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오따쓰 -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마을
앨런 와이즈먼 지음, 황대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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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하면 그 정국의 불안함이 얼마나 오랜 기간 지속되었으면, 지구 반대쪽에 있는 무관심한 사람에게 조차 내전과 코카잎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제아무리 인류애가 깊고 이상적이며 균형 잡힌 발상과 실행도 이러한 사회에서 30여년을 꾸준히 지속하고 유지하기란 불가능해 보이기만 한다.

‘가비오따쓰’, 원주민 야네로가 제비갈매기를 일컫는 말이자, 이젠 콜롬비아 중부 내륙 사바나지역의 생태공동체 마을의 이름이며, 지명이기도 하다. 또한, 인류와 자연의 조화를 실천하는 사람들 그자체이기 하며, 존재 가능한 유토피아(Utopia)의 이름, 즉 지상에 유토피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실행된 그 어떤 유토피아보다 훨씬 더 실천가능성이 있음을 입증하는 장소이다.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없는 버려진 광활한 사바나의 초원에서, 숲이 성장하는 토양으로 만들어 내고, 지구 대기환경을 끊임없이 훼손하고 있는 화석연료를 대체하기 위한 태양광을 이용한 천연의 에너지 개발을 위한 무수한 연구노력, 그리고 오염된 식수로 질병에 노출된 극악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식수원과 상상력 넘치는 펌프의 개발 등 오직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통해 풍요로운 이상향의 건설에 매진한‘파올로 루가리’를 비롯한 콜롬비아국립대 농화학부 토양화학자‘스벤 제텔리우스 박사’, 안데스대학 기계공학부 교수‘호르헤 쌉’박사등 최고 지성들의 야망에 찬 출발은 정말 인류의 대안적 생활양식처럼 기대와 열망으로 가슴 부풀게 한다.

제텔리우스 박사가 “새롭고 대안적이며 거주 가능한 생태공동체를 목표”로 하여야 한다고 오늘 이 공동체의 산파이자 후원자이고 주체자인‘파올로 루가리’에게 제언한 초기의 이상(理想)은 이제 울창한 열대삼림지로 변모하고, 자족경제를 마련한 명실상부한 생태공동체의 실증으로 우리에게 그 모습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단기 생명보험 패키지, 무기판매, 경호시스템, 장례기업과 같은 “죽음이 가장 잘나가는 성장산업”이라 할 정도의 무차별적인 살상이 공공연히 자행되는 콜롬비아의 불안정한 사회 환경을 극복하고, 이들 초기의 가비오따쓰인(人)들이 그들의 꿈을 실현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30여년이라는 그 오랜 세월만큼 무수한 굴곡과 시련의 연속이다.
자연친화의 생태공간을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농기구와 태양열온수기를 비롯한 난방기구, 풍력과 놀이를 이용한 펌프의 개발 등 공동체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한 초기의 부단한 노력에서부터, 공동체를 위해 지혜와 노동력을 아끼지 않았던 무수히 지나쳐간 사람들의 진실과 애환, UN과 UNDP 등 구호와 지원의 단절로 자생하기 위한 수익원천의 발굴이라는 문명사회와의 불가피한 연계에 대해 공동체의 이상을 손상시키지 않고 어떻게 그 접점을 찾아 내는가하는 실천적 문제점들이 생동감과 열정이 담겨져 기술되고 있다.

한편, 부분적으로 틀렸음이 입증되기도 하였지만, 1972년 로마클럽이 제출한 보고서‘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에서 “소비와 생산재의 문제에서 전 세계인이 집단적으로 자제하지 않으면, 인류는 한 세기도 지나지 못가서 실제적인 생존이 불가능해 질것이라는 경고”는‘지구를 구하기 위해 맺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조약’이라 일컬어지는 1987년 몬트리올협정으로 이어졌음과 같이 급격하게 파괴되는 오존층처럼 지구환경의 손상은 그 심각성이 빠르게 진전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가비오따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실로 지대하다.

물론 가비오따쓰의 30여년에 걸친 지난한 과정이 모두 성공적이지만은 않다. 작게는 그들이 만들어낸 수력터빈이 기술적으로 성공했으나 전력이 갖는 사회적 시스템의 연속성을 고려하지 않은 사회적 실패, 까싸바 분쇄기가 가져온 생활의 편리함과 생산성의 향상이 원주민과 농촌사회와의 괴리로 문화적 측면에서 실패하기도 한다. 또한, 공동체의 정체성이란 측면에서 “사람들은 우리를 왜 분류하려는지 모르겠소. 우리는 이념 주의자가 아니에요. 모든 이념은 문제를 불러일으킬 뿐이지요.”라는 루가리의 열띤 주장에도 세상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어느 한 틀에 끼워 맞추려는 이기적 잣대를 거두려하지 않는다. 더구나 콜롬비아 중국대사를 역임하는 끼비오따스의 조정자였던‘빼빼 고메쓰’와 파올로 루가리와의 공동체에 대한 견해 차이는 우리사회(한국)의 대안공동체의 실현에 있어서도 신중히 고려하여야할 다양한 과제들을 시사해주고 있다. 경쟁이 없는 사회, 이기적 소유욕이 배제된 삶을 사는 공동체로서 구성원들의 직무,기능 영역의 자율적 수행과 상호존중, 균등한 대우, 거주공간과 식사의 공동적 운영 등 200명 남짓한 공동체로서 불협화음이 대두되고 있지 않지만, 관리되어야 할 삼림의 규모와‘지속가능한’인류의 대안 공동체로서 성장하기 위한 구성인의 증가에 대응하는 시스템의 고려가 준비되어야만 할 것이다.

“발전이란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하는 질문에 국민총생산(GDP), 의료 병상수와 같은 물질적 지표가 아니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라는 루가리의 인류의 진정한 발전에 대한 진의는 “지속 가능한 기술이나 경제 발전 같은 것은 그에 걸 맞는 인간의 발전 없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와 맞물려 21세기 오늘 시장만능적 몰가치와 이성의 황폐화, 지역,민족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산업 국가들의 우리들에게 현명한 선택이 무엇인지에 대한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러시아, 인도, 중국, 멕시코가 제조 불법 화학물질(염화불화탄소(CFCs,프레온가스),메틸브롬화물)이 콜롬비아가 생산해내는 최악의 물질 코카인의 양을 능가하고 있을 정도로 인류는 이기적이고, 무지하며, 몰염치하다. 그래서 파올로 루가리를 비롯한 가비오따쓰인들의 이젠 울창한 삼림으로 변모한, 여전히 인류미래의 대안을 실험하는 유일한 장소처럼 보이는 야노스(Llanos)의 생태공동체가 어떤 구원처럼만 느껴진다.

수백만 그루씩 심어지고 관리되는 소나무, 그리고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낸 복원능력으로 천연의 열대우림처럼 보이는 경외를 자아내는 숲, 그곳의 동물들, 새, 곤충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자연의 소리, 경쟁 대신 협동이 들어서 있는 장소, 나누고 섬기는 존재로 살아남는 사람들, 스스로 만들어낸 독소에 젖어 허우적거리는 인류에게 잃어버린 감각을 되살려주고자 하는 시도가 지구 한쪽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본다. 누군가 루가리에게 말한다. “당신이 쓰고 있는 역사는 마치 시와 같군요.”가비오따쓰인들이 지금도 만들어내는 사바나의 풍요로운 삼림은 바로 우리들 미래의 삶이 되지 않을까?
앨런 와이즈먼의 이 저술은 그의‘인간 없는 세상’이 도래하기 전, 우리 인류가 준비할 수 있는 진정한 상상력이자 현실이며, 귀중한 대안으로서 아름답다. 인류의 오디쎄아(Odisea)로 발걸음을 내 딛는 가비오따쓰를 그리며...

“사람들은 가장 편리하고 풍족한 곳에서 사회적 실험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장 힘든 곳을 원했지요. 여기서 무언가 이루어 낼 수 있다면 세계 어느 곳에서도 해낼 수 있을 겁니다.”
- Paolo Lug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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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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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야만성에 대한 고발이라고 하여야 할까? 순수함에로의 귀환이라고 하여야 할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세상의 추악함이 이 보다 절실하게 표현 될 수 있을까?

어린 소녀에게 가해지는 세상의 무차별적 위협과 억압, 강제, 추행은 끊임없는 도피를 종용한다. 이러한 지속적이고 극한적 삶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내 존재를 계속 유지해 낼 수 있을까?

 

난, 검둥이 계집애, 내 부모가 누군지, 나의 이름이 무엇인지, 내가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단지, 다섯 살 인지 여섯 살 무렵의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자루에 갇혀 낯선 곳에 옮겨졌다는 어렴풋한 기억만 있을 뿐이다.

할머니보다는 마님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랄라 아스마’, 나의 주인인 노파는 나를 ‘라일라’로 부른다. 라일라는 몸종이자 벗이자 손녀처럼 키워진다. 그러나 라일라의 어린 몸을 탐하려는 노파의 아들과 폭력과 욕설의 겁박으로 위협하는 며느리가 있는 이 끔직한 세계는 노파의 죽음을 계기로 탈출로 이어지고, 작은 인연만이 존재하던 거리의 여자들, 공주님들이 사는 곳으로 도피한다. 그녀에게 열려 있는 세상이란 다시금 삶의 건강한 기회가 기다리는 땅과는 너무나 멀다.

노파의 며느리 ‘조라’의 추적으로 공주님들과의 그나마 자유로운 세계는 사라지고, 조라의 끔직한 폭압에 묻힌 구속의 노예로서 살아간다. 잠시의 자유의 기회처럼 보인 백인가정으로의 가정부로 대여되지만, 이곳에도 강자인 백인남자의 성적 탐욕의 시선을 피하기 어렵다. 세상은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 벅찬 가혹한 환경일 뿐이다. 그녀의 생존적 도피는 의지가 아니라 그저 열려 있는 방향일 뿐, 선택이 랄 수 없다. 강자들의 문명 넘어 강을 건너면 소외된 사람들의 열악한 환경이 펼쳐진다. 문명의 야만적 질서가 뿔뿔이 내몬 거리의 공주, 그녀를 보살펴 주던 언니들의 만남으로 작은 위안이 된다. 그곳에는 삶이 없다. 질병과 가난과 죽음만이 도사리는 그 열악한 곳으로부터, 조라의 위협적 추적이 있는 곳을 떠나야한다. “호시탐탐 노리고 뒤쫓고 그물을 치는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라일라의 성장한 의식은 프랑스로의 밀입국을 결정하고, 바다를 건너, 에스파니아의 험한 산맥을 넘어, 꿈의 도시 파리로 들어가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이방인으로서의 지위는 또 다른 소외와 불안의 세상 이상이 아니다. 어느덧 성숙한 여성의 몸으로 거주증을 획득하기 위해 복싱에 몰두하는 연인에게 몸을 열지만, 그녀의 세계는 냉정한 현실사회의 이해와 아프리카 초원과 강을 내달리는 근원으로의 회기를 꿈꾼다. 거주증 없는 불완전한 지위의 여린 흑인 소녀에게 내민 손길은 여지없이 추악한 탐욕만을 드러내고, 프란츠 파농의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을 전해주던, 그리고 세네갈의 강변 과 초원을 이야기하던 하킴의 할아버지 엘하즈는 그녀에게 죽은 손녀 마리마의 여권을 남긴다.

이 인간으로서 최초의 실존적 지위가 주어지는 행위는 자못 가슴을 에리듯 파고든다. 어디에도 그녀가 살아갈 바다가 없다. 라일라는 자신을 거친 물살에 이리저리 표류하는 한 마리의 가녀린 물고기라 생각한다. 그녀의 표류는 마리마란 실존의 존재가 되어 미국으로 표류한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 그녀의 노래는 저 멀리 검은 자루에 실려 떠나기 전 “영겁의 시간 전에”,“말라붙은 소금처럼 새하얀 거리, 부동의 벽들, 까마귀 울음소리” 들리던 아득한 세계로 향한다.

“나는 당신에게 주문을 걸었네, 검은색은 내 진정한 연인의 머리카락 색이네.”

서구의 감추어진 사악한 탐욕과 위선, 문명이란 얼굴의 야만성, 세상의 이중적이고 기만적인 모습, 세계화에 감추어진 인종과 지역의 소외라는 얼굴이 아프리카의 당당한 정체성으로 환원되고, 그 아스라한 태고의 소리들이 있는 곳, 그녀가 떠내려 온 검은 대륙으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황폐해진 소녀의 의식은 평온을 찾는다.

잔잔한 서정적 운율이 감아 도는 듯 한 포근한 감성이 내내 맴도는 작품이다. 다분히 저항적이고, 문명의 어두운 왜곡을 질타하고 있지만, 순수함으로의 회귀로 안내되는 여정에서 풍요로운 아름다움, 라일라의 밤!, 그 검은 마법에 매혹된다. 탁월한 문학이다. 소설이 빚어낼 수 있는 선의 극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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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키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오근영 옮김 / 창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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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본질적인 질문이기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으로 이 답을 찾기 위해 쉬지도 않고 책을 읽어 내려갔다. 정말 삶을 살 가치가 있고 그렇게 고마운 일일 수 있을까? 한 생명체로 태어나는 것이 과연 축복 받을 일인가? 죽음이 예고된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선(善) 일 수 있는 것일까?

이토록 무거운 주제가 이렇게 감동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산 자의 오만이고 허세일까? 그럼에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이 맛스런 스토리 구성은 오로지 작가의 역량 때문인가? 심장 저 깊은 곳에 있던 원초적인 그 무엇이 자꾸 건드려져 불쑥 불쑥 가슴이 저미듯 아려오고, 부모와 자식이란 관계로 연연히 내려오는 그 거대한 생명의 질서를 보는 것 같아 인간의 의지라는 것에 경외감을 갖게까지 한다.

‘시간을 살아간다.’는 뜻을 가진‘時生(도키오)’란 제목이 시사하듯, 미래의 아들이 세상을 저주하며 살아가는 한 못난 청년인 아비에 나타나 삶의 긍정과 자기애에 대한 가치의 본질을 찾는다는 다소 공상적이고 단순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소재를 통해 흐르는 문제의식은 그렇게 단조롭지 않으며, 모두(冒頭)에서와 같이 생명 잉태의 시원적 질서와 생의 가치, 삶의 본질에 대한 탐색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 부조리의 고발과 같은 세태의 본성까지 아우르는 장대한 여정을 지닌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미야모토 다쿠미’는 아이가 성장하면서 뇌신경의 점진적 파괴로 생명을 잃는다는‘그레고리우스 증후군(가공의 불치 병명임)’의 유전자를 가진 아내,‘레이코’와 결혼을 하게 되고, 이들 사이에 출생하는 남자아이는 10대를 넘길 수 없는 운명임을 알고 있다.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이다. 과연 아이를 낳는 것이 바른 선택인가? 아닌가? 이러한 결정을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인가?

둘은 아이를 낳고, 한없는 사랑으로 키우지만, 아이는 불치병에 스러지고 만다. 다쿠미의 고뇌어린 회한과 비통함, 애끓는 부성애가 아이의 운명을 다하기 전, “도키오! 아사쿠사 놀이공원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꼭 들려주려는 한마디로 긴 여운의 파문으로 다가온다.

이는 23세의 청년 다쿠미 앞에 나타난 당신의 아들이라는 도키오라는 청년과의 만남으로 비롯된 자신의 출생과 성장의 뿌리를 외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끌면서 다시금 그 생명탄생의 본질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 근원적 성찰에 이어 두 번째 질문을 던지는데, 주어진 인생이라는 피동적 인식과 부여된 세속적 환경의 좋고 나쁨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양부모에 의해 키워진 다쿠미의 생모로부터 버려졌다는 증오에서 비롯된 거친 삶의 모습은 이를 표현하고 있다.

한편, 다쿠미의 변심한 애인 치즈루, 그리고 그녀의 도피 행각, 붉은 장미의 문신을 한 호스티스 다케미와의 만남, 밀수와 뇌물과 연계된 공기업과 정부, 야쿠자 등 흥미로운 스토리가 무거운 주제를 무겁지 않게 접근하는 연결 통로로 활용되어, 오늘 우리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피폐함을 제기하는 긴박함과 속세적 사건의 전개로 소설적 재미를 배가시키고 있기도 하다.

17세의 아들 도키오가 이제 마지막 숨을 거두려할 때, 20년 전 아사쿠사 놀이공원에서 우연히 만났던 도키오, 그리고 그와의 2개월간의 짧은 동행에서 비로소 마주한 생모 앞에서의 다쿠미의 회한의 목소리는 그토록 어려운 질문들의 답을 알려준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中略(중략)~ 이제는 당신 탓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저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다쿠미와 미래의 아들 도키오가 보여주는 부자(父子)의 그 애틋한 시선들에서 작가의 풍부하고 깊은 삶의 이해와 애정을 느끼게 된다. 따뜻한 가슴과 절로 시려져 흐르는 눈물의 감동이 먹먹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팔순을 넘은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죽음이 우리를 떠나보내지만 삶이란 걸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아이들도 도키오의 나이를 훌쩍 넘어버렸습니다. 그들도 정말 이 세상을,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본 것을 감사할 줄 알았으면 기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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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암소들의 여름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정현규 옮김 / 쿠오레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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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단어들은 구속, 자유, 무관심, 외면, 모순, 허위, 국외자(Out-sider), 소외, 조롱과 같이 우리사회의 음울한 갈등과 불안을 상징한다. 비록 유머러스한 에피소드와 주인공들의 순박한 돌출 행동으로 어두움을 희석하고는 있지만,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인간소외에 대한 깊은 고뇌가 느껴진다.

작품의 시작에서 보여주듯이 주인공 ‘소르요넨’의 직업은 택시기사다. 자기의사는 중요치 않다. 본질적으로 택시기사는 타인(손님)의 의사에 따르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즉, 구속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자유로움에 대한 희망이 간절한 인물이다. 결국 자기의 자유의지를 실현하기위해 꽉 막힌 도시를 벗어나 뻥 뚫린 시외의 도로로 달려 나간다. 그런 그의 앞에서 도로 한가운데 길을 막고 선 노년의 신사가 넥타이 매려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이 노년의 신사를 태운 소르요넨은 이 차가 가는 곳이 곧 목적지라는 황당한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이내 이 둘의 의기는 투합한다. 치매환자인 ‘뤼트키넨’의 망각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구속에서의 탈출이 동일한 삶의 방향으로 공명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모든 에피소드와 장면은 이면에 아주 독립적인 주제의식을 심어놓고 있어, 이러한 작가의 의도적인 장치들을 보면서 독자들은 더욱 소설적 기법에 대한 탐색에 빠져들고, 흥미가 더해짐을 느낄 수 있다. 치매노인이라는 성격은 단순히 질병적 요소, 즉 환자로서의 인식에 불과하며, 작가는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요구한다. 하나의 완벽한 인간으로서 그들이 겪는 고통스런 세계를 그들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젊은 시절 전차병으로 참전했던 기억에 우쭐하고, 측량기사로서 사람들에게 존중받던 자신을 내내 자랑스럽게 여긴다. 전쟁 전시장의 장갑차속에서 벌어지는 뤼트키넨의 행동과 그의 웅크리고 잠든 모습, 옛 전우의 농장에서 벌어지는 엿새에 걸친 신나는 파괴행위, 정부에서 파견된 감사인이 내리는 삼림과 농장의 파괴에 대한 다분히 사회주의적 모순이 가져오는 웃기는 결과보고서, 웰빙을 부르짖는 자연주의자 프랑스 여성들의 핀란드 숲속 늪지대에서의 야생체험 현장, 그리고 소르요넨에서, 세르비아 출신의 외국인에 이르는 등장인물들의 면면, 경찰관과 마을주민들, 마지막 암소의 죽음까지...

이들에서 지속적으로 흐르는 세 가지의 의식을 접하게 되는데, 그 첫째는 구속과 자유와 그리고 죽음 또는 망각의 삶의 공식을 통해 소외된 인간, 그리고 사회적 외면과 무관심의 본질을 보게 되는 것이며, 둘째는 인간의 위선과 허영 등 허위의식에 대한 조롱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 사회 등 권력주체의 무능과 부조리에 대한 신랄한 비평이라 할 수 있다.

옛 전우의 농장에 보내는 마을주민과 주변집단의 시선, 그리고 국가가 내리는 개인과 자연에 대한 기만적이고 자의적 판단에 기초한 희생의 강요나, 의문과 문제를 제기하는 자에 대한 배타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다수의 기이한 무관심에서 극단적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국가적 이익의 갈등을 보여준다. 그러나 해학적이지만 삼림 등 농장과 국가재산의 파괴에 대한 처벌을 심사하던 감사인들의 국가가 추가적인 농가지원금이 들지 않으므로 오히려 이상적인 파괴라고 진단하는 것은 국가의 무지와 무능에 대한 조롱이면서 한편은 개인과 국가의 화해라고도 볼 수 있다.

작가의 지속되는 오늘 우리 인간들의 고독과 소외에 대한 해부와 망각과 파괴와 구속과 자유의 오묘한 교차적 사건들을 통해 결정론적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주인공들의 분투를 북구의 하얀 어둠처럼 그려내고 있다. 역시 파실린나는 ‘라플란드’의 숲과 같은 지배당하지 않는 삶의 이상을 지향하는듯하다. 진중한 주제들을 경쾌하게 펼쳐내는 작가의 역량이 더욱 빛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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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問 라이브러리 2
도정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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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 사회가 보이는 가치의 획일화로 상실된 너무도 중요한 자유와 행복의 몰락에 대한 통찰이며, 이의 회복을 위한 우리사회에 팽배한 그릇된 가치의 방향을 전환하기 위한 지식인의 분투(奮鬪)이다. 지적되고 있는 문제제기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나, 저자의 깊고 예리한 성찰이 대중의 이해를 촉구하기에 수월한 문장으로 기술되어있어 그 전도된 가치들의 대중적 이해를 돕기에 적절하다.

주요 비평 및 논단지에 발표된 6개의 원고로 구성된 이 저작물은 발표된 시기에도 불구하고 오늘에 있어서도 그 의미와 지향하는 가치의 어느 한 부분도 손상되지 않는다.

전 지구적으로 맞닥뜨린 세계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우리 한국사회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 태도는 우리에게 어떤 상황을 펼쳐내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존중하고 지켜내야 할 가치들을 망각하고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며, 그래서 손상된 가치들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사유하고 실천하여야 하는 것인가? 에 대한 냉철한 탐색과 분석을 통해 대안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비평의 대상으로 저자는 공교육의 붕괴, 문화정체성의 상실과 같은 사회, 문화적 위기를 소재로 하여 시장자본주의의 전체주의화, 권력-기술-자본의 연정이 가져오는 폐해에 대해 경종을 울려주고 있으며, 오늘의 세계화를 서구의 세계 식민지화 시대인 19세기의 ‘진보논리’와 20세기 탈식민화에 따른 대체 이데올로기로서 강구된 ‘개발논리’의 연속선상으로 진단하여, 강자의 약자에 대한 착취의 악덕이라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또한, 세계화의 중요한 특성인 전 지구의 단일화라는 획일성의 가치가 수반하는 다양하게 변주된 모습을 ‘아Q현상’과 같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잡종의 문화, 즉 혼합문화(Hybrid Culture)가 가지는 극단적 혼란을 지적하고, 이의 배후에서 은밀하고 음험하게 침투되는 시장전체주의의 과격한 몰가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저자는 시장자본주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며, 시장유일의 만능적 사고가 만들어내는 뒤틀린 사회현상으로 인한 가치의 왜곡을 바로잡자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공교육이나 대학경영에 물밀듯 불어 닥친 ‘경쟁의 논리’가 얼마나 모순되고 우스꽝스런 것인가는 민간기업의 경영이나 민간경제부문 또는 시장의 논리가 자연스럽게 요구되는 부분이 아닌 곳에 시장이라는 유일의 논리를 마구 들이대는 우리사회의 몰지각하고 무지한 현실로 드러난다. 이로 인한 시장전체주의의 그 야만적인 결과들은 인간과 사회의 갈등을 재촉하고 양분하여 붕괴로 견인한다.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은, 우리의 교육은, 우리의 학문과 문학은, 우리의 사회정책은 그래서 지금 어떠해야 하는가? 기술과 자본과 권력의 결합이 무서운 공포를 자아내는 것은 “어떻게(How)의 기술주의적 도구 사고가 왜(Why)라는 정당성의 질문을 압도하는 정신 상태”이기에 그렇다. 세계화가 가지는 그 실체의 속성을 이해하고 우리사회가 잃어버릴 수 없는 자유와 행복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래서 중차대하다. 저자의 신랄한 진단에서 내려가지 않던 울화와 분통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쾌감을 얻는다. 그리고 왜 시장자본주의가 세계화의 모습에서 전체주의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래서 어떤 추악한 모습으로 우리를 나락으로 내몰고 있는지 너무도 명쾌하게 평가하고 있다.


이 저술은 어느덧 황폐해지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무가치의 세계로 향하는 우리들과 우리사회에 대한 진지하고 사려 깊은 조언으로서 저술자의 땅을 치는 진정을 볼 수 있다. 가치가 전도(顚倒)된 이 기막힌 한국사회의 병리현상에 대한 최고의 진단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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