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 - 루이스 세풀베다 산문집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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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이야기꾼, 이 시인의 눈은 역시 연약한 것들, 망각한 것들, 숭고한 것들을 향해있고, 그것을 추억하고, 애도하며, 오늘을 직시하고, 미래의 당연히 그러해야만 할 방향을 생각한다. ‘칠레’는 지역적으로 우리와는 아주 먼 나라이지만 오랜 독재정권과 민주화의 길을 걷던 과정이 너무도 흡사하여 그 정서가 낯설지 않다는 것은 모순되게도‘세풀베다’와 공감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소설의 모티브가 된 이방인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었던 이주와 여행의 색다른 경험의 이야기들이 더해져 작가의 시선이 열려져 있는 진실을 향한 세계의 현상들을 공유하는 것도 이 책의 맛스러움이라 해야 하겠다.

 

독재정권에 맞서 펜으로서뿐 아니라 게릴라가 되어 육신으로 맞서 싸우던 작가로서는 칠레를 떠나 이웃나라를 전전하는 망명 아닌 망명생활이 불가피했었던 모양이다. 군부독재 권력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 그를 세상에 알린 소설,『연애소설 읽는 노인』이 이러한 망명 생활의 첫 기착지인 예콰도르 누시뇨에서의 원주민인 수아르족과 함께한 공동체 생활의 결과였음을 듣게 된다. 수아르족의 보호, 거센 폭풍우를 피해 찾아든 정글의 외딴 오두막과 그를 맞아준 노인, 초라한 벽에 세워진 몇 권의 낡은 책들,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도 괜찮아요”라고 세풀베다를 꿰뚫듯 마음을 안아준 노인의 얘기임을. 세상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욕망의 소음이 차단된 곳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이처럼 이 책의 에세이들은 작가의 망명 여행기이며, 어디서든 이방인의 낯선 시선이 번뜩이고, 그래서 늘 새롭고, 내부자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순수하게 읽어낸 현실, 날 것의 거울상이 된다. 독일의 망명생활 중 순박한 웃음을 머금은 칠레의‘라 빅토리아’ 마을을 배경으로 한 유년기 아이들의 사진이 계기가 되어 청년이 되었을 아이들을 찾는 여행의 소회가 책의 첫 장을 연다.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다고 하는 나라에서 그네들이 찾아낸 사진 속 아이들 중 한 아이는 굶주린 동생들을 위해 과자를 훔쳤다는 죄로 처형되고, 그나마 생존한 아이들의 무표정과 힘겨움이 새겨진, 아무런 희망도 갖지 않은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민족화해란 얼토당토않은 알맹이 없는 허튼소리로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린 권력은 여전히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핥고 있을 뿐 현실의 잔인함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음을 목격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입을 모아 합창하듯이 “크면 칠레를 떠날 거예요.”라고 자신들의 미래를 외친다. 최근 통계자료에서 과반수를 넘는 한국인들이 여건만 되면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답했다는 얘기와 너무도 흡사함에 움찔하게 된다. 사진에는 한 아이의 자리가 비어있고, 그 빈자리는“조국이라는 이름하에 망각으로 채워질 것”이라는 현실을 비추는 잔인한 거울의 모습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권력은 왜 이 거울너머의 진실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 ‘국민 대통합’이라고 외치는 한국의 정치권력이 진정 무엇이 통합인지 알고나 있으려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편 세풀베다는 남극 대륙에서 석유 채굴작업을 하는 거대자본이 만들어내는 종말적 현상을 목격한다. 남극해 일대의 3대 빙붕 중 하나인‘라르센 B 빙붕’이 떨어져 나와 녹아버리는 것인데, 칠레 남단에서 남극해의 장관을 보기위해 오는 유럽의 부자 관광객들을 보곤 “세상의 종말을 자기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싶어서 돈을 뿌리며 이 먼데까지 오니, 참 희한한 일이지?”라는 조롱에서 인간의 운명이 오직 시장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공포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지나친 근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의당 그러해야 하는 세계로 이행되고 있지 않다. 비극적인 종말이 단지 눈앞에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외면당하는 이 진실을 대체 어떻게 호소해야 할지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역사적 진실을 선취하려 했던 러시아 작가‘이사크 바벨’의 터무니없는 죽음의 얘기를 들으면서 좌절과 환멸이 지배하는 세계의 항상성을 보게 되는 것은 사실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기자 출신인 작가에겐 권력의 개들이 되어가는 언론의 모습에서 세계가 더욱 진실과 멀어지는 형상이 보였을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글이나 말에 대해 책임지려하지 않는다.”라며 오늘날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책들 옆으로 무지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쓸쓸이 지켜보아야만 했던 돈키호테”임을 말하는 낙심한 얼굴이 어른거린다.

 

또한 세풀베다 특유의 유머가 곁들인 풍자적 글들로 문학적 향기라는 즐거움도 주는데, ‘에드워드’라 불리는 수색견의 에피소드는 공권력의 맹목적 신념이 야기하는 폭력의 실체를 조명하며, 단지 발로 차는 남자의 발길질을 피하려다 바짓가랑이를 찢었다는 이유로 검찰에 상해죄로 고소된 개 ‘치키토’의 18년간 수감 이야기는 가해권력이 피해자의 저항을 폭력이라 규정하며 자유를 박탈하는 구조적 폭력의 현상을 재미있는 우화로 지펴낸다. “치키토는 절대로 그를 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항변이 왠지 아프게 들리는 까닭이 무엇일까?

 

인간의 존엄과 자유의 쟁취를 위한, 민중의 가슴 속에 타오르는 아름다운 꿈들의 얘기, 진실을 위해 억압과 죽음을 무릅쓴 스러져간 영웅들의 이야기가 진중한 언어로 들려진다. 길 끝에 선 노작가의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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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론 현대사상의 모험 10
에릭 홉스봄 지음, 강성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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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술(記述),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 역사학과 역사학자의 자세와 태도, 그리고 역사의 분석과 해석과 관계하는 학문들과의 연계성을 전체사회사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역사의 정체성과 당위론에 대한 홉스 봄(Eric John Ernest Hobsbawm)식 진술이라고 해야 할까.

주로 대중을 대상으로 강연하거나 전문지에 발표한 짧은 담론들로 구성된 글이라서 고도의 배경 학문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수월함이 있으나, 서술적 역사와 같이 일부 비판을 기초로 한 글들의 경우에는 대상학자와 저작에 대한 이해의 결여로 다소 어려움을 겪는 부분도 있다. 다만 역사를 어떠한 관점에서 인식해야 하는지, 역사란 바로 이러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아마 최고의 책이라는 점에서 사건사나 연대기정도에 익숙한 우리의 일반적 역사인식을 한 단계 올려놓아 주는 저술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무엇보다 관심을 갖게하였던 부분은 역사에서‘과거’의 의미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하는 것과 ‘당파’. 즉 특정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입장에 자신의 의도를 종속시키는 것에 대한 지적을 들 수 있는데, 바로 근자에 기승을 부리는 뉴라이트의 비뚤어진 역사관에 대한 본질적 잘못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역사가의 과제는 과거의 의미의 본질을 사회 속에서 분석하고, 그 변화와 이행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거라고 공식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것들일까? 결국 그 공식화된 기억으로서의 과거란 무수히 많은 것들 중에서 특별히 선택된 것일 뿐이다. 더구나 사회에서 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의식된 역사체계 속으로 통합 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현재의 논쟁과 불확실성을 심판하는 법정이 되는 경향으로 흐를 경우 인위적 가공물이 되거나 날조되곤 한다.


역사를 정치적 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는 우리 역사학계의 현실을 볼 때 1947년에야 비로소 국가로 존재하게 된 파키스탄이‘5000년의 파키스탄’이라고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동원한 현재의 정당화나, 마케도니아를 말하는 그리스,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의 역사와 같은 시대착오나 날조에 대한 홉스봄의 지적은 “역사가가 자신의 책임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정체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격정에서 비켜서 있어야 한다.”는 역사학자의 태도를 시정케 해준다. 그렇다고 역사의 당파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데올로기나 정치에 완전히 중립적이라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역사학자의 정치참여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탁상공론과 과학적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며, 과학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행위에 유혹되어 미리 결정된 자신들만의 교리를 입증하는 데만 참여하거나 실제적인 문제는 교조적 근거에서 거부하면서 사이비 문제를 제기하는 주관적 당파성은 경계하여야 할 요소임을 부인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란 대체 우리들, 오늘의 사람들에게 무엇이란 말인가? 어떤 의미를 기대해야 하는 것일까? “역사학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역사변화 전반에 걸친 메커니즘 형태를, 특히 변화가 극적으로 가속화되고 확대되어온 과거 몇 백 년 동안의 인간사회의 메커니즘 형태를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즉 역사는 역사적 경험과 관점의 결합에 기초해 현대사회에 대한 전망을 가능케 하며, 미래와 미래를 준비하기위해 요청되는 인간행위를 판단하는 데 필수적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특히 홉스봄은 ‘사회갈등’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한계까지 짓눌려 온 사회구조의 중요한 측면을 표현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예로서 프랑스 혁명기라는 짧은 기간이 동일시간 폭을 지닌 어떠한 시기보다 더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유독 많은 역사연구에 바쳐진 것처럼 어떤 중요한 문제들은 그 폭발의 순간에 평상시 잠재되어있던 많은 것을 드러내기에 사회의 주요변혁과 반응을 전체적으로 명료하게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홉스봄의 전체사회사, 즉 기존의 하층계급에 대한 역사, 풍속, 관습, 일상생활을 의미하는 사회사를 벗어나 경제, 정치, 문화, 종교등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한 역사인식과 관련을 맺고 있다 할 수 있겠다. 특히, ‘마르크스’의 ‘토대와 상부 구조’라는 상호작용하는 상이한 수준들로 구성된 사회라는 모델, 즉 사회현상의 위계질서를 주장하고 자기 지속적인 체계의 경향에 반작용하는 내적 긴장이 사회 내에서 존재한다는 주장에 강한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홉스봄의 역사론을 정립하는 원형적 토양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회에 대한 분석도 그 사회의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과 함께 시작해야만 한다는 마르크스의‘생산양식’은 인간사회의 다양성과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토대로서 홉스봄의 역사인식에 근저를 이루고 있다 할 수 있다. 이에 더불어 반(反)주류 역사라고 부를만한 분야의 탁월한 선구자들인‘페르낭 브로델’을 비롯한 《아날학파》의 “다양한 행동, 사고, 느낌의 형태를 서로 일관된 것으로 보기위해 이러한 형태들 사이의 논리적 연관성을 발견하려한”‘망탈리테(mentalites)’는 전체사회사에 음양으로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마르크스가 역사학에 미친 영향이나 아날학파에 대한 몇 꼭지의 글은 그래서 이 저술, 아니 홉스봄의 역사인식에 대한 중심 사고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 된다.


한편, 19세기 프랑스 歷史家‘미슐레(Jules Michelet) ’에 이르러서야 민중사가 시작되었다하지만 대개의 지역에서는 1950년대 되어서야 비로소 민중사 즉, 국가를 형성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인 민중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던 역사가 민중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꽤나 인상적이다. 왜 역사는 왕과 황제, 지배계급 상층부만 이야기 하였을까? 역사는 통치자의 영광과 실용적 용도를 위해서만 저술되는 그러한 역사였다. 결국 사회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궁극적으로 말하지 않는 역사, 민중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역사. 우리 한국의 역사는 여전히 이러한 지배계급의 역사만이 얘기되고 교육의 현장에서 유리되고 있다. 고작 홉스봄의 지적처럼 보통사람의 역사를 기술하는 일부 좌파의 역사조차도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의 선구자로 간주되는 인물이나 사건에 맞추어져 진정한 민중의 이야기는 하고 있지 않음에 대한 각성은 새삼스레 당혹스럽기조차 하다.


역사는 사회가 본질적으로 겪는 모든 변화에 대한 기록이다. 그래서 홉스봄이 말하는‘전체사회사’나, 역사 기술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아울러 제시되는 방법론들, 그리고 팽창된 방대한 역사 기술로서 편리한 출발점이 될 수 있는‘상황’에 대한 연구의 제안 등 진정 역사란 무엇인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차원을 달리한 역사의 이해를 갖게 해준다. 그의 저술, 『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극단의 시대』로 이어지는 역사의 심층적 이해를 위한 매혹적인 입문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역사를 말하는 법을 말하는 역사서이다! 역사를 읽으려면 우선 홉스봄의 『역사론: On History』부터 읽으라고 권유하고 싶어진다.


註) 망탈리테(mentalites) : 사회문화현상의 밑바닥에 자리한 집단 무의식 또는 집합기억으로서 인간의 사고와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심성(心性)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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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딩의 여덟째 날
리루이 지음, 배도임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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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할미의 사당이 마을을 내려다보는 중국의 한 촌락에 십자가의 첨탑을 높이 세운 성당의 오만한 계몽의 침략이란 상징적 충돌을 통해 20세기 전후 중국사회와 중국인들의 삶을 투영하고 있다. 그것은 종교를 앞세운 서구제국주의의 근대화의 민얼굴과 여기에 대처하는 중국인들의 양가적인 양태들 속에서 부글거리는 선망과 질시와 좌절과 분노의 본질에 대한 탐색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 한국문학들이 카톨릭이라는 서양 종교의 박해라고 말하며 종교적 자유를 억압했다는 식의 편협한 관점에서 근대화,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인간의 삶 전반에 미치는 성찰이라는 역사 인식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각성케 된다.

 

‘장마딩’이란, 선교를 위해 중국으로 건너온‘지오반니’라는 수사(사제)의 중국식 이름이고, 그의 신앙적 아버지인‘꼬르’주교의 애정의 산물이랄 수 있다. 이들에게 토속신앙으로 삼신할미를 모시는 중국인들은 한낱 우매한 이교도일 뿐이고, 그들의 사당은 하느님의 성전인 성당과 공존할 수 없는 우상에 불과한 것이다. 반면 소박한 동양인들은 서구의 물질문명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경외와 선망, 경계와 질시의 시선을 갖는다. 욕망을 자극하지만 선뜻 다가가기엔 왠지 불온한 무엇인 것이다.

 

소설은 이 두 경계가 부딪쳐 마침내 피와 죽음을 촉발하는 사건의 중심에 장마딩을 세운다. 그가 이교도들의 뭇매에 사망하지만 부활하는 것이다. 부활이란 의학적 생체의 회복에 불과하지만 주검과 동일한 몇 일간의 실신은 이교도의 핵심을 무너뜨리기에 더할 수 없는 명분이 된다. 이로 인해 마을 이교도의 핵심 인물이 참수되고, 그의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 왕석류(장왕)의 자기 속박은 집착과 광기, 그리고 원한과 복수라는 분노를 낳는다. 주교는 장마딩의 부활을 숨긴 채 토착신앙 말살 도모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남편을 잃은 여인의 광기는 삼신할미의 현영(現影)이 된다.

 

이것은‘의화단 사건’이라 불리는 1899년 중국 화북지역으로부터 확산된 반제국주의, 반기독교 농민투쟁이라는 무력적 배외(排外)운동이 왜 촉발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스냅사진들이 되어 그 단면들로 이어진다. 내쳐진 장마딩의 고난의 일정들, 의화단 일파들이 벌이는 강간과 폭력, 성당을 에워싼 분노한 농민들, 성당 마당에 누운 즐비한 사체들, 등등이 그러할 것이다. 기독교의 종교적 폭력, 분노한 농민의 저항으로서의 폭력이 충돌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과 서, 토착신앙과 기독교의 화해가 왕석류와 장마딩의 조우로 상징화된다.

 

진실의 속죄를 위해 찾아든 삼신할미 사당, 죽은 남편의 씨를 잉태하여야 한다는 여인의 광기어린 집착은 장마딩에게 참수된 남편의 환영을 덧씌운다. 그리곤 소설은 슬그머니 인간의 몸을 빌려 동서의 물질적 결합을 통한 융합을 그려낸다. 그러나 서양의 유일신 숭배 종교인 기독교는 결코 또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그런 관용의 신앙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장면은 꽤나 이상적(理想的)이고 가능치 않은 낭만적 지점에 멈추었다는 인상을 준다. 게다가 장마딩이 죽음에 이르러 남긴 표제인‘여덟째 날’이 기독교의 신이 7일간 세상을 창조하고 난 다음의 날이라는 뜻에서 신의 손아귀를 벗어난 새로운 세계, 삶의 새로운 의미를 상징하고 있는데, 이것이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한 엄숙한 승인으로서 근대화라는 이성의 맹목성을 거부하는 몸짓인지 끝내 해독하지 못하고 말았다.

 

또한 장마딩의 죽음에 덧씌운 인간의 절망이니 구원이니 하는 임의적인 환상이나, 후에 태어난 혼혈아들이 거룩한 화합이나 되는 냥, 무언가 숭고한 삶의 가치를 말하는 냥 하는 것은 어떤 유치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서구 제국주의의 선도부대로서의 기독교의 폭력성과 비굴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 동양의 현실을 수려한 문장으로 지펴낸 작품임에 이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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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삶 디 아더스 The Others 10
사이먼 밴 부이 지음, 공보경 옮김 / 푸른숲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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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외로움, 이별, 추억, ... 그리고, 미처 알지 못하지만 사랑인 것들. 우리들 마음 저 깊숙이, 아니 의식의 저편에 묻어 둔 감정들. 이것들에게 문득 가만히 다가가게 하고, 꺼내게 하는 향기와 꽃과 바다와 눈과 비, 어느 공원과 쇼윈도 속의 마네킹이기도 하며,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 사물들이 있을 것이다. 그 마주함의 찰나(刹那)가 영겁(永劫)의 시간이 되는 그런 순간이 있을 것이다. 절로 가슴속에 환한 미소가 퍼져나가는 그런 시간들. 이 소설집은 내가 구사할 수 있는 형용의 한계를 훌쩍 넘어버리는 이야기들이다. 그 아름다움, 슬플만큼 아름답다는 말이 어법에 맞는지 모르겠다. 내 몸과 마음이 이야기의 흐름에 젖어드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고 한다면...

 

눈 감고 내 마음에 끝없이 들려주고픈 19편의 장단(掌短)편 소설들이 발산하는 맑디맑은 아름다움이 눈을 떠버리면 속절없이 날아버릴 것만 같아 책을 덮고 가슴에 올려둔 채 가만히 누워있기조차 했다. 첫 번째 수록 작품인「작은 새」의 여백의 여운 같은 이야기의 사물들과 행동들 - 카프로니의 시집, 아르헨티나 지도, 와인병의 동전들, 침대 밑 운동화 - 에 내재된 감사와 존중의 사랑, 그 고아함에 다시금 첫 페이지의 문장으로 돌아갔었으니 말이다.

 

결여, 결핍, 상실, 그리고 이별과 죽음. 이 명사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만, 지나치게 지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것들에 잠재된 삶에서의 무수한 감정들을 헤아리고 있는 것인지 가만히 내게 되묻게 된다. 내가 지금 잃고 있는 것, 그 결여가 바로 이것일 수도 있음을. 아내와 지키지 못한 소박한 여행의 약속이, “그 구두 정말 멋져요” 라고 사랑스런 눈길을 보내던 연인의 진심이, 기차 매표원이 그리다 구겨버렸던 유리창 너머의 이름 모를 여인이, 구두 수선공이 되고픈 어느 소년의 사과 한 개가, 결코 이해받지 못할 여인들의 질투가, 자식을, 아내를 잃은 남자의 고통이, 어느 가난한 남자에게 몰래 전해진 케이크가, 귀가 들리지 않던 아내의 죽음이, 이 모든 것들에서 나는 사람은 상실을 매개로 결합된 존재일 밖에 없음을 보게 된다.

 

상실을 매개로 결합된 사람들임을 깨닫는 순간, 수술대 위에 누운 아내의 결핍을 이해하게 되고, 두고 온 구두를 간직하고 있는 옛 연인의 아픔과 비로소 소통할 수 있으며, 쇼윈도 마네킹이 아니라 구겨진 스케치 속의 여자와 차갑게 얼어붙은 눈 내리는 달 빛 속에서 꼬옥 안을 수 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임자 없이 무성하게 자란 사과나무는 분명 사랑하는 사람이 심었을 거라는 소년의 순박한 대답에서 비루하기만 했던 구두수선공의 삶이 풍부해지고, 질투와 시기로 거북해하던 아내가 제 옆자리의 쿠션을 톡톡치며 남편을 바라보는 그 시선만으로도 사랑은 말없이 풍성해지는 것이다.

 

추운 겨울 누군가 몰래 내준 케이크가 “손을 뻗는 대신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자그마한 손가락 사이로 살짝 케이크를 내려다보는” 아이의 모습에서 더없는 최고의 선물이 되고, 청각장애 아내의 그 결여의 사랑에서 나치 장교인 아버지를 떠난 유태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공허함, 상실의 추억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인생은 소소한 사건들이 모인 박물관 같다.”는 소설 속 한 문장에서, 과거의 편린들, 추억이 발설하는 왠지 아득한 슬픔같은 아름다움의 느낌이 되살아난다. 그래서인지 나는 갑자기 추억에 닻을 내린 채 조금은 뒤쳐져 있고 싶어진다. 그것들에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별과 상실의 이면에 있었던 감정들을, 사랑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사랑을 진정 알지 못했음을 혼자 웅얼댄다.

 

그리고 내 의식의 오솔길을 따라 내면에 은닉되었던 자아와 마주하려는 시도를 해 볼 용기를 내 본다. 누구나 비밀일 밖에 없는 이야기가 있다. 그 꼭꼭 숨겨져 있던 이야기가 마음에서 나오기 시작할 때 우린 그것에서 아름다움과 사랑을 느끼게 된다. 진정함이란 이런 것일 게다. ‘비로소 드러나는 사랑’, 정말 삶의 의미 같은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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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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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율은 생산최적화 사회구조 창조 도구이다!

  - 규율사회의 온순한 신체이기를 거부하는우편 배달원 ‘치나스키’를 중심으로

 

질서, 규범, 법과 제도 등 무수한 이름의 규제 장치들에 익숙해 진 우리들의 몸은 이것들에 순응한다. 이 사회적 장치들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소설의 첫 장은 미합중국 우정사업본부‘복무윤리강령’이 장식하고 있다. 우체국 직원의 행동 규범 수칙이다. 우체국 직원을 위한 것일까? 결코 아니다. 우정사업본부라는 조직을 위한 것이고, 이 조직은 상층부의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운영된다. 사회의 규제 장치들이란 개인인 약자들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 소설을 이렇게 규범 등 사회 규제 장치의 기능이라는 획일적 주제로 몰아감으로써 소설이 발산하는 더 많은 언어들을 사장시키는 편협이 있겠지만, ‘미셸 푸코’에 앞서 이미 ‘찰스 부코스키’가 문학작품으로 개인의 신체와 정신을 억압하는 이들 기능을 통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용될 수 있지 않을까? 부코스키가 만들어낸 현대인의 신체에 새겨진 규범의 감시와 처벌 기능을 거부하는 ‘헨리 치나스키’라는 중년남자, 그의 속물적 여과정치 없이 내뱉는 말, 얽매이거나 애걸하지 않는 행동이 매혹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바로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순응한 몸과 정신, 혹여 보잘것없는 내 것들을 잃게 될까 쩨쩨하고 비루해진 나의 억눌려진 정신이 그로인해 해소되기에.

 

치나스키는 우편 배달원이다. 물론 예기치 않게 수년 후에 우편물 분류 사무원이 되지만, 그의 노동력을 무참히 착취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정규직원이 결근하면 일종의 땡빵용으로 새벽부터 기다리다 집배 순로를 배정받는 ‘보결 배달원’으로 우체국에 입사한다. 게다가 현장 주임의 부당한 처우에 대한 시정을 상부에 요구했다가 오히려 일자리의 위협과 더욱 혹독한 처사에 내물리는 등 시련을 겪은 끝에 정규직 집배원이 되지만, 정년퇴직을 눈앞에 둔 성실한 선배 배달원이 오랜 그의 인고의 삶을 허물어뜨리는 누명으로 고통스러워함에도 우체국과 동료들은 외면하기만 한다. 조직이 그 구성원을 지켜주지 않는다. 자신들의 그 하찮은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 그래서 치나스키는 어렵사리 오른 정규직 우편 배달원을 사직(辭職)한다.

 

우편 배달원은‘사람을 죽이는 노동’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그 육체적, 정신적 혹사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더구나 보결 배달원이란 위치는 생계의 위협이라는 불안함을 내재하고 있기에 비굴함을 요구한다. 설혹 감당할 수 없는 배달물량을 배정받더라도, 폭우가 쏟아져 통행이 가능치 않더라도, 근무시간이 아무리 연장되더라도 감수하지 않으면 곧 불이익이 되어 일자리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 정규직 자리를 과감하게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치나스키이다. 인간성이 배제된, 오직 노동자라는 수단으로만 여겨지는 조직을 인내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기에.

 

몇몇 비평은 이러한 치나스키를‘반(反)노동’의 상징적 인물정도로 묘사한다. 이건 타인의 노동을 이용하여 이익을 향유하기만 하는 자들, 결코 노동을 하지 않거나 아예 모르는 자들의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을까? 치나스키가 경마에 빠져 몇 푼의 배당액으로 술과 무노동을 향유하기는 하지만, 그는 항상 강도 높은 노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요구에도 그 요구의 달성을 위해 시도하고, 또한 완수하는 미덕을 외면하지 않는다. 다만, 획일적으로 설정된 표준작업량의 일회적 측정으로 불이익의 감수를 종용하고, 끊임없이 연장되는 작업시간으로 사람을 단지 노동하는 기계로 인식하며, 어떠한 노동의 부당성에 대한 이의도 허용치 않으려는 무참한 조직에 저항 할 뿐이다. 이것을 반노동이라고 부른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소설은 비정규직의 고통, 노동의 비인간화라는 노동현실을 통해 규범이라는 감시와 처벌의 장치가 인간을 어떻게 길들여 한낱 생산성을 위해 도구화하는지를 거침없이 보여주고 있다. 생활의 달인 어쩌구하는 어느 TV프로를 우연히 본적이 있다. 엄청난 높이로 쌓인 박스더미를 순식간에 옮기는 묘기를 하는 창고 노동자를 비추면서 달인이라 추켜세우는 것이었고, 컨베이어벨트를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제품에서 불량품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선별해내거나, 연말연시에 폭주하는 우편물을 분류하는 우체국 직원의 쉴 새 없는 손놀림을 포착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뻔뻔함이었다. 그들이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오랜 노동의 강도를 읽는 것이 아니라, 생산성이라는 산출물량에 초점을 맞춘 자본가의 탐욕에 기승하는 것이리라. 광고주를 기쁘게 하려는 방송사의 취향이야 이해하지만 노동자들의 노동을 단지 기예(技藝)로 취급하여 눈요깃감으로 둔갑시키는 한국의 주류의식에 이맛살이 찌푸려졌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래, 기예로 보이는 그네들의 숙련된 동작에 가해졌던 감시와 처벌의 규정이 얼마나 오랜 시간 가해졌던 것인지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

 

소설 『우체국』에서 사회적 규제 장치인 온갖 규범들이 감시와 처벌이라는 기능을 통해 사람을 어떻게 길들이고, 현대 자본주의의 효과적인 이익 도구로 사용하는지를 이와 같이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매혹적인 문제의식과 달리 치나스키라는 남자의 여성관은 여성을 남자의 성적 대상 이상으로 인식하지 않는 여성 편력으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다는 점은 허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소설 속에 그의 사실 혼 관계의 첫 번째 아내에서부터 두 번째의 어린 아내, 그의 딸을 나아주는 세 번째 동거 여인을 비롯한 주변의 여자들은 오직 섹스라는 성적 파트너로 등장할 뿐이다. 그녀들과 그의 이상이 진지하게 논의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부부로서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데 인내라는 어떠한 수고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이를 사회적 규범에 얽매이거나 순응하지 않으려는 인간으로서 치나스키를 창조해내려는 작가의 결벽(潔癖)한 의도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혼이라는 사회장치 역시 인간을 속박하는 자유의 흠결중 하나라고 말이다.

 

결국 치나스키는 11년여에 걸친 우편물 분류 사무원이라는 육체노동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로 한다. 이것은 다름 아닌 자기의 발견, 즉 주체를 찾았다는 것이다. 현대의‘규율사회’가 “인간을 복잡하고 규율화하는 복잡한 생산구조 내에서 기능하는 신체 상태로 환원시켜 개인을 모두 유사하거나 혹은 적어도 비교 가능하고 양립 가능한 존재”로 바꾸었다는 푸코의 말처럼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질서에 예속되어 다양성이 배제되고 차이가 제거되어 같아지기를 요구하는 사회에 대한 멋진 저항인 것이다. 오늘의 노동이 동일한 인간으로 변형시키려는 규율사회의 권력에 침식되어 차이를 제거하고, 일탈을 금지하여 시민을 ‘온순한 신체’를 가진 부품화 하는 것이라는 소설 속 치나스키의 외침은 사실 감동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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