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타르, 왜 철학을 하는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지음, 코린 에노도 해제, 이세진 옮김, 이성근 감수 / 북노마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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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타르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지 않는다. 이처럼 원점에서 철학을 찾으려는 것은 스스로 침잠하는 그 본질을 망각한 실착행위(실수)라고 비판한다.  그래서 '왜 철학하는가'라고 묻는다. 사실 우리들은 일상적 삶 속에서 '철학'을 말할 기회는 거의 없으며, 현실의 실제와는 동떨어진 형이상학적 세계의 한가한 사유정도로 여기기까지 한다. 그런데 과연 철학이 이렇게 삶의 실제와는 이격된 존재일까? 만일 그렇다면 인간의 삶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철학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야하지 않았을까?

'왜' 하느냐는 물음은 이러한 의미에서 이미 우리의 삶속에 실제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전제이며, 또한 "의문시 되는 대상의 실제적 현존과 가능적 부재"가 함께하고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제 리오타르는 급진적인 전개에 착수하는 듯하다. 바로 이 물음 자체가 '욕망'의 본질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욕망이란 자신에게 없는 것(부재)을 향해서 나아가듯 대상에게로 향하는 움직임이지 않은가? 현존하는 것이 자기에 대해서 부재하든가 부재가 존재하는 한에서 욕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존의 모든 관계는 부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라고 썼던 '라캉'의 이 당연한 말에서 욕망이야말로 우리 존재의 주인임을 확인하게 된다. 철학은 왜 하는가? 라는 물음의 답은 바로 인간은 '왜 욕망하는가?' 로 답변된다. 그래서 이 책은 '욕망' ,  본질상 자신의 결합속에 존재와 부재를 품고 있는, 그러면서 한데 뒤섞지 않고 함께 지탱하는 그 힘을 찾아가는 여정이 된다.

 

'플라톤'의 [향연]中 '소크라테스'를 유혹하는 '알키비아데스'와의 대화를 통해 철학과 욕망의 관계를 흥미롭게 풀어나간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매혹적인 아름다움, 자신의 몸을 대가로 소크라테스의 지식을 얻고 싶어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요구하는 대가인 지식을 내놓을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고 알키비아데스의 거래제안에 모호하게 답한다. 아테네의 최고 스타인 알키비아데스는 이렇게 철학자를 정복하려 했으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더욱 몸이 달아 안달이나고 되레 종국에는 소크라테스의 노예가 되고만다. 소크라테스가 짐짓 위선을 떤 것일까?  "지혜란 결코 자신을 믿지 않기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다.  "항상 상실되고 새롭게 부재의 현존을 찾아나서는 것이 지혜"이니 소크라테스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을 보인것이다. 물론 알키비아데스의 거래가 실착행위인것만은 아니다. 결국 자신을 내어주는 방법으로 소크라테스에 안겼으니 어찌보면 리오타르의 해석처럼 알키비아데스는  "정념의 멋진 게임"을 한것이며, '헤겔'의 말처럼 "노예는 주인의 주인"이니 말이다.

 

이 재미있는 일화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지혜'를 찾는대신에 '자신이 왜 찾는가를 찾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철학한다는 것은 바로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라는 기막힌 답변이 된다. 플라톤은 이 일화에서 이처럼 철학을 얘기하는 것으로 만족했을까? 여기에는 이미 사물화할 수 없는 것을 '사물화'시키는 인간들의 논리에 반성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있다. 지혜를 마치 소유가 가능한 사물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논리를 중단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철학은 현실의 삶 깊숙이, 인간의 일상적 삶 자체이다. 이렇게 리오타르와 얘기하다보면 철학은 어떤 주제에 대한 사색이 아니라 모든 세상의 정념들이 있으며, 스스로에게 말하는 담론을 통해서 자신을 파악하는 한 순간 한순간이 된다는 것을 절로 깨우치게 된다.

 

리오타르는 이 욕망과 철학의 관계성을 통해 왜 철학을 하는지 더욱 밀고나간다. '철학의 기원'에서는 일자(一者)의 상실, 의미의 죽음, 다시말해서 인류가 일자, 통일성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로인해 상실감과 분열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의미'를 탐색하는 것처럼 당연한 행위가 없다고 주장하며, '철학과 말'에 대해서라는 강의를 통해서는 "사유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사유를 표현하는 것이 말"이라는, 사유를 사물처럼 여기는 생각에 딴죽을 걸며 사물화적인 발상을 비판하고, 생각도 이미 말이며, 생각하는 바를 명명할 수 없다면 아직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절대 명제를 선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4편의 소르본 대학 예비교양과정 강의)은 4편인 '철학과 행동에 대해서'라는 강의에서 방점(傍點)을 찍는다. "사유가 현실에 이르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현실이 사유에 이르러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철학은 자기 시대의 현실적인 문제의식에 호응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형이상학의 세계, 비인간적 세계, 내세 따위를 말함으로써 문제의식에 대한 화답이나 실제 사람들을 일깨우고 확립하는 방식 자체가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실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철학이야말로 현실에서 체험되는 '결핍'에서 비롯되기에 다른 것에 대한 욕망,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다른 관계 조직에 대한 욕망이 낡은 사회적 형식들을 뛰어넘지 못하는 데서 현실성이 나오는 것이라고, 철학이야말로 현실의 삶이며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리오타르는 그야말로 걸출한 철학의 정의를 내린다. "욕망이 있기 때문에, 현존속에 부재가 있기 때문에, ~ (중략) ~ 또한 권력이 아닌 우리의 권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얻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소외되고 상실됨으로써 사태와 행위, 말해진 것과 말하기의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기 때문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말을 통하여 결핍의 현존을 증명하지 않을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철학을 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너와 나, 우리들, 우리사회에는 철학이 실종된 듯하다. 자기 욕망의 부정, 자기의 현존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들끓는 사회, 즉 반성이 없는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된다. 철학하는 사회, 그 진솔하고 사유와 풍부한 욕망이 넘실되는 사회를 그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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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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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가의 전 작품집『고의는 아니지만』을 읽고 "자기반성도 없고 타자에 대한 이해도 없는 현실 속 일상을 투영해서 그것들이 잉태하고 출현하여 휘젓는 악의적 현상들과 참담하고 잔혹한 현실 세상의 수치스러운 속살을 치욕스럽게 드러내고 있다."라고 썼다.

아마 이러한 소회는  "지금의 인간들은 자기 이외에 진정한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가 없으며, 그 무관심이 유익하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체득한 개체들"이라는 나름의 인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다시금 옮겨 적는 이유는 이번 작품집『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다는 연상에서이다. 바로 그 무관심과 타자의 몰이해의 속살들, 양상들에 마치 줌인(zoom in)하여 각개를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기 때문이며, 급기야는 "바로 지금, 여기가 아닌 사실만으로도", 즉 이 현실의 모멸스러운 공간에서의 빈번한 탈출을 시도하는 인물들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랄 수 있다.

 

​「여기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 에서의 '하이'가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이나, '루초 폰타나(LUCIO FONTANA)'의 '탈리' 연작중 하나의 모작으로 그려진 칼자국, 사실은 그래피티에 지나지 않은 틈을 통해 비일상을 꿈꾸는 「관통」에서의 '미온'이라는 여성이 활보하는 세계에서 오늘 우리의 현실이 어디에까지 이르렀는지 우울하게 목격하게 된다. 이들이 원하는 세상은 그야말로 소박한 것들이다. 갖다버린 것을 주은 유모차와 주민센터 의류수거함에서 챙긴 수유셔츠가 아니라 3분백과 실크블라우스라는 "그저 단순 명료한 몰개성적 표지"지만 그것이 이 사회에서는 그토록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작품「이창」에 등장하는 '오지라퍼'의 이웃에 대한 침입에 가까운 관심이나, 「이물」의 '사회복지사'를 툴러싼 관심에 적의 적인 사회 양상, 그리고「식우」의 "내가 아니면 너도 안돼"에 기초한  '니은'의 타산적 배려처럼 타자에 대한 자기 이익, 자기 욕구 충족을 기반으로 한 관심이나 연민이란 오히려 세상을 더욱 불온하게 할 뿐이다.

 

작품「이물」에는 "내 밖에 있는 나 아닌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침입자"라는 주절거림이 있고, 인면수(人面樹)가 되어버린 무수한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인 「덩굴손 증후군의 내력」에는 "거대 규모의 비극에 매일같이 둘러싸여 있다보니 외부에서의 사소한 자극을 포착하는 일이 점점 둔"해지며, 「이창」에서는 "누군가를 위한다는 신념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말한다. 그리고 「식우」에서는 "나눈다는 행위는 자리가 비어있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라며, "자기들의 위험과 이익에 어느 누구보다도 예민한 촉을 지닌"부류들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래 "자본의 흐름이 훨씬 정직하고 믿을만한 삶을 이루는 근간이 된다는 진실"을 신봉하는 사회에서, 나 아닌 존재를 책임진다는 일, 누군가를 위한 위한 배려와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서로 이물(異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면, 살아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주 불가능한 임의이며 임시"임에 동의 한다면, 욕심의 끝이 자멸인 식우(蝕雨)의 도시가 아니라면,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식 기회주의적 인식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우린 온 몸을 기울여 들어야 한다. 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저기 저곳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건네고 싶어하는 말은 기껏해야 한 장짜리 고막의 떨림이 아닌 온 몸을 써서만 들을 수 있는 그 무엇"이기에.

 

이제 우리 불통과 무심의 세계를 묘사하는 일이 너무 버거워 초자연적 현상에 의탁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덩굴손 증후군의 내력」, 산성비가 내리는「식우」, 거대한 저수지가 된 마을의 이야기「파르마코스」처럼 오컬트(Occult)적 사건이나 현상을 통해서야 현실을 비로소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은 우리들의 사회, 그 평범한 일상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자행되는 무분별과 냉혹함, 무관심, 비열함, 이기심, 비정함이 야기하는 잔혹하고 무참한 현실의 각성들이다. 우리 개개인들이 스스로 자초한 자가당착, 현실의 잔혹한 삶에 와 닿으면서 일으키는 그 음험한 파열음에 절로 몸이 수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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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블 이야기
헬렌 맥도널드 지음, 공경희 옮김 / 판미동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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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감을 상실한 순간들이 밀려왔고, 세상이 인식되지 않는 이상한 일들을 겪었다."

이런 감정의 무정함에 놓여있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책 읽기에 매달리게 된 것은 이러한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서였다고. 작가 '헬렌 맥도널드'와 교감하기 시작한 것은 위의 203페이지에 이르러 접하게 된 문장에서 비로소 출발되었다.

 

그녀는 웃는다. "삶의 신호들을 죽음의 현실에 끼워넣을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항상 내 곁에 존재한다고 여기던 사람의 부재,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애도를 현실의 세속성이 얼마나 무참하게 하는지 달리 할 수 있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책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상실앞에서 당혹해하는 중년의 여인이 있으며, 현실을 이해한 그녀의 치열한 자기 치유의 행로이다.

 

그래서 애도와 치유, 삶과 죽음과 같은 진부한 소재의 연속이거나, 삶의 치유라는 경험사례식의 회고담에 머물렀다면 이 책을 읽어내는 데 힘겨웠을 것이다. 책의 중심에 있는 20세기 초 동성애이자 사람들과의 관계에 적응하지 못했던 소설가 'T.H.화이트'의 아마추어로서의 조련기인 [참매]의 기록들과 헬렌의 유대감은 이를 극복시켜준다. 이 유대감에는 잃어버리고 잊힌 것과의 교감을 위해 매가 있으며, 언제나 겁먹는 것을 통해서 사물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매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닮은 꼴의 발견이 있다.

 

그녀의 참매, '메이블' 조련행위는 "자신을 다른  인물이나 상황으로 재창조하는 능력을 믿음으로써 자아의 상실과 이성의 상실을 견디는 능력"을 갖고자하는 노력이다. 그녀는 말한다.

"솜씨있게 사냥하는 동물을 조련함으로써, 그것과 밀접하게 교류함으로써, 그것과 동감함으로써, 모든 생생하고 진지한 욕망을 완전한 순수속에서 경험할 수 있을 터였다. ~ 중략 ~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으리라."

 

그리곤  "먹먹한 가슴에 매가 돌아오는 것만큼 약이 되는 것은 없었"으며,  그녀의 "가슴과 매를 따로 생각하기가 몹시 어려"울만큼에 이른다. 그녀가 매를 길들이고 있는 것은 시간을 다 사라지게 하기위한 행위이다. 시간이 무가 되어버리게 하려고 책을 읽는 내 모습이 어른거린다. 과연 이게 전부일까? 내게도 수없이 자문했던 질문이다. 그저 위안에 그치는 것, 사라지게 하는 것, 무언가가 부족하지 않은가? 헬렌과 메이블의 교감과 조련의 성공은 화이트와 무엇이 다른 것인가?

 

헬렌은 화이트를 통해, 또한 메이블을 통해 자신이 알지 못했던 것을 확인한다.  "사랑을 얻었지만 그 사랑을, 그 사랑을 믿을 자신이 없어서 겁 먹은 사내처럼 행동했다." T.H.화이트는 자신의 참매 '고스'를 마침내 자신의 주먹위에 돌아오게 하는데 성공하지만, 고스에 대한 믿음에 주저하며 다른 매에게 시선을 돌림으로써 영원히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참매는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이며 시무룩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중략~도무지 합리적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이후에 그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사귄 남자와 헤어진 헬렌, 사람에게 사랑을 돌려 받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던 화이트에게 사랑에 대한 믿음만큼 절실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사랑에 대한 영원한 좌절만큼 서글픈 것은 없다. 소외, 무관심, 이별, 죽음, ...

 

헬렌에게 메이블의 조련은 곧 삶을 견디는 법 자체이며, 미숙한 삶을 마무리짓는 전환이자, 사랑의 간절함에 대한 비로소의 인식이다. 그녀가 한 작가의 작품을 빌려 "심리적인 살풀이 굿, 과거의 삶을 태워 없애려고 쓴 통렬한 이야기"라고 해석한 것은 바로 헬렌 자신의 이야기인 바로 이 [메이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뭔가  아주 간절히 보고 싶어서 가만히 있어야 할 때는, ~중략 ~ 얼마나 보고 싶은지를 기억하고 참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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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노래다. 도저히 읽기을 멈출 수 없다"라는 작가'마크 해던'의 서평이 아마 내가 이 책을 읽도록 유혹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책 표지의 앞과 뒤를 살펴본다.

 

"인간과 자연, 생명과 죽음, 애도와 치유가 어우러진 '현재 진행형의 고전'"이라는 압축된 문장이 시선을 끈다. 아~ 급하게 읽어야 할 책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한다. 문장 하나 하나에 나를 집어넣으며 읽어야 할 책이리라는 짐작을 한다.

 

그리곤 책장을 넘기며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상실앞에서 삶의 고통에 당혹해하는 중년의 여인을 본다. 자신의 현실을 이해한 그녀가 선택한 자기 치유의 방법이 바로 "외로움을 치유하는 것은 고독이다."이라는 한 문장에 온전히 포용되고 있음을 또한 보게된다.

 

책 읽는 속도를 낮춘다. 가능한 문장에 철저히 조우하기 위해. 책을 다 읽은 후에 어떤 소회를 남기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우선은 책 읽는 나의 이 고독한 행위와 작가  '헬렌 맥도널드'의 참매, '메이블'을 조련하는 행위에는 어딘가 맞닿아 있음을 느낀다. 나의 인간성을 태우기 위한 그것으로써.

 

그녀의 메이블 조련행위는 "자신을 다른  인물이나 상황으로 재창조하는 능력을 믿음으로써 자아의 상실과 이성의 상실을 견디는 능력"을 갖고자하는 노력이다.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솜씨있게 사냥하는 동물을 조련함으로써, 그것과 밀접하게 교류함으로써, 그것과 동감함으로써, 모든 생생하고 진지한 욕망을 완전한 순수속에서 경험할 수 있을 터였다. ~ 중략 ~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으리라." 고.    P 76 中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관찰중인 대상 속에 자신을 넣는 관찰자가 됨으로써, 그녀 자신을 매가 지닌 야생의 마음안에 넣어 자신의 인간성을 태워버리는 것이리라. 책은 동물과 인간의 "문학적 조우"의 걸작이리라 머리를 끄덕인다. 이 책 읽기는 하나의 과정, 인생의 한 과정이 될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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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사월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유정희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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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제재인 삶과 죽음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카눈의 관습법’, 즉 죽음의 법칙이 우선시되는 기괴한 서사시를 읽으면서 어떤 위대함, 숭고함, 그리고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데, 문득 칸트가 분류한 숭고함의 유형에 맞닿으면서 두려움과 아름다움이 뒤엉킨 곳에서 숭고함이 피어난다는 감성의 보편성 같은 것을 확인하게 된다.

끔찍하고 부조리하고 숙명적인 죽음의 법칙이 지배하는 ‘라프쉬’라는 알바니아 북부지방의 피의 복수에 얽힌 침울한 이야기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신비스러움과 친근함, 아름다움, 욕망의 감정이 어우러진 그 어떤 위대함, 경외를 떨 칠 수 없게 한다. 아마도 죽음이 내재하고 있는 그 자체의 위대성으로 인해 인간의 운명에 어떤 영원한 것이 부여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한데, 자신이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삶이 이어질 수 있다는 삶이 두 동강 난 청년이 발하는 비극성이 수반하는 감당키 어려운 위엄, 육중한 무게가 직접적인 영향일 것이다.

 

“피는 피로 갚는다!”바로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라 할 수 있는데, 죽음을 당한 집안은 반드시 죽음을 일으킨 집안에 죽음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명예라는 자본을 축적하려는 것인데 이 역시 아름다움을 야기하는 한 요소라 볼 때, 우리네가 성스러움이라고 부르는 것의 한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어떤 감성의 소용돌이가 그치질 않는데, 그것은 이러한 요소들이 줄기차게 작동하여 아마도 시종 아련한 그리움, 동경, 연민, 그리고 미(美)로서의 숭고함 같은 것에 마음이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네 형의 피를 회수하지 않는 한, 너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도 살 수 없다.”형을 죽인 크리예키크 가문의 남자에게 복수를 하여야 하는 것이다. 칠십년 전 손님으로부터 비롯된 이 처절한 복수의 반복은 카눈의 엄격한 법칙이며, 이를 어길 수 없다. 사람을 죽이기 전에는 살 권리가 없다는 이 기이한 삶과 죽음의 모순법, 이제 피를 회수해야 한다. 피를 회수당한 형의 피를 다시 회수해야 하는 것, 그리고 피를 회수하면 역시 그의 피도 회수당한 가문으로부터 회수당할 것이다. 이 작품이 위대한 것은 이처럼 생명의 법칙을 압도하는 죽음의 법칙이 뿌려대는 그 음울한 숭고함 때문만은 아니다.

 

신화와 같은 서사적 아름다움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층위의 비판이 그것인데, 카눈의 관습법이 지배하는 라프쉬를 신혼 여행지로 선택한 관찰자, 이 불행한 산악주민들로부터 예술적 재미를 찾으려는 작가‘베시안’의 오만함이 대변하는 지배자와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에 대한 은밀한 비난이다. 아름다운 신부‘디안’과 함께하는 라프쉬의 마차여행은 살인의 의식으로 점철(點綴)된 카눈의 관습법이 삶의 모든 행위를 실타래처럼 얽어 도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 속에서 미를 찾는 양태이다. 그러나 피를 회수하고 피의 세금을 내기위해 피의 관리인인 오로쉬 성을 나선 청년‘그로즈그’와 먼발치에서 눈을 마주한 디안은 죽음의 표시를 몸에 달고 있는 그 비극적 광휘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다. 죽음이 내려앉은 청년이 발산하는 두려움과 그 속에 동반된 전율, 그것은 마음을 끄는 그 무엇이다.

 

소설은 애초에 생명의 법칙보다 죽음의 법칙이 우선시 되는 이 지역, 즉 카눈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 바로 그러한 장치 속에 베시안과 디안이 뛰어들게 함으로써 비극의 씨를 잉태하게 하는 것인데, 그래서 소설이 온통 비극적 숭고함에 빠져들게 한다. 그조르그, 죽음의 표상인 검은 리본을 단 파리한 청년의 모습에 디안은 고통스럽게 그러나 동시에 감미롭게 무너져 내린다. “아무리 비싼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리라”고 디안은 마음속으로 되뇐다. 이것은 남편 베시안의 의도를 무참하게 전복시키는 것이며, 자신의 예술을 살찌우기위한 행동, 즉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지배 권력의 탐욕에 대한 파멸의 예고이기도 하다. “당신의 예술에선 범죄 냄새가 나오!”“피비린내 나는 연극을 공연하라고 몰아넣고는 그 연극을 관람하는 거요.”바로 그걸 ‘살인의 미학’이라 부르면서.

 

한편 이 작품을 미학의 향연장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인데, 칸트를 비롯해서, 바타이유, 랑시에르의 숭고미와 죽음의 사유들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그 지적 감수성을 깨워대는 통에 정말 예술의 지고한 즐거움에 빠진다는 것이 이런것이구나 하고 내심 기쁨의 탄성을 질러대게도 된다. “날짜도 계절도 연도도 미래도 없는 영원의 시간, 더 이상 어느 것도 그와 결부되지 않는 추상적 시간”속에 누워 부서진 사월을 어둠에서 맞는 그 비극적이고 부조리한 삶에서 오히려 삶의 무한성을 발견하게 하는 작가의 위대함에 그저 찬사를 보낼 밖에 없다. 진정 기립 박수를 보내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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