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도둑 - 예술, 범죄, 사랑 그리고 욕망에 관한 위험하고 매혹적인 이야기
마이클 핀클 지음, 염지선 옮김 / 생각의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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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했던 도둑 중 가장 많은 예술작품을 훔쳤고, 가장 성공한 도둑임에 틀림없는인물의 일대기라 해야 할까? 예술품 절도 역사상 이 인물보다 자주, 그리고 더 많이 훔친 도둑은 없다는 말처럼 예술 역사의 영원한 한 부분을 차지, 가히 기록적 범죄를 둘러싼 예술범죄에 대한 총합적 보고서라 할 만한 저작이다. 한낱 절도범에 대한 추적의 기록이 무어 그리 흥미롭겠는가하지만 그 대상이 고가의 회화와 조각 등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이라는 것, 게다가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해서 훔치고, 그 어떤 금전적 이득을 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다팔기 위해 훔친 예술품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이 예술 도둑의 행위와 심리를 비롯한 행적은 어떤 매혹을 느끼게까지 한다.

 

프랑스, 스위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등 7개국 박물관, 미술관 등지에서 추정가치 20억 달러에 달하는 예술품을 7년 동안 평균 12일 만에 한 번씩 훔친 희대의 예술 절도범인 프랑스 알자스 출신의 스테판 브라이트비저는 그의 나이 스물두 살에 연인 앤 캐시 클레인클라우스가 망을 보는 사이에 알자스의 농촌마을 창고를 개조한 박물관에서 최초의 절도물인 수발총을 훔친다. 그는 소유했다는 승리감에 미친 듯한 행복의 절정에 달하고, 도난당한 박물관의 동향을 주시하고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는 것에 한 번 더 해 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체포되어 처벌될 위험이 많은 행위로부터 절도범은 어떤 느낌을 향유하고자 했던 것일까? 첫 도둑질로부터 자신감을 얻은 브라이트비저는 19952, 알자스산맥 고성의 중세 박물관에서 두 번째 도둑질을 하는데, 이때 공포가 기쁨으로 바뀌는 시간은 더 짧아진다. 이 책의 묘미는 이렇듯 최초의 절도에서 두 번째로, 그리고 또 다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절도범의 심리 변화에서부터 절도가 가능한 박물관의 보안수준, 절도의 수법은 물론, 절도대상이 된 예술품에 대한 미학과 예술사적 가치, 예술품 약탈과 절도의 역사적 기록들, 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예술계에 만연한 악의, 그리고 예술품 범죄 전문 경찰기구와 이 희대의 예술품 절도범의 추락하는 삶의 모습이 흐른다.

 

이 예술품 절도범에 대해서 상충하는 이해가 있다. 브라이트비저의 병적 도벽은 절도가 아니라 수집 강박으로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해서 훔치는 것이라며, 단순 도둑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달리 자기애성 인격장애자로 흉악범에게 보이는 특성을 가진 미성숙한 소매치기범이 예술계의 대도로 미화되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상반된 주장으로 나뉜다. 이 책은 그 어느 측에 편향된 시선을 취하지 않는데, 저널리스트로서의 저자의 훈련된 균형일 것이다.

 

브라이트비저의 일상에 대한 기술을 들여다보면 과연 그는 진정 심미관을 지닌 선택된 예술 애호가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주말에 도둑질하고 주중에는 지방 도서관과 고고학 도서관을 찾아 예술 기초지식을 섭렵하고, 142만 페이지로 구성된 베네지트 예술가 사전의 카달로그 레조네를 탐독하며, 자신의 다락방에는 500여권의 미술장서로 작은 도서관을 꾸미고, 장인에 관한 논문, 도상학, 우의학, 상징주의 등을 연구하며, 훔친 예술품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어 며칠이고 작품에 대해 공부한다. 사물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받은 자로 여기게 하는 대목이다. 이는 브라이트비저를 단순한 절도범이라 할 수만은 없게 한다. 한 인간의 사회가 예술로 대체되어 있는 것인데, 어쩌면 바로 이 수집 강박이야말로 이 책의 모든 이야기들의 근원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만이 예술품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차릴 수 있기에 불법이든 아니든 원하는 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브라이트비저의 논리는 터무니없이 허황된 주장이지만, 반박을 무력화시키는 인류의 예술품 약탈사의 한 페이지만을 보더라도 예술의 역사는 절도의 역사와 맥을 함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일례로 기원전 4세기 그리스에서 제작된 조각상인 산 마르코의 말1세기 네로에게 약탈되어 로마로, 그리고 4세기에는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12024차 십자군전쟁에서 약탈되어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으로, 1797년 나폴레옹의 약탈로 루브로로, 그리고 다시 18세기 워털루전쟁의 승자인 영국은 베네치아로 돌려놓는다. 어차피 예술계 종사 모든 사람이 도둑이나 마찬가지라는 주장의 맞춤 증거다. 그러나 이처럼 예술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악의 연쇄적 소굴에서도 브라이트비저는 독보적인 악당이다.

 

수백만의 수백만만큼 훔치고 싶다. 성공하지 못하면 마음이 편치 않을 거야. 나 자신을 잃어버린 느낌이겠지.”, 브라이트비저가 연인이자 공범인 앤 캐서린에게 하는 말이다. 그를 감상적이고 날카로우며 뛰어난 심미안을 지닌 진정한 미술품 수집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위의 진술처럼 어쩌면 도벽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결여 아닐까? 이러한 강박적 수집 욕구는 물론 위대한 미술가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욕구라는 일화도 있다. 1907피카소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유물석상 한 쌍에 매혹되어 절도를 의뢰하여 그것을 입수한다. 훗날 그의 자서전에서 고백된 내용이다. 이 석상이 <아비뇽의 여인들>모델이다. 모나리자도난 사건의 용의자 선상에 자신이 오르자 겁을 먹은 피카소는 슬그머니 제 3자를 시켜 경찰서에 석상을 몰래 갖다 놓는다. 예술의 값어치보다 아름다움 자체가 좋아 공공을 배제하고 자신 혼자만이 그것을 누리기 위해 훔치는 행위가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깔끔하고 치밀하게 대낮에 이루어지는 브라이트비저와 앤 캐서린 2인조 절도범은 자신들의 행위가 언젠가는 덜미를 잡힐 것인지 예견하지 못했을까? 앤 캐서린은 자신들에게 사방에서 시선이 조여 오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렸던 듯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서 수술 장갑을 브라이트비저가 반드시 착용하고 작업을 할 것을, 지나치게 많은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음을 전체적으로 감지했을 때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만 이 강박적 수집가는 그의 인생이 영원히 절단 나는 전환적 사건을 맞이한다. 능숙함과 강렬한 소유욕망은 조심성을 망각하게 한다.

 

169쪽 절도품 도록 중 발췌


이 저작의 재미는 예술품 절도와 그 예술사적 의미의 향유에 그치지 않는데, 브라이트비저와 앤 캐서린의 동거와 그네들의 관계에서 추정되는 애정의 본질과 갈등, 브라이트비저라는 인물의 절대적 보호자인 어머니, 후일 그가 수감되었을 때 아들의 성장을 외면했던 아버지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처럼 인간애가 자칫 메마른 르포기사가 될 저술을 풍성한 인간미로 에워싼다. 게다가 마치 추리문학과 같은 긴장감까지 한 몫 해서 그들의 절도 행위에 순간 은밀히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그 불합리하고 부당한 행위에 동조했음에 놀라기도 한다. 특히 7년여에 걸친 절도이후 운명의 날이 다가와 그가 수감되었을 때 그를 면담한 심리학자들을 비롯한 특이하게도 독보적 분야의 전문영역을 연 예술범죄학, 분석심리학자들의 예술품 절도에 대한 진단 등은 자칫 가벼운 일화로 멈출 이야기의 품격을 올려놓기도 한다.

 

수집을 통해 세상과 분리된 자기만의 세계로 마법처럼 탈출하는 느낌을 지적하며 충동적 수집 강박을 처음으로 언급한 베르너 뮌스터버거의 수집: 통제할 수 없는 열정, 진정한 수집가라면 모두 포화점이 없다. 충분하다고 느끼는 순간 따위는 절대 오지 않는다.”며 예술품을 훔치는 부류가 자신의 행위를 결코 부도덕하다고 느끼지 않음을 지적한 에린 톰슨의 소유 Possession는 예술품 범죄에 대한 연구를 하고자하는 이들에게 훌륭한 참조가 되어줄 것 같다. 부모의 이혼, 가정의 파탄으로 고독의 구덩이에 빠졌던 청년은 예술로나마 주변을 채워야 했을 것이라는 한 영혼에 대한 관대함은 이내 구제할 길 없는 나락으로 빠지는 인간에 대한 속수무책의 허탈함을 느끼게도 한다.

 

브라이트비저가 자신의 절도 행위를 예술에 대한 도취로 주장하며 내세운 스탕달증후군 또한 우리 인간들의 자기기만 혹은 정당화의 모습으로 바라보게 하는데, 예술 작품을 보고 감동과 열띤 관능에 압도되어 황홀경을 경험하는 정신적 분열증상을 이른다. 1871년 스탕달이 일기 형식으로 쓴 이탈리아 여행기 로마, 나폴리, 피렌체에서 산타 크로체 성당 구석의 작은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의 감상에서 느꼈던 정신적 혼란의 묘사에서 나온 용어인 모양이다. 사실 이것은 그럴듯한 말로 꾸며낸 여행에서 겪는 시차로 인한 피로의 어지럼증, 떨림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브라이트비저의 예술 운운 하는 주장은 도벽의 기만적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전과자로 낙인이 찍힌 인간에게 세상은 거듭되는 그의 절도 행위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는 201920여 년 전에 훔쳤던 상아조각상 아담과 이브가 있는 벨기에 루벤스 박물관의 단돈 4달러 짜리 책자를 훔치다 다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강화된 예술품 절도범에 대한 처벌로 인해 60세가 되어서야 출소하게 될 것으로 예견된단다. 이제는 한낱 파렴치한 소매치기범으로 전락한, 더 이상 심미안의 소유자로서 단순 도둑놈이 아님을 항변할 수 없을만큼 전락한 것이다.

 

그의 인생을 영원히 뒤바꾼 스위스 루체른에서의 체포와 구속은 아들을 예술에 빼앗긴 어머니의 대대적인 다락방 숙청 작업으로 강변에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수많은 유화들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인류 문화유산에 대한 무책임한 훼손은 그를 공공의 적임을 피할 수 없게 한다. 매년 5만 건의 예술 도난사건이 발생하며 개인 소장물의 경우 그 회수율은 10%, 박물관과 미술관 등 공공기관의 도난회수율은 50%에 그친다고 한다. 우리사회의 현황은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으나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미국 등 구미 선진국들은 예술품 범죄 전담기구에서 20명에서 300명에 이르는 특수요원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이 책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번은 하게 되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가히 매혹적인 심리스릴러에 비견되며, 강렬한 예술 작품 앞에서 미학과 윤리의 경계에 서 갈등하는 마음에 이입되기도 하고, ‘집착과 그릇된 재능에 의한 범죄행각과 그 심리탐사이며, 배신과 놀라운 반전이 있는 흥미진진한 한 인간의 삶의 전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저술은 놀라운 예술 작품이다. 무언가에 지극한 사랑으로서의 이 미친 예술 이야기는 예술이란 진정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멋진 질문을 던진다. (*수록된 26작품의 절도품 컬러 도록이 책의 완성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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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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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열면 고개를 들어 흰 눈을 받아들이면 속눈썹이 초설(初雪)을 가로막았다.” 라는 영상미 그득한 이미지들로 독자의 지각이 깨어날 것을 독촉하는 문장들과 마주하게 된다. 동시에 잠속 꿈과 회상인가 하면 현실의 삶이 펼쳐지고 그 두 공간 경계의 시차에 적응하느라 안개 속을 거니는 기분에 휩싸인다. 그런데 이 당혹스러운 지각의 놀라움은 이내 영화 속 플래시백 장면처럼 익숙해지고, 세월에 훼손되어 찢어진 기억들이 마치 디지털 고해상도로 복원된 영상처럼 마술적 회복과 더불어 시차의 곤혹은 곧 융해되어 사라져버린다. 영화를 관람하듯 지각은 적응하여 소설 속 두 주인공이 찾으려는 물음, 그 진실의 여정에 무난히 동행하게 된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작가의 기교가 마음껏 발휘된, 기억과 현재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상황과 장면들의 배치는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다. 눈물의 여정은 꿈에서 시작하여 가을의 첫날 아침 파리에 도착했다.”는 독백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타이베이의 여자는 파리의 작은 아파트 매트리스에서 깨어난다. 형식의 구성과 상황 내용의 절묘한 합치는 아마도 이 소설의 독특한 매력일 것이다.

 


잠자지 못하는 여자, 타이베이의 고위 정치인인 남편의 가부장적 권위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그런 남편에게 언제나 차분하고 성실한 아내임을 가장하기 위해 여자는 충분히 자고 난 몸 상태를 연기해야 했다.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영화자료관의 복원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낭트 영화제에 여자는 초대된다. 여자는 자지 못한 잠을 자기위해서, 그리고 사람을 찾기 위해 함께 초대된 복원 영화에 출연했던 남자가 있는 파리로 찾아간다. 여자는 남자의 팔꿈치를 매만지며 비로소 오랜만에 잠을 이룬다. 남자의 팔꿈치는 어린 시절 침대 매트리스 광고를 위해 함께 잠들었던 여자에게 평온한 잠을 가져다주는 그런 유일한 위안의 감각 매체이다. 소설은 이렇게 두 사람의 기억을 점진적으로 쫓아나간다.

 

현재로 소환되는 기억들의 점진적 여정에 따라 여자의 불면과 그 불면의 근원인 굴종과 속박을 요구하는 세상의 왜곡된 시선들과 아이의 상실과 미완에 그쳐지도록 강요된 애도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런데 이 말 되지 못하고 묻혀있던 진실의 기억들은 남자의 기억들과 교호하며 메워지지 못했던 진실의 틈새를 완성해 나간다. 여자는 강간과 임신, 임신중절, 그리고 저열하고 파렴치한 협박과 임신, 불법 약물을 통한 강제유산, 이 과정에서 여자가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옆에서 그 어떤 진실도 묻지 않고 나누어 져주었던 친구, 하지만 여자가 자신의 배우자가 되기를 기대했던 남자가 동성애자임을 알게 되었던 그 어느 날의 기억, 그리고 윌슨병으로 쓸쓸히 죽어가야만 했던 딸아이에 대한 엄마로서의 죄의식, 성년이 된 아들의 정체성을 알게 된 어느 날의 장면들이 파리의 작은 공원, 아파트 창 밖 풍경, 그리고 파리 골목의 산책길, 투르의 들판과 루아르 강변에서의 현재의 모습과 융화하며 스크래치 가득한 옛 영화 필름에서 비춰지는 화면처럼 비가 되어 내린다.

 

한편 남자는 사랑하던 연인 J의 죽음을 떨쳐내지 못한 채 그 그리움에 대한 무기력으로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다. 그럼에도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아파트로 찾아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리곤 여자와 함께 걷는 파리 골목의 산책에서 목적지가 되어야 하는 낭트로 향하는, 그러나 불분명한 여정을 함께한다. 이 동행의 시작에서부터 여자는 남자에게 내 아들을 돌려달라고 악을 써대기 시작한다. 뜬금없이 아들을 찾아내라고? 소설의 치밀한 장치들을 독자는 다시금 세밀하게 되돌아보게 된다. , 사라진 존재의 자취와 그 경로를 찾을 수 있도록 흩뿌려진 빵 부스러기가 무엇이었던가? 이것은 남자가 찾고자하는 J의 흔적을 헤매는 경로와 더불어 여자가 찾고자하는 애도와 사랑에 대한 물음과 결합하여 진실, 그 고통과 상처들을 형성했던 주변의 것들, 알지 못했던 배려와 사랑, 알리고 싶지 않거나 알릴 수 없었던 사실들이 수면으로 떠오른다.

 

아버지의 거침없는 외도, 그 외도 현장을 엄마와 함께 목격해야만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 그리곤 버리듯 어린 자신과 지금은 정치인의 아내가 된 여배우인 소녀를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엄마, 남자의 동성애에 대해 폭언과 폭력, 저주의 욕설을 뱉어내며 홀로 죽어갔던 아버지,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소년과 함께 매트리스에서 잠자는 광고에 대해 부녀자의 도리를 지키지 않았다, 구역질나는 변태같은 짓거리를 한 여자아이라고 비난을 퍼붓던 세상을 감당해야 했고, 아이의 고통을 외면하고 아이를 이용해 돈 벌이와 명예의 대리충족만을 욕망했던 엄마와 남성의 권위에 대한 신앙적 신념을 가진 시어머니와 남편의 가부장적 태도, 그리고 그네들의 위선과 허위의식으로 인한 질식과 같은 속박, 자기 아이들을 지켜내지 못한 어미로서의 죄의식이 쓸쓸히 소환된다. 그래서일까? 소설의 장면들마다 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하다.

 

그들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그들이 찾아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자에게 여성으로서의 굴종과 속박을 당연시 요구하는 뒤틀린 성의식이 지배하는 타이완, 동성애법이 형식적으로 인정되었지만 그네들에 대한 변하지 않는 질시의 시선들은 노출되지 않은 폭력과 살육의 의지와 다른 것이 아님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세계의 양상 속에서 여자의 고통에 대한 귀 기울임과 발설되지 않는 목소리, 묵묵히 돌봄과 보호로 여자를 지켜주었던 남자의 또 다른 슬픔이 교차한다. 여기서 나는 게이미(Gay)’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여성들이 세상에 할 수 없는 심연의 목소리를 들어주며, 고통에 공감하고 보호하는 동성애 남자를 지칭하는 타이완에서 통용되는 신어인 모양이다. 여성과 성소수자들의 연대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언어로 여겨진다.

 

소설은 영상미 넘치는 현재와 기억이 수없이 반복되는 플래시백 장면들이 쌓여가며 이 세계에 맴도는 끈질긴 성적 약자의 상처와 고통을 한없이 파내려간다. 그들의 반점으로 얼룩진 기억의 테이프를 현재로 가져와 흐려진 화면에 새로운 색, 생을 지속할 수 있는 묻힌 진실의 복원을 통한 위로를 입혀낸다. 아마 이 소설은 한 편의 곰팡이 핀 두 사람의 낡은 인생을 복원함으로써 시차를 없애는 복원 기술로 그네들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깊은 탐색일 것이다. 읽어 나갈수록 선명해지는 이 세계의 음험한 악의로부터 탈주하려는 두 사람의 현재에 떠오르는 비밀의 이야기들에 끝없이 빠져들게 된다. 우리의 타자에 대한 이해와 포용의 역량은 어디쯤에 도달해 있을까? 소설은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우리네 사회와의 관계와 비판에 대한 정말 조심스러운 질의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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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10-01 0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너무 매력적인 리뷰네요. 글을 정말 잘 쓰시는 것 같아요!

필리아 2024-10-01 07:29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초록비님~
비 내리는 아침입니다, 좋은 일 많은 하루 되시기를요. :)
 
장 크리스토프 1 동서문화사 세계문학전집 32
로맹 롤랑 지음, 손석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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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글은 로맹 롤랑의 10장 혹은 10권의 대하소설 장 크리스토프(Jean Christophe)1~5권에 대한 독서 후기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쓴 빌헬름 마이스터와 비견되는 프랑스 교양소설의 대표작으로 불리기도 하는, 악전고투하는 인간 영혼의 격동적 인간의 목소리이다. 이 소설은 한 인물을 내세워 그 어떤 허위의 영웅주의를 그려내려는 케케묵은 교훈주의가 발붙이려는 작품이 아니다. 지식인이라는 얼굴 뒤에 숨어 비열함을 배설하는 이 세계의 권위와 질서에 충돌하며 자기 이상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는 한 인간이 겪어내야 하는 숱한 굴욕과 좌절의 실체 속에서 지극히 인간적 감정이 들끓는 감동적인 생명의 서사시라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을 하나의 음악의 시라고 부르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은 주인공의 유아기를 보여주는 새벽을 시작으로 아침’, ‘청춘과 같은 인생의 성장기를 표현하는 장을 거쳐, 성장한 인간이 겪어야 하는 이 세계의 온갖 갈등과 증오, 무기력과 절망, 그 속에서 다시 솟구치는 노여움과 분노에서 길어 올린 삶의 강렬한 욕망의 무대들과 마침내 새로운 날에 이르는 총 10개 장(혹은 권)으로 구성된 대하(大河)소설이다. 1890년에 시작된 발상으로부터 10여년에 걸친 집필 끝에 19126월에 탈고한, 한 작가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모든 이해가 망라된 필생의 역작이다.

 

10개의 장은 각기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던 듯하다. 이 동서문화사의 번역판본으로 1,700여 쪽이니, 여타 국내도서 판본으로는 2,500여 쪽에 이르는 분량이라 해도 될 것 같다. 한 호흡에 내달려 읽을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양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작품의 감상이라는 점에서도 각 장()을 기준으로 천천히 음미하며 읽도록 작가는 애초에 권유하려 했던 듯싶다. 각 장()이 한 인간의 특정 시기에 마주해야 하는 체험의 성분이다 보니, 그 고유한 경험의 세계들마다 독자들의 마음에 건네는 현상들이 다를 것인 까닭이다. (이를테면 새벽은 초등생이, ‘아침은 중학생이, ‘청춘반항은 고교생이, ‘광장시장이후는 대학생과 성년의 독자가 읽는 것과 같이)

 

소설은 제3의 관찰자 시점으로 씌어져있는데, 다분히 전지적 작가시점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이러한 시점이 직접으로 드러나는 5장 혹은 5권인 광장 시장에는 저자와 그림자와의 대화라는 작가와 주인공인 크리스토프와의 대화 장면을 통해 이 세계에 저항하며 단독적인 세계, 크리스토프가 삶의 목적으로 믿는 선을 위한 투쟁과 그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관계의 고려와 선을 위한 싸움에 도사린 악의 지향성에 대한 담화로 작가가 개입한다. 이것은 작가 로맹 롤랑이 작중 인물인 크리스토프에 대한 깊은 애정과 바로 작가자신의 이상을 투영한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 천재 예술가, 이 세계의 부패와 자기 몰이해에 도전하는 혁명가로서의 인물에 대한 존경의 의지를 반영한 작품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1- 새벽

 

1장 또는 1권에 해당되는 새벽은 아기 장 크리스토프(이하 크리스토프라 표기)’와 그의 가계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져있는데, 할아버지인 전직 궁중 악장 출신인 장 미셸이 요람에 누워있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내뱉는 인상적인 말로 시작된다. 이거 참 밉게도 생긴 놈이로군! (...) 아무 걱정할 것 없다. 얼굴이야 차차 변하는 거니까. 못 생겼으면 어떠냐! 이 애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한가지야. 훌륭한 사람이 되어달라는 거지.”

 

장 미셸의 아들인 크리스토프의 아버지 멜키오르는 아버지의 후광 덕에 궁중 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살아가지만 한미(寒微)한 집안의 여식인 아내 루이자와의 결혼을 후회하며, 이것이 자신의 출세를 막아선 것이라며 가장의 역할은 물론 궁중 음악가로서의 역할마저 소홀히 하기 시작한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루이자는 궁핍을 면하기 위해 마을의 피로연이나 연회 등에 요리사로 품팔이를 나서는 고통을 겪는다. 나태하고 술주정에 세월을 보내는 아들을 대신하여 장 미셸은 며느리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몇 푼에 불과한 연금을 쪼개 가계를 돕고, 크리스토프에 음악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삶에 대한 기개와 가치에 대한 경험들을 들려준다.

 

생 마르탱 수도원의 장중하고 완만한 종소리가 밤공기 속으로 울려 퍼지고, 그 영묘한 음악이 어린 크리스토프에게 풍부한 젖처럼 그의 속으로 흘러들어가며, 세상이란 온통 자유롭고 밝은 미래와 안락한 보호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기던 여섯 살 아이는 어머니 루이자가 품팔이 일을 하는 집을 찾아갔을 때 마주친 사건으로 인해 인간 중에는 명령하는 사람과 명령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기네 집 식구나 자신은 명령하는 사람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어머니에게 명령하던 한 여인은 어린 크리스토프를 자신의 아이들에게 끌어다 놓는다.

 

크리스토프의 추레한 옷차림은 곧 가난뱅이 아이로, 무시하고 노리개로 삼아도 문제가 되지 않을 아이로 인식되고 놀림과 폭행을 당한다. 크리스토프는 저항 끝에 그 집 아이를 때리게 된다. 이 장면은 내게 아주 익숙한데 우리 주변에서 늘 관찰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잘못한 아이들은 자기 부모의 권력 뒤에 숨어버리고, 약자의 자식은 바로 비굴한 자기 부모에 의해 얻어터지는 상황 말이다. 어린 크리스토프는 격렬한 고통에 사로잡힌다. 참담하고 미칠듯한 분노가 들끓는 여섯 살 아이의 마음이 온전히 전해진다. 아마 타인의 악의에 대한 최초의 인식이고 부끄러움과 부정에 대한 반항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 유아 성장기인 새벽은 보통의 인간에게는 발생치 않는 하나의 사건이 더해지는데, 크리스토프의 음악, 특히 작곡과 연주 능력의 천재성이다. 주정뱅이 바이올리니스트 아버지 멜키오르는 아들 크리스토프의 작곡 능력을 폄훼하고 한갓 유치한 아이의 흥얼거림으로 무시하지만, 할아버지 장 미셸이 크리스토프가 흥얼거린 선율을 악보로 표기한 것을 보자 야심으로 돌변하여 크리스토프를 채근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이 부당한 강요를 읽어내고 좋아하던 음악에 혐오를 느끼고, 연주하기를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그럴수록 학대는 심해지고,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위대한 음악가로서의 희망으로 이내 굴복한다. 멜키오르는 대공으로부터 크리스토프가 작곡한 음악 연주회를 승낙받기에 이르고 크리스토프는 공식 궁중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등록된다. 음악 천재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대공의 보호 하에 있게 됨으로써, 음악가로서 지위가 인정되고, 그 능력 발산의 토대가 갖추어진 것이다. 이것은 멜키오르의 가정에 대한 책무를 더욱 방기하게 하고 어린 아이는 가계의 일정 벌이를 책임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고작 여섯 살이다.

 

한 인간의 새벽에 이미 세상의 오욕과 허위, 고난과 역경이 몸에 새겨진 것이다. 어린 크리스토프와 어머니 루이자의 미약하지만 든든한 후원자였던 할아버지 장 미셀마저 죽음으로써 그야말로 가계는 침몰한다. 크리스토프가 궁중 악단원으로서 받는 급여까지 빼앗아 술로 탕진하는 아버지, 어린 아들의 짐을 덜기위해 품팔이를 하는 루이자, 급기야 아버지 멜키오르마저 술에 절어 싸늘한 시신이 되고, 열 네 살의 크리스토프는 두 동생과 어머니의 삶을 꾸려내야 할 가장의 무게를 지게 된다. 이제 어린아이는 아침을 맞는다. 시쳇말로 소년가장인 크리토프가 청년으로 가는 길목이다. 외톨이, 세상에 대한 신뢰가 손상되었더라도 아직은 여전히 천진난만한 소년이다.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토해 낼 대상이 없던 소년에게 다가 온 우정은 지고한 행복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몽땅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즐거움,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소년들의 우정을 그 자체로 보아주지 않는다. 그 우정에 파렴치하고 불쾌한 빈정거림이 파고들고, 그들 천박한 호기심은 심연을 열어 보여주게 된다. 천진난만했던 관계는 그렇게 더럽혀지고 변해버린다. 그들은 서로 낙담하고 우정은 어둠에 묻혀 사라져 버린다.

 

2- 아침

 

그러나 인생의 아침 아닌가. 사랑은 다시금 소년의 마음으로 들어차고, 집 앞 오랫동안 비어있던 저택에 과부가 된 추밀고문관의 아내인 폰 케리히 부인과 그녀의 여식 민나가 돌아와 살게 된다. 여인은 궁중 연주회에서 본 한 마을의 소년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를 민나의 피아노 선생으로 고용한다. 그들은 동정과 흥미로 소년을 고용했을 뿐, 결코 교육도 훈련도 받지 못한 이 야생의 소년에 대해서 그 어떤 진심도 가지지 않았다. 소년은 그들의 빈정거림을 알 아 볼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없었다. 그네들은 그의 책, 담화, 교양전반에 대한 무지와 조잡한 행동거지에 대한 한탄을 감춘 채 얼마간의 은혜를 베푸는 보호자인 척 하는 태도를 고수한다. 여식인 민나 또한 크리스토프는 보기 흉한 가난뱅이 소년이며, 가축 이상으로 생각지 않고 있었다.

 

고립된 공간에 갇혀 지내는 소녀와 외톨이 소년의 반복되는 만남은 산골짜기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안개처럼 무턱대고 솟아나는 연정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소녀는 여인다운 교태로 소년을 유혹하고 그 풍부한 사랑의 감정에 매몰되어 버린다. 세상은 그렇게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능청스럽고 시치미를 뗀 체 소년의 행동을 관찰하는 눈은 딸과 함께 여행을 떠나버린다. 이윽고 소녀의 부재를 안달하던 소년에게 도착한 편지는 너무 흥분하지 말고, 편지도 보내지 말아달라는 단교의 내용이다. 소년에게는 집에 돌아왔다는 전갈도 전하지 않는다. 뒤늦게 사실을 안 소년은 달려가지만, 우리 딸애를 유혹하다니, 정 말 뜻 밖이라는 말과 함께 두 사람은 안 된다. 신분만 해도...”라며 딱 잘라 멸시적 요소를 담아 냉담한 눈초리를 보낸다. 열다섯 살 소년 크리스토프는 그토록 우아한 영혼이라 생각했던 두 모녀의 무정함을 비로소 감득하고 호되게 따귀를 맞은 느낌으로 수치와 노여움으로 몸을 떤다.

 

소년은 되찾을 수 없이 잃어버린 부질없는 생애의 절망감에 짓눌리며 깨닫는다. 인생이란 휴전 없는 무자비한 투쟁임을. 눈에 보이지 않는 적군, 추하고 어두운 욕망, 인간을 타락시키고 절멸시키려는 것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는 것을. 소년 크리스토프는 그렇게 하나의 인간, 그가 되어야 할, 성취하여야 할 섭리로서의 인간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며, 청춘이 된다. 3(혹은 3) 청춘은 여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경험함으로써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기성의 인간 세계의 질서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작품의 중요한 한 축이라 해도 될 것 같다.

 

3- 청춘

 

크리스토프의 청춘은 이 세계의 냉엄한 시선으로부터의 깨달음인 자기되기로 시작한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켜켜이 쌓인 쓰라린 고뇌를 숨긴 채 세계를 뚫어보는 시선을 가진 인간으로서, 가계의 돌봄과 자신을 위해 착실하게 피아노 교습을 통한 벌이와 작곡을 위한 작업, 궁중 연주를 묵묵히 수행해 나가고, 아버지의 죽음과 동생들의 분가로 어머니와 함께 시장 거리에 있는 작은 집에 셋집 생활을 꾸려나간다. 겸허하고 선량한 여인네의 삶밖에 알지 못하는 어머니, 루이자는 참아왔던 현실의 삶에 지쳐 이제 모든 기운을 잃어버리고 의지의 힘을 상실한 채 무기력으로 빠져든다. 자신의 괴로움에 빠져 어머니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이내 지난날의 유물 속에 좌초한 어머니를 발견하고 아들은 마음 아프게 불쌍한 영혼, 어머니를 동정심으로 안는다.

 

청춘의 도입부는 이러한 두 모자와 더불어 이사집의 집주인 오일러의 가족들을 통한 독일 소시민들의 면모를 보여주려는 듯 한데, 그네들 교양이란 것의 한계, 기질들, 허영심과 하찮은 명예의 집착, 궁구하지 않은 맹목적 종교관에서 보이는 신앙의 이기주의 등, 독일인에게 자리잡은 이상주의의 허위가 배경이 되어 흐른다. 무엇보다 크리스토프가 경험하는 최초의 이성과의 사랑, 자비네, 아다, 로자 등 여인들과의 사랑과 이별에서 드러나는 허무와 씁쓸한 기쁨들, 닳아빠지고 시든 영혼들, 정열적 환각, 사랑의 전율, 그리고 치명적인 나날의 소모, 상실과 살아감의 이유를 직시하는 위기와 극기로서의 시간이다.

 

삶에 대한 희망을 품었지만 현실의 경험들은 치욕스러움과 비겁함과 자기 맹세의 배신을 요구한다. 그는 세계와 자신에 대한 믿음에 고뇌한다. 떠돌이 행상인 외삼촌 고트프리트는 어디에도 붙들려있지 않은 문자그대로의 유목민적 삶을 실천하는 인물인데, 매년 연례행사처럼 누이 루이자의 가족을 찾아오고, 그때마다 크리스토프는 외삼촌으로부터 어렴풋 현자의 면모를 발견한다. 외삼촌은 청년의 정신적 삶에 대한 유일한 조언자로서 인생의 길을 조언한다. 인간이 희망을 품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은 전혀 별개가 아님을, 인간은 결단코 희망과 살아감에서 싫증을 느끼지 않는 것이라고. 따라서 믿음이 없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는 것임을, 해가 뜨는 데 대해서 믿음을 갖, 오늘 일을 생각하고 이치 따위란 버리라고, 생활에서 억지를 버리고, 하루하루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삶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읽어나가던 중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문장이 있다. 조카에게서 고트프리트는 불가능한 것을 해내려 몸부림치는,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욕망을 발견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하면 되는 것을 이라고, 너는 오만하다, 너는 영웅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니까 어리석은 것밖엔 못하지...영웅이라? (...) 난 이렇게 생각한다. 영웅이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다른 이들은 그걸 하지 않는단다.”

 


4- 반항


크리스토프는 이 말의 충일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역량을 초월하려는 시도가 없는 삶이란 보람 없는 삶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후일 그가 보다 넓은 세계에서 지식과 관계의 경험들이 쌓였을 때 그는 알아차릴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이것만은 깨우쳤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기 자신으로 있다는 자유의 즐거움을 각성한 것이다. 청년은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삶의 전환기를 맞는다. 맹목적 반동의 시기이자 자신이 진실이라 시인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되는 그러한 시기에 도달한다. 4반동은 기성의 음악계와 대중의 인식에 도전하는, 자기 확신에 찬 젊은 열정이 세계로부터 소외되고 마침내 무수한 장벽 앞에서 부정되고 좌절하는 인간을 보여준다. 독일의 허위의식을 꿰뚫어보게 된 이 청년 음악가는 기성의 위선적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들, 그리고 대중의 무지를 본다. 이러한 그의 비판적 목소리는 위험하고 해괴한 짓거리로 치부되고, 악의적 소문이 되어 소도시를 휩쓴다.

 

그가 작곡한 독일인의 무기력에 대한 반동의 비판에서 출현한 작품은 철저하게 외면되고, 그의 음악을 조롱하기 위한 작당모의에 의해 안전히 추락한다. 시기와 몰이해, 수구적 보신주의가 팽배한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의 지향을 말하는 음악은 발붙이지 못한다. 대중과 기성의 권력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기에 이 청년의 음악은 무례하고 기이한 것이었으며, 그의 성장을 결코 허용하지 못한다. 작곡가가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고 발표할 수 없다면 토대가 없어진 것과 같다. 그는 비평지에 음악비평을 맡게 되고, 독일의 엄격주의와 속물근성을 비웃음 섞인 관찰안으로 날카롭게 벼려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의 비판은 작곡과 음악 연주가들을 넘어 가수를, 나아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연주를 듣고 있는 청중들까지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기성의 권위에 대한 비판을 넘어 대중을 적으로 돌림으로써 그에 대한 비난과 질시는 극에 이른다,

 

여기서 멈추어야 했는데, 젊은 열정은 내친걸음에 동료 비평계에 훈계를 가하기 시작함으로써 비평가들을 연결하는 상호 암묵적 약속을 난폭하게 깨부숴댔다. 그는 곧 공적 질서의 적으로 간주되고, 무차별 공격의 대상이 된다. 인간은 자기 확신으로부터 빠져나오기가 본디 힘든 존재이다. 크리스토프는 이제 싸움을 할 바에는 머리가 터지는 인간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미친 사람처럼 공격을 계속한다. 앞날을 위한 어떠한 보신처도 마련하지 않은 이 천둥벌거숭이는 급기야 위협을 느낀 비평지로부터 쫓겨나고, 대공의 보호막이었던 궁정연주자의 지위까지 박탈당한다. 크리스토프를 지지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알려지자 수많은 적이 나타나 크리스토프를 공격 보복한다. 승자에 아첨하고 패자를 욕함으로써 자신들의 무지와 욕망을 감추려는 비겁한 자들은 그의 교향곡은 정신병원에서 태어 난 것이다. 그의 경련적 화성은 마음이 메말라 있는 것과 사상이 없는 것을 기만하려는 수작이라고 까지 살인적 비평을 쏟아낸다.

 

홀로 버림받은 음악가, 모든 출구가 닫혔다. 궁여지책에 자비를 들여 작곡한 것을 출판하여 자신의 음악을 알리고자 하지만 6개월 동안 단 한부도 팔리지 않는다. 생계에 대한 위협으로 청년 천재는 그의 처지를 이용하여 값싸게 음악교수를 얻으려는 반종교적 학교에 자리를 잡는다. 그는 박물학을 가르치는 라인하르트 교수의 부인과 공동의 관심사와 친절을 받게 된다. 선량한 교수 부부의 초대에서 그는 애정과 감사의 기쁨과 배은망덕에 대한 대중의 혐오를 깨닫는다. 라인하르트 부인으로 불리는 안젤리카로부터 그녀의 출신지인 알자스지방과 프랑스, 라틴 문명에 대한 매혹을 간접적으로 듣게 된다. 독일의 기만적 이상주의에 똬리를 튼 그 허약함, 그 허위에 올라타 권세를 부리는 기성의 권력과 폭넓게 자리한 대중의 몽매성을 떠나 프랑스에서 새로운 출발을 꿈꾸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어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아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작곡과 답답함을 피해 산책하던 중 들른 술집에서 병사들의 마을 처녀에 대한 성적 모욕을 목격한다. 그들의 행패를 참지 못한 크리스토프는 한 병사를 때려눕히고 커다란 부상을 입힌다. 이때 방관하던 마을 청년들이 가세하여 일군의 독일병사들에게 커다란 상흔을 남긴다. 갑자기 마을 사람들은 크리스토프를 지적하며 그로 인해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그를 군대에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위협하기 시작한다. 피해 대상이었던 마을 처녀는 그들의 비겁을 지적하며, 크리스토프의 해외도주를 돕는다. 이 뜻하지 않은 사건의 범죄 용의자가 된 크리스토프는 불가피하게 파리로 탈주하게 된다. 아마 작가는 이들 농촌 마을의 술집 사건을 통해 당시 독일 소시민들에 팽배한 방관적 태도와 비겁함, 굴종적 인성을 들추어내려 했던 것 같다. 이는 크리스토프가 독일을 벗어나 프랑스로의 이주를 정당화하는, 그의 비판에 힘을 실어주는 적절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 예기치 못한 파리로의 도주는 젊은 비판적 음악가의 지성을 한층 넓고 깊어지게 해주는, 그러나 무수한 모욕과 배신, 좌절과 절망의 번민을 수반하는 그런 인생의 여정이 될 것이다. 5권인 광장 시장은 다층적 의미를 지닌 제목으로 여겨진다.

 

5- 광장 시장

 

주머니에 하루 여관비가 될까 말까한 궁박한 크리스토프가 자신의 몸을 누일 파리의 가장 누추하고 값싼 여관방이 있는 곳으로서 떠들썩한 광장시장이고, 그가 만나고 경험하는 프랑스의 음악과 소설과 시, 연극, 비평, 정치에 이르는 예술과 문화사회 전반에 대한 소란스럽기만한 현상으로서의 광장이자 시장이란 의미로 이해된다. 아마 작가 로맹롤랑의 당시 프랑스를 휩쓸던 예술을 위한 예술, 그 탐미적 세력에 올라탄 사회정치 전반에 만연한 위선과 탐욕, 부패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의 산물일 것이다. 작가는 이를 젊은 독일 천재음악가의 시선을 통해 우회적 비난의 목소리를 실어 직접의 공격화살을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의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프는 프랑스인들로부터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서 입으로만 이상주의를 외치고, 예술과 미의 이름으로 국민의 일반적 풍조인 외설과 퇴폐를 은폐하고 있음을 간파한다.

 

이 장은 온통 프랑스 예술의 각 분야와 정치사회에 이르는 크리스토프의 편력기라 할 만큼 프랑스 사회 전 분야를 망라한 냉혹한 비판의 목소리로 가득 채워져 있다. 따라서 소설적 맛스러움은 가장 덜한, 그야말로 한 편의 프랑스 문예비평이라 해도 될 지경이다. 이 편력을 통해 크리스토프는 그들과 확연히 두드러진 자신의 개성을 확신하고, 그 힘을 배증시키는 시간으로 삼는다. 이 소설은 문학작품으로서의 범주를 초월한다. 새로운 행동으로 가열차게 내모는 한 인간에게 몰아닥치는 무수한 절망들과 그 모멸과 굴종과 실의를 추진력으로 삼기 위해 수없이 고뇌하는 한 인간 내면의 빛을 읽게 된다. 그럼으로써 소설은 이미 숭고한 하나의 정신사가 된다.

 

크리스토프는 이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은 어디서 연원하는 것인지는 6~10권의 기대가 될 것 같다. 내 인생 여정에서 너무 늦게 이 작품이 도달한 것 같은 아쉬움이 있지만 새로운 삶들은 이 순간에도 새벽을 맞으니 그들에게 이 책은 인간과 인간 삶에 대한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리라. 결코 시대의 유행과는 무관한 영원한 배움의 산실이 되어 줄 것 같다. 수많은 검증과 비판 속에서 살아남은 명작, 그래서 고전이라 불리는 명예를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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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 과자와 맥주 동서문화사 세계문학전집 84
서머싯 몸 지음, 이철범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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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소설문학이 작가 의식의 반영이 아닌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점에서 모든 소설은 작가로서 한 인간의 배설물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소설 작품들은 이것을 노골적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것이고, 그렇기에 문()’이라며 지식의 한 체계라는 거룩한 이름의 범주로 부른다. 그러한 점에서 내겐 이 작품 과자와 맥주(Cakes & Ale)는 전형적인 작가의 배설물이며, 나아가 그 배설의 쾌락을 즐기려는 교활한 자부심과 비겁함의 산물로 보인다. 당대 영국 문단에 대한 비판이라는 장막의 그늘 속에서 자신이 지속하여 간직하고 싶은 한 때의 쾌락을 보존하고자하는 의지를 엿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비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작품을 서머싯 몸은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단다. 여든 살 기념작으로 한 작품을 출간하게 되었을 때, 이 작품을 호화장식으로 출간한 것으로도 은폐된 자기만의 즐거움을 위해 써졌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이렇게 추측하게 된 이유는 소설 속 곳곳에서도 드러나는데, 당대 영국 사회의 계급신분에 의한 인간관계에 놓인 뿌리깊은 차별의식과 각종 제약에 의한 인습적 수행에 있어 작가의 분신인 작중 화자인 윌리 어셴든(이하 어셴든이라 함)은 자신의 양육 보호자인 숙부인 교구 목사와 귀족 출신 숙모의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따른 것으로 그려낸다. 나는 여기서 몸의 비겁함과 교활함이 내비치고 있음을 읽는다.

 

또 다른 하나는 소설의 주요 대상 인물 중 하나인 문학 거장으로 불리는 에드워드 드리필드(이하 드리필드라 함)의 죽음에 즈음하여 그의 전기를 쓰려는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앨로이 키어(이하 로이라 함)의 문학적 성공을 향한 각종의 수법을 열거하며, 목적과 수단의 교묘한 조합을 통해서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얼마나 출세할 수 있는지를 더없이 잘 보여 주는 본보기가 바로 로이였다.”,  문학적 재능 없는 자가 문단에서 거들먹거리는 행태를 비판한다. 단지 이것으로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당대 거장으로 칭송되던 드리필드의 출신배경이나 그의 사생활을 들추어냄으로써 은근히 한 문인의 작품 활동이나 작품 자체를 은근히 비하한다. 몸은 이러한 배설을 통해서 아마도 꽤나 커다란 즐거움을 맛보았으리라.

 

끝으로 하나 더 부가 한다면, 아니 이 소설의 절대 중요 제재로써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내용일 것이다. 드리필드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로지와의 육체관계를 동반한 열정적 관계에 중층의 의미를 부여해 작가 자신의 의지를 감추는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 이것은 일석 삼조인데, 드리필드라는 문학거인을 추문의 희생자로 삼음으로써 격하시키는 효과를 얻는 것이고, 로지를 한 때 자신의 연인으로 삼음으로써 우월감을 성취하는 것이다. 게다가 로지라는 여인은 현실 속 작가의 쾌락적 사랑의 대상이었던 극작가 헨리 아서의 딸인 수 존스의 변신으로서 글로 보존된 숨겨진 관음의 화신이라는 점이다. 결국 이 소설은 아주 교활하고 비겁하게 써진 작가 개인을 위한 쾌락의 절대물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물론 이 소설은 이처럼 자전적 요소들로 작가가 숨기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욕망들로 인해 비하될 수 만은 없는, 우리네 인간 개인들과 사회에 대한 성숙한 성찰들이 있으며, 소위 사로잡는다라는 이야기의 구성과 전개에 있어 탁월한 재능을 갖춘 작품임을 부정하기는 어렵기도 하다.  대중 독자를 사로잡는 작가의 재능은 로이라는 드리필드 전기 작업을 수행하는 인물을 빗대어 한 편으론 폄하의 논의로,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 작품의 불가피한 요소를 오가며, 바로 대중적 흥미를 자신의 작품에 대한 역설적 정당화 논리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소설 속 1인칭 화자인 어셴든은 어떤 비평가들은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인기를 하찮게 여긴다. 인기란 평범함을 나타내는 증거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몸은 이 말을 진실로 믿어서가 아니라 역설적이고 다양한 반면이 있음을 말하고자 함이었던 것 같다.  소설의 제목, ‘Cakes & Ale'이 셰익스피어의 십이야에서 인생의 향락, 삶의 쾌락을 뜻하는 관용구로 사용되었 듯, 인기란 다름아닌  일반 독자를 사로잡는 뛰어난 재능임을 입증하는 당찬 실현임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일 게다.

 

몸은 어셴든의 입을 통해  어리석은 독자들의 흥미를 끌려는 멜로드라마 같은 사건들도 나한테는 아무 매력이 없었다.”고 말하게 하지만,  이 말은 오히려 더욱 이 작품이 바로 그러한 멜로드라마의 유형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역설적 진술인 것이며, 실제 작가는 화자의 뒤에 숨어. 소설들 대부분이 전형적 통속 소설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며,  불멸의 걸작이 햇빛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사라지는 일도 있겠지만, 후세 사람들이 그걸 무슨 수로 알겠는가라는 인식을 슬며시 내보이는 미끼로 진술된 것 같다. 이 소설은 쾌락적 흥미를 주 요소로 하고 있다.  때문에 이야기의 재미는 아주 자극적이어서 흥미, 매력, 사로잡는, 향락과 같이 그가 문단의 세태를 빈정거리며 제시한 요소들이 모두 버무려져, 대중적 인기를 얻는 작품이어야 함을 실천한다는 관점에서 애초에 이 소설은 흥미로 가득한 인기를 겨냥한 작품으로 써졌으리라 여겨진다.

 

열여섯 살 쯤으로 추정되는 어셴든은 숙부의 목사관에서 계급적 우월의 태도로 사람들과 세계를 인식한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하는 것은 자신들의 신분까지 천박하게 낮추어지는 것이라 삼가는 것인 관습인 시절이다. 소년 어셴든은 자전거 구입을 숙부로부터 승인 받아내자 홀로 타는 연습을 하지만 실패만을 거듭한다. 이때 두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데, 소설을 쓴다는 석공의 아들인 드리필드 부부다. 어셴든은 짐짓 거만하게 두 사람을 대하지만 상냥하고 붙임성있게 말을 거는 드리필드 부인의 친절에 그만 드리필드의 도움을 받아 자전거를 홀로 타는 데 일거에 성공하게 되고, 이후 어셴든은 숙부내외 몰래 친분을 쌓아나간다. 사실 이것은 드리필드의 죽음 이후 그의 전기를 쓰려는 동료 작가 로이로 인해 야기된 추억으로 시작된 회고의 기록이다.

 

로이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문호의 이미지에 드리필드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한다. 때문에 로이가 쓰는 드리필드의 전기는 아마도 부정적 이미지가 제거된 말끔한 것이 될 것이다.  소문나면 안 될 비밀들을 모두 숨긴 채 번듯한 전기를 엮어 내 놓으려는 것에서 어셴든은 부조리한 당대 문단의 왜곡된 조작적 분위기를 포함한 비판의 시선을 들이댄다. 로이라는 인물은 자메이카 총독을 지낸 영국 고위관료의 아들로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와 소설가가 된 한 때의 인기 작가이다. 그는 비평가에 잘 보이려 애쓰는 작가 유형의 대표자다.

 

로이가 어셴든에게 하는  유명한 비평가들과 의견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불안하지 않나?” 하는 물음은 그의 인물 됨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물음에 어셴든은  별로, 나도 글을 쓴 지 벌써 35년이나 되네. 그동안 작가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많이 보아왔지, 천재라고 추앙받으면서 짧은 시간동안 영광을 누린 뒤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라며, 문단에 의해 조작된 평판을 얻은 작가와 작품은 결국 쉽사리 잊혀질 뿐이라고 로이의 인식을 비판한다.  그런데 이 인식은 불멸의 걸작과 관련한 인기있는 소설에 대한 어셴든 자신의 인식과 충돌한다. 물론 대중적 인기와 문단 또는 비평계의 조작은 그 성격이 달라 완전한 비교 가치는 아닐 것이지만, 문학작품의 위선이라는 악덕의 관점에서는 동일한 기준이 될 것이다. 사실 어셴든의 당대 문학계에 대한 신랄하고 준엄한 비판이란 것의 이면에는 질투라는 썩 유쾌하지 못한 감정이 도사린 듯 보인다.

 


결국 이 소설은 로이가 쓰려는 드리필드에 대한 매끈한 전기에 대해 어셴든이 숨김없이 쓰는 사실로서의 전기소설이라는 위상을 갖는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몸의 분신인 어셴든이 진정 비판하고자 하는, 혹은 세상이 추앙하는 대상을 격하하려는 거장은 누구였을까? 가 궁금해진다. 석공의 아들이며, 두 번의 결혼, 중산층 등 평민 계층의 인물을 통해 당대 영국사회의 실상을 비판했던 손 위 세대의 거장은 토마스 하디(1840~1928)이다. 어셴든은 드리필드가 신분이 낮은 자의 자식이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자신과의 관계에서 둘이 나누는 대화의 어투나 그가 자신을 대했던 낮은 자세를 눈에 띄게 반복한다.

 

또한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로지가 술집 여급 출신이며, 자유로운 성적 관계를 주변 사람들의 입을 빌어 지속적으로 비하한다. 이처럼 작가의 작품 자체와는 무관한 극히 사적 삶을 통해 격하하는 동시에, 문단 내 평판을 좌우하는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트래퍼드 부부를 등장시킴으로써, 그들의 종속적 인물로서 문단의 평판을 획득하고 거장으로 불린 것으로 묘사하여 문학적 역량 또한 신뢰할 것이 아니었음을 넌지시 비춘다. 몸은 이를 통해 자신이 통속작가이거나 단지 대중인기에 영합하는 작가로 치부되는 문단 내 현실을 돌파하려는 하나의 배설로서의 쾌락적 글쓰기처럼 여겨지는 이유이다.


나는 소설 속 드리필드의 모델로 추정되는 토마스 하디의 결혼 생활의 진실을 알기 위해 간략한 기록들을 살펴보았는데, 첫 번째 아내는 술집 여급과는 전혀 다른 변호사의 딸로서 오히려 토마스 하디보다 우월한 계급 출신여성이었기에 그 신분 차로 인한 갈등으로 두 사람이 결별한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작품은 소설, 허구의 산물이다. 그런데 그의 두 번째 부인에 대한 묘사는 실제 사실과 상당부분 부합한다.  플로렌스 덕데일로 불리던 여인은 소설의 내용과 같이 하디의 문학적 명성을 자랑스러워했고, 후일 토머스 하디 전기를 집필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로이가 쓰려는 전기 역시 드리필드의 두 번째 아내인 에이미의 요구에 의한 것이고, 그녀가 직접적으로 관여한다는 의미에서 거의 유사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몸은 왜 드리필드의 첫 번째 아내는 다른 성격의 인물로 변조한 것일까? 여기에 이 소설의 향락적 재미가 있다. 이 재미는 대중이 기대하는 멜로드라마적 요소와 더불어 자신이 간직한 소중한 사랑의 기억인 여인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을 은폐할 수 있는 기막힌 위장 수단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몸과 열정적 사랑의 시간을 8년 남짓 했던 여인인 수 존스는  내면의 밝은 빛이 밖으로 흘러 넘치는 것 같은 여인이라는 찬양처럼 그의 인생에 유일한 여성이었을 것이다. 소설에서도 로지의 초상화를 온 정성을 다해 그려내는 화가가 등장하고, 그 초상화에 대한 어셴든의 첫 인상은 여기 기록하여 남겨두고 싶을 만큼 강렬하다.  나는 그녀와 그림을 뚫어져라 보았다. 갑자기 심장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가 날카로운 칼로 심장을 푹 찌른 것 같았다.(...) 묘하게 기분 좋은 아픔이 느껴졌다.”

 

로지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의 수사가 책의 몇 쪽에 걸쳐 흐른다. 너무 아름다워 숨이 막힌다고, 수 존스는 이렇게 소설 속 로지의 몸()을 입고 작가 서머싯 몸의 영원한 여신으로 박제화된다,  나폴리 박물관의 정교한 프시케의 조각상처럼.  실제 수 존스의 초상화는 몸의 평생 절친이었던 영국 왕립미술원 원장이었던 제럴드 캐리가 그린 초상화로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 그림은 아마도 소설 속 로지에 대한 묘사와 거의 일치된 감상을 주는 모양이다.

 

나는 허구의 소설을 작가의 현실적 삶으로부터 유추하려는 이 감상이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 소설은 다분히 작가의 전기적 작품임을 부인할 수 없는 성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 어셴든에 의해 폄하되고 비판되는 문학비평가로 등장하는 로이가 그렇고, 드리필드의 명성을 유지 존속시키려는 두 번째 부인 에이미나, 드리필드를 문학계의 거장으로서 평판을 만들고, 그로부터 자신들의 비평가의 지위와 영향력을 계속했던 트래퍼드 부부 모두 현실 속 인물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렇기 때문이다.

 

후일 몸은 여든 살 기념 인터뷰에서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지적을 모두 긍정했으니 작가의 실제 삶과 분리하여 읽는 것은 오히려 작품에 숨겨진 의도를 방해하게 되리라 생각된다. 신분질서의 비인간적 계층질서에 대한 혐오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체화된 뿌리깊은 인습에 굴종된 모습을 보이지만, 술집 여급 출신이라는 로지의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과 그녀의 분방한 성적 자유의 행로에 대해 진심을 다해 긍정하고 응원하는 것에서 한 개인을 둘러싼 세상의 질서와 관습을 이겨낸다는 것의 모순이라는 어려움을 발견하게 된다.

 

혐오하면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그 나약함과 사랑과 명예의 소유를 향한 갈망들이 때론 거친 격랑처럼 몰려오고, 때로는 구름 한 점 없는 여름날 저녁같은 고요함이 되어 흐른다.  한 인물의 전기를 쓸 때 전체적 조화를 생각해야 한다는 균형이라는 조작된 글이 아니라 엉뚱한 것을 집어넣어 전체 인상을 흩트리려는 작가의 그 교활함을 사랑하게 된다.  어쩌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이 작품의 진솔함이 바로 이 소설이 시대를 계속하며 명작으로 독자들을 유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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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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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가 까다롭지만 고상하고, 심술궂지만 고결하고, 독선적이지만

인류의 권리와 자유를 진심으로 열망하는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해즐릿 사후 100주년 기념 에세이에서


윌리엄 해즐릿은 최소한 조지 오웰이나 토머스 드 퀸시, 찰스 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에세이스트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라는 평가와 같이 현대의 관문에 들어선 19세기 당대의 새로움을 분석하고 해설해주는 출중한 재능을 지닌 치열한 문장가이자 지성인이었다. 모두에 인용한 해즐릿 사후 100주년 기념 에세이를 쓴 버지니아 울프가 그의 글과 인물됨에 대해 묘사한 것처럼 우리 또한 그의 글에서 유사한 느낌을 갖게 된다. 해즐릿의 글들은 준엄하고 냉소적이며 신랄하고 예리하지만 인간 심리의 깊이를 모색하고 세상사의 이치를 스스로 납득하여 그 사색의 결과를 공유하고 싶어 했던 인류애의 소유자임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해즐릿의 이 유일한 국역본을 읽으며 시종 야릇한 흥분과 공감을 잃지 않았다. 그의 탐색적이고 분석적이며 냉소적인 비판의 시선에 놓여있는 준엄한 지성과 그 활기가 여기 있는 듯 다가왔기 때문이다. 학식을 존중하지 않는 당대의 분위기와 그를 헐뜯는 블랙우드 매거진과 같은 보수 저널들의 거짓말과 조롱에도 자신의 원칙에 충실했으며, 결코 정부의 도구가 되지 않았던, 오직 진리를 추구하며 굴욕과 환멸의 고통을 겪어냈던 인물에 대한 존경을 갖게 된다.

 

이 에세이집은 버지니아 울프의 기념 에세이와 여섯 편의 해즐릿의 에세이를 수록하고 있다. 독자의 욕심 같아서는 그의 에세이집 인간 행동론, 좌담, 정치 에세이등 보다 많은 글들을 접하고 싶지만, 이 국내 최초의 해즐릿 에세이집은 그야말로 최고의 글들이 엄선되었음을 절로 깨달을 만큼 독보적 강렬함이 발산된다. 1819년 반혁명적인 반동 지식인들과의 투쟁으로 그의 천재성만큼이나 세상에서 배제되어 그의 글들은 사장되었던 것 같다. 이를 다시금 세상에 복귀시킨 장본인이 바로 울프였던 것 같다. 울프는 그녀의 에세이에서 자신은 그를 마음에 들어 했을 거라며 현란하지 않고 화려한 수식 없이 오직 진리를 찾고 싶어 한 절박한 욕구를 위해썼을 해즐릿의 글들을 옹호한다. 그의 글들을 200년이라는 시간 뒤에 이국의 장소에 있는 한 독자가 생생하게 읽을 수 있게 된 것도 아마 울프라는 지성의 덕택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200쪽 남짓한 에세이집의 매 페이지마다 이처럼 많은 색인 스티커를 붙인 적이 없었던 듯하다. 거의 모든 페이지가 형광펜 밑줄로 가득 채워졌으며, 옮겨 써 놓은 문장들도 조금 과장해서 거의 노트 한 권 분량에 이르렀다. 이 에세이집의 표제명이 된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는 단연 어떠한 수식어도 필요없는 지혜와 집요한 탐구 정신이 돋보이는 글이다. 그 강렬한 맛에 내 정신이 어찔할 정도다.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의 오늘날 우리는 해즐릿만큼 쓰지 못한다.”는 고백은 결코 실언이 아님을 확인케 된다. 이하 감상글은 여섯 편 중 내게 인상적이었던 세 편의 글에 대한 간략한 인상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모든 문장을 옮겨오고 싶은 마음이지만 절제 하련다.

 

1.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이 글은 해즐릿이 탐색하고 분석한 인간 본성론의 한 단면일 것이다. 이 글이 쓰인 시기에 대한 기록이 제공되지 않아 정확한 시기는 알 수가 없지만 아마 인간 행동론에 수록된 1805년이거나, 그가 모닝 클로니클의 의회 출입기자로 정치 기사를 쓰던 1812년 무렵일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해서 이 글에 투영된 그의 분석 대상이 되었던 인간모델들은 어쩌면 정치인들을 비롯한 소위 권력 계층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어조의 신랄함은 더욱 날카롭고 강렬하다.

 

증오에 물리는 일은 있을 수 없고, 농축된 악의처럼 잘 보존되는 것도 없다.

우리는 모든 일에 싫증을 내지만 타인을 조롱하는 일에는 그렇지 않다.” -52쪽에서

 

이는 결코 주의깊고 치열한 관찰을 통하지 않고는 획득될 수 없는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처럼 보인다. 정말이지 인간의 마음이란 들여다보면 볼수록 반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혐오할 게 없으면 생각과 행동의 원천마저 잃어버릴 것 같기만 하다. 우리는 비근하게 이러한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어떤 비극적 사건을 목격하는 일이라면 열정적으로 떼지어 몰려드는 인간 군상들을 보라. 또한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이질적 행동을 하는 사람이 보이면 사방의 인간들이 몰려들어 공격하고 괴롭히는 것을 얼마나 쉽사리 볼 수 있는가. 온라인 사회연결망에 어떤 도덕적 아량을 넘어서는 행위자의 영상에 대한 집단적으로 달리는 무수한 비난과 폭력적 댓글들, 이것들에서 우리는 해즐릿이 보았던 얽매임 없이 풀려난 충동적이고 기뻐 날뛰는 야성의 환호, 농축된 악의인 혐오의 즐거움 목격하게 된다.

 

왜 그럴까? 흠잡기 좋아하는 성향, 남들의 행동과 동기를 시기하고 감시하는 편협한 태도에 근인(根因)하는 것이라고 해즐릿은 지적한다. 이 불온한 인간의 본성은 결코 혐오를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인간 본성에 대한 예견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 사회 현실의 이해 도구가 되어줄 수 있다. 그는 만일 인류가 올바름을 희망했다면 오래 전에 이루었을지 모른다.”며 공포와 혐오의 대상을 상상 속에 끈질기게 살려두려는 인간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지나친 인간 비하의 논리라 반박하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 혐오는 죽지 않는다!”

 


2. 질투에 관하여

 

이 에세이는 앞서 소개된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 버금가는 탁월한 사회심리분석이라 할 수 있겠다. 여물통의 개처럼 우리에게 소용이 없는데도 타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갖지 못하게 방해하고 사취하는 데 있는 심술궂고 자신의 더러운 욕망을 감추고 조작하려는 욕구를 동반하는 비열하고 역겨운 감정이 바로 질투이다. 이 감정의 속성을 해부, 분석하여 이것이 사회와 인간관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논쟁적 글이기도 하다.

 

이 기형적 감정 또한 바로 지금의 한국사회에 팽배한데, 특히 정치인들이라 불리는 족속의 일원에서 아주 쉽사리 발견된다. 우선 하찮고 건방진 자아가 일으키는 사회적 물의라는 측면에서 해즐릿은 이렇게 지적한다. 별스럽고 균형을 잃은 부모의 인격을 보면 그 자식이 심술궂고 제멋대로인 게 놀랍지 않다.”.  악질의 정치인 자식들이 제멋대로 이 사회를 휘젓고 다니며 법질서를 파괴하는 것에는, 질투의 근원인 과도한 자기애의 속성 때문에 자신이 더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질투란 본디 시기하며 악의 품은 곁눈으로 세상을 보는 자기중심적 악의에서 출발하는 까닭이다.

 

때문에 자기를 정점으로 세상이 작동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우수한 것이라도 짓밟아 파괴시켜 버리려는 냉소적 무관심이요 악질적 경멸의 심리이다. 이러한 인간들은 결코 타인이든 세상사든 모두 자기애에 부속적일 때만 연대의식이 작동되기에 거의 모든 행위가 증오로 뭉쳐진 적대감이다. 오늘 한국사회 권력자의 행태는 해즐릿의 통찰처럼 절대적 질투의 화신이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기심이 낳은 기형아의 전형이랄 수 있겠다. 사회적 행위에 있어 인간이 보이는 행태에 이 질투라는 감정이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그래서 우리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타인과 사회를 이해, 비판하는 근거로 읽게 된다.

 

3. 학자들의 무지에 관하여

 

읽고 쓰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보다

차라리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는 게 낫다.” -132

 

이 글은 나의 독서 행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도록 하였는데, 바로 다음의 문장에 작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머릿속 빈곳에 채워지고 끊임없이 서로를 삭제하는 낱말들과 설익은 비유가 지겹게 끝없이 펼쳐지는 책에 만족하며 가만히 앉아 있다.”, 책을 자연을 바라보는 안경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자연의 강렬한 빛과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차단하는 막으로 쓰는 자기 생각 부재와 실제 세계의 이해에 무력함을 해즐릿은 지적하는 것이다.

 

학식은 진정한 지식을 대체한다!”  세상의 혼잡과 소음과 눈부신 빛에서 고개를 돌리고 죽은 언어들의 조용한 단조로움과 덜 놀랍고 더 알기 쉬운 문자의 조합으로 시선을 돌리는 책벌레가 빠지는 함정이다. 사실 이 문장을 일반화하여 독서와 학식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분명 오류이지만,  책이라는 이질적 출처에 생각을 의존하는 습관이 생각의 내재적 힘을 약화시키는 것 또한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오직 책에서 책으로 건너가는 독서광들은 어쩌면 살아있는 세계의 형태를 표현하는 데 서툴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서평가들이 정작 자기만의 고유한 글을 쓰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원인에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내던지고 스스로 생각하라!”

 

책벌레는 글자로 구성된 일반론의 거미줄로 스스로 돌돌 말고서

다른 사람들의 두뇌에서 반사된 가물거리는 그림자를 볼 뿐이다.” -132~133

 

해즐릿은 명문 이튼스쿨의 우등 졸업생인 인물이 가장 훌륭하지 못한 정치인이었음을 예시하며, 배운 것만 잘 기억했지 결코 총명하지 않은 아이가 대개 전체 일등을 한다고 경험과 열정, 창의를 추구하는 살아있는 지식에 무지함으로써 빚어지는 학식의 무모성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우리 사회 또한 어린 시절 시험 성적이라는 달달 학습한 기억지식을 우수한 지성으로 인식하는 토대에 기초하고 있다. 바로 눈과 귀의 위대한 세상이 가려진 채 책이라는 하나의 문만 열려 있을 때 그 사회가 무지에 맥없이 빠져드는 현상이 발생함을 오늘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 때문에 우리들은 이기심이 낳은 저 기형아를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지금 신음하고 있지 않은가.

 

4.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 맨주먹 권투

 

앞 선 세 꼭지의 에세이에 결코 뒤지지 않는 글들이다. 특히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논란을 겪는 노인 문제와 관련하여 시사(示唆)하는 바가 높은 사유의 글이다. 나 또한 이제 나이가 제법 들어차면서 죽음의 관념에 곧잘 잠기게 되곤 한다. 어느 새 발치에 안개가 끼고 나이의 그늘이 자신을 감싸드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느리지만 엄숙히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몽상은 죽음은 단지 추상적 명제이거나,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라는 동의에 그치고 자신에게 온다는 것을 깊이 깨닫지 못한다.

 

해즐릿은 노년의 길고 우울하고 장엄한 색채와 가을 저녁의 어둠이 모든 것을 덮는 시간이 파괴한 것들 속으로 사라질 것을 예감하지 못하는 젊을 때에는 물체와 감각의 무리에 가려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젊음만이 죽음의 필연성을 자기와는 멀고 먼 불가능의 진리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많은 대부분의 산 사람들은 죽음의 다가옴을 실감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인간 사회의 정치적 현실은 갈등에 휩싸이곤 한다. 마치 자신들에게는 절대 노화와 죽음 같은 것은 오지 않을 것이기에 멸시하고, 혐오하고, 부정함으로써 영원히 현재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해즐릿은 이러한 인간들일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는 크다고 지적한다. 자기 존재에 대한 뿌리 깊은 편애 때문인데, 물론 삶을 사랑하는 습관적 애착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에 가까워진 노인들 스스로가 활동적이고 삶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기회를 지원하고 응원하는 세계여야지 그것을 박탈하려는 그 어떤 것도 비윤리적이요, 부도덕한 저열성이란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 같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내려 온 뒤 세상으로부터 빨리 잊힌다고 나는 놀라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해즐릿의 말처럼 무대 위에 있을 때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으니말이다. 햄릿31절의 대사처럼 오래 사는 불행은 겪고싶지 않은 마음이다. 죽음에 대한 다양하고 깊은 신선한 통찰들이 가득한 글이다.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질투에 관하여두 글에 대한 보충적 논의로 읽어도 될 것 같다. 호감을 살만한 거의 모든 자질에도 불구하고 괜히 비위를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한 관찰이기에 우리들 자신의 언행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줄 터이다. 혹여 나는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타인에 은혜를 베풀 듯 행동한 적은 없는지, 선행을 모종의 암시를 흘리거나, 꺼내지 말아야 할 화제를 꺼냄으로써 친절을 가장한 적은 없는지 말이다. 끝으로 맨주먹 권투라는 에세이는 문자 그대로 맨주먹으로 벌이는 권투 시합의 생생한 관람기다. 챔피언으로 자신을 과신한 개스맨이라는 선수가 과대한 자기평가에 매몰되어 박살나는 광경을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해즐릿의 저널리스트로서의 모습이 선연한 작품이다.

 

아마 당대 정치인들을 비롯한 사회 각계의 인물들에서 그는 이러한 자만, 자기애의 오류를 무수히 목격했기 때문 일 것이다. 이러한 양태는 오늘에도 전혀 다르지 않다. 이 에세이들은 위대한 탐구적 지성이 자신의 생각을 잘 알고 그것을 힘차게, 눈부시게 밀고나간, 모든 힘이 정제되어 들어있는 영혼의 글들이랄 수 있다. 그 신랄하고 절박한 열정에 독자는 끌어 당겨져 몰입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과 그들의 사회는 200년 전 해즐릿이 살던 곳과 근본적 질서는 물론 그 어떤 인간본성도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 세상사의 이치를 전하고 싶어 했던 일류지성으로부터 오늘의 우리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이다. 윌리엄 해즐릿 읽기를 감히 모든 독서가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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