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인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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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구라는 행성 위에 살아가는 인간들을 잠식한 세상의 모든 가치들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진정 인간 개체 하나 하나를 위한 절대적 필요인가? 인간 행위를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명령은 항상 올바른가? 소설은 아마 이런 물음을 요청하고 인간 세상의 윤리적 구조에 강렬한 의심을, 그리고 극단적인 실현의 양태(樣態)를 통해 엄청난 충격을 가한다.

 

이 작품 지구별 인간무라타 사야카의 흥행작이었던 편의점 인간을 계승하고 있다는 비평이 있지만, 내게는 인간 행위에 규정된 윤리관을 새롭게 정의한 사회를 배경으로 살의(殺意)가 미래로 생명을 이어가는 사회를 그린 중편소설 살인출산의 또 다른 변형, 아니 도래(到來) 전의 에피소드처럼 여겨진다.

 

나는 인간을 만드는 공장에 살고 있다. (...) 이곳은 육체로 이어진 인간 공장이다.

나 같은 아이들은 언젠가 이 공장 밖으로 출하된다.” -44

 

중학생 여자 아이 나쓰키에겐 자신이 사는 지구라는 세계가 자신의 별()인 것 같지 않다. 이 세계의 지식과 문화에 어떤 비판도 할 줄 모르고 그저 맹신하고 복종하는, 속물의 화신인 부모에게 고집 센 멍청이로 불리며, 어떠한 이해도 받지 못하는 소외된 아이다.  그녀에겐 이 세계가 번식력 갖춘 인간을 출하하는 인간공장 같기만 하다. 소설의 첫 문장으로 묘사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삼림으로 한 낮에도 밤의 조각이 사라지지 않는 웅장한 산속 외딴 아키시나의 집은 나쓰키가 유일하게 평온을 느끼는 공간이다.

 

매년 백종절이면 친척들이 모이는 곳, 여기서 만나는 사촌인 유우와의 만남은 나쓰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확인하며, 새로운 감각을 갖게 하는 즐거움의 시간인 까닭이다. 소녀와 소년은 지구별 인간(地球星人)’이 아닌 외계인(포하피핀포보피아 별)으로서 인간 세계를 바라본다. 세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대로 뇌를 발달시키고, 몸을 성장시키도록 강제되는 것에 두 아이는 순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자신들이 성장해서 독자적으로 온전히 살아남을 때까지 그러한 어른들의 세계에 복종하여야 함을 안다. 이러한 나쓰키에게 학원 선생의 성폭행이 저질러진다. 잘 생긴 낯 덕택에 학생들과 학부모들로부터 흠모의 시선을 한껏 받는 남자는 나쓰키를 유인하여 버젓이 악행을 저지른다. 아이는 이를 스스로 해결할 길이 없다.

 


학원 선생의 폭력을 엄마에게 말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어린 게 벌써 그딴 생각이나 하고라는 말과 함께 슬리퍼로 얼굴, 머리 등을 내리치는 또 다른 폭력이다. 이러한 나쓰키에게 어린 시절을 마감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아키시나에서 재회한 우유와 나쓰키는 최초의 섹스를 하고, 이들의 발가벗은 채 엉킨 모습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에 반응하는 어른들의 난리법석을 나쓰키는 이렇게 대꾸한다.

 

어른은 아이를 성욕 처리에 이용하면서, 아이가 자기 의지로 섹스를 하면 멍청이처럼

난리 법석을 떤다.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다. 세상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주제에.” -109

 

지구별 인간들의 자기기만과 타자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맹목적 윤리관에 대한 냉정한 혐오의 변()일 것이다. 시간은 20년을 훌쩍 건너뛰어 각방 쓰는 건조한 결혼 생활, 성행위 완전 배제, 가사 완전 분담을 계약 내용으로  결혼 생활을 하는 나쓰키와 남편 도모오미의 삶의 방식을 비춘다.

 

두 사람은 이 세계라는 보이지 않는 공장(Factory)’의 일원이 되는 것에 결코 세뇌되지 않는다. 이들은 공장으로부터 배제되지 않도록 끝없이 연기를 펼치며, 그들의 부모와 친척, 친구와 이웃이 믿는 공장의 일부가 되리라는 시선에서 도망친다. 여성의 자궁은 공장의 부품이며, 마찬가지로 부품인 누군가의 정소(精巢)와 연결되어 아이를 제조할 것”(126)을 엄중한 규칙이라 압박하고, 공장의 정상적 부품임을 끊임없이 입증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공장에 공헌하는 모습의 가장(假裝)된 어필은 그들의 부모에 의해 의심되고, 조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 비어 있는 아키시나의 산속 집에 홀로 살고 있는 우유가 있는 곳으로 도피하듯 탈주한다. 우유와 나쓰키가 어린시절 찾던 자신들을 데려가주기 위한 우주선, 즉 인간 굴종의 삶이 강요되는 지구별이라는 공장을 벗어나 새로운 감각으로의 이동 공간인 아키시나에서 외계의 감각을 가진 새로운 종으로서의 삶의 시도에 착수한다.

 

나쓰키를 비롯한 이들 세 사람은 공장의 노예인 삶, 죽은 거나 다름없는 인생으로부터의 도주를 시작하는 것이다. 세상이 말하게 하는 말을 자기 말이라 믿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으리라(234)”는 이들의 생각을 부정하기란 그리 쉬운 명제가 아니다. 언젠가부터 나 또한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그저 올바르다는 믿음에 저항하고 있으니 말이다. 실상 내 생각이라는 것이 집단의 지혜가 위임한 판결의 무기력한 집합소에 불과한 것 아닐까? 하는 것이며, 단지 이것들을 암송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소설의 대단원은 그야말로 당혹과 전복의 서사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체를 섭식하는 행위를 통해 공장의 질서에 반란을 일으킨다. 인간사회의 윤리의식에 철저한 의심, 강력한 반기를 전시함으로써 세계라는 인간 공장에 대한 종교적 맹신, 그 무사유를 뒤집어엎는다. 폭설과 산사태로 차단되었던 아키시나의 공간에 지구별 인간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들의 눈앞에 있는 전경은 벌거벗은 채 배가 산처럼 부은 세 마리의 낯선 종족이다. 그리곤 우주선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지구별 인간의 울음소리가 대기를 채운다.

 

그러나 이들은 지구성인들을 향해 괜찮다고 말한다. 당신들 안에도 우리들의 모습이 잠들어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매일 불어날 것이라고.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맹종하는 이 세계의 잔혹한 질서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신()인간이 늘어 날 것임을 선언하는 이 문장은 새로운 정체성의 존재에 대한 어떤 가능성의 희구처럼 보인다. 무라타 사야카는 의심을 잃어버린 사유(思惟)없는 이 세상을 향해 묵시적 외침을 계속 할 모양이다. 공장의 정상적 부품임을 입증하라는 세상의 강요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포하피핀포보피아주문, 번식 없는 감염의 확산, 자멸, 종말의 외침이 서늘하게 온 몸을 파고든다. 인간의 세계에는 더 이상 구원 같은 것은 없다는 웅변일까?




註1) 포하피핀포보피아의 의미: 나쓰키의 사촌 우유가 상상한 외계의 별이지만, 이 별은 인간을 도구화한 지구별의 윤리적 의심을 통한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존재의 상징적 표현으로서, 나쓰키, 우유, 도모오미 세 사람의 실천적 행위의 변신적 실체이기도 함. 즉 새로운 감각의 신인류의 은유적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임. 어원은 분명치 않으나 마법적 존재인 피핀과 공포증을 의미하는 포비아의 조어처럼 보이기도 한다. 


註2) 村田 沙耶香 (Murata Sayaka) :


무라타 사야카의 글쓰기는 인간을 길들여 온 모든 습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정신을 위해, 


너무 자명해서 증명조차 필요없으리라 여겨지는 이 시대의 보편적 가치들이 실은 아무런 토대도 지니고 있는 것이 없다는 그 맹목과 독단을 깡그리 전복한다. 


그렇게 해서 획득하는 것, 초인간적이고 비인간적인 신체 상태, 어쩌면 니체의 위버멘쉬가 되기위한 집요한 실천인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소설들은 이렇듯 변모의 예술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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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4 1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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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5 1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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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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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을 일회적으로 자극하는 수많은 미디어의 영상들은 저 먼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하고 무자비한 현실을 소비시키면서 자기들의 체제와 영역의 우월성이라는 안전성과 안도감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순간 연민과 동정, 분노를 느끼지만 이 역시 자기안도의 유희요 공모이며 자기기만을 넘어서지 못한다. 영상이 전달하는 비도덕적이고 파괴적인 실제에 분노, 공포, 동정심 등 온갖 감정을 느끼지만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안심한다. 감정의 찰나적 소비가 주는 즐거움으로 곧 휘발되고 만다. 더 이상의 감정적, 이성적 진전이 없기가 태반이다.

 

반면 이 문학적 서사는 이러한 기만적 환상이 아니라 우리를 생생한 현실, 무서운 현실, 보지 못하는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파악과 나아가 인간이란 진정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 즉 사유와 실천적 숙고로 이끈다. 할레드 호세이니가 대면시키는 언어의 힘은 액정 화면의 영상처럼 화면 속 현실에 대한 감염의 배척이나 쾌락적 소비가 아니라 소설이 구현하는 현실에 풍덩 빠뜨림으로써 독자가 온 몸으로 체화토록. 대체 인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왜 이런 일이 지속되고 있는 것인지를.

 

탈레반의 무차별한 테러를 상징하듯 화염과 울부짖는 여인이 있는 영상, 그 철저히 차단되었던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이 우리들의 세계로 어느 날 불쑥 더 이상 배제될 수 없는 감염, 현실의 문제가 되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특별기여자로 우리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 온 아프가니스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다고 극렬한 반감의 소리들이 그치질 않고 있다. 우리는 진정 무엇을 알아야하고, 어떤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일까? 이 세계에 함께 할 수 없는 인간이라 구분하고 차별하는 그 경계의 본질이란 대체 무엇인가? 누가 그것을 정의할 권리를 가졌다는 것인가? 어쩌면 이러한 물음들이 가득한 것이 이 작품일 것이다.

 

현실을 차단하는 액정 화면 가득한 과장된 발악, 공허한 외침이 아닌 언어의 힘’, ‘문학의 힘이 고통과 슬픔이 만연한 불의한 현장에 오랫동안 체류케 하며 를 포함한 인간존재에 대한 생각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한다. 바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수천 킬로미터 먼 이역의 나라, 아프가니스탄은 지하드(이슬람 신앙과 원리를 위하여 벌이는 성전(聖戰))’라는 이름 아래 서로 죽고 죽이는 증오의 싸움이 지속되고 있다. 이 소설을 읽게 된 것은 우리 사회의 일상 속으로 들어 올 수밖에 없었던 일련의 무고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더 이상 영상 속 비현실적 소비 대상의 존재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앎의 문제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시,청각을 일회적으로 자극하는 수많은 미디어의 영상들을 바라보면서 저 먼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하고 무자비한 현실을 소비하며, 자신의 체제와 영역의 우월성이라는 안전성과 안도감을 즐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순간의 연민과 동정, 분노로 내 도덕성에 안심하며, 감염되지 않을 영상의 상징적 메시지에 유희와 공모를, 그리고 자기기만을 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영상이 전달하는 비도덕적이고 파괴적인 실제에 분노, 공포, 동정심 등 온갖 감정을 느끼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안심하며, 감정의 찰나적 소비로 곧 휘발되어 더 이상의 감정적, 이성적 진전이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나였을 것이다.

 

소설 속으로

 

소설은 하라미(혼외 자식, 사생아를 비하하여 부르는 말)’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소녀 마리암의 다섯 살 기억으로 시작된다. 이 저열한 비참의 언어는 무슬림의 율법, 그네들이 관습과 상식이라 부르는 것이 편의적이고 기득권 중심에 의해 작동되기에 야기되는 불의한 현실적 산물이다. 시인들의 도시로 불리는 헤라트 지역의 유지인 잘릴의 자식이지만 식모에 불과했던 마리암의 어머니 나나는 헤라트로부터 쫓겨나 버려진 언덕의 오두막에서 마리암을 외로이 키워나간다. 모녀는 이들에게 철저하게 거부되고 부정되는 존재이다. 특정된 날에 딸을 찾아와 함께하는 아버지 잘릴에 대한 어린 마리암의 친근감과 존경의 마음은 그네들 사회의 뿌리깊은 차별, 그 위선을 온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어머니 나나에 의해 짓밟힌다.

 

잘릴은 영화와 아이스크림, 시인의 나무 등등을 마리암에게 이야기로 들려주지만, 정작 마리암이 그 실체에 대한 경험을 요구하는 순간 돌아오는 것은 완곡한 거부의 몸짓이다. 어린 마리암은 이를 해독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말은 잘릴에 대한 증오심으로 왜곡된 것으로 여겨지고, 마리암은 아버지가 사는 헤라트로 찾아가면 자신을 환대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아버지와의 만남은 거절된다. 마리암은 닫힌 대문 앞에서 온 밤을 지새우지만 결코 출입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라미, 적법하게 시작되지 못한 삶은 결코 그 어떤 적법한 권리도 그녀와는 무관한, 단지 그녀의 죽음에만 적용될 터이다.

 

나나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이 세상 어디에선가 고통받고 있는 

여자의 한숨이라고 했었다.”    - 128

 

쫓기듯 차에 실려 강제로 어머니가 있는 오두막에 돌아왔을 때, 마리암은 어머니 나나의 싸늘한 주검을 만난다. 하라미로 태어난 딸의 보호만이 생의 유일한 이유였던 여인은 딸이 헤라트로 떠나자 더 이상 삶의 미련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의지할 곳 없어진 열다섯 살 마리암은 일시적으로 헤라트 잘릴의 집에 머물게 되지만 이내 쉰 살을 훌쩍 넘은 수도 카불의 구두장이 아내로 떠밀려 떠나가게 된다. 그녀는 구두장이 라시드의 성욕받이요, 음식과 세탁을 하며 집안 청소를 하는 성노예이자 식모의 역할에 종속된다. 마리암은 눈만 드러나는 브루카의 착용과 남편과의 외출이외에는 허락되지 않는 감금과 억압의 생활에 강제되고, 수차례의 거듭되는 유산과 더불어 허리띠의 버클로 내리치고 주먹과 발길질이 반복되는 폭력으로 부서진 이와 멍든 몸을 헤어나지 못한다.


 



소설은 이렇듯 마리암이라는 여인의 삶을 통해 가부장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무슬림의 율법 아래에 놓인 여성들의 무참한 고통의 실체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곤 소련의 위성 정권 하에서 교사직업을 잃고 허드렛일로 연명하는 한 가족, 그 속에서 자유롭게 성장하는 금발과 초록색 눈을 한 여자아이 라일라의 시점을 병행한다. ()소련 항전 조직인 무자헤딘, 이슬람 성전(聖戰)의 전사로 참전하는 두 오빠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고, 가족, 특히 라일라의 어머니는 아프가니스탄의 성스러운 전사들의 승리가 기어이 찾아오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못한다. 소련군이 철수하고 무자헤딘의 새로운 이슬람 정권이 수립되지만, 카불은 사분오열된 내분으로 다시금 저마다 지하드를 내걸며 상대를 겨냥한 무차별 전쟁을 벌인다.

 

여기서 주목되는 지점이 있는데, 라일라의 어머니는 전사한 자식들의 장례를 직접 치러주고 예를 표했다는 한 군벌에 맹목적인 신성을 부여한다. 그녀에게는 그가 아프가니스탄에 평화와 번영의 영광을 되찾아줄 것이라는 부동의 믿음이다. 그러나 실상은 권력을 향한 이기심을 은폐한 기만적인 지하드의 하나일 뿐임을 우리들은 안다. 인간의 이성이 ()지성화하여 뿌리깊은 갈등과 분열로 자리잡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도 흔한 보기일 것이다. 이것은 한 가족을 자멸의 길로 이끄는 기원이 되는 듯하다.

 

이웃집이 로켓탄으로 폭파되고 무고한 몸통이 갈기갈기 찢겨진 시체들이 나뒹구는 무법의 지대 속에서도 젊은이들의 애틋한 사랑은 이어진다. 다리 하나를 총탄으로 잃어버린 타리크는 라일라의 수호기사다. 라일라와 타리크의 성장기 속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사랑의 이야기는 온통 폭력과 죽음으로 가득한 소설의 배경에 한 줌의 순수하고 밝은 빛으로 어떤 아득한 태곳적 향수, 천개의 찬란한 태양이 비추는 영화(榮華)와 평화가 만개한 영역을 거니는 듯한 기쁨을 준다. 전쟁의 참화가 직접적 생존의 문제임을 회피할 수 없는 지경이 된 사람들은 고향 카불을 뒤로하고 정처없는 난민의 행렬로 뛰어든다. 타리크의 가족도 탈출을 결심하고, 라일라와 함께 갈 것을 제안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배신할 수 없는 열네 살 소녀 라일라는 동행을 거절한다. 타리크와의 이별, 라일라는 아름답고 신성하기조차 한, 타리크와의 소중한 첫 경험을 갖는다.


디아스포라의 행렬, 아버지 바비의 설득 끝에 라일라의 가족도 파키스탄으로의 탈출을 준비하고 짐을 차에 옮기던 날, 한 발의 로켓탄은 라일라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을 빼앗아 간다. 군벌(軍閥)들이 벌이는 기만적인 성전은 카불과 시민들의 삶을 초토화시킨다. 파괴된 벽돌과 유리 덩어리에 깔려 신음하던 라일라는 그녀의 성장을 눈여겨보았던 예순이 넘은 동네 이웃인 구두장이 라시드의 더러운 계산에 의해 구출되어 죽음에서 벗어난다. 총알과 로켓탄은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니고...납치, 강간, 살인...길 가의 시궁창에 던져진 주검들..., 열 네 살 여자 아이가 홀로 탈출의 길을 걷는 것은 곧 자살, 자멸의 길(295)”임을 겁박하며, 라시드는 라일라를 두 번째 아내로 취한다. 라일라의 몸속에는 이미 타리크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기에 이 굴욕적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그녀의 불가항력적 최선이었던 까닭이다.

 

라시드의 두 아내로서 마리암과 라일라의 동거는 이렇게 시작된다. 열다섯에 끌려와 서른다섯이 된 첫째 부인 마리암, 열네 살 둘째 부인 라일라는 서로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딸처럼 가까운 관계로 발전한다. 라시드가 구둣가게로 출근하면 바쁜 일상 속에서 두 여자는 마당의 거친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할와를 먹으며 여인들의 이야기를 나눈다. 마리암에게 이러한 시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자기만의 시간, 기쁨이 된다. 라일라는 딸 아이 아지자를 출산하고, 두 여인은 아지자의 재롱과 양육으로 모녀처럼 친밀성이 더욱 깊어진다.

 

오랜 세월 악의와 구타를 감내해 왔던 마리암이 느끼는 새로운 생명의 경이, 그리고 어린 라일라로부터 여성의 유대, 어머니 나나가 들려주었던 고통받는 여자의 한 숨의 이야기들이 억압받고 차별받는 여인들 삶의 숙연한 진실을 비로소 마주하게 하고, 그녀의 삶을 온통 좌우했던 불의한 세계 너머에 있었던 평화로웠던 어린 시절의 고향, 그리고 꿈으로 자리 잡는다. 한편, 죽은 줄 알았던 타리크의 돌연한 방문은 라일라의 체념한 삶을 깨우고, 이는 비열한 성적 이기심에 매몰된 라시드의 잔혹한 폭력을 다시금 깨우는 계기가 된다. 아름다움과 젊음, 지적 교양까지 갖춘 라일라에 대한 절대 소유욕이 금이 가자, 라시드는 마침내 라일라를 죽이려는 살기로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여성을 한낱 물건이상의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탈레반의 살인적 규율이 지배하는 시대, 마리암은 라일라와 그녀의 아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탈레반 율법학자들의 구태는 라시드를 죽여야만 했던 상황의 정상을 고려하지 않는다. 재판관인 율법학자는 말한다. 어째서 너는 내 율법에 복종하지 않았느냐? 함시라. ... 신이 우리를 위해 만드신 법을 계속 지키는 길밖에 없소. ... 당신은 사악한 짓을 했소. 당신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하오.(512)”, 신의 명령인 남성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여인은 죽어야 한다는 기만과 위선의 변()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는 판결문 아래 서명하고 죽음을 초연히 받아들인다.

 

사형장인 가지 경기장에 운집한 수천 개의 눈이 그녀를 응시한다. 나는 이 눈이 천개의 찬란한 태양과 대비되어 인간의 부패한 의식, 그 탐욕과 폭력적 쾌락에 절은 인간들의 추악한 심연을 보는 듯 더없이 역겨운 장면으로 기억된다. 여인의 처형장면을 즐기려는 무슬림 남성들의 이 관음증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신성한 율법이라고, 신앙과 원리를 위해 벌인 성전으로 쟁취한 결과라고? 경기장 한가운데 무릎을 꿀린 채 소련제 칼리시니코프 소총이 그녀를 향했을 때 한없이 평화로운 느낌이었다는 마리암의 마음을 읽으며, 그토록 불친절하기만 했던 그녀의 삶이 이제야 휴식을 취하게 되는구나라는 탄식, 안타까움으로 속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소설의 종장은 타리크와 함께 파키스탄 국경지대의 단란한 삶을 꾸리던 라일라가 고국 아프가니스탄, 고향인 카불로 돌아와 고아들을 보듬고 그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장면으로 이어지지만 라일라는 되뇐다. “고국에서는 다시 폭탄이 떨어지고 이번에는 미국의 폭탄이라고. 그리고 국제평화유지군이 카불에 파견되었다고. 카불의 참회는 너무 늦게 왔다고(437).” 그러나 오늘 우리는 알고 있다. 평화유지군은 도망치듯 카불을 떠났고, 탈레반이 또다시 그 지옥의 언어, 위선의 언어, 악의 언어인 지하드를 내걸고 사람들을 다시금 죽이고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글을 맺으며

 

작품 속에 면면히 흐르는 하나의 축은 여성에 대한 악착같은 차별의 인식이다. 그것은 여자들은 양식을 축내는, 재산을 갉아먹는 소비적 존재이상으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가부장의 절대 권위를 내세우는 탈레반의 무슬림 율법은 여성의 교육, 취업, 사회적 생활을 모두 부정하며, 외출조차 금지한다. 앎과 생업 활동이 차단되어 무력화된 여성은 남성 권력에 의해 무방비적 착취의 대상이 되고 만다. 마리암과 라일라의 남편인 구두장이 라시드가 탈레반을, 무슬림 율법의 권위를, 그칠줄 모르는 기만적 지하드를 반기는 이유이다. 하찮은 인간이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무한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구속도 없는 여성에 대한 무참한 폭력 행사의 정당화를 낳는다.

 

이들의 권력의 독점을 위한 남성적 율법이 지배하는 세계가 곧 아프가니스탄의 지속되는 내전의 실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을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키고 제멋대로 하고싶은 무한한 권력의 독점을 위한. 이것의 모습은 그 형태를 바꾸어 마치 타자에 대한 공감능력을 상실한 오늘 한국사회의 검찰 권력의 몽매성과 매우 닮아있다. 사회적 약자의 모습에 낯설어하는 그 무관심과 무지, 그리고 악착같은 권력 독점의 욕심까지. 그러나 이러한 악의와 폭력, 무관심의 파렴치, 잔인함이 횡행하는 반지성의 세상 속에서도 인간들은 고귀한 생명성, 사랑과 유대를 통해 인내하며 기어코 세대를 이어간다. 인간의 역사는 어쩌면 이러한 약자들의 고통과 슬픔, 인내에 의해 지속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검은 부르카로 온 몸을 감싸고 그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여인들, 세상의 온갖 악의와 억제가 집약된 그 처참한 환경 속에서 피어나는 여인들의 고고한 인내와 생명성에 대한 이 찬가를 읽으며, 체념과 포기, 좌절과 같은 감상적 환상을 벗어난다. 삶이 제아무리 불친절해도 마지막 걸음을 옮기는 마리암의 마음을 그득 채우는 어머니 나나와 잘릴이 주었던 소소한 사랑의 기억들, 마리암의 오두막에 앉아 그녀의 희생과 사랑을 더듬는 라일라의 삶을 향한 굳센 발걸음은 아마 영원히 내 마음 속에 감동적으로 새겨질 것 같다.

 

참혹하고 불쌍한 죽음을 소비하며 더 확실한 안도감을 느끼는 기만적 독서를 경계했지만, 그렇다고 동정과 연민, 분노의 감성으로 휘몰아치는 격렬한 기분에 휩싸이는 것에 저항하지도 않았다. 이산의 슬픔을 안고 한국 땅의 어디에선가 고달픈 적응과 희망, 구원의 길을 모색하고 있을 특별기여자들의 알지 못하는 고통으로 내 생각은 이어진다. 그들에게 겨누어지는 차별과 편견의 잣대가 거두어지길, 환대의 손길이 어루만져 주길, 그들의 조국에 다시금 천개의 태양이 찬란하게 내리 쪼이기를 내 작은 감상과 기도로 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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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 까치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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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는 사용에 따라서 감소하는 반면, 존재는 실천을 통해서 증대한다." - 161쪽 에서

 

근대 산업사회는 "무제한의 생산, 절대적 자유, 무한한 행복"이라는 삶의 이상을 부르짖으며 이 위대한 약속의 실현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 이것이 가져다주리라 믿었던 것들을 위한 요구가 '경제 성장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와 같이 정작 그 주체여야 했던 인간은 소외되고, 인간적 자질은 이에 따라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주의, 소유욕이라는 인간자연의 충동이 아니라 사회적 제약의 산물에 휘둘리는 현실만 드러내 보이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상품화라는 비인격화에 내몰리고, 자연에 대한 무참한 지배는 전지구적 전염병이라는 자연의 보복으로 궁박하기 그지없는 상태에 처해있다. 경제적 동인이라 부추긴 소유와 이기심은 부의 극단적 편재로 인한 계층 갈등을 고착화시키는 탐욕과 아집의 언어가 되어 시기와 혐오, 적대만 양산할 뿐이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위기는 인간 실존에 대한 전면적인 위협이라는 인식을 요구하기에 이르고, 인류의 운명, 즉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의 육체적 생존이 인간 정신의 근본적 변화에 매달"려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실에서 인간 삶의 두 가지 측면인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인간 성격 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전제조건, 새로운 인간의 본질적 특성, 나아가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제언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이 저작은 반세기를 지나 그 통찰력을 빛낸다.

 

1. 두 실존 양식 -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

 

소유와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 체험의 형태이다. 꽃을 뿌리째 뽑아 손 안에 드는 것과 가까이 다가가 꽃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바라보는 행위처럼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 여기에는 죽음’, ‘폭력하나 되는 공존이라는 대비가 있다. 프롬은 산업사회 이후 언어 사용의 변화에서도 존재에서 소유로 이전되는 인간 행위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나는 생각한다.''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든가, 환자가 '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나는 문제를 하나 가지고 있다.'로 표현하는 것처럼 존재의 양식이 사라지고 소유의 양식이 인간을 포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주체적 경험을 하는 자아가 사라지고 소유한 그것으로 대치되어 버리는 것이다. 과연 나는 문제를 소유할 수 있는가? 하면 결코 그것은 소유할 수 있는 성질의 물건이 아니라는 점에 놀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오늘의 사회가 전적으로 소유지향과 이윤추구의 사회라는 점에서 어쩌면 당연한 반영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형상은 우리네 일상, 독서, 대화, 기억, 지식, 신앙, 권위행사, 사랑에 이르기까지 소유양식에 점령된 현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독서의 경우에도 줄거리나 주인공이 죽는지 사는지와 같은 이야기 소유에 머물고 획득된 인식은 아무것도 없이 종료된다. 인간 통찰 능력의 심화나 그 감응이 삶의 새로운 변화의 동력이 되는 존재 양식의 독서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소유 양식은 지식으로부터 소외, 자아로부터의 소외만을 양산한다.

 

"그대의 존재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대가 그대의 삶을 덜 표출할수록,

그만큼 그대는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그만큼 그대의 소외된 삶은 더 커진다....“

- 225쪽 에서

 

반면 존재 양식은 소유 양식과 같이 생동하지 않는 것, 소외 된 것,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 경험에 의해 보증되는 자기 창조의 능동적 과정이다. 존재는 공유와 결속의 양식이다. 지식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파고드는 사유행위 그 자체로서 존재 양식일 때의 생명력이다. 일용품, 재산, 지식, 사상 등등의 소유에 집착할 때 이것들은 자유의 족쇄가 되고 자기실현의 장애물이 되고 만다. 존재는 흘러가는 것이며, 생산적 표출이라는 의미에서 활동 상태이다. 반면 소유는 아집과 소외와 굴종을 요구한다. 3부로 구성된 이 저작의 고전적 지위는 이러한 두 실존 양식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분석을 서술하는 제2부일 것이다.

 

2. 소유의 본질, 존재의 지혜

 



왜 소유에 집착하는 것일까? 아마 "가장 중요한 대상은 자신의 자아일 것이다. 자신의 육체, 이름, 사회적 지위, 소유물(지식까지), 과시하고 싶은 이미지... 이들 허구적 자질의 혼합물을 자아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물을 자신을 확인하는 경험적 토대로 이해하고 있기에 소유는 자아 취득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그런데 이 소유는 지배 느낌의 상승, 새로운 자극의 무한 욕구이기에 타자의 경시와 무관심, 도구화, 종속화만을 요구한다. 결국 인간과 소유 대상의 관계는 살아있음의 온기, 연대감이 함께할 여지가 사라진다. 자신임을 확신하는 느낌이 사물을 소유하는 데에 의존하는 삶, 더구나 재산과 이윤 지향의 태도는 권력의 욕구, 폭력의 충동, 약탈과 탈취의 능력이 행복이라는 인식에 사로잡히게 한다.

 

이와 달리 체험과 관계하는 존재 양식은 인간 자체를 묘사할 수 없듯이 사물처럼 술회할 수 없다. 이것은 자기를 성장시키고 흐르게 하며 고립된 자아의 감옥을 초극하는 능동적 활동이기에 그렇다. 소유와 달리 소외되지 않기에 자신의 행동을 주체로 체험하며, 살아있는 생산적 관계를 형성한다. 관계하는 대상에게 생명을 부여하며,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행위가 본성에 일치하는 능동성"이기에 이것은 활동성, 이성, 자유, 기쁨, 자기완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에티카, ,개념정의 2,3,5; 명제 40,42)

 

이와 같이 소유지향성은 관계에 억압과 부담, 갈등과 질투로 채워지고, 경쟁심, 적대감, 두려움으로 특징지어진다. 반면 존재 지향성은 공존의 즐김, 이성과 사랑의 힘, 창조력 등 본질적 힘이 불어난다. 이 두 양식은 죽음에 대한 인식에서조차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육신, 자아, 재산, 실체와 같은 소유물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삶을 소유물로 간주하지 않는 존재 양식은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닌 삶에 대한 숙고라는 지혜로움이다. 인간 삶의 양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새삼 중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3. 새로운 인간과 사회

 

개인의 정신적 구조는 사회 경제적 구조와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소유 양식에 얽매여 있다. 그리고 이것을 벗어나야 함 또한 잘 알고 있다. 인간 자신의 보존본능을 위협하는 현실임에도 당장의 희생보다는 아득해 보이는 재난을 택하고 있다. 인간이 지닌 치명적 수동성, 과학기술과 경제사회체제의 낙관론과 기득권은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기에 그렇다. 프롬은 작심하고 근본적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이를 방해하는 난점들을 조목조목 열거하고 그를 분쇄할 정책들과 실천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실천과 동떨어진 통찰은 아무 실효가 없는 법이다." - 244쪽에서

 

인류가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케 하고, 그 원인을 인식케 하며, 원인 제거와 함께 고통 해방을 위한 새로운 생활습관을 제시한다는 단계별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발군의 통찰에 이은 그 구체 실천 내용을 개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집중화로 수렴되지 않는 산업적 생산형태의 강구, 자유시장 경제 포기와 고도 분산화 경제로, 무제한 성장에서 선택적 성장으로, 노동에 대한 전혀 다른 인식 - 정신적 충족이 효율적 동인이 되게 하는, 이를테면 공공선의 기여로 노동의 가치를 재편하는 것과 같은, 또한 최저 생계비와 같은 생존근거의 부여 등 극복되어야 할 난제를 비롯하여 인간 욕구 본질에 대한 새로운 인간과학의 투자, 관료주의적 행태들(인간의 사물화, 수치화 취급, 양적 관점의 관리 등)의 폐지 등 오늘에도 급진적인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 생존에 대한 무제한적 권리 규범도 없는 인간 사회가 자신들의 애완동물에게는 인정하는 이 기이한 세계일지라도, 이 이기심과 탐욕은 인간 천성이 아니라 "늑대들 틈에서 늑대가 되어야 한다는 보편화된 압력의 결과"라는 시각이기에 프롬은 사회적 풍조를 바꾸려는 열망과 인류 20%의 실천이 이루어진다면 인류의 세계는 '존재의 도시'로 변화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전망을 보이고 있다.

 

인간애로 가득한 프롬의 절절한, 그리고 인간 본성의 구석구석, 인간 사회 행태의 망라된 문제의식을 토대로 현대사회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제언은 지금 인류 사회 모두에게 새로운 공동체적 신체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각성,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그 어느 때보다 비상한 긴장들이 팽배해있는 오늘, 자기실현과 인간 존엄의 재수립, 인간의 유대를 포함한 정신적 가치의 새로운 정립을 제시하는 웅숭깊은 세계관은 새로운 삶의 방식, 문명 전환적 통찰의 요구인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귀중한 성찰적 지식의 표본이 되어 주리라는 기대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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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과학의 대중적 저술가이자 유튜브 최대 과학채널 쿠르츠게작트의 설립자인

'필리프 데트머'가 저술한 Immune(면역)의 리뷰로서, 도서출판 사이언스북스에서 

제공한 가제본 도서를 기초로 쓰여졌습니다.



참조 : 이미지를 클릭하면 관련 동영상으로 연결됩니다.


책은 단세포 생물이 다세포 생물이 되어 5억년 이상 시간을 누적하며 진화시켜온 대략 40조 개의 세포가 유기적 상호작용으로 축조된 인간 신체의 생존 유지 장치인 면역계의 정교하고 기발한 시스템을 대중적 언어로 지펴낸, 자기 앎에 대한 탁월한 저술임을 어떤 언어로도 부정하기 어려운 역작이. 어쩌면 인간 신체에 대한 이 새로운 앎, 무지로부터의 작은 해방이 가져오는 흥분 탓이겠지만 내 의식이 무수한 나래를 펴며 자꾸만 다른 사유의 영역으로 날아가게 한다.

 

면역체란 생명체의 보호와 유지 존속을 위해 진화과정에서 부딪힌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시켜온 엄청난 복잡성 시스템이다. 이 문제란 인간 몸을 자기 생존의 생태계로 인식하는 세균, 바이러스, 기생충 등(이들을 통틀어 병원체라 한다), 세계에 온통 퍼져있는 외부 적으로부터 인간 신체를 지키는 것이다. 즉 자신을 보호하고 계속 살 수 있게 해주는 생물학적 원리를 어떻게 표출하는 가의 문제는 자기 생존에 직결되는 것인 까닭이다.

 

병원체에게 인간의 신체는 위험을 줄이면서 영양을 섭취하고 생존과 번식을 위한 멋진 대상이다. 따라서 이들 빌붙으려는 존재들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곧 생존의 중요한 과제라는 점이다. 면역계는 바로 이러한 오랜 투쟁 속에서 살아남은 진화의 산물이며, 그만큼 정교해지고 치밀해졌다. 그 결과는 신체 속으로 침입하는 적을 특이적으로 인식하고 그 적에게만 효과적인 무기를 신속하게 대량 생산하는 능력과 한 번 침입했던 적의 모습을 항구적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자기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21)이다. 타자가 해를 끼칠지 말지와 무관하게 일단은 타자로 식별되면 무차별 공격을 하여 파괴하는 것이다. 타자는 죽음이다. 이를 부정하는 순간 생명체는 며칠도 못가 죽고 만다.

 

건강의 유지란 바로 이러한 면역계의 안정적 작동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40조 개에 이르는 인간 몸을 한군데도 빠짐없이 방어하는 것은 결코 간단치 않다. 면역계는 이 엄청난 세포 구조물의 방어체계로서 한 순간도 그 작동(경계)을 멈출 수가 없다. 멈춤은 곧 죽음이다. 사실 살아있다는 것은 적대 세력이 득실대는 곳에서의 쉴 새 없는 전쟁에서의 승리이다. 굴복은 멈춤이요 생명 작동의 중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체에 공급되는 에너지 모두를 면역계를 위해 사용할 수는 없다. 40조 개에 이르는 세포의 정상적이고 평온한 작동을 위한 영양 공급과 신체를 구성하는 각 조직과 기관의 일관된 작동 시스템을 감시, 운영하는 데 막대한 에너지가 소요되기에, 면역계는 빠듯한 예산으로 방어 전략을 구축했다. 그것은 선천 면역계와 후천 면역계로 기본 방어 전략과 특화된 방어 전략으로 이원화하여 침입자에 따른 각기 다른 방어 전략을 구사하여 낭비 요인을 제거한 것이다.

 

전문적이고 복잡한 용어를 피하고 난이도를 조절하여 독자가 재미와 지적 이해를 함께 쌓아갈 수 있도록 집필된 이 저술은 그 지식의 친밀하고 세밀한 안내로 거의 저절로 체화될 만큼 직관적이고 우아하기까지 하다. 아마 인간의 지식 습득에 대한 어떤 앎의 경로를 알고 있는 듯, 이해를 위해 동원되는 침입자, , 전쟁, 무기, 생물학적 로봇과 같은 상징을 동원한 비유법은 복잡하고 난해한 생물학적 지식을 그야말로 천재적 서술능력을 통해 명료하게 전달해준다.

 

인간 신체와 외부세계의 접점인 피부와 점막(기관지와 허파, 눈꺼풀, 입속, 콧속, 위장, 생식기관)을 비롯해 콧구멍, 귓구멍 등등은 침입자가 몸속으로 들어오려고 시도하는 장소다. 다시 말해 적대세력과의 경계인 피부와 이들 점막에는 천연 항생물질을 비롯한 염도, 약산성 등 미생물이 서식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뿐 아니라 매순간 100만개의 세포가 통제된 자살을 감행함으로써 침입 세균의 서식터전을 제거하기까지 한다.

 

아마 탄성을 지르게 되는 것은 하나의 상처로 시작되는 예화(例話)를 통해 면역계와 면역 세포들의 활동을 가히 숙련된 솜씨로,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도록 전달하는 점진적 세밀성을 지닌 강렬한 지식들 때문이다. 우리 신체의 선천 면역계는 외부 침입자(병원체)를 발견하면 즉시 행동에 돌입하는 체계이다. 적과 죽은 세포를 먹어치우며, 방어전략을 지휘하는 큰 포식 세포로부터 상처가 너무 깊을 경우 혈액 속에 떠돌던 중성구가 활성화되어 살인 병기로 둔갑, 자폭까지 마다치 않으며 병원체를 맹공하는 경로는 실감나는 한 편의 드라마 같을 정도로 흥미와 지식을 동시에 흡수케 한다.

 

이 면역 세포들 및 단백질 덩어리들이 활성화되고, 세균과의 전쟁터가 된 상처 부위로 어떻게 중성구가 경로를 찾아 도달하게 되는지, 360도 면역 감지 체계를 갖는 세포막과 일종의 면역계 언어인 아주 작은 단백질인 사이토카인을 생성 발산하는 큰 포식세포의 행위 등은 가히 경이로움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 몸에 발생하는 염증의 목적은 물론, 사이토카인 폭풍이라 불리는 면역계 통제 상실 증상 등 단백질 사이에 발생하는 일련의 생화학 반응에 이르는 해설은 인간 신체의 면역계를 실체적 이해로 견인한다.

 

나아가 단백질과 물 분자로 구성된 세포의 특징과 3D 퍼즐 조각처럼 존재하는 단백질의 특정화된 형태가 침입하는 세군과의 형태 차이를 인식함으로써 적대자를 멸실(滅失)시키는 작동 시스템은 진화적 신비에 어떤 경외감마저 일으킨다. 단백질 인식기 역할을 하는 선천 면역계의 수용체에서부터 우리 몸의 모든 체액에 가득 차 있는 약 1,500경에 이르는 보체계가 발휘하는 면역 기능들 또한 경이로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겹겹이 감시되고 활성화되는 면역계의 경로들을 따라가며 적의 존재 성격(바이러스인지, 세균인지, 기생충인지)을 알아내고, 후천적 면역계의 도움을 받을지 여부를 결정하는가 하면, 전쟁터 상황과 적의 존재를 알리는 전령인 가지세포의 비상한 이동, 면역 세포의 정보센터 역할을 하는 우리 몸에 존재하는 약 600개의 림프샘과 면역 슈퍼하이웨이라 할 수 있는 림프계(몸속 배관)’를 떠돌던 ‘T세포의 활성화와 항체 형성 세포의 변이 등은 우리 몸의 구성 기관은 물론 신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는다.


면역 세포의 필수 검정기관, 가슴샘 - 130


내겐 뜻밖의 새로운 앎이 된 가슴샘(흉선)’의 역할에 대한 지식은 면역계의 경이성과 함께 생명의 한계를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후천 면역계인 T세포는 선천 면역 세포들의 활성화 및 전략 지휘자 역할과 특정 침입자인 항원에 맞서는 항체를 만들어 적을 무력화시킨다. 이 세포는 한 가지 특이한 항원만을 인식하는 특이적 수용체를 갖도록 만들어져 적을 섬멸한다. 그런데 자기를 타자로 인식하는 경우를 제거하기 위해 이들 T세포를 검사, 훈련하는 곳이 바로 가슴샘이다. 여기서 졸업하는, 즉 특이적 수용체를 생성할 수 있으며, 다른 수용체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고, 자기를 타자로 인식하는 지 여부를 통과한 것은 2,000만개에 달하는 것 중 2%20~40만개에 불과하다. 항체로 변이하는 이 세포의 특징이 왜곡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가슴샘의 메커니즘은 절로 그 진화적 능력에 머리를 떨구게 한다.

 

가슴샘은 대략 85세 전후에 이르면 기능을 멈춘다고 한다. 인간의 생존에 절대적인 장기로서 언제 죽을지 결정하는 장기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 기능이 멈추면 이미 양성되어 배출된 T세포만으로 병원체에 저항하여야 하기에 감염성 질환이나 암에 지극히 취약해진다. 결국 생존을 위한 방어 체계가 사라지기에 인간의 신체는 죽음의 도래에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이 짧은 리뷰를 쓰는 순간에도 내 몸의 면역 체계는 끊임없이 침입하는 세균을 감시하고, 발견된 병원체들과 전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매혹적이고 역동적인 면역계의 활성화 및 작동 기작(機作)을 알아가며 내 호기심은 선천 면역계 역할의 목적인 자기와 타자의 철저한 구별단백질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생화학적 물질로서 세포를 생물학적 로봇기계로 정의하는 곳으로 향한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란, 아니 동물이란 본질적으로 타자를 공격, 파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인가에 대한 물음과 동물이란 한낱 생물학적 로봇인 단백질 형태의 끊임없는 변형과 조작에 불과한가라는 수없이 반복되는 논쟁적 물음의 제기이다. 단지 단백질의 생화학적 기작에 의한 흐름에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존재임에 쉽사리 굴복되지 않는 저항이 머리를 치켜든다. 타자에 대한 연민, 이성과 감성의 융합으로서의 정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나는 이러한 과학적 실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여야 하는지 지향할 곳 없는 심연에 빠져든다.

 

이러한 자가당착(自家撞着)적인 어리석은 물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평온과 안정성이라는 건강한 생()의 진작을 위한 자기 앎의 회복을 위해 쓰여진 이 책은 가히 독보적인 역작이라 할 정도의 생명(면역)의학에 대한 대중적 걸작이다. 오늘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욱 과학과 자본이 견고하게 유착된 의학이, 무지해진 인간 위에 더 한층 군림하며 앎의 주권 박탈을 강화하고 있다.

 

이렇게 자기 신체에 무지해진 대중은 각종 음모론과 당파적 이익을 위해 동원된 뒤틀린 의학 정보에 쉽사리 현혹되어 정작 필요한 삶의 건강을 위한 지혜를 상실하고, 진정한 자기 운명의 주인임을 망각한다. 인간의 신체 내에서 병원체인 COVID19가 행운을 누릴 때, 인간들은 자신들의 면역체계에 대한 앎 대신에 엉뚱하게도 정치적 패거리 놀이에 심취했다. 자신들의 몸을 잃어버린 줄 모르게 되면서 자기 탐구, 그 생리적 활성화를 위한 중요성을 알려고 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은 오늘의 사회가 얼마나 반()생명성을 가속화시키고 있는가의 반증일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삶의 질에 결정적 역할을 미치는 면역계에 대한 앎을 말하는 이 저술은 시의적절하고 또한 중대하다. 면역계는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 존재이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순간 목숨을 잃게 되는 결정적 생명장치이다. 정말 쾌락적 향연을 즐긴 듯한 충족감을 풍성히 안기는 기념비적 과학 저작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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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잡기록은 지난 방법서설 제1부에서 제3부에 이르는 감상글에 이은

4부에서 제6부까지에 대한 정리 및 소회이다.




정신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이 있다. ...지성에 의해 지각했던 것들까지 똑같이 의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발견하려 했던 것이 남아 있었으니, 그것은 확실히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오로지 의심하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었다. ...이것은 어떤 근거들에 의해서도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3부 까지가 철학 제 1원리를 도출하기까지의 방법에 대한 서술이었다면, 4부는 책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최초 사색의 결과와 그로부터 파생된 일반 규칙의 도출에 대한 사유의 진술이며, 5부에서는 인간 신체와 정신의 분리에 따른 이성이라는 보편적 도구의 인간 고유성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제 6부는 그의 자연학 저술들의 출판에 대해 가해질 교황청 비난의 공포에 대한 두려움, 그 불안 심리 및 방법서설을 포함한 자신의 자연학 저술들을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저술한 이유를 술회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방법서설의 철학적 고유성은 정신 작업 전체를 새롭게 시작하고자, 전통적인 고전 논리학을 극복하고 새로운 논리 방법을 고안하고자 하였던 제 1~3부에 걸친 격률과 도덕 규칙이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컨에서부터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로 이어지는 근대철학 전체의 문제였던 고전 논리학을 극복하는 새로운 인간 정신의 방법에 대한 요구는 그만큼 절실했다고 할 수 있다.

 

4

 

데카르트의 방법은 다름 아닌 반성적 인식, 관념에 대한 관념이라 할 수 있다. 즉 가장 완전한 방법이란 정신에 주어져 있는 가장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에 따라 어떻게 인도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방법은 지성의 자기 탐구요, 자기반성이다. 지성은 이로써 인식을 확장해 나아간다. 그는 이를 위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것은 절대로 그른 것으로 내던져 버리고 전혀 의심할 수 없는 무엇을 찾는 것이다.

 

참된 원리는 모든 의심의 위협 밖에 놓여 있으며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을 만큼 명백하고 확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의심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버렸을 때 그의 신념 속에 대체 무엇이 남았는가를 깨닫는다. 의심하고 부정하는 동안에도 자신은 의심하는 무엇이며 따라서 자신은 실존한다는 진리, 1의 철학의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 (Je Pense, done je suos/ cogito, ergo sum)” *1 참조

 

그런데 여기에는 관념 기원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만일 관념이 생각의 주체인 사유하는 나(Cogito)'보다 많은 능력을 지닌 것으로부터 왔다면 이것은 코기토의 능력 밖이다. 결국 관념이 코기토의 소관이 되려면 능력이 더 작은 것으로부터 와야만 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관념 기원의 문제는 자신 속에서 연역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신의 실존 문제를 통해 사유하는 나의 관념 속에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여 제1원리의 참됨을 의존한다. 이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순환논증인데, 증명되어야 할 것이 이미 그 증명에 전제 되어 있는 그야말로 하나마나한 논증인 까닭이다.

 

신의 실존은 나의 생각으로부터 증명된 것이고, 나의 생각은 신의 실존에 의해 보장받는다는 논리는 논증규칙의 위반이고 사실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은 것이다. 의존해야 할 논리가 이렇게 무너지면 그의 제 1 철학 원리도 의심을 극복한 명증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의 많은 비판적 사유들로 그의 코기토에 의심이 짙게 드리워지긴 했으나, 모든 의견에 대해 의심의 근거를 요구하는 방법적 회의는 참된 원리를 찾으려는 인간 사유에 귀중한 방향을 제시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제 1원리에 이르는 4가지 논리규칙으로부터 극히 명석하고 판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모두 진실이다.”라는 일반규칙은 인간 관념의 실재성을 이해하는 귀중한 지표로서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5~ 6

 

1 원리로부터 연역한 진리의 연쇄를 개괄적으로 제사하고 있는 제 5부는 데카르트의 이원론(二元論)과 신체에 대한 기계주의적 주장이 특별히 관철되는 장이라 할 수 있다. 그는 4부에서 이미 나는 하나의 실체로서 그 본질, 혹은 본성은 다만 생각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고, 존재하기 위한 어떤 장소도 필요하지 않으며, 어떠한 물질적 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나를 존재하도록 하고 있는 바의 정신은 물체(신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며, 정신은 정신으로서 존재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정신과 신체의 분리를 확언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물에 있어 제 1의 근본적 운동인 심장과 동맥의 운동은 신체와 분리된 정신의 조력을 받지 않는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시계추나 톱니바퀴의 힘, 위치 및 모양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기는 운동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기관의 배치와 그 성질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기는 기계적 운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신체의 모든 부분에 운동을 주는 동물의 정기(精氣) 또한 신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훌륭한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계적 성능에 불과하다고 확언하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인간이 이러한 기계적인 동물과 다른 것은 말()과 기호의 조립 사용이라는 이성이라는 보편적 도구를 지녔다는 점에 있다고 역설한다. 이는 동물이 신체를 구성하는 기관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라 이성이라는 인식 능력, 즉 정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이성적 정신은 물질의 힘으로부터 추출할 수 없음의 증거, 정신과 신체는 분리되었음의 명확하고 판명 가능한 참된 진리라는 것이다. 아마 오늘날 유일신을 신봉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이미 무너진 믿음일 것이다.

 

6부는 그의 자연학 저술에 대한 방법론의 진술과 일반적 원리 획득을 위한 온갖 특수문제의 실험을 통한 제 1원리의 발견과 그 연역의 가능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더욱 시선을 끄는 것은 갈릴레이에 대한 교황청의 심판이 가져온 불안 심리로 발표 예정이었던 그의 자연학 저술들에 혹여 잠재할지 모를 위험성이 가져올 두려움에 대한 변명과 그럼에도 자신의 학문은 참된 진리이기에 발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유들의 구구절절한 정당화 논리들의 술회이다.

 

출간을 미룰수록 그의 저술에 대한 세간의 의혹이 증폭되어 자칫 교황청의 도덕적 잣대를 넘어서지 못하는 불신의 내용이 있음을 자인하는 모양새를 회피하기 위해 부득이 출간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을 떨쳐내는 데는 미흡하였던지, 자신의 저술들을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저술하였음을 부연 설명한다. 대중이 사용하는 통속어인 프랑스어가 자연적 이성만을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더 올바르게 이해주리라는 생각과, 이들을 재판관으로 가지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로마 교황청의 특정인들과 일부 극단적 도덕주의자들의 비난을 피하고 대다수 시민의 지지를 통해 칼날을 피하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결 어


데카르트 자신은 신의 실존 증명과 코기토가 참임을 증명하는 데 순환논리를 사용함으로써(비록 데카르트 자신은 순환논리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존재 증명에 실패하지만, 이는 스피노자에 이르러 가장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인간 자신으로부터라는 자기 완결적 관념 형성 모델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어주었다. 즉 참된 관념의 형상이 어떤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본성 자체에 의존해 있다는 주장으로서, 관념에서 모든 외부적 원인을 배제하고 신의 관념을 초월적 타자가 아니라 지성이 제 능력 안에서 길어낼 수 있는 관념들 가운데 가장 완전한 관념으로서 설명해 내는 초석이 된다.

 

과학과 이성을 기초로하는 방법서설속 많은 사유가 오늘에 이르러 그 확신이 부정되거나 흔들리고 있지만, 그가 사유의 방법론으로 제시하는 이성의 윤리 규칙, 진리 추구 방법론은 여전히 인간 사고의 진보를 위해, 앎이라는 지혜의 발견을 위한 필요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인류 정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고귀한 인간 사유의 도전을 보는 것은 어떤 충만감과 함께 겸허함의 필요를 느끼게 한다. 오늘 우리들의 사회에는 정보가 난무한다. 진정한 앎, 참된 것이란 극한적 회의를 수반하는 사유의 처절함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지금의 사회에는 사유하는 존재들이 점점 쪼그라드는 것만 같다. 거짓이 횡행하는 사회는 이같은 처절한 사유 없음에서 자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 이 제1철학 원리 명제는 프랑스어로 저술되어 발표되었다. 따라서 코기토(Cogito)를 비롯한 라틴어 번역문장은 데카르트의 완전한 진술을 의미하지 못한다. 특히 그가 선언하듯 새로운 논리의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이를 삼단논법식의 해석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식의 해석은 오류라는 학계의 비판이 존재한다. 생각하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생각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동시적인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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