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응 - 주의 기울임, 알아차림, 어우러져 살아감에 관하여
팀 잉골드 지음, 김현우 옮김 / 가망서사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팀 잉골드는 사회인류학자다. 최근 생태학이나 인간-비인간 동등성의 존재론을 논의하는 많은 저술들에 그 이름이 빈번히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정작 팀 잉골드는 이들 학제적 이론가들의 담론에 섞이기를 반기지 않는다. 그들은 연구 대상의 현상적 조건에 동요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세계와 이어진 관계로부터 단절되기를 요구하지만, 진리추구란 세계에 온전히 참여해 서로 조응해야만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을 구성하는 모든 글들은 학자로서의 페르소나를 내려놓고 그 자신의 목소리와 손과 마음으로 쓴, 그로인해 마구 뒤섞이고 흔들리며 혼란에 빠지는 자유를 만끽한 누구나 감응할 수 있는 글로 다가온다.

 

마치 과학적 객관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연에서 한 발짝 벗어나야 한다며, 일상의 언어를 기피하고 무척이나 깊이 사유한 척하며 배제와 소외를 자부심으로 하는 그 분리와 배척, 스스로 인간-비인간 자신과 타자의 동등성을 부인하는 모순의 지대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저자는 평평한 운동장, 좀 더 균형잡힌 대칭적 접근 방식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의 이중성을 지적한다. 그들은 근대성의 강력한 신화중 하나인 자연의 굴레를 벗어나 역사의 길로 들어선 유일한 종으로서 인간이라는 신화에 올라 탄 인간중심주의의 축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또한 최근 주류 철학적 위치를 점하는 존재론으로는 우주만물이 서로 뒤섞여 흐르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말 할 수 없다고, 그것은 고립과 경계를 세운 개념이며, 이 세계의 단일성이 아닌 다중 세계를 상정하기에 서로 열려있으며 단일한 생성의 세계에 함께 참여하는 이 세계를 기술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세계와 조응하려면 아예 무대 뒤로 가서 은밀히 움직이는

존재들에 합류해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31

 

존재론적 실재론에 경도되어 있는 내겐 당혹스러운 비판이지만,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활동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단일 세계임을 부정하는 앎이 없는 나로서는 재발생론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그의 주장을 반박하지 못한다. 이처럼 이 저술은 삶들의 끊임없는 전개와 생성 속에서 서로 합류하고, 존재 및 생성이 한데 얽힌 흐름의 와중(진행중; in between-ness)으로서 조응을 말한다. 이 조응은 주변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법뿐 아니라 예민함과 판단력으로 그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에게 응답하는 법을 되살리려는 시도이다. 또한 이 세계 만물은 존재하는 상태(being)’가 아니라 생성중인 상태(becoming)’라는 저자의 발생론적 시선, 그 자체를 서술하는 글들이라 할 수 있겠다.

 

카렐리아 북부 숲 어딘가에 높이 4미터, 200톤가량의 거대한 바위가 있다. 그 바위는 경사면에 멈춰있는(0 zero의 속도로 미끄러지고 있는)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이 바위를 붙들고 있다. 빙하에 떠밀려 내려오다 그곳에 머물러 있다. 비와 눈, 혹독한 추위와 바람과 햇살의 반복 속에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가운데 작은 균열이 발생하고 그 틈에 씨앗이 날아들고 파고든 뿌리가 바위를 단단히 붙잡고 있다. 이 위태롭게 균형잡힌 조합은 그 내부의 고요 속에서 영원히 숨을 멈추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언젠가 이 고요가 깨지고 바위도 굴러 떨어질 것이다. 이것은 순간에 머무르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는 몽상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이 광경을 상상하며 나는 하나의 바위, , 나무의 광대한 시간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느낌에 빠진다. 그 광경 한가운데 뒤섞임으로서 비로소 감응을 교환하고 그 끊임없는 변화 생성하는 존재에 조응할 수 있는 감각을 얻게 된다.

 


여기의 글들은 이처럼 이 세계--존재들에 귀를 기울이고 세심하게 바라보며 그들과 어우러져 그 순환의 흐름에 함께하는 시간을 발견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물질과 함께하며 그들과 조응하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아마 인간과 비인간을 분리하고 이성이 통치하는 질서, 이것을 무너뜨리려는 자연에 맞서 지키려고 노력하는 투쟁의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망각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오늘 기후-세계의 물질적 격동 사이에서 조화를 모색하는 인간은 이성의 규칙에 목을 내놓고 더욱더 공학기술을 미래의 방법이라 여긴다, 그럴수록 인간은 비인간 존재와 투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는 영역들이 늘어날 뿐임을 보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하나의 일례가 기록되고 있는데. 오염에 대한 인간 인식의 역전적 양상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설정한 통상의 분류된 범주에 맞지 않거나 경계를 넘는 것들은 위험하고 불결한 것으로 간주하여 금기의 관습을 통해 물리적, 상징적으로 배제한다. 오염을 제거하는 것, 즉 오염을 제거하는 정화작업을 통해, 자신들의 개념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화작업이란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고 지적한다. 물질을 재결합하거나 재방출하기 전에 모재(material matrix)에서 분리해 내는 정화 작업, 자연적으로 섞여있는 상태에서 비교적 무해했던 물질을 순수한 형태로 분리해 낸 후 다시 혼합하거나 결합하는 과정에서 인류를 해악으로 몰아넣는 무시무시한 진정한 오염(핵폭발 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오염에 대한 정화의식이야말로 세계내 존재들을 위협하는 가장 극악한 행위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거나 완벽하게 정지 상태로 보이는 것들은 그 존재를 무시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 보이지 않거나 정지해 있어 지각할 수 없다고 그 존재들이나 그 내부에 움직임이 들끓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숨 쉬는 생명체인데, 우리 존재를 살아가게 하는 공기부분(aerial part)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 존재를 부인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듯, 맨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이 대기의 모든 움직임의 와중에 무수한 존재들이 형성되고 해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세심한 주의 기울임, 조응이다. 행위의 주체성과 수용성은 서로 얽혀 순환하는 것이다. 어느 일방 주체의 주관에 의한 일방이란 환상이고 곧 부러질 교만이다.

 

어찌 보면 이 글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유의 길을 전복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기술과학으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상상이 점점 더 많이 삶을 윤택하게 주리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주는 말조차도 비인간은 물론 같은 인간 종에게조차 상대적 약자와 그들 존재에 비인간화라는 사악함을 뒤집어씌우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이를테면 바람직하지 않은 변종, UDV(undesirable variants)’와 같은 두문자어로 우려되는 문제를 가리키는 동시에 외면할 수 있는 사악한 말을 천연덕스레 내뱉는다. 이 말에 대한 경멸, 지시 대상의 원래 명칭을 말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연루의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하여, 숙련된 주의력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한 발 물러서 거리를 두고 중립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척한다. 이 두문자어로 된 말아닌 파렴치한 기호 뒤에 숨어 세계에 합류할 것을 부정하며 타자를 철저히 단절시키는 것이다. 이 두문자어의 범람은 지시 대상의 실재를 부인하고 관심 밖으로 밀어내며, 그에 얽힌 정서를 지운다. 그럼으로써 대상을 못 보면서도 살펴보고, 감시하고 통제하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아주 사악한 효과를 거둔다. 즉 두문자어로 된 말아닌 말은 사물의 진실을 가리고 현실을 왜곡하고 사실을 은폐하는 언어가 가하는 폭력의 다름 아니다.

 

이 세계를 마치 적합한 품종들만의 보호구역으로 만들 것인 양 차이 속에 어울려 살았던 사람들과 비인간 존재들을 폐기하듯 떠밀어 분류하고 쫓아낸다. 아 멋진 신세계여! 실업자, 성소수자, 이주민, 무국적자...들이 떠돈다. 나는 이러한 시각에서 ‘LGBTQ+’와 같은 두문자어를 혐오스럽게 바라본다. 두문자어에 그 내부에 담겨있는 무수한 존재들의 연결을 은연히 가리면서 마치 점잖게 객관적 지위를 차지한 듯 문제를 바라보는 그러한 기회주의적 정서를 읽게 되기 때문이다. 많은 세대에서 말을 줄여 두문자만으로 된 이상한 조어를 사용하는 언어 혐오적 양상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마 이 두문자어의 증가는 그만큼 이 세계에 폭력성이 비례하여 증가하고 있다는 의미라 여긴다면 지나친 상상인 것일까?

 

영국 국방부가 발표한 두문자어가 2만 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NKZ, 핵살상 지대(nuclear killing zone), HK, 물리적으로 대상을 파괴하는 공격(hard kill) 등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간단한 사안처럼 포장하여 군사화가 땅과 생명에 가하는 폭력을 위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광범위한 생명살상은 안중에 사라지고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파괴를 계획하는 데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않게 된다. 군 지휘관은 그저 HK를 지시한다. 이처럼 두문자어는 그 언어에 내재된 폭력성을 가리는 효율성에 가려져 손쉽게 세계와의 단절을 도모하고 폭력을 정상화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세계에서의 우리 자신의 존재 조건이란 무엇인지, 이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럼으로써 인간-비인간이 공존하는 이 세계 속 삶의 경험이 얼마나 풍요로워 질 수 있는지를 감각하는 시간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행해 온 모든 가정을 뒤집어보는 사고 실험을 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캐럴 보브, 스탠드에 매달린 조개껍데기스탠드에서 떨어진 조개껍데기2011, 거품이 이는 말의 침전시 작품, 오비츠 애밀리 컬렉션 제공, 로렌초 비투리 촬영, 100


사물은 우리의 개념적 서술을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 자연이 인간에게 굴복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상대적 인간 약자가 강자에게 자율적으로 복종했던 적도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캐럴 보브의 거품이 이는 말의 침이라는 주제의 전시작품들은 세계의 이러한 이치, 세계의 생동과 과잉의 충돌이 빚어내는 상황의 불안한 한 예시일 것이다. 인간이 보지 않는 세계의 역동성은 이를 통제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복잡한 얽힘의 세계이다. 무수한 요소들이 뒤섞이는 와중에 그 균형이 평정의 감각을 찾아가는 세계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지금 우리들은 사고의 대상과 감각의 대상 중 사고의 대상에 집중하고 있지만 그 둘 사이에 흔들리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이른 것 같다. 판단을 유예하라.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궁정화가 아펠렉스가 헐떡이는 말의 게거품을 묘사하지 못해 던진 스펀지가 원하던 효과를 그림에 나타내듯, 그러면 개념들이 정리되고 마음의 평화를, 세계의 평온을 되찾는 길이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다. 조응이란 여러 참여자 사이에서 그 와중에 이뤄지는 지속되고 있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태초에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 우리들이 함께 그 속에서 조응하는 존재임을 아주 느린 속도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 속에 침잠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이 세계의 주체가 아님을, 인간 너머의 존재들과 조응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과 사유, 행위와 방식을 체득하는 시간이 되어 줄 것이다. 그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우러져야 한다. 그 아주 시원적인 단순한 이치를 깨우치는 것이 왜 그리도 어려운 것인지, 대체 그것에 이르는 길을 막아서는 장벽들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시간도 되어줄 터이다. 바로 지금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사유의 전복을 위한 하나의 계기가 되어 주는 필독서라 감히 전하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록비 2024-12-03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진작부터 이 책 읽어보고 싶었는데 아직 못읽었어요. 다시금 의욕을 북돋는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필리아 2024-12-03 11:55   좋아요 1 | URL
네, 오늘 우리들의 익숙한 사고의 전복을 안내하고 있어요.
함께 어우러져 뒤얽혀 조응하는 세계를 느릿한 오랫적 시선의
사유로 회복하는 초대장이랍니다. 고맙습니다. 초록비님~ :)
 
오늘날의 애니미즘
오쿠노 카츠미.시미즈 다카시 지음, 차은정.김수경 옮김 / 포도밭출판사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의 세계 철학은 더 이상 주객(主客)을 논하지 않는다. 이미 인간을 주체로 한, 그리고 인간을 제외한 모든 비인간 - 사물, 동물, 식물, 화학물질 등등 - 을 대상화한 결과 그 오만이 얼마나 잘못된 지식이었는지 반성적 고찰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 세기의 자기성찰은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소외되었던 객체에게 새로운 권한을 인정함으로써 인식론의 교만을 탈피하여 존재 그 자체를 이해하려는 객체지향 이론 또는 실재론적 존재론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비롯한 대상 일체 위에 군림하여 인간 자신의 힘, 즉 자력(自力)으로 성취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태도와 이로 인한 철저한 비인간 일체에 대한 소외와 자원화라는 합리주의와 효율성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제 인간은 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와 비인간을 동등한 주체로서 이해하여야만 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전에 이러한 이해가 없거나 시도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주체와 객체, 개체와 전체, 인간과 비인간 등과 같은 이항대립이나, 개체를 더하면 전체가 되거나 전체를 미분하면 개체가 된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일원화하여 동등성과 전체성의 시각으로 통합하려는 유장한 사유의 노력이 있어왔다.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적 서구철학의 자성(自省)으로 시작된 후설, 메를로 퐁띠로 이어지는 현상학을 비롯하여 미셸 세르나 브뤼노 라투르를 경유하여 작금의 그레이엄 하먼, 레이 브라이언트, 티모시 머튼 등 존재론적 실재론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철학은 주체와 대상의 상호의존성이나 주객 혼효성(混淆性) 등의 변화된 성찰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구의 사유는 이항 대립의 관계를 통합하려는 노력만큼이나 독립적이면서 관계들을 분리하는 요소들을 내적으로 포섭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서구철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 지점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애니미즘이라는 잊혀진 고대의 원초 신앙을 21세기에 소환한 것처럼 대담한 기획이며, 철학적이고 인류학적 도전이랄 수 있다. 그런데 이 오늘날이라는 수식어가 더해짐으로써 150년 전 인류학자 에드워드 타일러가 인간과 비인간을 확연히 분리한 후 비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정신(영혼)을 비인간에 투사한그런 소박한 애니미즘이 아니다. 다시 말해 풀, 나무, 벌레, 물고기, 돌 등 삼라만상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정령신앙을 반복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 너머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인간이 스스로 그 힘에 이끌린다는 함의(含意)를 지닌, 거대한 타력(他力)을 느끼며 자력을 잊지 않는 자유롭고 활기찬 사상으로서 타력을 상상하는 것으로서 애니미즘이다. 이미 인간이 무시하고 마음대로 남용하던 비인간의 배후에 숨겨진 힘을 확실히 보았기 때문이다. 애니미즘은 이러한 지상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에 대한 겸허한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보다 풍부한 사고와 행동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는 인간의 힘도 인간의 지혜도 미치지 않는 곳이 있음을, 또 그것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머뭇거리던 기분을 기억해내는 작업이다. 21세기는 종교가(전지전능하다고 주장하는 일신교가 아니다!) 거대한 주제로 등장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 예견되고 있다. 오늘의 인류에게 주어진 새롭고 거대한 테마이다. 주객의 대립이나 정신과 물질 구별의 무용함, 무의미함을 전제로 한, 인간과 비인간이 공히 동등한 정서적, 영적 성질을 가진 존재임을 이해하는 신앙과 실천에 관한 종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은 인류학자와 불교철학자 두 사람이 나뉘어 애니미즘이 왜 오늘의 인류에게 소환되어야 하는 정당성이 있는지를 인류학과 초기 불교와 철학적 사유를 중심으로 탐색, 논의한다. 사실 현대인은 인간과 비인간 정령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애초 상실되어 있기에 비인간에 대한 감수성에 대해 어떤 지적 감흥을 갖기가 매우 어렵다. 뛰어넘을 수 없는 깊은 골과 장벽이 세워져 있어 표층적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언어 이전(以前), 반성 이전과 같이 인간 사고를 초월하는 저 너머 세계에 가 닿는 것은 불가능할 만큼 어렵게 여겨진다. 바로 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인류가 이해하여야 될 애니미즘 사고가 무엇인지를 민족지적 인류학의 현장 조사, 문학과 철학, 위상 기하학과 종교이론을 넘나들며 흥미롭게 요구되는 애니미즘 사고를 탐사해내고 있다.

 

문자 이전의 시대인 고대 원시사회는 동물의 정령을 믿었으며, 특정 동물을 죽였을 때, 그 동물의 영혼을 위해 제의를 지냈다. 그 때의 인간들은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마음 상태였다. 그들은 인간이었다가 곰과 같은 동물이었다가 다시 인간이 되는 순환하는 세계를 마음속에 지녔다. 이것은 자신의 뿌리가 가 닿는 무시간적(無時間的) 기이한 시공의 경험이다. 오늘의 우리는 이러한 사고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인류학자인 릿교(立敎)대학 오쿠노 교수는 오직 한 면만으로 형성된, 즉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비유해, 면을 걷다보면 어느 순간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걷는 존재를 이해토록 돕는다. 인과(因果)로 성립되는 현실 세계에서 인과 없는 세계가 만나는 놀라움, 삶과 죽음이 하나의 세계로 연결되었다는 색다른 시공의 경험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인류학을 공부하는 독자들은 오쿠노가 소개하는 아이누족의 곰 의례나 푸난족의 사냥과 같은 사례를 통해 애니미즘의 세계에 보다 근접한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푸난족의 새 사냥 장면은 매우 인상적인데, 화살이 든 대통을 훅 불어 목표물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것인데, 어느 순간 숲 속으로 화살이 날아가고 탁 하고 작은 새가 떨어진다. 우리는 이 장면을 사냥꾼이 화살을 쏘아 새를 맞혀 그 새가 떨어졌다고 인과율에 의해 해석하는 데 익숙하다. 과연 그럴까? 이것을 동시성으로, 무인과적 연결(우연)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작은 새의 죽음 너머 저편에 펼쳐진 어둠이, 죽음의 시계가 화살을 부른 것이라고, 푸난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화살을 불고, 죽음이 푸난과 작은 새를 에워싸며 퍼져나갔다고. 이것이 애니미즘의 관점이다.

 

죽음 속에 자연이 있고 인생이 있으며 생명체가 살아가며 무수한 만남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이해이다. 인과로 연결된 표층적 현실 아래 우연의 집적이 사태간의 결합을 통해 상호 연관되는 별개의 존재 영역이 활동을 지속하는 것이라는 애니미즘의 적절한 예시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왜 필요한 것일까? 우리의 인간 중심적 사고가 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고, 비인간 세계의 존재자들과 대화하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새가 화살을 맞았을까? 맞았을 수도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두 사건에는 어떤 인과성도 없지만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시간성이다. 이 세계는 수시로 이러한 무시간성, 동시성이 흘러드는 세계이다. 인과성과 무인과성의 세계가 스치듯 마주치는 찰나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것,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이 잃어버린 감수성이고 인간이 관여한 바가 아닌 인간 너머의 거대한 힘의 작용을 상상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일 것이다.

 

한편 불교 철학자인 도요(東洋)대학 교수 시미즈 다카시는 애니미즘을 불교 철학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서구 이원론의 참된 초극을 향한 무수한 노력들이 환원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관점을 시작으로 인도의 논리학, 대승 불교에 이미 이원론의 초극에 대한 이론이 발전해왔다는 주장에 입각한다. 특히 주체/대상/하나/여럿이라는 이항대립의 통합을 위한 추구가 실패하는 이유는 /이라는 공간적 요소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하다며 소위 삼분법을 설명하는데, 이를 서술하기 위해 논리적 접근을 시도하지만 그 논리가 과학적 논변이 아닌 초월적 형이상학, 즉 불교철학자(선승들 포함)들의 증명할 수 없는 사유들에 의존하고 있어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 이론을 비판승계하려는 야심은 미완에 그치고 있다는 인상이다.

 

하지만 서구 철학의 실패지점에서 인류에게 요청되는 존재론적 접근인 일원론적 통합의 지향을 동양의 불교와 애니미즘을 교차시키며 그 속에서 모든 영역을 포섭 아우르는 세계를 구상하고 있다는 측면은 그 시도를 존중하고 싶다. 이러한 시도는 한국 철학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흥미롭다. 이 책을 통해 서구 철학과 긴밀하게 조응함과 동시에 일본의 독자적 철학을 구축해온 그들의 두터운 층에 시기어린 부러움이 일기도 했다. 특히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서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으로 이어지고, 이를 극복하는데 나가르주나와 도겐의 중관주의 불교 철학을 통해 평면적 대립의 통합 너머 삼차원적 이항 대립의 포섭과 통합으로 나아가는 당찬 주장들은 나름 현대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도 한다.

 

이 책을 읽다 관심을 갖게 된 인물을 발견한 것은 내겐 무엇보다 소중한 과실인데,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이츠키 히로유키(五木寬之, 1932~)’.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고, 비인간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지속적 목소리를 낸 보기 드문 애니미스트란 점 때문이다. 그의 중심 사상은 타력(他力)’이라는 언어가 점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류가 오랜 동안 시달려 온 이중성의 문제를 아우르는 혜안처럼 보인다. 지금의 인류는 자기 힘만을 과신하며 못할 것이 없다고 모든 것을 물질화, 도구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신감 넘치는 이면에 결여된 것이 무엇일까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16~17세기 에도 시대의 검객인 미야모토 무사시가 숙적 요시오카 가문과의 마지막 결투에 앞서 승리 기원을 하려다 말고 바로 결투장에 임하는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무사시는 배례하기에 앞서 배전(拜殿)의 종을 치려다 말고, 자신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는지 자문한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인데 뭘 빌고 말고 할 것인가 하고는 승리 기원을 멈추고 그대로 자리를 떠난다. 그는 왜 기원을 하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을까. 이것이야말로 거대한 타력의 바람을 느꼈기에 그러했다고 해석한다. 무사시가 자력, 오직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여 싸우려 결심한 것에는 이미 자신이 관여한 바가 아닌 타력이라는 기묘한 힘에 이끌려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이 역시 애니미즘이다.

 

자연의 보이지 않는 힘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신과 자신 주변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를 항상 열어두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과 생명에 주의를 기울이면 사물과 생명, 그리고 세계로부터의 작용에 응할 수 있는 기제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상상력은 극도로 편협해졌다. 인간의 자력이라는 좁은 틀에 갇혀 저편의 세계를 차단함으로써 세계 실재의 참모습에 이르는 길을 잃어버렸다. 그로부터 발생하는 무수한 자연의 보복에 속수무책으로 방황하고 있다. 여기서 자연(自然)의 의미를 다시 되새길 필요를 느끼게 된다. ()는 저절로라는 뜻이며, ()은 관여한 바 없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관여나 해석을 통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자체가 저절로 진실의 작용을 드러내기에 우리는 겸허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61쪽에서 부분발췌


이 저술은 고대의 소박한 정령신앙의 재판이 아니다. 이 세계와 인간 존재의 위치를 깨닫고 잃어버린 상상력, 감수성을 복원코자하는 작업이다, 서구 일변도의 이원론적, 이항 대립적, 주객분리의 근원적 결여의 사유를 넘어서 만물이 공존하는 세계, 인간 사고와 행동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가기 위한 제안적 사유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인류학이나 불교철학을 학문적 토대로 지닌 사람들을 비롯해 존재론적 고찰이나 객체지향의 철학, 즉 비인간 일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새로운 관점과 식견을 충분히 제공하리라 믿는다.

 

화가 막스 에른스트는 그의 창작 좌우명으로 해부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름다워!”라는 로트레아몽의 시 구절을 인용했다. 겉으로 보기에 대립적 성질의 둘 또는 그 이상의 요소들을 한층 더 대립적인 성질을 가진 수준에 모아놓은 것으로부터 그는 이 복합적 형상과 그것이 드러내는 배경 사이에서 그 구성 요소들 간의 대립과 상관의 이중적 얽힘이 재편성되고 변형 조정된 의미를 밝히는 것이 바로 예술의 목적이었다고 느낀 것이다. 세계는 이처럼 이질적 존재자들의 얽힘에 의해, 그 보이지 않고 소외된 의미들의 혼효적 창발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애니미즘을 오늘날이라는 바로 지금으로 호출하는 이 논의는 때문에 우리의 새로운 자세를 위한 너무도 중요한 출발의 사유가 되어 줄 터이며, 아마 이러한 태도를 향한 무수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 줄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힐 2024-11-29 1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력>타력>에니미즘‘ 순으로 저는 이해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필리아님 글을 보고 이 상관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네요. 어쩌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의 본성은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하나로 연결 되어 있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어지는 것을 인간의 기준으로 해석하다 보니 각각 다르게 이해 되는게 아닐까요? 생각해 볼 만한 좋은 주제와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 합니다.

필리아 2024-11-29 12:41   좋아요 1 | URL
애니미즘은 인과성이 없는 저 편의 알 수 없는 힘으로서의 타력을 승인하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저는 이 단순한 정의에 동의하는데요, 우리들이 자력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힘에 이미 타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이제 새삼스레 인정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이 책은 동양철학, 특히 불교철학과 민간 신앙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어쩌면 두 저자의 시도처럼 서구철학이 돌파하지 못하는 그 한계를 극복하는 돌파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 인용,소개되는 책들을 더 읽어보려 합니다. 고맙습니다. 마힐님~, 벌써 주말이네요, 즐겁고 유쾌한 주말 되시기를요 :)
 
아침 그리고 저녁 (리커버) 문학동네 숏클래식 리커버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과 죽음의 짧지만 지극히 강렬한 이 이야기를 읽기에 앞서, 안쪽에서 걷다보면 어느새 밖에서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세계, 그 경계가 바뀌는 신비가 품고 있는 삼라만상의 오묘한 질서를 상상하고 있었다. 이 소설을 읽게 나의 충동을 그 어느 누구도 강요하거나 제의한 적이 없는 데도 이어서 이 책을 펼쳐들었던 것은 과연 우연이기만 한 걸까? 책이라는 사물과 나를 구성하는 유기체와 그리고 온갖 물질과 비물질들이 그 어떤 보이지 않는 상호 연결로 조정되는 힘이란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은 필연(無因果的 連結)처럼 내게 펼쳐졌다.

 

그리곤 바로 더운물 더요. 올라이, 늙은 산파 안나가 말한다.”는 새 생명을 예감하는 첫 문장을 만났다. 그 어떤 생명이 소중하고 귀하지 않겠는가마는, 태어날 아기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아버지 올라이의 마음에 가득하다. 자신의 아버지, 태어날 아이의 할아버지 이름을 딴 요한네스가 살아가는 동안 겪을 가장 힘 든 싸움 중 하나일 이 험한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음을, 자신의 근원인 어머니 몸속에서 나와 저 밖의 험한 세상에서 제 삶을 시작하기 위해 싸워야 함을 가만히 응원한다.

 

소설은 2부로 구성되어 1부는 요한네스의 출생의 순간, 생명 탄생을 에워싼 감사와 고투, 생의 시작이란 의미가 귀결한 시어(詩語)들이 생과 소멸의 짙은 사유의 강이 되어 흐르고, 2부는 한 생이 이울어가는, 불현듯 다가온 세계의 경계를 넘어선 요한네스가 자신의 생을 뒤돌아보며 조망하는 관점의 이야기가 마치 이 세계와 저 세계가 통합된 듯 삶과 죽음의 세계의 동시성(同時性)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생명은 생성되었으면 소멸을 향해가기 마련이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의 대단한 모험의 여정이다. 그렇다고 생의 소멸이라는 어떤 부존재의 허무를 향한 길만은 아닐 것이고, 또한 어느 순간 세계 밖이라는 그 경계를 넘어서 다시 뫼비우스의 길 밖에서 안으로 들어설지 알 수도 없는 일일임을 나는 어렴 풋 믿는다.

 

물론 그 순환의 걸음 길을 다시 돌아 나올 때는 또 다른 변화의 존재이겠지만 말이다. 이 작품이 윤회(輪廻)를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이 세계우주의 모두가 연결되었음을, 마치 나와 네가 하나이면서 서로 다르고 그 자신임을 말하는 것에서 그 어떤 존재자를 분리하는 경계가 희미해져 이 세계우주의 거대한 흐름의 근원임을 실감하게 한다. 요한네스는 어느 날 잠자기 위해 자신의 다락방에 올라간 아내 에르나가 다음날 아침 내려오지 않았을 때, 그것이 마지막이었음을, 요한네스는 마치 생과 멸의 그 이치 그대로의 그러함에 순응하듯, 그래그래, (...) 그런 거겠지.”라고 생각했음을 떠올린다.

 

이른 아침에 깨어나 괜스레 딱히 할 일도 없는 요한네스가 이러저러한 소소한 행위에 앞서 공연히 행동의 순서를 망설이고, 그러다 느닷없이 어떤 동작을 행하게 되고, 이 방 저 방을, 마당과 창고를 기웃거리다 어떤 잡일거리를 발견하고는 하루의 일과가 생겼음에 비로소 평정을 찾는 장면을 읽으며, 공감하게 된 나를 거울처럼 보았다. 늙어간다는 것, 그 시선에는 익숙했던 모든 사물이 제 안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무엇인가를 말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각자의 무게를 지탱하며 거기 서서 고요를 내뿜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2부는 이른 아침 이미 사자(死者)가 된 요한네스가 생의 경계를 넘어선 무시간적 이야기다, 우리는 이것을 시간의 흐름이라는 연결된 장면으로 읽어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이미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시간성과 아무 관련이 없다. 이미 죽은 50년 지기 페테르를 만나 게를 잡고, 그 잡은 게를 시장에서 제일 먼저 사가던 노처녀 페테르센을 함께 기다리며, 젊은 시절 그녀를 배웅해주기 위해 함께 걷던 산책길의 어느 날이며, 아내 에르나와 친구 페테르의 아내 마르타와 만나던 한 때, 어느 덧 일곱의 아이를 낳아 기르던 시절이 무시간(無時間)적으로 흐른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빨리 결정을 내리게나.”

 

검은 실루엣으로 흔들리는 페테르의 고깃배는 흰 뱃전부터

교회 묘지 앞 해변으로 들어간다.” - 100

 

항상 반복되던 요한네스의 거동이 보이지 않고 그 어떤 불빛도 비치지 않는 집은 이웃의 전갈로 인근에 살던 요한네스의 막내 딸 싱네의 발걸음을 빠르게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게 한다. 요한네스는 페테르의 길게 자란 머리를 잘라주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던 길에 딸이 분주하게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곤 싱네를 부르지만 딸은 자신을 보지 못하는 듯하다. 그리곤 싱네 얼굴에 가벼운 동요가 일어남을 보고, 그녀가 자신을 정면으로 향해 다가옴을 본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몸을 그저 통과해 버린다. 싱네의 온기가 그를 관통한다. 가벼운 두려움이 떠오른 채 자신을 지나치는 딸아이의 몸을.

 

싱네는 온통 어둠에 잠긴 아버지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간다. 아버지의 담배갑과 성냥이 항상 놓여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다. 컴컴한 어둠이 내려앉은 집, 싱네는 조심스레 아버지의 침실 방을 열고 등을 킨다. 아버지는 대답이 없고, 꼼짝하지 않는다. 안 돼요 아버지, 아버지 일어나세요. (...)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입술이 떨려온다, 그리고 눈물이 고인다.” 홀로 죽음을 맞고 온종일 침대 누워 계셨던 요한네스, 아버지. 페테르는 요한네스에게 그가 죽었음을, 오늘 아침 일찍 숨을 거두었음을 알려준다.

 

친구의 길을 안내해주기 위해 페테르가 온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지? 고깃배를 타고 우리는 다른 세상을 가는 거지.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네.” 내가 너이고 모든 것이 하나이지만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자기 자신인 온 우주세계가 하나인 곳이니, 요한네스와 페테르의 구별은 이미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모든 것이 긍정되는 세계, 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고 그저 존재할 뿐 인 세계, 작가의 말처럼 끊임없이 생성중인 삶과 죽음의 리듬’, 그 순환하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리라.

 

하늘과 바다는 둘이 아닌 하나이고 바다와 구름과 바람이 하나이면서 모든 것,

빛과 물이 하나가 된다.” -163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 하나의 전체가 있어서 거기서 시작이 그대로 끝이기도 하다는 선불교가 떠오른다. 또는 이편과 저편, 나와 너라는 대상이 분화하지 않았다는 요즘의 실재론적 존재론의 세계, 바로 그것인 것만 같다. 문득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져 서로의 영혼이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그 순환의 고리에 순응하는 섭리를 생각게 된다. 작가 욘 포세는 아마 서로 대립하고 분리되어 미분화하는 세계의 추락에서 이러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의미한 하나로 연결된 세계를 그리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인위적 관여를 떠나 자연의 힘에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 자연법이(自然法爾) , 본원에 의한 것으로부터 저절로 그처럼 있게 한다는 불교의 무아(無我)에 가닿게 한다. 미혹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생도 없고 멸도 없는 모든 분절의 무화(無化)가 이야기되는 세계 말이다.

 

인간의 힘과 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을 느끼고, 언어와 지식을 넘어서 만물을 있게 한 작용에 마음을 맡기고 열린 기분을 기억해 내는 것, 아마 우리들이 사는 이 세기의 중요한 주제일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인간들의 존재 불안을 탐색하는 작가의 깊고 깊은 사색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주체가 어디 있고 대상화된 객체란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이 주객 분리의 사고가 지금 인간사회를 어떤 지경에 몰아넣고 있다는 말인가. 아마 이러한 목소리들에 대한 한 울림일 것이다. 곰과 나무와 돌의 대화에 귀 기울일 줄 알았던 저 먼 원초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알지 못할 향수에 젖게 된다. 이 작품은 그런 이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주 트리플 28
김남숙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록된 세 편의 단편에서 시시하다라는 기분에 잠식된 인물들을 공히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사용되는 의미는 아마 너무 익숙하고 뻔해 하찮게 여겨지는 기분이어서 하고자 하는 것도 별 신통함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사실 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여정에 무어 그리 신통방통한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겠는가. 어쩌다, 아니면 예기치 않게 정말 대단하고 기상천외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거의 보잘 것 없는 일상의 연속 아닌가? 그런데, 순간 스치는 생각이 내게 이러한 시시함의 느낌을 경계하라고 일깨운다. 그 익숙해서 보잘 것 없음의 이면에 속살거리는 무수한 함의, 삶의 진실들이 있음을.

 


표제작 파주에서 일산 변방 논술학원에서 좆같은 맞춤법이나 알려주며 밥벌이하는 화자 윤정이 아이들의 평가하는 눈이 싫다고 할 때, 현철이란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미워하는 거보다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요. (...) 너무 무서워 하다보면 그게 미워지는 거거든요.”라고, 어떤 감정이 오래 지속되면 결국 시시껍절하게 되고 만다는 말일 것이다. 현철은 윤정과 함께 살고 있는 정호란 인물에 의해 군 생활 내내 맨 날 뒈질 것 같은폭력과 괴롭힘을 당했던 인물이다. 현철은 정호에게 당한만큼 잔혹하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 반복된 고통의 기억이라는 익숙함과 3년이라는 시간 속에 하찮음, 시시함으로 묻어두려 했지만, 그 시시해지는 감정을 떨쳐내고 복수(?), 사죄로서의 보상을 요구한다.

 

이와 달리 가해자인 정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그게 언제 적이야.”라거나, 괴롭히는 축에도 못 끼었다.”고 말한다. 소설은 가해자의 기억과 피해자의 고통이라는 진부한 또 하나의 주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호와 현철이란 인물들의 상황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시선으로서 윤정이 느끼는 현철의 시시해 보일만큼 긴 미움에 대한 감응이다. 그래서 현철의 비열하고 역겨워도 보상 받고 싶다는 말을 윤정은 잘 헤아릴 수 있다. 정호는 자신이 현철에게 뭘 잘 못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시시함 속에 하찮아진 것인데, 어쩌면 이 시시함이 함의하고 있는 오래시간의 축적, 익숙함이 가져온 둔감함에 묻혀버리는 생생한 미움의 감정을 망각한 까닭일 것이다. 화자 윤정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무 시시해서 죽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변화없는 규칙적 단조로움이 가져온 익숙함에 매몰되어가는 자신에 대한 항변의 목소리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그녀는 왜 정호를 떠나지 않을까? 시시함을 자각하지 못하는 불감증 인간을. 내겐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았다.

 

두 번째 작품인 그런 사람의 주인공 는 가벼워지기 위해 서울에서 3,870킬로 떨어진 후아힌의 락사수바 리조트에서 3개월 째 머물고 있다. 가벼워진다는 것은 무언가 삶의 무게로 짐 지워지는 것을 떨어내려 한다는 것인데, 사실 그 떨어낼 대상이란 것에 대한 몇 가지 정황이 발설되어 추정될 수는 있지만 그리 명확하지는 않다. 직장 상사인 유부남 K와의 관계가 가져온, 이를테면 유부남을 꼬신 어디서 굴러 들어온지 모르는 애, 다 알면서도 만난 어리석은 애, 머리채를 잡고 가기에 딱 좋은.”과 같은 시선이 가져온 고통인지, 아니면 7년 전 문화센터 소설수업을 맡았을 당시 선배와의 어떤 부적절한 사건인지 불확실하다. 다만, 이들 모두가 화자인 를 무겁게 하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7년 전, 소설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던, 그러나 이후 쓰기를 멈춘 채 일반 사무직원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K와의 관계가 가져온 상황으로부터 도피처럼 보이는 후아힌으로의 가벼움을 위한 떠남은 체류 3개월이 되던 어느 날 기억 속 멀리에서 유영하다가 곧 사라져도 무방한수강생의 연락을 받는다. ‘는 가벼움에 방해가 되는 기억의 무거움으로 거부감을 갖지만 후아힌에 1개월째 체류하고 있다는 남자와의 마주침을 불가피하게 피하지 못한다. 그는 7년 전 소설수업을 하던 선생님, 더구나 배우고 싶었던, 아끼고자 했던 선생이 아님을, 변화된 인간을 보게 되고, 그녀를 도우려 한다. 그것이 순수한 보호의 심정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말이다.

 

어찌되었건 가벼움을 방해하는 남자의 불편함으로 는 후아힌을 떠나 돌아온다. 그리고는 친구의 권유에 따라 병원의 도움을 받는다. 치료법인 모양인데 나비와 꽃을 색칠하는 것이 나를 고쳐주었다고 하며, 그런 시시한 생각을 자주했다. 아주 가볍게라고, 삶을 무겁게 하던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있음을 시사하는데, 중요한 것을 놓쳤다. 제목인 그런 사람의 지칭된, 타인에게 인지된 변화된 범주로서의 인간, 그것의 인정이라는 것, 그대로의 수긍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소설 제목에 답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바로 이 직시가 가벼움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화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일 게다. 다 잊고 새로운 껍질로 갈음한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 것인지를.”이라고. 변화된 자신, 바로 그 자체로서의 자신을 인정함으로써.

 

세 번째 작품 보통의 경우보통이라는 수식어처럼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지극한 다수성, 바꿔 말하면 이 또한 시시함에 대한 연속된 또 다른 이야기를 상상케 한다. 방송사 외주 사무실에서 구성작가로 일하는 막내사원 지수는 선배인 희진 언니가 직장을 떠나 환해서 눈이 멀 것 같은 곳, 토레스 델 파이네로 떠날 때, 머리카락이 거의 모두 빠져 모자를 벗을 때 가발이 함께 벗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때 희진은 지수에게 말한다. 이건 말하자면 비슷한 애들끼리의 결속 같은 거야라고. 비밀은 비슷한 애들끼리만 가능한 거라고.

 

지수는 소위 짬밥이 쌓이지 않은 막내 작가이기에 협찬 코너 원고를 쓰거나 온갖 잡다한 일을 버텨내야 한다. 그녀는 스트레스와 수면부족, 음식섭취로 축약되는 탈모의 원인들로 인해 정수리와 두피 부분이 미치도록 가려워 진물이 날 정도로 긁어댄다. 그리곤 이 증상을 언니가 말한 결속에 속하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또한 긁어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순간들이 (...) .매순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버텨내야 하는 고통을 말하기도 한다. 아직도 대학 등록금 대부금을 갚기에는 20개월 남짓 남았기에,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만 그녀는 버텨내느라 그 보상으로 인한 것인지 초고도비만과 고도비만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뚱뚱해진다. 보복, 음식고문으로써.

 

지수는 밉보이지 않기 위해 융통성이라는 것을 보이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동료직원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던 중 한 신입 남자 피디가 건네는 말 한마디에 생각한다. 나의 다음을 궁금해 할까, 아니, 누군가는 나를 조금 궁금해 할까. (...) 내 이유에 대해서, 체념과 절망 사이,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가운데 그 익숙해지는 삶의 슬픔의 감정은 사실 꽤나 끈질긴 모양이다. 이윽고 프로그램 개편과 함께 그녀는 자신도 하나의 독자적인 방송을 맡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 제안은 다이어트 프로그램의 실제 참여자가 되어 체중 감량의 출연자가 되는 것이고, 이후 결과에 따라 메인 작가로 발탁되기를 기대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그녀는 수락하고 직접 체중 감량의 실연자가 된다. 그녀의 유일한 대화 상대자가 되어주던 피디는 왜 그 작업을 수락했느냐고, 그냥 못한다고, 하기 싫다고 그러지 못했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한다.

 


촬영 구성안이라는 허용된 말 속에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숨겨 놓을 때만 작은 희열을 느꼈다.”, 한 협찬코너의 원고에 올 겨울은 어떨까요? 버티지 말고 나가 보세요.”라고 써 넣지만, 최종 방송분에는 버티지 말고 나가 보세요는 삭제되어버린다. 지수는 보통의 삶, 시시한 삶을 당분간 꾸려가기로 한 것일 게다. 시시함, 이 하찮고 보잘 것 없음의 단어에는 우리네 삶의 온갖 곡절이 숨어있는 듯하다. 익숙함이 가져오는 무감응이나 망각, 반면에 체념이나 그대로의 순응이 주는 안정감과 자기 보존의 의식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어떤 지혜가 버무려진 언어, 삶의 농축인 것만 같다. 왠지 시시하기 그지없는 내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 같은 평온을 느끼게 된다. 김남숙 작가의 앞선 소설집 아이젠을 읽어보고 싶어진다. 알고 싶은 또 한 사람의 작가를 발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의지와 운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1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김현철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이 글은 의지와 운명1,2권  통합 감상입니다.


막스는 운명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의지와 운명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방치했어...

그렇다면, 선생님, 필연은요. 그 빌어먹을 필연은요? 필연이 없는 의지나 운명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206)

 

소설은 오늘을 구성하는 멕시코의 현대사를 관류하며 형제의 의지와 운명이라는 부조리한 삶의 형식인 시간의 악을 드러내고, 그 악의 형상이 어떻게 오늘의 인간문화에 깊숙이 불가항력적 힘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가히 신화적으로 묘파(描破)해내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잘린 머리다.“, 이 이야기의 종국이 비극임을 전제하는 이 문장은 비장(悲壯)하게 다가온다. (註: 카스토르와 폴룩스, 카인과 아벨, 이들 신화와 성경 속 인물과 소설 속  여호수아와 예리고를 읽으면 더욱 풍부한 얘기로 읽을 수 있다.)

 

태평양 연안 게레로 주 연안, 바닷가에 야자열매처럼 버려져 모래밭에 뇌수가 흘러내리는 몸통을 잃은 머리통이 자신의 짧은 삶의 여정과 시대의 역사를 술회한다. 그런데 이렇게 잘린 자신의 머리통이 멕시코에서 천 번째임을 밝히는 통계 숫자는 그 사회가 만연한 범죄의 장소임을, 뿌리 깊게 부패한 곳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술회하는 머리통, 화자는 여호수아 나달이라는 스물일곱 살 젊은이다.

 

연안 모래밭에 나뒹구는 잘린 머리통, 여호수아는 자기 삶의 여정을 소년시절부터 거슬러 술회하기 시작한다. 코주부로 놀림 받던 어느 날, 에롤이라는 동급생 불량소년들의 우두머리인 에롤로부터 폭력을 당한다. 이때 예리고란 소년이 나타나 그를 보호하고 에롤을 망신시켜 더는 여호수아를 괴롭히지 못하게 처리한다. 여호수아와 한 살 많은 예리고는 평생동안 유지될 동맹, 신성한 형제로서의 의무를 맺는다. 그런데 두 소년 모두 의지가지 할 부모를 알지 못하고 성장한다. 누군가의 정기적 도움으로 살아가지만 둘 은 그 누군가나 그 행위의 의미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 둘은 자신들이 확신하는 각각의 진리, 그들이 학습한 독서와 지식에 기초한 비평의 틀을 통과한 의견만을 받아들이며, 여느 평범한 사람들과는 차별화된, 사회가 설정한 모든 근거나 기준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를 갈망한다.

 

두 사람은 그들의 지적 성장에 도움을 준 피로파테르 신부의 가르침인 스피노자 철학을 중심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페라기우스의 논쟁으로 대변되는 자유에 대한 관점, 즉 펠라기우스의 자유의 철학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라는 중개자가 없다면 개인의 자유란 존재할 수 없다는 두 철학처럼 둘의 삶의 세계에 대한 신념은 조금씩 달리 진행된다. 에리고의 그 어떤 귄위와 위압적 체계에 대한 부정은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의 인정으로, 여호수아에겐 확실함을 잃어버렸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두 사람과 친구가 된 에롤이 이 둘에게 건네는 말이 있다. 너희가 원하는 것과 사회가 너희에게 허용하는 것 사이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운명과 내기를 걸어보거나 (63).”

 

이제 두 청년은 운명과 내기를 거는 의지라는 자유의 발걸음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걸음의 길은 그들의 신념만큼이나 다르다. 여호수아는 실제가 허구를 능가함을 안다. 그의 성장통으로 신경증을 앓고 있을 때 그를 간호했던 간호사와의 세속적 신음과 기다란 감탄사로 표현되는 최초의 정사이후 깨달은 것이라면 헛소리가 될까? 이를테면 여호수아는 현실론자이고 예리고는 이상주의자라면 아마도 어설픈 구분이 될 것 같다. 여호수아는 철학으로 이루어진 뼈대에 살을 붙이는,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법을 공부하기 위해 멕시코국립자치대학 법학부에 진학한다. 둘은 같은 현상을 보지만 그 드러난 문제점의 해결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예리고는 갑작스레 자신은 프랑스로 떠날 것을 선언하고, 두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는 이제 보이지 않게 변해가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 대화의 문장은 이들의 가치를 상징하는 하나가 될 듯하다.

 

오감에 근접한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세계가 있는 반면, 실제와 허구를 구별할 수 있어야만 존재하는 상상의 세계, 환상의 모든 권리를 갖춘 그런 상상의 세계가 존재한다.” (80)

 

사람을 망치는 게 뭘까? 여호수아는 명예? ? 섹스? 권력? ...” 거론하지만, 예리고는 그 반대쪽에 있는 실패, 무명으로 남는 것, 가난, 성불구...”를 호명한다. 여호수아의 주장에는 항상 의문부호가 있는 불확실성을 전제한 주장인 반면, 예리고는 부정성에 기초한 단정이다. 예리고가 떠난 이후 여호수아는 대통령과 통신사업으로 멕시코 최대의 부를 가진 막스 몬로이의 자문역인 변호사 상히네스 교수로부터 법과 이론의 실제적 통찰을 위한 스스로의 관찰이라는 경험을 위해 살아있는 자들의 무덤이고, 멕시코의 시베리아이자 황무지 안의 황무지인 감옥중의 감옥인 교도소를 출입한다. 인구의 절반이 가난 아니면 범죄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멕시코의 실상인 하부 세계를 경험한다. 여기서 한 독특한 죄수를 만나게 되는데, 스스로 수감되기를 원해 석방을 거부하고 교도소의 질서자로 군림하는 인물, 미겔 아파레시도를 관찰하게 된다.

 


여호수아는 졸업에 즈음하여 상히네스 교수로부터 <마키아벨리와 국가의 탄생>이라는 변호사 자격취득 논문의 주제를 받는다. 이때 프랑스에서 귀국한 예리고와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상히네스에게 호출되어 불려간다. 여기서 예리고는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추천되어 대통령실로, 여호수아는 막스 몬로이의 통신사업제국에 입사하게 된다. 소설은 이때부터 음모와 배신, 비열함과 추악함, 탐욕으로 일그러진 멕시코 사회를 철저하게 해부하기 시작한다. 막스 몬로이의 어머니인 망령이 여호수아에게 건네는 꿈 속 같은 훈계들은 배신과 거짓말, 만행과 복수로 점철된 멕시코의 현대사를 관통하고, 그것은 운명에 마주선 의지의 시험대가 된다. 이십년이나 지속된 내전, 그로 인해 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어. (...) 이 나라는 배신의 나라야.(202)”

 

젊은 피를 수혈받은 대통령은 예리고에게 주문한다. 투표만 해서는 민주주의를 살 수 없다고, 사람들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를 위해 욕구와 갈증과 허기를 다독일 수 있는 축제를 조직하라고. 사실 오늘날에는,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퇴락한 후진 전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과 국민을 상대로 뻔한 농락을 행하려는 자들이 여전히 이 퇴행적 기만수법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멕시코 사회와 국민들에게 뿌리깊게 자리잡은 기득권 계층의 집요한 수구적 탐욕과 이를 위한 기만과 거짓, 부패라는 악의 세습이다. 다시금 마이클 존스턴의 한국사회의 부패유형을 지적한 말이 떠오른다. 그것은 많이 배운 놈들이 조직적으로 뭉쳐, 국민을 등쳐먹는 엘리트 카르텔 유형이라는 아픈 말이었는데, 딱 소설 속 멕시코의 유형이랄 수 있다.

 

이야기 속 대통령은 예리고에게 말한다. 의식(儀式)은 우리 모두가 누더기를 가리기 위해 어께에 두를 수 있는 품위 있는 망토라고. 에리고는 대통령의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이벤트를 준비하지만, 이것은 그의 신념인 이상주의, 즉 무능하고 부도덕한 권력을 전복하는 혁명의 준비로 활용한다. 아주 흥미로운데, 이때 대통령의 유일한 경쟁자인 막스 몬로이는 대통령에게 경고한다. 이런 기만적 수단은 오히려 국민의 불만과 저항만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정보 사회인 오늘은 그런 비밀스런 통치는 더 이상 먹히지 않을 뿐 아니라 권력의 실패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쟁자가 하는 경고는 조언이 아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항구화하기 위한 기득권집단의 암묵적 협력이다. 반란의 싹을 미리 잘라내 자신들의 기득권이 손상되는 일이 없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경고요 협박인 듯 하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면 공조이자 동업자의 협력인 것이다. 예리고는 실패하고, 권력에 쫓긴다, 잡히면 죽음이다.

 

최종 목적지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모든 운명이 숙명이라는 사실이었다. 운명은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고, 철문이 닫히듯 삶의 문이 닫히고 만다. (...) 많은 시간이 흘러야 우리는 깨달을 수 있을까? 우리의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운명을 점 칠 수 없다는 사실을, 불확실함이 인생의 실체적 기후라는 사실을....” (246)

 

운명에 도전하여 자신의 의지를 시험한 젊은이는 그 어설픈 낭만적 이상주의의 독단에 의해 실패한 것이다. 이 소설이 얄궂은 것은 여호수아를 정점으로 형제의 동맹을 맺건, 교도소의 지배자인 죄수 미겔이 되었건 막스 몬로이와 맺게 되는 관계다. 이 관계에서 빚어지는 증오와 복수, 빼앗긴 욕망, 그리고 운명과 의지라는 그늘에 덮인 실체가 수면에 떠오르면서 무자비한 폭력의 역사에 토대를 둔 사회에서 의지라는 것은 한낱 숙명으로서 허무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는 양상을 세밀화로 그려낸다. 사실 지구 반대편 남의 나라 역사거나 현실의 실체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참혹한 폭력의 토대에 구축된 기득권 계층사회이다. 일본의 주구들, 미군정에 기생한 일제 부역자들의 후손이 그대로 오늘의 한국 정치와 경제 권력을 점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진부하게 된 오늘의 현실은 그만하기로 하고, 다시 소설의 마지막으로 가 봐야하는 까닭이 있다.

 

막스 몬로이라는 경제 권력의 거대주체는 여호수아의 믿음인 실제는 허구를 능가한다는 진술이 바로 허구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현실을 제압하는 것은 허구이기 때문이다. 망상과 다를 바 없는 신화가 현실을 기만하고 세계를 호도하기 때문이다. 막스는 운명을 만들어내기 위해 의지와 운명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방치했다는 그럴싸한 환상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사람들은 현혹되어 실제가 허구를 능가한다고 착각하고 산다. 필연이 없는 의지나 운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필연에 대한 믿음은 폭력사회에서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얘기이다.

 

이것이 현실을 제압하는 허구의 세계인 멕시코요, 바로 허구의 다른 말인 조작이 판치는 한국이며 악의 형상이다. 젊은이들에게 위협을 느끼는 늙은 겁쟁이들이 권력을 확고히 만들고자 하는 수구의 심리는 자신의 아들들을 피비린내 나는 희생양으로 던져 놓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여호수아는 왜 머리가 잘려 해변가 모래위에 던져져야 했을까? 추악하게 일그러진 이 비정한 비극적 드라마는 음모와 배신으로 점철된 권력에 집요하게 매달린 인간들의 염오(厭惡)의 역사, 그 현실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 인간의 조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이 된다. 이 걸작을 이제라도 읽어 볼 수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힐 2024-11-21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책을 읽지 않고 필리아님의 리뷰만 봐도 영화의 장면들처럼 떠올라 지네요.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이 허구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걸작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 합니다.

필리아 2024-11-21 12:21   좋아요 1 | URL
소설에는 이런 문장도 있어요. ˝허망함은 우리의 운명이지만 자유는 우리의 야망이며, 자유를 위한 투쟁 말고는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배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결국 의지라는 수단으로 운명을 돌파해 내려하지만, 거대하게 구축된 권력의 세계에 희생될 수 밖에 세계를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답니다. 무엇보다 푸엔테스의 이야기를 이끄는 힘을 느끼게 됩니다. 괜찮은 소설이에요. 댓글 고맙습니다. 마힐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