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살림지식총서 168
김성곤 지음 / 살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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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7월 16일 초판이 발간된 이래 미국을 비롯해 지구촌 전역의 독자들을 열광케 한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은 21세기 오늘에도 여전히 갈채 받는 성장소설의 전형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저술은 은둔과 칩거로 베일에 가려졌던 J.D. 샐린저의 문학세계에 대한 탐구를 통해 그의 삶과 문학사상을 탐색하고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5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읽는 독자들에게는 시대상에서 오는 낯섦으로 이 작품이 왜 성장소설의 고전적 위치에 서는가에 의문을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따라서 호밀밭의 파수꾼이란 작품이 출간된 1951년의 미국사회와 당시의 문학운동에 대한 이해는 작품의 함의에 보다 본질적인 접근을 가능케 하여준다.

 

일종의 축약된 샐린저 평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저술은 1960년대 이후 오늘까지 은둔하고 있는 신비의 작가 샐린저의 칩거이유를 “상업주의와 가짜가 횡행하는 현실에 대한 환멸”에서 모색하고 있으며, “현대의 멀티미디어적 상황과 범람하는 대중문화 사회에서 전통적 순수문학 작가들이 느끼는 미로의식과 구토의식”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또한 2000년 상영된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Finding Forrester)'의 두 주인공 ‘윌리엄 포레스터’와 ‘자말 월레스’를 통해 샐린저의 의식을 더듬고,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순수의 오염이자 대중문화의 침범”에 대한 도피와 “견고한 자아의 패각”이 무엇인지 탐색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평전의 둘째장이라 할 수 있는 세계를 풍미했던‘샐린저현상’과 그의‘문학적 여정’을 통해 호밀밭의 파수꾼이 차지하는 문학사적 위치를 탐구한다.‘순응의 시대(This age of Conformity)', '진정제를 맞은 50년대(tranquilized fifties)'라고 지칭되는 당시 미국사회의 “다양성이 결여된 단일문화와 보이지 않는 정신적 통제”와 “외견상으로는 모든 게 정상이나, 내면적으로는 모든 것이 급속도로 붕괴”되는 정신적 빈곤에 대한‘반문화(反文化)’의 형태로서 그 의미를 출발시키고 있다.

 

결국 저자는 샐린저 작품의 중심적 기저를 전후 허무의식과 연관하여 “기존 체제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렸으며, 자신들이 허위와 기만 속에 살고 있다는 느낌”으로 인한 “서구의 이성중심주의의 허위와 기만에 대한‘이유 없는 반항’”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샐린저 문학의 지위를 “미국의 비트운동(The Beat Movement), 영국의 성난 젊은이들(The Angry Young Men), 60년대 히피문화의 원조로 이해한다.

 

“체제저항과 찰나주의를 추구”하던 비트운동이나 “모든 이념을 거부, 보다 나은 세상의 존재도 믿지 않았다.”는 성난 젊은이들 그룹 작가들에 대한 설명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이해하는 방편으로서 비교적 심층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들의 상세한 설명은 저자 김성곤 교수의 저서 참조)

 

끝으로 호밀밭의 파수꾼 작품에 대한 분석과 발표된 유명한 단편과 중편들, 그리고 그들 작품집의 구성에 얽힌 이야기는 샐린저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귀중한 지침이 될 것 같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보는 세상은 어떤 것인가? “현대사회와 종교는 상업주의로 혼합된 인공적인 무대의 쇼처럼 진실성을 상실하고 있으며, 허위로 점철되어있다.”는 것이며,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가짜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순수성을 상실하고 어른이 된다. 결국 그 가짜의 일부가 되어간다는 것을 인식하는 소설”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1999년 미국도서관협회가 선정한 위대한 금서에서 13위를 차지한 아이러니를 간직하고 있는‘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처럼 순수성을 보존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한 채 은둔하고 있던 노작가 샐린저의 타계는 세상에 다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의 연장인것만 같다.“현실에서 벗어나 신화의 세계로 들어간 전설적인 작가”로서 기억되기만을 바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세상에 더 이상 발표치 않은 그의 작품들이 그의 사후인 지금 어떤 모양으로 혹 우리에게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게 한다.

 

짧게 구성된 이 저작물은 샐린저의 주요 작품들과 그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어떠한 결여나 미흡도 없다. 청소년들에게, 영미문학을 사랑하는, 문학작품의 분석적 이해를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멋진 참고 도서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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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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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에 발표된 챈들러의 첫 장편 소설인 이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거듭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욱 세련된 추리기법과 강력한 서스펜스로 독자의 숨결까지 조정할 만큼의 스릴러들이 즐비한 요즘에도 침식(侵蝕)당하지 않는 어떤 인간적 향수 때문이 아닐까? 작가가 탄생시킨 사설탐정‘필립 말로’로부터 잃어버린, 혹은 밀어놓은 인간성에 대한 무의식적 소망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일 것이다. 사람의 진심에 대한 존중과 배려, 세상을 대하는 정의로운 신념에 대한 자기 감시와 같은 오늘의 세상에서는 찾기 어려운 개성에 대한 매혹일 것이다. 또한 위선이 없기에 투박하고 자칫 오만과 적의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하는 진솔한 인물에 대한 자연스런 애정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매혹적인 인물의 탄생만으로 이 작품의 대중적 공감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오랜 풍화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도덕성, 윤리의식을 비롯한 인간사회의 부조리를 관통하고 있는 빛나는 통찰의 서사이며, 절제된 형용, 너절한 긴장이나 선정적 자극을 배제한 문장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의 완성적 묘미를 잃지 않고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는 작가적 역량에 기인하고 있어서 이지 않을까?

 

산뜻하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필립 말로가 사건 의뢰의 상담을 위해 명문 부호인 스턴우드 가문의 대저택을 방문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스턴우드 가(家)의 둘째 딸인 카멘의 맹랑한 첫 대면에서 눈치 빠른 독자에게 당대에 만연하고 있던 상류층의 무례와 방탕이 주제를 견인하는 주요 소재이리라는 암시를 한다. 노쇠하고 병든 스턴우드 장군의 자존심과 혈연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의뢰의 내용은 둘째 딸의 빛을 상환해달라는 정중함을 위장한 채무통지의 진의를 밝혀달라는 것이지만, 애정을 가지고 있던 첫째 사위의 돌연한 사라짐과 막연한 관련성에 대한 의혹의 규명이기도 하다.

 

말로는 노인의 작은 자존심과 믿음에 대한 의지를 헤아린다. 채권자로 서명된 가이거를 찾아 나선 탐정은 그가 고서점으로 위장된 음란물 제작 및 거래자임을 알게 되고, 그의 거처에서 동향을 탐색하던 중 총격소리와 급하게 뛰쳐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진 한 남자를 목격하게 된다. 집 안에는 마약으로 정신을 잃은 스턴우드 가의 둘째 딸과 흥건한 피와 함께 바닥에 누워있는 가이거의 피살체를 발견하게 된다. 노인의 작은 자존심, 명예, 의뢰인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말로는 카멘이 그 자리에 있었던 흔적을 지워버린다. 협박의 다름 아닌 의혹의 채무통지를 보낸 당사자의 불온한 신원뿐 아니라 살해됨으로써 사건은 단순함을 일순간에 넘어선다.

 

이어서 스턴가의 운전기사가 차량과 함께 의문의 사체로 발견되고, 피살자인 가이거의 음란도서가 반출되어 옮겨진 장소에서 또 하나의 살인을 목격하게 된다. 관할 경찰과 수사담당 검사에게 말로는 자신이 살해 현장에서 목격한 사실을 진술하지만 스턴우드 가와의 관련성은 모두 은폐한다. 여기서 필립 말로의 정말 멋진 명언들이 등장한다. 바로 소설 속 허구의 인물에게 반하게 되어, 챈들러를 일약 최고 수준의 작가반열에 올려놓은 그 문장일 것이다.

 

의뢰인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과 자유를 건 위험한 현장에 거침없이 뛰어들고, 의뢰인의 이름을 보호하기 위해 검사 앞에서 사건의 내용을 당당하게 제외시켰음을 선언하는 말로의 행위이다. 일개 사설탐정의 이러한 헌신적인 행위에 대해서 “이 모든 일을 해서 얻는 게 뭔가?”하고 검사가 묻자, 말로는 대답한다. “일당 25달러와 소요경비를 청구하죠.” 그리곤 다음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런데 그 정도의 돈 때문에 이 지역의 법 집행을 맡은 사람들 중 절반의 미움을 사겠다는 건가?”

“저도 마음에 안 듭니다. 하지만 제가 하는 일이 뭡니까? 전, 사건을 맡고 있죠. 저는 생활을 위해서 팔아야 할 것은 팝니다. 하느님이 주신 약간의 용기와 사고력, 그리고 의뢰인을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밀고 나아가는 마음입니다.”

아마 ‘정의(正義)란 자기 자신의 것을 소유하고 자기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한‘플라톤’의 말, 즉 정의란 단순히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받으며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는 이 단순한 진실 이상의 미덕이 어디 있겠는가? 신뢰가 팍팍 쌓이는 이 말에 그 누가 적의를 가지겠는가?

 

이것으로 의뢰된 사건은 종료된 듯하지만, 노인의 의뢰내용 이면에 감추어진 사라진 사위‘러스티 리건’과의 관련성은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스턴우드 장군의 집사로부터 사건 종결의 통지를 받지만 플라톤의 정의처럼 말로의 직분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탐정의 목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배후자로 심증을 지닌 ‘에디 마스’라는 자의 아내와 동행 도피했다는 풍문은 더욱 말로의 직관을 유혹한다. 남편이 실종된 스턴우드가의 첫째 딸‘비비안 리건’과 에디 마스의 석연찮은 관계, 말로가 혹여 자신의 남편을 찾으려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은폐된 우려의 가면은 실종사건의 진실을 향한 국면으로 전환된다.

 

마약과 문란한 성생활, 도박, 주류밀매 등 상류계층의 부정한 부의 원천과 도덕적 타락은 스턴우드가의 자식들과 그들의 일상을 에워싼 산업을 통해 소설의 환경을 가득 채운다. 아파트에 몰래 들어가 침대위에 알몸으로 누워 유혹하는 카멘의 탐욕스럽고 히스테리적인 성욕을 자제시키고 내치는 탐정 말로의 냉엄한 행동에서 무언가 알아차려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인이 애처롭게 기다리는 것, 그러나 가문의 작은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하는 노인이 눈을 감기 전에 알아서는 안 될 그 무엇의 진실이 바로 이 질병적 성적 탐닉처럼 감추어져 점차 부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소설의 제목인 죽음의 상징 언어인 빅 슬립(big sleep)에 이미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선악의 획일화되고 편협한 구별이나 신분, 지위, 과거의 내력, 성의 구분 등으로 인간을 판단하지 않으며, 오히려 범죄자에게 조차 깊은 인간적 연민을 짙게 발산하며, 어떤 장식도 위선도 없이 시대와 인간 자신의 내부를 바라보게 하는 담담한 문장이 더욱 서사를 돋보이게 하는 작품이다. 훌륭한 소설 앞에 더 이상의 내 조잡한 수사(修辭)는 여기서 맺는 것이 옳은 선택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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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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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 어떤 감정적 수사(修辭)도 없이 하나의 행위가 진행된다. 니켈도금 수갑이 한 남자의 목을 파고들고 경동맥이 파열되어 피가 용솟음친다. 발버둥 치던 다리의 움직임이 이내 멈추어 버린다. 여기엔 그저 죽음의 형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흥분도, 공포도, 악의도. 마치 신(神)의 행위처럼 말이다. 악의 신, ‘안톤 시거’는 이렇게 부보안관을 살해하고 도로를 질주한다. 그리곤 영문을 모르는 이의 차를 막아서고 양미간에 도살장용 스턴건으로 압축공기를 양미간에 박아 넣는다. 낭자한 피 웅덩이가 만들어지고 차를 옮겨 탄다.

 

그를 제어할 어떠한 힘도 세상에는 없을 것 같은 불가항력의 기운이 느껴진다. 무력감...

소설은 이 거대한 악의 힘을 무력하게 지켜보고 있어야 할 뿐인 인간의 역사를 투영한다. 여기에 “인생은 매 순간 갈림길이고 선택”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명제, 어느 순간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으로 초래된 일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되는 인간의 운명이 이어진다.

 

영양 사냥을 하던 용접공의 쌍안경에 4륜 구동 트럭과 죽은 듯한 사람과 개의 형상이 들어서고, 마약 밀매단들간의 무수한 총격의 흔적과 피로 얼룩진 사체들을 발견하게 된다. 사막에 점점이 이어진 혈흔을 따라가던 사냥꾼 ‘루엘린 모스’는 지폐 가득한 240만 달러의 가방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인생 전체가 새로이 결정되는 순간에 직면한 것이다. 인생을 생명의 사투에 내거는 선택을 한다. 돈 가방을 손에 쥔다.

이제 사신(死神)과 사냥꾼의 대결,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냉정한 세계가 펼쳐진다. 이 세상에서 보기 힘든 것이라는 넝쿨째 들어온 행운, 40파운드의 종이더미에 이 시대는 삶을 걸게 한다. 돈이 자유와 행복이라고 모든 이들이 합창하는 세상이기에. 그러나 예견되는 도피와 죽음에 도전해야 한다.

 

세상은 이들만의 무법천지가 아니라는 듯이 부하를 잃은 보안관 ‘벨’의 시선이 놓여진다. 그런데 이 노인의 언행이 여간 시원치 않다. 마치 방관자이고 관찰자 같은 사변(思辨)적 언어만 횡설수설한다. “저기 어딘가에는 진정한 파괴의 예언자가 있었다. 나는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 , 수많은 인명의 피살과 마약, 기관총, 산탄총, 권총 등 어지러이 널린 총기들이 의미하는 거대한 범죄가 존재하고, 자신의 관할지역 시민이 알 수 없는 범죄조직에 쫓기고 있음에도 역사의 불가피성, 죄의식, 회한, 증폭되는 시대의 잔혹성을 주절대기만 한다.

 

“아주 기묘한 역사, 역사의 어느 구석을 둘러봐도 지독한 피비린내를 풍기는 역사”임을 성찰하는 노인의 인식이 설사 진실일지언정, 살인자에 다가서기 위한 적극적 행위를 해야 하지 않는가? 고작 쫓기는 남자의 여자에게 찾아가 자수를 권유하는 행동에 머문다. 이것은 벨 자신의 사변처럼 악의 역사라는 당위에 대한 무기력으로서 노인의 존재가 의미없음 이듯이, 소설의 서사나 구성적 측면에서도 그를 위한 공간이 없어야 마땅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인간 세상은 이처럼 제어할 수 없는 사신의 시대라는 의미일까? 인간이 어찌 신에 대항 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참혹한 총격전, 돈의 회수를 위한 마약 밀매조직과 살인 전문가, 도망자의 선혈이 뒤 엉킨다. 추적을 뿌리쳐야 하는 도망자 모스와 악의 화신인 시거의 집요하고 거침없는 추격은 인간의 모든 감정이 응고된 채 지극히 건조하고 표정없는 행동으로 그 을씨년스러움을 더한다. 신의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인간의 애처로운 도피 행각처럼. 결국 역사란, 인간의 세계란 이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노인의 사변을 지켜 볼 필요가 있다. “자기가 누구이며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평생동안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잘못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들 누가 이 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 악의 신인 살인자 시거조차 자신의 행위를 신의(信義)를 지키기 위한 행위라 하고 있으며, 선(善)의 대리자인 노인 자신마저도 “인간이라면 영혼을 내 맡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자신은 그러지 않을 테다.”라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세상의 종말을 목전에 두었음에도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을 향한 묵시록, 그 경고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욕정에 병들고 동물성에 얽매여, 그것은 스스로 모르나니, 나를 거두어 영원한 예술품으로 만들어주오.”라는 예이츠의 시(詩),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Sailing to Byzantium」의 한 구절처럼 인간 존재로서의 환멸을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흥건한 핏빛이 지면의 도처를 채우는 이 음울한 한 편의 스릴러가 던지는 세상의 무력감이 너무도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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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 / 비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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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가 쓴 <시시포스의 신화> 중 인간의 숙명성에 대한 심원한 다음의 문장은 스러져가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이 빼앗긴 것, 바로 그것일 것이다. “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은 충분히 가득 차오른다.”

아마 이것의 패러독스한 해석이 깊게 내려앉은 고립무원의 둔덕, 생존의 희망, 그 가능성마저 상실시키는 음울한 이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젊음의 일탈, 그 해방적 쾌락의 공간이 호기심과 탐험으로 각색된 여정의 불안으로 이동하고, 그 불안이 두려움이 되며, 마침내 온통 죽음의 불가피성에 직면하는 공포로 전율하게 된다. 구원의 희망이라는 기대치가 마음에서 그 존재를 잃어버리는 순간, 절망은 인간을 내습한다. 알지 못하던 죽음의 그늘, 그 실체를 비로소 인지하게 되고, 알게 됨으로써 희망이 사라진다. 희망이 사라진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죽음의 공포, 그 유혹이다.

 

작열하는 태양, 열대의 바다, 젊은 육체들의 갈망 그득한 웃음소리와 술, 그리고 음악에 몸을 맡긴 독일, 그리스, 미국의 청춘남녀들이 멕시코 휴양지의 낮과 밤을 채운다. 제프와 에이미, 에릭과 스테이시 이렇게 두 쌍의 미국인 청춘들은 심해 가이드로 우연히 만난 독일청년 마티아스의 떠나버린 동생에 대한 사연을 듣게 된다. 고고학현장 발굴 인원인 한 여성을 찾아 떠난 동생을 찾기위해 동행의 제안을 하고 이들과 주점에서 만난 그리스 청년 파블로 등 6명은 이렇다 할 준비도 의지도 없이 가벼운 휴가여행의 기분을 지니고 낯선 장소로 출발한다.

 

이들을 목적지로 안내하던 고물트럭은 정글 앞에서 멈추고, 현지인 운전사는 이들이 가고자 하는 곳은 아무도 없다라는 의미인 듯, 알 수 없는 언어로 강하게 만류하지만 6명의 젊은 이방인들은 이를 무시하고 발길을 향한다. 정글과 개간지를 통과하면서 마야인들의 작은 부락을 만나지만 어느 누구도 이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지만, 이들에게 다가온 한 명의 건장한 마야의 남성으로부터 떠나라는 의미의 이해 할 수 없는 언어와 행동의 메시지를 받고 발굴지로 추정되는 경로를 찾아 발길을 돌린다. 언어의 불통이 지니는 오해와 왜곡, 그리고 불신, 서로 소통이 되었더라면...

이 소설의 얄궂음은 이 다른 언어로 인한 소통의 차단, 불능성, 무력성을 반복한다. 그리스인과 미국인의 의사불통, 마야인과 이들의 소통불능, 문화의 기원인 언어의 차이, 문명적 오만함을 극복하지 못할 때 야기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낭패, 그 무능력의 어두운 단면이기도 할 것이다.

 

마침내 이들 일행은 마야인들의 미심쩍은 감시 속에서 발굴지로 보이는 폐허에 이르는 길을 찾아내고,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러나 황급히 말을 타고 달려온 마야인은 그들에게 둔덕으로 오르지 말 것을 표현하지만 둔덕의 경계에 무성하게 자란 초록의 넝쿨에 발이 감긴 에이미를 보자 많은 숫자로 늘어난 마야인들은 태도를 바꾸어 총과 화살을 겨누고 이들에게 경계가 된 넝쿨식물의 안 지대인 둔덕을 오를 것을 강요한다. 그러다 넝쿨식물 사이로 드러난 사람의 뼈와 소지품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해골이 된 사체는 바로 마티아스의 동생 헨리히임을 알게 된다. 무엇인가에 흡입된 듯이 살이 사라지고 하얀 뼈들만 드러낸 이해 할 수 없는 모습, 당황과 참담함, 살해의 위협에 내몰린 이들은 둔덕을 오르고 발굴단의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텐트를 발견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다.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이 없을 때, 자신들의 합리적 이성에 반하는 현상을 마주 할 때, 이해 할 수 없는 위협이 자신들을 에워쌀 때, 인간은 무력감과 가공할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이들이 들어선 황량한 폐허, 정글의 무더위와 함께 줄곧 괴롭히던 파리와 모기떼마저 사라진 지대, 낯선 초록의 넝쿨 식물이외에는 어떠한 생물도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환경임을 일행 모두가 인지했을 때, 이미 이들은 폐허의 둔덕에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곤 발굴단원으로 보이는 해골의 잔재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을 살해한 주체가 바로 선홍색 꽃을 맺은 넝쿨식물임을 납득하기에 이른다.

 

인간의 욕망을 꿰뚫는 넝쿨에 기만당하고, 그리스인의 척추부상, 에릭의 다리 중상, 보잘 것 없는 식수와 식량은 일행의 생존적 열망을 떨어뜨린다. 토사물을 흡입키 위해 달려드는 넝쿨의 재빠른 움직임, 기생을 위해 에릭의 상처를 뚫고 신체 속으로 들어간 넝쿨, 하반신의 마비로 죽음의 문턱에 선 그리스인의 하체를 먹어대는 무성한 넝쿨의 집요한 공격, 이를 피해 폐허를 벗어나려 하지만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막아선 마야인들의 화살과 총신들은 오직 그들이 떠나올 때 남긴 메시지를 확인할 그리스인의 친구들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구원의 기대만을 남긴다.

 

생존의 희망은 오직 외부로부터의 구조밖에 남은 것이 없음을 인정할 때, 그러나 그 구원조차 가능성이 퇴색하게 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목마름과 배고픔, 잠에 빠질 때마다 인간의 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달려드는 음험한 식물의 공격, 자신의 앞에 죽음만이 놓여 있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 그리고 바로 옆의 연인과 동료들이 넝쿨식물에 의해 살해당하고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만 할 때, 우린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그 잘난 이성은 아무런 기지도 발휘하지 못한다.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몰래 물을 들이켜고, 한정된 열악한 식량을 삼켜버리는 이기심, 타인의 약점을 힐난하고, 시기하고 의심하며 감정의 싸움에 몰두한다. “굳이 넝쿨이 죽일 필요 없지. 너희들 스스로 자초하고 말거야.”라는 자조의 말처럼 희망이 떠나버린 인간은 생존을 위한 투쟁심, 생의 의욕을 상실하고 만다. 자멸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기다리고 희망하고 견디는 것 뿐”이라며, 삶의 가능성, 생의 의지를 지키기 위한 견뎌냄, 인내의 지혜를 다짐하지만 희망의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인간을 삶의 시험에 돌입하게 한다. 결국 저 시시포스처럼 인간은 모든 것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됨을 수긍하고, 보기를 바라지만 어둠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아는 맹인이 되어 계속해서 전진한다. 그리고 바위는 또다시 굴러 떨어진다. 소설은 이같이 결코 해피엔딩을 보여주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사라지고 난 그곳에 또 한패의 젊은 그리스인들이 둔덕을 넘어 동료의 이름, 파블로를 외치고 있으니.

 

빈틈없이 독자의 뇌리를 채우는 가득한 공포, 심연보다 깊은 표현할 길 없는 아득한 공포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끝 간 데 없이 마음을 죄어온다. 그럼에도 책을 놓을 수 없는 이 기묘한 매혹을 무어라 할 수 있을까? 희망이 상실된 지대, 그곳에 좌초된 인간들의 뒤늦은 깨달음, 그리고 탄식을 절로 나오게 하는 인간의 본성들, 터질 듯한 공포의 괴성을 같이 질러댈 것만 같은 그 소스라치게 하는 악마적 전율을 조작해대는 치밀한 문장의 마법일까? 초자연적 스릴러! 진정한 압도적 호러 걸작이라 왜 아니라 하겠는가? 공포를 이해할 줄 아는 독자들에게 감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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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 / 비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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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보다 깊은 표현할 길 없는 아득한 공포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끝 간 데 없이 마음을 죄어온다. 터질 듯한 공포의 괴성을 같이 질러댈 것만 같은 악마적 전율을 몰고오는 치밀한 문장의 마법, 공포를 이해할 줄 아는 독자들에게 감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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