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통해 스캔들이 왔다 - 모방적 욕망과 르네 지라르 철학 우리 시대의 고전 19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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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혹짙은 책의 제목만큼 '르네 지라르'의 주장은 매혹적이다. 그런데 이 매혹이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지만 흥미로움을 떨쳐낼 수 없을만큼 읽는 즐거움이 있다. 우선 서구와 비서구의 구분 연장선에서 논의되는 차이(差異)와 다양성(多樣性)의 부정을 통한 서구중심주의, 모방의 폭력성 논의에서 야기되는 인간 본질의 불분명함,  기독교 근본주의자로 비칠만큼의 타종교를 비롯한 고대종교의 폭력에 대한 무지의 주장이 그렇다.  즉, 같아지기, 따라하기, 혹은 의식, 무의적으로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는  '모방(模倣')'이라는 논쟁의 중심어(語)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모름지기 "인간관계의 핵심은 그 관계가 어떤 것이든 간에 모두 모방으로 되어있"으며,  "아주 사소한 몸짓까지 모방적 욕망 혹은 욕망하는 모방이 지배하고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책은 이 모방이론을 토대로한 자민족중심주의의 옹호와 상대주의의 비판, 그리고 모방의 폭력성과 인간의 집단적 폭력의 속성을 폭로한 희생양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3개의 논문과 이탈리아 메시나 정치학 교수인 '마리아 스텔라 바르베리'와의 자신의 철학에 대한 대담으로 구성되어있다. 바르베리와의 대담은 지라르의 연구자들에게는 그의 그간의 저술들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줄 것이지만, 일반 독자인 내게는 '상대주의 극복'이라는 주제하의 3개의 논문이 훨씬 많은 생각의 여지를 남겨주었다고 할 수 있다.

 

1. 이중모방과 나쁜 상호성

 

우선 우리네 일상의 모습을 바라보는 관점의 독특함으로 인해 이 '이중모방(二重模倣)'을 감상의 첫 번째 제목으로 삼았는데, 이는 아주 사소한 몸짓까지 '모방적 욕망'이 지배한다는 주장,  즉 동일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타자와의 경쟁관계에서나 설명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동일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개인들 사이에서도 과연 모방이라는 개념이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일례를 소개하고 있다. "당신이 나에게 손을 내밀자 나도 당신에게 손을 내민다는 행동"이 그것인데, 이것은 어떤 동일한 욕망관계나  경쟁관계와는 무관한 것이다. 이 대수롭지 않은 제의에 내가 참가하기를 거부할 때 당신의 반응은 어떨까? 아마 손을 거둬들이고, 등을 돌리거나 냉랭한 태도를 보이기가 십상이다. 그렇다면 모방이 아닌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손을 내밀지 않음으로써 모방을 거절했을 때 당신은 나의 거절을 되풀이함으로써, 다시말해 "거절을 모방함으로써 나를 모방한다."는 것이다. 일치를 실현하는 모방이 나오자 오히려 불일치가 견고해지고 강화되는 것, 이것을 이중모방이라 정의하는데 이는 곧 모방이 얼마나 엄격하고 단호하게 인간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증거라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상호성은 이렇게 모방을 통해 언제나 나쁜 상호성으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결국 적대자들은 점점 더 같아지면서 역할은 서로 바뀌고 서로를 반사한다. 이 유사해짐, 무차별화의 과정이야말로 바로 지금 우리 인간들을 위협하는 갈수록 심화되고 많아지는 폭력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인류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니 우리네 일상에서 목격하게되는 무수한 형태의 폭력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사유방식, 혹은 관점으로서 수긍할 수있다. 그러나 저항없이 순전히 납득하기에는 내키지 않는 것이 있다. 같아지는 것이 인간들의 궁극적 '목적'일까 하는 의문이다. 인간의 욕망이 지향하는 더 커다란 범주의 목적, 그것은 타자와의 '다름', 즉 '차이(差異)'가 아닌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라르는 '레비 스트로스'를 비롯한 구조주의자들을 겨냥해 "차이 타령만 하는 그런 인류학은 당연히 불완전하고 불구"라고까지 비판하고 있다. 오히려 폭력이 존재하는 것은 비슷한것, 동일한 것, 차이가 없는 것으로 부터 발생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주장하는 모방이론이야말로 인간과 인간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차이의 존중이라는 상대주의 비판의 핵심이다. 그래서 이 모방의 사슬을 끊는 것, '차별화'함으로써 폭력이 발발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과연 지라르의 이 '차별화'에 대한 맹신은 사회의 양극화라는 이 극단적인 차별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2. 희생양 예수, 모방의 폭력성을 폭로하다

 

모방이론은 급기야 기독교와 타 종교및 고대 신들과의 차별성을 입증하는 도구가 된다. '희생양'이란 무엇인가? 지라르는 "근거없는 비난을 제공해주는 그 맹렬한 전염때문에 까닭없이 비난 받는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즉 우리들이 익숙하게 사용하고있는 모방적으로 집중 동원된 한 무리의 사람들에 의해 부당하게 피해를 받는 희생양의 의미 그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는 희생양이다. 지라르의 주장은 여기서 시작된다.  거의 모든 종교나 신화의 신이 동일하거나 유사하게 희생양이 되지만, 기독교 이외에 이 희생양을 박해하는 사회를 비난하는 신화나 종교는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 이외에서의 희생양은 그냥 죄인이며, 사회는 무고한 자일 뿐이지만 기독교는 사회의 유죄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며, 차별화된 종교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희생양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폭력의 전염에서 나오는 환상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인데, 모방은 공동체를 하나로 만들어 내는 기저(基底)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의 동맹에서는 인간 영혼에 들어있는 어두운 세력이 드러난다. 집단적 전이는 전혀 새로운 죄악을 얻는다." 인간의 모방적 욕망을 적극 이용한 이 집단적 푝력성의 전염, 모든 사람들이 빠져있는 모방적 경쟁관계의 결과인 집단 폭력에 앞서 나타나는 카오스는 희생양에 대한 반대를 통해 더욱 단단한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곤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바로 이 희생양에 대한 '만장일치적 군중현상'인 "모방적 경쟁관계를 중단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은 평화가 아니라 분쟁을 주러왔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곧 사회조화라는 것이 폭력적 만장일치라는 거짓에 기반을 두고 있어, 이를 폭로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예수는 인간의 모방적경쟁관계 이면에 숨어있는 이 폭력의 지배력을 끊어내기위해 기꺼이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특정 종교의 유일신에 기반을 두고 있긴하지만 '모방적 경쟁관계의 중단'이 오늘 우리네 사회에서 얼마나 필요한 지적인가 하는 점에서 수긍의 머리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위신재를 향한 끊임없는 소비의 부채질과 과시적 욕망, 교묘하고 은폐되어 자신들이 지배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상징적 폭력이자 불평등한 계급적 질서의 공고화인 문화적(교육적) 구별짓기 등, 이 사회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의 단절을 위해 분명 모방이론은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이 책의 소감은 『마태복음 5:38~40』중 "앙갚음하지 마라. 누가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라는 문장으로 마무리 하여야 할 것 같다. 가장 폭력적인 사람도 자신은 항상 타인의 폭력에 대응했을 뿐이라고 믿을 정도로 폭력에 대한 인간의 관행적 환상을 지적하는 문구이다. "모방에 대한 우리의 무지 때문에 폭력 상승작용을 향한 큰 문이 열린다. " 폭력상승에 가담하지 않는 것, 부정적 상호합작의 빌미를 끊어내는 슬기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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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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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기억을 들춰내는 추억이 깃든 사연을 듣다보면 어느 한 지점에서 아니 어떤 단어나 문장, 혹은 그 분위기가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 놓곤 한다. '유배지의 한 끼니, 흘러간 사랑, 잃어버린 그 맛, 나그네 살이, 밥도둑- 토박이 음식' 등 다 섯장, 서른네 꼭지의 산문마다에 한둘씩 풀어늫는 추억의 레시피들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알지 못하는 세상의 창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도 하지만, 나는 자주시선을 멈추고 곧 회상(想)의 세계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아마 개정판 서문에 작가가 써 놓은  "누군가 함께 먹었던 음식의 맛에 대한 그리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문장 탓이었을까?

 

내가 제 아무리 혼자하는 삶의 의미있음을 강변()하고 있지만, 그 고독의 허기를 모른 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유배와 망명으로 제 땅에 있지 못했을 망정 항상 타인과 함께하는 작가의 삶의 풍성함에 시기심이 생기기도 했으니 말이다. 떠올릴 만큼 맛있었던 음식의 기억이 거의 없다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나누었던 순간이 지극히 없었던 내겐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순간 순간 나와 함께해주었던 사람들을 몇 번씩이나 생각하느라 글 읽는 것을 멈추어야 했다.

 

[기억의 고리, 그 시작과 끝]이라는 산문 속에 사랑스런 에피소드의 한 구절이 있다.  "수남아 너만 먹어!  나는 누룽지를 받아먹으면서 어쩐지 좀 부끄러웠다."

누군가 나만을 위해 몰래 건네주는 무수한 의미와 정감을 지닌 그 음식과 함께했던 추억이 내게도 아스라이 시간을 거슬러 풋풋한 행복감에 젖어들게 한다. 그리곤 "내 존재를 비춰주고 확인시켜줄 타인이라는 거울이 필요했던"이라는 [세상으로 나가는 남자의 창]에 깃든 문장에서 다시금 그 타인을 기억 속에서 더듬곤 했다. 나는 "모시조개 넣고 된장 고추장에 끓인 '냉이 토장국''같은 기억은 없다. 줄 곧 하나의 대도시에서만 살아 왔다는 것이 변명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내 존재를 비춰주었던 여인과 함께했던 동숭로 가로변(지금이야 상업성 짙은 곳으로 변했지만)의 작은 카페 '오감도'에서의 음식과 분위가 지금에도 내 가슴을 설렘으로 가득 채운다. 

 

이처럼 잠시의 행복감과 설렘의 시간으로 향기로운 추억에 잠기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고독한 식사의 허기"라는 문장이 날카롭게 나를 헤집는다. 이 달콤한 회상들, 누군가와 같이했던 순간이 이렇게도 오랜시간을 건너뛰어야만 한다는 것인가? 내가 진정한 관계들을 지니지 못했구나 라는 생각이 파고든다. 내겐 음식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그저 살기위한 하나의 습관 이상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삶의 전체가 갑자기 의미를 잃어버린것만 같다. 음식은 다름아닌 사람과의 관계,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 "내 시대의 추억을 되씹으면서 인생살이와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볼 작정"이라던 초판 서문의 이 문장속 단어들, '인생살이', 그리고 '사람의 관계'가 계속해서 내 입속에서 반복된다. 

'모하카르' 작은 해안마을에서  "무엇이라도 사납게 먹어치울 것 같은 식욕이 솟구친다." 던 '가스파초 수프'가 궁금해진다. 내 식어버린 삶의 열정이 살아날것 만 같다. 이 역시 함께했던 '부랑자'라로 부르던 벗이 있었기에 작가의 기억 속에서 되 살아났을 것이다.

 

언제나 나를 위해 달려오는 친구, 한 살 터울밖에 나지 않는 대학 1년 후배가 떠오른다. 그와 함께하던 음식이란 것들이 뻔 한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는 기억이다. "아욱 된장국이 올라올때면 어쩐지 수저가 무겁다. 좀 잘해줄걸"하는 이젠 세상을 같이하지 못하는 옛 지기를 향한 그리움의 언어에서 "순수한 처음의 식사를 회복하는 일은 자기 시대를 정화하려는 모든 사람들의 기본 출발점이다."라는 구절의 전정함을 곱씹게 된다. 쉽진 않겠지만 이제 나도 음식의 맛나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할까보다. 그와 그녀들과 함께하는 세상, 관계가 풍성한 세계, 인생살이가 의미로 가득한 세상으로 말이다. 함께하는 세계가 있는 작가의 인생살이를 한껏 부러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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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 2016-03-13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어요!!

필리아 2016-03-13 16:02   좋아요 0 | URL
저는 천천히 추억들을 떠올리며 읽었어요...
 
해질 무렵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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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시간을 현재에 생각케하는 노장의 회심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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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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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종(種)의 살아온 방식들,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인간의 삶은 계속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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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
베로니크 오발데 지음, 김남주 옮김 / 뮤진트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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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 누군가 있음에도 외로움이 착 달라붙는 쓸쓸함도 있지만, 다만 같은 지붕아래 나를 이해하는 유일한 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평온한 고독감도 있다. “고요한 배타성”, “쾌적한 고독”, 바로 이러한 상태가 유지되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된 것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 적대적으로만 바뀌어가는 그 어떤 힘에 대한 무의식적 거부감이 아닐까?

 

작품에 마냥 취해 나 또한 감미로운 현기증과 몽롱한 분열의 상태에서 한동안 빠져나오기가 싫어진다. 사람이 그립고 사랑이 아쉽지만 정작 사람들의 무리에 휩싸이는 것만은 피하고 싶은 그런 마음, 이기적인가? 화해하라고? 불온하지만 세상의 불온함이 가득 든‘작은 상자’를 열어보면 고통스러우니 바쁜 도시생활에 휩쓸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그래야 살 수 있다고?...소설은 그래서 거침없이 나가는 주류의 세상을 파괴하고, 물건들이 사라지는 새로운 시공(時空), 새로운 삶의 체계와 세상, 그 윤곽과 형태를 찾아간다.


더없이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랜슬롯’이란 사내, 그 수동은 세상에의 순종이 아니라 방심이라고, 살짝 세상 밖에 속해 있었다고 하는 남자다. 욕망이란 것이 유실된 삶, 그래서 타인에 대한 평화로운 방심에 익숙한 사람, 그러나 삶의 우연이란 그렇게 무력하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어서, 알 수 없는 생명력이 자신의 고독한 영역에 깊숙이 쳐들어와 고요함을 붕괴시키기도 한다. 하이힐! 이 물체 고유의 관능성이 느닷없이 그에게 떨어지는 순간, 그의 삶은 살아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 매혹적인 물건의 소유자, ‘이리나’, 세상에 대한 분노, 연민, “줄곧 세상의 끝으로 가서 멸종 위기의 동물을 찍어야”하는 여자, “육체가 별도로 존재하는 정서적인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여인과의 결합은 정말이지 삶이란 이렇듯 모순 같으면서 조화인 것이라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여자, 그러나 이 자유분방하고 세상의 어둠을 파헤치고 그래서 제거하는, 기성의 불온함을 걷어내고 다시 시작되도록 하려는 여인을 이해하는 과정, 아니 그러함에도 사랑하도록 하는 여인의 존재는 무엇일까?

권력을 가진 위험한 집단, 혐오의 대상들을 처단하고자 했던 여자, 세상의 분노를 착실히 지워버리려 했던 여자, 섹스는 그저 상대에게 예의를 표시하기 위한 행위에 불과한 듯 한 여자, 그 여자의 옛 남자들로부터 전해 듣는 그녀의 모습들로 인한 남자의 고통, 커져만 가는 의혹과 질투, 그 모호한 감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래서 이 모순되는 감정 속에서 몸부림치는 남자의 상처는 안타깝기만 하다.


세상, 산다는 것이란 그 본성이 본디 당혹스러운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 당혹감이란‘대상’으로부터 피어나는 건 아닐까? 소설의 남자처럼“자신과 사물들의 적대감을 혼동”했다고, 그래서 비로소 이 세상 그 누구도, 무엇도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수 없음을 음미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오늘도 파렴치한 이들, 사악한 이들, 잔인한 이들이 벌인 온통 우울한 아침 뉴스로 시작한다. “무질서가 지배하는 헛것 같은 장소”인 이 겹겹의 혼돈이 장악하는 세상의 진실을 사소한 일상으로 덮어두면, 또는 회피하고 자신의 내면의 둥지만을 감싸 안으면 평화는 오는 것인가? 춥고 음산한 벽지와 시끌벅적한 도시도 아닌 어떤 도시의 외곽지대를 정착지로서 만족해하는 남자의 돌아왔다는 이성(理性)은 왠지 낯설다.

 

내 마음의 고동을, 밤의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그것이 위안이고 평화라는 말일까? 그럼에도 사랑하는 여인의 부재(不在)에 대한 강박적 집념, 그 지독한 감정의 내면 일기를 좇으면서 거듭 이 모순된 감성이 내 것만 같은 느낌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여자의 대항과 돌발이라는 분노의 근본과 행동에 동조하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핏줄 속에 파닥거리는 화해에 대한 욕망이” 우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는 그 말이 더욱 진실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이해해 주었던 세상에 유일했던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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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페스트 2015-11-15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필리아님의 리뷰를 저희 뮤진트리 페이스북에 공유해도 될지요.

2015-11-15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페스트 2015-11-1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페이스북에 한번 놀어 오세요 ;;

https://www.facebook.com/mujintree/?ref=hl

헤닝 만켈 페이지도 찾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