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 살인자의 성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5
페르난도 바예호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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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980~1990년대의 부패하고 범죄 집단화된 국가인 콜롬비아를 배경으로 한 절망적이고 자조적인 외침이다. 그런데, 저 먼 남미대륙 한 나라의, 그것도 30년 전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던져줄 수 있는가라는 볼 멘 불평의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역사는 그 모습을 변조해서 반복된다. 1930년대 나치의 파시즘이 21세기 이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콜롬비아의 증오가 꼬리를 물고 영속되듯, 이 땅에서도 그것을 빼닮은 듯 범죄 집단화하는 국가권력의 양태가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으니 말이다.

 


마약 밀매조직이 곧 정부였으며, 그 쓰레기들이 국가 행정과 공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이에 영합한 오래된 부패조직인 관료들은 자기 주머니 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그 구성원인 시민이라는 존재들의 삶 또한 무지막지하고 극악무도한 패악질을 닮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직 그 짓을 흉내 내야만 생존의 여지가 있었으니 말이다. 화자(話者)는 생존해 있는 마지막 문법 학자로 자처 혹은 추정하는 페르난도(작가의 분신)라는 인물이며, 어느 검사에게 조국 콜롬비아에서의 자기 행적을 술회하는 형식을 하고 있다.

 

청부 살인자(sicario)란 위탁받아 살인하는 아주 젊은 청년이에요

심지어 어린아일 때도 있어요.” -12

 

지구상에서 가장 범죄가 잦은 나라, 증오와 원한의 수도, 메데인은 재앙의 얼굴을 하고 있다. 법은 불()처벌이 원칙이고, 범죄자이면서 처벌받지 않은 첫 번째 인간이 대통령인 나라, 이 시간에 그는 아마도 나라건 일터건 모두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있을거야”(27). 이 낯설지 않은 익숙한 문장이 이 소설을 더욱 열중하여 읽게 한다. 메데인에는 150개의 성당이 있다. 청부 살인자들이 실수하지 않게 해달라고 성모에게 기도하기 위해서, 총을 쏠 때 목표물에 정확하게 명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존재하는 수많은 성당, 범죄의 일상성만큼이나 즐비한 성당의 실존은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죽음인 나라에 맞춤처럼 보인다.

 

어디를 걷거나 어떠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더라도 죽음은 삶처럼 따라붙는 곳, 그 누구도 결백하지 않은 인간쓰레기들, 찌꺼기들만이 있는 나라,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는 것이 정당화되는 곳이다. 죽이려는 열망과 재생하고 번식하려는 분노가 서로 경쟁하는 곳, 열두 살이 되면 범죄의 온상지인 코무나의 아이들은 늙은이와 다름없어진다. 살아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지만 사회는 점차 유대감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해지고 누덕누덕 기운 침대보처럼 되어버린 도시, 소설은 온통 총알을 박아버리는 장면의 연속이다. 더 이상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가난의 고통과 벌이의 고됨으로부터 해방을 주기 위해 서로 서로 죽음을 공연한다.

 

택시의 라디오에서는 공공의 젖이나 빨면서 나라의 돈을 빼앗아가는 엿 같은 관리들의 의미 없는 발표문이나 마약 밀매자들의 거슬리는 바나예토 음악이 틀어져 있다. 죽음, 권총, 경찰, 안녕 개새끼야.” 재의 수요일 성 십자가를 그어주는 곳, ! 피할 수 없는 단호한 단 한발의 총알. 사체에 몰려드는 구경꾼들, 야비하고 천한 영혼 밑바닥부터 말 할 수 없이 은밀하게 용솟음치는 기쁨을 어쩔 줄 몰라하는 선천적이고 만성적 비열함을 가진 군중들. 거짓말과 도둑질을 일삼는 가장 비열한 버러지들이 되어버린 시민이란 것들. 뉴스도 더는 새롭지 않다. 단지 죽음의 숫자가 오늘과 내일 조금씩 다를 뿐. 당국이라 말할 수 있는 게 없고, 단지 도둑질하고 공공의 것을 약탈하는 사악한 권력만이..., 그래서 기도의 내용도 이렇다. 이 삶에서 이미 지옥의 악몽을 겪었고, 그것도 아주 충분히 겪었으니, 영원한 저주에서 저를 구하소서. 이웃과 함께, 아멘.”

 

훔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둑맞지 않기 위해 피를 흘리며 지켜낸 곳.

주님, 그토록 이상한 생각에서 구하시고 보호하소서.” -89

 

소비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지독한 약탈자본주의가 시대를 휩쓸면서 이에 도취된 인간들은 타인으로부터 탈취를 영속화한다. 빼앗기 위해 죽이고, 그를 다시 찾아오기 위해 죽이고, 이 반복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음의 향연은 계속된다. 권력이 곧 불의(不義)한 조직인 세계,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니 수출할 것도 없고 오직 하얀 코카인 가루에 매달려 있다. 자동차도, 가전제품도, 명품 브랜드 옷과 가방도, 모든 것이 마약에 의존해 있는 세계, 마약 밀매 영역다툼으로 반복되는 매일의 죽음과 이 죽음을 괴로워하는 사회를 먹이로 먹고사는 기자라는 것들까지, 어느 한 구석도 악취나는 부패에 오염되지 않은 영역이 없는 곳이 소설 전반을 그칠 줄 모르고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럼에도 개들이 짖는 소리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가면서 자기들이 더 낫다고 목청껏 소리치고 있는 형국이란 가히 저질 코미디 이상의 촌극이라 할 것이다.

 

하나의 세계가 몰락하는 광경, 인간 군상의 저열한 추락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나 특출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주가조작, 부동산 투기를 위한 국토계획의 자의적 변경, 정적 살해를 위한 공권력의 사적 남용, 하다못해 마약밀매의 개입 징후까지, 이 소설의 극단적 양상들이 결코 먼 나라의 지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에 절로 전율케 된다.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고, 갈라치기와 적대로 시민 분열을 초래하며, 역사의 부정과 부역자들의 만행이 뻐젓이 저질러지다 보면 아마도 이 사회도 그간 쌓아온 질서와 정신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약탈자와 파렴치범들이 행세하며 처벌받지 않는 곳인데, 그 누구인들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겠는가? 사회는 순간 급속하게 저 지옥의 나락으로 곤두박질 칠 것이다.

 

이 소설은 시종 욕하면서 빠져드는 작품일 것이다. 그 역겨움과 비열함과 악랄함, 그리고 그 어떤 사회적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래서 죽음은 늘 방치되고, 살인자는 더 이상 추적되지 않는 세계, 어른이 되기 전에 청부 살인자가 되어 또 다른 청부 살인자에 의해 죽어가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세계, 인간임에 대한 불명예와 치욕이 넘쳐흐른다. 왜곡된 현실을 더 왜곡하여 보려고 저 무도한 머저리는 마약밀매에 개입한 것인가? 아무튼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심사가 그리 편하지 않았다. 다만 서사적 힘은 가히 독보적이고 치명적일 만큼 흡입력이 뛰어나다, 페르난도 바예호는 라틴 아메리카의 현존하는 최고의 작가라고 한다. 한 사회가 한번 폭력의 굴레에 갇히기 시작하면 그것을 걷어내는 데는 엄청난 사회적 희생을 필요로 하게 된다. 우리 사회가 이미 정치검찰들에 의해 폭력의 굴레에 갇히기 시작했다. 아마 이것을 이전의 민주사회로 회복하는 데 우리사회는 엄청난 곤혹이라는 고통을 겪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정치인 혹은 관료는 본질상 비천하고 악한 놈들이야 .(...) 절대로 그들이 순진하다고, 죄 없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하지 마. 그게 바로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거야.”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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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로버트 제임스 월러 지음, 공경희 옮김 / 시공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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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타인의 사랑에 대해서 말 할 수 없다. 여기까지는 아름답고 위대한 열정이며, 바로 여기부터는 한낱 감상이며 천박한 욕망이라고 말이다. 진실하고 심오하며 열정에 찬 사랑의 가능성을 조롱, 멸시하며 불륜, 천한 감상이라 치부하는 태도로는 이 소설을 읽는 데 요구되는 우리라는 창조, 사랑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 것이다. 점점 인간 서로의 신뢰가 부서져 나가고, 사랑이란 언어는 단지 편의성의 문제로 전락하는 이즈음의 세계에서 예순 일곱 살 프란체스카 존슨이 쓰다듬는 추억의 손길처럼, 이 작품은 어떤 순간의 기억을 더듬어 보며 오랜 열정을 되살려보려 애쓰게 하기도 했다.

 

모든 세월과 인생 동안 서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던 광활한 초원을 날 던 두 마리 새, 오하이오의 작은 농촌 마을의 마흔 다섯 살 나폴리 출신의 여인 프란체스카 존슨,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작가, 쉰 두 살의 마지막 카우보이 로버트 킨케이드는 달리는 될 수 없었던 듯, 마치 피할 수 없었던 일처럼 만나게 된다. 1965816일 월요일 이른 아침 킨케이드는 아이오와 주 매디슨 카운티에 있는 지붕 덮인 일곱 개 다리의 사진 촬영을 위해 다리들을 답사해 나간다.



여섯 개의 다리는 찾았으나 일곱 번 째 로즈먼 다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자갈길을 맴돌다 리처드 존슨, RR2’라고 쓰여 있는 길 끝 우편함을 발견하고 길을 따라 올라가 마침내 현관문 앞에 앉아있는 여자를 바라본다. 자세히 그녀를 바라보고, 다시 아름다워질 질 수 있는 아름다운 여자임을, 다루기 힘든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최초의 우발적이고 우연한 마주침은 프란체스카의 단 몇 초의 인상과 자기감정의 변화에 대한 자각으로 다시 묘사되는데, 원하신다면 제가 직접 가르쳐 드려도 좋은데요.”라고 말하는 자신에게 놀라며, 바로 그 지점이 그녀를 영원히 변하게 하는 일이 시작될 것임을 느낀다.

 

우리는 얼굴을 채 바라보기도 전에,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사람의 전체 이미지를 분석할 사이도 없이 타인에 대한 자신의 행동과 감정을 결정한다. 더구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이끌림의 감정은 숨어있던 또 다른 자아의 소리에 압도되고 껍질을 스스로 벗어나 배워서 알게 된 모든 것에 배치되는 마법 같은 욕망에 자극되기도 한다. 살랑거리며 소리를 내는 또 하나의 숨어있던 마음이 깨어난다, 나는 개암나무 숲에 갔었네. 내 머릿속에 불이 났기에...”

 

프란체스카는 그렇게 낯선 남자의 낡아빠진 시보레 픽업트럭 해리에 올라타고 로즈먼 다리를 안내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와 함께 음식을 만들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행크 스노우의 노래와 푸른빛의 저녁을 바라본다. 함께하고 싶은 갈망과 이를 부인하는 어려운 내면의 싸움 속에서 다음날의 촬영 작업을 위해 킨케이드는 떠나고 프란체스카는 아쉬운 마음을 달랜다. 여자는 차를 타고 밤길을 달려 킨케이드가 다시 찾게 될 로즈먼 다리에 쪽지를 붙이고 돌아온다. 아마 소문이 온 마을을 떠도는데 순식간이면 될 곳에서 위험을 무릅쓴, 그 어떤 대가를 치르든지 그녀는 이미 어떤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리라.

 

“‘흰 나방들이 날개짓할 때다시 저녁 식사를 하고 싶으시면,

오늘 밤 일이 끝난 후 들르세요. 언제라도 좋아요.”

 

자신의 마음을 알리고 싶은 여자의 마음이 온통 드러난 이 쪽지의 내용보다 앞서 두 사람은 킨케이드의 오후 촬영 작업을 함께 하게 된다. 그리곤 늦은 밤 돌아와 낯선 남자에게 자신의 침실방 샤워실을 내어준다. 그리곤 남자의 목욕이 끝 난 후 여자는 몸을 씻어내고 바람의 노래 향수를 뿌리며 이 밤을 위해 낮에 새롭게 마련한 분홍색 원피스와 이보다 엷은 핑크 색조의 립스틱을 바른다. 두 사람은 좁은 부엌에서 서로 맞잡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서로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마침 라디오에서는 느리게 편곡된 Les Feuilles mortes(枯葉)이 흐르고, 서로의 내음과 휘감기는 다리와 맞닿은 배를 느끼며 성큼 다가서는 존재에 밀착된다. 그녀는 여자가 된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고향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둘 다 스스로를 잃고 우리라고 새로 만들어낸 다른 존재 안에 서로 얽혀들어 하나로만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가 된다.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 어찌할 수 없이 가장 깊고, 가장 심오하게.“

 


아이 둘과 남편 리처드는 일리노이의 농산물 축제를 위해 일주일의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킨케이드를 따라 나서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킨케이드는 프란체스카와 함께 떠날 것을 제안하지만, 여자는 책임감이라는 현실로부터 자신을 찢어내 버릴 수 없음을 안다. 길과 책임감과 죄의식.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광활한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여러 차례 오는 것이 아님을 안다. 두 사람은 목요일 밤 다시 오지 않을 서로의 발견에 감동하며 다시 사랑을 나누고, 흐르는 눈물로 햇빛에 일그러진 서로의 이미지를 뒤로 한 채 이별한다.

 

이 모든 이야기는 예순 일곱 살이 된 프란체스카가 남편 리처드의 죽음 이후 8년이 지난 22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의 추억으로 펼쳐지는 격정적 고백일기이기도 하다. 나흘의 사랑, 그 감정이 얼마나 강한 것이었는지, 그녀는 생생하게, 또렷하게 기억을 떠올린다. 남편의 사후 매년 8월의 그날이 되면 킨케이드가 보내 왔던 사랑에 빠진 여인의 얼굴을 한 자신의 사진과 로즈먼 다리를 찍은 사진 두 장, 그리고 킨케이드의 편지와 글, 그가 발표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스크랩된 사진들을 꺼내 어루만지며 추억 속 이미지들을 현실로 소환한다. 그녀가 유일하게 느끼며 살고 싶어하는 현실, 짓눌리고 짓눌려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을 존재를 버티게 해 주었던 생존의 문제였던 사랑의 기억. 고대의 탑 주변을... 나는 천년 동안 돌고 있네.”

 

두 사람은 19658월의 그 이별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서로의 간절한 갈망에도 불구하고. 우주를 떠도는 두 점의 먼지처럼 서로에게 빛을 던지고 나흘간의 사랑으로 하나의 존재가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함께 보낼 수 없는 시간의 통곡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이 우주에 단 하나 뿐인 사랑의 실체라는 가능성을 남기고 이울어져 갔다. 1982년 프란체스카는 킨케이드의 변호인을 통해 그의 죽음과 유언에 따른 유품을 전달 받으며, 그의 유해가 로즈먼 다리에 뿌려졌음을 알게 된다. 프란체스카는 19891월 예순아홉 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두 자식에게 자신의 재를 로즈먼 다리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그대로 실행되었다.

 

실화 소설이다. 나는 오래되어 잊혀진 노래 고엽(枯葉)을 찾아 몇 차례 귀를 기울이며 일체화로 얽혀드는 그 관능과 열정의 감각에 공감해보려 했지만 역시 그것은 그들만의 배경이었던 모양이다. 구전(口傳)되는 어느 부족의 역사처럼 밀려드는 추억 속에서 해마다 빈틈없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프란체스카라는 여인의 절실하게 현재화된 사랑의 이야기와, 함께 할 수 없었음에도 그녀라는 존재의 발견 사실에 감사하며 깊고, 완벽하게 언제나 사랑하고 있음을 토로하는 킨케이드의 편지 글에 빠져 나는 짧은 시간 동안 이 작품을 수차례 반복하여 읽었다.

 

이 둘의 만남처럼 아마 광대한 이 우주에서 세포 속속들이 자석같은 힘이 작용하는 존재가 그 어디엔가 있을 터이다. 남녀의 끌어당기는 힘, 아마 나는 이 힘의 무한한 아름다움에서 빠져나오기 싫었던 모양이다. W.B. 예이츠의 시집을 다시 주문하고, 호그백 다리, 시더 다리, 로즈먼 다리 등 두 사람의 짧은 여정에 등장했던 매디슨 카운티의 지붕 덮인 다리들을 검색해 보기도 했다. 문화에 의해 적절하다고 일컬어지는, 문명인의 엄격한 규칙에 배치되는 욕망이라고 누군가 손가락질할 수 있으리라. 나는 그러한 폄하의 언어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편협한 것인지를 아는 나이가 되었다. 조금은 더 열려있고 따뜻한 마음으로 이 신비한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면 아마 그 고귀하고 우아하며 위대한 감정들과 함께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 마음이 쓸쓸해질 때면 가끔 이 책을 꺼내 읽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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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08-01 15: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실화 였군요. 저는 예전 영화 이미지가 있어서 실화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아름다운 영화 같은 글 감사 합니다.

필리아 2024-08-01 16:22   좋아요 3 | URL
네,로버트 킨케이드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정식계약 사진작가로 활동했던 실존인물이고, 프란체스카 또한 실존했던 인물이랍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마힐님~

페넬로페 2024-08-01 19: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래전에 영화를 보고,
영화가 좋아 책도 읽었어요.
책이 좀 더 디테일하지만
영화가 너무 강렬했어요.
지금도 영화의 거의 끝부분에서
비가 오는데 메릴 스트립이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앞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운전해서 가는 차를 따라가는데,
메릴 스트립이 울면서 자동차 문을 열지 말지 망설이는 명연기가 기억나요.
그 나이에도 저런 열정이 있을까 궁금했지만
‘우리가 타인의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필리아님의 첫 글에 그냥 이해가 되네요^^

필리아 2024-08-01 20:39   좋아요 3 | URL
저는 우주적 만남이라는 킨케이드의 말을 믿고 싶어요. 저 멀리 실루엣 만으로도 어떤 일체성을 느끼게 되었던 설렘이 있었던 기억이 있거든요. 물론 스쳐지나갈 수 밖에 없었지만 말이죠. 상대의 반응이 나와 같지 않았다면 그건 큰 오해고 실례가 될 테니 말이에요.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마주하게 될 때 무언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됨을 예상하는 각자의 목소리가 소설에서는 묘사되고 있어요. 그래서 저에겐 그 첫 마주침이 너무 인상적이에요. 네, 페넬로페님이 말씀하신 영화 속 자동차에서의 망설임과 소설에는 없는 비를 맞고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도 깊은 인상을 남겼죠. 영상의 인상에 대한 말씀 고맙습니다~~
 
이 책은 신유물론이다 - 브뤼노 라투르, 로지 브라이도티, 제인 베넷, 도나 해러웨이, 카렌 바라드의 생각
심귀연 지음 / 날(도서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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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인간 유일의 영혼을 주장하는 문장이 출현한 이래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 식물, 사물(물질) 등 비인간 존재는 위계질서에 의해 객체의 자리로 밀려났다.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는 이렇게 지구 생태계를 이분법으로 구분하여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 인간과 사물로 갈라놓았다. 그리고는 이들 비인간 존재는 수동적이고 억압당하는 대상화된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홀로 주체의 자리를 누리던 인간은 객체라고 억압되고 이용되기만 기다리던 비인간존재의 활력을 어렴풋 깨닫기 시작했다. 물질인 이산화탄소의 증가는 폭염과 홍수, 가뭄, 해수면 상승 등 지구온난화라는 초객체(hyper-objects)로서 행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의 활력도 능동성도 없다고 여겼던 비인간존재가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류를 지배해 온 근대적 인간중심주의적 이분법은 이제 자신들이 부여한 오만한 주체의 자리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데카르트 이후 500년에 이르는 정신과 물질’, 이분법에 의한 위계질서는 새로운 사고의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 신유물론(新唯物論)’은 이러한 새로운 사고들에 대한 주요 사유들을 통해 인간 인식 우선에 의해 배제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던 것들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만물의 궁극적 실재는 물질이며, 정신적 관념적인 것 모두 물질로 환원 설명했던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유물론에 대해 물질을 바라보는 태도가 새롭다는 의미에서 (New)’ 유물론이다. 다시 말해 물질은 외부의 어떤 작용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활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는 이론이다. 물질의 활력과 능동성을 인정하고 그 고유성을 발견하는 노력인 것이다. 20세기 후반기부터 이러한 전환적 사유가 발아하기 시작해 21세기에 이르러서는 객체지향이론, 사변 실재론, 유물론적 페미니즘, 행위자 연결망 이론, 비판적 포스트 휴먼, 비판적 생기론, 급진적 관계주의 지향 이론들이 신유물론적 토대위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적 사고를 해체하고 있다.

 

인간이 판단 통제해야 될 대상으로 바라보는 자연관은 더 이상 지구 생태계의 위계적 관점이 될 수 없다. 실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자연과 인간,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분법의 경계를 의심케 한다. 지금 이 순간 함께하는 모든 인간, 비인간 존재는 현실 존재로서 무수히 다양한 행위자로 기능을 하고 있다. 인간은 위기와 두려움을 느끼며 자연의 능동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세상은 무수한 행위자들이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내고 힘을 겨루는 곳이며, 인간, 비인간 존재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가진 행위자가 되어 능동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통제 관리할 수 있다고 여겼던 인간의 정신은 비인간 존재의 부름에 응답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어쭙잖은 이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비인간 존재의 능동성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그 무관심과 무시, 폄하에 반발한 비인간 존재는 생태계 연결망의 한 행위자로서 본래의 불안정성과 변화 동력으로 인간의 오만한 환상을 깨워대고 있다. 이성적인 것만이 합리적이라 생각게 했던 근대의 사고는 인간 자신의 몸이 물질임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며, 동물이고 자연임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삼림의 파괴와 동물과 식물의 멸종, 즉 자연의 멸종은 곧 인간의 종말임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식을 바꿔야 새로운 패러다임이 가능하다. 비인간의 행위 능력과 존재 권리를 인정해야 하며 스스로 존재에 대한 권리를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고 교만의 지위에서 내려와 이분법 구조를 해체해야 한다.

 


인간, 비인간 모두 행위자이며 행위자들은 모두 연결망에서 자신을 드러낸다며 행위자 연결망 이론을 주장했던 브뤼노 라투르를 출발점으로 하여 미셸 세르, 화이트 헤드의 과정 철학을 경유하여, ‘뤼스 이리가레의 영향을 받아 권력과 억압의 구조를 해체하고 공생방법을 제시했던 유목하는 주체로서 경계를 넘나드는 변신하는 존재를 말했던 유물론적 페미니스트 로지 브라이도티‘~되기의 철학을 검토한다. 변하지 않는 것을 진리로 여긴 오랜 근대적 이분법을 탈피하여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유목자의 떠돌아다님의 자유로운 연결,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의 변신을 받아들이는 계급, 연령, 젠더, 인종을 초월한 활기찬 연대의 철학을 소개한다. 데카르트식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은 여성을 타자로 배제함으로써 멸시해왔다. 개체화되고 대상화된 존재, 즉 물질적이고 기계적이며 수동적인 존재라는 여성 담론을 해체하고 신유물론을 통해 페미니즘을 윤리적 문제로 전위(transposition)시킨 것이다.

 

책은 이처럼 신유물론이 인간 삶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사고로서 세상을 어떻게 보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주요 영향력있는 석학들의 실천적 이론을 안내하고 있다. 사실 유물론 하면 마르크스의 사적(史的)유물론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사회구조와 역사발전의 원인을 물질에 근거해 파악하여 물적 토대가 곧 사회발전의 근원이라 본 유물론이다. 그런데 이 또한 정치철학자인 제인 베넷의 지적처럼 인간의 노동과 그 가치를 최우선시 하는 사고라는 점에서 인간중심주의 이론이라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 가구를 만드는 데는 목재와 망치, , , 인간의 노동이 각기 그 자체의 활력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파급력을 품게 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인간과 비인간은 동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실 생명에 대해 여전히 합의된 정의가 없듯,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 논리는 수상쩍은 것이다. 물질이나 기계는 수동적이고 죽은 존재라는 기계론적 관점을 벗어나면 우리는 인간중심주의에 깃들어있는 자연관에 의구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다못해 인간이 버린 쓰레기조차 매립지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활기 넘치는 화학물질로 휘발성 강한 메탄을 생성하며 스스로 변화한다. 물질은 스스로 영향을 미치는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생기란 이러한 물질의 활력에 관한 것이다. 제인 베넷의 비판적 생기론은 이처럼 신유물론적 사고에 기반을 둔 사유이다. 그녀는 또한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적 위계 권력을 배제하기 위해 브뤼노 라투르의 영향을 받아 행위소라는 스스로 자신이고자 하는 능동적 힘으로서 물질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같은 이분법적 권력질서를 해체하고 자연과 문화, 인간과 기계,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없애고자했던 사상가들은 도나 해러웨이’, ‘카렌 바라드에서 그레이엄 하먼’, ‘티모시 머튼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석학들이 등장했으며, 오늘 인류의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려종, 사이보그 등 얽혀 연결된 존재로서 서로 감염시키는 관계에 집중하여 개체성이란 관계망에서 생성되는 것이며. 독립적 개체성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해러웨이의 공동생성의 존재론이나, 양자역학에 터 잡아 얽혀있으되 분리되지 않은 유동적 상태가 현상이며 이 안의 행위 요소들의 움직임인 내부-작용을 통해 비로소 개체가 출현하는 것이라는 물질을 과정에 있는 현상으로 이해한 카렌 바라드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과 비인간을 실재하는 행위자로서 고려케 한다.

 

이제 우리 인간은 다른 존재를 판단하는 주체의 자리가 가당치 않은 것임을 직시할 시점에 도달해 있다. 주체가 있음으로 인해 객체라는 대상화된 존재가 있어 억압당하고 불평등을 강요당하며 무시되고 배제된다. 이러한 데카르트식 이분법적 사고로는 더는 이 세계에 팽만한 문제들에 접근 할 수가 없다. 물질이고 자연이고 타자라며 자신 역시 하나의 타자임을 이해하지 못한 채 타자의 목소리를 무시한 결과 온갖 사회적 불평등이 만연하고 기후온난화와 같은 재앙이 일상화 되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신유물론은 이러한 구분,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인간 사물이라는 차별의 경계를 해체하고 세계는 더는 수직적이지 않으며 여러 갈래의 복잡한 연결망임을 인식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고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 시급한 시대이다. 이 책 신유물론은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하나의 철학적 이론이나 사조인 것만이 아니다. 바로 현재하는 인류인 우리들의 일상적 행위를 돌아보아야 할 이유의 직시이다. 책은 이러한 사유의 전환을 위한 첫 번째 문으로 보다 심화된 사유 속으로 이행하는 안내서로 삼기에 적절할 만큼 친절하고 수월한 문장으로 씌어 있다. 늦었다고 여길 때가 어쩌면 가장 빠른 때인지도 모르겠다. 이 세계에 노정된 무수한 불평등과 재앙적 위기를 생각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거대하게 변화하는 사고의 조류에 동승할 기회를 제공해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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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음 / 허블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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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스럽게 허겁지겁 읽어나갔다며 이 소설이 압도적 몰입으로 이끄는 작품이었다는 감상평에 절반만큼 현혹되어 집어 들었다. 물론 나머지 절반은 의심을 지닌 채 말이다.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쪽으로 책장을 넘겼다.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이상 행위를 한 것인데, 그곳에 무언가 주인공의 심적 또는 행위의 도달지점이 있으리라는 기대였던 것 같다.

 

그는 내 손목을 세게 쥐고, 끔찍한 눈으로 목도하고 있었다. 칼을 박아 넣으려 하는 사랑의 민낯을. (...) 날에 얼굴이 비쳤다. 울고 있는데도 웃음이 나왔다.” -170

 

이 히스테릭한 양면성의 장면을 뇌리에 가둔 채 읽기 시작했다. 유치원 교사 오영아가 있다. 그녀는 한 원아의 폭력으로 다친 피해 원생들을 달래고, 발악적 비명을 질러대는 가해 원아로 인해 매일이 고통스럽다. 아이를 한 대 쥐어 패고 싶지만 참아야 하고, 피해 원생들의 항의하는 부모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일까지 도맡아야 한다. 또한 오랜 친구는 그녀에게 세상의 당위에 대한 정의를 주장하며, 작은 어긋남조차 일상의 수행에서 실천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녀는 그 올바름에 그저 수긍하는 것이 선의이며 갈등을 초래하지 않는 것이 친구와의 우정을 유지하는 것이라 인내한다.

 

어질고 배려심 깊은 연인과 미래를 계획하는 것은 사랑의 열정이 없어도 그의 선한 의지를 거절하는 것은 도덕적 배신이라 여기고 순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자신을 채근한다. 그러나 이 모든 수용과 수긍에 내면의 목소리를 억압하여야 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낀다. 마음껏 분출되는 감정과 의지에 따라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 억압에서 자유, 해방을 향한 마음을 옥죄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럽기만 한 것이다. 그녀는 이를 도덕적 선의 길이고, 이 억압을 일탈하는 것은 부도덕, 즉 악이라 여기는 것 같다. 결국 그녀는 심리상담소를 찾는다.

 

나는 이러한 도덕적 선악을 전제로 한 이후에 서술되는 일탈의 행위를 반면교사로 하여 비로소 선악의 조화, 혹은 중립지대를 오가는 것이 마치 삶의 기술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주인공의 서사가 오히려 너무 판명하여 도덕적 회색지대의 모호함을 희구했다는 주인공의 태도가 기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주인공 오영아가 세상을 판단하는 생각이 여러 곳에서 드러나는데, 마일로로 불리기를 악착스레 외치는 문제아 은우의 엄마가 운영하는 에코 비건 빵집 나루터와 일방통로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염가의 상품을 파는 25마트의 대비라던가, 심리상담소에서 대뇌피질 시술 이후 타자의 절망과 폭력성의 쾌락에 자기를 내어주는 행위처럼 오직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분별하는데 능숙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공공을 위하는 만족, 그것이 희생시키는 사적인 행복이야말로

도덕이라는 쾌락이 가진 양면이었다.” -118

 

주인공이 자기감정 해석에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여겨진 이유이다. 발설하고 행위하고 싶지만 상황과 타자와의 관계에 따라 자기 내면의 원초적 반응을 억제하여 초래 될지 모를 갈등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은 결코 도덕적 행위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조금만 상상 실험을 해봐도 우리는 짜증나지만 타인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무수한 경우를 그려낼 수 있다. 그것에는 인간애라던가 관대함, 도덕적 이성의 발휘 여지가 없는 그저 타인이 함께 있음으로 인해 야기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에게 강제된 의무인 것이다. 우리들은 현존하는 존재들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하며 이러한 관계의 의무에 강제되고 있다. 유치원 교사 오영아는 자신의 본능적 반응의 억제를 마치 도덕적 소비처럼 여기는데,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승객으로 가득찬 만원버스에 새로운 승객이 오르면 욕지거리를 속으로 삼키며 작은 공간을 어쩔 수 없이 내어주는 것처럼, 타인들과 맺는 관계는 이 불가피한 자기 공간의 일부 포기이다. 여기 어디 도덕적 미덕이 존재하는가.

 


직장에서 상사의 무례한 부탁이나 곤란할 일의 회피, 저의가 불순한 동료의 행위 등을 무난하게 참아 내거나 거절하지 않고 맡는 경우에 이것에 대체 어떤 도덕적 미덕이 있을까? 직장이 자신의 생계나 성취의 불가피한 과정, 혹은 타자들의 불편한 시선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애나 자기 이익을 위해서이지 도덕적 소비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친구와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일방적인 수용과 순응성은 상실이나 외로움의 회피와 자기감정의 보호를 위한 것이지 무슨 도덕적 소비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인지. 더구나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이나 인간들의 관계는 도덕적 이성의 실현과는 연결지점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아마 인간 대부분의 행위는 밀집한 버스 내에서 벌어지는 짜증나는 의무의 연속이고, 그것은 바로 다른 존재가 내 옆에 있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우발적이고 우연한 문제일 뿐이다. 즉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의무를 의식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일 것이다.

 

소설에 이런 문장이 있다. 짐승 같은 웃음 아래 가라앉은 다른 지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112)”, 타인이 불행을 맞아 송두리째 삶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며 쾌감에 절어 웃음을 터뜨리는 자신에게 그 심연에 웅크리고 있는 또다른 본성을 묻는 목소리일 것이다. 그리곤 시술 이전의 자신이 억제했던 목소리와 행위를 도덕적 소비로 해석하면서 미래의 연속적 행복을 스스로 박탈하는 어리석음이었나.”라고 사적 행복과 공공을 위한 만족의 두 가지 양면적 쾌락을 문제 삼는다. 그리곤 도덕적으로 산다는 건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회피였다.(135)” 고 결론을 내린다. 나는 은우의 엄마가 오영아에게 하는 말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운 목소리로 여겨졌는데, 사회적으로 용인된 가치만 추구하는 것, 당신은 그걸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부단히 통제했고, 그 기능이 무척 발달한 여자였습니다.(146)” 라는 지적이다.

 

기성의 질서와 제도, 가치에 대한 순응과 이에 대한 부정이나 의문의 필요성이 절단된 교육에 길든, 아니 기막히게 훈련된 세대들은 소위 시민적 소양이라는 도덕성,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만을 내면화한 것 같다.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승인된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도덕이라 생각하는 오해를 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주인공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고 속상하다.

 

사회적 시선에 붙들려 억제된 자기의지를 해방코자 하는 그 고통스런 바램은 도덕적 일탈과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그건 존재의 당연한 욕구인데 기성의 세상이 그것을 극단적으로 왜곡시켜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부끄러운 여자, 추한 여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주인공의 자각이 절실한 시절이다. 이 만들어짐의 외피를 인식하는 것, 그 지점으로부터 존재는 자유로워 질 것이다. 관계와 상황의 불편함과 짜증남은 도덕의 미덕이나 소비와 무관한 우리의 사회적 의무에서 발생하는 지극히 자연스런 감정이다. 그것에 어떤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게되면 삶이 궁색하게 되고, 정작 괴물로 둔갑하게 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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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 - 분배에 관한 인류학적 사유
제임스 퍼거슨 지음, 이동구 옮김 / 여문책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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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원제는 분배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를 한 현존과 사회적 의무(Presence and Social obligation)’이다. 번역본 제목이 된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은 바로 현존을 풀어 쓴 것이다. 아마 직관적 이해가 쉽도록 이 풀어쓴 의미가 도움이 될 터이다. 분배, 즉 나눔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고려할 때 한국사회는 임금노동을 인간됨의 자격으로 삼고 있으며, 이에 앞선 전제로 국민국가의 성원권을 토대로 하고 있다. 함께 있음과 동일 경계 내 영토에 함께 사는 사람들의 자원 분배는 사실 뗄 수 없는 하나의 연결된 개념이다.

 

이같은 상태에 있는 존재들을 우리라고 하며, 이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에게는 제외와 배타를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눔의 토대를 이러한 기준에 매달리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인데, 실업과 불완전 취업상태의 비공식 생계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함에 따라 노동에 기반을 둔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기존 형태의 분배방식은 소위 사회 안전망이라는 기능을 더 이상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의 자원 투입 증가와 대대적인 감세조치가 진행되더라도 노동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자동화와 AI화로 감소시키고 있으며, 안정적 일자리는 축소되고 불완전 취업상태를 급진적으로 늘리는 까닭이다. 다시말해 시민권, 노동에 기반을 둔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인구가 늘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 이제 법적으로 인정한 정치적 성원권에 따른 일련의 명백한 보편적 권리와 의무의 보장은 사회적 안전장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관점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하는 순간에 이미 진입해 있으며, 이를 도외시할 경우 국민국가라는 신화적 믿음에 토대를 둔 분배정치는 무수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뿐 아니라 국가의 안정성과 정체성을 혼란에 빠뜨릴 우려가 증가한다. 이 저술은 이처럼 세계의 자원 분배에 대한 개념의 변화를 사유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대안적 가치와 제도를 향해 기존의 관념을 확장 혹은 변경시킬 수 있는지를 함께 고려해 보자는 것이다. 기술발전이 임금노동을 만들어내지도 않으며, 구조적 실업과 비정규직화가 지속되는 세계에서 전체의 성원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소수의 안정적 도시 노동계급만을 배분의 정당한 자격이라 한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외, 배제되는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을 왜 가져야 하는가라는 첨예한 정치적 질문이 가능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성원권과 임금 노동의 기여도가 공적 분배 정치의 기준이었다면 이 기준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한국 사회는 시민권의 담지자인 성원으로서 노동임금 기여자만을 우리라고 부른다. 우리라는 그럴듯한 포용적 언어가 배타적 경계를 강화할수록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더욱 황폐해져 가게 된다. 여기서 대두되는 것이 현존, 여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들의 사회적 현실임을 직시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주하게 되는 일상적 상황을 생각해보자, 아침 출근 시간에 붐비는 지하철에 발 디딜 틈 없이 밀집한 객차에 몸을 꾸겨 넣는다. 이때 이미 만원 열차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새로이 올라타는 사람을 위해 공간을 기꺼이 내어주어야 하고, 내리는 사람을 위해 출로의 공간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여기에는 인간애라던가 도덕주의적 이성의 발휘, 자비로운 관대함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다만 속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비좁은 객차 내에서 어떻게 해서든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귀찮음과 짜증에 가깝다. 그럼에도 어떤 의무가 주는 느낌을 실행하는 것이다. 여기 함께 있어야 하는 사람의 실효적 분배요구에 강제되는 의무인 것이다. 바로 이것을 사회적 의무라 한다. 사회적 의무란 이처럼 인류애나 연민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의 문제인 것이다.

 


이제까지 분배의 자격 토대인 임금노동과 성원권 소유자만을 우리라 불렀다면 여기에 함께 있는 존재를 포함하여 우리라 할 수 있는 내연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불안정한 취업 상태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대표적일 것이다. 이들은 수시로 일자리가 중단되고 다시 불안정한 취업을 반복해야 한다. 지금의 행정부는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불안정 노동자의 실업급여 수급자격을 제한하여 사회안전망에서 배제시켜버렸다. 또한 취업이 불가능한 상태에 처한 사람들은 6개월 남짓의 짧은 실업급여 수급기간이 종료되면 영구히 사회적 분배에서 제외되어 빈곤의 나락에 빠지게 된다.

 

소득 70%이하의 하위계층 노령자에게 지급하던 월 33만원 이하에서 1만원까지 차등 지급하던 기초연금도 금리 인상에 따른 가능소득을 소득 증가분으로 가산, 수급자격을 대폭 축소하여 노인인구의 생계를 사지에 몰아넣고 있다. 즉 현 정부는 사회안전망 조치인 자원분배를 오직 상호거래의 인센티브로 여겨 노동기여에 한해서만 반대급부를 인정하는 것인데, 즉 사회복지 차원의 분배 정책은 폐지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급격하게 자원분배의 왜곡이 발생하고 있고 양극화를 극단화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서 하나 중요한 의미의 확인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회적이라 표현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단지 우연하고 우발적으로 공존하게 된 승객들간의 의존적 관계에 대한 앞선 설명과 같이 사회적이라 함은 생물학적 인구집단의 네트워크나 시장으로 연결된 경제적 이해 당사자들간의 집합이 아니다. 구성원들이 구속력있는 의무로 묶인 특정한 종류의 집단적 자아로서 도덕적 단일체라 이해하여야 한다. 즉 회원제 조직이나 사회를 규정하고 범위를 정해 놓은 안전망은 무수한 대다수의 사람들을 배제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의 건강성이란 비시민권자를 포함한 영토 내 모든 국가 성원을 포함하는 의미로 확장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인류학자인 저자 제임스 퍼거슨은 수천 년에 이르는 인류 사회가 일군 거대한 부는 인류 모든 인간의 상상과 고통, 피와 땀에 의한 공통의 유산이기에 모든 사람이 이 공통의 소유권에 대한 요구로부터 보편적 분배요구가 출현한다고 주장한다. 다시말해 전체 생산물에 대해 모든 사람이 일정한 지분을 가진다는 말이다. 다시 지하철 승객간의 공간 만들기를 생각해보자. 이들은 그저 한 공간에 밀집해 있을 뿐이지만 실질적 의무와 일정기간 지속되는 실용적 조정장치로 실효적 공간을 내어주고 그것을 정당하게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성이 중대하게 강제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공유의 문제이며, 연민이나 관대한 배려 따위가 아니라 여기 함께 살고 있으므로 불편을 감수하고 적정의 공간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의무란 이런 것이다. 이 원초적 사회적 의무를 지속하여 무시하고 배제하려 하면 사회는 급속하게 붕괴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수많은 반란과 혁명이라 기록된 역사적 현실이다. 사회적 의무는 짜증나지만 어쩌겠어! 와 같은 느낌의 의무이다. 그렇다고 존재에 대한 요구를 승인하는 것이 완전 평등이나 공평을 전제로 한 분배일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 이러한 사회적 의무의 반대 면인 요구에 만족스러운 수준의 답을 제공하는 경우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최소한으로 수용되며 성원권과 기여라는 명확한 한계와 보이지 않는 불평등이 수반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공평하지 않더라도 실질적인 자원의 분배에 이들을 참여시키는 것은 실존적임을 인정해야 한다.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인구 소멸국가로 지칭되며, 부족한 저임금 노동력은 이주노동자들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비정규직과 실업인구는 점증하고 있으며, 이는 기술발전에 의해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성원권이라는 기준만으로 사회 전체 자원을 배분하는 제도는 더 이상 올바른 정책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지금 여기 함께 있는 존재인 현존하는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 기준 개념의 지평을 확장해야 하는 것이다. 성원권이라는 집단의 폐쇄성은 배타적 성격으로 즉각적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 함께 산다. 이주노동자가 일군 농산물과 공산물로 우리는 식탁에서 식사를 하게 되고,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의해 배달 서비스와 경비, 청소 서비스를 받는다. 이 세계는 이들과 여기 함께 있다는 명확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며, 이것이 곧 사회적 의무의 강력한 근거이다.

 

이 세계 가치의 원천은 사회 전체의 것이다. 사회전체에 대한 과실에 대한 정당한 권리는 자본가나 노동자가 아닌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 배분이 불평등한 것일지라도. 불과 수년 전에 보편적 기본 소득이라는 개념이 한창 떠들썩했다. 나눔의 대상을 생각할 때 자신의 정체성이나 정치적 입장의 공유로 판단할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저 스치고 지나치고 부딪히는 불특정 이웃에 대한 사회적 의무라는 감각을 사회성의 원천으로 두는 공동체를 생각해야 하는 시대에 당면한 것이다. 과연 우리에 누구를 포함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관점의 대전환을 사유케 하는 간결한 저술이다. 낯섦과 수용하기 싫지만 내어주어야 하는 몫의 필요성을 과연 간과할 수 있는 것인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다. 분명 따뜻한 공동체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우리는 비좁은 열차 안 승객처럼 새로운 승객의 공간 요구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이다. 이같이 책은 새롭게 수립되어야하는 분배정치의 대안과 전략을 위한 실천적 사유와 내용의 귀중한 촉매제라 하겠다. 120쪽 남짓의 콤팩트한 저작이다. 편견이나 선입견,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잠시 지우고 순수한 관점에서 변화하는 시대의 공존과 공유, 공동체의 의미를 새롭게 사유해 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많은 독자들이 분배 정치란 무엇인가를, 그리고 기본소득이란 왜 요구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볼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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