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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평점 :
■ 시작하는 말
오늘 우리는 실존했던 민중의 고통과 죽음의 실재성을 부인하며 공동체의 기억을 방해 훼손하려는 무리들로 인해 다시금 역사의 분노를 마주해야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자신들의 권력 지키기에 급급해 정쟁을 일상화하며, 민생을 외면하고, 민의는 묵살하며, 주변 정세에 대해 무감하여 인민과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작태는 이 땅의 역사 내내 변함없이 자행되고 있다.
역사 쓰기란 “고귀한 문명의 장치로서 인간 역사의 부조리를 끊어내기 위한 ‘공분(公憤)의 기록’”이어야 한다고 프랑스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주는 말했다. 승자들에 의해 써진 기록은 분명 많은 실재를 가려 보이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지배 담론이 드리운 그늘을 걷어내어 암살당했던 사실들을 드러내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불화와 충동의 비극적 실재를 포착, 현재의 가치 기준에 따라 재해석하고 삶의 새로운 관계를 이해, 구축하는 일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하는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대략 400년 전인 1636년, 이 땅의 왕이 적의 군주에게 머리를 세 번 땅에 찧고 아홉 번 절하는 굴욕의 역사를 오늘 다시금 성찰해야 하는 까닭일 것이다.
책은 이 굴욕의 사건과 이를 전후(前後)한 당대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외세에 무력하게 국토와 백성이 짓밟히는 위난(危難)을 마주하게 될 때까지 국가의 리더와 정치관료 등 지배 권력이 어떻게 국가의 위기를 초래했으며, 그 위기의 마주함에서 그네들의 대응 행태란 대체 어떠한 것들이었는지, 그리고 국난 이후의 행태들은 또한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이 저술의 고귀함은 역사를 비평의 체에 거르지 않고 고작 기록된 내용을 기술자의 욕망에 맞춰 재배열하여 정리한 또 하나의 단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툭하면 역사의 공평한 기술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대립과 충돌의 공평한 이야기란 진실을 가리는 기만이자 왜곡의 역사가 되기 일쑤다. 나는 역사란 실재의 불균질함을 감당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곧 ‘부조리한 양상들에서 의미와 특정 형상을 해독해내야 하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1636년 급하게 비빈 및 세손 등이 도피한 강화도가 청의 군대가 공격을 시작한 지 반나절 만에 함락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의 권력이 기록한 내용은 “물살이 세고 좁은 해협이어서 적의 수군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기록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양측 군대의 군사 수와 군선(軍船)의 비교를 통해 이 기록이 패전의 기록이 될 수 없음을 규명한다.
조선의 수군은 두께 12~3센티미터의 송판으로 만들어진 50~200명이 승선하는 판옥선 40척이었으며, 청군은 수레에 실어 온 작은 배 80척이었다는 것이다. 즉 조선의 수군은 보수적으로 계산하더라도 3,000명 내외였으며, 강화도 방어 병력은 간신 김류가 인조에게 잘라 말했듯 10,000명의 육상군이 있었다는 것이다. 도합 13,000명의 군대가 3,000명에 불과한 청군에 반나절만에 패전, 함락 당하였다는 것은 당시 지휘자들의 무능과 무책임, 비겁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독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독이 바로 ‘부조리한 양상들에서 특정한 의미를 길어 올리는 진정한 역사 쓰기’라 할 것이다.
■ 역사의 치욕을 향해 달려가는 지배 권력의 행태
- 인조반정에서 정묘호란까지
책은 총 3부로 나뉘어 기술되고 있는데, 1부는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전 인조반정, 그리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다루고 있으며, 2부는 병자호란에 대처하는 무능과 무책임으로 점철된 왕과 고관대작들의 행태들을 추적한다, 그리고 3부는 병자호란 이후에 발생한 백성이 겪는 고통의 형태들과 볼모로 청에 잡혀있던 소현세자의 귀국과 죽음, 그리고 세자빈 및 그의 자식들에 가해진 참혹함 등 권력이 자기 책임 지우기에 급급한 수치와 비극의 실체를 쫓는다.
인조반정을 정당화하는 기록이 권력을 찬탈한 세력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추출한 광해군을 성군으로 취급하지 않았음은 불 본 듯 뻔한 일이다. 서인(西人)세력의 거두인 전 영의정 박순의 서자들이 일으킨 역모로부터 시작되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 서궁 유폐와 소북(小北)파에 대한 처절한 참살로이어진 계축옥사에 대한 반발, 즉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명분으로 서인이 주도한 오늘의 표현으로 쿠데타다.
성공한 쿠데타의 공신들과 인조는 그렇다면 국가개혁과 백성의 삶을 돌보는 일에 관심이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이 ‘이괄의 난’이다. 이것은 반정공신 김류, 이귀 등이 12,000의 군사를 가지고 서북지역 방어를 위해 평안병사 부원수로 영변에 있던 이괄을 제거하기위해 역모의 누명을 씌움으로써 야기된 파렴치한 권력독점의 야욕에 대한 반발이다. 거침없이 궁궐의 턱밑까지 이괄의 반군이 밀어닥치자 왕과 이들 대신들이 나누는 대책이란 천박하기 그지없다. 왜관에 있던 왜인을 불러 반군을 진압하자는 외세 의존의 결정을 하는 것이다. 만일 영의정 이원익이 “와서 구원하지 않고 대거로 몰려온다면 그 때는 어찌 하겠는가”라는 반론이 없었다면 왜란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왜(倭)에 조선을 갖다 바치는 결과를 초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뜻밖의 환난이 닥칠지 모르니 보내지 말도록 하라.”는 것이 인조의 교지였다는 말도 그 무능의 한 증거 일 것이다.
이괄의 난은 국가 권력의 무엇이어야 하는지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반성적 시선을 던져준다. 왕과 대신은 반군의 물밀 듯 내려오는 기세에 눌려 궁궐을 버리고 공주로 몽진을 떠난다. 백성의 삶은 아랑곳없다, 자신들만 살면 되는 것이라는 비겁과 이기심과 무책임이 국가 지배계층의 태도였다. 이렇다 할 저항 없이 무혈 입성한 이괄의 교만 역시 자멸의 길을 걷는다. 이괄의 난이 평정되면서 22일 만에 돌아 온 왕과 대신들의 행태는 정말 당혹스럽기조차 하다.
오히려 국경지대의 수비군은 물론 모든 군사의 조련을 전면 금지하고, 기찰(譏察)을 강화하며, 고작 자신들의 안위를 위한 경호군을 대폭 증가시키고는, 생활터전을 벗어나지 못했던 백성들에게는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의심으로 무참히 도륙하는 짓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망각한 채 무고한 사람들의 안위를 틀어막았다. 오늘의 현실과 오버랩되며 기시감에 전율하게 된다. 어찌 권력의 하는 짓이 이렇게 동일한 것인지. 무책임과 이기심!, 이 두 단어는 인조정권 내내, 아니 오늘의 한국 사회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양상을 보일 터이다. 역사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없는 족속들. 바로 이 족속들에 내 자신이 포함되어 있음에 수치감이 몰려온다.
게다가 친명배금이라는 주변정세를 헤아리지 못하는 외교적 무지와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명 황제에 책봉을 애걸함으로써 명이 보낸 책봉사에 의해 나라 곳간이 거덜나는 실상은 차마 읽어나가는 것이 부끄럽기조차 하다. 인조 3년 1626년 6월7일자 『승정원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물건 모두가 떨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특히 은과 삼은 바닥이 났습니다. 이번 천사(주청사)의 행렬은 전에 없던 변으로...”
국가 재정의 상황이 이러할진대, 공신들을 모아 회맹연을 열어 인조와 공신들은 권력의 영속을 자축한다. 그리곤 다시 회맹 뒤에는 분축연을 반드시 여는 것이 관례라며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외면하고 수일에 걸친 잔치를 강행했다니 공감능력 상실, 탐욕스러움, 권력의 도취, 무책임성이 국가의 중심을 채우고 있었다는 말이라 하겠다. 백성이 국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던 당대와 오늘의 사정은 다르다. 민중이 정치권력에 대한 감시를 외면하면 그것이 만들어내는 불의의 결과가 오롯이 참담함으로 돌아온다, 오늘 우리 민중은 권력을 향해 그릇됨을 지적할 수 있다. 목소리를 잃지 않는 인민들의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현실이다.
조선을 둘러싼 주변 정세의 거대한 변화가 몰아치고 있는 시대였다. 인조와 그의 봉신들은 권력의 탐닉에 빠져 소위 국제 정세의 변화를 읽는데 관심이 없었다. 오직 명에 대한 사대에 매달린 어리석음은 거대해지는 후금을 공략하는 전쟁에 13,000의 조선군을 파병하기에 이르고, 살아 돌아온 이는 2,700에 불과했다, 이것이 후금(청)의 조선 침략 명분이 되는데, 1627년의 정묘호란이다.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치닫는 적군에 놀라 왕과 대신들은 또 다시 강화도로 도주한다. 이 전쟁이 내정과 길어진 보급로 등의 문제를 인지한 후금의 사정이 아니었다면 백성의 고통은 정말 끔찍한 사정에 놓였을 것이다. 훈련된 군대도, 위난 정보를 전할 통신체제(봉수제)도, 그 어느 것도 외세의 침입에 대응할 것이 없었음이다.
권력이 자기 안위를 위해 국가 존립 기반을 망가뜨리는 이런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다. 결국 주화파와 척화파의 명분 싸움이 시작되는데, 이는 후일 병자호란에서 판박이처럼 반복된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현실임에도 백성의 안위에는 눈을 돌린 채 명나라를 배신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척화파와 백성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강화하여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주화파의 아무런 실익도 없는 고담준론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바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쟁(政爭)이고 당파싸움에 몰두하는 것이다. 백성의 삶의 토대를 희생시키며 벌이는 권력 싸움, 바로 오늘에도 우리들의 눈앞에 전개되는 추악한 정쟁의 동태(同態)이다
■ 병자호란에서 우리가 해독해야 할 것들
- 1636년 남한산성의 그날
1636년 12월 8일 청의 선봉군이 압록강을 넘어 다시금 조선을 침략하는 병자호란은 1627년에 청군 앞에서 약조한 굴종의 맹서인 정묘약조의 위반을 구실로 한 것이다. 조선이 명에 붙어 배신했다는 명분이다. 청군 침입의 치계를 12월 9일 조정에 보낸 것이 12월 12일 도착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즉 봉수제가 작동하지 않아 파발에 의존해야 했으며, 12월 13일에는 이미 적군이 안주에 이르렀고, 14일에는 개성을 통과하여 한양의 목전에 도달했다. 강화도로 몽진을 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급하게 왕과 대신들은 입보처(立保處)를 남한산성으로 바꾸고는 황급히 대궐을 버리고 또 도주했다. 인조와 대신들의 세 번째 궁궐을 버린 도망이다.
남한산성에 들어앉아 성문을 걸어 잠그고, 인조는 “각 도의 감사와 병사 및 경기 열읍의 군대를 선발해서 적을 치게 하라”라는 교지를 내린다. 즉 임금을 지키는 근왕군(勤王軍)을 결성해서 청군과 대적하여 자신을 구하라는 명령이다. 제일 먼저 응답하여 출동한 곳이 강원도 춘천방어사 권정길이었던 모양이다. 1,000명의 군사로 청군과 대결하였으나 전멸하였으며, 경상좌도, 전라도 등 속속히 출전하지만 패배한다. 여기서 다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이들 패배에는 지휘관의 무능과 비겁함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하나같이 가장 먼저 도주하고, 선전(善戰)하는 동료 장수를 이간질하거나,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작태들이 난무한다.
우리 역사상 3대 패전의 하나인 수만의 군사가 전멸한 쌍령전투가 바로 병자호란에서 있었던 비극이다. 전술과 전략에 대한 무지, 시종일관 당파 간 불신, 무능한 지휘자의 비숙련 직관 등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이 결합된 필패의 총체이다. 청(淸)과의 화친여부를 놓고 주화파와 척화파의 격돌은 재연되는데, 척화파의 좌장인 사대주의자 김상헌은 화친 주장자들을 모두 역적으로 몬다. 주화파의 좌장격인 최명길은 “오랑캐의 말 발굽아래 어육(魚肉)이 되어가고 있는 죄 없는 백성은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반문한다. 정치권력이 자기 권력과 재화에 탐닉할 때, 그리고 백성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정치사회를 정쟁의 분열로 내몰 때, 국가와 백성의 삶은 필연코 황폐해진다. 정묘호란에서 당면했던 국방과 경제력에 대한 증강은 10년이 지난 병자년에도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거듭 반복되는 국난에도 이들은 아무것도 배우는 것이 없었다.
청 황제 홍타이지를 향해 “조선 국왕 이종(李倧)은 삼가 대청국 황제께 글월을 올립니다.”라며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하는 이 수치의 역사를 인조 응당의 몫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겠는가? 대신이라는 자들, 고작 자신과 자기 식솔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자들이 권력을 지키고 있을 때, 민중은 어떤 상황을 맞이해야 하는가의 충격적 장면이다. 사실 이 잘 알려진 수모의 한 순간보다 더욱 주목하게 되는 사건이 있다. 화친 조건에 앞서 청이 요구하는 것들이 있는데, 왕제와 대신을 인질로 먼저 자신들에게 인도하라 했을 때, 이들은 합심하여 자신들의 교활성을 뽐내며 가짜 인물들을 보냈다가 들통나는 것이고, 이는 더욱 강화된 조건을 야기하여 더 커다란 손실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왕과 고관대작인 이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형제, 자식에 안위에 대해서는 끔찍하면서도, 백성의 목숨은 언제라도 내어주어도 된다는 생각, 게다가 임기응변이 통하리라 생각했다는 그 우매함과 교활함이다. 이러한 태도가 당시 지배권력의 일반적인 믿음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얼마나 세상의 이치에 어두웠던가를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당대 관료들의 저열한 양식의 형태가 빚은 비극으로서 두드러지는 사건은 강화도 함락에 관한 기록들이다. 간신 김류는 자신의 식솔들을 보호하기 위해 비빈 및 세손들의 피난처인 강화도의 검찰사로 아들 김경징을 발탁하여 보내는 것이다. 전시에 부여된 지역 총책임자의 감투이다. 김경징은 강화도를 완벽한 은둔처로 여기고 술판을 벌이며, 추궁하는 이들에게 “내 아버지가 체찰사이고 내가 검찰사다. 내가 술판을 벌이는데 누가 뭐라 한단 말인가?” 어째 요즘 안하무인의 국회의원과 그 자식을 빼 닮았지 않은가? 청군이 보이자 강화유수 장신동과 함께 산 속으로 제일 먼저 도주하고, 고려 최씨 정권이 38년간 항전하였던 난공불락의 강화를 반나절만에 적에게 내주었다. 지휘자들의 총체적 무능과 무책임의 전형이다.
당시 사관(史官)은 김류와 김경징 부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단다. “김류는 사랑에 가리워 아들 김경징의 나쁜 점을 몰랐으나....탐욕과 교만을 일삼으며...한낱 광동(狂童)일 뿐이었다...김류는 부귀 때문에 나라를 망치고 또 제 아들을 죽였다.” 백성들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어떠한 안전 막도 없이 죽어 가는데, 대신과 그 가솔들은 여전히 흥청대고 있었으며, 성안에 둘러앉아 고작 술사의 점괘에 의존하여 전투 여부를 결정하였다는 그 몽매성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청이 항복조건을 작성해서 보내 온 조유문이 조선이 칭하는 화친조약이다. 즉 청이 조선에 내리는 명령서이자 항복문서일 뿐이다. 이것을 조선의 국왕이 청 황제 앞에서 낭독함으로써 전쟁은 종료되었다. ‘정축조약’이란 말처럼 기만적인 명칭도 없을 것이다. 명목상 조약인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전후(戰後) 후유증들
- 백성들의 지속되는 고통과 성찰(省察)없는 지배계급의 양태들
청은 척화파 대신을 자신들에게 보낼 것을 명령하고, 세자와 그들의 노비로 삼을 수많은 조선 백성을 이끌고 퇴각한다. 척화파 대신(大臣)들을 대신(代身)하여 청에 끌려가 처형된 오늘날 삼학사로 불리며 칭송되는 인물들은 실제 대신들이 아니었다. 김상헌, 김류, 정온 등 대신들은 슬그머니 제외되고 홍익한, 윤집, 오달제 3인이 희생자가 되었다. 그들은 국가와 왕에 대한 충성심과 명에 대한 사대를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이 과연 기릴 인물들일까? 이들이 백성의 신음을 들을 수 있는 존재들이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겠지만 척화파와 주화파의 좌장인 김상헌과 최명길이 모두 청에 소환되어 감금되는 사건이 있다. 김상헌이야 척화파이기에 청을 부인하는 속국의 인물에게 죄를 묻는 건 강자의 권리일 수 있다. 그런데 주화파의 거두인 최명길이 호출되는 것은 여전히 지배계급 간의 권력 싸움이 반복되고 있었다는 하나의 증거다. “조선이 청과 강화를 한 것은 종묘사직을 보존키 위한 것이었을 뿐 본심이 아니었다.”는 명(明)으로 보내는 외교문서를 이계라는 인물이 청(淸)에 밀고함으로써 끌려갔다는 점이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타자를 낭떠러지로 미는 것, 이것이 저들 지배계급의 성찰 없는 일관된 작태였다.
이 국가적 수치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회자되는 단어를 남겼는데, 화냥년과 호로(胡虜)새끼라는 욕설에 가까운 악질적 언어다. 이 말에는 우리 선조들의 슬픔과 한이 담겨있다. 청에 끌려간 조선인들을 피로인이라 불렀으며, 속환되어 청에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당대의 세계는 이들을 매몰차게 내쳤다. 특히 여성들은 오랑캐 청인들과 정을 나눴다고 가문을 들먹이며 죽음으로 내몰고, 자결이 강요되었다. 그네들이 후일 화냥년이란 말로 바뀐 환향(還鄕)녀다. 그리고 그네들이 출산한 아이를 일러 호로새끼라며 멸시, 배척했다. 이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필연적이었겠지만 이들을 사회적 일원으로 보듬지 못하고 내치는 데에는 역시 사대부들의 이기심과 냉혹함이 작동했다.
전후의 공과(功過)처리 문제라는 관점에서 아주 중요하게 이해된 부분이 있는데, 23,000병력을 가지고 있던 황해도 및 평안도 도원수(都元帥) 김자점이 삼전도 굴욕을 치룰 때까지 오늘날 가평군 설악에 있는 미원이라는 곳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대소신료(大小臣僚)의 처벌 요구가 잇따르는데, 위급한 상황을 외면하고, 그 어떤 구제의 행위도 하지 않은 자에 대한 기율에 따른 처벌은 정당한 요구였을 것이다. 적이 쳐들어왔는데, 군대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면 이적(利敵)행위라 할 수 있다.
인조는 오히려 이들을 호위대장, 병조판서, 좌의정까지 자리를 내주며 곁에 두었다. 국가를 배신한 이적 행위자가 버젓이 국가 최고위 관료에 임명된다면 이것을 정의롭다 할 수 있을까? 또한 백성들은 물론 그 밖의 관료들에게 어떤 메시지가 될 것인가? 국가에 대한 이적 행위가 오히려 존중되는 세계라면 어느 누가 질서와 윤리, 법을 존중하겠는가? 전쟁 후, 조선의 사회상이 얼마나 무질서와 광기에 젖어있었는가의 반증일 것이다. 여기에 백성이, 정의가 설 자리가 있었겠는가?
이처럼 군주의 패덕함은 8년에 걸친 이역의 땅인 청의 볼모가 되었던 소현세자의 귀국과 그의 죽음처럼 당시 국정의 혼탁함과 맞물려 뚜렷한 상징적 사건을 낳는다. 『인조실록』에도 인조가 세자의 귀국을 원치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청이 자신을 입조시키고 아들 소현세자에게 양위시킬 것이라는 의혹에서 비롯된 권력에 대한 집착이라 할 것이다. 소현세자는 지병으로 산증을 앓고 있었으며, 이러한 의심과 냉대는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죽음에 대한 연구들이 다수 있는 모양인데, 병을 잘못 이해하여 치료하는 바람에 죽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저자는 소현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던 진언군 아내의 증언에 더 힘을 싣는다. “옴 몸이 전부 검은 빛이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물론 이 모호한 기록만으로 독살을 단정할 수는 없다.
인조의 총비(寵妃)인 소용 조씨의 모친과 염문을 일으키던 어의(御醫) 이형익이 한 말이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상이) 전교하기를, 침을 맞을 때 침의 2인만 입시하고 여러 어의는 모두 세자궁에 나아가 대령하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좋은 독살 환경을 만들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평소 세자 부부를 무함(誣陷)하기 일쑤였던 조소용이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형익에게 소현세자의 독살을 사주했으리라는 추정이다. 게다가 세자의 사후 묘호의 등급도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비에게 주어지던 능(陵), 혹은 그보다 낮은 원(園)을 물리치고 묘(墓)로 명령했다는 것도 독살에 무게를 싣게 한다.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게 된 강빈은 조소용의 간계에 의해 사사되었으며, 그의 세 자식들도 제주에 유배되어 둘은 굶주림과 학대 속에서 사망하였다. 조선의 대표적 혼군(混君)인 인조의 사망이후 적통인 소현세자의 생존한 아들을 배척하고 즉위한 효종 또한 적통성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강빈의 옥사를 거론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리겠다”며, 진실을 지우려 한 효종의 비겁함에서 끈질긴 불의의 계승을 읽게 된다. 탐욕과 간계와 비굴, 비겁과 무능과 무책임, 그리고 광기가 빚어낸 17세기 이 땅의 역사는 수치와 비극의 역사라 해도 결코 지나친 이해가 아닐 것이다.
■ 맺는 말
오늘은 17세기 절대권력을 지닌 왕이 지배하는 세상도 아니며, 형식적이든 외형적이든 지배 권력에 진입하는 계층에 제한이 주어진 세상도 아닌,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권리인 체제이다. 혼군의 무능과 무책임은 국민이 지탄하고 시정을 촉구할 수 있으며, 자기 이익에 탐닉하며 국민 삶의 건강성을 훼손하는 권력은 끌어내릴 수 있다. 이처럼 반복되는 불의로 그득하고 부조리한 양상은 이제 우리들의 세계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 이것이 역사를 읽는 까닭일 것이다.
이 책은 지배 엘리트로 자처하는 인간들의 절대 사회가 당연했던 것으로 만들어 냈던 권력관계의 충돌을 배제하고 외면함으로써 공평하게 정리한 따위의 역사서가 아니다. 역사의 자료를 어떻게 읽었는지, 어떻게 선택했고 분류하였는지를 드러낼 뿐 아니라, 진실이 좌초해 있는 사료들의 베일을 찢고 앎의 불투명을 해쳐내어 가려져 있던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왜곡과 진실 사이에 난 좁은 길을 역사가가 어떻게 걸어내야 하는지, 이를 통해 현재의 삶의 현상들의 관계를 이해케 하는 노작(勞作)이라 하겠다. 병자호란에 대한 이 역사평설은 전쟁이란 참화를 온통 몸으로 겪어내야만 했던 백성들의 흥건한 피(血) 위에서 풍악을 울려대는 권력의 파렴치에 대한 규명이며, 해독이다. 역사의 진실을 일그러뜨리고 더럽히면서 관련 사실을 기만적으로 이용하려는 인간들이 나라를 혼돈의 지경으로 몰아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더욱 우리들에게 역사의 이해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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