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의미한 것을 자유롭게 내던지고 해진 갓 안에 한없이 상쾌한 여름 바람을 담는다.” 

- 87

 

세계의 이해(利害)관계에 얽매여 있지 않은데도 마음의 분주함과 심사의 사나움을 떨쳐내기 쉽지 않은 시절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그리는 선경(仙境)을 거니는 듯 봄 햇빛이 여유로이 비추는 산골 마을 비인정(非人情)의 세계를 향한 까닭이다. 아마 괴로움, , 사리사욕이 분출하는 인정(人情)을 벗어날 수 없는 도시를 떠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완전히 잊고 순수 객관에 눈을 맡긴 채 자연의 경치와 일체가 되는, 오직 존재하는 것은 마음뿐인 그런 무위(無爲)의 시간에 온전히 잠기는 순간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산속 구불구불한 길 위에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젖은 채 화구(畵具)를 메고 걷는 남자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을 바라보는 듯 취하게 한다. 남자는 화가이며 시인이다. 그는 산길을 걸으며 비인정을 다짐한다. 어떠한 이해(利害)의 밧줄에도 얽매이지 않는 집착으로부터의 해방, 고요의 세계로의 침잠을 통해 진정한 그림, 화가의 길을 찾는다. 나는 작가 소세키가 추구했던 예술의 지고(至高)를 향한 일본적 자긍심은 회피하며 읽는다. 오직 마음의 평정, 잠시라도 비인정(非人情)의 천지를 소요(逍遙)하고자 하는 읽기에 열중한다.

 

이제 빗길을 걷고 있는 남자에겐 괴로움이 없다, 그저 경치를 한 폭의 그림으로 보고 한 편의 시로 읽는 이에게는 오직 티끌만한 고통도 없는 산 속 종달새 소리와 노랗게 피어있는 유채꽃 군집만이 있을 뿐이다. 산길 모퉁이에 자리잡은 찻집을 경유하여 여장을 풀 나코이 마을 숙소를 향한다. 찻집에서 듣게 된 이혼하고 돌아 온 여인이 운영하는 산골 마을 여관, 근처의 조금은 넓게 만들어진 가가미가 연못과 산사(山寺) 간카이지, 내려다보이는 푸른 바다와 나무와 잡초가 우거진 자연은 신선의 마을처럼 모든 것이 분별의 자물쇠를 열고 집착의 빗장을 벗어난 아득한 고요함으로 가득하다.

 

화공(畵工)은 순간순간 마음에 닿는 세계를 열일곱자 하이쿠에 담아내거나 당시(唐詩)를 곁들이며 비인정의 풍류를 한껏 즐긴다.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꺾다보니,

한가로이 남산이 들어오네

採菊東鬱下 悠然見南山 - 22

 

장지문 밖의 밤 풍경 속에서 들려오는 천하의 춘한(春恨)을 모두 모으는 듯한 노래를 부르는 인물을 생각하다 잠 못 이루고, 오매(寤寐)의 경계를 소요(逍遙)하고 있을 때, 환영처럼 홀연히 나타난 여자의 그림자를 느낀다. 어떠한 양해도 없이 미끄러져 들어와 살금살금 걷는 여인, 이 낯선 여인은 남자의 심상에 맺혀진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그림 속 오필리아에 대입되어 마음뿐인 비인정의 세계와 대상의 선택이 불가피한 인정의 세계와의 절충, 그 모순 속의 조화를 향한 모델이 된다.

 

남자는 느낌없이 물체만 있으면 되는 그림, 물체와 느낌이 양립하는 그림을 넘어 제 3의 그림을 추구한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마음뿐인 그림. 그러나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던가. 그저 감흥에 빠진 마음을 얼마간이라도 전하여 다소의 생명을 어렴풋한 분위기로 보여줄 수만 있어도 인간 세계 최고의 그림이 될 테니 말이다.


 



남자가 수시로 드나드는 시적, 회화적 입각점(立脚點)에 들어서, 절로 떠오르는 심상은 선경(仙境)을 향한 그리움에 가깝다.

 

문득 고요한 하루 얻었으니,

백년이 분주한 줄 알았네.

아득한 심사 어디에 둘까,

멀기만 하구나, 신선의 마을 -95

 

사실 가까이 다가갔다고 여기지만 그저 찰나(刹那)이고 다시금 아득하게 먼 곳에 있는 것 같은 것이 이상(理想)일 것이다. 어쩌면 몽롱한 영적 시공에서나 가능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마치 이를 현실화하려는 듯한 여관 온천탕 장면의 묘사는 신경(神境)의 실재(實在)화 같아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남자의 마음, 그 정취에 몰입하게 된다.

 

비마저 흥을 돋우는 고요한 봄비가 내리는 산골의 탕 안에서 혼()까지 봄의 온천물에 띄우며 멀리서 들려오는 샤미센 소리를 무책임하게 듣고 있는 한 남자, 그의 앞에는 실내를 가득 메운 김이 가득 피어오르고있다. 그때 봄밤의 불빛을 반투명으로 흩뜨리며 목욕탕 가득한 무지개 세계가 진하게 흔들리는 가운데 몽롱하고...뿌옇게 하며 순백색의 모습이 구름 속에 점차 오른다....신대(神代)의 모습을 구름 속에 불러일으킨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타난 아름다운 여인은 노골적으로 들이 밀어진 것이 아닌, 모든 것을 그윽하게 만드는 일종의 영적인, 충분히 웅숭깊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직 마음인 그림을 그리며, 비인정의 세상을 만끽하려 산골 마을을 찾은 화공인 남자는 실제 단 한 장의 그림도 그리지 않는다. 그의 말처럼 화구 상자는 단지 취흥을 돋우기 위한 악세사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는 진정한 화가다, 훌륭한 화가라고 외친다. 작품화하는 순간 비인정은 사라지고 인정의 세계가 들어차기 때문이다. 이 가로놓인 거대한 아이러니를 왕래하는 것이 인간사가 아닐까?

 

작품을 읽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인정이라는 세속의 세계를 떠나 온 듯, 비인정이 그득한 시()와 수채화같은 풍경을 거니는 소설 속 침잠은 더럽혀지고 사나운 떼를 벗겨낸 듯 머리가 맑아진다. 이 작품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다시금 시 속의 사람도 아니고 그림 속의 나도 아닌 인정의 세계에 내 딛어야만 하는 이 불가피성이 고통스럽기만 하다. 거듭 소설의 세계 속으로 돌아가고픈 심정이다. 그렇다고 도연명처럼 내내 남산만 바라보고 있을 순 없을 터. 현실로 돌아와 이렇게 감상을 남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폴 크루그먼, 좀비와 싸우다 - 나쁜 신념과 정책은 왜 이토록 끈질기게 살아남는가
폴 크루그먼 지음, 김진원 옮김 / 부키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공정책 비평가로 나선 경제학자들이 존경하는 경제학자로 불리는 폴 크루그먼의 보수주의 정책에 대한 강력하고 신랄한 논평집이다. 뉴욕 타임스20년 넘게 정치,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정책들을 중심으로 하여, 탄탄한 지적 배경을 토대로 탐욕과 편협, 거짓과 무지, 음모와 공작으로 버무려진 보수당파를 예리하게 분석, 비판하고, 국민들의 지성이 사실을 바르게 직시할 수 있도록 견인하는 총론집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이 대선(大選)전에 출간되었으면 더욱 시의적절 했을 터이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이 정권과 보수 극우당파들의 실체를 지금이라도 국민이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다면 아쉽지만 의의가 충분하리라. 표제처럼 그 논평의 대상은 좀비(zombies)’. 내게 좀비란 뇌가 비었거나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인간의 외형을 하고는 오직 자기 욕망의 방향을 향해서만 돌진하는 존재로 이해된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니 딱 작금의 한국에 극우화된 보수당파를 기술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어찌 이다지도 좀비와 하나의 당파가 같은 말로 정의될 수 있는지 놀랍기도 하다.

 

이 좀비들은 권력을 잡기만 하면 늘상 하는 짓이 있다. 부자 감세와 사회안전망 해체이다. 폴 크루그먼은 이 반복되는 뻔뻔한 불한당주의를 제 일성(一聲)으로 하여 비판의 논의를 연다. 보수 당파가 하는 짓의 유일한 정책이기 때문인데, 그 밖의 모든 것은 이 탐욕을 성취하기 위해 파생된 것들이다. , 이것에 그자들의 모든 이기심이 내재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것 외에는 그자들은 어떠한 정책도 내놓지 못하며, 잘못되거나 악화되면 남 탓을 해대며, 저열한 음모와 공작 정치로 빨갱이 놀이를 하여 국민의 시선을 돌리고, 바로 그 국민의 삶을 볼모로하여 정치 싸움으로 세월을 보낸다.

 

결국 이 책은 이러한 보수정치 집단의 이기주의의 신성화에서 비롯되는 각양의 우파 정책들이 안고 있는 파렴치를 경제적, 정치적 정연한 논리에 의거, 그 그릇되고 악의적인 행태를 규명하며, 본색을 혁파하는 논증들이라 할 것이다. 이 논평들이 싸우는 좀비는 부자감세 좀비, 사회보장제도 물어뜯기 좀비, 공기업 민영화 좀비, 불평등은 없다 좀비, 빨갱이다 좀비, 긴축 좀비, 기후변화 부정 좀비, 가짜뉴스로 진실을 호도하는 언론 좀비 등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등장한다.

 

미국 보수 우파정당인 공화당을 비판 대상의 기저로 하고 있으나 한국의 수구 정당과 사실 한 치의 다름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보수 우파의 이념을 그대로 식재(植栽)한 것이기에 본디 다를 수가 없는 태생적 동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군정(美軍政)의 역사로 시작되는 수구정당의 역사를 여기서 새삼스레 논의하지는 않겠으나, 폴 크루그먼의 비판 내용을 우리의 것으로 이해하고 동의 할 수 있는 역사적이고 현재적인 이유인 것이다.

 

 

이미 검찰이 장악한 수구 정권은 대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감세 정책 실행을 발표했다. 이들이 하는 수작은 항상 같다. 박정희부터 이명박, 박근혜 시절에도, 한결같이 부자 감세를 최우선 정책으로 시행하면서 부자가 잘되면 국민도 잘살게 된다는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정당화했다. 크루그먼도 지적하듯이 이것은 실증적으로도 경제논리로도 한 번도 사실로 증명되지 못한 개수작이다. 부자 감세로 발생한 이익을 노동의 신규 고용과 시설 투자로 이어져 경제가 부흥할 것이라는 논리는 특권층인 자신들의 탐욕을 위장하는 허상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투자를 이끌어내는 요소는 사장 수요’의 인식이며, 기업의 본성상 감세조치와 같은 재정적 유인책에 결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결국 감세로 인해 발생한 이익은 부자에게 완전히 덤일 뿐이며, 고용투자에 아무런 명분도 주지 못하는 이 부가적으로 발생한 이익은 대부분 자사주식의 매입을 통해 자기 자산 불리기에 소용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부자 감세는 이 정책을 통해 살찌게 된 부자로부터 은밀하게 거대한 돈을 사취하려는 수구당의 오래된 탐욕에 터 잡은 것이기에 이들은 이 정책을 그 거짓됨에도 반복하는 이유이다.

 

더구나 감세로 이해 줄어든 세수는 국부(國富)의 채산이 맞지 않기에 어떻게든 균형을 맞춰야 하게 되는데, 국민의 안정적 삶이라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사회 안정 제도의 지출을 줄이려고 한다. 그것이 곧 건강보험 민영화, 한전 민영화와 같은 정부투자기관의 민영화 이전이라는 악질적인 정책이다. 그래서 이 불의한 정권은 뻔뻔한 거짓의 명분아래 시민의 정책적 대변 기관인 각종 민간단체에 대한 보조금을 없애거나 해체하는 짓을 거리낌 없이 실행한다. 이것이 일석이조인 것은 부자감세로 감소한 세수의 일부를 시민의 입을 틀어막음으로서 보전하는 것이다. 세출도 줄이고, 권력에 비판적인 입도 막는 교활성, 악질성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보수 당파란 구속받지 않는 사리사욕 추구가 번영과 행복의 열쇠라고 주장하는 말종 집단이다. 타자를 위해 작은 희생의 감수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파렴치한 탐욕의 정신, 이것을 정의와 공정이라 말하는 족속이다. 크루그먼의 보수 당파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규정이다. 보수주의가 국민 대다수를 희생양으로 삼아 부유한 특권층에 이로운 정책을 펴나가는 이 편집증적 사고방식에 한국 사회의 언론은 이 정책이 얼마나 국민에게 해로운 것인지 아무런 정보도 전하지 않거나 하지 않는다.


 



사실 보수 세력이 이러한 행태를 겁 없이 반복하는 이유는 무지한 국민, 진실을 알려는 국민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기초한다. 우경화는 항상 우매한, 무사유의 국민을 토대로 한다. 그리고 이들의 행태가 새롭지도 않은 것이 수십 년 간 이 자들이 걸어 온 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부패, 정략적 무지, 음모이론, 협박..., 조작, 부하뇌동..., 이들은 그저 사악한 이념만 쫓는 게 아니다. 현재로서는 사악한 존재 그 자체다!(221)” 이익을 쫓고,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 자기이익을 구하느라 온갖 진실을 부정하는 행위에 익숙한 집단인 까닭이기도 하다.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거나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경제적 파국으로 이끈다고 주장하며 정책 발안자를 빨갱이로 내몰기까지 한다. 전 정권을 빨갱이 정권이라 규정하는 극우화된 한국의 수구 정권은 소위 자유시장 경제 + 복지국가는 빨갱이 국가, 즉 사회주의라 왜곡한다. 폴 크루그먼은 이와같은 전형적 국가로 유럽의 부유한 국가인 덴마크를 예로 든다. 시민의 자유가 보장되고 불평등이 가장 적은 이 시장자본주의 국가가 빨갱이 국가인가하고 되묻는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완전히 다른 체제이다. 수구 세력은 이 둘의 차이를 흐리게 하여 건전한 복지 정책, 사회안전망의 구축을 방해한다.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리사욕을 채울 욕심에 국민의 삶이나 문명도 기꺼이 위험에 빠뜨릴 위인들이라고 맹공을 가하는 크루그먼의 비평에 체증이 다 내려가는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사회민주주의는 시장경제이며 탄탄한 공공 사회 안전망을 갖추고 기업 이윤을 쫓아 경영 전략을 세울 때 그 범위에 일정한 제약(공공기업, 독점규제 등)을 가하는 규정을 마련해 놓은 체제를 말한다.

 

만일 지금의 수구 정권이 말하는 빨갱이시선으로 판단하게 되면 서유럽의 모든 국가가 빨갱이 국가가 되고 만다. 크루그먼은 시민 여론을 조사하여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이 빨갱이국가라고 하는데 전국민 건강보험제도를 실시하는데 찬성하겠느냐고 묻는다. 시민들은 그렇다면 보수정당이 말하는 빨갱이여도 좋으니 실시하여야 한다고 답했음을 지적하며, 보수 당파가 주장하는 공포전략의 구사가 얼마나 파렴치한 것인지를 비판한다.

 

한국전력이나 건강보험공단은 민간 기업처럼 서비스나 제품을 새로이 창출하여 수요를 늘리는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 아니다. 이것은 국민의 생활 안정과 빈부의 차이를 불문하고 형평적 삶의 보장을 위해 기꺼이 공공성을 우위에 두고 정부가 지원하는 정책적 공기업이다. 수구 당파는 경영효율이 악화되어 적자가 늘어났으니 민간기업으로 이전하여 효율을 추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렴치한 말이다. 특권층에 천문학적인 거대한 혜택을 주고 그곳으로부터 막대한 돈을 받아내려는 추악한 욕망이외에는 없다. 내부 효율을 감독 통제할 권력을 국민으로부터 대리한 정권이 탁월한 공기업 리더를 등용하여 실천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지, 이를 민간에 팔아먹어 배를 불리라 한 것이 아니다. 외부 효율이 존재하지 않는 공기업의 특수성을 고려치 못하는 이 무식하고 냉혹한 수구 우파의 더러움은 어떻게도 국민이 막아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메디칼 케어(medical care; 일종의 국민건강보험)의 실시가 반쪽자리나마 실행되는 데 온갖 적의를 가지고 반대하는 미국 공화당의 실례는 이들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 한국인들에게 충분한 반면교사가 되어 줄 것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이들 우경화된 보수 집단의 실체란 것이 무엇인가는 사실 파악할 것도 없다. 자신들의 정치적 위기가 올 때면, ‘진정한 보수주의로 거듭 나겠다고 속이 텅 빈 말을 부르짖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 보수주의란 것이 이기주의 신성화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온난화 등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이면의 추악한 돈의 집착 논리부터 부정직이 떨치는 그 더러운 왜곡의 힘에 이르기까지 좀비와의 투쟁이 장장 600 여 쪽을 채우고 있지만, 요즘 한 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작태와 그 궤를 같이하여 읽게 되는 또 하나의 싸움에 대한 비평으로 감상을 맺어야 할 것 같다.

 

도어 스테핑에서 보이는 태도를 보자. 정권의 무능력과 법치의 경멸, 권위주의 행태, 정치 검찰로 도배질 된 행정부 기관 등등에 대해 비판적 질문을 하면 무조건 무시하며 마치 반역자의 말이기라도 한 듯 소리 높여 질시하기까지 한다. 검찰 권력을 앞세워 초법적 권력을 행사하는 무법의 권위를 내세우기까지 한다. 여기에 특권층의 이익집단인 조중동 황색신문이 결탁하여 비뚤어지고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여론을 호도하고 정치가 이처럼 막무가내의 내리막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좀비가 이 사회 곳곳에 포진하여 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끌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어용(御用) 학자들까지 가세하여, 한 쪽이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음에도 마치 자신들만은 중도의 균형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거짓된 등가성(false equivalence)’의 태도를 표명하곤 한다. 논쟁을 벌이는 양쪽을 똑같이 대하는 양비론은 사실 저세상 논리의 다름 아니다. 미국인들은 이를 행성 형태 다르게 보기라 부르는 모양이다. 이 기계적 중립주의는 위선이며, 기회주의이고, 정치 논쟁을 무슨 연극이나 문학비평 다루듯 하는 엉뚱한 경향성이라 할 것이다. 이제는 Covid19의 방역과 관련하여 국민건강 안전을 정치화하여 뚱딴지같은 과학방역이라는 유치하고 천박한 논리를 내세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책임과 무관심의 전형적 보수 특권층의 본색을 유감없이 발휘하기까지 한다. 각자도생의 원칙, 역시 이기주의의 발현이다.

 

우파 정치꾼들이 점령한 지금의 한국 정치에는 그들, 특권층이라는 보호막 밖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이 보이지 않는다. 시민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말하고 생각하며 행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까짓 하찮은 9급 공무원 마음대로 취직시킨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죄책감 없이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 인식의 눈을 갖지 못한 이 어둠의 극우 정파에 대한 실체20년의 살아있는 정치현장에서 함께 숨 쉬며 그 터무니없는 거짓말의 향연을 냉정한 논리로 비평하는 이 책에서 오늘의 한국 사회의 동일 유사성을 바라보는 것은 참담함이며,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시민들, 독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하는 시국에 놓여있음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다 없애버렸다고 여겼던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소리가 어디선가 망령처럼 다시금 튀어나오기 때문에 바퀴벌레 발상이라 비유하듯 어렵게 선취한 민주주의와 시민적 자유의 삶을 퇴행시키지 않기 위해 필히 참조해야 할 먼저 경험한 공공정책 학자의 이 실증적 논평집을 귀감으로 삼아야 할 이유가 충분함을 발견할 것이다. 악의적이며 탐욕적인 수구파 주장의 무식과 뻔뻔함을 깨부수는 풍부하고 지적인 논리로 가득하다. 그 위선으로 가득찬 허상을 무너뜨리는 진실의 논리를 통해 우리 삶의 안전성을 위한 시민적 책임을 또한 각성하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시원하고 후련한 비평과 함께하는 모처럼 너절한 세계에서 벗어나는 느낌이다. 부디 많은 독자들이 이 위대하고 예리한 통찰과 함께 하기를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 논쟁 - 주제 : 자유의지, 처벌, 응분의 대가
대니얼 데닛.그레그 카루소 지음, 윤종은 옮김 / 책세상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유의지, 처벌, 응분의 대가를 논의의 중심으로 하는 두 철학 거장의 논쟁이다. 한 사람은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없다고 보는 자유의지 회의론자그레그 카루소(이하 카루소라 함)’이며, 인지 심리학자로 국내에 잘 알려진 대니얼 데닛(이하 데닛이라 함)’은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자유의지 양립가능론자이다. 사실 이렇게 단순 명쾌하게 논쟁자들의 신념을 범주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 논쟁의 첫 번째 주제인 자유의지조차도 하나의 의미로 정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 특히 관념적 언어의 경우 어쩌면 십인십색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는 이 두 논쟁자의 경우에는 언어의 해석과 정의의 문제에서부터 논증 내용의 작은 모순이나 흠결(欠缺)조차도 그저 넘길 수 없는 첨예한 논의의 대상이 되곤 한다. 3부로 구성되어 각 주제별 논의를 심화하고 있는데, 그 격렬함으로 인해 각자의 논증 중에 비웃음과 경멸, 모욕이 점잖음 속에 예리한 칼날처럼 상대의 심중을 헤집는다. 상대의 주장에 대한 빈정거림과 자기주장을 강변하는, 이를테면 내 견해는 뼛속까지 결과주의적이라는 식으로 혐오의 반론을 전개하기까지 한다.

 

사실 실질적 논쟁에서 두 토론자가 어떤 합치된 견해로 수렴하는 일은 결코 발생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책을 읽기 전부터 예견되었던 것이다. 자유의지의 존재를 굳건히 믿는 자가 자유의지가 없다고 설득되거나 그 반대의 상황이 발생하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 게다. 책의 전체적 논지를 단순화하여 정리한다면 인간 개인의 도덕적 책임의 소유 여부에 따라 제도적 규범, 즉 법에 의한 단죄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격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판단도 분명 양분될 것이며, 이로부터 그 감상의 글도 전혀 다른 결과를 보일 터이다.

 

데닛의 주장은 과거의 사실과 자연법칙이 하나의 미래를 가져온다결정론자연, 사회, 환경에서 주어지는 자극에 합리적으로 반응하는 능력으로서 자유의지가 양립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카루소는 사람은 자유의지를 지니지 않거나 적어도 그 존재를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없으며, 행위자가 통제할 수 없는 인과적 결정인 결정론은 절대 양립 불가능하다는 강한 양립 불가능론을 주장한다. 이 논쟁의 초석적인 두 입장에서부터 자유의지에 대한 정의는 서로 다르다. 데닛은 대개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자극에 대한 합리적 반응의 주체로서 사람을 보는 것이며, 카루소는 기본적인 응분에 따른 칭찬과 비난, 보상과 처벌을 받기위해 갖춰야하는 행동 통제력을 자유의지로 보고 있다. 사실 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관련하여서는 카루소의 정의가 내겐 더 합리적으로 다가온다.

 

카루소의 정의를 지지하는 까닭은 이후 도덕책임의 발생과 관련한 결과주의와 계획주의 논의는 물론 사법제도와 형벌에 대한 정당성 문제를 거론하기 위해서는 응분행동 통제력

중대한 철학적, 윤리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데닛은 이 정의에 이의를 제기하는데, 응분과 통제력 개념을 거부하는 것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목적으로 타당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겐 데닛이 도덕적 책임 부과에 대한 가장 악질적 이념인 응보주의라는 낙인을 사전에 회피하려는 것으로 의심을 갖게 했다. 응보주의란 오직 범죄자가 저지른 행동에만 관심을 지니는 응분의 책임이라는 처벌 정당화 이론이다. 이것은 미래의 좋은 결과를 극대화하거나 사회 안전 강화, 도덕적 교화를 통한 선()의 확대는 무시하고 응분에 따른 처벌만을 주장한다. 이러한 의심은 카루소도 데닛으로부터 거듭 발견하게 되는데, 완화하여 준()응보주의자가 아니냐고 확인하지만 데닛은 이에대해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표시한다.

 

데닛은 모든 인간은 자신의 판단과 분별력이 침해되거나 조작되지 않도록 주의할 책임을 져야하며, 이것은 성장 과정에서 충분히 자질을 배양하여 마땅한 도덕적 책임을 지는 인간이 되어야 하며, 또한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신의 한 행위에 대해서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하며, 사회적 합의라는 계약주의에 의해 성립된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응보주의에 근접한 논리로 보이지만 데닛은 이를 부정한다. 이것은 결과주의라는 회고적 비난과 처벌의 개념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지 응보주의에 의한 주장이 아니며, 더구나 긍정적 부가 효과 없이 처벌하는 응보주의와 달리 자신은 범죄자의 긍정적 개정을 상정하고 있으므로 같지 않다는 것이다.

 

운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 -39

 

카루소는 데닛의 이러한 주장, 즉 주체적인 사람은 자신이 한 일에 마땅히 책임을 져야한다는 논리를 거부한다. 모든 인간은 구성적 운현재적 운에 지배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구성적 운이란 어떤 가정에 태어날지, 어떤 장점과 재능, 성향, 신체적 특성을 타고날지 알 수 없는 운을 의미하며, 현재적 운이란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간주되는 행동이나 결정을 할 때 행위자의 기분, 우연히 든 생각, 주변 환경의 상황적 특성 등에 영향을 받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행위를 선택 결정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개체마다의 불평등성에 기초하여 인간 개체에게 도덕적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부당하며, 따라서 이는 도덕적 책임이 들어설 자리를 허물어뜨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카루소 주장의 배경에는 운에 의해 조성된 인간 개체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기초하여 응분이라는 도덕적 책임을 씌워 징벌을 정당화하는 것과, 인간을 가혹하게 모욕하는 방식으로 다루고 그 불평등을 항구화하는 일을 합리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반박의 논리가 있다. 이에 더해 카루소는 당신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당신은 혼자 힘으로 그 자리까지 오른 게 아닙니다.”고 하는데, 데닛은 이 발언이 위협적이라고 비난한다(60). 여기서 두 논쟁자의 신념의 커다란 차이를 목격하게 된다. 공정성을 주제로 담론계를 달궜던 능력주의에 대한 불평등성의 문제에서 데닛은 능력주의가 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를 대변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논쟁점을 모두 거론하는 것은 감상문의 목적도 아니기에 가장 치열한 논쟁 부분인 처벌과 도덕, 응분의 대가와 관련한 논의에 대한 소감으로 맺어야 할 것 같다. 아마 이것을 이렇게 정리해도 될 것 같다. 동일한 인간의 동일 범죄에 대한 처분, 격리와 감금의 좁혀지지 않는 차이의 논쟁이라고. 카루소는 기본적 응분이라는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 자유의지회의론에 기초한 공중보건격리모형을 제시하며, 자유의지 없이도 사회의 도덕적 질서 유지와 안전, 나아가 선의 지향이 가능함을 역설한다. 이 모형의 주요 내용은 기본적 응분에 따른 도덕적 책임부과는 있을 수 없으며, 전염병 보균자가 병에 걸린 것이 걸린 자의 책임으로 물을 수 없듯 범죄자 또한 기본적 응분에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토대위에 피해 예방 차원으로 범죄자를 무력화하는 일과 격리는 정당한 것이며, 이를 시행할 때 사회 안전을 지키기 위한 침해원칙을 준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갱생과 사회복귀에 초점을 맞춘 격리 등과 같은 무력화 방법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응분이라는 관념이 형사사법제도의 과도한 징벌성을 정당화하여 불평등에 기초하여 인간을 고통에 빠뜨리는 오늘의 처벌 체계에 대한 전면적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데닛은 이러한 카루소의 근본적 열망은 적극 지지하지만, 인도적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처벌이 필요하다고 현실의 실제성을 들어 반대한다.

 

특히 범죄 행위가 없음에도 사회일원에게 일종의 도덕적 엄벌의 경고를 위해 강력한 징벌을 가해도 된다는 결과주의적 이론을 데닛은 강력하게 주장하며,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이용한들 무엇이 문제냐고 항변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효용을 위해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하여 범죄를 억제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주장이며, 여기에는 도덕이란 사회적 활동의 산물이며, 인류의 오랜 문명적 진화에 의한 위대한 발명의 설득의 장이라는 제도적 수호를 위한 당위성이라는 배경이 있다.

 

데닛은 사회의 안정적 질서의 존속을 위해 점진적인 형사 사법제도, 즉 처벌의 형식에 대한 개선을 주장한다. 또한 처벌이 없는 공중보건격리모형에 의한 격리와 무력화 제도에 반대하며 공상적인 유토피아에 불과한 헛소리라고 경멸한다. 반면 카루소의 주장에는 인간 존재에 내재된 불평등성을 불식시키기 위한 집요한 노력이 있다. 그는 개인적 요인보다는 사회 구조적 요인을 중시하며, 인간에 대한 도덕적 신뢰가 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데닛은 이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 인류의 모든 도덕적 규범이나 정치 제도는 끊임없이 변화되어 온 것이다. 19세기에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고 노예 해방을 주장하는 사람은 급진적 이상주의자로 내몰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도덕적 질서일 뿐이다. 무엇이든 기존 질서에 변화를 요구하면 그 낯섦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항과 부정, 혐오의 시선을 보내곤 한다. 18세기까지 도심의 한복판에서 죄수의 목을 공개적으로 자르는 것이 하등 도덕적 문제가 아니었지만 오늘날 국가가 이러한 행위를 한다면 그 야만적 퇴행행위에 대한 비난을 버텨내기 어려울 것이다.

 

도덕적 이상주의라거나 현실적 실현 가능성이 없다거나, 사람들이 강제 없이도 국가의 지시만으로 자율적으로 격리를 지킬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오류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의 경우 대다수의 시민은 스스로 자가 격리에 임했으며, 불응자의 경우 적절한 전향적 무력화의 행사를 한 사례가 있듯이 극한적 개인주의화된 서구사회의 모델에 경도되어 수구적인 가치에 구태여 집착할 이유는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물론 두 논쟁자 어느 한 쪽의 견해가 모두 옳지 않거나 옳은 것은 아니다. 반드시 자유의지의 존재 유무를 판단치 않아도 도덕적 책임과 그에 대한 처리는 결정론이나 비결정론적 회의주의든 모순 없이 수행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데닛의 제도 수호론적 주장의 일부를 참조하여 카루소의 이상적 신념을 위한 개혁이 우리 인류의 바람직한 도덕 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논쟁이 격화될수록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 '그게아니라(rathering)'의 기만이라는 둥 논증을 벗어나는 비난과 상대 의견을 격하시키려는 수사법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러한 생동감있는 논쟁의 현실성이 독자를 그 격전장으로 몰입케 하여 어느 한 쪽의 입장에 서게 하지만, 논쟁자들의 사유와 논거로부터 발견하게 되는 도덕적, 정치적, 윤리적 지식들은 실로 많은 삶의 유익을 제공한다. 단지 철학적 논쟁을 담아낸 책으로 대하기보다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어떻게 모든 구성원이 함께 행복을 증진시키고 차별없는 평평한 세계를 만들어 낼지를 생각하는 모처럼의 흐뭇한 자기 충전의 기회가 되어 주는 간결 명쾌하면서도 전문성을 지닌 윤리학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가히 진짜배기 논쟁의 정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두를 파괴할 힘
이경희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 23...소셜 네트워크의 이용에 능숙한, 즉 자신들의 행위를 이벤트화하여 무릇 무심한 대중의 시선을 모으는 데 익숙한 발랄함과 패기를 차용하여 던적스런 세상의 변화를 시도하는, 일견 1968년의 혁명을 잇는 언뜻 무모해 보이지만 인류의 새로운 삶의 설계를 위해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걸음의 의미를 펼쳐내고 있다.

 

그렇다, 이 소설은 보통의 인간들이 지니지 못한 능력을 지닌 이들을 중심으로 소외된 인간들이 펼쳐내는 혁명의 이야기다. 그것은 제목처럼 모두를 파괴하는 힘의 실현으로서 세상을 파괴할 힘이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진 세계, 그러기 위해서 부와 권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너희들도 전부 잃어봐야 이해할 것인지를 묻는, 혁명의 시간이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그 목소리는 열 번을 실패해도 열한 번의 실패를 기다리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저 한 걸음의 행보일지언정 그 속에서 작은 변화가 하나씩 이루어짐을 발견하는 희망의 전언이다.

 

계속 발버둥 쳐. 너희의 세상을 만날 때까지 몇 번이고 부딪치고 또 부딪쳐 (....) 언젠가 세상은 달라질 거야. 달라질 수 있어.” - 288쪽에서

 

아주 묵직한 진리의 메시지가 울려 퍼진다. 전개되는 혁명의 주체들이 겪게 되는 온갖 기만들과 모순, 이기심을 부양하는 무지(無知), 무사유(無思惟)에 터 잡은 맹목적 믿음, 탐욕과 악의가 가득한 세계가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세상은 원래 불합리하고 고통스러우며, 아무리 노력해도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조금 다르게 세상을 보게되면 세상의 접힌 뒷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밀어넣는 이 세상을 멈춰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상상하고 그 실천적 사유를 함께 해보는 여정이 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접하는 혁명의 현실은 우리네가 얼마나 견고한 인류의 악과 대적해야 하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것은 아마 다음의 문장과 같을 것이다. 이 오랜 인간의 악의가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을 내어 줄 것이라 여기지 말라는 주문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성의 가장 깊은 밑바닥 아래에 얼마나 참혹한 폭력들이 파묻혀 있는지를, 수만 년의 역사를 거치며 악의를 가다듬어온 인류는 (...) 도덕 밑에 은밀히 파묻어 후세에 대물림하기를 반복해왔다.” -243쪽에서

 

소설 속 주인공들은 데비안트(Deviant)라는 범주화 된, 사전에는 ‘~에서 벗어난의 의미를 가진 재능의 소유자들이다. 이들은 사람간의 심리적 연결능력인 텔레파스, 공간을 뛰어넘고 군사적, 산업적 물질과 함께 이동할 수 있는 점퍼, 일종의 염력으로 물체에 의도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키넨시스, 그리고 투시능력으로서 세상을 모든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는 보이안트라는 네 가지 능력을 각기 발휘하는 보통의 인간들과는 다른 능력이 발현된다.

 

이들의 변이된 능력은 핵물질에 피폭된 인간들 중에서 발현되는, 즉 인간사회의 무지와 악의에 의해 피해를 입은 소외된 존재들이다. 사회는 자신들과 다른 이들 데비안트를 격리, 차별하면서도 자신들의 안보상 무기로 활용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한다. 정상적 교육은 물론 대학에 진학할 수 도 없으며, 직업을 가질 수도, 인간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데 온갖 제약을 받는다. 시간적 배경은 2036년을 전후한 근()미래다.

 

각 국가들은 데비안트인 소년 소녀들을 격리된 섬에 가두어 육성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육이라기보다는 강요된 규율의 주입과 먹지 못할 음식으로 연명시키는 극악의 장소이다. 그리곤 이들에게 데비안트의 발현 능력에 따른 등급을 부여하고 고착화시킨 후 서열화하여 시기와 질투로 구성원 내 격렬한 경쟁을 가속화시켜 끔찍한 지옥의 환경을 조성한다. 텔레파스 능력을 지닌 10대 소녀 신화경은 데비안트들의 차별이라는 결코 변하지 않으려는 절벽같은 세상에 변화의 희망을 당기기 위해 분신자살하는 어머니의 희생 뉴스를 보게 되고, 기성 질서에 저항을 실천하는 동갑내기 데비안트 조유영과 우정을 쌓게 된다.


 



파리, 홍콩 등지가 기성 질서에 저항하여 새로운 세계, 변화를 향한 소외된 이들의 투쟁지로 등장하는 것은 아마 작품에 현실감을 부여하려는 작가의 의도였을 것이다. 68혁명과 홍콩 시민의 민주화 운동, 그리고 1871년 파리 민중들과 노동자가 부패한 권력에 대항하여 자율적 시민정부를 수립하였던 파리코뮌의 정신은 이 소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다. 그래서 신화경, 조유영을 비롯한 키넨시스인 레이리, 보이안트인 하태빈, 그리고 국제원자력기구인 IAEA에 데비안트를 추가하여 국제적 규제질서의 범위에 포함시킨 IAEDA의 스파이인 (소셜 네트워크 닉네임 PD)’, 5명은  3 파리 코뮌이 활동하는 파리를 향한 장정에 오른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신화경은 허브로 불리는 델레파스 능력의 소유자이자, 무수한 사람들의 심리적 연결로 무의식적 통제와 교감을 할 수 있는 슈퍼 데비안트 급 텔레파스로서, 그녀의 의도 여하와 무관하게 사람들은 그녀의 심상에 매료됨으로써 데비안트의 자연적 리더로 추대된다. 4부 구성에서 2혁민이들, 3예카테린부르크는 이들 5인이 서울 발 파리 행 열차를 타고 가면서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혁명의 불씨를 지피고, 마침내 변하지 않는 세상을 멈춰 세워 새로운 세계로의 혁명을 시작하는 예카테린부르크 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와 혁명아들의 절박한 투쟁의 장면들을 담고 있다. 데비안트와 그 밖의 소외된 이들로 운집한 10만 명이 넘는 인간들, 이들의 활동은 생생한 화면에 담겨 소셜 페이지를 실시간으로 장식하고 세계 인구의 절반은 이를 게걸스럽게 탐닉한다.

 

혁명을 위해 모여든 데비안트를 비롯한 엄청난 인간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사상 유례없는 스펙터클로서 안방에서 해시태그나 다는 인간들에게 기막힌 엔터테인먼트로 소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질서를 지배하는 기득 권력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혁명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동력이다. 사실 우리네 삶의 거의 모든 현상이 이러한 모순 속에서 진행되고 있을 터이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인식되지 않는 그 터무니없는 것이 양립하고 있다.

 

혁민이들(혁명하는 민들레들)이 예카테린부르크 역에서 혁명운동을 시작하는 시기가 2036년인 것은 68혁명이 일어난 지 68년이 되는 해라는 것은 상징적이다. 68혁명의 주체랄 수 있는 기 드보르의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일명 제4 인터내셔널)이 스펙타클이라는 온통 쇼로 둔갑한 거짓된 오늘의 세계인 온실 속에 갇혀 지내며 자신이 갇힌 줄 모르는 현대사회의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상처를 내 돌아보게 하려 했던 것을 승계하는 혁명임을 말하려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들 수 십 만 명에 달하는 혁명군중, 특히 미사일 발사 체계조차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데비안트들과 이들을 연결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텔레파스 능력자인 화경의 행동에 위협을 느낀 각국을 대표한 IAEDA는 협상을 요구하고 대표자를 파견한다. 협상을 위한 혁명군중 집단들의 안건을 모으기 위한 과정은 아마 인간의 너절한 이기심의 전시장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묘사되고 있는데, 수긍의 머리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모두가 다른 방식으로 혁명을 바로보고 있었다. (...) 사람들은 각자 다른 세상을 산다. (...) 요구는 끝이 없었고 자신의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 자존심뿐인 헛똑똑이들은 사소한 문구 하나하나를 물고 늘어지면서  끝도 없이 논의의 초점을 흔들어댔다.”

- 250, 327쪽 등에서 부분인용

 

100명이 100가지 주장을 하며, 협상 안건에서 거절되었을 때 혁명의 대표자를 향한 그 거침없는 야유와 비아냥, 조롱, 멸시, 혐오와 증오는 오늘의 인간 세계가 왜 이처럼 어리석고 못났는지의 반면교사일 것이다. 서로 발목을 잡고 있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세계, 결국 정의가 힘이 아니라 힘이 정의가 될 수밖에 없는 세계를 인간들 스스로가 만들어내고 있음의 비판일 것이다.

 

92일간의 혁명 군중의 동력은 협상이 지연되는 만큼 분열과 반목, 그리고 이탈이 시작되기 시작한다. 지도자 없는 혁명을 실천하는 화경은 현실과 이상, 실현과 배제의 길목을 굳건히 지키고 세상의 변화를 위한 시도에서 뒷걸음치지 않는다. 우린 너도 나도 세상이 잘못 됐다는 주장에는 흔쾌히 공감한다. 그러나 해결하여야 할 문제와 마주하면 그야말로 십인십색이다. 어떤 정책안이 수립되어 제시되면 결과를 놓고 모두들 자신의 한 마디를 얹으며 쉽사리 품평하고 조롱하기 일쑤다. 아마 소셜 미디어의 타임라인을 보면 파리 떼처럼 모여들어 헤아릴 새도 없이 빠르게 복제되는 냉혹한 손가락들이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잡아당기는(369)” 꼴을 보지 않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혁명을 좌절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살포되는 가짜정보가 진실을 덮는 장면은 오히려 현실보다 순수하기까지 하다. 지금의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정부가 들어서기 전인 지난 5년간 조중동 등 황색 매체들의 행태는 이것을 훨씬 넘어서는 파렴치하고 저열한 것들이었다. 소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조금씩 우습고 혐오스러운 존재로 격하시킨다. 분란을 조장하고 명분을 쌓으려는 목적, 그리고 무지한 우민들에게 전투 의지를 불사르기 위해서, 마치 정의로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라며, 적은 악당이라고 (448)” 자신들의 기득권 집단을 지키기 위해 못할 것이 없는 것이다.

 

소설의 1부와 4부는 혁명 군중을 공격하는 지배권력의 무참한 살생의 현장을 피해 그 많은 데비안트들 중 고작 5명의 생존자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조한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벗어나 달에 불시착해서 벌어지는 생사의 기만적인 에피소들이 전개된다. 화경을 살해하려는 IAEDA의 스파이, 새로운 변화의 혁명을 시작, 지속시키기 위해 화경을 보호하려는 존재들이 벌이는 최후의 싸움, 그리고 핵폭탄이 날아가고 허물어져 가는 세계를 바라보며 증오를 담아 중얼거리는 혁명이 다시금 시작된다.

 

, 이제 눈을 떠. 혁명의 시간이 다가왔어!” 이 마지막 문장은 누구를 향해 발화되고 있는 것이겠는가! 이 소설은 본문이 끝나고 에필로그와 책의 가장 끝에 있는 쿠키까지 모두 꼼꼼히 읽어야 작품의 전모가 규명되는 작품이다. 이 세상을, 우리 인간을, 군중을 이해하고, 혁명의 실천을 강렬한 생동감과 함께 지적으로 지펴낸 바로 오늘의 초상일 것이다. 만일 모두가 평등하게 핵폭탄을 지니고 있다면 힘이 정의인 세계가 정의가 힘인 세계로 바뀌지 않겠냐는 작가의 말은 결코 예사스럽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능력주의를 공정이라 주장하는 자들은 이 작품을 읽지 말라. 만일 읽게 되면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카이브 취향 채석장 시리즈
아를레트 파르주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 쓰기는 인류의 발명 이래 고귀한 문명의 장치로서 인간 역사의 부조리를 끊어내기 위한 공분의 기록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처럼 끊임없이 삶의 현장으로 소환하여 현실 개선과 미래기획의 통찰로서 그 기능을 다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었음에도 집요하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의미로 왜곡, 장악하려는 세력의 시도 또한 그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가스실은 실재하는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특정 자료의 왜곡 배치를 통하여 가스실이라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는 식의 역사를 쓰는 자도 있다.  고통과 죽음의 실재성을 제거하여 자신들의 도덕적 결함 없음을 퍼뜨리려는 악의적 역사가가 버젓이 활개치는 것 역시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에 프랑스는 1990년  "반인도적 존재의 규모와 회의를 표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122, 주석22)"하는 게이소(Loi Gayssot을 통과시켜 문화공동체의 기억을 왜곡시키는 역사 쓰기를 엄단하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의 역사 쓰기 또한 이와 결코 다르지 않다. 자료의 출처와 해석, 그리고 그 배치를 자의적으로 배열하여 공동체의 기억을 방해, 훼손시키려는 자들이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실을 일그러뜨리고 더럽히면서 관련 사실을 기만적으로 이용하려는 역사 쓰기가 아니기 위해서는 역사는 어떻게 기술 될 수 있어야 하는가? 아카이브 취향이라는 이 작지만 밀도 높은 에세이는 바로 이러한 선택과 배제의 자의성에 의한 함정과 유혹의 벗어나기로부터 해석틀의 조건에 이르는 진정한 역사 쓰기를 성찰하고 있다.

 

"역사를 써야 하는 이유는 죽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과거를 이야기할 어법을 찾아내 '살아있는 존재들 사이의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152

 

세월의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는, 누군가가 읽을 것을 전제로 하여 써지지 않은 채 저장되어있는 18세기 형사사건의 고발장, 재판 기록, 심문 기록, 수사기록, 판결문 등 자료 한 장 한 장을 읽고 필사하며 질문하고, 해석틀을 만들어 좀처럼 역사 언어의 조명을 받을 일 없었던 존재들의 언어에 숨결을 불어넣는 역사 작업자의 충실한 역사 서술의 이야기이다.

 

또한 지배 담론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암살당했던 실재'를 규명하는 작업이며, 특히 공권력에 의해 강제된 진술에 의해 강요되어 끌려나온, 역사의 고려 대상이 된 적 없던 사람들의 파편화된 답변들이라는 실재로부터 의미와 특정 형상을 해독해내는 역사 기술자의 세부적 작업 방식에 대한 일종의 메타 역사서이기도 하다.

 

형사사건 아카이브는 그 자체로는 실재하지만 가공되지 않은 흔적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의 무수한 흔적에서 한 번도 역사의 대상이었던 적이 없던 존재들의 삶과 운명을 좌우하던 세계의 특정한 형상을 해독해내는 작업에는 실로 엄청난 곡해와 왜곡의 함정과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이에 더해 연구 영역이나 방향의 선택과 배제가 야기하는 애초에 결여된 역사 쓰기를 할 수 도 있다.  예로서 일상생활과 감정 구조에 주목하여 여성의 역사를 쓰기로 한 역사가가 마르크스의 관점을 배제하기로 하였다고 할 때 여성사에서 계급적 차이에 관한 논의가 빠진 총체적 사회의 역사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특정한 타자들을 배제하는 날조된 역사가 되고 만다는 점이다.




 

"역사를 쓰는 일은 불화의 확인 조서를 작성하는 일이다." - 61

 

지배 계급의 당위성을 주장하려는 의도를 지닌 역사 쓰기의 경우 대중의 반감이나 저항과 같은 권력 관계의 충돌을 외면한다.  역사의 흐름을 왜곡 수정하여 항시 지배 엘리트 계급의 절대 사회가 당연했던 것으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역사는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충돌은 역사가 생기는 장소이며, 이 충돌을 성찰의 동력으로 삼는 역사가 될 때   "인간의 비사회적 관계", 즉 인간의 그늘진 측면, 불화와 비극적 충동의 실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카이브라는 날 것의 자료를 읽고 필사하는 인내의 작업 속에서  "기존 형태의 자료를 재활용, 재조립하여 실재를 다른 방식으로 서사화할 가능성을 타진하는 작업(81)"'껍질 벗기기(depouiller)'라 부른다.  그리곤 비슷한 내용으로 모으거나 특별한 것을 분리하기도 한다. 또는 자료축적을 통해 어떤 형태 속에서 디테일을 연구할 수 있으며, 실재를 향한 특정 시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도박범의 죄를 연구하다가 경찰과 유흥계, 귀족층과 금융업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게 될 수도 있으며, 가난과 고통의 문제로 확대되기도 한다. 역사적 사료의 선택과 연구 영역의 설정은 동질적 자료들의 수집으로 시작되어 연결 목표로 이어지기도 하며, 때론 이질적인 것에서 촉지각을 깨우는 선물같은 사료를 접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카이브와의 거리를 상실하는, 흘러넘치는 삶을 이야기하는 문장들에 몰입하다보면 아카이브에게 질문하는 법을 잃어버리는 함정에 빠지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우려해야 할 것은 역사가 자신이 세워놓은 가설을 뒷받침해줄 것들에만 주목하는  '동일화(Identofication)'에 빠져 가설을 반박하는 자료나 아예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여 상상력과 사고력이 마비되어 터무니없는 역사가 출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사가는 자칫 아카이브를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삼을 우려가 상존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아카이브가 연구 테마에 넘치도록 정보를 내줄 때가 있어 그대로 역사책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아카이브의 사본에 불과한 무미건조한 역사가 되고 만다고 지적한다. 비평이라는 체에 걸러지지 않은 실증주의적 주석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재검토, 비평의 거리가 요구됨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 과정이 오늘 첨예한 역사적 갈등을 야기하는 지점이 아닐까를 생각게 된다. 인용은 결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찾은 인용문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용문을 찾는 것은 거의 항상 가능하다(94)"는 것이다.

 

"역사는 아카이브 베끼기가 아니다. 역사를 염두에 두면서 아카이브를 철거하는 것,

아카이브 앞에서 불안을 감추지 않는 것이다." -95

 

아카이브에서 선택한 것에 머물고 싶은 충동, 골라낸 것들을 하나로 엮고 싶은 마음, 픽션을 쓰고 싶은 마음에 포획되기 일쑤란다. 안다고 해서 피해지지는 것도 아니기에 아카이브에 집어 넣은 상황들, 상황을 둘러싼 일상의 어둠을 정밀하게 세공하는 작업을 위해서 역사가의 자기 경계는 세계에 대한 책임자로서의 역사가로서 절대 필요의 태도일 것이다.

 

"역사는 대립과 충돌의 결과를 공평하게 정리한 이야기가 아니다. 상호 이질적인 

논리들의 충돌 속에서 드러나는 실재의 불균질함을 감당하는 일이 역사다." -106

 

형사 사건 아카이브는 다른 어떤 아카이브보다 복잡한 담론을 휘두르는 공권력에 저항하는 보통 사람들의 운명을 두드러지게 드러내준다. 애써 짓누르려는 힘, 이를 떨치고 일어나려는 힘의 갈등과 대립의 이야기, 그리고 이들 진술 문장의 이면에서 말하고 있는 개인적, 사회적 전략들이 숨 쉬고 있다. 역사가의 해석틀이란 바로 이러한 것들을 현재의 가치 기준에 따라 재해석하는 관점이다. 역사가는 바로 이러한 자료들을 어떻게 읽었는지, 어떻게 선택하고 분류했는지 그 해석틀을 설명하여야 한다. 이를 투명하게 설명하지 않거나 못하는 역사 쓰기는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실이 좌초해 있는 아카이브의 베일을 찢고 앎의 불투명을 해쳐내어 가려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역사 쓰기의 과정을 세밀화로 그려낸 이 책은 지혜와 논리 사이, 감정과 혼란 사이에 난 좁은 길을 역사가가 어떻게 모색해야 하는 가에 대한 고귀한 사유이다. 실재하는 아카이브를 현재의 실재로 재배치하여 삶의 새로운 관계를 이해하고 포착하며 규명하는 역사 쓰기 작업에 대한 재치와 진지함이 어우러진 농축된 메타 역사 에세이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을 한 단계 성숙시켜 주는 책이라 하고 싶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등대지기 2022-07-23 19: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지만 봤을때는 밀도있는 책일거라 생각못했는데 필리아님 덕분에 기대되는 책이 생겼네요 ^^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 2022-07-23 19:39   좋아요 2 | URL
책은 저자의 도서관 자료 열람과 관련한 지극히 사적인 인상들과 역사 쓰기에 대한 신념을 교차하면서 짐짓 진지함의 무게를 덜어내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에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예상치 못했던 작지만 쏠쏠한 배움이 있는 책이었답니다. 등대지기님, 댓글 감사드립니다. 유쾌한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7-23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을 듯요.♡

필리아 2022-07-24 08:57   좋아요 0 | URL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틀을 밝혀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남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