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와 집시 창비교양문고 46
D. H. 로렌스 지음 / 창비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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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분량의 이 소설에서 ‘D.H.로렌스’의 잘 알려진 작품들 - 『아들과 연인』, 『채털리 부인의 사랑』,『목사의 딸들』- 의 수많은 잉태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독자로서 예기치 않은 수확이라 할 것이다.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떠나버린 ‘씬시어’였던 여인으로 지칭되는 바람난 여자, 그녀의 남편인 목사와 아들을 바라보는 노파의 교활한 여성적 권력,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는 목사의 두 딸 ‘이베트’와 ‘루씰’등에서 옹졸하고 편협한 습관을 무지하게 휘두르는 쾨쾨하게 썩은 내 나는 중산층의 위선에 대한 집요한 저항과 반란을 보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오늘의 사회가 배태(胚胎)하고 있는 문제들의 해결을 방해하는 본원에는 바로 이 양가적인 ‘중산층 의식’이 지닌 이기심이 놓여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차에, 이 위선의 역겨움을 꿰뚫고 삶의 문제적 주제임을 포착한 작가의 선견에 경외와 공감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소설의 시작부터 뻐근하다. 젊은 남자와 떠나버린 아내, 아내를 잃어버린 목사와 이를 기회로 자신의 권력을 온전히 행사하려는 목사의 늙은 어머니, 고모‘씨시’의 벌레 먹은 마음 등 간교하게 자신들을 신성화한 가면 쓴 인간들의 설명이 숨 가쁘게 이어진다. 짐짓 하찮은 중산계급의 관습적 권위로 치장한 그들의 내면은 추악한 오물로 가득 차 있을 뿐임을.

스위스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스물한 살, 열아홉 살의 어엿한 숙녀가 되어 고향의 목사관으로 돌아 온 루씰과 이베트를 기다리는 것이라곤 이렇게 상식이라고, 관습이라고 못 박아 놓은 편견의 그늘에 앉아있는 병든 내면의 인간들이 있는 곳이다. 그렇다고 그녀들 주위 사람들의 삶의 의식이라 해서 중산계급의 이 틀에 박힌 인식의 지리멸렬함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청혼과 추파가 그녀들의 주변을 서성거리지만 그 편협과 위선의 틀 속에서 어떠한 마음의 동요, 사랑, 활력을 찾지 못한다.

 

 

쾌활함과 영혼의 자유로움을 미덕으로 한 이베트에게 운명처럼 한 남자가 찾아 든다. 마차를 타고 정처 없이 떠도는 집시, 남자의 과감한 시선에 그녀는 자신의 내면이 온통 사로잡히고 있음을 느낀다. 그의 시선에 압도당한 자신의 영혼을. 그리곤 예비역 대령과 재혼하여 마을의 별장에서 꾸밈없이 신혼을 만끽하는 포쎄트 부인의 삶에 내재된 자유의 건강성에 매료된다. 간교와 추악과 편협이란 이기심을 숨긴 채 효성, 아량, 배려, 경건을 내세우는 외면의 역겨움과는 너무도 다른 이들의 생명력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목사는 이베트의 이러한 친교활동에 젊은 남자와 떠나버린 아내의 환영을 투사하곤 그들과 단교하지 않으면 정신병수용소에 보낼 수 있음을 위협한다. 온화함으로 치장된 외면의 가면이 흘러내리고 구린내 나는 위선이 드러나는 것이다.

 

작가의 시선이 몰두하는 것은 이처럼 인간의 생명성을 갈아먹는 당대 중산계층의 인간들에게 만연되어 있는 위선적 습관들이다. 삶을 왜곡시키고 병들게 하는 이중성, 옹색함 들의 면면들을. 결국 눈이 먼 채 경건함 뒤에 교활함을 감추고 목사관의 최고의 자리에 앉아있는 노파를 홍수로 쓸어버림과 동시에 위기에 처한 이베트의 수호자가 되어 그녀를 홍수에서 구해내는 집시의 홍수와의 사투, 그리고 저체온으로 떨고 있는 그녀를 구원함으로써 계층적 몰이해의 편협성을 무너뜨리고 생명력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베트에게 날아든 편지의 하단에 비로소 “아가씨의 충성스러운 조우 보즈웰”이라고 적힌 집시의 이름 한 문장이 왜곡된 삶의 관습을 모두 바로잡아 주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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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해가 지다 AALA문학총서 4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글누림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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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은 인생은‘끊임없이 준비하는 과정’이라 말했고, 어떤 사상가는 ‘선택의 과정’이라 말했다. 이러한 말들은 삶을 충실하게 하려는 이들을 위한 조언으로서 나온 것이지만 사실 그것 자체가 이미 삶이란 고되고 어려운 것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준비하는 것을 잊거나 소홀하면 인생이 기다리는 것은 좌절과 절망의 고통이라는 것이고, 그릇된 길의 선택은 그대로 자기 몫이라는 얘기가 될 것이다. 무엇인가를 하여도, 하지 않아도 인생의 고뇌란 것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모순이 보인다. 아마도 이것이 카뮈가 말한 삶의 부조리일 것이다. 인생이란 이성(理性)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결코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것은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내 머릿속을 관통하던 생각이다. 아등바등하며 보다 우월한 삶의 조건을 성취하려는 몸부림, 그 과정에서 상실하는 것들, 지나치는 것들에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것을 뛰어넘는 삶의 가치들이 있음을. 한여름 강처럼 흐르는 모래사막 위로 번지는 석양의 노을이 인생에서 무엇인지를. 그래서인지‘ 夏日落(하일락)’, 여름 해가 지다라는 소설의 원제(原題)는 대자연의 장관 앞에 외소하게 서있는 인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 군상들의 상징적 인물이 소설 속 중대장‘자오린’ 이고, 지도원 ‘가오바오신’이 되어 그들의 작은 무대를 배경으로 삶의 패러독스를 열연한다.

 

베트남전에서 살아 돌아온 중국군 자오와 가오는 중대장과 지도원이 되어 후방 연대 1개 중대의 지휘관으로, 정신공작 지도원으로 공생한다. 자오는 부대대장이 되어 벽지의 농촌에 있는 아내와 딸에게 도시의 호구를 갖게 하는 것이고 가오는 교도원으로 진급하여 권력의 상층부로 가는 것이 꿈이다. 또한 농촌 출신의 자오, 도시 엘리트 출신인 가오는 이렇게 저마다의 인생의 목표를 향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인생이란 의지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이, 이들의 영내에서 한 정의 자동소총 분실사고가 발생하고 이것이 불이익이 될 것을 예감한 두 사람은 비밀리에 회수를 위해 동분서주한다.

 

여기서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혹여 불만을 가질 만한 인물을 색출하기 위해 일종의 자아비판으로서 서로 자신들의 과오를 밝히는데 이것은 상대에게 순수치 못한 빌미를 제공한다. 이 와중에 열일곱 살 어린 병사‘샤를뤄(夏日落)’가 분실된 총으로 자살한다. 이제 한낱 총기 도난사건은 숨길 수 없는 사건으로 확대되고 급기야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닥쳐올 위기를 회피하기 위해 책임을 상대의 과실로 넘길 구실을 찾는다. 끈끈했던 전쟁 동료의 우정이 질시와 반목이 되어 대립한다.

 

사건 진상 조사팀은 이들에 관한 처리가 결정될 때까지 두 사람을 구금실에서 동거하게 한다. 하나의 공간에 선 두 사람, 이들이 왜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농민이 도시의 호구를 갖게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군대의 경력이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신분상승의 유일한 창구임을, 도시와 농촌의 그 엄청난 계급적 격차와 삶의 조건에서의 간극이란 현실을 쏟아 놓는다. 작가의 초기작인 이 작품이 그의 이후 작품들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사서』『딩씨 마을의 꿈』- 에서 나타나는 사회 비판의식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왜곡된 현실의 중국 공산주의의 부패와 허위를 수면위에 드러내 놓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본질은 이것에 있지 않다. 서로 말 없이 보내던 구금실의 두 사람은 생각에 잠기고, 자신들 과거의 기억을 비롯한 자아, 자기 내면과 마주한다. 도시의 호구란, 진급이란, 내게 무엇인가라고.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이혼까지 한 여인 ‘왕후이’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오, 폭탄에 맞아 자신을 덮친 소대장의 피가 낭자한 잘린 머리의 꿈에 시달리는 가오, 그들에게 질시와 반목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미친 듯이 싸워대던 중국과 베트남의 두 정상이 화해와 협력의 성명서를 발표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삶이란 준비하는 과정도, 선택의 과정도 아닌 것이다. 그저 살아내는 것이지 않은가? 거기에 그 어떠한 정의와 수식도 초라해지고 만다. 샤를뤄가 말한 여름해가 지는 그 장관 아래서 인간이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인생은 곧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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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 지음, 황문성 사진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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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삶이니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사는 것이 힘겹게 느껴질 때면 이런 소리가 절로 나오곤 한다. 이런 상념이 반복되는 데에도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것을 보면 반백년 가까이 살아왔음에도 내면의 수양이 멀어도 한참이나 먼 것임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지를 전혀 모르는 바도 아닌데 말이다. 마침 깊고 넓은 수렁에 빠져 이것을 헤쳐 나오는 데 기력이 많이 쇠잔해 있어 그만 멈추고 그저 영원한 안식에 몸을 맡기는 것이 어떨까하는 즈음에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은 내게 주어진 어떤 계시 같은 것일까?

 

난 용기까지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 더 갈 수 있는 힘이 내게 남아 있는지,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싶을 따름이다. 내가 왜 힘겨워 하는 것인지, 지금의 수렁이 어떤 실체인지, 내부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외부에 있는 것인지, 과연 빠져나와야 할 만큼 삶의 가치란 것이 존재하기는 한 것인지를.

시인의 목소리는 고독처럼 내게 가까운 그것이었다. 나 역시 그처럼‘영원한 외로움과 기다림의 고착물’이라 설명되었던 그의 詩, <입산>의 ‘골짜기’가 되곤 했으니까. 친구가 들려주는 같은 종(種)으로서의 위로 같은 것이라고 할까? 그래서 알고는 있었으나 잊어 버렸던 삶의 이해들을 다시금 상기하고 그것들의 정말의 의미를 가슴 깊숙이 받아들이는 이 과정은 내겐 절실함의 밧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 힘겨움의 본질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책은 절로 나를 이렇게 이끌고 있었다. 마음을 장악하고 있던 질문들 - 그악스럽게 탐욕에 차 소유의 집착을 부리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를 취함을 위한 좌절은 아니었을까? 아님 주변의 온갖 것들에 분노를 뿜어내다 지레 지쳐 버린 것은 아닐까? 아직 견뎌낸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너무 나를 완전하게 채워두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혹여 온통 상상속의 걱정거리가 산처럼 쌓여 미리부터 질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의 답변이 아니라 그냥 듣고 토닥여주는, 바로 그 위로의 언어와 행위만으로도 족했으니까. 그러다 무심히 보았을 문장들이 내 가슴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나는 그것에 밑줄을 긋는다. “내 몫을 그저 있는 그대로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기 시작했다.”

 

내가 내 몫에 만족하고 있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의 일화가 어떤 공명을 일으켰다. 그리곤 ‘빈손’과 “바늘 하나 찌를 곳이 없는 충만을 뜻한다”는 ‘여백’의 가득함과 여유의 이해가 비로소 내 관념의 바다에 안착했음을 느끼게 된다.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한 손은 늘 비워둬야 한다는 것과 영혼의 공간이 형성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의미하는 것을. 문득 오랜 친구가 언젠가 테이블 위의 주먹 쥔 내 손위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포갰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녀는 벌써 여백과 빈손이라는 삶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닐까하고.

 

나는 시인의 문장들을 다시 좇는다. 거기엔 “칼날 인(刃)자와 마음 심(心)이 합쳐진 합성어” 인(忍)자가 “가슴에 칼이 꽂힌 상태를 그냥 견디어내다.”는 뜻과 함께 놓여있다. 세상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글자라는 말의 의미가가 새롭게 다가선다. 내가 생각하는 인내는 아직 어설픈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준비하기 위한 오랜 시간의 견딤이 무엇인지를 내게 새겨두라고 다짐한다. 어부가 찢어진 그물 깁는 것처럼 준비하고 인내하는 것의 의미를. 조급하게 깁지도 않은 그물로 바다에 나가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지금까지의 내 모습은 그러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주어 담을 과실의 적음에 좌절하는 어리석음의 반복이 아니었는지를. 인생이란 바로 준비하는 과정임을.

 

이제 어느 소설가가 썼던 돌돌 흐르는 산 속‘여울물 소리’의 실체가 시인이 말하는 내면의 소리임을 알게 된다. “초가지붕 추녀 끝에 매달린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 그 진리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쥐었던 주먹을 펼치고, “허공으로 날아간 화살은 허공으로 날아간 화살일 뿐”임을, 채움이 아니라 빈 공간을 새겨두게 된다. 삶의 의미와 향기가 그득한, 그리고 위로의 힘이 되어 준 책으로 오래 기억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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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동서 미스터리 북스 52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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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하학적인 작품의 제목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 추상이 이내 구체적으로, 아니 사실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일 것이다. 추리문학에 리얼리즘을 지펴낸 작가의 역량 덕택이다. 그래서 거창하게 그의 소설에‘사회파’란 수식이 따라다니는 터일 것이다. 점을 촘촘히 이으면 선이 되듯이 흩어져있는 정황을 연결하면 거대한 네트워크, 어떤 사회적 연결망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동기와 결과의 끊을 수 없는 인과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끈질긴 인내와 노력을 요구한다. 소설은 이처럼 무관한 점들을 이어 선을 그리는 작업이다. 그 점들의 연관관계를.

 

1. 추리의 구조

 

아마 이렇듯 무심한 ‘점’들의 관계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무심성의 가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무런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것들의, 혹은 그 연결이 불가능하게 생각되는 것들의 관련성과 가능성이 수면위에 드러나는 순간 아~하고 경탄의 외마디가 절로 터져 나오게 하는, 우리들의 믿음을 굳건히 해주는 그런 감동의 견인을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완전범죄’다. 정황적 증거조차도 오리무중이고, 직감과 추정에 의한 용의자의 행선 추적에서도 아무런 흠결을 찾아 낼 수 없는 완벽함만이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 무결점의 완전성이 오히려 범죄적임을 감지하는 경찰의 직관이 소설을 끌어가야 할 정도이다. 분명 범죄로 여겨지지만 범죄로 판단할 근거가 없는 사건, 그리고 확신되는 용의자이지만 사건에 연결시킬 어떠한 빈틈이나 실책도 발견되지 않는 그런 사건이 있다. 바로 이것에 도전하는 것이 이 소설이고, 독자를 흥분시키는 요소이다.

 

큐슈의 한 해변가에 정사(情死)로 추정되는 나란히 누운 연인의 죽음이 뉴스로 전해진다. 그리고 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기차에 오르는 것을 본 목격자가 있어 단순한 정사로 판단하는 데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목격이 예사롭지 않다. 무수한 선로에 들고나는 열차가 쉴새없는 역에서 건너편 기차의 사람을 명확하게 발견하는 것은 사실 가능성이 희박한 이야기다. 소설의 추리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범죄사건이 있고, 그 사건의 용의자로 추정되는 자가 있다. 그 용의자는 사건이 일어나던 날, 사건 현장인 일본의 남단인 큐슈와는 극단적으로 반대인 북부 홋카이도 지역으로 출장을 갔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다. 이처럼 용의자의 증거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짜임새 있게 맞추어져 있다. 이제 독자들은 소설 속 수사관과 함께 이 완벽한 알리바이들의 오류를 밝혀내는 데 동참해야만 하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소설은 더 이상 흥미를 유지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 이 소설은 사건의 범인에 대한 확증은 없지만 누군지는 이미 독자들이 알아버린 상태로 시작되는 구조인 것이다. 그리곤 용의자가 갖추어 놓은 무흠결(無欠缺)의 증거들, 알리바이를 하나씩 파괴해 나가는 작업이다.

 

도저히 깨뜨려지지 않을 것만 같은 완벽한 알리바이들을 깨어나가는 쏠쏠한 재미의 대단함이야말로 이 작품 최고의 맛이라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각종 트릭들마저도 작중(作中) 수사관의 입을 통해 발설될 정도이고 보면 소설을 떠받치고 있는 알리바이의 견고한 조성에 대한 작가가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런 것들을 깨부수는 재미이니 오죽 희열이겠는가. 그런데, ‘알리파이 파괴’라는 추리문학의 이 막강한 테크닉에 리얼리즘이 더해지면서 소설은 현실 속 우리들의 사회와 삶 속으로 파고든다.

 

2. ‘상식의 맹점’을 지닌 현실 사회

 

이제 안개 속에 흩어진 점들이 선으로 연결된다. 관청가의 고급 주점과 여급, 그곳에 드나드는 단골 고객인 중년의 사업가, 말기 폐환자로 요양지에서 소설을 읽고 수필을 쓰며 소일하는 그의 아내, 정부 한 부처((OO省)에서 실무의 잔뼈가 굵은 실무관료와 그의 상급자들..., 소설이 산만하게 뿌려놓은 이러한 배경들이 하나의 알리바이가 파괴될 때마다 하나의 선이 되어 그 실체를 드러낸다.

 

사건의 출발점인‘정사(情死)’란 사랑하는 연인들이 이생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을 마감하기 위해 선택한 결과에 붙인 이름이다. 그러니 여기에 범죄적 시선을 메어두기란 비상식적이란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한다. 아마 이 소설의, 작가의 관심은 작품의 중심구조인 알리바이의 파괴처럼 보통의 사람들이 지닌 이 상식이란 것의 파괴가 얼마나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이해인가를 말하려는 데 있다 해도 무리한 것은 아닐 것이다. 상식이 지닌 맹점을 보여주고 그것의 깨뜨림이 바로 지금의 우리 보통 사람들이 지속해야 할 사회적 책무임을 인식케 하는 치밀한 기획임인 것이다.

 

신문의 지면과 방송 뉴스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들, 특히 정부 및 여타 국가기관을 비롯한 지방자치단체 등의 뇌물수수를 비롯한 각종의 부정하고 부패한 사건 소식이 연일 잇닿는다. 그래서 감사원 결과가 발표되고, 검찰이 일선에 등장하여 엄중한 수사 방침을 말하지만, 매양 사람들이 수긍하기에는 턱없이 미흡한 결과만으로 흐지부지 종료되거나, 말단이나 중간실무자급의 적당한 희생양을 구속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만다.

 

이 현실의 리얼리티를 반영하고자 한 것인지, 용의자의 정교한 모든 알리바이를 무너뜨려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실제적인 아무런 증거도 확보한 것은 없는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추정과 정황의 확신만을 하게 되었을 뿐 법적 증거라 할 수 있는 물증은 확보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부처(OO省) 과장대리의 정사로 부정사건에 연루되었던 해당 부처의 상급자들은 오히려 승진하여 더욱 확고한 권력층이 되었다는 소문만을 전한다.

 

여기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들이 상식이라고 믿고 있는 것, 이것들의 실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사는 모두 자살인가? 다수가 좇고 인정하면 옳은 것인가? 학연 지연 자체는 좋은 건가? 사회적 관습이라고 용인되는 무수한 욕망의 산물들은 과연 정당한 것들인가? 우리들이 인정한 상식 중 엄청나게 많은 것들은 대개 진실과 거리가 멀 것이며, 나아가 부정당하기 까지 한 것일 수 있다. 우린 이 상식의 맹점으로 인해 다수의 실패라는 경험을 반복한다. 이 상식의 파괴라는 다수의 특권을 우리들 스스로 되돌아보는 고통을 수용하지 않는 이상 사회의 건강성이나 정의는 공염불에 그치고 말지도 모른다.

 

소설은 이처럼 현실을 비틀어대는 양 현실적 결과에 이르지 못한다. 결국 실체적 의미에서 영원한 미제(未濟) 사건에 머물고 마는 것인데, 정사는 자살이란 대중의 상식이란 눈높이에 맞추면 당연히 범인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이 작품의 리얼리티가 뛰어난 것이 바로 이러한 작가의 조치이며, 작품의 완성도는 급작스럽게 높아지고, 주제의식은 실천적 철학에 가닿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독특한 추리구조 양식에 매혹되어 책장을 따라가다 보면 사회적 현실과 이성의 무능지대라는 의외의 호소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대단한 작가를 만났고, 흥미롭고 시사성 높은 주제의 작품을 만났음에 흡족한 즐거움을 숨기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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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 내가 나를 쓴 최초의 철학자 몽테뉴의 12가지 고민들
솔 프램튼 지음, 김유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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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이 된 문장의 출처를 굳이 찾아보았다. 몽테뉴가 교조적 신학과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박 을 위해 자신의 수상록<> 1권에 추가한 <레몽 스봉의 변호>라는 에세이 중에서 가까스로 발견했다. 인간이 다른 종(種)에 비해 우월하다는‘당연한 추정’을 극복하려는 일화의 한 토막이다. 고양이가 사람을 데리고 노는 것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당대에 얼마나 전복적인 인식이었을까에 이르면 책의 제목으로 이 문장을 선정한‘솔 프램튼’의 관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몽테뉴에 대한 선입견인 스토아 주의자, 회의론자, 그리고 말년에는 쾌락주의자라는 도식화된 이해를 뛰어넘어 새로운 들여다보기를 예견케 하는 대목이랄 수 있다. 물론 그의 지적처럼 “결론을 추출하는 과정이 아니라 성숙해지는 과정에 가까운” 몽테뉴의 『에세(essai)』에 대해 평생에 걸쳐 써진 글들이기에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초연한 부동(不動)의 경지라는 신념에서 에피쿠로스적 쾌락주의의 성향으로 변모하는 의식의 진행들을 선명하게 목격케 하고 있지만, 이보다는 “인간 이성의 역설적 한계를 집요하게 파고든” 진솔한 사상가의 진면목을 알아차리게 해주는 미덕에 더 큰 무게를 느끼게 한다.

 

그래서 16세기 프랑스의 시대 상황이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는 암흑의 시대였다는 측면에서 몽테뉴 역시 대학살과 전쟁과 죽음이라는 시대의 명제를 피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고난이나 죽음에서 조차 초연해야 하는 아파테이아(aphtheia)를 신조로 여기게 되었다는 기술들에는 그닥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또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와의 격렬한 종교분쟁으로 인한 그치지 않는 혼란이 야기한 지적확신의 상실이 사람들을 회의주의에 젖어들게 하였다는 점 역시 상식적 설명이랄 수 있다. 이러한 시대사적 배경의 해석이 몽테뉴의 에세를 독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역시 몽테뉴라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이해만큼 공감을 자아내지는 못한다.

 

솔 프램튼의 이 책은‘미셸 드 몽테뉴 참맛보기’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제격이지 싶다. 저자의 분석처럼 『에세(essai)』에는 ‘맛’이란 단어는 물론 관련 단어들이 엄청난 빈도로 등장한다고 하였듯이, 또한 몽테뉴 자신의 서문처럼 어떠한 사상적 결과물을 지향한 것이 아니며, 단지 자신의 후손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기 인생을 가능한 여과없이 보여주고 몽테뉴라는 인물을 마음속에 그려주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의 기록이듯이 한 사람의 진솔한 모습을 맛보고 음미하는 작업이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책을 보게 되면 설혹 몽테뉴의 일면 경박함이라든가 중용을 빙자한 모호한 처신, 천박함, 편협성, 그리고 시대적 괴리가 몰고 온 간극이 읽히지만 관용의 시선이 내면에 자리잡게 된다. 그러면 소란스러운 내 비판의 눈초리는 사그라들고 몽테뉴란 인물을 순수하게 접하게 되고, 한 인간의 삶 전반을 스스럼없이 보여준 그에게 경외와 고마움의 마음과 같은 종(種)으로서의 공감의 연민마저 깃듦을 느끼게 된다.

뜬금없는 말(言) 같지만 사람은 자신의 경험의 경지를 넘어설 수 없는 모양이다. 냉정한 스토아주의자가 낙마(落馬)사고로 죽음의 순간을 경험하고서야 자신의 영혼에 대한 인식 유지능력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고 회의주의자가 되는 것을 보면, 이러한 내면의 변화조차 드러내는 사상가의 솔직함이 몽테뉴란 인물에 더욱 매력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에세(essai)』는 테마별로 분류된 수상록이 물론 아니다. 때문에 읽다보면 방대한 분량이 산만하고 지루하기조차 하여 어떤 도달지를 알 수 없어 헤매게 되고 책을 물리게 된다. 해서 몽테뉴를 그야말로 맛만 보고 말게 되기가 일쑤다. 이것을 이 책이 어느 정도 해결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우정, 사랑, 전쟁, 죽음, 인간관계, 동물, 성, 여행, 직업...과 같은 주제들로 구분되어 비로소 한 인간의 생각을 어떤 지속성과 연관성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례로 동물과 관련한 에세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특히 말(馬)은 그것이 주제가 아니라도 빈번히 등장하면서 몽테뉴 삶의 관계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미처 알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했던 생각에 미치게 되는 것과 같다.

 

특히 당대로서는 가히 선도적이랄 수 있는, 아니 위험하기 그지없는 몽테뉴의 이교에 대한 종교적 평등성의 관점이라든가, 멕시코 원시부족에 대해 야만의 옷을 입힌 유럽인들이야말로 야만인이라고 말하는 그의 해학적 비평의식은 신선한 의외의 발견이랄 수 있다. 말을 탄 에스파냐 인에 패배한 아즈텍의 왕이 그들의 말(馬)에게 용서를 빌고, 말이 울음소리를 내자 화해와 휴전의 표시로 받아들였다면서 에스파냐인들은 원주민들이 자신들을 배제한 사실조차 몰랐다고 너스레를 떠는 몽테뉴의 표정에서 인간 우월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양양한 미소를 보는 것과 같다.

 

한편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몽테뉴 사후 2세기가 지나 18세기에 출간된 <<여행 일지>>의 소개가 부연(敷衍) 되면서 『에세(essai)』 내용들의 배경을 알게 되어 그 외연이 확장되는 것이고, 인간의 정신을 육체에서 분리한 근대 기계적 이성주의 효시랄 수 있는 데카르트와 대척점에 놓여 “확실성에 도달하고자 시도하지 않고 인생 그 자체를 정당화하려한” 인류 역사상 인간의식에 손을 댄 최초의 저술가로서의 몽테뉴의 발견이 아닐까 싶다. 아마 이 책을 통해, 아니 몽테뉴로 가는 길의 안내를 통해 “인생이라는 과수원을 거니는 속도를 늦추고 가능한 한 삶의 달콤함과 아름다움을 입안가득 무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 생각”한 인간과 속도를 맞추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점일 것이다.

 

시치미 뚝 떼고 성(性)을 주제로 한 글들의 제목에 ‘베르길리우스의 시구에 붙여’라고 점잖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의 욕구를 솔직히 드러내는 그에게 점점 반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어지는 것처럼, 몽테뉴의 『에세(essai); 수상록』을 꼭 다시금 펼쳐들고 그와 같이 인생의 길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출렁거림을 느끼게 된다. 내 생의 지평을 천천히 지켜보는 여유를 선사하는 정말 맛있는 저술이라 하겠다.

 

[참조] 같이 읽으면 좋은 책 :

1)슈테판 츠바이크 著 <<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2)미셸 드 몽테뉴 著 <<몽테뉴 수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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