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거울 속에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헬렌 맥클로이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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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 해독하지 못한다고 모든 것이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해독 불가능한 영역이 인간에게 불안함과 두려움을 던지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70여 년 전에 쓰인 신비와 초자연적 현상이라 불리는 것들에 대한 인간 이성의 치열한 독해인 이 소설은 바로 경계에 놓인 인간들의 심리적 탐색을 시도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어린 공포의 실체를 과학적 이성만으로 과연 규명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이 해독의 책임자가 정신과 의사인 것은 어쩌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한창 위력을 떨칠 때이니, 작가적 상상력을 그리 탁월한 선상에 놓는 것을 주저하게 하지만, 다양한 소재들을 뒤섞어 발산시키는 이야기의 마력은 가히 이것의 보상을 훌쩍 넘어버린다.

 

배경 또한 한창 감수성 높은 여학교와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중세의 고딕식 음침함이 자리한다. 그리곤 아무런 설명도 없는 일방적 해고를 요구받는 미술 여교사 ‘포스티나’의 당황한 모습이 보이고, 이 의문은 유약한 여성의 심리적 묘사와 그녀에 대해 주위에서 점차 강화되던 경계와 외면의 시선이 더해지면서 불온한 분위기가 지면을 장악한다. 해고 제안에 왠지 항거 하지 못했지만 그 부당성에 좌절하던 여자는 그녀에게서 유일하게 호의를 거두지 않은 동료 여교사인‘기젤라’에게 사연을 하소연 하고, 석연찮은 기운을 감지한 기젤라는 그녀의 연인인 정신과 의사인 ‘배질 윌링’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제 희생자로 보이는 여교사에게 행해진 부당성의 실체를 좇는다. 불안과 분열적 징후를 보이는 포스티나의 대리인을 자청한 정신과의사는 그녀의 승낙을 얻어내고, 그녀를 여학교에서 내 보낼 수밖에 없었던 학교장의 설명을 접하게 된다. 동시에 서로 다른 장소에 존재하는 포스티나를 목격했다는 학생들과 교사들, 하녀들의 두려움에 가득한 증언은 그 설명 할 수 없는 공포로 대체되어 학교의 명망 유지를 위한 불가피성이었다는 항변이다. 그러나 이 유령 현상에 대한 믿음, 심령적 두려움의 근원에 부정한 인간의 의지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과학이요, 합리적 이성이 가지는 판단일 것이다.

 

아마 소설이 단지 이 심령현상의 배후, 그 이면에 은둔하고 있을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에만 몰두하였다면 굳이 더 읽어볼 의욕을 상실해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인간의 정신, ‘거울’로 상징되는 자아의 반영물인 거울 속의 존재, 그 낯선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포스티나라는 여성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나’의 다양한 주체들을 발견하는 즐거움, 그리고 분열된 ‘나’의 집합체를 내 몸속이 아닌 외부에서 마주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존재에 대한 혼란과 의심의 경합은 소설적 재미의 격을 올려놓는다.

 

그런데 서로 다른 시공(時空)에 동시에 존재하는 ‘나’를 오늘의 이성은 수용할 것을 거부한다. 누군가의 착시이거나 음험한 수작이 담긴 장난 아니고서는 과학적 논리에서 설명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이 허무맹랑해 보이는 유령타령이나 도플갱어의 주장은 교활하고 야비한 인간의 폭력성이나 탐욕을 위장하려는 기만적 술책의 다른 언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배질 월링이 포스티나에게 도플갱어의 혐오스런 망령을 덧씌운 몇 가지 합리적인 증거와 용의자를 발견해내고 궁극에 가장(假裝)과 거울을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환영이 정말의 실체로 인지되는 명쾌한 정신분석학적 해부에 이르게 하는 것은 미스터리의 해결과 이성과 심령의 대결이라는 이중적 성공으로 이끈다.

 

한편 스토리를 구성하는 소재나 전개에 있어서도 탁월한 역량을 보이는데, 특히 포스티나의 어머니로 묘사되고 있는 1900년대 고급 화류계 여성과 상류 계급 남성들의 생활양식, 혹은 여학교를 무대로 펼쳐지는 교사들과 학부형들을 통한 여성들의 패션이나 이성관, 문화의식, 그리고 애증과 약자에 대한 혐오가 발산하는 폭력성, 도덕적 문란, 시대를 휩쓴 매춘부와 명문가들의 얽히고설킨 출생 비밀 등 다채로운 일화와 사건들은 소설의 풍미를 한껏 높여준다. 또한 인물, 사건, 심령적 소재의 완벽한 조화와 소설 전체를 감싸고도는 무의식의 어두운 심연같은 음울한 분위기는 알 수 없는 내면의 무엇을 자극하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빠져들게 하고, 사건의 완전한 진상의 수용여부, 즉 과학적 이성과 심령에 대한 믿음의 선택을 독자에게 남겨둔 작가의 중용적 결말도 여타의 미스터리 작품들과 색다른 인상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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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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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성체가 되는 과정에는 탈바꿈이라는 고통의 여정이 있다. 뼈대를 바꾸어 끼고 태를 바꾸어 쓴다는‘탈태(奪胎)’라는 한자어처럼 그야말로 성장이란 잔혹과 공포의 시간이다. 그래서 이성을 가졌다는 인간은 공포와 고통으로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하기위해 무한한 관심과 애정으로 배려한다. 무사히 성장하여 성체의 일원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 이들이 마주하게 될 불안과 두려움을 어루만지고 어엿한 인간 사회의 구성원으로 설 수 있도록.

 

‘수레바퀴’라는 무쇠덩이의 엄청난 무게를 느끼게 하는 이 소설은 바로 이러한 어른들, 사회의 관심 속에 있는 소년, ‘한스 기벤라트’의 삶을 좇는다. 사회에 두각을 나타낸 어떠한 인재도 잉태하지 못한 독일의 한 작은 마을에 탁월한 학습능력을 지닌 소년의 출현은 학교 교장은 물론 마을사람들 전체의 기대를 모은다. 시험과 학교가 요구하는 지식을 위한 그들의 지도와 소년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지역 우등생들의 경쟁에서 당당히 2등으로 상급학교인 신학교에 합격한다. 그러나 소년은 학업에 매몰되어 자유와 기쁨이었던 자연과의 교감, 친구들과의 추억 등과 어느덧 괴리된 현실, 그 상실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든다.

 

탈태의 여정에 있어야 할 두려움과 낯섦에 대한 어루만짐과 관심, 애정의 배려는 자취를 감추고 기성의 권위에 순응하여 규격화된 지식을 축적하는 과정으로의 변질로 탈바꿈 해버렸다. 인간의 아이라는 자연은 오히려 탈태의 고통이 배가되어 버리는 것이다. 친구는 없고 경쟁자만 있으며, 사유와 지혜는 없고 지식만 넘쳐나고, 삶의 의미는 사라지고 살아가는 기술만이 진실이라고 가르치는 교육으로 대체된 현실은 소년이 겪어내야 할 성장의 두근거림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이다. 소년들의 의식을 획일화하고 지배질서에 잘 길들여진 지식기계들의 생산에 열을 올리는 신학교의 생활은 학습에 대한 긴장으로 소년을 만성적 두통에 시달리게 한다.

 

이러한 신학교의 환경으로 인해 점차 고립되고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소년은 동기 집단과 반목하는, 한 자유로운 영혼에 호감을 갖게 된다. 무리와는 떨어져 시를 읊조리고, 신성한 교과서는 그림낙서로 채워져 있으며, 그리스어와 호머와 같은 정규교육에 냉소를 보내는‘하일너’라는 친구를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 유일하게 좇았던 학교지식 밖 세상의 새로운 틈새, 그 자연스러움의 본성을 엿보게 된다.

그러나 학교가 이러한 영혼들에 반감을 갖고 적대시하는 것은 오늘의 우리네 학교현실과 다르지 않다. 기성 권위가 만들어놓은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인간은 바로 그네들의 경계 밖으로 내쳐진다. 이로 인해 한스의 유일한 친구인 하일너는 학교를 떠나고, 두려움과 혼란의 탈태 시간은 소년 홀로 감당해야 할 여정이 된다.

 

신경쇠약 진단이 내려지고, 급기야는 신학교에 다시는 돌아 갈 수 없을 요양휴가로 귀가하는 한스는 고향 집에서 실망하고 있을 아버지의 분노를 예상하며 고통으로 신음하지만, 아이의 좌절보다는 자신의 분노에 타협한 아버지는 신분 상승의 미련을 놓지 못하고 시간의 회복을 기대한다. 소년에서 남성의 문턱에 선 한스는 어린 시절의 충만한 상상력과 즐거움이 사라진 채 불안한 미래, 조급한 시선에서 해방될 수 없는 현실에서 고뇌하던 중 한 처녀의 짓궂은 애정 공세에 마음이 사로잡힌다. 그러나 한낱 성적 대용물이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청년 한스에게 이것은 또 다른 공포와 좌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또 다시 가해지는 삶의 진부함, 아버지의 권유에 의한 기계 견습공으로서의 사회 첫걸음은 결코 도전도, 희망도, 삶의 새로운 의미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선배 기계공들과의 어느 주말의 나들이는 술집과 여자와의 희롱, 수공업자들의 하잘것없는 무용담, 그리고 사라진 꿈에 머물러 있음을 목격하는, 즉 자살이라는 자기 미래에 대한 결심, 삶의 미련이 지워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기성의 권위와 질서의 무게, 사랑이란 감정의 무게, 자기 정체성의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한 미성숙한 삶의 자세가 아니냐고. 그러나 나는 한 아이가 자라고 성년의 인간이 되는 과정을 오직 지식 생산의 터널로 만들어 놓곤 어떠한 삶의 지혜도 가르치지 않는 기성의 무책임함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싶어진다. “저기 걸어가는 신사양반들 ~ 中略 ~ 저 사람들도 한스를 이 지경에 빠지도록 도와준 셈이지요”라는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의 발설을 되새겨 보아야 하는 것처럼. 수레바퀴 위에 꿈과 사랑을 싣지 못하고 아이들이 그 무거운 무게 아래에서 신음케 하는 현실의 우리세계를 돌아 볼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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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열린책들 세계문학 115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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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를 통해 사실을 재현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지 않을까? 작품을 읽는 내내 고미술품 복원가인‘훌리아’라는 여성을 화폭 속으로 매몰시킨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는 한 점의 15세기 플랑드르 패널화와 화가‘피터 반 호이스’라는 허구의 실존 여부를 찾으려 애썼으니 말이다. 그림 속의 체스를 두고 있는 기사와 대공(大公), 그리고 창가에 검은 옷을 입고 책을 읽는 여인, 이렇게 세 명의 인물에 내재된 은밀한 역사의 암시는 화자와 더불어 그림의 세계를 거닐게 된다.

 

경매를 위해 복원작업을 준비하던 훌리아는 화가가 그림으로 덮어버린 한 줄의 라틴어 문장을 발견한다. “누가 기사를 죽였는가?” 이 의혹 가득한 문장은 화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되고 그림 속 인물들의 정체와 그들로부터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소명의식으로, 또한 미술품에 대한 진정한 가치의 부여라는 사명까지로 발전한다. 헤어진 고미술사가를 찾아 작중 인물들의 역사적 실존 여부와 자료를 건네받고,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같은 보호자인 골동품 상인인‘세사르’를 찾아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소설의 뛰어남은 바로 이 지점부터 시작하는 듯하다. 500 여년전 중세의 사건이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삶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화폭에 그려진 체스판과 말들의 위치와 주인공이 된 인물들의 삶과 죽음에 얽힌 진실이 교섭하고 있으며, 체스가 인간 삶의 또 다른 상징계로 현실과 교호(交互)하는 것이다. 체스판에 투영된 삶의 생생한 진실들 속으로.

살짝 관심이 느슨해질 쯤 해서 긴장을 죄려는 듯 그림 속 인물들의 사적(史的)지식을 알려주던 옛 연인의 죽음이 알려지고, 자살과 타살을 가늠할 수 없는 애매함이 그림의 진실과 관련한 어떤 위기감을 전달한다. 사자(死者)와 관련 되어 확인되지 않는 금발의 여인, 그림이 지닌 사료적 가치의 발견으로 상승할 경매가에 따른 배후 인물들의 존재로 훌리아는 불안한 일상에 놓인다.

 

그녀가 유일하게 신뢰하는 세사르는 그림의 진실과 현실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최고의 체스 전문가를 훌리아에게 소개하고, 체스꾼은 그림에 나타난 체스 말을 통해 복기를 시도한다. 화가가 숨겨놓았을 진실의 확신을 가지고. 또한 소설은 그림에 담겨진 해박한 역사의 지식으로 안내한다. 피살된 기사, 밝혀지지 않은 범인과 배후, 그리고 기사의 연인이었다는 스캔들을 지녔던 대공의 부인, 그래서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기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임을. 그러나 그 애도에는 기사의 살해를 사주한 자로서의 회한, 이 불가피한 선택에 내재된 여인의 사랑과 배신의 고통스러운 양가적 감정이 배어있음을. 이것이 복선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거의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이지만 바로 이것이 이야기의 방향을 여러 갈래로 분기하게 하여 다양한 인물들과 사건, 상황 모두에서 높은 서스펜스에서 풀려나질 못하게 한다.

 

그림에 새로운 사적의미가 더해지면서 경매를 둘러싼 커미셔너들, 경매시장에 내놓은 노회한 소유자와 속물적인 그의 조카들의 탐욕스런 음모와 암투가 진행되고, 옛 연인의 사인을 좇는 경찰의 어설픈 암행까지 겹치면서 그림 속 ‘흑녀’의 살인 사주는 현실의 모습과 흡사 닮은꼴을 이룬다. 체스 말의 다음 행보가 적힌 쪽지가 그림과 관련 인물들의 미래를 암시하듯 훌리아에게 전달되고 보이지 않는 인물과의 체스 대결이 현실과의 경계를 허물고 죽음을 건 게임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소설은 이처럼 중세 예술작품의 독해와 고미술시장을 둘러싼 부르주아적 탐닉이 돋보인다. 그래서 엘리트주의적 지성의 흥미로움이 환상적 즐거움을 제공하지만, 그림 속 인물들이나 현실의 인물들 모두에게서 발산되는 고뇌 역시 부르주아적 낭만과 향락으로만 가득하기에 리얼리티의 취약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예술품의 재화적 가치, 즉 상품으로서의 가치보다는 걸작 회화의 역사적이고 미학적인 해석에 열중이었던 훌리아라는 여성이 그림과 관련하여 자신의 근친이었던 두 사람이 살해되었음에도 정작 체스 판의 흑녀를 현실에서 마주하고, 그 전략적 의미와 현실적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의 반응에서 어떤 도덕적 전망도 존재하지 않음을 보게 되는 것은 이 작품에 깊은 회의마저 품게 한다. 물론 소설은 주장하고 있다. 훌리아의 보호자로서 의무를 다하는 세사르에게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써 훌리아에 대한 이성적 사랑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중년 남자의 양가적 감정을 대공녀의 고뇌에 중첩시키는 것이다. 사랑과 현실의 선택, 인간 앞에 놓인 이 오래된 딜레마의 멋진 승화를 보여주고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결국 술책적 삶을 미화하고, 위선의 미덕을 칭송하는 것, 세상 전체가 비즈니스적 삶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오늘, 물신주의의 속살을 비추려한 역설이었다고.

 

이러한 혹평이 가능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가공의 걸작 회화를 탄생시키고, 이것을 풍부한 미술사적 상상력에 담아 쏟아내는 미학적 해석은 가히 탁월하며, 더구나 그림 속 체스의 장면이 현실의 전략적 행동으로 되살아나면서 삶의 투쟁과 위선, 사랑과 죽음의 의미로 이행되는 환유(換喩)적 기법은 기발함 그것이라 하겠다. 암시와 트릭, 복선마저 그 임무를 드러내지 않고 마지막 행으로 이끄는 이야기로서의 재미 또한 압권임을 실토치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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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6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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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있음, 본 리뷰는 귀하의 독서 재미를 박탈할 수 있습니다]

 

이치라는 것이 있다. 당연히 세상의 순리가 자기 자리에 맞게 들어서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런데 이 말을 곰곰 생각해보면 터무니 없는 독선이 보인다. 사람의 수가 늘어나면 그 순리라는 것이 그 만큼 늘어난다. 그 순리에 대한 믿음은 충돌하고 이내 갈등하게 된다. 내가 당위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대에게는 당위가 아닌 것이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인 '경우' 또한 이와 같은 용법을 지닌 말이 아닐까. '사람이 경우가 없어'라고 상대를 비방하는 표현에는 다분히 주관적인 자신의 분별력과 이치에 대한 거슬림의 감정이 있다. 그러나 상대는 오히려 자신의 판단에 어떠한 그릇됨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기준에 작용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도덕 원칙으로서의 정의일까? 아니면 단순히 감정적 불쾌를 나타내는 질투나 시기심, 혹은 무례함이나 불합리성, 균형감의 파괴에 대한 불만일까? 이미 <고백>이라는 걸출한 작품에서 변질된 자기애라는 인간의 내면에 괴물화된 이기심의 형태들을 깊이있게 투영하였듯이 비록 돈독한 신뢰관계로 인간 상호간의 심리적 교량이 있을것이라는 이해에도 불구하고 이를 초월하는 또다른 형식의 자기애라는 인간 심리와 마주하게 된다. 아마 이것의 실체를 작가는 경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러하니 애초에 이 주관적 판단을 전제로하는 심리적 행동은 펼연적으로 오류를 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보육원과 아동보호시설에 맡겨진 두 여자 아이들은 성장하여 우연히 보육시설의 봉사활동을 하다 서로의 처지를 알게되고 우정을 쌓는다. 그리곤 파란 리본과 함께 맡겨진 사연을 나누고 그 리본의 반을 잘라 요코, 그리고 하루미, 두 여성은 새로운 가족이상의 의미를 교환한다. 이것은 아름다운 소재가 되어 지방의원의 아내가 된 요코에 의해 <파란하늘 리본>이라는 제목의 동화집으로 출간되고,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오른다. 신문사 기자가 된 하루미는 사전 허락없이 자신의 사연을 출간한 요코의 이유있는 사죄를 허물없이 보듬고 대중적 지지를 보내준다. 그러나 지방의원의 아내이자 유명동화작가가 되어 분주한 날을 보내던 요코를 시샘하듯 불온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녀의 어린 아들 유타가 유괴되고 비밀을 공개조건으로 아이를 살려주겠다는 협박장이 선거 사무실로 날아든다.

 

이의 원인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지방의원인 남편의 비서인 아키라는 여성, 후원회장인 아키의 아버지인 고토, 남편의 부정선거 자금의혹을 고발했던 내부자인 남편의 오랜 지기, 요코의 결혼을 여전히 마땅치 않아하는 시어머니 등등이 얽혀 의혹자는 점차 확대되고, 사건은 남편의 부정선거 자금의 비밀을 밝히라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거듭 날아든 협박장은 점차 요코쪽으로 방향을 겨눈다. 요코는 아이의 무사한 귀환을 위해 자신의 출신에 얽힌 모든 진실을 공개하기로 결심한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진실을 알기위해 그녀는 자신의 출생시기와 보육원에 맡겨지던 시절과 일치하는 한 살인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의 자취를 좇고, 의혹의 여인을 알아낸다. 모든 정황적 증거는 그녀가 살인자의 딸임을 가리킨다. 그리곤 유명 TV프로그램의 인터뷰 방송에 초대되고, 자신이 30여년전 살인사건 가해자의 딸임을 밝히고 자식으로서 피해자와 그 유족에게 사죄와 책임을 다할 것임을 호소한다.

 

소설은 본격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가족을 이루고 행복한 미래를 펼쳐가던 그녀에게 과거의 진실을 구태여 알게하고 행복을 박탈하려는 유괴범의 저의는 무엇일까? 하고. 대체 범인은 요코에게 어떤 분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의 정체를 마주하는 순간 아~하는 자조적인 탄식을 하게 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불신 때문일까? 무언가 있어야 할 위치에 있지 못하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삶의 질서가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것, 이러한 인간의 본원적인 '경우'의 원칙은 대체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희생자일 뿐인 버려진 아이였던 요코에게 불행의 진실을 알게하는 것이 경우를 지키겠다는 도덕적 혹은 감정적 미덕을 지키는 정의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아무튼 사람의 심연을 지배하는 의식의 요구는 이기심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일까? 하는 곤혹스러운 자문을 하게한다. 경우를 주장하기 보다는 그 경우의 배경을 진솔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말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미나토 가나에의 인간의 자기애에 기초하는 또 하나의 세밀화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우린 타인의 행복에 무심할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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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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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저널리스트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저임금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빈곤의 늪을 사회구조적으로 파헤친 유명한 저술『노동의 배신』 의 한국판 번안이라고 해야 할까? 집필자에겐 이러한 비유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결코 폄하하려는 의미에서의 진술이 아니다. 한국의 현실이 신자유주의 선봉국인 미국의 노동생태계와 한 치의 차이도 없이 닮은꼴이기에 떠오른 생각에서 일뿐이다.

사회의 불평등 성향이 짙어질수록, 또한 대중의 상상력이 퇴화할수록 빈민의 존재는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얘기되곤 한다. 이렇게 그 존재에 대한 이해가 결핍되어 있다보니 자연 이러한 상황을 사회구조적으로 고민하려는 시도가 어렵게 되고 만다.

 

그래서 돼지농장, 꽃게잡이, 공장노동의 현장에 자기 육체와 삶의 현실을 오로지 바치는 체험의 수기는 이 사회에서 눈에 띄지 않던 실체들의 진실을 비로소 보이는 것으로 말해주는 숭고함을 지니게 된다. 바로 이 고발은 가난, 빈곤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속살을 보여준다. 가진 자들,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몽매함과 이기심을 얹어 빈곤을 의지의 결핍으로 치부하는 것의 무지와 오류를 밝히는 작업으로서.

빈곤을 왜곡하려는 가진 자들의 몰염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치질 않는다. 보수언론은 틈틈이 복지의 보편적 확대정책에 각종의 흠집을 내기위해 발악을 하면서 수십조에서 수조원에 이르는 개인적 부를 축재한 재벌의 탐욕을 지키려고 혼신을 다한다. 점차 가난이 대중화되고 빈곤이 만성적이 되어감에도 이 그릇된 구조의 근본적 틀을 다시 잡으려는 시도는 어디에서도 가능치 못하게 봉쇄되고, 어느 노인의 말처럼 자본주의가 아니라 ‘反사회주의’가 바로 한국의 이데올로기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의 진실 일 것이다.

책에 소개된 체험의 일화들은 한결같이 육체가 무너져 내릴 정도로 노동을 해도, 정신이 손상을 입을만큼 고통을 받으며 일을 해도 먹고살기가 더욱 힘겨워지며, 노동을 할수록 가난해지는 이 사회의 실상이다. 이 노동자들에겐 삶에 여가다운 여가를 즐길 시간도 돈도 허락되지 않기에 그들이 헛된 지출을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생명장치를 유지하기만 하는데도 이러하니 이것이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럼에도 사회를 위해 책임의식이라곤 한 번도 지녀본 적 없는 자들은 저임금 노동자들을 게으르고 의존적인 계층이라고 매도한다.

 

이 같이 이미 열심히 일해도 가난해지는 구조가 정착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우기는 세력들을 보면 이 사회에 뿌리내린 저임금 노동의 현실은 아마도 당대에는 사라질 수 없지 않을까하는 절망적 관망까지 하게 한다. 만성적 빈곤으로부터 헤어 날 수 없게 구조화된 저임 노동시장의 생생한 체험의 기록은 그래서 권력이 왜곡시켜버린 이 부정적 구조를 가능한 시급히 교정하라는 안타까운 구조신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이 사회에 대한 신뢰가 손상되어서는 위험하다는 신호 말이다.

체스의 말(장기 의 卒에 상당)이 한 칸씩 움직여 상대측의 마지막 선에 도달하면 여왕적 지위를 갖게된다는 저자의 바람을 온전히 담은‘퀴닝(Queening)'과 같은 획기적 전환은 아니더라도 노동에 정당한 대가가 주어지고 그를 통해 성실한 한걸음이 쌓이면 보다 나은 삶, 희망이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구조적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 땅의 저임금 노동현실,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구조는 노동자들의 의지의 결여가 아니라 희망을 지닐 수 없게 만드는, 희망의 결핍을 강요하는 왜곡된 구조임을 선언하는 저자의 수고에 지지를 보내게 된다. 빈곤 지수가 매년 나아지는 그런 사회를 위해 새 정권은 MB정권의 탐욕스런 부자정치와는 다른 행보를 할 것이라 억지스런 기대를 가져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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