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아 갈로티 서문문고 316
레싱 지음, 송전 옮김 / 서문당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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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소년은 오래전 동숭동 연극공연을 보려 맨 앞줄 좌석에 앉았다. 베르테르의 로테에 대한 열정적 사랑의 몸짓과 그가 권총으로 자살하는 충격적 장면만이 오랜 시간  뇌리에 남았었고, 그로부터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이 낭만적 격정의 소설을 다시 펼쳐든다. 흘러간 세월 탓인지, 이젠 사랑의 열정에 대한 감상(感傷)은 휘발되어 사라지고 남은 이성의 찌꺼기만이 진실처럼 내게 날아든다. 자살한 청년이 마지막에 읽었을 책상 위에 홀로 펼쳐진 책, 에밀리아 갈로티의 상징성 때문이었을까? 

 

아마 그런 탓일 게다. 청년 괴테의, 아니 그의 분신인 소설 속 베르터의 진짜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만이 관심사가 된 것이다. 메마른 이성의 고지식함만이. 아마 은 베르터의 고뇌는 바로 경직된 합리주의적 논리인 이성, 이것이 외면하고 있는 비논리적 감성을 말하려 한 것에 대한 정면으로 배치되는 읽기를 하게 된 것이니, 정말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젊은 괴테가 쓴 자전적 삶의 일화에서 출생한 소설이다. 줄거리는 물론 작품의 성격에 대해서는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듯한 그런 상식이 되어버린 소설이지만, 피상적인 이해만큼 사랑과 실연의 지독한 열정의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지식인 청년 베르터가 온전히 차지할 수 없는 한 여인에 대한 이룰 수 없는 갈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침내 자살하고 마는, 18세기말 당대에 베르터 신드롬까지 낳았던 감상적 낭만주의의 격정어린 소설이지만, 이는 서사(敍事)의 표면적 묘사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마 지역 무도회에서 마주쳐 한 눈에 사로잡힌 영지 주문관의 딸인 실제의 여성 샤를로테에 대한 짝사랑의 경험은 소설의 서사 축을 형성하는 시대의 분위기에 맞춤의 골격이었겠지만, 정작 괴테가 소설을 통해 하고자 했던 목소리는 시민계급의 사회적, 직업적 한계에 대한 좌절과 그로인한 무기력이었던 것 같다. 사실 당대 시민계층은 이중적 모순에서 갈팡질팡했던 같다. 귀족계급인 상류사회에 편입을 원하면서도 그 진입여정이 요구하는 굴욕과 모욕의 인내라는 노예성에 대한 반감 또한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한편으론 하층계급에 대한 차별로 인한 이익을 지속하여 누리고자 하는 마음 또한 물리치기 어려운 것이었다는 점이다. 베르터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가장 화나게 하는 일은 시민사회의 숙명적인 신분의식이야.

물론 나도 차별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는지 누구 못지않게 알고 있네,

다만 그런 차별이 내게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소설의 도입부 역시 청년 작가 괴테의 무도회 기억에 색을 입힌 것이어서, 그의 분신격인 베르터는 첫 눈에 영지 주문관의 딸인 로테에 빠져든다. 하지만 로테와의 친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미 약혼한 남성이 있는데, 궁정에서 큰 총애를 받는, 궁정관직을 지닌 훌륭한 자질의 청년 알베르트. 여행에서 돌아 온 알베르트가 나타나자 베르터는 로테를 떠나 친구와 어머니가 추천했던 공사(公使) 보좌역에 취임하고, 직업적 성취를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지각없는 천박함으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관례만을 고집하는 늙은 공사와 점증하는 갈등으로 직업의 미래에 한계를 절실하게 느낀다.

 

이윽고 공사의 상사인 C백작의 경고와 능력의 가능성에 우회적 칭찬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베르터는 공사보좌역을 박차고 나오는데, 그 결정적인 사건의 에피소드는 상류계급과 시민계급이 한 자리에 어울릴 수 없다는 엄중한 분리이고, 이는 그 무엇보다 선명한 차별, 직업과 신분적 한계를 특징짓는다. 상류 사회 신사숙녀의 저녁 모임이 있는 C백작의 오찬모임에 초대받은 베르터는 오찬 후에도 떠날 줄 모르고 어슬렁거리다 저녁 만찬을 위해 도착한 F남작, S부인, B양등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미 친교가 있었던 B양 조차 그를 외면한다. 급기야 C백작은 사람들이 자네가 여기 있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모양이네.”라고 나가줄 것을 요구한다. 훗날 B(귀족으로 추정)으로부터 뒷이야기를 전해 듣는데, 귀족 부인들이 당신과 같이 어울리느니 차라리 남편들을 데리고 나가버리겠다고 분노를 터뜨렸다는 것이다.

 

괴테는 이러한 이야기의 흐름에 주인공의 심적 변화를 호메로스에서 낭만주의 사조의 서사시 오시안으로 이동한다. 오시안이 호메로스를 내 마음속에서 몰아냈어.”, 격정적 영웅의 찬미에서 달빛 아래 선조들의 혼령을 이끌고 가는 거센 폭풍우에 휩싸여 황야를 헤매고 다니는 망령들의 신음소리이고, 고귀하게 전사한 애인의 무덤가의 (...) 애처로운 통곡소리가 그의 마음에 자리잡은 것이다. 청년의 마음에 들끓는 여인 로테의 소유를 향한 갈증은 그의 도덕성, 즉 출구없는 억제 속에서 광적 혼란으로 치닫는다. 그 결말은 독서 여부와 무관하게 알려진 대로 권총 자살이다. 그런데 베르터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현장 묘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

 

포도주는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습니다.

사면 책상 위에는 에밀리아 갈로티가 펼쳐진 채 놓여 있었습니다.”

 

이 문장은 편집자가 독자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명목 하에 베르터가 남긴 쪽지, 부쳐지지 않은 편지, 그 밖의 정보들로 엮인 베르터가 자살에 이르게 된 경위와 자살현장의 묘사의 말미(末尾)이다. 앞의 문장은 술에 취한 충동적 자살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고, 뒤의 문장은 그가 자살 직전까지 레싱의 희곡작품인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고 있었음을, 이 작품과 베르터의 죽음과의 연관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베르터는 왜 레싱의 작품을 읽었으며, 책의 펼쳐진 곳에는 어떤 장면이 있었을까, 그 장면이 자살을 촉발한 결정적인 것이었을까? 하는 물음을 하게 된 것이다.

 

에밀리아 갈로티는 당대 독일 시민계급의 비정치적 행동양식에 대한 비판이라는 시선이 주를 이루었던 모양이고, 괴테는 이 작품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작품평을 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봉건 영주에게 레싱이 창을 겨눈 것이라고 비평가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일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전제군주의 자의적 지배에 대항하여 도덕적으로 항거하는 결정적 발걸음이었다는 것이다. 무소불위의 독재 권력을 휘두르며 영주민에게 군림하던 영주 혹은 군주와 빌붙은 귀족 나부랭이들의 횡포가 극심하던 시절이고, 엄격한 검열이 이루어진 시대이다 보니 레싱은 자신의 희곡이 정치적으로 해석될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 부던히 애를 썼던 모양이다. 따라서 연극의 배경도 18세기 독일이 아닌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소공국 구아스탈라로 설정하여 자신의 삶에 혹여 미칠지도 모를 불행을 방지하려 했음이다.

 

희곡(5막 42장)의 내용은 에밀리아 갈로티라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반한 바람둥이 영주가 이미 결혼이 예정된 에밀리아를 손에 넣기 위한 이중의 기만성을 띤 살해 납치 자작극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 자작극을 기획 연출하는 관방대신 마리넬리를 앞세운 비열하고 교활한 납치극을 벌이고서는 그 후과(後果)가 영주 자신에게 미칠까봐 마리넬리에게 책임을 씌우는 것이고, 권력에 위협당하는 여인이 정조(貞操)를 위해 아버지의 조력을 받아 죽음으로 권력이 자행하려는 치욕에 저항하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시민 계급의 각성과 자의식을 일깨우려는 형상화인 것이다.

 

베르터는 아마 에밀리아의 자살에 내재된 도덕적, 정치적 저항의 의미를 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이미 결혼이 예정된 여인을 손에 넣기 위한 영주의 무모한 술책의 끝, 그 좌절이라는 비극성을 보았던 것일까? 청년 베르터는 시민계급의 직업적 성취란 귀족들이 독차지한 고급 관료가 아닌 하급 관리나 기껏해야 공사나 추밀 참사관이 한계인 것을 알았고, 결코 상류 사회에 편입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자각으로 깊은 무기력에 빠져들었으며, 이를 타개하는 방편이 한 여인에 대한 열정적 사랑이었다. 그러나 이 사랑의 대상조차 궁정 관료인 남편을 둔 유부녀였으니, 이것은 자신의 현존이 지닌 한계에 대한 크나큰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그는 오시안의 서사시 속, 무덤가에서 들려오는 애인의 통곡 소리를 듣는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 되었을 것 같다. 250여년이 지난 오늘이라고 인간사회의 계급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명칭이 바뀌었을 뿐. 어쩌면 베르터의 차별에 대한 이중적 시선에 그 답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에 초점이 맞춰진 차별의 관점 말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말이 요즈음 유행하듯, 자기 이익과 자기 위치에서 세계를 바라볼 때 갖는 그 수직을 향한 환상적 욕구, 이 욕구를 이용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는 계층의 조작이 지속 가능할 때 아마 화창한 미래를 꿈꾸었을 청년들의 좌절은 참담함이요, 자기 경멸의 역겨움일 것이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격정적 사랑에 휩싸인 청년의 차지할 수 없는 연인을 향한 내적 갈등이란 이야기에 당대 신분사회의 한계와 그 저항을 은닉한 꾀바르고 은밀한, 도래할 시민혁명의 전주곡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레싱과 괴테, 동시대를 살던 두 문학 거인의 작품은 어리석은 세상의 눈을 속이고 진실을 외치고자 했던 목소리들이다. 시간의 흐름은 하나의 텍스트에 다른 관점을 들이댈 수 있을 만큼 무상하게 변하는 것인가 보다. 불가피한 운명에 순응하지 마라!” 불가피한 것이란 없다. 아마 이것이 이들의 외침이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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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 우리 본성의 빛과 그림자를 찾아서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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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세이는 현란하지 않고 화려한 수식 없이 오직 진리를 찾고 싶어 한 절박한 욕구를 위해”, 또한 대중의 행복과는 대조적인 소수 계급의 교만과 권력을 혐오한”, “인간성의 유익을 위해 이득과 명성을 포기하고, 도덕적 용기를 멈추지 않았던 시대의 비판가로서 윌리엄 해즐릿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글들이다. 1830918, 그의 아들과 찰스 램 단 두 사람만이 지킨 임종 후, 세인트 앤 교회 묘지에 묻혔지만,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날선 것이었는지 영국 당대 귀족사회와 이에 기생하는 무리들은 고인(故人)의 묘지를 무참히 파괴하였다. 상층의 지배계급들에게 그는 가히 화끈거리는 상처였으며, 그의 영향력이 그만큼 두려웠던 것이었음의 반증일 것이다.

 


파괴된 채 근 200년의 풍파를 거친 2003년이 되어서야 노동당 당수 마이틀 풋의 주도하에 가디언의 모금으로 복구되었으며, 위의 인용문장은 묘비명의 일부 문장으로서 그 기념비에 새겨졌다. 해즐릿의 글은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 이은 두 번째의 마주함이다. 진리와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애(人間愛)의 지지 않는 옹호자로서의 그의 격정적인 글 속에서 한 인간에 대한 고귀한 열정과 경애의 마음을 갖게 된다. 해즐릿의 신랄하면서 결코 가볍지 않은 숙고된 통찰의 예리한 비판적 시선들은 이후 수많은 철학과 문학, 사회비평의 귀중한 아카이브로서 역할을 했을 것임을 나는 19세기 이후의 문장들에서 확인한다.

 

이권과 허영심이 결합한 수구의 전형인 에드먼드 버크와 이러한 무리들의 권력지향성과 몰염치한 가면, 부패한 매춘(賣春) 경향성의 근저를 파헤쳐 그 더러움의 심연을 지적하거나, 소위 패션이라는 유행이 지닌 태생적 자기모순의 현상을 알아 본 것도 아마도 그가 처음일 것이다. 고상함을 가장하는 태도가 많은 곳에 반드시 두 배로 많은 상스러움이 있다.(110)”는 이 간결한 문장은 손에 넣기 힘든 신속함과 변화무상에 공을 들여 허세를 유지하는 패션의 본질에 대한 그의 심안(審眼)을 반영한다. 해즐릿의 글은 이렇게 폐부를 깊숙이 찔러대는 냉혹한 비판적 성찰만이 아니라 그에 이르는 여정의 글들에는 시적 향취와 여느 소박한 소시민의 애틋한 경험들이 또한 놓여있다.

 

이러한 시정(詩情)은 표제인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에서 단연 두드러지는데, 우리는 친숙해서 하찮아진 지금 여기에서 숨 쉬며 저 너머 멀리 펼쳐져 흐릿한 시야에서 사라지는 풍경에 욕망과 고상한 존재 양식을 투사하곤 한다. 그리곤 그 먼 것에 비현실적 상상의 색을 입히며, 발견하고 싶은 희망과 소원을 품는다. 그는 말한다. 지평선의 아련한 능선을 바라보며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어떤 흥미로운 것들이 있을까 상상하는 인간을. 윌리엄 워즈워스와 윌리엄 콜린스의 시구가 어우러져 발산되는 풍부한 상상의 이미지들인 우리네 착각, 그 자체의 고귀함과 신비로움에 감사케 한다.

 

나는 기억 상자를 열어 기억의 포로들을 끌어낸다.” -61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거닐던 월위스 몽펠리에의 차()농원의 추억, 해즐릿은 이 빛나고 생생하고 육감적이며 섬세한, 슬픔을 생각과 격정의 보존액에 계속 담금질되어 변형된 당의(糖衣)가 씌워지고 축제 장식이 장식된 듯한 지나간 멀고 먼 기억을 더듬는다. 그는 이것이 상상 속에 색을 입힌 착각임을 모르지 않는다. 소망이 투영된 흔적임을. 그렇게 아득한 것은 좋아 보인다.

 

어쩌면 마르셀 프루스트는 해즐릿의 이 산문을 읽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냄새와 맛과 소리가 시각보다 더 원형적이어서 반복에 따른 마모가 덜한 것이라는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마들렌의 그 맛과 향기에서 연원하는 기억의 향연 말이다. 해즐릿은 연인의 목소리, 청각에 각인된 고유한 특성을 세익스피어의 문장을 통해 소리가 주는 그 은은한 마법을 들려준다. 밤이 되면 연인의 혀는 어찌나 달콤한 음악소리 같은지. 로미오와 줄리엣》Ⅱ..207”, 상상의 자극을 받은 우리의 귀로 들려온 목소리는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천국을 항해한다.

 

~, 시적 애상 넘치는 이 에세이는 곧이어 시대에 대한 격정으로 전환되어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엄혹한 통찰, 실체 자체를 마치 꿰뚫어내기라 하듯 혜안 번뜩이는 글들이 펼쳐진다.

 

편견과 악의는 언제나 결점을 실제보다 크게 과장한다.

우리는 무지만으로도 그 사람들을 괴물이나 유령으로 만든다.” - 74

 

멀어서 흐릿한 것, 그래서 가까이 접촉하지 못해 알지 못하는 것은 이처럼 매혹적인 추억이나 소망의 투영인 것만은 아니다. 소문이나 추측만으로 특정한 결점을 과장하여 비현실적 관념을 씌우는 짓들이 얼마나 난무하고 있는가! 알지도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적의를 품고, 관념상의 증오와 무자비한 혐오를 들씌워 대상화하는 부당한 적의(敵意) 말이다. 당파적 적개심에 휩싸여 인간과 세계를 잔혹하게 갈라치기하는 그 던적스러움 또한 눈에 멀리 보이는 것에 입혀지는 부당한 상상이며 착각이다. 우리들은 관념적으로 완벽한 존재가 아닐뿐더러, 결함으로 가득한 동물이기도 하다. 시인 존 세필드가 그의 詩論에서 세상에 결함이 없는 괴물 같은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고 쓴 이유일 것이다.


아첨꾼과 독재자에 관하여, 148쪽에서

 

오늘 한국사회를 대상으로 써진 것이라해도 손색이 없을, 아니 그 정치적 시각이 지닌 보편성의 통찰이야말로 현재를 문제적으로 성찰토록 돕는다. 아첨꾼과 독재자에 관하여라는 글이 그것인데, 프랑스 혁명을 비난하는 책인 프랑스 혁명 고찰,(1792)을 쓴 에드먼드 버크를 시작으로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비열함, 그리고 압제하고 압제당하는 사회체제를 정당화하는 그 부패한 시선들의 민낯을 여지없이 발가벗긴다.

 

공화주의를 대표하는 신문인 모닝 클로니클의 정치기자 생활은 인간 심리와 세상사의 이치를 그 스스로 납득하는 사유의 시간을 충분히 제공하였을 터이다. 이에 터 잡은 준엄한 지성은 독재자 하나에 수없이 많은 준비된 노예들이 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독재자를 사랑한다. (...) 필연적으로 불행과 퇴보가 일반인들에게 너무 널리 만연하고 깊게 침투한다.”, 독재자인 군주와 그에 빌붙은 기회주의자, 아첨꾼들의 노예근성을 파헤치기도 한다.

 

이들 비열한 노예들은 가장 이상적 아첨꾼이며, 언제나 가장 확고한 독재의 토대라는 것이다. 주인 마차 꽁무니에 올라타 민중을 개와 돼지라고 경멸의 눈초리로 내려다보는 것들을 우리는 수없이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이성이 마비된 인간들, 자발적 복종의 노예근성에 찌든 저 비루한 인간무리들을 보라! 동정의 여지조차 없는 저 열등함과 무지로 버무려진 인간 군상들을. 경배가 변태적일수록 욕망 어린 아집에 만족해하는당대 귀족계급들과 그 기생의 무리들을 지켜보면서 일구어낸 생생한 증언일 것이다.

 

지금 독재를 획책하던 내란 범 윤의 지지를 떠들며 성조기를 흔드는 사대주의, 독재와 친일을 찬양하는 저 노예근성의 무리들은 해즐릿이 통찰한 바로 200년 전 영국의 그 흉측스러운 폭력의 무리들 바로 그것일 것이다. 나는 해즐릿의 권력의 본성에 대한 이 비범한 에세이에서 훗날 윌리엄 골딩이 쓴 파리 대왕에서 그려내고 있는 파괴적이고 무력에 기승한 권력과 공포와 짐승의 다른 이름인 종교의 묘사를 발견한다.

 

이 에세이집에는 이 밖에도 근대 형법의 교범으로 일컬어지는 베카리아의 죄와 벌 논고(1764)에서 주장한 사형제도 비난에 대한 반박의 글을 비롯하여 삶의 애착과 죽음에 대한 불쾌감의 상관성에 대한 논의, 허영과 배타적 자기본위의 산물로서 패션에 대한 비판, 성공의 조건에 대한 실제성 존중이라는 독특한 논의 등 인간애와 일반 민중의 상식이라는 눈높이에서 바라본 당위적이어야 할 도덕의 논의도 있다. 사실 어느 글 하나, 어느 문장 하나 소홀히 읽어나갈 것이 없는 빛나는 지혜의 시선으로 가득하다.

 

특히, 옮긴이의 글은 해즐릿의 소설 리베르 아모리스의 일부 소개와 함께 산문 런던의 고독으로 갈음되고 있는데, 그것은 늘 그 자리를 지키는 등대와 같은 사랑의 이야기이며, 지배계급의 기만과 악의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주저하지 않음으로써, 생애 내내 고통을 감수하여야만 했던 인류의 용기인 지성이 대도시 런던에서 얼마나 소외의 고독을 느껴야 했는지에 대한 은유의 기록으로 읽히기도 한다.

 

밖에는 박애의 이슬이 땅을 적시는데 그의 마음은

기드온의 양털 한 뭉치처럼 말라 있을 것이다.” - 190

 

돈과 권력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파렴치한 도시에서, 외롭게 귀족들과 그 노예들 무리의 부조리와 부당성과 기만과 이기심과 거짓을, 그리고 탐욕스러움과 무지와 은밀한 폭력과 열등함을 보았으며, 그를 주저하지 않고 비판했던 용기있는 지식인의 고독과 쓸쓸한 죽음을 본다. 비록 진정한 친구 찰스 램과 아들 두 사람에 불과한 임종이었지만, 나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노라라는 유언은 시공을 초월한 오늘의 독자인 나에게 겸허와 존경의 마음을, 어떤 위로의 감정을 지니게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아직 접하지 못한 그의 문장들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갖게 된다. 혹여 그의 소설 리베르 아모리스의 출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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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7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8 0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리대왕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9
윌리엄 골딩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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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꾸준히 독자들을 불러 모으는 이유를 생각게 되는데, 아마 인간의 두 대립하는 성향을 마치 시뮬레이션 하듯고립된 섬이라는 실험 공간에서 극명하게 관망케 함으로써, 적나라하게 인간 본성이라는 것을 직관적 체험의 장으로 이끌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은 반성적 성찰 대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감성,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방편 대 눈앞의 편익의 매몰, 합리적 논리 위에 선 민주주의 대 비합리적 권위주의의 폭력성의 대결처럼 선명하게 드러나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이야기의 전개 때문일 것이다.

 


윌리엄 골딩은 시뮬레이션을 위해 한 장소에 모여 자신들의 생존과 구조를 위한 어떤 결정을 해야 하고, 구성원 각자의 임무와 능력을 조화하고 수행할 작업의 목적과 방향을 제시할 리더의 선출 장면을 펼친다. 이를 위해서는 섬에 흩어져 인원을 알 수 없는 아이들을 모아야 하고, 그 수단이 랠프라는 소년이 발견한 소라. 소라를 부는 것은 무리 전체를 공론장에 모으는 기능을 가지며, 또한 소라를 지님으로써 발언권을 가지게 된다. 즉 무리 각자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과 다수의 결정으로 특정 의견을 결정하는 일견 민주주의적 질서를 상징하는 도구이다. 최초의 모임에서 랠프가 대장으로 선출되고, 대장이 되고 싶어 했던 잭은 자신의 본래 무리를 이끄는 사냥대의 리더가 된다. 이로써 원시적이지만 무리의 기초적 질서가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의기투합은 이내 균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무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할 작업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는데, 구조를 위한 방편으로 산 정상에 불을 피워 혹시 지나가던 배로부터 구조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그들의 생존에 중대한 일이다. 인원을 나누어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장작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불씨를 지키는 임무가 주어진다. 또한 밤과 알지 못하는 두려움과 추위와 비를 피하기 위한 오두막의 축조가 시급한 일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오두막 짓기에 관심이 없으며, 수영이나 놀이에 여념이 없으며, 봉화의 불씨는 꺼지고, 당번은 자리를 지키지 않고 자신들의 즐거움에만 열중한다. 배가 나타났지만 봉화는 불타오르지 않으며, 의무를 진 아이들은 멧돼지 사냥 놀이에 빠졌다. 희박한 구조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무리는 그것을 놓쳤다.

 

여기서 작가는 두 측면을 제시하려 하는 듯한데, 반성적 성찰없는 행위가 가져오는 직관적, 즉흥성으로 인한 생존행위의 방해가 그 하나이고, 눈앞의 편의라는 단기적 이익의 향유에 현혹되어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목표가 사라지고 마는 자기파멸적 몽매성이 또 하나일 것이다. 무리의 선출된 랠프와 사냥꾼 리더 잭은 첨예한 적대감으로 갈등하기 시작한다. 다음과 같은 의견들은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배가 이 섬 가까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산꼭대기에 연기를 피워야 해. 봉화를 올려야 한다구!”  -56

 

우리가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닷가에 오두막을 짓는 거였어.....해야 할 일을 밀쳐두고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구조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니?”  -69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있어. 그가 뭐라고 말하기만 하면 그냥 몰려가고...”  -69

 

생각하지 않는 것, 해야 할 일을 밀쳐두고 자기 쾌락에 열중함으로써 무리의 구조 기회를 날려버린 것, 다시 말해 개인의 편익만을 우선시 했을 때 마주하게 되는 파멸성이다. 이 최초의 갈등으로 무리는 분리되기 시작하고, 곧 이어 끔찍한 적대감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이 갈등과 적대감이 쉽사리 폭력으로 전이되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 숱하게 접했던 실상이어서 사실 그리 새로운 식견이랄 수도 없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작가가 표출하고 싶어했던 것은 두 소년의 죽음의 의미와 아주 쉽사리 잔인함과 폭력으로 전이하는 인간과 무리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종교적 상념이다.

 

두 소년, 사이먼과 새끼돼지(무어)의 죽음과 원시적 종교성은 양 극단의 대척에 서있지만 인류의 본질적 고질병,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에 맞닿아 있다. 사이먼은 섬에 고립된 아이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공포의 정체, 그것을 뱀이라고, 혹은 짐승이나 유령이라 부르며,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존재를 신비화하지만, 그것의 본질은 바로 인간인 자신들뿐임을 자각한다. 한편 새끼돼지로 불리는 무어는 생각하는 능력, 사물과 사태의 궁극을 이해하려는 사유의 필요성을 말하는 생각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이 두 소년은 트로이의 예언자이자 진실의 목소리인 카산드라이다. 사이먼과 무어는 무리에게 외면당하고, 그들의 목소리는 미친 소리이거나 직면한 현실에서 아무런 울림을 가지지 못하고, 마침내 야만성과 살의로 충만한 잭 일원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인류의 역사는 늘 진실의 목소리를 살해함으로써 자신들의 저열성과 몽매성을 정당화했음의 고발일 것이다.

 

소설은 우리들에게 이해가 가능하고 합법적인 세계가 어떻게 허물어져 가는가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그리고는 묻는다. 대체 우리가 뭐지? 사람이야? 아니면 동물이야? 그것도 아니면 야만인이야?”, 세계는 어떤 합의된 질서, 규칙을 지키려는 상호 노력에 의해서 지탱된다. 만일 이것이 파괴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이른바 각자 자기 개인의 편익만 한없이 추구하는 홉스식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의 장이 되고 말 것이다. 작가는 이로부터 폭력성의 얼굴을 보여주는 데, 잭과 그 사냥 무리들이 원형을 이루고 창을 치켜들며 짐승을 죽여라! 목을 따라! 피를 흘려라!”를 반복하여 외치며 광기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피와 진흙과 숫으로 채색된 가면이 된다. 모든 수치와 분별이 가려진 짐승으로의 변신, 엘리아스 카네티가 군중과 권력에서 치밀하게 통찰했던 인간 무리의 야만성에 깃든 그 시원적 폭력성을 짐승의 변장이란 이미지에 덧씌움으로써 자신들의 잔인성과 악덕을 정당화하는 기만으로서의 종교적 기원, 그것일 게다. 이 소설이 드러내고자하는 주제들의 보편성은 언제나 그렇듯 인간 사회의 대립되는 두 부류의 본질에 가닿는다.

 

즉흥적이고 눈앞의 이익을 쫓으며, 비합리적 권위주의의 폭력성을 휘두르는 무리들의 야만성, 이 무리들의 탈 규칙(), 법 초월적 야만성이 그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반성하는 자기 성찰과 좌절하는 상식의 세계, 합의된 질서의 세계를 지켜내려는 무리이다. 사냥 술책과 신나는 희열과 기만적 전술의 세계가 있다면, 인간이 함께하는 삶의 세계를 위해 생각하고 조금 더 현명해지기 위해 인간과 인간사회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스스로 묻는 세계가 있다. 우리가 규칙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인류가 가진 것이라곤 바로 그 규칙뿐이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합의하여 가진 것, 그 규칙을 파괴하는 것은 인류의 퇴행이고 자멸이다. 그 누가 살아남겠는가? 윌리엄 골딩이 프로그램한 이 시뮬레이션을 관찰하다보면 절로 지금의 저 무도한 야만의 무리들이 해독될 것이다. 이 소설이 그침 없이 읽히는 까닭은 바로 인간과 그 무리의 본성이 발하는 어두운 진실을 밝은 하늘 아래에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길은 과일 나무 숲도 침범했을 것이다. 도대체 내일은 무얼 먹을 작정이란 말인가? (...) 그들은 대체 어쩌겠다는 말인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가?”  -313


P.S. 헌정 질서를 파괴해서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폭력도 불사하는 저 무도한 무리들은 그 파괴된 질서 이후에 대체 어떻게 한 사회의 안녕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독재로 국민의 입과 손발을 묶어 탄압하는 끔찍한 저 파시즘의 세계를 원하는 것인가? 그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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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수집가들
피에르 르탕 지음, 이재형 옮김 / 오프더레코드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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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르-은 자신만의 멋진 세상을 창조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일러스트레이션의 마스터로 불리는 아티스트이자 예술품 컬렉터다.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일종의 회고록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베트남인 아버지 르포로부터 수집 취향을 물려받은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시작해서, 한 점 두 점씩 루벤스, 게르치노 등 훌륭한 컬렉션들을 팔아 그림이 걸려있던 벽의 빛바랜 흔적이 누더기처럼 남아있던 유고슬라비아 연안의 작은 공국 브리오니의 왕녀마리루이즈가 파리의 집에서 들려주던 컬렉션들의 황홀한 내용들에 감동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아름다움에 얽힌 흔적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이 진귀한 수집품들의 획득과 소유의 전율이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추억의 기록이 된다.

 

나는 수집이라는 특정 대상물에 대한 소유의 취향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 책에 흥미를 가진 이유는 수집가(Collector)들의 예술관 또는 그 심미안(審美眼)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회의적 관심이었다. 컬렉터들과의 만남, 그네들의 집이나 그들의 부티크에 자리한 온갖 수집품들, 그리고 그 수집품에 얽힌 컬렉터들과의 추억들, 그로부터 느껴졌던 컬렉터 저마다의 고유한 특징들이 그리움의 감정처럼 아늑하게 흐르는 이야기 속에서 이러한 내 의혹의 눈길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컬렉터들만의 갈증은 저절로 냄새가 맡아지는 모양이다. 뮤지컬 코미디 <로키 호러 픽쳐 쇼>의 등장인물 피터 힌우드의 방 세 칸짜리 런던 집을 방문했을 때 환상과 기이함, 유머가 혼합된 그야말로 기발한 조화의 느낌을 말한다. 세 개의 방을 휘감아 돌던 경이로운 수집품들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의 광휘를 발하고, -탕은 그로부터 찾고, 발견하고, 획득하고, 은신처에 들이기 위해공을 들이는 컬렉터만의 삶을, 아마 동류의 유대감을 얻었으리라.

 

나는 그 어떤 물질을 얻기 위해 이처럼 공을 들여 본 적이 없다. 만일 호감과 감동의 탄성을 지를 정도인 무엇이라면 눈요기, 관람으로 충분히 감당했을 것이다. ~, 하고 말이다. 어쩌면 피에르 르-탕만큼 그 예술적 아름다움과 그 물품의 단독성이 발하는 미적 발산에 편협하고 건조한 삶의 지대에서 살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파리 16구의 부유한 부르주아적 건물에서 에릭 마르크 알부앵의 최고수준의 아르누보 양식과 아방가르드 스타일이 세련되게 혼합된 신중하게 선택된 수집품들은 그를 보고 감탄하는 르-탕을 넘어 독자에게도 수집가의 열정이란 무엇인지가 전해진다. 그럼에도 수집품 하나하나에 다른 것은 일절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한 존재감이 어려 있었다니, 나는 그 존재감이 무엇인지 상상해보려 애쓰지만 경험 없는 나는 그에 도달하지 못한다.

 


-탕은 획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노름꾼이 주사위를 굴리는 것과 같은 신비한 이유로 가장 중요한 행위다.”라고. 우연한 발견에서 그것을 소유로 이끄는 필연은 신비스러울 만큼 컬렉션의 핵심이라는 뜻일 것이다. 발견했을 때 완벽한 존재감이 어린 컬렉션이란 수집가의 주관적 취향일 것이다. 컬렉터들 저마다 자신들만의 고유한 수집품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보편적 매혹의 정서를 가져오는 그 무엇인가가 그들을 유혹하는 것일 게다. -탕은 전 루브르박물관장인 피에르를 비롯하여 영화 <선셋 대로; Sunset Boulevard>의 글로리아 스완슨처럼 뭔가에 고정된 시선을 지닌 우아한 여성 롤랑드루이즈 드 프티피에르, 엘리엇 호지킨, 지미 스톡웰 등 독특하고 매혹적인 20인의 컬렉터들과 그 강박적이고 비범하기까지 한 수집의 이야기들을 펼쳐내고 있다.

 

-탕 또한 독보적 컬렉터로서 자신의 얘기를 아주 조금 스치듯 들려주는데, 자신은 컬렉션으로 투기나 장식을 하겠다는 생각을 결코 해 본적 없으며, “수집은 필요불가결한 동시에 완전히 무용한 일이다.”고 말한다. 무용(無用)한데 필요불가결하다니, 쓸모없는 절대필요라는 이 모순된 문장에 수집가의 애증이 모두 담겨 있는 듯하다. 무릇 아름다움이나 예술이란 개념만큼 이 모순의 문장에 맞춤인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 컬렉터란 예술 취향이 집약된 이름일 것이다. 자신의 취향이 온전하게 배어있는 물건들에 둘러싸여 순간의 만족을 가지는 느낌, 그러나 이 물질적 향취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이 물욕은 끝없이 갱신되지 않으면 고통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이 호사가는 무언가를 다시 사기 위해 팔아야만 하는 자신을 가난한(?) 컬렉터라 부른다. 아마 르-탕은 이러한 수집 취향의 굴레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앞으로도 오랫동안 나만의 즐거움을 위해 발견과 획득의 유혹에 기꺼이 굴복할 생각이다.” 미지(未知)에 대한 궁금증과 그 신비의 장막 뒤에 빛나는 아름다움에 대한 매력의 기대는 떨쳐낼 수 없는 것인 모양이다. 그가 한때 열정적으로 수집했던 신낭만주의자들의 작품이 우아하고 비현실적 미학이었던 것처럼, 수집이란 우리네에게 부족한 그 어떤 정서적 매력 요인을 선사해주는 원천인지도 모르겠다. -탕에게서 나는 컬렉터란 어떤 존재인지를 배우게 되었는데, ‘파리의 배로 불리는 레알 시장 인접 몽토르게이 거리에 있는 유명 컬렉터인 보리스 코치노의 집에서 시대를 아우르는 희귀품 조합들과, 그 시절을 풍미했던 예술가들과의 추억이 가족처럼 친밀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했던 기억으로부터이다.

 

그것은 경험 할 수 없었던 시대와 현재의 우리를 이어주는 살아있는 연결고리라는 것이다. 삶의 영속성에 대한 무의식의 갈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친구인 자크의 집 벽에 자신이 판 컬렉션이 안전하게 걸려 있음을,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 기뻐하는 르-탕의 시선과, 획득과 소유의 전율이란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임을 이 마지막 저술에서 말하는 것은 꽤나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 한 평생을 아름다움에 얽힌 흔적들에 에워싸여 살았던 이 예술 컬렉터의 이야기에 심취하다보면 그 쓸쓸하고 아늑한 아름다움으로 채색된 옛 기억을 거닐다 돌아 온 느낌이다. 무언가를 수집해 본 이들에겐 공감의 즐거움을, 수집의 유혹을 가져본 적 없는 나와 같은 이들이라면 예술의 향취와 추억의 길을 거니는 그런 기분 좋은 여정이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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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의 소리 - 개정판 최인훈 전집 9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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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1972년에 각기 써진 한반도내에서 암약하던 일본 간자(間者;오늘의 말로 간첩)의 목소리로 전하는 한국인의 자신들이 알지 못하게 뼛속 깊숙이 내재화 되어있는 식민지 노예근성과 그 비루함과 몽매성에 대한 관찰기이며 담화문이다. 최인훈 선생의 이 소설 총독의 소리5년에 걸쳐 총 4편으로 집필된, 소설의 통념적 형식을 파괴하면서까지 이 사회에 전하려 했던 빙적이아(憑敵利我)의 간절한 외침이기도 하다. 일본의 간자와 일제에 부역하던 무리가 그것들이 우려했던 징벌과는 달리 그대로 부패한 축재와 권력을 이어가며 반도의 상층부 지배 집단으로 기득권층을 이루고 있게 되었음에, 바로 그러한 결코 깨어나지 못할 반도민의 정치적 인식능력의 한계를 보았음에 대한 쾌재의 풍자이기도 하다.

 


빙적이아(憑敵利我)’, (,친일부역의 무리)의 입을 빌려 내부(한국민과 그 사회)를 깨우치려는 방편으로 최인훈 작가가 역사적 타자의 입을 빙자해서 한국 사회 내부의 문제를 환기하기 위해 사용한 서술 도구이다. 소설에서 유령방송국을 통해 담화를 발하는 총독(總督)’은 한국 내에서 일본을 위해, 한국의 정치사회는 물론, 외교, 국방, 경제를 망라한 그 현황에 도사린 일제 부역자들의 활약상, 즉 식민지 잔재가 왕성하게 반도를 망치고 있음으로 인한 재 침탈 가능성이 숙성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환호이며, 부역자 무리의 노고에 대한 칭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달리 말하자면 한국의 기득계층은 곧 친일 부역자무리가 점령하고 있다는 인식이며, 그것들이 지속적으로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성장을 방해하고, 국론을 분열시켜 결코 화해할 수 없이 사분오열되어 어떤 단일한 민중의 권력도 부상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제어함으로써 외세에 무기력한 민족으로 남아있도록 하고자 하는 사대주의와 그것들의 자기 영달과 이익 이외에는 철저하게 분쇄하고자 하는 반민주, 권위주의 사회의 지향이며 정착이다.

 

여기에 동원되는 수단은 남북의 휴전상황 고착화를 이용한 반공(反共)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효과이다. 즉 빨갱이 몰이는 불의한 친일 뿌리의 기득권을 영속화하는 기막힌 방법이며, 몽매한데다 노예근성까지 갖춘 반도인의 맹목적 충성이 거들어주기까지 한다. 일제 식민지 기간 내내 일제에 저항했던 모든 반도인을 빨갱이로 몰아 처단했던 효율성의 경험이, 이제 반도인의 정신에 각인되어 손쉽게 정치적 반대세력을 몰아세우는 유효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총독의 소리, 189쪽에서

 

소설 속 총독이 발하는 4편의 담화를 읽다보면, 2025년 지금 한국사회에 펼쳐지는 이 혼란의 정국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가의 역사적 실체를 성찰 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그 근원인 민족 배반자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친일의 근성을 발본색원하지 못한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망각증세, 다시 말해 일제 부역자의 종자인 멸종되어 마땅한 반()민주주의 친일 정당 소속 윤 모가 말하듯 ‘1년만 지나면 개, 돼지들은 모두 잊고 다시 (국회의원으로) 선택해준다는 어리석은 노예근성에 근거한 흉측스런 말에 가닿는다. 아마 이 근성은 한국 내 일본 간자들의 우두머리인 총독의 말처럼, 이들 노예근성의 한국인들이란, 인간 조건에 대한 감각이 모자란 종족이며, 정치적 음치(音癡)이자 풍문에 사는 자이고, 이목구비가 있으면서 죽은 자들로서, 목하 극우를 표방하는 폭력적 야만의 작태에 대해 부끄러움도 모르는 종자들이다.

 

자신들의 역사를 안다는 것이 요즘보다 처절하게 그 중요함을 인식하여야 할 때가 없었던 듯 하다. 이 땅에 민주주의와 그 기반 요소들인 인권과, 평등과 공정성, 법치주의가 표면적으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표면아래서 이를 집요하게 방해하고 훼손하는 엄청난 규모의 퇴행적 세력이 있었음을 목도하고 있는 지금, 한국인, 우리들의 역사적, 민족적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뼛속까지 아려오는 통증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너무도 연약하게 흔들리고 있으며, 법치는 일제 부역의 무리들, 민주주의와 헌법수호를 열망하는 국민을 향해 빨갱이 타령을 하며, 법 초월의 무도함을 지껄이는 바로 그것들이 이를 증거한다 할 것이다.


【《총독의 소리, 2121쪽에서

 

50여 년 전에 써진 이 인용문은 <총독의 소리> 노변담화방송을 듣던 한 시인의 자괴감 어린 자기성찰의 목소리다, 방대한 헛소문이 엉킨 전선들의 잡음처럼난무하는 실상은 마치 지금 벌어지는 저열함에 지배된 소셜미디어와 사이비 언론들에 넘쳐나는 조작과 날조, 기만과 거짓을 통해 돈벌이에 나선 군상들과, 이에 영합하여 맹목적 신뢰로 옹졸하고 편협한 이성 없는 무지를 뽐내는, 자신들의 노예근성에 복무하는 군상들의 악의적 댓글과 퍼나르기를 보고 있는 듯하다.

 

원시인의 귀보다 더욱 가난한 초라한 장치를 조작하면서 이 세상의 악의와 선의의 목소리를 알아들으려는시인은 그나마 자신의 무지에 대한 성찰이 보이기라도 하지만, 저 친일 부역 종자들이자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부패한 기득권 무리들의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무도함과 불순함, 폭력성, 이를 선전 선동하는 것들에게서는 그 어떤 역사적 각성은 물론 도덕성조차 찾을 수 없다. 오직 자신들의 편익과 편의, 권력과 축재(蓄財)라는 탐욕만이 목적인 불의함만이 더러운 썩은 내를 풍길 뿐이다. 이것들에게는 헌법의 수호, 즉 법치의 질서도,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정신도, 헌법 전문에 새겨진 대한민국의 민족정신인 현대사까지도 왜곡과 파괴의 대상이 된다.


【《총독의 소리, 3129쪽에서

 

외교 무대에서 버젓이 자국의 국기를 외면하여 국가를 모멸하고, 적국의 입장에서 식민지민이 생각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발언을 국영방송에서 서슴지 않고 뇌까리는 것들이야말로 한국사회의 기득권 계층의 낯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의 한 표징일 것이다. 위의 인용문장은 청산되지 않고 이 사회의 권력과 부를 움켜쥔 친일부역의 종자들이 지닌 혐오스러운 믿음의 실체를 토설한 내용이다. 움켜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이것들이 자신들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국민을 향해 빨갱이 몰이와 민주주의 근간의 파괴라는 이중의 배격 수단을 활용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소설은 해방 후 2025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식민지 황국신민의 충성스런 노예로서의 민주주의의 싹이 자랄 수 없도록 사회의 혼돈을 상시화하며, 일본의 한반도 재탈환의 토양을 성숙시키고 있음에 대한 자기 격려의 말을 그치지 않고 있음에 매서운 질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식은 식민지 지배 조건이 해방 이후 80년이 지난 지금에도 고스란히 유지 보존될 수 있는 가에 대한 국민 각자의 반성의 요구이다. <총독의 소리>에서 간자가 한반도의 정세에 대해, 분단 대치상황으로 인한 군사비 과도 지출, 남북 간에 적대적 무한경쟁 체제로 인해 통일은 요원한 문제일 것이라고 진단하듯, 친일 부역의 무리들은 이 불안한 분단의 지속이 권력의 유지와 방어에 요긴하기 때문에 종전(終戰)이나, 남북의 평화적 화해무드를 방해한다.

 

이 불안정성이 곧 기득권 유지의 필요조건인 탓이다. 2025, 현재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민주주의와 국가적 현실의 이해를 향한 적극적 앎의 여정이며, 우리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 가에 대한 충실한 지혜를 향한 탐구의 노력이 될 것이다. 소설은 비단 국내 정치질서에 대한 성찰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에 대한 냉혹한 인식을 촉발시키는 현실적 진단의 통찰도 있으며, 엔카(演歌)를 기원으로 한 일본의 리듬을 그대로 답습한 트로트에 열광토록 분위기 몰이를 하는 황색 미디어들이 유행처럼 하는 짓, 즉 일본풍의 선율과 음계에 익숙해짐으로써 정서적으로 내지(內地;일본을 의미)와의 유대를 계속하고 있음의 제국일본을 향한 복종의 표지임을 말하는 것들을 향한 반면교사의 비판적 메시지도 있다. 즉 보이지 않는 문화적 식민 토양을 축조하려는 은밀하고 더러운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응징의 메시지다.

 

매국 황색미디어에서 시작된 이러한 친일 부역 도당의 신()황국신민화 표방은 이제 공중파 방송에까지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사회의 기득권 계층이 거의 모두가 친일의 뿌리를 지니고 있음의 반증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최인훈 선생은 아직도 이따위 소리를 하고 있구나라며, 작금의 한국사회에 대해 비통과 울분을 금치 못했을 것 같다. 지금 벌어지는 내란의 심판은 바로 신()식민지화를 도모하던 매판 세력과 민족적, 민주주의적 민중세력과의 싸움이라는 오래된 뿌리를 지닌 역사적 심판인 것이다. 대다수의 국민과 소수의 반민주 기득권 집단과의 결전이라는 의미이다. 이 작품으로부터 현대사의 구체적이고 수월한 이해를 수행하고, 나아가 해방전후사의 인식, 반민특위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묻는다와 같은 우리 현대사의 독서로 나아가면 보다 명료한 역사인식을 갖추는데 적절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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