‘정한아’의 『리틀 시카고』,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차별적 시선을 그린 ‘강병융’의 『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 가난의 상속자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주류사회의 양가적 행동을 묘사한 ‘김영하’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 물질과 과시와 폭력의 도시에서 신음하는 소시민들의 이야기인 ‘김사과’의 『테러의 시』, 타자에 무관심한 현대사회의 수많은 장치들의 혐오스런 작용을 고민케 하는 ‘구병모’의 『고의는 아니지만』, 한국사회 자본가들의 왜곡된 형성을 쓴‘황석영’의 『강남몽』, 소위 대선정국의 화두가 된 경제민주주의의 파행을 그린 ‘조정래’의 『허수아비 춤』등등, 이들 소설은 모두 정치적이지 않은가? 정치를 떠난 개인의 삶을 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대 민족국가의 성립 이래 정치를 개인의 삶과 분리하여 생각 할 수 없게 된 연유에 있다.

 

성적 욕망도, 물질에 대한 소비의 욕구도, 지위에 대한 야망도, 권력의 탐욕도, 친구와의 우정도, 연인과의 사랑도, 어린아이의 까르르하는 웃음소리도, 노인의 쓸쓸한 고독도 모두 정치적이다. 정치라는 삶의 시스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의 미세한 변화에 민감한 예술가는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그의 작품은 곧 정치적이다. 시민들, 민족의 촉각인 이들에게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그건 부당함과 비정함, 불의와 폭력이란 암흑세계에서 쥐죽은 듯 살라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소설은 인간 개인들의 비도덕적 상황을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소설이 이것을 쓰지 않는다면, 인간의 얘기를 쓰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써야 한다는 것일까? 현대의 소설은 그래서 정치적인 것이다.

                           

[참고도서]

1.‘폴 돌란’의 『정치와 소설 ; Fiction and Politics in the modern world』

2. '구스타프 야누흐‘의 『카프카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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