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페이퍼 글은 카프카 탄생 140주년을 맞이하여 민음사에서 특별 간행한

카프카 단편집 <돌연한 출발>을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2023년 유네스코는 '세계 책의 날' 올해의 인물로 '프란츠 카프카'를 선정했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은 우리를 아주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처럼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책이라네.”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쓴 프란츠 카프카의 편지 에서


 


카프카의 작품집은 많은 독자들이 여러 권 소장중일 것이다. 이 편집본은 조금은 새로운 면모를 하고 있는데, 카프카의 육필원고와 그가 그렸던 몇 장의 드로잉, 그리고 프라하 시가의 전경과 그의 작품 산실이었던 여동생 집의 사진 등이 22쪽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내 그림은 순전히 그림 글쓰기라 했던 그의 말처럼 스케치 속에서 어떤 서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바라보지만 그의 소설들처럼 왠지 이해를 거부하는 느낌에 시선을 거두었다. 자신을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음직한 왜곡된 이미지를 상상해본 것이 아닐까라는 헛다리도 짚어보지만 합당한 해석이 아닌 듯해 실패한 미소를 지어본다.

 

아무튼 카프카의 탄생 140주년 기념판본으로 출간된 이 책은 여덟 번째로 내 품에 들어 온 소중한 카프카의 소설집이다. 새롭게 시선을 끈 것은 옮긴이 전영애 교수가 엄선하여 서른 두 편의 장단편(短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내적 화자가 지닌 의미의 유사성에 따른 작품의 재배치가 돋보인다.

 

사실 나는 카프카를 즐겨 읽는다. 무의식의 어떤 은폐되고 억압된 욕망을 분출하고 싶어질 때면 짧지만 강렬한 밀도로 응축된 그의 소설을 주기적으로 찾아 든다. 물론 덤터기만 쓰고 물러날 때도 있지만 그 불가능 속을 헤매다보면 무언가 해소된 느낌을 갖기도 한다. 카프카의 소설들은 서사적 진공상태로 다가와 그 속에서 어떤 기대와 답변을 찾지 못하도록 일관된 요약이나 해석을 거부하는 듯하지만, 그의 종결(終結)없는 미결이 매혹적일 수도 있다. 내가 답을 만들어가며, 혹은 내가 기대하는 어떤 질서를 축조해가는 해결의 과정을 즐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쓴 위에 인용한 카프카의 편지로부터 간략한 감상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 구절은 한 권의 책에 대한 얼붙은 도끼의 은유처럼 그의 소설이 주는 불편함과 불안과 고통이 독자에게 무엇을 시사하려는 것인지를 짐작케 한다. 작품의 구조적 측면의 비()일관적 훼방이 불러일으키는 고통이기도 하지만, 서사의 내용면에서 끊임없이 타자를 밀어내는 세계의 위계와 오염된 인간성들, 몰이해와 낯섦, 관료적 권력이 뿜어내는 악취 등등 인간과 인간사회의 추오를 들이밀어 독자들의 정체성과 실존을 위협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곤란들과 당혹감을 정면으로 마주케 함으로써 체험적 변화를 요구하는 책의 의무에 대한 그의 의지표명일 것이다.

 

이 편집본의 표제가 된 극히 짧은 소설 돌연한 출발도 그 이해로부터 독자를 완강하게 추방하려는 듯하기만 하다. 첫 문장부터 실패의 상황이다. 마구간에서 말()을 끌어내 오라는 명령을 하인은 듣지 못한다. 화자의 뜻은 이 불통에 의해 연거푸 좌절된다. 카프카의 작품들은 실패를 씀으로써 성공했다는 비평가 '게르하르트 노이만'의 지적처럼 당대에 만연한 인간 사이의 소통불능이 단지 떠난다.”는 목적을 지닌 굉장한 여행과 극히 대항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상 혹은 진실의 지대를 향한 삶의 대모험은 이 돌연한 출발에서 시작되어야만 한다는 듯이,

 

이와 연관하여 읽을 수 있는 소설인 옆 마을평범한 나날조차도...턱없이 모자란다는 점을 두려워하지 않고 옆 마을로 말을 타고 나설 작정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할아버지의 말씀 한 문장으로 구성되어있다. 구세대의 안주하려는 게으름과 이상을 찾으려는 새로운 세대의 응축된 대립의 장면이다. 이러한 세대 간의 갈등, 즉 지배의 세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메시지는 카프카 소설의 커다란 하나의 축인 것 같다.

 


그것은 약혼녀 펠리체 B'라는 부제가 달린 선고의 주인공 게오르크와 아버지의 거듭되는 위상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장면에서 극심한 갈등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둔감하고 더럽고 편견으로 그득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죄를 씌워 판결하는 이 우화는 너를 지금 익사형에 처하노라라는 말과 똑같이 다리에서 추락하는 아들의 행위처럼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이 작품에 시선이 붙들리는 것은 이러한 세대 간의 권력 갈등 못지않게 죽음이 지니는 의미이다. 부모님, 저는 그래도 당신들은 사랑했었답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다리에서 떨어진 죽음 이후의 그 무심한 전경이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리 위에는 끝이 없을 것처럼 차들이 오가고 있었다.”는 세계의 무관심한 불변성.

 

이것은 너무도 유명해서 거듭거듭 소환되는 변신그레고르 잠자의 죽음 이후 가족들의 소풍 전경과 거의 동일한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카프카에겐 이 죽음의 개념은 평온과 안락, 화해의 감정이었던 것만 같다. 변신을 나는 작품의 외적 환경인 시대상과 연결하여 읽곤 하는데, 주류 유럽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끝없이 배제되고 거부되는 유대인의 고통, 즉 자기이해와 타자의 시선이 지닌 엄청난 간극에 대한 처절한 항의로 이해하고 있다.

 

이 작품과 항상 동일선상에서 언급되는 작품이 학술원에의 보고의 주인공인 원숭이 빨간 페터가 주류 사회를 상징하는 고매한 학술원에 하는 신랄한 보고내용이다. 이 소설은 페터의 치욕적인 상처를 설명하는 구절들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무시, 무관심과 편견을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성적 거세와 할레를 암시하며 유대인의 유럽 주류사회의 모방은 그네들의 생존적 탈출구임을, 유럽 사회가 우월해서가 아님을 강조한다. 오직 세상에 스며들기 위함임을, 그러나 세계는 페터의 보고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다. 메아리 없는 외침, 이 철저한 소외와 배제의 고통을 읽고 있으면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재적 사건임을 통절하게 느끼게 된다.

 

나는 단편 법 앞에서를 장편소설 소송에서 K와 신부가 나누는 법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와 시골사람의 대화를 참조하곤 하는데, 이해를 거부하는 이들의 해석에서 역설적인 전략을 보게 된다. 법의 문은 마침내 그의 죽음으로써 문이 닫힌다는 점이다. 시골사람 스스로 연기하는 술책이라고 지적한 조르조 아감벤의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기 위한 인내심 가득한 고도의 전략이란 말에 한편 수긍하게도 된다. 카프카의 소설을 대표적인 열린 결말의 서사라 부르는 이유처럼 무궁무진한 해석들이 가능한 작품일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들은 모두(冒頭)에서 말하기도 했지만 실패와 좌절의 이야기들이다. 단편 다리(, )와 잠재적 적을 막기 위해 지하에 삶의 터전을 구축하는 한 개체의 보고인 ()은 소위 기대와 체험, 그리고 실패의 정형성을 띤다. 물론 의 주인공은 조금 복잡하지만 애초 장소를 소유하지 못한 존재의 굴이 지닌 안전의 보장 실패는 예견된 귀결인 것만 같다. 살아있는 다리()로서 절벽 위에 몸을 뻗어 누군가가 오는 것을 보려다 그만 떨어져 찢어발겨지는 인간의 다소 황당한 이야기도 역시 실패는 본래적이다.

 

그런데 발터 벤야민실패는 카프카 문학의 정수라 하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는 인생 경력에서 전형적으로 실패하는 주인공들이 즐비하며, 한편으론 이러한 망가진 경력을 표현하는 문학적 형식에 실패함으로써 그는 말하고자 함에 성공하고 있다고. 오늘 한 세기가 넘어 이역만리에 있는 낯선 지역의 독자가 그의 좌절과 실패담을 읽으며, 어떻게 이 세계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실패한 다리가 아닌 굳건한 토대를 놓았음의 반증일 것이다.

 

건조한 아이러니와 감각적 통찰력으로 가득한 카프카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세계의 규명을 마주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리장성의 축조 때와 같은 의사소통 부재, 의미를 상실하는 공동의 작업이나, 그 누구도 합의할 수 있는 형상이 아닌 오드라덱을 통해 통제도 지배도 불가능한 존재를 그리는 가장의 근심에 이르는, 마치 원인도 목적도 없는 것 같은 불안의 실체들이 빼곡한 카프카를 읽는다는 것은 삶에 대한 내 자신의 시선을 스스로 점검하는 실마리가 되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극적 실존으로서의 인간 카프카의 작품을 계속 읽어나가며 몰이해로 뭉쳐진 존재로서의 나, 상식이라는 하나의 시선에 포획된 나를 의심케 하는 목소리들에 마음의 문을 열어야만 우리는 변화하고 다름을 수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들은 그 생생한 실천의 장이다. 해명할 수 없는 것들에 달려들어 그것들을 규명하려는 온몸을 다하는 그의 절체절명(絕體絕命)의 글은 항상 묵직한 감동이다.

 

여전히 카프카 읽기에 나는 많은 빈틈을 느낀다. 이 틈새를 메우는 읽기, 그 모험을 이번 기념 편집본이 다시금 자극한다. 권력이 법과 함께 자신들의 영토를 모든 인간의 영역으로까지 뻗는 가장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즈음이다. 시민이기 전에 인간인 우리들은 이 불의한 영토화 욕망에 맞서야 하는 앎의 지대를 카프카를 통해 경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카프카를 읽기에 더없이 좋은 시절, 4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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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나무 아우또노미아총서 12
움베르토 마투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최호영 옮김 / 갈무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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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과 자신의 행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알게 모르게 어떤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이데아론이니 물자체니, 표상이니 하는 실재(實在)에 대한 인식들인 역사적 산물에 의존한다. 사실 이러한 인식론들의 철학적 배경을 알지 못하더라도 그것들이 세상의 지배적 시선이 되어 일상에 녹아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식 행위에 대해 새삼스레 성찰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를 습관화시킨 이들 인식의 방식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수많은 세포(생명체)로 구성된 유기체인 존재를 라는 독립된 개체로 지각하게 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라든가, 우리라는 사회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존재인 이유는 무엇일까? 와 같은 물음들이다. 나아가 나라는 존재의 바깥인 환경을 나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이러한 것들은 어떤 작동방식을 지니는 것일까? 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물음들과 관련하여 외부 대상이나 사물의 표상(表象)을 인체 내 신경계가 작업한 결과물이라는 우리의 직관적 이해를 전복시키고 있다. 인식(認識)이란 어떤 표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물체로서의 존재가 자신의 생존을 지속케 하는 행위를 관찰자적 해석으로 바라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설명하는 용어의 핵심이 구조접속이라고 이해하게 되는데, 이는 생명체가 자기를 구성하는 조직을 유지한 채 환경과 적응 관계를 지속하며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즉 세계에 대해 어떤 인식과 반응으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마치 인간만의 독특한 체계에 의한 것이라 바라보는 시선이란 인간중심적 해석의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구성된 존재인가? 라는 물음을 하게 되면, 하나의 세포가 분열 증식하여 메타세포화 된 세포들의 통합구성체라고 답변할 수 있다. 이 답변은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미시적으로는 세포차원의 생존이며, 거시적으로는 몸체라는 거대한 메타세포체의 생존이라는 자기생성과 적응의 보존을 위해 매순간 역동적인 변화의 흐름을 지속하는 존재라고 정의하는 것과 같다.

 

이 설명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의 행위라는 것은 외부 관찰자가 바라보는 외부적익 해석적인 이해가 아니라 곧바로 그 실체인 세포 개체 본연의 활동에 주목하게 한다. 일례로 원핵세포인 아메바를 관찰하게 되면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위족을 뻗어 이동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때 관찰자는 아메바가 이동했다고, 아메바가 운동한다고 말한다. 신경세포도 없는 아메바는 외부의 표상 따위가 없다. 이 단세포 생물은 주변 환경의 어떤 상태가 유발한 요인에 의해 자기 역동성으로 인한 구조변화, 즉 내부 원형질이 화학적 반응에 의해 이쪽저쪽으로 흘러 떠밀렸을 뿐이다. 이를 섭동(攝動)작용(perturbation)’이라 부른다.

 

이 책을 읽고나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 개체들이 왜 그렇게 다양한 행위를 하게 되는지, 또한 왜 이러한 세계가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이 세계의 필연성이 바로 생명체들 저마다의 자기생성과 적응 본능의 산출물임을 수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조차도 모든 개체마다 달리 구성된 유전자에 각인되고. 또한 저마다의 개체발생이라는 구조변천을 겪으며 지니게 된 고유의 자기 생존체계의 차이로 인해 다른 반응을 일으킬 것은 분명할 것이다. 따라서 이 전복적인 인지론을 불편하게 여기기도 할 것이다.

 

이 저술의 목적은 바로 개체의 이 다름을 규명하는 것이며, 한편 이 다름을 포용하는 동일성을 유지케 하는 조직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조직을 이루는 구조적 요소들과 그 변화의 역동성을 통해 인간과 인간이 산출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생명체의 역사인 원시지구로부터 오늘의 세계에 이르는 수십억 년, 그리고 영장류에서 현생 인류가 출현하는 수백만 년 자연 표류(漂流)’의 여정을 통해 문화의 탄생, 언어의 발생이 어떤 현상의 귀결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호작용의 한 양식인 섭동작용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현상인 구조 접속이다. 그리고 원시 단세포 생명체가 다세포화 되어 인간의 몸체와 같은 메타세포체로 형성되는 것이며, 이들 거대해진 세포들의 정보 연결망인 신경세포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규명이다. 이로서 생명체가 그를 둘러싼 환경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고 있으며. 이 작용의 성질이 곧 인간의 문화적 현상들과 언어의 발생으로 표현되었는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이 가진 특별성 바로 인간의 언어와 문화현상 등의 행위란 세포와 메타세포체의 자기생성조직의 역동성과 적응의 산출물일 뿐, 도의 인식행위라거나 이성의 발현이라며 유기물인 생물체와 별도로 존재하는 정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형이상학적 발현이 아니라는 설명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 거부감이 심하게 솟구쳐 오를 수도 있겠지만, 인식 현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경험 속으로 파고 들 수 있도록 잠시 확실성의 유혹, 즉 자기 확신을 버리는 것도 지혜일 것이다. 자기 믿음에 대한 확실성을 허물지 못하면 그 어떤 새로운 앎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인지적 경험은 자신의 생물학적 구조를 바탕으로 매우 개인적으로 존재하는 인식자를 전제하기에 그 오랜 개체발생의 학습을 버리는 것이 몹시 힘든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인간 모두는 맹점(盲點)이 있다. 관념적 언어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실제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망막부위의 시신경이 빠져나가는 부위가 빛에 무감각함으로써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 인간이라는 메타세포체는 그리 완벽한 구조체가 아니다. 단지 환경의 구조변천과 자기생성조직과 적응 보존 활동이 상보적(相補的)이었기에 적응 상실을 겪지 않고 지금 존재할 뿐이다. 우리의 관찰능력은 무한히 제한적이다. 타고난 무능력 지대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과학적 도구들이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과학적 설명 체계를 내놓을 수 없는 것들에 우연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무능력과 무지를 실토하기도 한다.

 

여기 매우 중요한 관점의 문제가 있다. 앞서 언급한 아메바의 생존 작업 방식인 위족 행위를 보고 이동이라는 표현을 하듯, 생물체의 상태변화란 결코 외부 관찰자의 해석처럼 세계에 대한 표상물을 가지고 작업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생물체 자체의 역동성은 세계의 변화(장애물, 훼손 etc.)를 포함하지 않는다. 단지 주변 환경의 어떤 상태가 유발한 요인에 그저 자기 생존을 위해서 내부의 반응일 뿐이다.

 

인간 또한 단세포의 분열 증식으로 비교적 오랜 시간 개체발생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메타세포체인 몸체가 되었다. 지구상의 어떤 생물체도 번식은 오로지 단일 세포로 시작된다. 이 말이 뜻하고자 하는 바는 어떠한 생물체든 자기생성조직과 적응보존이라는 세포 내부의 역동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작업 폐쇄적 조직이라는 점이다. 결국 인간이건 여타 동물들이 되었건, 그 밖의 어떤 생물체가 되었건 그들의 형태변화나 행동이란 유기체 안의 관계들이 춤추듯 변화하는 것을 밖에서 본 것에 불과하다.

 

사람은 사회적 삶 속에서 언어적영역을 산출하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지만 사람만이 언어적 행동조정을 통해 새로운 현상계인 언어의 나라를 산출했다.” -237

 

이제 우리들이 의미론적으로 말하는 인식활동이란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유기체의 인식활동이란 유기체가 살아가는 구조접속의 영역 안에서 감각 작용적 상호관계로서 일어나는 활동이라고. 신경계가 환경의 어떤 것을 내면화했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말이 된다. 신경계는 어떤 외부 세계의 표상도 갖지 않으며 가질 수도 없다. 단지 유기체의 작업방식과 환경의 작업방식이 어울려 이루어지는 구조접속의 표현일 뿐이다. 생물로서 구조접속(적응)을 끊임없이 유지하는 일이 그 생물의 존재영역에서 일어나는 인식활동인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 곧 앎(인식)이라는 말이다.

 

묻게 된다. 의미론적 인식으로 보는 것이 인간중심적인 표현이라면 인간의 무수한 관념적이거나 물질적 표상을 뜻하는 소통의 언어들은 대체 무엇이고, 기억, 생각, 이성, 정신이란 또한 무엇이냐고. 인간은 여타 생물체와는 다른 존재임을 나타내는 표지 아니냐고. 구조접속의 이미를 되새기면 메타세포체와 같은 다세포 생물체의 각 개체들의 구조접속을 2차 구조접속이라하며, 사회적 행동 접속을 하는 것을 3차 구조접속이라 부른다. 이들 구조접속의 본질은 똑같은 기제가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 현상적 차이 외에는 구분이 없는 유기체 각자의 적응과 조직 보존을 위한 상호 개체들 간의 섭동이라 할 수 있다.

 

즉 사회적 유기체는 3차 구조접속에 의해 상호 재귀적 성격을 띠고 공동개체 발생을 겪게 된다. 사회적 유기체간의 섭동을 통해 함께 표류하는 개체들로서 새로운 현상계를 산출한다. 이때 모든 개체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생리적 역동성의 틀 안에서 밀접하게 접속되어 꾸준한 화학적, 시각적, 청각적, 그 밖의 온갖 요소들과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들의 행동을 조정한다. 이 행동 조정을 통해 개체 자신들은 자기 자신을 공동의 상호작용 그물 속에 끼워 넣으며 개체발생을 실현하고 자기 생존을 보존한다. 이때 구조 접속의 영속성을 위해 개체가 하는 행동조정이 바로 의사소통이다.

여기서 다시 주목할 것이 있다. 유기체는 자기 구조적 역동성에 따르는 것을 결코 멈출 수 없다는 점이다. 죽음이란 바로 세포 개체 또는 유기체가 자기 구조적 역동성을 멈추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유기체는 자기 구조에 따라 결정되는 데로 자기가 행동하거나 말하는 것을 행동 또는 말하는 것이고, 듣는 것을 들을 뿐이다. 즉 유기체가 무엇을 수용하는 가에 따라 일어나는 행동이나 말이 곧 의사소통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단세포의 본래 구조가 지닌 행동 양식에 의한 것개체 발생이라는 유기체 개별의 사회적 상황의 특수한 접속의 역사가 좌우한다. 이것이 인간의 다양성을 이루는 이유이다.

 

인간의 언어는 이러한 의사소통적 행위, 즉 언어적 행위로부터 발생한 행위들의 상호 조정이 일어남으로서 실현되었다. 언어가 생길 가능성은 이같은 3차 접속을 하는 사회적 유기체들의 자연 표류 속에 늘 존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이를 초기 인류의 사회적 동물로서의 생활양식에서 찾고 있는데, 친밀한 정서적 대인관계의 역사다. 3차 구조접속을 통해 인류는 계절과 상관없는 여성 신체의 구조적 변화를 산출하고, 이는 결속의 강화로 이어졌으며, 이 생활양식이 재귀적으로 조정됨으로써, 즉 언어적 상호작용이 보존되는 가운데 애정에 찬 협업의 결과로 언어가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프리카 숲 속에 사는 앵무새는 시각적 접촉이 어려워 짝끼리 어울려 행동을 조정하기 위해 

공동의 노래를 이용한다. 모든 쌍들은 그들만의 또 다른 가락을 만들어낸다

하나가 한 마디를 부르면 또 하나가 이어 부르는 이중창이다. 둘 만의 구별이 발생하고

이러한 의사소통을 언어적 행동조정이라 이른다.



다시 말해 언어적 행동이 언어적 행동조정의 대상이 되었을 때 언어가 생겼다는 것이다. 매번 결속을 확인하는 한 쌍의 남녀는 그들만의 친밀함을 여타의 것과 구분하기 위해 차별화된 소리로 개성화하였을 것이며, 언어적 행위의 영역 안에서 구분을 통한 자기라는 존재적 조건이 생겼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구분의 능력, 즉 언어는 언어적 재귀현상이 없다면 결코 발현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것이 곧 자기의식이요, 정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만일 언어가 없다면 자기(selbst)’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우리 사람은 언어 안에 함께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를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이처럼 재귀적 상호작용의 역사를 공유하는 존재자들이다. 이는 또다시 중대한 이해로 우리를 이끄는데, 우리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이처럼 언어 안에 존재함으로써 의식과 역동성이 비로소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한다면 어떤 바깥세계를 내면화하기위해 어느 특정한 존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며, 언어를 구성하는 행동조정을 통해 오히려 세계를 산출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 세계에 가득 들어 찬 의식과 정신들, 수많은 규칙성들은 모두 우리가 겪어 온 생물학적, 사회적 역사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저자들은 이 결과물을 통해 이 세계란 우리가 타자들과 함께 산출한 하나의 세계임을 밝히는 것이다. 인간이란 유기체는 자기 고유의 구조적 역동성에 의해 자기생성과 적응을 유지하려는 존재이기에 그 무수한 구조적 변이체인 인간 개체들은 모두 다른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또 한편 이 세계는 함께 만들어낸 것이며, 이 공동의 산출물과 상호작용, 즉 구조접속을 회피하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존하려면 서로 확실성을 고집하고 타자를 부정하면서 살아 갈 수 없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그렇기에 세계를 산출하는 공동의 일원이라는 윤리적 책임을 가진다. 이것이 바로 타자 존재의 정당성에 대한 성찰이며 윤리의 바탕이 된다.

 

자기 것을 확신하는 한 다툼이 생긴 영역에서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극복하려면 공존할 수 있는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야 한다.” -276

 

진부하지만 인용하지 않을 수 없는 잘려진 장면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이 벌거벗고 돌아다니며 세계를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락한 뒤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알았다. 즉 비로소 자신들이 안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들의 앎을 깨달았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서로 생물학적 일치 때문에 타인을 볼 수 있고 그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둘 줄 안다. 이 신경생물학적 인지철학은 남을 받아들임 없이 세계는 존재 할 수 없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 책은 바로 이 사람다움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 조건의 존재론적 근본 특징을 규명하는 위대한 고전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앎의 나무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의 모든 어려움은 바로 앎을 잘못 아는 것, 즉 앎을 모르는 데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앎을 아는 것, 그것이 인간의 윤리적 책무일 것이다. 그저 안다고 하는 것이 이 세계를 얼마나 어지럽히는지 우리는 매양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이 인지 혁명적 신경철학의 세계를 거닐어 보는 것도 화려한 이 계절의 길을 산책하는 것 이상의 기쁨을 선사해 줄 것이다.

 

 

용어 참조

 

*구조접속: 조직을 유지한 채 적응관계를 존속시키며 구조변화를 이루는 상태, 이 상태에서 유기체와 환경 모두가 자신들만의 독립적 변화를 겪는다.

*자연표류: 목적, 계획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그때그때 갈 수 있는 길을 따라 흐를 뿐이다. (저자들은 학계를 지배해 온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라는 개념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다고 진화 현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즉 생물이 주변 환경을 이용하여 최적화하여 적응해가는 과정이라는 통속적 진화, 진보를 부인하는 것이다. 진화란 생물의 특정 성질을 최적화하는 과정이 아니며, 단지 자기생성과 적응이 보존되는 가운데 일어나는 어떤 외부의 힘도 필요 없는 자연적인 표류의 산물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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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수확자 시리즈 3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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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영생이 실현된 세계에서 인간의 자율성이란 과연 자신들에게 안전한 것인지를 묻는 수확자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다. 이 마지막 편에 앞선 전편 선더헤드는 인간성이라 일컫는 인간의 본질은 양심과 연민이 다스리는 세계와는 한참이나 멀다는 증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처럼 이 소설은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총체적 모습들에 대한 일견 철학적이고 정치적이며 윤리적 언어들이 매 쪽마다 빼곡하게 박혀있다. 그럼에도 이 사색적 문장들이 서사적 흐름의 재미를 더하는 압도적 페이지터너로 작동하여 가히 살인적인 몰입에 빠져들게 한다. 나누어 읽겠다던 목표를 어느새 잊고 밤을 꼴딱 새는 후유증을 남길 정도이니, 결코 하루 180쪽 이상을 읽지 말 것을 충고한다.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종소리에 앞선 수확자선더헤드를 통해 수확자들과 그들의 지대인 수확령’, 그리고 이들을 제외한 전 인류의 세계를 통제, 관리하는 지능체계인 선더헤드는 상호불가침의 양립하는 세계이며, 죽음을 독점한 수확령의 부패로 더 이상 수확자들의 세계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윤리적 미덕이 작동하지 않는 원초적 폭력의 세계로의 변질을 목격케 했다. 인간지성의 통합체인 선더헤드는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불신이라는 최종 결정을 내리고, 인류 모두와 연결되었던 소통채널을 단절시키면서 불신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신뢰할 수 없는 종족, 다만 하나의 소통 창구, 즉 단 한 명에게만 자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존재를 남겨두었다. 그가 종소리. 이 마지막 편은 종소리로 명명된 존재, 다시 말해 신뢰할 수 있는 인간 존재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과정과 이미 도덕성과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성, 연민을 상실한 권력화 된 수확 세력과의 생존을 향한 싸움의 과정이 전개된다. 또한 타락한 권력, 부패한 지배 수확자와 이로 인해 변화하는 인간과 그 집단들의 궁색한 부하뇌동, 오늘의 우리 인간사회에서 펼쳐지는 그 무수한 현상들의 본질이 지닌 하찮음과 탐욕 등을 드러내 보여준다.

 

어쩌면 이 마지막 편에서 우리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이 만든 사회의 모습이 얼마나 천박한 욕망들로 구축되어 있는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목숨을 거두는 수확자에게 요구되었던 미덕과 이타심, 명예가 자만심과 자기편익에 의해 얼마나 쉽사리 무너지는지를 본다. 이 세상의 무엇이든 일궈내기 위해서는 오랜 인내와 노력의 축적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이룩된 것들을 망가뜨리는 것은 정말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임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한다. 소설은 바로 이 순식간에 세상을 퇴행, 악화 시키는 것들의 열거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류 사회의 조화로운 평화를 유지하던 인류를 대표하던 7인의 대()수확자들과 그들의 신성함을 상징하던 인공섬 인듀라를 함께 해저의 심연에 침몰시키고 불의하게 최고위 수확자가 되어 세계를 유린하는 인물이 자신의 거처에 시민을 향해 설치한 포대처럼 지배와 군림, 권력을 향한 그칠 줄 모르는 욕망은 총구가 겨누어야 하는 본연의 이익이 어떻게 뒤바뀌는 지의 일례이다. 국가의 보위를 위해 만들어지고 조성된 무기와 병사의 총부리가 침략하는 적을 향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빈번하게 내부의 국민들을 향해, 권력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겨누어졌는지 또한 우리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소설의 핵심 제재인 수확자, 불사(不死)의 세계가 된 세상에 공정한 죽음을 가져오기 위해 이용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마치 오늘날 국가의 대표자와 여러 형식의 국민 대표기관들이 주권자인 국민을 보위하기 위한 수단인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본질이 얼마나 쉽게 역전되어 그 도구와 수단이 주인으로 행세하려는 드는지를 소설 속 고위 지배자 고더드는 권력을 손에 넣은 자의 최악의 유형을 보여준다. 이 자는 공포는 존경이 사랑하는 아버지임을 역설하며, 인류를 향한 폭력의 공포를 통해 순수한 복종을, 자신 만의 자유를 추구한다.

 

이 같은 추악한 권력이 저지르는 여러 형태 중 아주 멋진 장면으로 인류 공공의 적으로 누명을 씌워 한 청년의 처형을 대형 이벤트, 즉 휘황찬란한 쇼로 바꿔 놓는, 소위 스펙터클이라는 대중을 향한 기만적 행위를 들 수 있다. 자신의 부패와 불의로 인해 모여진 시민적 분노의 시선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외교적 실패와 무능, 국익의 훼손이라는 국민적 추궁이 집중되자 정적에 대한 조작된 악성 루머를 통해 시선을 돌리는 행위와 같은 양태라 할 것이다. 대중 분노의 출구를 스텍터클화된 쇼로. 그러나 곧잘 그것을 즐기는 천박하고 우매한 인간들의 자멸의 길이 되기도 함을 참담한 비극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아마 이 소설을 리더의 덕목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고더드라는 최악의 인물을 통해 오늘 우리 사회를 읽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자아가 너무나 비대해져 자신이 저지른 온갖 거짓과 위선과 기만에 대해 언제나 합리적 변명거리를 찾아내는 그 부도덕성의 향연이라 해도 될 것이다. 잘못 선택된 한 인간이 수 없는 피와 고통으로 이룩한 사회적 건강성을 얼마나 짧은 시간에 항구적으로 파괴하는지, 그래서 인류의 삶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시간적 회귀를 하게 되는 지의 일례이기도 할 것이다. 그에게는 윤리와 도덕성 따위는 헛소리가 되고 만다. 양심은 깨끗했는데, 양심이 아예 없기 때문이라는 말은 헛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고결한 수확자로서 이 부패한 인물과 대척에 선 패러데이가 하는, 우리 인간은 뭐가 문제일까? 발 딛고 선 곳을 뜯어내고 마는 까닭이 무엇일까? ” 라는 자조적 물음이 있다. 물론 단순히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고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완벽한 세상에 들어맞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그만일까? 불완전하니까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어떠한 공감도 연민도 없는 것이 당연한 행위가 될 수 있는가하고 물어보아야 한다. 이를 부정한다면 오늘의 인간 문명이 설 토대는 사라지고 만다. 물론 내면에서 일어난 자기 욕망에 어떻게 의심을 품을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과 같이 인간의 뚜렷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한계를 알기에 자문할 줄 알며, 성찰(省察)이란 것을 할 줄 안다. 그리고 타인의 의견에 겸허히 귀 기울여야 함을 안다.

 

사실 이 소설에는 선더헤드라는 인류지성의 총체인 초지능의 자의식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물음의 멋진 사색들, 정신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인간의 생물학적 신체가 지닌 단독성, 종교에 대한 현대적 수용과 비판에 대한 은유적 서사들, 효율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불가피한 연민의 소멸에서부터 대중의 계층적 차별 인식이 권력의 위선 은폐의 용이한 도구적 관점이 되는 것, 인간의 희망이 정치적 불의와 자기 편익에 의해 소멸할 수 있는지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들로 수놓아지고 있다. 한편 종소리 성서와 그에 뒤따르는 사제의 해석, 그리고 해석에 대한 현대적 분석이라는 기발한 장들과 같이 작가의 재치 넘치는 종교 비판의 지적 환유를 만끽할 수도 있으며, 인류의 자기 구원을 향한 원대한 지향을 발견할 수 도 있다.

 

지금 이러한 열렬한 비판적 자기 탐색의 이야기들도 아마 수십 년 내에 조잡함과 근시안적 이해를 보고 웃음 지을 확률이 거의 절대적 일 것이다. 요즘들어 이러한 비판적 성찰의 감상을 끄적이며 이 열렬함이 민망스럽게만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태도는 이것이 최선일 것이라며 위안을 삼는다.

 

1수확자리뷰참조: https://blog.aladin.co.kr/729034103/14373732

2선더헤드리뷰참조: https://blog.aladin.co.kr/729034103/1438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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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 존 그리샴 베스트 컬렉션 3
존 그리샴 지음, 공경희 옮김 / 시공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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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번역본인 이 책의 제목은 조금 얄궂다. 소설 주인공의 출구(出口)를 누설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샴의 소설은 이 정도로는 결코 재미가 반감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을까? 맞는 말이다. 이렇게 재밌어도 되는 거야? 라고 토설(吐說)하고 싶으니 말이다. 가히 폭력적으로 몰입하게 하는 소설이다. 660여 쪽에 언제 이르렀는지 몰랐을 정도니까. 잠시 자신을 잊고 싶다면 이 소설이 제격이다 싶다. 그러나 이 세상에 도사린 흉물스러움이라는 망각할 수 없는 물음을 던지니 몰아(沒我)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듯싶다.

 

소설은 초반부에 세무관계 법률회사인 벤디니, 램버트 & 로크(이하 벤디니로 표기함)’의 면접관이 하버드 법대 졸업예정인 스물다섯 살 미첼 맥디르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워 입사를 권유하면서 인상적인 문장을 선보인다. 그들은 맥디르에게 결혼 여부를 물으며, 우리는 안정된 가정을 원합니다. 행복한 변호사는 생산적인 변호사니까.(14)”라고 구성원의 행복과 안녕을 중요한 회사의 이상으로 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대목이다.

 

현대의 핵가족 중심으로 구성된 가정이란 자본주의의 토대이자 핵심 축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언어이다. 두 남녀와 그들의 아이로 구성된 스위트 홈이라는 이 낭만적인 형상은 자본 생산 도구인 인간의 노동력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조건이자 토대라는 의미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벤디니 면접관의 말은 피고용인을 조종하기 위한 일종의 인질(人質) 유무를 알기 위함이다. 자신들에게 반항할 경우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아내와 자녀라는 대상이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사악함이 포장된 언어임이 드러나니 말이다.

 

벤디니는 마피아 조직이 운영하는 돈 세탁과 탈세를 위한 로펌이다. 맥디르는 파괴적인 고액 연봉과 처우조건으로 이러한 조건 뒤에 숨은 조직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능한 변호사로 인정받아 최단기에 로펌의 파트너가 되기 위한 야망으로 충성을 다한다. 1주에 90시간을 넘는 업무로 헌신한다. 아마 소설 속 시대에는 로펌 입사자인 법대 졸업생만이 변호사 자격시험을 보게 되었던 모양이다.(소설은 1991년에 발표되었음.) 고객에게 청구할 수 있는 업무 수행시간이 곧 보상으로 주어지는 회사에서 시간당 계산되는 고액의 임금은 의욕으로 가득한 젊은이를 유혹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과중한 업무에도 불구하고 맥디르는 변호사 시험에 수석 합격하고, 이는 지역 신문에 합격자명단과 함께 게재된다.

 

소설을 이끄는 사건은 이로부터 시작된다. 신출내기 평변호사인 맥디르에게 FBI가 접촉을 해 온다. 죽거나 살해되거나 불법의 주체가 되어 은퇴하지 않는 이상 자의에 의해 퇴사할 수 없는 조직, 마약 조직에 의해 세금 탈루와 검은 돈을 세탁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로펌임을 전해 듣는다. FBI에 협조하여 벤디니의 은폐된 비밀 정보를 제공하거나, 이 제안을 거부하고 후일 FBI에 의해 불법 가담자로 기소되거나 선택하라는 압박이다. 또한 맥디르의 주택 모든 곳과 승용차, 전화에 고도의 감청 장치가 벤디니의 보안인력에 의해 설치되어 있음을.

 

딜레마, 어쩌면 이 딜레마를 이루는 인간사회의 윤리적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이 소설의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 비근(卑近)하게 발생한다. 조직에서 불법이나 비윤리적 불의로 내부 부패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이의 정화(淨化)를 요구하거나 외부에 발설하는 인물이 어떤 처지에 이르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해당 조직에서의 생존 포기는 물론 외부 삶에서 조차 평온한 삶을 영위하기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집단에 의해 범죄적 인물로 오히려 내몰리기 일쑤며, 외부에 안정적 보호막을 위한 장치가 전무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이 현실임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정의를 실행하는 것에 이 세계가 그리 우호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적대적이기까지 한다는 것을. 이름하여 내부 고발자라는 께름직하기까지 한 불온한 명명까지.

 


벤디니의 보안 조직은 맥디르와 FBI의 접촉을 의심하고, 결국 내부 자료의 제공이 일부 이루어졌음을 FBI 조직의 고위 인물을 통해 파악하게 된다. 이제 24시간 내에 더 이상의 내부 비밀 자료들이 전달 될 수 없도록, FBI의 접근을 차단하고 조직의 근간을 지키기 위해, 조직의 배신자인 맥디르를 살해하기로 결정 한다. FBI가 자신들이 보호해야할 정보원을 적인 벤디니에게 누설한 장본인이 된 것이다. 맥디르에게 다가온 위기의 순간, 이 과정은 손에 제법 땀이 차게 한다. 아슬아슬한 위기의 순간들이 끊임없이 교차하고, 숨 막히는 도주와 집요한 추적이 시작된다.

 

FBI는 자신들의 정보원을 위험에 빠뜨렸고, 그의 안전을 보호함에 있어 신뢰를 상실했다. 맥디르는 벤디니와 FBI 모두를 피해 도주한다. 여기서 예상되는 질문이 있다. 정의는 실천 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물음이다. 사인과 사인의 관계에서 정의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것은 민사 또는 형사법이라는 실정법에 의해 법의 판결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인과 국가 권력, 또는 개인과 거대 기업 집단이나 기구, 기관과의 싸움이라는 절대적 약자와 강자의 싸움에서 정의는 핵심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추가적인 현실적 문제도 있다. 비대한 국가 조직에는 항상 중요 정보를 적에게 누설하고 이익을 착복하는 존재가 있다는 점이다. 서로 불법행위나 비윤리적 행위를 상호 공유하는 폐쇄적 조직인 검찰조직 같은 경우나 조직범죄 집단에서도 이탈이 발생하곤 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의의 딜레마는 자기 편익 우선적 인간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적 본성과 정의 실현을 위한 국가 권력의 사회계약에 대한 인식 변화의 문제라는 두 측면이 도사리고 있다.

 

전자는 순수한 사적 윤리에 대한 문제이고, 후자는 정의와 사회 안전망 구축에 대해 사인과 국가가 맺는 사회계약의 문제이다. 이를테면 검찰조직의 불법, 비윤리적 행위를 고발하는 해당 조직의 개인을 국가가 어떻게 보호해 줄 것인가, 위법을 은밀하게 수행하는 기업이나 집단을 고발하는 개인의 안전을 위한 제도의 구축에 대한 논의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정의(正義)’가 실천되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한 사회계약의 당사자로서 주권자인 시민들 개인들을 향한 물음이기도 할 것이다.

 

폐쇄적 조직이란 내부 구성원이 동질적 인간들로 이루어져 끈끈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해당 조직에 발을 담그고 있는 시간이 경과될수록 기성의 부패성에도 깊게 연루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게 된 조직을 말한다. 만일 이러한 조직에서 어떤 명령이나 지시, 참여에 소극적이거나 거부 의사를 보이는 인물은 바로 배척되거나 해코지를 통해 위험에 내몰곤 한다. 그래서 정의의 실천은 개인의 엄청난 용기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조직은 새로이 들어오는 인물을 자신들 조직문화에 길들이는 비공식적 훈육 프로그램이 비교적 잘 짜여 있다. 결국 동색(同色)의 인간들로 구성된 가장 반사회적 조직이 되곤 한다. 소설 속 로펌 벤디니는 이러한 전형적 사례를 보여준다. 조직 문화를 체화하고 있는 선배 파트너 변호사가 평변호사와 짝을 이뤄 강도 높은 업무를 부여함으로써 오직 해당 조직의 구성원의 시각만을 지니도록 훈련하는 것, 즉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여 조직 내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폐쇄조직이다. 폐쇄조직은 부패와 불법의 자연적 온상이 되는 토대임을 소설은 이처럼 아주 명료하게 입증한다.

 

탁월한 스토리 구성, 스피디한 위기 장면의 전환 등, 존 그리샴의 이 작품은 탁월한 재미로 책장을 넘기는 부담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하면서도 아주 묵직한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국가권력인 FBI가 맥디르라는 개인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는가? 살인 조직인 마피아는 자신들의 범죄증거를 넘긴 조직원을 어떻게 처리하려 할까? 이 둘 사이에서 맥디르가 실현하려했던 정의는 과연 실천할 윤리적 책임을 지울 수 있는 것인가?

 

벤디니의 변호사들은 불법 행위를 일상적으로 행하며 아무런 도덕적, 법적 책임도 느끼지 못한다.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적 행위가 정상적 삶의 행위로서 정당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들은 범죄 조직에 봉사했으며, 그로부터 발생하는 막대한 검은 돈을 보상으로 챙긴 사람들이다. 조직의 폐쇄성과 정의 실천, 국가권력의 무능력과 부패성 등, 이 소설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과제는 사실 그리 만만치 않다. 그리샴은 정의 실천의 실현 가능성을 주인공을 통해 말하려는 듯하지만, 그 출구가 그리 화려하지만은 않다. 정의 실현의 딜레마, 우리 세계는 이 딜레마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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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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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오늘 우리는 실존했던 민중의 고통과 죽음의 실재성을 부인하며 공동체의 기억을 방해 훼손하려는 무리들로 인해 다시금 역사의 분노를 마주해야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자신들의 권력 지키기에 급급해 정쟁을 일상화하며, 민생을 외면하고, 민의는 묵살하며, 주변 정세에 대해 무감하여 인민과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작태는 이 땅의 역사 내내 변함없이 자행되고 있다.

 

역사 쓰기란 고귀한 문명의 장치로서 인간 역사의 부조리를 끊어내기 위한 공분(公憤)의 기록이어야 한다고 프랑스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주는 말했다. 승자들에 의해 써진 기록은 분명 많은 실재를 가려 보이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지배 담론이 드리운 그늘을 걷어내어 암살당했던 사실들을 드러내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불화와 충동의 비극적 실재를 포착, 현재의 가치 기준에 따라 재해석하고 삶의 새로운 관계를 이해, 구축하는 일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하는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대략 400년 전인 1636, 이 땅의 왕이 적의 군주에게 머리를 세 번 땅에 찧고 아홉 번 절하는 굴욕의 역사를 오늘 다시금 성찰해야 하는 까닭일 것이다.

 

책은 이 굴욕의 사건과 이를 전후(前後)한 당대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외세에 무력하게 국토와 백성이 짓밟히는 위난(危難)을 마주하게 될 때까지 국가의 리더와 정치관료 등 지배 권력이 어떻게 국가의 위기를 초래했으며, 그 위기의 마주함에서 그네들의 대응 행태란 대체 어떠한 것들이었는지, 그리고 국난 이후의 행태들은 또한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이 저술의 고귀함은 역사를 비평의 체에 거르지 않고 고작 기록된 내용을 기술자의 욕망에 맞춰 재배열하여 정리한 또 하나의 단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툭하면 역사의 공평한 기술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대립과 충돌의 공평한 이야기란 진실을 가리는 기만이자 왜곡의 역사가 되기 일쑤다. 나는 역사란 실재의 불균질함을 감당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조리한 양상들에서 의미와 특정 형상을 해독해내야 하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1636년 급하게 비빈 및 세손 등이 도피한 강화도가 청의 군대가 공격을 시작한 지 반나절 만에 함락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의 권력이 기록한 내용은 물살이 세고 좁은 해협이어서 적의 수군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기록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양측 군대의 군사 수와 군선(軍船)의 비교를 통해 이 기록이 패전의 기록이 될 수 없음을 규명한다.

 

조선의 수군은 두께 12~3센티미터의 송판으로 만들어진 50~200명이 승선하는 판옥선 40척이었으며, 청군은 수레에 실어 온 작은 배 80척이었다는 것이다. 즉 조선의 수군은 보수적으로 계산하더라도 3,000명 내외였으며, 강화도 방어 병력은 간신 김류가 인조에게 잘라 말했듯 10,000명의 육상군이 있었다는 것이다. 도합 13,000명의 군대가 3,000명에 불과한 청군에 반나절만에 패전, 함락 당하였다는 것은 당시 지휘자들의 무능과 무책임, 비겁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독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독이 바로 부조리한 양상들에서 특정한 의미를 길어 올리는 진정한 역사 쓰기라 할 것이다.


역사의 치욕을 향해 달려가는 지배 권력의 행태

   - 인조반정에서 정묘호란까지

 

책은 총 3부로 나뉘어 기술되고 있는데, 1부는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전 인조반정, 그리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다루고 있으며, 2부는 병자호란에 대처하는 무능과 무책임으로 점철된 왕과 고관대작들의 행태들을 추적한다, 그리고 3부는 병자호란 이후에 발생한 백성이 겪는 고통의 형태들과 볼모로 청에 잡혀있던 소현세자의 귀국과 죽음, 그리고 세자빈 및 그의 자식들에 가해진 참혹함 등 권력이 자기 책임 지우기에 급급한 수치와 비극의 실체를 쫓는다.

 

인조반정을 정당화하는 기록이 권력을 찬탈한 세력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추출한 광해군을 성군으로 취급하지 않았음은 불 본 듯 뻔한 일이다. 서인(西人)세력의 거두인 전 영의정 박순의 서자들이 일으킨 역모로부터 시작되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 서궁 유폐와 소북(小北)파에 대한 처절한 참살로이어진 계축옥사에 대한 반발, 즉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명분으로 서인이 주도한 오늘의 표현으로 쿠데타다.

 

성공한 쿠데타의 공신들과 인조는 그렇다면 국가개혁과 백성의 삶을 돌보는 일에 관심이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이 이괄의 난이다. 이것은 반정공신 김류, 이귀 등이 12,000의 군사를 가지고 서북지역 방어를 위해 평안병사 부원수로 영변에 있던 이괄을 제거하기위해 역모의 누명을 씌움으로써 야기된 파렴치한 권력독점의 야욕에 대한 반발이다. 거침없이 궁궐의 턱밑까지 이괄의 반군이 밀어닥치자 왕과 이들 대신들이 나누는 대책이란 천박하기 그지없다. 왜관에 있던 왜인을 불러 반군을 진압하자는 외세 의존의 결정을 하는 것이다. 만일 영의정 이원익이 와서 구원하지 않고 대거로 몰려온다면 그 때는 어찌 하겠는가라는 반론이 없었다면 왜란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왜()에 조선을 갖다 바치는 결과를 초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뜻밖의 환난이 닥칠지 모르니 보내지 말도록 하라.”는 것이 인조의 교지였다는 말도 그 무능의 한 증거 일 것이다.

 

이괄의 난은 국가 권력의 무엇이어야 하는지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반성적 시선을 던져준다. 왕과 대신은 반군의 물밀 듯 내려오는 기세에 눌려 궁궐을 버리고 공주로 몽진을 떠난다. 백성의 삶은 아랑곳없다, 자신들만 살면 되는 것이라는 비겁과 이기심과 무책임이 국가 지배계층의 태도였다. 이렇다 할 저항 없이 무혈 입성한 이괄의 교만 역시 자멸의 길을 걷는다. 이괄의 난이 평정되면서 22일 만에 돌아 온 왕과 대신들의 행태는 정말 당혹스럽기조차 하다.

 

오히려 국경지대의 수비군은 물론 모든 군사의 조련을 전면 금지하고, 기찰(譏察)을 강화하며, 고작 자신들의 안위를 위한 경호군을 대폭 증가시키고는, 생활터전을 벗어나지 못했던 백성들에게는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의심으로 무참히 도륙하는 짓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망각한 채 무고한 사람들의 안위를 틀어막았다. 오늘의 현실과 오버랩되며 기시감에 전율하게 된다. 어찌 권력의 하는 짓이 이렇게 동일한 것인지. 무책임과 이기심!, 이 두 단어는 인조정권 내내, 아니 오늘의 한국 사회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양상을 보일 터이다. 역사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없는 족속들. 바로 이 족속들에 내 자신이 포함되어 있음에 수치감이 몰려온다.

 

게다가 친명배금이라는 주변정세를 헤아리지 못하는 외교적 무지와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명 황제에 책봉을 애걸함으로써 명이 보낸 책봉사에 의해 나라 곳간이 거덜나는 실상은 차마 읽어나가는 것이 부끄럽기조차 하다. 인조 3162667일자 승정원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물건 모두가 떨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특히 은과 삼은 바닥이 났습니다. 이번 천사(주청사)의 행렬은 전에 없던 변으로...”

 

국가 재정의 상황이 이러할진대, 공신들을 모아 회맹연을 열어 인조와 공신들은 권력의 영속을 자축한다. 그리곤 다시 회맹 뒤에는 분축연을 반드시 여는 것이 관례라며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외면하고 수일에 걸친 잔치를 강행했다니 공감능력 상실, 탐욕스러움, 권력의 도취, 무책임성이 국가의 중심을 채우고 있었다는 말이라 하겠다. 백성이 국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던 당대와 오늘의 사정은 다르다. 민중이 정치권력에 대한 감시를 외면하면 그것이 만들어내는 불의의 결과가 오롯이 참담함으로 돌아온다, 오늘 우리 민중은 권력을 향해 그릇됨을 지적할 수 있다. 목소리를 잃지 않는 인민들의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현실이다.

 

조선을 둘러싼 주변 정세의 거대한 변화가 몰아치고 있는 시대였다. 인조와 그의 봉신들은 권력의 탐닉에 빠져 소위 국제 정세의 변화를 읽는데 관심이 없었다. 오직 명에 대한 사대에 매달린 어리석음은 거대해지는 후금을 공략하는 전쟁에 13,000의 조선군을 파병하기에 이르고, 살아 돌아온 이는 2,700에 불과했다, 이것이 후금()의 조선 침략 명분이 되는데, 1627년의 정묘호란이다.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치닫는 적군에 놀라 왕과 대신들은 또 다시 강화도로 도주한다. 이 전쟁이 내정과 길어진 보급로 등의 문제를 인지한 후금의 사정이 아니었다면 백성의 고통은 정말 끔찍한 사정에 놓였을 것이다. 훈련된 군대도, 위난 정보를 전할 통신체제(봉수제), 그 어느 것도 외세의 침입에 대응할 것이 없었음이다.

 

권력이 자기 안위를 위해 국가 존립 기반을 망가뜨리는 이런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다. 결국 주화파와 척화파의 명분 싸움이 시작되는데, 이는 후일 병자호란에서 판박이처럼 반복된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현실임에도 백성의 안위에는 눈을 돌린 채 명나라를 배신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척화파와 백성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강화하여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주화파의 아무런 실익도 없는 고담준론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바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쟁(政爭)이고 당파싸움에 몰두하는 것이다. 백성의 삶의 토대를 희생시키며 벌이는 권력 싸움, 바로 오늘에도 우리들의 눈앞에 전개되는 추악한 정쟁의 동태(同態)이다

 


병자호란에서 우리가 해독해야 할 것들

   - 1636년 남한산성의 그날

 

1636128일 청의 선봉군이 압록강을 넘어 다시금 조선을 침략하는 병자호란은 1627년에 청군 앞에서 약조한 굴종의 맹서인 정묘약조의 위반을 구실로 한 것이다. 조선이 명에 붙어 배신했다는 명분이다. 청군 침입의 치계를 129일 조정에 보낸 것이 1212일 도착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즉 봉수제가 작동하지 않아 파발에 의존해야 했으며, 1213일에는 이미 적군이 안주에 이르렀고, 14일에는 개성을 통과하여 한양의 목전에 도달했다. 강화도로 몽진을 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급하게 왕과 대신들은 입보처(立保處)를 남한산성으로 바꾸고는 황급히 대궐을 버리고 또 도주했다. 인조와 대신들의 세 번째 궁궐을 버린 도망이다.

 

남한산성에 들어앉아 성문을 걸어 잠그고, 인조는 각 도의 감사와 병사 및 경기 열읍의 군대를 선발해서 적을 치게 하라라는 교지를 내린다. 즉 임금을 지키는 근왕군(勤王軍)을 결성해서 청군과 대적하여 자신을 구하라는 명령이다. 제일 먼저 응답하여 출동한 곳이 강원도 춘천방어사 권정길이었던 모양이다. 1,000명의 군사로 청군과 대결하였으나 전멸하였으며, 경상좌도, 전라도 등 속속히 출전하지만 패배한다. 여기서 다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이들 패배에는 지휘관의 무능과 비겁함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하나같이 가장 먼저 도주하고, 선전(善戰)하는 동료 장수를 이간질하거나,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작태들이 난무한다.

 

우리 역사상 3대 패전의 하나인 수만의 군사가 전멸한 쌍령전투가 바로 병자호란에서 있었던 비극이다. 전술과 전략에 대한 무지, 시종일관 당파 간 불신, 무능한 지휘자의 비숙련 직관 등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이 결합된 필패의 총체이다. ()과의 화친여부를 놓고 주화파와 척화파의 격돌은 재연되는데, 척화파의 좌장인 사대주의자 김상헌은 화친 주장자들을 모두 역적으로 몬다. 주화파의 좌장격인 최명길은 오랑캐의 말 발굽아래 어육(魚肉)이 되어가고 있는 죄 없는 백성은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반문한다. 정치권력이 자기 권력과 재화에 탐닉할 때, 그리고 백성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정치사회를 정쟁의 분열로 내몰 때, 국가와 백성의 삶은 필연코 황폐해진다. 정묘호란에서 당면했던 국방과 경제력에 대한 증강은 10년이 지난 병자년에도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거듭 반복되는 국난에도 이들은 아무것도 배우는 것이 없었다.

 

청 황제 홍타이지를 향해 조선 국왕 이종(李倧)은 삼가 대청국 황제께 글월을 올립니다.”라며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하는 이 수치의 역사를 인조 응당의 몫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겠는가? 대신이라는 자들, 고작 자신과 자기 식솔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자들이 권력을 지키고 있을 때, 민중은 어떤 상황을 맞이해야 하는가의 충격적 장면이다. 사실 이 잘 알려진 수모의 한 순간보다 더욱 주목하게 되는 사건이 있다. 화친 조건에 앞서 청이 요구하는 것들이 있는데, 왕제와 대신을 인질로 먼저 자신들에게 인도하라 했을 때, 이들은 합심하여 자신들의 교활성을 뽐내며 가짜 인물들을 보냈다가 들통나는 것이고, 이는 더욱 강화된 조건을 야기하여 더 커다란 손실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왕과 고관대작인 이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형제, 자식에 안위에 대해서는 끔찍하면서도, 백성의 목숨은 언제라도 내어주어도 된다는 생각, 게다가 임기응변이 통하리라 생각했다는 그 우매함과 교활함이다. 이러한 태도가 당시 지배권력의 일반적인 믿음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얼마나 세상의 이치에 어두웠던가를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당대 관료들의 저열한 양식의 형태가 빚은 비극으로서 두드러지는 사건은 강화도 함락에 관한 기록들이다. 간신 김류는 자신의 식솔들을 보호하기 위해 비빈 및 세손들의 피난처인 강화도의 검찰사로 아들 김경징을 발탁하여 보내는 것이다. 전시에 부여된 지역 총책임자의 감투이다. 김경징은 강화도를 완벽한 은둔처로 여기고 술판을 벌이며, 추궁하는 이들에게 내 아버지가 체찰사이고 내가 검찰사다. 내가 술판을 벌이는데 누가 뭐라 한단 말인가?” 어째 요즘 안하무인의 국회의원과 그 자식을 빼 닮았지 않은가? 청군이 보이자 강화유수 장신동과 함께 산 속으로 제일 먼저 도주하고, 고려 최씨 정권이 38년간 항전하였던 난공불락의 강화를 반나절만에 적에게 내주었다. 지휘자들의 총체적 무능과 무책임의 전형이다.

 

당시 사관(史官)은 김류와 김경징 부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단다. 김류는 사랑에 가리워 아들 김경징의 나쁜 점을 몰랐으나....탐욕과 교만을 일삼으며...한낱 광동(狂童)일 뿐이었다...김류는 부귀 때문에 나라를 망치고 또 제 아들을 죽였다.” 백성들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어떠한 안전 막도 없이 죽어 가는데, 대신과 그 가솔들은 여전히 흥청대고 있었으며, 성안에 둘러앉아 고작 술사의 점괘에 의존하여 전투 여부를 결정하였다는 그 몽매성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청이 항복조건을 작성해서 보내 온 조유문이 조선이 칭하는 화친조약이다. 즉 청이 조선에 내리는 명령서이자 항복문서일 뿐이다. 이것을 조선의 국왕이 청 황제 앞에서 낭독함으로써 전쟁은 종료되었다. ‘정축조약이란 말처럼 기만적인 명칭도 없을 것이다. 명목상 조약인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전후(戰後) 후유증들

   - 백성들의 지속되는 고통과 성찰(省察)없는 지배계급의 양태들

 

청은 척화파 대신을 자신들에게 보낼 것을 명령하고, 세자와 그들의 노비로 삼을 수많은 조선 백성을 이끌고 퇴각한다. 척화파 대신(大臣)들을 대신(代身)하여 청에 끌려가 처형된 오늘날 삼학사로 불리며 칭송되는 인물들은 실제 대신들이 아니었다. 김상헌, 김류, 정온 등 대신들은 슬그머니 제외되고 홍익한, 윤집, 오달제 3인이 희생자가 되었다. 그들은 국가와 왕에 대한 충성심과 명에 대한 사대를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이 과연 기릴 인물들일까? 이들이 백성의 신음을 들을 수 있는 존재들이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겠지만 척화파와 주화파의 좌장인 김상헌과 최명길이 모두 청에 소환되어 감금되는 사건이 있다. 김상헌이야 척화파이기에 청을 부인하는 속국의 인물에게 죄를 묻는 건 강자의 권리일 수 있다. 그런데 주화파의 거두인 최명길이 호출되는 것은 여전히 지배계급 간의 권력 싸움이 반복되고 있었다는 하나의 증거다. 조선이 청과 강화를 한 것은 종묘사직을 보존키 위한 것이었을 뿐 본심이 아니었다.”는 명()으로 보내는 외교문서를 이계라는 인물이 청()에 밀고함으로써 끌려갔다는 점이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타자를 낭떠러지로 미는 것, 이것이 저들 지배계급의 성찰 없는 일관된 작태였다.

 

이 국가적 수치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회자되는 단어를 남겼는데, 화냥년과 호로(胡虜)새끼라는 욕설에 가까운 악질적 언어다. 이 말에는 우리 선조들의 슬픔과 한이 담겨있다. 청에 끌려간 조선인들을 피로인이라 불렀으며, 속환되어 청에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당대의 세계는 이들을 매몰차게 내쳤다. 특히 여성들은 오랑캐 청인들과 정을 나눴다고 가문을 들먹이며 죽음으로 내몰고, 자결이 강요되었다. 그네들이 후일 화냥년이란 말로 바뀐 환향(還鄕)녀다. 그리고 그네들이 출산한 아이를 일러 호로새끼라며 멸시, 배척했다. 이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필연적이었겠지만 이들을 사회적 일원으로 보듬지 못하고 내치는 데에는 역시 사대부들의 이기심과 냉혹함이 작동했다.

 

전후의 공과(功過)처리 문제라는 관점에서 아주 중요하게 이해된 부분이 있는데, 23,000병력을 가지고 있던 황해도 및 평안도 도원수(都元帥) 김자점이 삼전도 굴욕을 치룰 때까지 오늘날 가평군 설악에 있는 미원이라는 곳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대소신료(大小臣僚)의 처벌 요구가 잇따르는데, 위급한 상황을 외면하고, 그 어떤 구제의 행위도 하지 않은 자에 대한 기율에 따른 처벌은 정당한 요구였을 것이다. 적이 쳐들어왔는데, 군대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면 이적(利敵)행위라 할 수 있다.

 

인조는 오히려 이들을 호위대장, 병조판서, 좌의정까지 자리를 내주며 곁에 두었다. 국가를 배신한 이적 행위자가 버젓이 국가 최고위 관료에 임명된다면 이것을 정의롭다 할 수 있을까? 또한 백성들은 물론 그 밖의 관료들에게 어떤 메시지가 될 것인가? 국가에 대한 이적 행위가 오히려 존중되는 세계라면 어느 누가 질서와 윤리, 법을 존중하겠는가? 전쟁 후, 조선의 사회상이 얼마나 무질서와 광기에 젖어있었는가의 반증일 것이다. 여기에 백성이, 정의가 설 자리가 있었겠는가?

 

이처럼 군주의 패덕함은 8년에 걸친 이역의 땅인 청의 볼모가 되었던 소현세자의 귀국과 그의 죽음처럼 당시 국정의 혼탁함과 맞물려 뚜렷한 상징적 사건을 낳는다. 인조실록에도 인조가 세자의 귀국을 원치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청이 자신을 입조시키고 아들 소현세자에게 양위시킬 것이라는 의혹에서 비롯된 권력에 대한 집착이라 할 것이다. 소현세자는 지병으로 산증을 앓고 있었으며, 이러한 의심과 냉대는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죽음에 대한 연구들이 다수 있는 모양인데, 병을 잘못 이해하여 치료하는 바람에 죽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저자는 소현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던 진언군 아내의 증언에 더 힘을 싣는다. 옴 몸이 전부 검은 빛이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물론 이 모호한 기록만으로 독살을 단정할 수는 없다.

 

인조의 총비(寵妃)인 소용 조씨의 모친과 염문을 일으키던 어의(御醫) 이형익이 한 말이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상이) 전교하기를, 침을 맞을 때 침의 2인만 입시하고 여러 어의는 모두 세자궁에 나아가 대령하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좋은 독살 환경을 만들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평소 세자 부부를 무함(誣陷)하기 일쑤였던 조소용이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형익에게 소현세자의 독살을 사주했으리라는 추정이다. 게다가 세자의 사후 묘호의 등급도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비에게 주어지던 능(), 혹은 그보다 낮은 원()을 물리치고 묘()로 명령했다는 것도 독살에 무게를 싣게 한다.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게 된 강빈은 조소용의 간계에 의해 사사되었으며, 그의 세 자식들도 제주에 유배되어 둘은 굶주림과 학대 속에서 사망하였다. 조선의 대표적 혼군(混君)인 인조의 사망이후 적통인 소현세자의 생존한 아들을 배척하고 즉위한 효종 또한 적통성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강빈의 옥사를 거론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리겠다, 진실을 지우려 한 효종의 비겁함에서 끈질긴 불의의 계승을 읽게 된다. 탐욕과 간계와 비굴, 비겁과 무능과 무책임, 그리고 광기가 빚어낸 17세기 이 땅의 역사는 수치와 비극의 역사라 해도 결코 지나친 이해가 아닐 것이다.

 

맺는 말


오늘은 17세기 절대권력을 지닌 왕이 지배하는 세상도 아니며, 형식적이든 외형적이든 지배 권력에 진입하는 계층에 제한이 주어진 세상도 아닌,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권리인 체제이다. 혼군의 무능과 무책임은 국민이 지탄하고 시정을 촉구할 수 있으며, 자기 이익에 탐닉하며 국민 삶의 건강성을 훼손하는 권력은 끌어내릴 수 있다. 이처럼 반복되는 불의로 그득하고 부조리한 양상은 이제 우리들의 세계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 이것이 역사를 읽는 까닭일 것이다.

 

이 책은 지배 엘리트로 자처하는 인간들의 절대 사회가 당연했던 것으로 만들어 냈던 권력관계의 충돌을 배제하고 외면함으로써 공평하게 정리한 따위의 역사서가 아니다. 역사의 자료를 어떻게 읽었는지, 어떻게 선택했고 분류하였는지를 드러낼 뿐 아니라, 진실이 좌초해 있는 사료들의 베일을 찢고 앎의 불투명을 해쳐내어 가려져 있던 것을 드러내 보여준. 왜곡과 진실 사이에 난 좁은 길을 역사가가 어떻게 걸어내야 하는지, 이를 통해 현재의 삶의 현상들의 관계를 이해케 하는 노작(勞作)이라 하겠다. 병자호란에 대한 이 역사평설은 전쟁이란 참화를 온통 몸으로 겪어내야만 했던 백성들의 흥건한 피() 위에서 풍악을 울려대는 권력의 파렴치에 대한 규명이며, 해독이다. 역사의 진실을 일그러뜨리고 더럽히면서 관련 사실을 기만적으로 이용하려는 인간들이 나라를 혼돈의 지경으로 몰아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더욱 우리들에게 역사의 이해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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