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기술 멈퍼드 시리즈 3
루이스 멈퍼드 지음, 박홍규 옮김 / 텍스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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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문화비평가의 예언적 비판이 오늘에 더욱 새롭게 읽히는 것은 왜일까? 당시 급진적이라는 비판을 받기까지 한 기계주의적 물질문명의 폐해는 오늘 더욱 분명하게 인지되는 실제가 되어있다는 의미에서일 것이며, 오히려 적기의 담론이기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금의 세계는 획일성, 규칙성, 기계적 정확성이 인류 역사의 어떤 시기보다 비범한 수준에 이른 사회이다. 이러한 기계주의적 특성이 인류를 물질적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인간적 가치의 근원인 ‘반복적 질서’에 대한 이해가 맹목적 운명에의 굴종에서 빠져나와 생존적 안정감과 자기 치유적 가치의 발견에 중심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기계적 규칙성이라는 도구로서의 기술에 너무 비싼 대가를 치렀다는 보상 심리가 지나쳐 인류 문명의 한 축인 미적 상징으로서의 예술, 인간의 주관적 세계를 박탈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은 파편화된 인간들의 소통부재, 권력과 돈에 대한 강박적 신경증, 정서적 불감증, 활력없는 수동성과 위축된 욕망의 삶, 물질적 부품화 된 대체 가능물로서의 인간과 같은 비인격적 질서가 인간을 압도한 인간성 상실의 음울함으로 그려내는 오늘의 담론에 다름 아니다.

책은 이처럼 현대문명의 과도한 과학기술에의 집착이 인간을 반복과 단조로운 행동에 내몰고, 규율과 규칙성에 종속시켜 폭력적 소외와 무감각 상태에 매몰시켰으며, 그 결과 윤리적 기준과 절연되고, 의식과 유리되어 자기 파멸적, 인류 문명의 치명적 파괴로 내닫는 물질 종속의 불구화된 인류 사회의 재생을 위한 경건한 문명 통찰이자 제언이라 하겠다.

 

적은 분량의 저술이지만 매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는 삶의 새로운 시선들과 가치로 응축된 기술(記述)이어서 어느 한 문단이라도 빼놓고 서술한다는 것은 결코 이 책을 제대로 말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인간적 가치의 양축인 인간의 주관적 세계인 상징으로서의 예술(art)과 객관적 세계인 기계적 질서로서의 기술(技術; technics)의 균형을 찾기 위한 인류의 자각과 인간성 회복과 자기 억제를 향한 현상적 비평과 방법론적 제안이라는 대의로 정리하는 것이 그나마 양심적이고 책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소개가 될 것이다.

 

부연한다면, 인간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단순한 그림자로 축소되어 본연의 상상력과 생존능력까지 상실하기에 이른 오늘의 세계에 대한 다각적이고 신랄한 비평으로서, 물질, 권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요, 정서적 미성숙자들이 판치는 과도한 객관성이라는 폭력적 무지에 대한 질책이다. 또한 인간다움의 복원, 즉 삶의 의미 있는 순간을, 풍부성을 인간에게 되돌려 주기위한 기획이라 할 것이다.

 

다만 예술의 한 지류인 문학을 주목하는 법인(凡人)으로서 ‘예술발전 3단계’의 설명을 통해 예술가와 예술의 형식과 위상의 당위성에 대한 비평은 이 자리에서 정리해두고 싶다. 이 욕구는 더욱 전체주의화하는 한국인의 의식세계와 한국문학의 근작(近作)들에 대한 독자로서의 아쉬움에 기인한 것인데, “인간 손아귀에서 너무 빨리 벗어나거나 무의식속으로 침전될 수 있는 경험의 소중한 부분들을 더욱 영속적인 형태로 만들고 강력하게 투사하고자 하는 욕구”로서의 예술이라는 기초적 정의에는 부합하지만 정말 지고(至高)의 예술 작품은 왜 발견할 수 없으며, 정신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획일화하려는 권력의 의지는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의 답변을 비로소 찾아낼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이다.

 

즉, 이것은 왜 한국의 주류 담론이 편협하고 획일화된 전체주의적 폭력성에 경도되고 있는가에 이르게 하고, 예술다운 예술은 실종되어 고작 유아적 자기 동일시의 세계에서 허우적대고 있는가의 현주소를 확인케 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의 기본은 ‘멈퍼드’의 지적처럼 자기몰두, 자기 동일시로부터 시작된다. 이를테면 ‘나 좀 봐줘’라는 자폐증적이고 유아기적인 자기애가 예술의 1단계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 여기에 머물고 만다면 예술의 소통능력과 나아가 새로운 삶을 가져오는 예술의 유대형성으로서의 능력을 찾을 길이 없어진다. 성장하지 못하고 멈추어버린 미숙함, 혹은 아이로서의 퇴행적 양태를 보일 뿐이다.

 

요즘 한국문학을 보면 많은 작품들에서 아래와 같은 부정과 증오의 퇴행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나 자신을 미워합니다.” “세계를 증오합니다.” “당신을 미워합니다. 죽어버려라!” 이처럼 자신을, 세계를 절망의 상태로 몰아가는 광적 폭력, 공허한 자기파괴만 있는 것인데, 이것은 오직 예술가 자신만을 위한 약효밖에 없음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정서적 미성숙, 아마 사물, 도구, 객관에 편중된 교육으로 양육된 기계주의적 물질시대의 소산일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주류적 담론을 형성하는 미디어 매체에서도 동일하게 발견하게 된다.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아이의 옹알거림, 이 원시적인 자폐증세가 오늘 한국의 정신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여기에는 상호소통이란 존재할 수 없다. 유아적 자기애만 있는 세계, 공포와 불안, 폭력적 무지, 독선만이 넘실댄다.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 파시즘의 음울한 세계이다.

 

예술 발전의 2단계는 비로소 ‘나 좀 봐’라는 단순한 주목의 세계에서 인정받는 무엇인가를 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기과시가 상호소통으로 나아가는 단계이다. 즉, 사회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물질 기술사회가 상실한 ‘사랑’, ‘인간의 유대’를 회복키 위해서, 특히 미적 상징의 본질적 특성으로서의 예술의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전히 미흡하다.

예술가의 자아는 예술작품에 용해되고, 작가의 개성과 문화의 한계를 초월한, 즉 자신의 상실이라는 더 높은 힘과 대리자로의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전인격적으로 삶 전체를 감싸 안고, 삶의 비극적 모순을 유화시키는 그런 것으로서. 우리에게, 인간에게 진짜의 삶을 돌려주기 위해 삶의 양면을 극복하고 자기를 내려놓는 그 완전한 책임의 세계를 체험 할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나는 교만하게도 자신은 ‘객관적’인 지성을 갖추었다고 말하는 쓰레기 같은 일부 종편채널 등 미디어의 패널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고 싶다. 객관적이라는 말의 뜻은 ‘자신만의 감정이나 충동, 의욕을 갖지 못하거나 그런 것들을 습관적으로 묵살하는 성향’일 뿐이라고. 더구나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주관까지도 포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임을. 바로 이 주관을 결여한 세계, 미적 상징을 과소평가하고, 자본과 권력, 물질에 정신을 내어준 세계, 이 불구의 세계가 이들이 말하는 객관적 세계인 것이라고. 예술이 실종된 세계, 바로 그것이라고.

 

이러한 무지의 악의가 인식을 지배하는 사회에 혐오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의 배척에 대한 불복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몸 자체를 왜곡하고 해체하는 예술가들의 자기부정, 자기증오의 노골적 투사로 예술을 비정상화하는 도피의 세계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인간 삶과 정신에 어떠한 새로운 형식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지금 예술은 잃어버린 삶의 요소인 인간성 회복에 자신을 내놓아야 할 때인 것이다. 자기애의 부정도, 자기애에 정지해서도, 그리고 고작 소통에 안주해서도 될 일이 아닌 것이다. 공리적, 합리적 관심이 미적 관심을 압도하는 비인격화된 물신의 세계는 예술만이 구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세계는 잠시 정지하고 상징의 세계를 복원하기 위한 혹독한 자기억제의 노력이 언제쯤 공감과 실천의 발걸음 내딛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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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세트 - 전2권 열린책들 세계문학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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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임을...”

 

이 작품을 읽다보면 인간 정신의 교만성과 권력 장악의 역사로서의 인간사를 끊임없이 떠올리게 된다. 인간의 지식과 권능이란 것이 하잘것없음과 능멸스러움에 터잡은 미망(迷妄)에 불과한 것임을.

소설은 중세 이탈리아 북부의 한 수도원을 배경으로 그야말로 찬란한 지성과 겸허의 미덕을 장착하고 가히 탐욕스럽게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하게 한다. 독서의 쾌락, 읽는 즐거움의 지고함을 또 어디서 경험할 수 있을까? 스러져가는 소설 속 수도사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서책(書冊)이 이만할까? 불온하면서도 성스럽고, 악마적이면서도 신성한,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상호성의 세계에 흠뻑 취하게 된다.

 

소설은 수도사 아드소가 젊은날 수련사로서 고승인 ‘베스커빌의 윌리엄’이라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를 보좌하면서 겪었던 7일간의 격동적인 역사의 기록물이라는 형식을 하고 있으며, 구성은 두 줄기의 커다란 서사를 지니고 있다. 그 하나는 수도원 장서관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수도사들의 잇단 의문의 죽음이고, 이 사건의 조사과정을 배경으로 교황청과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소유냐, 청빈(淸貧)이냐’라는 그리스도 삶의 해석이란 종파갈등을 통해 이의 외피인 교만과 탐욕을, 은닉된 본질로서의 독단과 권력의 사상(事象)을 관찰케 한다.

 

수도원장으로부터 필사본 채색사였던 수도사의 의문스러운 죽음의 소식을 접한 윌리엄 수도사는 사건 조사에 착수하지만 죽음은 잇달아 발생하고, 해석갈등의 중재 장소로 합의된 수도원에 양 종파의 대표단 회의일자가 임박한다. 프란체스코회의 종파들을 이단으로 몰아넣기 위해 혈안이 된 교황의 주구들에게 수사들의 죽음은 좋은 먹잇감이 된다. 예견되었다는 듯이 수도원 식료계 수도사가 시약소 본초학자인 수도사를 살해한 혐의로 교황청 이단 심판관에게 체포되기에 이르고 이들은 체포된 수도사를 청빈의 극단적 실행 세력인 이단으로 몰아 청빈을 주장하던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여기서 한낱 교리해석의 진실주장은 권력을 장악하기위한 암투의 수단 이상이 아님을 드러낸다. 신(神)에 대한 복종과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유지에 장애가 되는 모든 세력을 한데 뭉뚱그려 ‘이단(異端)’이라는 불모의 굴레를 씌워 버리는 것이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베르나르 기’라는 교황청 주구인 심판관이데, 왜곡된 정의를 앞세워 탐욕을 성취하는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타인의 사용을 배제하는 권력을 본성으로하는‘자본(資本)’이라는 물신(物神)에 대한 주류와 비주류 경제학의 해석과 닮아 있으며, 종북이라는 기호를 통해 반대자에 대한 무자비한 폭언과 폭력을 자행하는 수구세력의 책략과도 같은 모습이다. 이단 심판이라고 하는 무자비함은 가짜 그리스도가 판치는 요한계시록의 음울한 예언에 가닿는다. 더구나 “전체에게 전체로서 온다!”는 탐욕스런 다중(多衆)의 오염된 정신세계에 대한 경고는 결코 오늘의 세계도 피해갈 수 없는 진리가 아니겠는가?

 

이것은 수도원 장서관을 중심으로 잇달아 살해된 수도사들의 주검의 동기에도, 윌리엄 수도사의 사건 조사방법에 자리한 시행착오에도 잇닿는다.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창세기」와 달리 우주창조의 역사를 자연의 이치로 해석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의 열람을 막기위해 지식을 갈망하는 수도사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영혼의 교만, 자신의 믿음만은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유일한 진리의 해석자임을 자처하는 독단(獨斷)이 바로 악마성(惡魔性)임을. 또한 요한계시록의 7가지 죽음이라는 가상의 질서에 현혹되어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게 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인과관계와 같은 관계성이나 논리, 질서를 좇는 몽매한 족속인가를 확인하게 한다. 무관계한 관계창출, 질서없음이라는 혼돈의 상호작용과 같은 무질서의 질서라는 초월적 권능의 세계를 넘보는 인간 지성의 초라함을.

 

이러한 묵시록적 서사의 진중한 압박에도 소설의 세계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는 흡입력은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자로서 상징과 언어를 통한 수많은 기호의 해석과 중세 기독교의 신학논쟁을 둘러싼 다양한 교리와 사유의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지적 만찬에 기초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불모(不毛)스러운 탐욕으로 연이어 희생되는 수도사들의 죽음의 동기에 도사리고 있는 음험한 독단의 실체에 이르는 풍부한 내적 사유와 쾌락을 준비시키는 팽팽한 지적 긴장감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소설의 중심 소재인 장서관과 비밀의 서책은 진리해석자로 자처하는 장님 노(老)수도사 ‘호르헤’를 통해 믿음의 독단성이 지닌 허구성과 그 본성으로서의 은폐된 폭력성, 권력 지향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묵시록의 피날레, 소설의 걸맞은 대단원으로서 수도원 본관, 요사, 장서관, 교회 등이 불타오르는 장엄한 광경은 인간정신의 정화(淨化), 가히 완전한 소설적 완성의 경지, 그야말로 압권이랄 수 있다. 한 때 신성한 최고의 수도원이었으나 잿더미의 폐허가 된 옛 수도원 터를 맴도는 적막과 적멸의 기운은 어느덧 영혼의 무화(無化)를 기다리는 노수도사가 된 아드소의 신성을 향한 겸허를 더욱 선명하게 분별없는 내 작은 가슴에 새겨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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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관한 세 편의 해석 을유세계사상고전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오현숙 옮김 / 을유문화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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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성적이탈>, <유아 성애> 그리고, <사춘기의 재구성>이라는 3편의 정신분석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신분석이란 모든 정신적 증상을 생애사적으로, 또한 무의식적인 결정요인으로 보고 거슬러 추적하는 것임을 확인하는 작업이라 하겠다.

또한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며 신체적인 쾌감, 충동적인 욕구와 즐거움, 사랑 등의 심리성적 에너지인‘리비도’의 추동과 억압이라는 성적(性的) 결정요인을 인간의 정신적 조건임을 전제하고 있기에 성애(性愛)의 발달 단계에 대한 이 논문들은 아동 및 청소년의 양육은 물론 부모의 자세, 나아가 성인으로서 자신의 정신적 건강상태와 성적행태의 정상성(正常性)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1. 성적 이탈에 대해서

 

이러한 배경에서 유아나 사춘기의 성애를 말하는 것과 달리 ‘성적 이탈’에 대한 내용을 처음에 위치시켜 무엇이 정상인가를 이해하고, 그래서 이탈적 현상들 - 도착, 변태와 같은 - 이라 말하는 것의 본질이 무엇이며, 이것들이 어떠한 정신적 발달의 기원을 지니고 있는지를 납득케 하고자 하고 있다.

이것은 성적이탈, 특히 성 도착이라는 일종의 질병적 명명 하에 도덕적 불용과 비난의 굴레를 씌우고 있는 것들이 어떻게 잠재되고 발현되는 것인가를 통해 시기적, 원인적 규명과 인간의 이해를 확장할 수 있도록 함에 있다.

 

성도착은 ‘성 대상 도착’과 ‘성 목표 도착’으로 구분되는데, 성 대상 도착은 자기애, 동성애, 이성애와 같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가이며, 성 목표 도착은 페티시즘이나 사디즘 혹은 마조히즘처럼 성 대상을 상대로 중도적 상태에서 과도하게 지체하거나, 본래의 성 목표를 포기하고 부적절한 대체물에 집착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여기서 주목할 첫째 물음은 이러한 모든 것들을 ‘도착증’이라는 정신적 질환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결론은 ‘그렇지 않다’ 이다. 성 대상이나 성 목표 도착이 건강한 사람 모두에게 일반적으로 해당된다는 것이다. 단지 어느 지점부터가 소위 질병적이냐는 과제만 남는다.

 

우선 성 대상 도착의 하나인 동성애만 하더라도 인간의 양성적 본성이라는 생물학적 사실을 전제하면 무조건 질병으로 단정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어머니(여자)와의 접촉으로 생을 시작하고 대부분의 인간은 그 품에서 애정을 받으며 성장한다. 여기서 아동기에 어머니에 대한 고착상태에서 멈추어버리면 자신을 여성과 동일시하고 스스로를 성 대상으로 삼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자신을 여자로 느끼고 행동하는 ‘주체적 동성애자’가 되거나, 완전히 남성적이면서 다만 성 대상으로 여성 대상자를 남성인 동성 대상과 뒤바꾸는 ‘대상적 동성애자’로 나뉜다. 그런데 전자인 주체적 동성애자는 ‘성적 중간인’으로서 정상적 인간(트랜스젠더 등)으로 정의되지만, 후자인 대상적 동성애자(게이, 레즈비언)는 ‘강박 신경증 환자’로 분류된다.

 

한편 성 목표에 이르지 아니하고 머리칼, 옷, 신발과 같은 부적절한 대체물에 머무는 것과 같은 성 목표 도착인 페티시즘을 보면 어느 누구나 성 목표(성교와 같은)에 도달하기 까지 일정한 중도적 상태를 갖는다는 점에서 이 역시 모두 질병이라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양태는 조기에 성적인 두려움, 즉 아동기의 성 목표인 입술, 항문, 다른 신체부위를 성 목표로 과대평가하거나 이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어떤 두려움을 경험하였을 때 정상적 성 목표를 밀어내고 대체물을 구하도록 자극한 우연적 조건으로 야기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극도로 과장되고 지체되어 아예 본래의 성 목표를 상실하고 특정한 대체물에 고착되었을 때 도착증이라 부른다.

 

이처럼 ‘도착증’이라고 명명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규범에 다름아닌 정상이라는 모호한 기준에 따른다. 도덕성이나 윤리의식과 같은 변화무쌍한 것이 건강과 질병의 기준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병(신경증, 우울증, 강박증, 등등)적 증상이란 어떤 의미에서 인간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시대가 수인할 수 있는 정도에 따른다고까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적이탈이란 인간의 잠재태(潛在態)인 것이다.

 

2. 유아성애에 대해서

 

건강한 성인의 정신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기초적이고 중대한 이해가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 6세에서 8세 사이의 초기 아동기를 잊어버리는 독특한 기억상실을 지닌다고 한다. 유아가 가장 수용력이 클 때라는 측면에서 흥미로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문화적 역량의 향상이라는 수치심이나 혐오감 또는 도덕심을 체화하게 되는 유아의 성충동의 승화가 정신적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긴 것을 의식으로부터 차단하고 억압하여 무의식화하고 있다는 의미의 반면이랄 수 있다.

 

예컨대 엄마의 젖을 빠는 것은 처음에는 생존에 기여하는 행위이지만 후에는 독립하여 아이의 입술을 자극하는 일종의 성감대로서의 만족을 지향하는 행위이다. 배부르게 엄마의 젖을 먹고나서 발그레한 뺨과 행복한 미소로 잠에 떨어져 있는 모습은 아마도 성적 만족 표현에 대한 지표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만일 젖을 떼야 하는데도 오래도록 젖을 집착하는 아이는 성장한 후 어떤 도착적인 행위자일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기억에서는 은폐되었으나 무의식에서 빨기를 히스테리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키스의 달인이거나 음주와 흡연을 지속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유아성애의 도착적 발현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관점이 있다. 아이들의 야뇨증이나 배변을 회피하거나 유보하려는 행위에 숨겨진 성애이다. 이것 역시 입술과 마찬가지로 점막으로 이루어진 항문의 성적 자극과 관련한다. 영아가 양육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변기에 앉아 장을 비우는 것을 매우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것은 배변이 항문 점막을 통과할 때의 자극이 주는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행위이며, 밤에 이불에 오줌을 배출하는 것 역시 유아적 몽정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석적 용어로 영아수음이라 정의되는데, 입술로 젖을 빠는 행위와 같이 ‘자기 성애적’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즉 성 대상이 자신인 것인데, 이것이 나르시시즘이다. 이러한 배경만으로도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심리성적 에너지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자각할 수 있는 지표가 되어 줄 것이다. 억압되어 은폐된 기억의 심연에 자리잡고 있는 충족되지 못한 성충동과 성만족, 다시 말해 아동의 정상적 리비도의 발현이 저지당하고 왜곡된 고통의 무의식적 발현인 것이다.

 

이외에도 엿보기나 노출, 잔학성 충동을 통한 쾌락이 있는데, 아이들은 부끄럼없이 성기를 드러내어 신체를 노출하는데서 즐거움을 얻으며, 양육자(어머니, 아버지)의 신체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며, 엉덩이를 두들겨주는 데서 쾌감을 얻는다. 젖을 빠는 구강기 체제와 항문기적인 가학성의 체제를 어떻게 통과하느냐에 따라 아이의 심리성적 에너지의 조절 성향이 결정된다 할 것이다. 이것을 인간의 문화적 행동양식과 비교하면 이러한 자기성애적 요인이 어떻게 통제되고 조절되는 가에 따라 성 도착이라는 질병과 문화적 승화라는 이질적인 에너지의 발현이 이루어진다. 결국 공상, 독서, 연구와 지적, 문화적 행위나 바바리맨의 노출, 포르노는 물론 주변의 성적 대상에 집착하는 관음증(엿보기)은 공통의 심리적 뿌리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사춘기의 재구성에 대해서

 

아동기에서 사춘기에 이르는 시기는 성 목표가 입술, 항문, 기타 신체부위와 같은 성감대에서 성의 본질적 목표인 성 물질 방출에서 오는 즐거움이라는 성 목표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기간이다. 또한 성 대상 역시 자기 자신이나 양육자로부터 제3의 존재로 전환된다. 이 과정에 경험적 문제가 발생하면 아이는 잘못된 성적 발달을 하게 되고 신경증적 질병을 지니게 된다. 부모의 불화나 불행한 결혼생활, 부모와 아이 관계의 장애 등은 아이의 정상적인 발달을 저해하고 유아적인 것에 머무르는 퇴행이나, 근친상간적 고착, 성의 회피를 통한 목표가 왜곡되어 도착적인 성향의 사람이 되어버린다.

 

물론 이러한 현상의 정도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다. 일례로 대개의 청년들이 더 성숙한 여성에 끌리거나 더 많은 경험과 권위를 갖춘 남성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러한 발달단계를 경유하는 존재로서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정상적인 과정을 통과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성 대상이나 성 목표의 도착 현상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극단적인 자기애나 대상적 동성애, 페티시스트, 사디스트로서 말이다.

 

인간의 본성, 문화적, 사회적 행태의 근원을 리비도라는 심리성적 에너지로 파악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오늘날의 과학이 모두 동의하거나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치심, 도덕심과 같은 정신적 제방을 쌓고, 이를 문화적으로 승화시키는 고도의 심리적 성취능력을 발달시킨 인간의 본질에는 고착된 충동과 승화의 끊임없는 투쟁이 있음을 발견케 한다. 또한 인간의 행위를 의식적으로 차단된 아동기의 은폐된 욕망들의 무의식의 발현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한 우리는 보다 용이한 자기 이해와 건강성의 회복에 실마리를 제공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동의 양육에서 교육, 양육자의 행동에 대한 교정, 그리고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이들에 대한 고통의 교감을 통한 따뜻한 연민과 배려의 정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도시생활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신경증을 앓고 있다. 신경증은 "성 목표 도착의 음성화(negative)"라고 정의한 프로이트의 말은 이러한 우리 정신의 실체에 대한 명료한 진단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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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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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빈번히 주절거리곤 한다. ‘자기만은 저 높은 고지에 올라 권력과 부(富)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자기 욕망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을 좇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아마 이것이 중산계층을 지배하는 정신일 것이다. 그리고 키냐르가 지적했듯이 이 정신을 구성하는 쾌활하고 한심한 덕목들의 본질 - ‘돈, 기업, 이윤, 풍요, 건강, 승리, 생산력, 성공...’이라는 숭배신조 - 에 내재된 무한경쟁의 순환하는 욕망, 이미지라는 환상과 마비의 모욕에 붙들린 도취된 소비의 세계가 타자와 감동의 기억을 사라지게 하고 있음을.

 

작가, 아니 작중인물‘케이(한국명 한경희)’는 이러한 욕망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에 도취되어 있는 여대생이다. 그녀가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세계, 안주하고 있던 지배적이고 주류적인 세계의 외곽을 깨는 것, 인식의 무능력 지대를 횡단하며 비로소 닫힌 세계의 본질을 볼 수 있는 개안(開眼)을 갖게 되는 일련의 역사가 이 작품의 줄거리라 해도 크게 빗나간 이해는 아닐 것이다.

 

어학연수를 위한 뉴욕에서의 짧은 유학생활, 부유한 백인 여자친구 써머를 통한 화려한 소비와 물질, 사교의 세계는 케이의 욕망을, 쾌락을 자극하고 고양(高揚)시킨다. 귀국 후에도 뉴욕의 세련된 감각의 세계는 산만하고 혼란스러운 서울의 누추(陋醜)와 비교되고, 만나는 사람들조차 그녀의 감각적 이상의 잣대에 턱없이 미흡하다. 그리곤 뉴욕에서 출생했다는 유한계급의‘재현’이란 남자에 매혹된다. 그녀의 허영을 충족시키는, 같은 세계에 대한 이해를 지녔으리라는 공감의 신념에 의해서.

 

그러나 그녀는 불안하다. 도시의 현란함, 다종다양의 특성이 들끓는 세계, 자신의 경제적 지위와 정신적 지위의 간극, 불투명한 가능성의 세계는 무한한 선택의 세계를 위장한 차별화된 세계, 구분된 세계임을 어렴풋이 자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자각은 스스로 정신을 다듬는 고독의 시간을 통한 깨달음이 아니라 외부, 타인의 체험의 언어를 통해 전달된다. 그래서 진정한 각성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이러한 미국명 케이가 한국명 한경희로 불리는 것은 그녀가 숨기고 싶어 했던 가난한 시절이었던 초등학교 동창생 지원과 우연한 마주침에서 비롯되는데, 수족관의 물속을 평온히 유영하는 중산층의 백수인 연인 재현과의 이별과 공장 노동자로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지원과의 시작은 차원으로서의 인식의 전환적 상징이라 할 것이다.

 

그녀는 지원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 번도 자신의 것을 가져보거나 계급적 욕망에 시달린 적 없는 하층민의 체념과 피해의 트라우마를. 그래서 젊은 청춘 연인이 그저 쾌락을 함께하며, 넘쳐나는 세상의 욕망에 휩싸이는 것과 주류적 질서와의 상관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자신 또한 몰락의, 경제적 고통의 시간을 경험했다는 인식에서 자신과 다른 세계로서의 지원의 삶을 보지 못한다. 잔업수당이 곧 삶의 형편을 결정하는 세계에 속한 지원에게 삼청동, 홍대, 압구정의 카페, 록밴드의 공연과 영화 관람은 이질적인 문화의 세계이고, 불편함과 불안감을, 괴리와 열등감을 심화시킬 뿐이다. 경희는 그에게 감당할 수 있는 세계에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에 대한 이해, 재현과 그의 친구였던 록밴드의 공연을 위해 내려갔다 경유한 생맥주집 주인의 언어에서 얻어진다. 수족관에 있는 물고기인 경희와 야생의 바다에 있는 지원의 그 다른 세계의 비유할 수 없는 차별화된 삶의 공간을. 수족관에서 느끼는 물결의 흔들림이 바다의 물결과 같은 것일 수 없듯이 중산층이라는 경계 내에서의 삶에 있는 자가 한시도 생존의 치열함을 벗어날 수 없는 자의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이것은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한 복판에서 발생한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검은 회색연기에 휩싸인 압도적인 재난의 풍경에도 무심한 한 때를 보내는 젊은이들의 대조적인 장면의 사진으로 확장되고 본질에 접근한다.

 

사진 속의 젊은이들이 특별히 냉소적이거나, 퇴폐적이고, 악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인생의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살아 있는 인간의 무심함, 삶의 본질적인 끔찍함의 형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바로 사진 속의 젊은이들이 우리의 초상이라는 것을. 이것을 지각한 정신은 수족관을 나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야생의 대양을 향해 용기있는 자세로.

 

여기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장이 떠오른다. 그가 지향한 문장의 목적은 다르지만 “사람이 앉지 못하도록 비탈공간을 만들고, 가시밭 공간을 조성하며, 순찰 경비원을 세워 접근을 방어하기 위해 공간을 분리하는”, 즉 이질적인 집단에 대한 공포를 회피하려는 주류의 탐욕적 인식의 세계, 오늘 우리들의 무감각하고 무심한 세계에 대한 진술을. 그리고 “지금의 세상이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지옥인가”하고 묻는 그 처연한 물음의 진의를. 이것은 케이 아니, 경희가 자신이 사는 세계가 천국인가, 지옥인가를 자문하는 것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안전망을 상실한 개인으로 야기되는 불안과 안전위협의 공포를 회피하기 위한 분리의 형상이 공존하는 이곳.

 

그래서 제목인 ‘천국에서’는 지금 이 세상이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기를 바라는 불가능에 대한 패러독스일 것이다. 결국 작가는 주인공 경희(케이)를 통해서 지옥 아닌 길을 찾기위해 분투, 수족관을 열어젖히고 강으로 대양으로 헤엄쳐 나아가는 희망의 빛을 비추지만 그 가능성의 미래는 왠지 묵시록(默示錄)적이기만 하다. 이기심이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의 환상을 언제나 저버릴 수 있을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어쩌면 사회철학자 이진경이 말했듯이 “지배적인 척도에 반하여 척도적인 것과 대결하며 새로운 것을 창안”하려는 시도가 천국을 향한 더 현실적인 모색이 아닐까?

 

김사과의 발표된 지금까지의 소설들 - 단편집『02 영이』나, 장편『테러의 시』,『풀이 눕는다』 - 과는 서사의 감성 저변을 이루던 증오와 분노가 넘실대고, 핏물이 배어나올 정도의 냉소적 통렬함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꿈과 환상으로 지탱되는 이 도시, 서울의 세계, 매순간 타인들에게 증명되고 갱신되기 위해 사는 삶, 단지 살기위해서 사는 삶에 초점 잃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 초라함도 모르고 허우적거리는 정말 함께하는 것이 싫은 인간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하겠다는 혐오의 치열함을, 또한 진짜 인간이 된다는 게 뭔지 알지 못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도시. 값싼 연민을 보내는 것으로 휴머니스트가 된 듯 위선과 가식, 가면에 도취된 인간들을 묘사했던『테러의 시』속 사유가 도도히 연속해서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가치판단적 주장과 같은 서술의 개입이 허구적 즐거움을 부분적으로 손상시킨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었음을 숨길 수 없지만, 인간과 인간 사회의 기본적 딜레마에 대한 심원한 그녀의 탐색은 언제나 깊은 공감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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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침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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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인간의 소망, 억제되었던 삶의 궁극적 욕망의 세계, 키냐르 식 시간인 ‘옛날’, 그리고 ‘최초의 왕국’이라는 순수의 세계에 대한 애절한 희구에 다시금 공감하는 시간이 된다. 이 옛날이 삶의 열정과 회한, 본질과 허영, 기만의 세계와 갈등하며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운명을 완성하는 세계로 이끈다.

파리 교외, 나룻배가 외로이 떠있고,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비에브로 강변, 소박한 자연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당대 최고의 비올라(다 감바) 연주자인 ‘생트 콜롱브’의 죽은 아내를 향한 비장한 선율이 흐른다. 아내에 대한 사랑을 지우지 못하는 남자와 두 딸의 비올라 삼중주는 영주들, 음악가들에게 깊은 영감과 감동을 안기고, 최고의 음악가로 칭송을 받는다.

 

명성은 국왕의 부름을 부르지만 남자는 영광을 쫓는 이들이 비난하는 오만한 고뇌의 세계를 결코 떠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얼굴을 파묻고, “아주 오래전 머물렀던, 어두컴컴한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을 가질 수 있는 비에브로 강이 있기에. 이것은 어머니의 뱃속, 태아로서의 평온, 아득함의 기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며, 사랑과 보살핌이 충만한 원초의 세계이자,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죽음의 세계이다. 또한 그의 음악은 바로 이 흐릿한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염원이자 억제된 금기가 해제된 순수한 욕망의 실현이다. 음악과 삶의 궁극이 맞닿아 있는 세계, 그의 음악은 곧 『떠도는 그림자들』에서 말하는‘옛날의 냄새’에 가 닿는다.

 

소설은 음악, 예술의 지향에 훼방을 놓으려는 듯, 음악은 하지만(play) 음악가는 될 수 없는 청년“마랭 마레”를 등장 시킨다. 진정한 음악은 기교와 광대놀음이 아님을 바람, 눈, 오열의 소리를 통해 말하지만 “우리 정신은 휴식을 모르오, 삶은 맹렬할수록, 굶주릴수록 아름답소.”와 같은 주장을 지닌 이에게는 명예와 영광, 재화와 위세가 더욱 중요한 덕목이니 공허한 울림일 밖에 없다. 더구나 청년 마랭 마레는 스승 생트 콜롱브의 장녀인‘마들렌’과 정념을 불사르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한 여동생‘투아네트’의 탐스런 육체를 소유하게 되자 마들렌을 저버리고, 그녀로부터 내밀하게 익힌 스승의 연주기법을 가지고 궁정 수석 연주자가 된다. 아마 음악은 과연 무엇인가? 음악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와 같은 물음일 것이다. 아니 삶을 사는 우리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답변은 생트 콜롱브가 죽은 아내의 환영을 만나 연주를 들려주고, 와인을 대접하는 장면, 그 자체일 것이다. 생과 사의 만남, 시간성이 없는 원초의 세계로의 편입일 것이다. 이것은 스승의 연주를 듣기위해 오두막에 숨어들었다가 인기척에 주고받는 두 사람의 대화에 담겨있기도 하다. 밖에 누구냐고 묻는 스승의 물음에 “궁을 도망쳐 음악을 찾는 이”라는 답변과, 다시금 “음악에서 회한과 눈물”을 찾는다는 제자의 답이다. 그리곤 마침내 음악은 신(神)을 위한 것도, 귀도, 황금도, 침묵도, 사랑도, 단념도,...아니며,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라는 ‘최초의 왕국’이라는 무의식의 기원을 발설함으로써 시초의 본질에 이른다.

 

“선생님, 마지막 수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첫 수업을 해도 되겠소?”

 

세상의 이치(理致)란 낮과 밤,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사랑과 증오....처럼 대립적인 것 같지만 그것은 이면이자, 동일 한 것의 다른 언어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래서 키냐르의 인물들은 원초의 세계, 혹은 ‘옛날’로 회귀한다. 무(無), 없음의 세계로. 그것이 시작이었고, 끝이 아닌가.

 

이런 키냐르의 언어를 보고 ‘퇴행적’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옛날, 흐릿한 기억의 시간으로 퇴행하는 것이라고. 심한 오독이고 존재의 몰이해라 할 것이다. 삶의 궁극적 욕망은 프로이트의 확신처럼 유아기의 억눌린 기억의 실현이라는 점에 있으며, 이것은 퇴행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정신 조건이다. 억제된, 금기시된 욕망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 그것은 곧 가공되고 조작된 세계가 아니라 순수의 세계를 되찾는 것이다. 더구나 키냐르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작위적 개념이 아니기에 더더욱 과거로 가는 역행이 아니다. 어머니의 젖을 물고 있던 옛날의 은폐된 기억의 세계로. 그곳에 무슨 언어가 있으며, 불행이 있고, 모욕이 있겠는가. 기만과 위선, 허영이 무용한 곳, “욕망과 추억을 참을 수 없어 이따금 바지를 아래로 내리”는 생트 콜롱브의 와인이 놓여있는 그 오두막의 세계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목 놓아 부를 수 있는 세계로. 시인 로르카의 ‘머리를 더듬는 손’처럼 죽은 아내의 시선에 놓여있는 생트 콜롱브의 늙은 손이 켜는 비올라의 선율이 하염없이 가든한 눈물을 흐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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