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쓰홍 작가의 <67번째 천산갑> 리뷰대회 수상자가 발표되었네요.

선정되신 분 모두 축하드립니다. 저도 기분 좋은 하루가 되었네요. ^^



고독과 치유의 여정을 영상미 넘치는 문장으로 

유창하게 그려낸 훌륭한 작품입니다.


많은 독자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은 작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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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1-19 15: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상자가 닉네임이 아닌 본명으로 발표되었네요.ㅎㅎ
필리아님!
축하드려요^^

필리아 2024-11-19 17:38   좋아요 1 | URL
네, <유령의 시간>에 이은 연타석 홈~런.
기분 좋네요. 고맙습니다. 페넬로페님 ^*

yamoo 2024-11-19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리뷰대회라는 걸 참가해 본 적이 없으요~~
아주 아주 오래전에 감상문 대회 몇 번 참가한 이후로는 없다는..
1등 상금 2-3백 걸린 대회는 하도 잘쓰는 사람들이 많아 생각도 하지 않는데, 지인이 저번 서울북스오브리류 야심차게 도전했다가 탈락했으요~~ 여기 제출 마감 1주일 전에 만났는데, 은근히 수상을 기대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여기 정말 어마무시하게 잘 쓰는 사람들 많이 제출한다고...참가에 의의를 두는 게 좋다는 취지로 얘기해 드렸는데...그래서 그런지 탈락의 후유증을 잘 감내하시더라구요..ㅎㅎ

그나저나 필리아 님...이전에 리뷰대회 수상하신거 봤는데, 또 수상하셨네요! 감축드려요~~

필리아 2024-11-19 18:1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yamoo님 ~
저는 제 감상이 다른 이들에게 과연 수용될 수 있는
것인지를 가늠하는 기회로 리뷰대회를 활용하고 있어요.
선정되면 더욱 좋은 거구요...

꼬마요정 2024-11-20 1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축하드립니다!!!
너무 멋진 글이에요. 늘 느끼지만 필리아 님 글 너무 잘 쓰십니다. <67번째 천산갑> 읽고 싶어집니다. ㅎㅎㅎ

필리아 2024-11-20 19:31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님 고맙습니다.
네, 천산갑은 생각지 못한 재미가 있는 작품이랍니다.
좋은 꿈 꾸세요. ^^
 
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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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역주행 소문을 듣고는 책장 어딘가에 꽂아 두었다는 기억을 살려냈다. 아마 몇 차례 자리를 옮기며 책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책 중 하나였던 것이 분명했다. 앞뒤로 배열된 뒷줄에서 찾아냈다. 바로 첫 페이지를 펼치고 읽어보았다. 불안한 예감은 결국 현실로 닥쳐왔다. 진평강 하류에 떠내려 온 두 사람의 시신을...”로 시작하는 문장을 읽으며, 어떻게 이 문장의 유혹을 보지 못했는지 까닭을 스스로에게 물으며 걷잡을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숭고하다며 가치를 부여하는 일들은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벌어지거나 무모함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나중에 의미가 부여된 것일 수도 있다.” -39쪽에서

 

이 소설은 사랑과 숭고의 재발견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물론 위에 인용한 소설 속 숭고에 대한 주인공 도담의 이해처럼 어떤 고결성과 같은 드높은 고양의 언어는 늘 과장의 가면을 쓰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과장의 언어에는 무엇인가가 은폐되어 무지의 유보상태로 남겨지기 일쑤다. 이러한 측면에서 소설은 사랑과 숭고라는 언어에 드리워진 음영을 발견하는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때문인지 이야기는 초입부터 수영을 배우기 위해 아빠 창석을 졸라 진평강을 찾았다가 미장원 원장 미영의 아들 해솔이 물속에 빠져 허우적댈 때 부지불식간에 해솔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드는 도담의 모습을 보여준다.

 

피부가 하얀 서울에서 갓 내려온 도시적인 해솔에 무의식적으로 매혹되었을 수 도 있으며, 아빠로부터 배운 생명 구조에 대한 자기희생의 마음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동기야 어떻든 물에 빠져 곧 익사할 수도 있는 사람을 보고 뛰어드는 사람들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자주 접하게 된다. 우리들은 그 행위를 아주 고결한 정신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숭고함이라 말하기도 한다. 숭고란 말은 이처럼 항시 죽음에 근접한 어떤 생명 초월의 현상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것 같다. 따라서 그 행위 또는 정신에 은닉된 수수께끼같은 이성을 넘어서는 고귀함에 대한 표현 불가능한 개념의 언어일 것이다. 도담은 소방관인 아빠에 대한 헌신적인 생명 구조의 노력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런 아빠가 기관지 질환으로 입원한 엄마의 부재 속에서 해솔의 엄마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해솔을 물속에서 구조한 이후 도담은 해솔과 우정을 쌓아가고, 이윽고 어린 사랑의 싹이 피어난다. 그리고 둘 만의 비밀 장소에서 더욱 특별한 관계가 된다. 도담은 아빠와 해솔 엄마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아빠의 핸드폰을 훔쳐보고 그들이 숲속 계곡에 있는 칠성폭포에서의 만남을 알게 된다. 도담은 해솔을 설득해 아빠의 소방관용 랜턴을 손에 쥐고 어두운 숲속 밤길을 오른다. 해솔은 그만 둘 것을 청하지만 도담은 듣지 않는다. 그녀는 존경하던 아빠에 대한 믿음이 훼손 된 것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는 것인데, 이윽고 현장 근처에 도달한 도담은 두 사람의 만남을 보고 비명을 지르려 한다, 그때 해솔은 도담의 입을 틀어막고, 급작스레 랜턴을 폭포 용담에서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에게 비춘다.

 


폭우가 쏟아지는 계곡에서 당황한 두 사람은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해솔의 엄마 미영을 보호하려는 창석은 속수무책으로 떠밀려간다. 수일간의 탐색 끝에 소설의 첫 문장처럼 두 시신이 발견된다. 빼곡하게 다슬기로 덮인 부패한 두 구의 시신. 작은 마을은 온갖 악취나는 상상력으로 뒤덮인다. 고아가 된 해솔은 외할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서울로 떠나기 전 도담의 집을 찾지만, 도담의 엄마 정미로부터 악의에 찬 독설을 듣는다. 너희는 악연이야, 얽혀서 좋을 게 없어, 절대로 연락하지 마.”, 그리고 도담으로부터도 그 어떤 기약의 말도 듣지 못하고 발길을 되돌린다.

 

정미의 차가운 언어는 해솔의 엄마 미영과 남편 창석의 관계라는 수치스러움과 분노에 대한 고통의 외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해솔이 어떤 죄책감을 가져야 했을까? 외로웠던 엄마, 친절하고 존경받는 의인이었던 도담의 아빠 창석에 대한 호감, 그들의 사랑에 대한 책임을 소년이 질 수 있었을까?

 

정말 사랑 했나 아니면 그저 욕망에 도취한 불장난이었나

그 둘은 어떻게 다른가.”   - 82쪽에서

 

거침없이 휩쓸 듯 무서운 속도로 흐르는 물이 급류다. 그런데 이 단어는 어떤 현상의 급작스러운 변화라는 비유의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은 이 둘의 의미를 그 물리적 속성을 지닌 급류 실체로서의 장면과 이 장면을 겪은 후 깊은 내적 영향을 갖게 된 두 사람의 변화로 그려내고 있다.

 

참으로 그 경계를 규정할 수 없는 오래된 질문이 다시 출현한다. 사랑과 욕망의 도취, 과연 다른 것인가? 다르다고 제시하는 혼인으로 취득된 가정의 불가침성에 대한 법 규정과 도덕의 덕목들, 그런데 사랑이 과연 법과 도덕으로 무 자르듯 재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던가? 대체 사랑의 정의가 무엇인가? 해솔은 할머니와 함께하는 궁핍함 속에서 작은 약국을 운영하는, 소박한 꿈의 실현을 위해 약학과에 진학한다. 도담의 그리움에 대한 갈망을 억제하며, 약사가 되어 도담과 함께 하는 삶의 시간을 위해.

 

이후 도담과 해솔의 삶의 시간을 오가며, 3년 만에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오랫동안 참았던 그리움, 그리고 다시 만났다는 안도감과 서로에 대한 안쓰러움, 미안함, 그간의 외로움과 설움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시간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3년이란 시간의 공백을 없애려는 듯 다급하게 하나가 된다. 서로의 존재가 아팠던두 사람은 절박하게 서로에게 안긴다. 나는 서로의 존재를 아파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이 사랑의 정의가 어쩌면 숭고와 어울리는 우리가 찾는 그 사랑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폭포 사건을 시작으로 사랑이라는 주제는 도담과 해솔을 중심으로 그네들의 삶의 단면들을 비추며, 작가의 말처럼 급류처럼 느껴지는 삶 속에서안녕을 찾아가는 여정을 쫓는다. 아빠를, 엄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책감과 그리고 존경의 마음이 훼손된 것에 대한 분노, 한편으론 해솔과 도담 서로에 대한 미안함이 얽혀 두 사람의 상처입은 마음은 갈등과 치유 사이를 오가며, 고통의 기억을 떠나지 못한다. 이 여정 속에서 사랑에 대한 무수한 정의가 직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아마 그러한 사랑의 정의들은 성장, 혹은 성숙 과정의 언어일 것이다.

 

도담은 상처입은 사람의 냄새를 도처에 풍기며, 그녀에게 각인된 사랑이란 언어는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담에게 사랑은 사기이고 기만인, 자신조차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을 두 글자로 퉁 치는치사한 말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는 여전히 자신이 가진 불행의 엄청난 크기에 대한 도담의 오인 때문일 것인데, 다른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하기에 사랑을 가장 좋은 것이라 믿는다고 사랑 예찬론자인 친구를 비난하기까지 한다.

 

해솔은 도담과 함께 있다가 정미에게 발각됨으로써 다시금 강제 이별을 하게 되고, 졸업 후 소방서 구조대원이 된다. 그리고는 각종 화재와 재난 현장 속에서 생명을 구출하는데 헌신하고, 수차례에 걸친 화상과 생명이 위태로운 부상을 입기도 한다. 동료들은 그의 행위를 자살행위라고, 정말 목숨을 던질 기세였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을 구조하는 데는 이상할 정도로 필사적이면서 자신을 구하는 데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왜 해솔은 약사라는 안전한 직업을 뒤로하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소방관이 되었을까?

 

도담이 물리치료사로 일하는 병원에 해솔이 중화상을 입고 실려 옴으로써 8년 만에 두 사람은 다시 재회하게 된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이었을까? 이는 도담이 해솔에게 하는 말속에 그 답이 있는데, 너는 너를 용서했니?”라는 두 사람 모두 12년간 자신들에게 한 번도 하지 못한 질문을 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거울이 필요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어쩌면 이 서로에 대한 거울은 앞선 서로의 존재에 대한 아픔의 감응이었을 것이다.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잘 알려진 소설에 그녀가 유일하게 느끼며 살고 싶어하는 현실, 짓눌리고 짓눌려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을 존재를 버티게 해 주었던 생존의 문제였던 사랑의 기억이라는 문장이 있다. 사랑은 이처럼 한 존재가 버티는 거대한 힘일 것이다. 그것은 잘 포장된 욕망이나 이기심이 아니며, 멋대로 핑크빛으로, 하트 모양으로 정하는 마케팅 같은 것도 아니다. 또한 외로움이나 정욕을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니며, 내 상처만이 더 크다며 남의 상처를 가볍게 치부하는 그런 냉소적 오만의 잣대를 들이대며 사랑의 진정을 폄하하는 가난한 마음도 아니다. 특히 사랑은 허술한 교리 따위는 더욱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건 사랑이 아닐 것이다.

 

아마 대형 화재 현장에 출동했다 매몰된 현장에서 눈이 감겨 오는 데,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는 해솔의 말처럼 그때 생각했어. 누군가 죽기 전에 떠오르는 사람을 향해 느끼는 감정, 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랑이란 말을 발명한 것 같다고. 그 사람에게 한 단어로 할 수 있는 말을 위해 사랑한다는 말을 만든 것 같다고하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여기서 도담이 사랑은 기만이고 사기라고, 그저 설명할 말이 없어 한 단어로 퉁 치는 그런 말이 아니게 된다. 드디어 사랑은 지고한 숭고함에 이른다. 해솔이 도담에게 말하지 못했던 진실의 이야기가 주제에 이르기 위한 전복의 언어로 발설되는데, 이 문장은 소설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비밀로 하기로 한다.

 

바다에 재가 되어 뿌려졌던 아빠 창석의 기일을 한 번도 치룬 적 없었던 도담은 사랑의 숭고성 앞에 해솔과 함께하는 삶을 결정하는 듯하다. 그리고는 해솔과 함께 추모선을 타고 하얀 국화송이를 바다에 띄운다. 아빠 창석이 하던 일은 생명을 저 건너편으로 건너가지 않도록 맞서는 일이었음을. 두 사람은 앞에 파도가 일고 있었지만 그들은 수영하는 법을 알았다.” 는 마지막 문장처럼, 삶의 급류라는 휘몰아치는 시간을 견뎌내고 사랑과 생명에 대한 숭고한 의지를 배웠던 것일 게다.

 


누구든 급류에 휩싸여 그 흐름에 떠내려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 급류는 현실의 폭우 속 강물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 세상이라는 급류에 더 많이 속수무책이 될 때가 있다. 이 두려움은 우리를 한동안 잡아 얽매이게 한다. 이를 벗어나는 길은 바로 그것과 마주하는 방법 이외에는 없는 듯하다. 도담과 해솔은 그 마주함에 이르는 데 12년이 걸렸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책임을 덮기 위해 급류라는 그 사건의 기억들로 회피하고 있었음을, 두 사람은 그것을 서로라는 거울을 통해 발견하고, 바로 그 거울 됨이 사랑임을 확인한다. 그래  "소용돌이에 빠지면 수면에서 나오려 하지 말고 숨 참고 밑바닥까지 잠수해야 하는 것"일 게다. 이 사랑 이야기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나오려니 조금은 더 머물고 싶은 아련함이 남는다. 해솔과 도담의 그 절박한 사랑의 순간들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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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1-14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이 역주행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도서관에도 예약이 꽉 차 있네요^^

필리아 2024-11-14 22:02   좋아요 1 | URL
저도 명쾌하게 역주행의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제 견해는 이렇습니다. 요즘 한국문학은 은유와 상징 등 책읽기의 숙련(?)된 사유를 요구하거나, 사변적인 경향이 있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아주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언어로 쓰여 있어요, 그리고 사랑이라는 주제가 두 어린 인물들(열일곱살)의 성장(서른살)과 함께 정서적으로 친근한 의미로 풀어내고 있거든요, 그럼에도 천박하지 않으면서 어떤 고결한 품위가 손상되지 않은 이야기라는 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에요, 또한 다소 충격적(?)인, 일종의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사건에 대한 당사자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지니게 된 죄책감을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인물을 통해 그것을 이해해나가는 과정이 결코 이야기의 재미를 손상시키지 않고 더욱 빠져들게 하는 점이 아닐까해요. 두서없는 제 소견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페넬로페님, 좋은 꿈 꾸는 밤이 되시기를요. :)

p.s. 통속적이라는 의견도 있네요. 네, 그 통속성이라는 친근함이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에 맞서고자하는 어떤 숭고함으로 소설 전체의 배경처럼 흐르는 탓에 얄팍하지 않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네요.

필리아 2024-11-14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역주행하는 소설에 대한 이런 소박한 분석도 있네요.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도 역주행한 소설인데요, 두 작품 모두 소위 ˝피폐한 사랑 이야기가 인기가 있다?˝는 공식에 들어간다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지 리딩(술술 읽힌다)이라는 거구요, 특히 10~20대가 선호하는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네요. 뭐 다 거기서 거긴인 얘기 같네요.... , 결국 이 작품을 어떻게 읽어내고 있는가, 어떤 평을 할 수 있는가는 독자들의 몫이겠지요.

페넬로페 2024-11-14 23:03   좋아요 1 | URL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진영 작가의 작품을 몇 편 읽었는데 감상을 쓰지 못하고 있어요.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직은 감이 안 와서요. 계속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글은 케임브리지종신 석학 교수인 피터 버크의 무지의 역사, Ignorance: A global history2무지의 결과11장에서 13장에 이르는 정치와 재앙, 비밀과 거짓말에 대한 읽기에서 떠오른 상념의 記述입니.

 

1. 무지의 사회적 분배

 

비밀과 은폐, 공작 또는 음험한 기획에 열중하는 권력이 자신들의 관심사 이외에는 무관심과 함께 무지가 따르는 것은 불가피한 양상일 것이다. 해서 이들 권력집단의 구성원들은 이러한 무지를 아주 폭넓게 공유한다. 그렇기에 만일 그들의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해 국가적 재난이나 위기, 또는 불의한 사정이 드러나면 이들은 부인, 부정, 거짓말, 무책임으로 방어하곤 한다. 즉 관련된 인물들, 아래로는 지방부처의 수장에서부터 장관,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공적 부인을 통해 거짓말로 상황을 돌파하려하며 그 거짓말의 취약부분이 들통 나면 거짓말했다는 사실을 다시 부인하면서 또다시 거짓말을 한다.

 

부인하는 거짓말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에 대한 거짓말이 연쇄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사회, 정치학자들의 일관된 견해이다. 즉 그 권력 집단의 무지의 사회적 분배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분명 전 정부에서는 총명한 관리였는데, 급작스레 아주 멍청한 각료가 되어 횡설수설하며 그 어떤 소신도 밝히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적잖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것은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침묵으로 응답하고, 또는 모른다고 하는 양상이다.

 

국회 청문회에 소환된 각 기관 수장들이 예고된 재난을 재앙으로 만들어 버린 후, 하나같이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는 자가 없었으며, 자신들의 무지와 무관심을 태연스레 드러내기까지 했다. 피터 버크 교수는 결함을 지닌 결정권자들이 놀라울 정도로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기술을 지휘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재난을 재앙으로 만드는 사태는 불가피한 무지가 아니라 비난받아 마땅한 무지준비 부족’”이라 단정한다. 지금 재난에 대한 권력의 무책임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행태에 내재된 무지의 속성을 살펴보고자 하기 위해 일례로 시작한 것일 뿐이다. 뜬금없이 누군가는 무지는 즐거움이라는 당치도 않은 말을 주절거리지만 무지는 대부분 삶에 대한 부정적 요소를 구성한다.

 

2. 무지는 공적 부인(否認)이라는 거짓말 형태로 표출된다

 

오늘의 우리네 사회는 오랜 학습을 통해 재난에 대한 대비책을 알고 있다. 결국 효율적이고 장기적 대비를 할 수 있으며, 할 수 있다는 것이 재난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견해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재난은 거의 모두가 인재(人災)’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부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정부의 어느 책임자도 자신의 책임이 아니며, 불가피한 재난이었으며, 오히려 피해자들의 부주의 탓이고, 나아가 불의한 세력의 사건 날조라고 떠들며, 반국가세력의 음모라고 궤변(詭辯)을 주절거리기까지 한다. 공적 부정은 허위 정보의 한 형태이며, 사적 부정이나 침묵은 고의적 무지라 했다. 즉 알지 않으려 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기에 이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1959~1962년을 중국에서는 대약진 운동의 시기라 부른다. 이때 3,000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세계사의 어디에도 이만한 규모의 아사(餓死)를 기록한 기근은 없었다. 서구를 따라잡겠다고 자신의 천재성과 무오류라는 무지와 오만으로 파종과 수확을 해야 할 농민에게 철 생산을 독려 했다, 이것은 위신구라는 농촌 공간을 배경으로 황허유역 모래밭에서 흙철을 모아 철 생산에 내몰린 농민의 고통스러운 삶을 적나라하고 풍자적으로 묘사한소설가 옌롄커의 四書그것이다. 결과는 심각한 식량부족과 대기근이었다. 마오쩌뚱 정권은 자신의 실수는 은폐하고, 생산통계는 조작하고, 인민의 삶에는 무관심했다. 마오는 물론 정권의 그 누구도 책임지질 않았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반대하는 농민 탓, 인민 탓이었다. 이 끔찍한 엉터리 운동이 대실패로 끝난 것은 너무도 자명한 순리였다.

 

이 실패한 약진 운동에는 아주 흥미로운, 지금 한국 사회에 펼쳐지는 희극 장면으로 다시 반복된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와 인간 권력의 반복 유사성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무지의 양상을 발견하게 한다. 마오쩌뚱은 곡물 생산을 늘리라고 종용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는데 방문 이동 경로는 하나의 연극무대로 사전에 철저히 연출된 현장만을 방문하였다는 것이다, 권력자의 무지는 항상 현실을 왜곡하게 만든다. 이것은 전제주의나 독재권력이 있는 곳이면 여지없이 반복되는데, 농협의 대파 한단 가격으로 인해 야기되었던 상황이 바로 이러한 연출된 무대에서 벌어진 부득이한 연극일 게다. 바로 이 권력이 권위주의 독재 권력을 지향하고 있음의 반증으로 해석될 수 있는 하나의 지점이다.

 

사실 이처럼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를 뿐 아니라, 서민 대중의 삶에 대한 정보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무시하는 독재자들에게 흔히 보이는 무의식적 무지이자 허용된 무지만이 발견되는 것이고, 그나마 무지의 단순성 때문에 비난의 대상을 명료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두에서 언급한 무지의 사회적 분배로 인해 권력 집단에게 광범위하게 무지가 작용할 때 그 무지는 대개 알고 싶지 않거나 알아서 무시하는 무지이기에 그 결과는 사회적으로 심대한 손상을 가져오기에 예사로운 무지가 아니다. 이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는 특히 권위주의 권력이 구사하는 여러 형태의 무지를 보았는데, 그것은 무시, 은폐와 조작, 부인이라는 양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요인이 더 내재되어 있는데, 무관심으로 인한 무지가 무능과 안일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는 오로지 시민의 고통으로 안겨지는 것이기에 아주 나쁜 무지다. 마오쩌뚱은 기근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어떤 사실이 발생했음에도 부인하면, 공식 대응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결국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조치들이 취해지지 않고, 무시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 마오쩌뚱은 기근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측근의 고위관리들 역시 무지를 가장한 채 책임을 회피했다. 어째 너무 닮지 않았는가?

 

어떤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고 진행 중인데, 그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하거나 무시하면, 당연 무지로 인한 무능, 즉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방치가 발생하고, 문제는 곪아 터져 국민의 삶을 곤두박질치게 만든다. 국민을 볼모, 희생양으로 삼아 벌이는 권력의 행태는 정말 끔찍한 것이다. 정치 퇴행은 물론이고 경제적 사회문화적 몰락으로 이어지기에 그렇게 일시적이거나 단순하게 취급될 사안이 아닌 것이다. 희생양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마당에 무지와 관련한 희생양 증후군(또는 집단 편집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근자에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비난하는 저열한 수구적 무리들의 역사 왜곡과 날조에 편승한 무지도 바로 하나의 집단 편집증 현상인데, 어떤 예상치 못한 재앙이 일어났을 때,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책임을 돌려 가해 당사자의 책임을 회피하는 기만 책략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러한 사태는 너무 비근하게 벌어지는 일이기에 그리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1666년 런던 대화재가 발생하자 기득권 세력인 영국 국교 집단은 박해받던 가톨릭 신자들이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거짓 소문을 내서 자신들의 적을 쓸어버리는 발작을 했다. 이른바 희생양 증후군이다. 범죄행위의 가해자인 자신이 속한 집단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추악한 무지의 일면이다. 이들은 결코 진실을 알고자 하지 않는다. 자신은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결코 깨어나지 않을 무지이다, 때문에 이에 기초한 지식은 항상 왜곡되고 조작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집단 편집증(희생양 증후군)은 곧 무지의 한 양상이다

 

1923년 일본 관동 대지진의 조선인 대학살(조선인을 포함 15만 명이 사망)도 조선인의 방화와 약탈, 그리고 우물 독극물 투입으로 일본인이 무고하게 죽어나가고 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일본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희생양 증후군의 대표적 사례이다. 다시 말해 재난 대비 부족에 대해 응당 책임져야 할 권력이 자신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희생양에 뒤집어씌운 것이다. 이는 대중의 무지를 토대로 한다. 정보가 부족해지면 그 진실의 빈 공간을 소문이 대체하는데, 이는 예외 없이 왜곡과 조작된 허위와 거짓 정보로 채워졌다는 것이 역사의 실증이다. 1980년 광주시민이 무참하게 학살된 민중항쟁 운동 또한 북한 특수부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침투하여 벌인 정당한 군사행위라고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떠드는 것 또한 이와 유사한 의도된 고의적 무지의 한 형태일 것이다.

 

제주 4.3사건 또한 학살의 책임을 피해자로 돌리는 무도함과 무지함의 반복이라 할 수 있는데, 한동안 우리 역사에서 4.3사건은 금기어였다. 마치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를 발설하면 투옥되듯, 철저한 금기어로서 기억에서 지워야하는 어휘였다. 알고 있지만 모른다고 인식하는 알려진 무지였다. 이웃이 끌려가고 무수한 총소리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마을 사람들은 알지만 몰랐다. 안다고 말하는 순간 군경에 의해 똑같이 죽을 수 있었기에 기억에서 어떻게든 지워버려야 하는 사실이었다. 이와 동일한 사건은 세계 도처의 독재정권에 의해 무수히 벌어졌고, 그 진상을 밝히는 데 대부분 50여년의 끈질긴 추적의 노력이 이루어져야 했다. 19404~5월 폴란드 장교 2만 명이 비밀경찰에 의해 조직적으로 사살되고 카틴 숲이라는 곳에 묻혀버린 역사가 있다. 폴란드 공산당 정권은 논의를 금기로 하고, 실종된 장교들의 날짜를 조작 날조했다. 그리고는 독일에 그 책임을 돌렸다.

 

1989년에야 진상이 규명되고, 러시아 보리스 옐친은 바르샤바 기념탑에 서서 사죄했다. 보지 말아야 할 것, 알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으면 기억을 지워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기억하던 이들이 모두 죽으면 영원히 그 사회는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동일한 사태를 반복되어 맞이하게 된다. 누군가 기억상실증은 국가가 후원하는 스포츠다!”고 말했단다. 고위 정치인들의 청문회에서 우리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무수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인간들을 보게 된다. 선택적이고 고의적인 무지는 모두 거짓말임을 역설한다. 독재 권력에 편승해 무지의 사회적 분배를 나누어 가진 고위 정부 관료들은 소위 고의적 허위 정보, 디스인포메이션(disinformation)’을 공유하는 것이다. 즉 더러운 속임수, 기만 게임에 동참하는 것인데, 자기들만의 폐쇄적 정보를 이용하여 조작, 날조, 은폐를 일삼으며 일반 대중을 무지 속으로 몰아넣고자 한다. 독재 권력은 항상 자신들의 성공을 위해 대중의 무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제거하고 싶은 정적에게 조작된 범죄 사실을 대중에게 선전하고, 권력(檢警言)을 이용하여 상대의 평판을 훼손하며, 정치적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저열하고 악질적 행위를 하는 것도 결국 무지에 대한 의존이 배경이다. 때문에 그토록 언론기관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삼으려 안달하고, 언론에 대해 사전 검열을 자행하고, 금서 목록을 지정하며,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독재 권력에 반하는 사회문화 및 정치 인물을 공적 진입에서 배제하려는 것도 대중의 무지를 유지, 지속하려는 의지의 다름이 아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가장 심각한 형태의 무지가 이 사회를 좌우하고 있기에 비밀주의와 은폐, 조작과 날조된 거짓으로 진실의 공간은 늘 빈자리가 되어 그 자리에 의심과 혼란이라는 소문이 꿰차는 것은 필연이다. 그만큼 사회는 분열과 극한적 적대를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사회의 각종 미디어가 온통 거짓말과 조작, 왜곡, 날조된 말들로 채워져 거짓이 활개 치는 것은 온라인 플랫폼의 알고리즘이나 생성형 AI 탓만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무지의 형태가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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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dromes of Corruption : Wealth, Power, and Democracy (Paperback)
Michael Johnston / Cambridge Univ Pr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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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 또는 국가의 부패 양상을 비범하게 통찰한 걸작이다. 특히 한국 사회의 오랜 부패 양상인 엘리트형 카르텔의 만성적 부패에 대한 참조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왜 『부패 증후군, Syndromes of Corruption』의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되지 못하는 지의 한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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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eterminate Inflorescence : Notes from a poetry class (Hardcover) - 이성복 시인 <무한화서> 영문판, 2023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번역도서부문 (바리오스상) 후보작 선정
Lee Seong-bok / Penguin Books Ltd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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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쥐어짜낸 말들이 아니라 그 이전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써진 언어들이고, 마음에 박히는 시론집이다. 이 영국 판본 『무한화서』는 이성복 시인에게 어떤 좋은 일을 내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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