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상처, 죄책감, 그리움, 향수가 때론 열병처럼 그리고 차가운 이성 속을 오가며 심리적, 사유적, 정치사적 고뇌와 더불어 아픈 사랑이야기로 그려지고 있다. 정말 치명적이고 압도적이라 할  이 사랑 이야기에 우리의 도덕적 잣대는 초라해 질 정도로 무색해진다.

법제사(法制史)학자인 ‘미하엘 베르크’의 인생에 차곡차곡 쌓인 층위(層位)속 저 기반에 놓여 그의 삶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던 이야기, 벗어나고 싶었던 이야기이기에 글로 쓰기로 했다는 역설에서 그 사랑과 상처, 배반과 죄책감, 그리움의 깊이를 되뇌게 된다.

열다섯 살 소년과 서른여섯 살 여자의 우연한 만남, 여자 ‘한나 슈미트’에게 ‘미하엘’은 사랑스런 ‘꼬마’이다. 사춘기 소년에게 비친 그녀의 스타킹 신는 모습은 관능과는 다른 그러나 무감응의 장면은 아니다. 어린 소년에게 그녀의 모습은 잊을 수 없는 영상으로 맺히고 그녀의 아파트를 찾아가 계단에 앉아 기다리는 순수한 열정과 용기, 팽배한 기대에 차있는 소년의 수줍은 긴장의 모습을 본다. 모성의 그리움, 여인에 대한 신비로운 기대감, 막연한 육체적 수줍음과 갈망의 혼돈이다.

그녀의 아파트 창고에서 갈탄의 검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소년, 욕조 속에서 검은 갈탄 먼지를 씻어내고, 물기 먹은 발가벗은 몸으로 그녀 앞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 서있는 소년과 물기를 닦아주는 ‘한나’의 손길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그래서 너무도 감각적인 이 문장들은 아름다운 미학적 한 편의 영상을 상상케 한다.

미하엘은 그렇게 매일 그녀를 찾아가고, 그것은 두 사람의 의식(儀式)처럼 자리를 잡아간다. 어느날 부턴가 책을 읽어주지 않으면 사랑을 나눌 수가 없다는 그녀의 요구는, 아파트에 들어서면 책 읽어 주기, 샤워하기, 사랑 나누기, 그리곤 나란히 누워있기의 정형적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이 관능적 유희에서 누구도 그 어떤 추함을 발견해 내지 못할 것이다.

열다섯 소년의 그 충만한 상상력과 환희, 열정의 표현들은 내 어린 그 시절의 환상과 겹쳐 공감의 미소를 짓게 한다. 그녀를 생각하느라 뒤척이는 불면의 밤을 “결핍의 시간이 아니라 충만의 시간”이라고 정의하는 소년은 “동경, 회상, 불안, 욕망 등이 미로를 만들어 놓는다.”고 혼돈의 설렘을 이야기한다. 또한 그 때를 “그렇게 충만한 날들을 보낸 적이 없으며, 나의 삶이 그렇게 바쁘고 촘촘한 적이 없었다.”고 그녀와 함께하는 매일의 의식이 온통 그를 점령하고 있음을 노래한다. 소년의 시점어서 그런 것일까? 세상 이목의 모든 소음들을 배제하고 그저 가슴 벅찬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만 이해하고 싶어진다.

어느 날 사라져버린 그녀, 직장도 뒤로하고 한 마디 이별의 말도 없이 홀연히 소년의 시야에서 없어졌다. 사라지기 전날, 학교친구들과 수영을 하던 수영장 먼발치에 나타났던 그녀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주저했던 자신의 이기심이 자책감으로 떠오른다. 여인의 사라짐이 가져온 사건은 죄책감과 배신감이란 양극단의 감정을 오가게 한다. 자책과 자기합리화, 그리고 배신감.

이는 이 작품의 중대한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심리적, 철학적 고뇌의 핵심 언어이자 전환적 사건이 된다. 그녀가 떠난 이유를 소년은 그녀 존재의 ‘부인(否認)’이란 “배반의 보이지 않는 변명”이라 자책한다.

한동안 한나를 찾아 헤매던 일을 멈추고 일상의 평정된 삶에 익숙해진 법대생으로 성장한 청년 미하엘은 한 법학세미나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세미나 목적의 탐구를 목적으로 제3제국(나치정권)의 강제수용소 감시원들의 전범재판에 참석하게 된다. 피고인들의 모습에서 꼿꼿이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한나를 발견한다. 심리과정에서 한나의 과거가 규명되기 시작하고 한나의 무계획과 무전략의 사실 발언에 미하엘의 감성과 이성은 안타까움으로 번민한다. 미하엘은 이 재판심리과정을 통해 비로소 한나, 그녀의 실존 자체를 인식하게 된다.

이 재판심리 장면은 홀로코스트란 소재를 통해 한나, 그리고 미하엘, 전후 독일의 나치 청산문제에 대한 독일인의 인식과정에 대한 정체성 논의까지 아우르는 확장된 제재와 주제의 강화로 이끈다.

글자를 읽고 쓰지 못하는 그녀가 강제수용소 감시원의 지도자로서 사건의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시인한다. 여기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이 이뤄진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 보다는 차라리 나를 놀라게 하는 쪽을 택했다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회피하고, 방어하고, 숨기고, 위장하고 또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의 근거가 되는 수치심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이는 한나의 수치심과 미하엘 자신의 수치심, 상처에 대한 보편적 공감의 이해이기도 하다.

이처럼 한나의 전범재판 심리의 과정은 한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리고 삶의 미래를 좌우하는 결정적 판단에서조차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희생할 가치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고뇌에 찬 철학적 질문들을 쏟아낸다.

종신형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는 18년동안 미하엘은 한나를 찾지 않는다. 그 어떤 사적 내용을 담지 않은 오직 책을 읽어 녹음한 테이프만을 보낸다. 그녀의 사면허가가 취해지고 석방되는 18년 동안.

형무소 소장의 간곡한 요청으로 석방을 앞두고 미하엘은 한나를 만나,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재판과정에 언급된 사실들에 대해서 재판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어요?”

“그게 그렇게도 마음에 걸리니?”

“나는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누구도 내가 누군 인지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리고 너는 알거야. 너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너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법정 역시 나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었어.”

소장의 안내로 18년간 수감되었던 한나의 방에서 신문에서 오려낸 자신의 졸업식 사진을 발견한다.

“우리는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되어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우리네 인생에서, 역사에서 우리들은 과거의 상처와 죄책감을 떠나버릴 수 없다. 그곳에는 그리움과 사랑도 함께 있으니 말이다. 이 작품이 독일의 과거사에 대한 아픔과 청산이란 정치사적 회고일 수 있지만, 서사의 내용인 미하엘과 한나의 사랑, 그리고 파노라마 같이 펼쳐지는 인생에 대한 사색적 성찰은 문학의 완벽한 미학적 구도를 완성시키는 중심이라 하고 싶다.

정말 우아하고 도발적이며 감동적이다. 이처럼 급하게 설레는 심장의 울림, 감성의 울림을 가져온 작품은 아마 굉장히 오랜만일 것이다. 20세기 독일문학의 걸작중 하나로 손색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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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리나 2009-03-05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의 품격과 주제가 손에 잡힐듯 완벽하게 기술된듯 합니다. 멋진 서평 잘보고 갑니다~
 
사요나라 사요나라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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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작(前作),‘惡人’을 상기시키는 계보(系譜)작이다. 작가가 던지는 화두는 악인에서 그랬듯이 우리가 쉽게 답변 할 수없는 혼란스런 질문을 던진다. ‘가쓰라 계곡’의 유아 살인사건, 이는 다분히 우리들의 편협한 시선을 고착화시키는 자극 수단이다. 행적과 겉모습으로 보아‘그 사람이 범인이 맞을 것이다.’라는 식의 편견 말이다. 살해된 아이의 엄마인 이웃집 여인‘다치바나 사토미’, 살해범으로 경찰에 구인되고 느닷없이 사토미는 이웃집 남자 ‘오자키 슌스케’와 정을 통했다고 진술한다. 사건은 치정살인사건으로 치닫고 대중을 자극하는 소재에 열을 올리는 삼류 잡지기자들의 취재경쟁 속에서 잡지기자 ‘와타나베’는 사건의 추이에 집착을 갖게 된다.

소설의 치밀한 정지작업이 진행되면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무수한 상상력을 만들어내게 한다. 범인은 누구일까? 사토미가 정부를 위해 거추장스런 아이를 살해한 것일까? 둘이 공모한 것일까? 아님 오자키가 교사한 것인가? 추측이 난무할 때 와타나베의 집요한 뒷조사는 의외의 시각으로 소설을 반전 시킨다.

시간은 10여년을 거슬러 대학 야구부 선수들의 여학생 집단강간이란 과거의 사건을 조명하기 시작한다. 오자키가 바로 강간사건의 주범으로 전도양양하던 야구선수 생활을 접었던 사실을 드러낸다. 소설의 전개속도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급하게 오가며 빠르게 흘러간다. 그렇담 범인은 분명해진 것이 아닌가? 조금씩 실체가 드러나는 오자키, 신비스런 그의 아내‘가나코’, 그리고 집단 강간의 희생자였던 당시 여고생 ‘미즈타니 나쓰미’의 사건 이후의 험난한 인생을 추적한다.

작품은 중반에 이르러 독자들을 당혹감에 휩싸이게 한다. 강간사건의 주범이었던 오자키와 피해자였던 나쓰미와의 우연한 만남, 마음의 정리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던 죄의식은 진정 잊혀진 것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쫒아온 오자키를 알아본 나쓰미 역시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투성이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한다. 몇 차례 결혼의 시도와 결혼생활의 파탄을 겪은 나쓰미의 정신적 상처는 정신병원의 주기적 입원으로 이어진다. 어린시절 저지른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사죄하기 위한 오자키의 만남의 시도가 이어지지만 나쓰미를 만나는 것은 거절된다. 가해자의 죄의식, 피해자의 사회적 냉대와 상흔은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통절한 상처로 깊어지기만 할 뿐이다.
급기야 나쓰미로부터 연락이 온다. 진정 사죄하려 한다면 함께 가장 불행해지도록 하자. 더 이상 불행해질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불행에 이르기까지.

“인생에서 발을 헛디딘 남자의 말로.”오자키의 아내 가나코는 남편을 사토미의 정부라고 경찰에 진술하고 오자키는 살해공범이란 수렁에 빠져든다. “가나코가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까?” 그렇다면 맞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긍정해버리는 오자키의 자백에서 사랑과 연민의 눈물을 보게 된다.

이제‘사요나라(さよなら)溪谷’은 ‘악인’의 작품성을 뛰어넘는다. 더욱 정교해진 플롯, 스릴러식의 반전, 통속적 이야기의 맛깔스러움, 그리고 존재를 거부하고 싶은 사랑까지. 어느 순간 읽어버렸고 다시금 책장을 첫 페이지로 돌려놓고 시선을 떨어뜨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피해자의 처절한 삶의 고통, 무엇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사죄하고자 하는 오자키의 나쓰미에 대한 진정은 전달되고...사토미의 거짓주장 철회와 범죄의 인정에 따라 풀려난 오자키는 자신을 떠나면서 가나코가 남긴 편지를 손에 쥐고 있다. “안녕이라고.....그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행복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녀와 나, 행복해질 것 같았습니다.”.....
불행해지기로 약속했기에, 그렇게 약속했기에 함께 할 수 있었던 연인, 그래서 행복해질 것 같기에 떠나는 사랑이 눈시울을 흐리게 한다. 이런 사랑이 있구나. 이처럼 참담한 사랑도 있구나. 인생은 대체 뭔가. 작가가 던진 사랑이야기에 좀체 답변을 할 수가 없다. 악인에 이어 또다시 허둥대는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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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모에 - 혼이여 타올라라!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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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노년 삶의 지침이랄까? 이 시기에 부딪게 될 삶의 문제와 자신에게 할 질문들이 섬세한 심리묘사와 사실감 넘치는 언어로 과연 ‘기리노 나쓰오’구나 할 만큼 완성도 높게 구성된 작품이라 하겠다. 중년, 노년에 이르면서 우리는 한쪽의 상실을 겪게 된다. 나이 듦에 대한 또 다른 사회의 인식을 강요받게 되는 시점이고 준비되지 않은 아니 알지 못하는 세계에 발을 내 딛는 두려움과 공허함이 삶의 불안을 더욱 가중시키리라. 피부의 탄력은 사라지고 흰머리가 뒤덮는 중노년의 홀로된 삶은 어떤 것일까? 남은 생에서 우린 자신을 어떻게 이끌어야 할까?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 홀로 남겨진 59살의 전업주부인 ‘도시코’, 그녀의 심리적 움직임을 통해 중노년의 갈등과 위기, 그리고 새로이 마주하게 되는 세상의 위협과 극복, 도전과 화해의 이야기가 바로 곁에서 펼쳐지듯 그려진다.
작가는 도시코란 여성을 통해 질문과 문제를 던지고, 그녀가 어떻게 답하고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 마치 대중잡지의 ‘Q&A’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인상을 갖게 한다.
남편이 심장마비로 예기치 않은 죽음 맞이했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녀가 알지 못했던 연인이 있었다. 당신의 허물어진 감성에 도전적으로 나타난 이러한 배신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제 홀로 살아가야 할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 8년 만에 나타난 아들이 집을 내놓던지, 재산을 분할해 내놓으라고 법정상속권을 주장한다. 아들의 이 이기적인 요구를 들어주고 그에게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럼 나의 노후는 안정과 자유와 위로를 받는 삶이 될 것인가?
배우자가 여전히 생존한 친구들과 미망인인 친구들의 극명한 삶의 시선에 대한 괴리, 미망인이 된 나의 열등감은 어디에 기초하는 것일까?
남편이 참여했던 취미활동 모임에서 함께하자는 연락이 왔다. 참여 할 것인가? 그중 마음에 흡족한 이성이 나를 유혹한다. 그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그는 아내가 있다. 그와 동침을 하게 되었다. 내가 취할 길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

이렇듯 이 작품은 이러한 삶의 질문들을 빼곡히 늘어놓고 도시코의 옮기는 발걸음에서 망설임과 회의, 다시 과감한 행동의 결단과 주장, 그리곤 밀려오는 고독함과 홀로됨의 열등감이 반복을 통해 자연스럽게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건강한 자아를 확립해나가는 길로 안내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에서 노년의 삶을 슬기롭게 지탱해 나가는 이들을 목격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메밀국수 강습반을 이끄는 70대의 홀아비 이마이, 멋진 차림으로 여성의 눈길을 받는 전직 백화점 중역 쓰가모토의 세련된 매너와 로망스, 여과 없는 주장을 해대는 미망인 에이코의 과감함과 몰두는 작품의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무난히 소화한다.

이제 노년의 문제는 사회문제를 떠나 인류의 보편적 삶의 질에 관한 문제라 할 정도로 수명이 늘어났다. 이즈음에 있어 59세라는 나이는 중년도 아니고 노년도 아닌 애매한 연령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 배열하고 있는 중노년의 이성문제, 여가활동과 인간관계에 대한 의미, 직업을 비롯한 사회보장제도 등 삶의 질에 대한 보장과 사회적 시선에 대한 문제, 가족개념의 해체에 따른 홀로서기와 중노년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 등은 사회적 과제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중요한 과제들이다.
기리노 나쓰오식 여성심리의 치밀하고 세련된 묘사는 소설적 재미를 배가시키고 문제의식을 슬며시 잘 녹여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도시코들이여! 진정 당신들만의 삶을 위해 영혼을 불태우라! 새로이 기다리고 있는 삶의 모습 또한 아름다운 것을... 중노년의 삶에 대한 지평을 멋지게 그려낸 수작(秀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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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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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중이 영화를 감상하는 이유는 아마 해당 영화의 스토리에서의 재미, 화려한 배우의 모습, 그리고 대형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의 아름다움이 대개일 것이다. 물론 영화의 주제의식과 감독의 제작의도, 전개기법 등에까지 관심이 이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기술적 위상, 철학적 인식론, 현상학적 분석을 들이대는 이들은 거의 존재치 않는다 하여도 지나친 견해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진중권이 소개하는 이 영화담론은 “문화적 코드를 많이 이해할수록 영화의 조크를 더 많이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문학이던 영화이던 아니면 그 밖의 정치,경제,사회에 대한 시선이던 바라보는 이의 한정된 지식수준을 새로운 경지로 견인하여 영화 감상의 폭을 확장시켜준다.

고해상과 저해상의 화면, 흑백과 컬러화면의 대조와 같이 무심코 바라보았던 영상이 관람자에게 시사하려는 저마다의 의미가 있음을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소개되고 있는 일부 영화의 담론에 등장하는 미학, 영상기술, 미디어 문화와 관련한 용어들의 생경함은 그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을 그리 녹록치 않게 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시야를 제공하여 밋밋하게 별다른 영감 없이 지나쳤던 영화들에서 전혀 새로운 흥미요소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준다.

영화 <300>의 당혹스러웠던 이미지가 “시각적 과잉(visual excess)을 통해 너무나 단순해서 무식하기까지 한 플롯의 빈곤함을 잊게”하려 하였던 것이라는 설명은 그저 도취되었던 당시의 기억을 이해케 된다. “환상이 고해상의 실재가 되어 나타나는 것. 이것이 오늘날 대중이 겪는 새로운 이미지 체험이다.”라는 ‘생성 이미지’의 시각적 이미지와 새로운 체험의 본질을 읽게 되기도 한다.
또한 <슈렉>에서 ‘포스트 모던’과 ‘패스티시 전략’을 이야기 할 때 공감의 머리를 끄덕이게 하는 설명과 유독 어둡고 섬뜩하게 보였던 <폴라 익스프레스>의 인물들에서 느꼈던 감정이 왜 그러해야 했는지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라는 개념을 통해 그 낯섦에 대한 본능적 거부의 이유를 알게된다. 이처럼 ’재현의 인식론‘에서 ’생성의 존재론‘에 이르는 시각적 이미지의 해석에 대한 다채로운 지식을 제공하는가 하면, 기술의 혁명, 미래기술과 연계하여 인간의 정신과 신체의 확장이 의미하는 대중의 욕망을 보여주기도 하고, 지각의 현상학적 분석을 통한 자극의 이전과 의미, 나아가 도덕론, 미학적 상상력으로서의 과학적 이성을 이야기하는 데까지 도달한다.

<나비효과>에서 단순히 단기기억상실증 주인공의 긴박한 스토리에 집착했던 표피적 감상에서 “다수의 플롯을 공간적으로 병행시키는 방법으로 짜인”구성에서 ‘하이퍼 링크(hyper-link)의 형식화’와 오늘날의 복잡한 “시공간으로부터 격리시킴으로써 과잉 자극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취약한 인간의 정신인 전형적인‘피크노렙시(pyknolepsie)’를 이해하는 감상영역의 확장으로 안내된다.
한편, ‘인간의 골동성’, ‘인간의 확장’이라는 미디어의 ‘의족명제(prothesenthese)’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미래파’들의 전쟁의 예술성 찬양이나 피카소의 큐비즘을 통해 ‘신체의 금속화’, 양자수준의 조작가능 컴퓨터, DNA결합 디지로그 컴퓨터 탄생 등 미래를‘이식혁명의 시대’로 전망하는 담론을 즐기기도 한다.

특히, 동요하는 카메라, 외부 관찰자가 아니라 스크린 속 주인공과 똑 같이“상황의 내부에 처한 자로 찍었기에” 오마하 해변 전투의 전장이 객석으로까지 연장된 느낌을 주었다는 설명은 영상이란 시각이 관객의 촉각으로 이전되는 ‘신체의 현상학’, ‘지각의 현상학’에 대한 이해로 감상의 격을 높여준다. 이로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태극기 휘날리며>의 대비를 통해 “전략 없이 실천된 현상학의 무의미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우리 영화의 한계를 넌지시 지적하기도 한다.

<클로버 필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해상도가 지각에 미치는 영향력과 상상력, <뷰티풀 마인드>의 “정신이 위대해지려면 아름다워야 한다.”까지 영상에 대한 전혀 새롭고 신선한 관점을 지니게 한다. 아마도 폭넓은 독자를 지니고 있는 저자의 이 영상미학 담론은 대중들의 영화감상에 안목, 지적수준을 얼마간 격상시켜주는 역할을 할 것 같다. 갈수록 높아지는 국내 영화 관객의 시선을 국내 영화가 얼마나 맞추어 낼지가 우리영화의 미래를 결정하는 하나의 좌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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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의 시절]의 서평을 써주세요.
방황의 시절 문지 푸른 문학
다치아 마라이니 지음, 천지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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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내내 흐르던 어둡고 우울한 숙명론적 이야기가 갑자기 일갈되고 새로운 삶의 지향으로 전환되는 대단원은 작가의 세상에 대한 미숙한 관점처럼만 보여 오늘의 시선에서 그리 세련된 작품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작품의 초반부, 엔리카 가족의 빈한한 일상과 단절된 소통에서 환경결정론적인 인간의 질서를 보는 것 같은 섬뜩한 회의마저 엄습한다.

주거환경의 불안과 엄마의 죽음, 아빠의 경제적 무능력, 어린 소녀의 가사노동의 부담, 학습기회의 제약, 인간관계 형성의 한계, 이러한 피폐한 정신적, 물질적 환경에서 과연 우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열정으로 콩닥거리는 가슴과 화창한 봄날의 희망으로 충만 되어야 할 17살 소녀 ‘엔리카’에게 이러한 환경은 정말 끔직스럽다. 그때 누군가의 달콤한 속삭임과 상냥한 손길이 창백해진 정신을 어루만지면 이를 회피 할 수 있는 정신이란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러한 의문에서 작품을 바라보면‘방황(彷徨)’이란 언어로 소녀의 행동에 잣대를 갖다 대는 것은 몰염치한 이기적 시선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더더욱 작가의 시선에 동화하기 어렵다.

학위를 준비한다는 구실아래 항상 공부 핑계를 대고 만남을 거절하는 첫사랑 연인‘체사레’와의 관능적 사랑은 어린소녀가 극복하기 힘든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체사레가 준비하는 학위란 것은 계층의 상승, 부의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 이상이 아니며, 그래서 이는 부와 계층에 대한 상징적 기준이자 인간사회의 탐욕스런 이기심으로 보여 진다. 그럼에도 엔리카가 헌신적인 남자친구‘카를로’를 회피하고 약혼녀가 있는 체사레를 지향하는 것은 거부키 힘든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임을 보여주는 것일까?

이에 더해 가족의 안락함과 삶의 질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어떠한 가치부여도 불능한 ‘새장 만들기’는 경제적 소외자의 무능을 한껏 극대화시키고, 어머니의 직장벌이로 연명하는 생계는 세 사람의 소통장애와 위태로운 가족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취약한 가족관계의 뿌리는 거의 경제적 고통에 연유된 것으로 엄마의 죽음으로 급속하게 와해된다.

집세를 내지 못하는 아빠의 극단적 무능함은 부녀의 이별로 이어진다. 그러나 작가는 엔리카의 행동에서 당황의 기미를 읽어내지 못하게 못한다. 17살 소녀의 임신, 책임을 회피하는 체사레, 그리고 낙태에서조차 어린 소녀의 담담함만을 보게 된다. 결국 이렇게 냉혹하리만큼 처연한 엔리카의 묘사는 어떤 의미에선 절망의 초월처럼 보인다. 여기서 성장과정의 한 소녀를 상상하기는 어려우며, 그래서 소설이 취한 성장기의 방황이란 주제와 전후 모순을 읽게 된다.

홀로서기 위해 찾아가는 세상에의 첫 발은 체사레의 한때의 연인이었던 백작부인인‘바르덴고 부인’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삶의 반경이란, 인생행로에 직접적인 한계처럼 인식된다. 즉, 자신이 속한 일상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을 인생은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는 환경결정론적 시각이 대두된다.

그러나 유산계급인 부자, 백작부인의 개인비서로 숙식을 해결하지만 이내 자기 또래의 어린 남자와의 관계에 몰입하는 비천함만을 목격하게 되고, 체사레의 부자 약혼녀와의 결혼과 그의 학업중단이 인생항로의 전환점으로 비춰지지만 엔리카의 지속되어온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결정적 갈등의 요소로 이해하기에는 무언가 필연성이 없음에도 급기야는 구태의연한 계몽적 귀결로 치닫기 시작하기까지 한다. 또한 부기학교 동료이자 희생적인 남자친구‘카를로’를 저버리는 행위는 사회의 계층과 부에대한 갈망을 고착화시키는 작가의 또 다른 의식처럼만 보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해 단순한 육체적 해갈을 위한 욕망의 대상, 또는 계층과 부의 방편정도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등장 여성들이 이를 극복하려는 어떠한 적극적 행위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결국 이 작품은 한 소녀의 성장기 방황도 아니요, 침해받는 여성 권익의 보호도 아니며, 사회제도의 위선이나 자본주의의 계층적 고착화에 대한 고발도 아니며, 생존하는 것은 다만 환경결정론적 계층의 고착화 지지가 아닌가 할 정도로 당혹스럽다. 너무 극단적 해석이라 보여 질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이를 불식할 어떠한 필연적 이야기나 주장을 찾을 수가 없다. 1960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이라 하나 시대를 포용하거나 작품의 완결성 측면에서 오늘에 읽히기에는 많은 취약성을 가진 작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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