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
류전윈 지음, 문현선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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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하고 단순한 문장, 으레 그렇듯 세상물정 모르는 듯한 어리숙함에는 해학(諧謔)이 내재한다. 그런데 그 웃음의 문장들이 모여 엄청난 질문을 제기한다. 우린 '왜 사는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대체 '삶이란 어떤 것인가' , 이게 어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의문인가?  진부하기 그지없겠지만 소설의 대답은 '선택의 연속' , '자신의 삶을 증명하는 일련의 사건들'이라고 하는것만 같다. 그런데 이 너절하고 낡은 말이 폐부(肺腑)깊숙이 비집고 들어오고, 흩뿌리는 빗속에 고개를 떨군 빛바랜 중년의 나를 보게 만든다. 내가 증명하려했던 것은 무엇인가? 내 삶의 무수한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지 않았던가?

 

소설 속 여인 '리설련'은 29세에 시작한 소송과 고소를 20년간 지속한다. 그녀는 자기 진실을 증명하는데 삶의 시간을 보냈다. 가짜 이혼이 진짜 이혼 되어버리고, 그래서 진짜 이혼이 거짓이혼이라는 재판을 구한다. 그렇다고 진짜 이혼이 되버린 남편과 결혼관계를 유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거짓 이혼의 판결후 진짜 이혼을 하겠다는 것이니, 사실 결과적으로는 하나마나한 재판이지만 그녀는 두 번째 자식을 출산하기 위한 방법으로 남편과 위장이혼을 한 것이니 사실은 거짓 이혼이 진실이다. 허나 소송의 결과는 적법한 이혼서류와 절차를 밟은 것이므로 법률적 진실이라는 판결이다. 그녀는 패소한다. 진실이 부인된 것이다. 위장 이혼을 빌미로 이미 새 살림을 차린 남편은 당연히 이혼의 진실을 주장하고 그녀는 판결을 번복할 상급 판관들을 접촉하려 하지만 오히려 폭도로 내물리기까지 한다.

 

이제 그녀는 지방 관서의 수장들을 찾아가 호소한다. 현장, 시장, 성장, 그러나 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일개 촌부의 소송은 그네들의 행동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자신들의 이익에 충혈된 관료들이 이 깨알같이 작은 사건에 관여할 리 없지않은가. 그녀는 마지막 수단으로 국가의 고위관료들이 모이는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열리는 베이징의 대회장에 들어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시도하고,  "억울합니다"라고 고소장을 꺼내는 순간 그녀는 대회장 경비인에게 붙들리지만 이 상황을 보게된 국가 지도자에게 여인의 사연은 전달된다. 리설련 사건을 예로들면서 인민위에 군림하지 말고 인민을 섬기라는 지도자의 말에 해당 성장은 그녀의 고소장에 거명된 법원장을 비롯한 현장, 시장들을 줄줄이 해임한다. 촌부의 이혼 소송이 고급관료들을 무더기로 파면하는, 영문도 모를 그네들의 인생을 절단내는 국가적 사건이 되어버린다. 그럼 여인의 고소는 성공한 것인가? 법률적 진실을 뒤집을 어떠한 증거도 없는 그녀의 소송은 번복되지 않는다. 그녀가 원하는 '진실의 증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매년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열리는 기간이면 그녀는 베이징으로 숨어든다. 지방행정관료들과 법원관계자들은 그녀를 소백채(小白菜 )라 부르며 머리를 내젓는다.

 

그런데 400쪽 남짓 펼쳐지는 이 장황하게 고소로 점철된 여인의 20년 세월의 이야기는 이혼소송의 대상이었던 남편의 죽음으로 그야말로 시르죽는다. 그리곤 20여쪽에 불과한 해임된 현장 '사위민'이라는 남성의 '장난'에 관한 에피소드에 무참하게 묻혀버린다. 해직된 이후 렌구수러우(連骨熟肉)라는 익힌고기를 파는 우일촌이라는 유명식당을 운영하며 가까운 벗들과 마작을 하며 "지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중 이모님의 부음을 받고 천리길을 달려가지만 명절이 겹쳐 돌아오는 열차표를 구하지 못한다. 허나 그의 지치지 않는 삶을 공유하며 함께 늙어가던 친구와의 마지막 마작 게임을 위해 어떻게든 고향으로, 그의 우일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리설련의 그것이다. "억울함을 호소합니다"라고 쓴 종이를 머리위로 올리는 순간 경찰이 덥치고, 그의 고향으로 호송된다.

 

작가의 이 기만적인 작품의 구성, [장난]은 동일한 행위가 발생시키는 양 극단의 의미를 생각케 한다. 20년의 진지함이 장난이 되버린 인생, 1분도 채 되지 않는 순간의 장난이지만 진정함이 물씬 나는 인생, 우리가 선택할 삶은 어느 것인가? 사위민이라는 인물에게 돌발적으로 다가왔던 해직, 그리고 그의 선택, 삶이 어찌 자기 뜻한데로만 흘러가겠는가?, 그러함에도 그 선택이란 또한 어떤 것인지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니고 독자를 설득한다.  어쩌면 나는 리설련이라는 여인의 삶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내가 나의 삶 내내 내게 증명하려했던 것이 무엇인가? 하고 자문해본다. 오~ 지치지 않는 삶이라는 이 간결한 문장이 간절하고 깊게 다가온다. 소박한 문장이 발산하는 류전윈 특유의 해학과 삶의 의미라는 통렬한 물음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이 삶의 시간에 절로 머리를 숙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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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고독
박형숙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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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소위 안정된 가족 생활이라는 것, 즉 공고한 일부일처의 관계만을 유일한 이상으로 보는 관념의 거부에 막연한 동의를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현실과 환상의 좁은 틈바구니에서 겨우 존재하느라 힘들었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쓴 이 작품집에 대한 '작가의 말'속에서 그 거부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하는 충동이 일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관념의 거부를 넓게 정의하여 '불륜(不倫)'이라는 한 단어에 가두어 두려하고 "불륜 소설은 쓰레기다."라고 통속적 이해로 재단하여 비난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를 회피하는 위선"이라고 대응하는 식의 진부한 사회적 시선을 반복하고 싶지도 않으며, 또한 불륜도 사랑인가? 간통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어떠한 것인가? 라는 식의 관음증적 연민, 혹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거나, 서로의 몸에 자신을 기록하기 위한 정사(情事)라는 식의 언어의 향연과 같은 수많은 수사적 되풀이에도 관심을 둘 여유가 없다.

 

오직 "좁은 틈바구니"라는 이 경계지대, 소위 '불륜(不倫:Infidelity)'이라고 폭넓게 정의되는 상황의 영역, 상대자에 대한 신의를 가진 정인(情人)을 배반하는 행위, 보다 좁게 정의하자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적 관계' 를 맺는 사람들이 거니는 그곳에서 '겨우 존재'하는, 이 욕망의 지대에서 존재하려고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내적 풍경, 그 인간적인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작가의 의지에 매력을 느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겠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내게 좁은, 즉 현실과 환상의 틈바구니라는 존재지역, 그곳의 정서를 탐색하는 여정이 되었다.

 

작품집의 모두에 있는 [풀 스토리]에서 그 환상의 첫 이미지를 엿볼 수 있다. 자신의 친구'태환'과 관계를 맺은 아내 '미령'에게 남편 '영수'왜 그랬어라고 묻는다. 그녀의 대답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에 가 닿아있다. "그냥 궁금했어, 내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 궁금해서 새롭거나 모르는 것에 대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의 발동이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선을 걷어낸 진실의 마주함이랄까?

 

두 번째 수록작인 [한 낯의 꿈]에 이르면, 처음”, "미지의 가능성"과 같은 신비감에 대한 현혹, 그 환상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을 유부녀인 '미희'라는 여성은 "가정보다 더 소중한 것",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욕망"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상대자인 남성은 "성욕"에 불과한 것이라고 조롱하지만 말이다. 작품 [아홉 번째 고독]에서는 현실과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을 왕래하며, 그 경계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세무사의 아내가 등장하여 '아홉 번째 고독(9th-solitude)'이라는 허영 끼 가득한 아이디를 사용하는 소설가의 미궁에서 진실을 묻는다. "사랑인가요?", 그러나 묻는 순간 대상은 사라지고 만다. 현실에 발을 지탱하지 않은 그 허구, 아니 환상의 부질없음과 공허함이 잔뜩 묻어난다.

 

소설 속 환상의 실체 유형 몇 가지를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현실은 결혼제도 내에 있는 남녀이고, 환상은 욕망의 진실에 족쇄를 채운 금기와 금지의 실체이다. 여기서 오늘의 성() 이데올로기로서의 섹슈얼리티(sexuality)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작품 [한 낯의 꿈에서], 유부녀 '미희'"죄의식이란 한낱 불투명한 의식의 그림자"라고 자신과 유부남과의 성적 만남, 즉 불륜이라는 금지의 언어를 한 방에 돌파해낸다. 게다가 [칠월의 풀밭]이란 단편에서는 "이별만이 사랑을 아름답게 해주죠. 이별 없는 사랑은 부패"라고 하면서 늘 돌아설 준비를 하는 그런 관계, 어쩌면 성적 쾌락이라는 이익만을 향유하려는 듯한 성 심리의 한 단면을 그려내기도 한다.

 

이처럼 이 틈바구니에 서있는 사람들의 정서는 불투명한 의식의 그림자라는 죄의식, 전적으로 소유하지 못하는 불안감, 의심, 이별의 준비와 같은 현실성과 자유, 아름다움, 도취, 위안, 최상의 기쁨 등의 환상, 혹은 감정과 윤리 사이의 숨 막히는 갈등 속에 놓여있다. 그러나 단편[비행]에서 아내 일탈의 추억을 상징하는 재즈의 선율을 담담히 수용하는 남자, [한 낮의 꿈]에서 아내가 출근 한 후 자신의 집에서 유부녀와 정사를 나눈 후 문득 "아내의 잔소리가 귓가에 살아나기 시작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라는 남자가 있는가하면, [칠월의 풀밭]속 여성 '성하'처럼 세상의 모든 남자를 자신의 안에 담으며, 또한 남편을 사랑하는 여자, 또 다른 육체를 꿈꾸는 욕망을 말하는 여자가 있다.

 

남자와 여자의 성적 쾌락의 궁극이 어디에 있는지 극명한 대비를 느끼게 한다. 이 대비는 자신의 친구와 성관계를 맺은 아내 미령이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이 느껴졌다.", 또한 소설 [비행]에서 남편 ''는 결혼의 이유를 "위생적이고 뒤탈 없고, 돈 안 드는 섹스"라고 주장하고, 단편[린의 수치]에서 전임강사 ''는 여()제자로부터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육체적 관계를 맺은 여자의 심리적 도달점은 수치심"이란 것을 비로소 이해하는 것처럼, 성기 위주의 남성의 섹슈얼리티, 그리고 여성의 에로스적 본능, 즉 성과 사랑의 교호(交互)로 진화한 여성의 섹슈얼리티, 나아가서 여성의 결혼에 대한 기대는 지금 오늘 우리의 결혼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녀 간 간극의 심연을 보여준다.

 

이러한 오늘날 여성의 성적 태도, 오랜 동안 성적지위를 향상시켜온 여성들의 성 관념이 여전히 가부장적 태도에 머물러있는 남성의 그것과 괴리를 일으키고, 그 파열음은 더욱 커지기만 하는 듯하다. 소설 속 남자들은 오직 유혹 또는 정복의 테크닉이라는 방면에서만 사랑의 전문가가 되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들의 직업이나 일에서 자기정체성을 찾으려 하지만, 여주인공들은 처음, 새로움, 우발성과 같은 낭만적 사랑의 에로틱한 효력이 성적인 만족과 행복을 보장할 것이라는 환상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바로 이 '새로움'이라는 환상의 공통성이 보이며, 이는 미래의 시간을 향해 유대를 공유하며,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고 서로에게 민감해질 준비가 되어있음이라는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이란 단어만큼 억압된 언어도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문자 그대로 윤리적이지 않다는 불륜(不倫)이라는 광의의 단어로 남녀의 성을 포괄적으로 금기시하고 있다. 이 금기의 부조화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부정의 언어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이 환상의 공통성에서 우리는 보다 공고한 결혼관계, 부부관계, 연인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앤서니 기든스'가 말한 '합류적 사랑'의 정의처럼 남녀 "두 사람의 정체성이 각기 달랐음을 인정한 위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협상해가는 그러한 사랑", 그리고 "관능의 기술을 결혼 관계의 핵심에 도입" 한 그런 사랑의 관계로, 바로 에로티시즘은 신체의 감각을 통해 표현되는 감정을 의사소통이라는 맥락에서 가꾸어가는 것, 곧 쾌락을 주고받는 기술임을 이해하는 것이지 않을까?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감히 이 소설집을 섹슈얼리티의 상호적 성취를 결혼과의 유지 또는 해소를 좌우하는 핵심요소로 그려낸 수작(秀作)이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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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11-03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읽지 않아 필리아(비의식) 님의 논리만 가지고 여쭈어 보겠습니다. 결국 필리아(비의식) 님의 결론은 (부부 사이의) 사랑은 “쾌락을 주고 받는 기술임을 이해하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것일 텐데요. 이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역시 사랑이 아닌 ‘배신 혹은 불륜(不倫)’이라는 계기였습니다. 필리아(비의식) 님의 논리 전개에 그렇게 나타나 있죠. (혹은 박형숙 소설의 이면에요.) 그렇다면 사랑은 사랑 그 자체만을 통해서는 인식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저런 물음 묻고 보니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까닭은 사랑과 쾌락에 대한 개념적 착종을 일으킨 것 같아서요. 무슨 말씀이냐면, 사랑이란 개념에는 정신적/추상적 가치가 더 강하게 내재된 것 같고, 쾌락이란 개념에는 물질적/물리적/감각적 요소가 핵심적인 것 같다는 것이죠. 문학이라는 것을 논리에 치중해 분석하는 것은 그야말로 너무 건조한 것일 텐데요. 그렇더라도 소설가나 소설비평가는 개념적 착종에 너무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험한(?) 편견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필리아 2024-10-29 19:23   좋아요 0 | URL
네, 불륜이란 언어 자체가 이미 쾌락을 주고 받는 관점에서 출발하게 하지요, 그런데 님의 말씀은 쾌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의 문제같군요. 결혼이라는 남녀의 결합과 유지에 대해서 님의 지적처럼 감각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구요, 소위 관념적이고 정신이기도 한 사랑과의 융합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합류적 사랑`이지요. 편견이라 비판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 일천한 감상평에 성심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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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우엘벡 지음, 김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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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갗이 직접 부딪히는 섹슈얼리티, 그러나 점점 이를 회피하는 현대인들의 정신작용과 행동양식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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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심연 위에 걸쳐진 가느다란 나뭇가지˝라고 말하던 [이탈리아 구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그리곤 ˝이제 여기까지 왔어˝라는 마지막 말의 의미가 더욱 절절해진다. `헤닝 만켈`,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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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더스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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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에는 소설의 내용이 있습니다.

 

[엔더스]의 전작인 [스타터스]를 읽고 나는 "생명윤리에 대한 도덕적 성찰을 이끄는 작품"이라고 소감을 썼었다. 그리곤 비정한 '신체강탈'의 가상세계라는 소재의 참신성과 스토리의 달달한 맛에만 머물 수 없는 소설이라고 했다. 그만큼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진중함이 소설의 전체를 이끌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엔더스]는 전편의 무거운 주제의식을 떨어내면서 이야기의 재미를 증폭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정통 추리소설의 장점을 겨냥하기라도 한듯 미스터리와 긴장감있는 속도, 그리고 독자의 기대를 멋지게 뒤집어버리는 대반전, 게다가 TV리얼리티쇼를 방불케하는 생존게임식 요소까지 구성과 스토리의 전개가 놀라울 정도이다. 그렇다고 '리사 프라이스'가 아무런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외모라는 게 너무 과대평가 되고 있다는 거야. 아름다움은 홀로 스타의 기준에 맞추는 게 아니라, 너한테 맞추는 거야" 와 같이 성형중독 사회를 꼬집는가하면, "백신이 허용된 특권 계층...정치인, 장성, ~(중략)~ ...유명연예인이나 상위 부유층 미들이 있었다." 처럼 생물학전으로 전멸한 중년세대인 '미들'중에서도 부를 거머쥔 소수계층이 생존하고 있음을 비추고 있다. 이는 자본집중 사회의 편중과 왜곡된 부의 윤리의식을 배경화하려는 작가의 의지라 할 것이다. 이러한 배경의 세계를 기반으로 십대의 소년 소녀인 '스타터스'들의 신체렌탈을 주도했던 바디뱅크인 일명 '프라임 데스티네이션(Prime Destination)'의 파괴가 있은 직후 이 탐욕과 부도덕한 집단의 수장인 '올드맨'의 집요한 추적과 열여섯 소녀 '캘리'의 용기있는 대결이 펼쳐진다.

 

프라임데스티네이션에 자신의 신체대여를 위해 머리에 칩이 이식되었던 스타터스들은 '메탈'이라고 불린다. 올드맨은 바디뱅크가 붕괴되었으나 메탈 추적능력을 통해 이들을 납치, 매매의 대상으로 삼는다. 프라임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식된 칩을 개조했던 캘리에게 올드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녕 캘리, 내가 그리웠지?" , "나는 여전히 어떤 칩이라도 접속할 수 있어", "게다가 무기로도 바꿀 수 있지"

동생 타일러의 신발을 사주기 위해 대형 쇼핑몰을 찾은 캘리의 눈 앞에서 시위라도 하듯 메탈이 폭발하고, 유리와 금속 파편이 캘리위로 비처럼 쏟아질 때 그녀를 방패처럼 막고있는 스타터를 느끼게 된다. '하이든', 그는 올드맨과 추종자들의 추적을 피해 캘리의 도피를 돕고, 올드맨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알린다. 아버지에 대항해 캘리와 그녀의 동생 타일러를 보호하고, 자신의 비밀주거지에 도망자들인 메탈들에게 안식의 공간을 제공한다.

 

그러나 습격을 받은 이들의 비밀공간은 파괴되고 같이 기숙하던 메탈들은 납치당하고 만다. 이윽고 올드맨의 접속기술은 더욱 진전되어 캘리의 신체를 통제하기에 이른다. 통제영역을 벗어나 그를 파괴하기 위한 캘리와 하이든의 쫓고 쫓기는 긴장국면은 지속되고, 캘리에게 아빠의 목소리가 접속되어 들려온다. 올드맨의 변조된 가장일까, 아빠가 생존하여 계신걸까? 캘리는 혼란에 빠진다. 이 혼란은 여타 메탈들과는 달리 캘리에게 이식된 칩의 변조과정에서 변이된  '다중접속'의 가능성, 그리고 확신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신체에 여러사람의 정신이 진입하여 사용할 수 있는 독보적인 존재, 탐욕의 화신인 올드맨이 캘리를 추적하는 이유이다.  생명의 객체화, 대상화, 생산물화의 극치이다. 인간 고유의 정체성은 완전히 실종되고 오직 재화, 황금의 논리만 작동한다.

 

드디어 올드맨의 정체, 붕괴된 바디뱅크인 프라임의 조직 동기가 드러나는 반전이 시작된다.  "프라임이 존재하는 온전한 이유는 스타터 노예제의 끝이었어"  

그리고 캘리의 의식속에 들려오는 협박의 목소리 인물인 브로크만의 실체가 드러난다. 독자가 굳건히 믿고 있었던 존재들에 대한 기대와 앎이 산산조각이 나며, 지금까지의 이야기 전개를 다시 수습하기 시작해야 한다. 캘리와 하이든 일행이 싸워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캘리의 다중접속 능력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거래상품으로서의 최고 가치를 지닌 소녀, 캘리의 도전은 다시 시작된다. 자신을 통제하고 장악하는 힘에 대항하여 그 힘을 상대에게로 역전시키는 능력, 대반전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복과 통제의 가치로 과학기술을 사용하려는 계층의 야욕, 윤리적 감각이 실종된 비정한 신체 강탈의 가상 세계를 뛰어난 스토리 전개 역량에 버무려낸 SF와 추리문학의 결정판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혹시 [미들스]라는 제목의 후속 작품을 기대한다면 작가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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