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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인간 - 가면과 현기증 (Le masque et vertige)
로제 카이와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평점 :
놀이가 일상과 뒤섞일 때 그 사회는 부패한다!
- 주술과 홀림의 정치, 문명 퇴행의 표상에 대해서
이 책은 놀이를 출발점으로 하는 사회학의 기초를 놓고자 하는 작업이다. 인류의 오랜 역사 시간 동안 놀이를 단순하고 무의미한 어린이 같은 기본 놀이로 간주해왔고, 고작 심리학이나 생물학적 기반에 의한 교육 또는 훈련 역할정도의 연구가 고작이었으며, 지금의 현실도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지배 엘리트의 은폐된 어떤 의지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놀이에 대한 문화적 해석의 장을 전면적으로 열어놓은 ‘요한 하우징거’의 1938년 발표된 『호모 루덴스』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로제 카이와’의 이 저술은 아마도 ‘놀이’에 은닉된 문화적 사회적 가치를 드러낸 지금까지의 가장 완결된 연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책을 새삼 주목하게 되는 것은 놀이의 사회문화적 가치, 즉 현실 세계의 각종 제도와 규칙이 어떻게 놀이와 상호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이며, 나아가 “놀이는 한 문화의 도덕적, 지적 가치를 나타내는(58쪽)” 중대한 표상이라는 점인 까닭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회의 지배적 놀이는 그 사회 실체의 얼굴이며, 야만과 문명 사이의 위치를 가늠하는 척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저술은 바로 2023년 한국 사회의 문명적 위치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수없이 다양하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놀이’가 무엇인지부터 아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로제 카이와’는 놀이를 규정하는 특징을 여섯 가지로 규정하고 있는데, 자유로운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과 시간과 공간의 범위가 한정된 분리, 격리된 활동이라는 것, 그리고 결과나 놀이의 전개가 결정되어 있지 않아야 하고, 재화나 부 같은 어떠한 새로운 요소도 만들어내지 않는 비생산적 활동이며, 규칙(약속)이 있는 활동이거나 허구적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는 놀이란 즐거움 그 자체인 것이라는 점에서 언제든 하고 싶으면 하고 그만두고 싶으면 하지 않으면 되는 자유로운 것이며, 일상생활과 경계를 구분할 수 있는 놀이를 위한 별도의 장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개념 자체에서 당연히 도출되는 것이다.
특히 비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놀이가 생산에 참여하게 되면 실생활의 경계가 무너져 더 이상 놀이가 아닌 것이 되며, 놀이라는 순수한 즐거움을 파괴하게 된다. 아마 놀이의 가장 중요한 활동 요소일 텐데 필수적으로 해당 놀이의 절대적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규칙과 이에 대한 준수가 없다면 놀이는 놀이로 수행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이는 모두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규칙 없는 놀이도 있다. 자유로운 즉흥적 발상을 전제로 하는 인형놀이, 병정놀이, 기차놀이처럼 역을 맡는 즐거움으로 인해 노는 놀이가 있다. 이것은 감정이 규칙을 대신하는 놀이로서 이 감정(허구)이 곧 규칙인 놀이이다. 여기서 어떤 놀이든 오직 규칙을 지니든가 허구를 지니든가 둘 중 하나를 지닌다는 점이다. 둘 모두를 지닌 놀이는 존재 할 수 없으며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 특징들, 특히 규칙과 허구의 놀이를 장황하게 서술한 이유는 이것이 곧 특정 사회의 문명의 위치를 가늠하는 중대한 분류 개념이기 때문이다. 허구의 놀이가 한 사회에 만연하는 경우 그 사회의 현실은 공정성이나 평등성, 민주주의적 의식의 쇠퇴, 사회적 불안정성의 증대를 예측케 하는 지표일 수 있는 까닭이다. 이를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놀이의 역할에 따른 분류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카이와는 모든 놀이를 ‘경쟁, 우연, 모의(模擬), 현기증’, 네 개의 역할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각기 아곤(Agon; 시합,경기), 알레아(Alea; 요행,우연), 미미크리(Mimicry; 흉내,연기,모의), 일링크스(Ilinx; 현기증,홀림,소용돌이)로 명명한다.
사실 오늘의 세계와 같은 법과 제도가 정비되고, 세습계급을 불식시키며 주술적이고 열광적 제의(祭儀) 사회를 벗어난 것은 불과 1세기도 되지 않는다. 물론 서구 사회의 경우 계몽주의가 태동한 17세기를 전후한 4세기 남짓 되겠지만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30년 전까지 암흑 사회였다고 할 수 있으니 최근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허구적인 환상에 의존하는 혹세무민의 사회였음을 의미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놀이의 네 역할을 간략하게나마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놀이(Jeu, Play)의 네 역할(아곤에서 일링크스까지)
아곤(Agon)은 적절한 연습, 부단한 노력, 승리에의 의지, 지속적인 주의를 요구하는 놀이다. 스피드, 인내력, 체력, 기억력, 재주와 같은 개인의 능력이 경쟁하는 놀이로서 체스, 당구, 축구 등등을 열거할 수 있겠다. 이러한 경쟁, 시합 놀이는 우선 공정하고 평등한 기회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불공평성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한 규칙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이들의 여러 참을성 놀이는 아곤의 초기 놀이 양식일 것이다. 숨 오래 참기, 눈 깜빡거리지 않기 등 상대방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는 순수한 개인 능력 드러내기 놀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알레아(Alea)는 상대방을 이기기보다는 운명을 이기는 것이 문제인 놀이다. 의지를 포기하고 운명에 몸을 맡기고 숙명의 결정을 수동적으로 또 고의적으로 기다리는 놀이다. 이 놀이의 본질은 “노력과 성과에 대한 오만불손한 경멸”이 자리잡고 있는데, 가혹한 현실 세계에서 노력과 능력으로 도달 할 수 없는 성취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놀이의 중요한 점은 참여자가 무릅쓴 부담과 위험에 엄밀하게 비례한 보상처럼 위험과 이익의 균형을 위한 주의가 기울여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현실에 없는 순수하게 평등한 조건의 인위적 조성이다. 우연만큼 평등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이에서 절대적 평등의 실현 규칙은 불가능하다. 아곤의 경우 먼저 시작하거나 나중에 하는 것이 유리하기도 하며 육상이나 빙상 트랙경기에서 안과 바깥쪽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물론 이를 상쇄하기위해 교대로 차지토록 하는 방법까지 동원하며 평등을 확립하려 한다. 복권같은 출생의 우연에 의한 환경적 우열, 체급별 경기의 체중의 불가피한 차이 등 완전한 절대 평등의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 알레아는 우연이라는 평등성으로 이를 보완한다.
미미크리(Mimicry)는 허구적 닫힌 세계를 일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한 놀이다. 가공의 환경 속에서 가공의 인물이나 사물이 되어 그것에 어울리게 행동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놀이다. 집에 있는 의자를 죽 늘어놓고 칙칙폭폭 기차놀이를 하는 아이는 자신이 기관사인 척 하며 논다. 또는 엄마, 요리사, 군인, 왕, 비행기, 자동차를 흉내 내거나 연기하며 논다. 어른은 가면을 쓰거나 변장을 하고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숨기고 실제의 인격을 해방시켜 방종의 분위기를 이용하며 논다. 미미크리는 곧잘 아곤과 결합하여 구경거리가 됨으로써 즐긴다. 운동선수, 영화배우, 아이돌스타 등은 능력 경쟁을 통해 관객과 청중에 과시함으로서 즐거워한다,
끝으로 일링크스(Ilinx)는 일시적 지각의 안정을 파괴함으로써 기분 좋은 패닉을 즐기려는 목적의 놀이다. 몸을 빙빙 돌려 쓰러지거나 비틀거림을 즐기는 것, 높이 올라가는 그네, 광란적 회전을 즐기는 놀이를 들 수 있겠다. 혼란과 패닉을 즐기는 이 놀이는 고대 주술사의 광란적 환상의 몸놀림을 연상시킨다. 설명이 길어졌지만 이들 놀이의 역할과 그 수행을 앎으로서 이들과 현실 세계의 제도와 규칙, 사회의 특성을 대응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들 놀이가 인간의 강력한 본능들의 형식이며, 관념적이고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일상생활과 떨어져 놀이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아곤은 페어플레이의 규칙 존중과 타고난 탐욕의 억제를 습관화 시킨다. 또한 알레아는 현대사회의 생존 경쟁이 요구하는 부단한 긴장과 경쟁의 열위의 체념을 보상하며 개인과 사회적 긴장의 배출구 역할을 한다. 미미크리는 자신의 인격에 잠시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서 공상과 환상을 즐기며 병적 일탈을 막으며, 일링크스는 기억의 부담, 책임의 고통, 세상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일시적 도피 수단이 된다. 이렇게 이들의 역할에 따른 기능을 해석하다보면 놀이라는 것이 사회적 순화, 배출, 훈련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일링크스에 분류되는 놀이가 만일 오염되거나 타락해서 더 이상 놀이의 범주를 벗어난다면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 지 생각해본다면 이 착란과 혼란의 추구가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가 상습화되는 것이다. 아마 취함과 현기증 속에 있는 인간은 개인 자신은 물론 주변을 황폐화 시킬 것이 다. 다시 말해 놀이는 본능을 억제하며 제도적 존재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며, 이들 놀이를 부패, 타락케 하는 요인, 또는 사람, 권력의 침범은 질서와 규칙의 파괴를 낳게 될 것이다.
■ 놀이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사회적 표상으로서의 놀이
놀이는 인간에게 자연의 단조로움, 결정론, 맹목성과 난폭함에 저항 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순기능의 역할로서 작동한다. 격리된 놀이에 따른 장소, 시간적 한계, 그리고 규칙성과 생산의 부담 없는 비생산성의 해방감과 자유로운 진퇴, 실현 불능의 허구를 통한 감정의 우회와 일시적 분출의 창구로서 현실 사회의 가혹한 환경을 차단하고 휴식과 즐거움이라는 삶의 가능성을 조성하며 제도와 정치사회의 불충분성을 보완하는 균형추가 된다.
그런데 놀이가 일상으로 오염되기 시작하면 놀이의 성질 자체가 손상되고 놀이는 놀이로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즉 놀이가 현실 세계와 뒤섞이면 부패가 일어난다. 즐거움이었던 것이 고정 관념이 되고, 도피였던 것이 의무가 되며, 기분 전환이었던 것이 집착, 강박 불안의 원천이 되어버린다. 놀이는 현실에 감염되어 부패가 일어난다. 이 부패에 주목하게 되는데, 바로 오늘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양상을 해석하는 하나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놀이 정신에 의해서 더 이상 누그러지지 않는 대립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부패가 나타난다. ‘놀이 정신’을 다시 반복 서술한다면 바로 정정당당한 규칙의 존중을 비롯한 모두에서 언급한 놀이의 여섯 특성과 같다. 놀이 정신은 곧 사회 제도가 반영하고 있는 원천이다. 작금의 한국정치사회는 이 놀이 정신이 훼손, 파괴됨으로써 도덕적, 사회적, 법률적 구속의 틈이 벌어졌다. 이 균열로 인해 경쟁의 선천적 난폭성, 즉 '자신의 반대자는 철저히 도륙한다'가 사회 속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규칙이 존중되지 않음으로서 폭력과 잔악성이 사회를 잠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탐욕과 폭력의 억제 습관을 붙이는 교화적 역할을 수행하던 놀이의 정신이 파괴되었음은 하나의 현실 사건만으로 입증이 충분하다. “아곤(경쟁, 규칙존중)의 타락은 심판과 판정이 모두 무시되는 곳에서 시작된다.(81쪽)”고 한다. 검경 수사권 분리와 일제 징용공 보상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을 부정, 무시하며 권력 자신만의 독단을 내세우는 현 정권의 타락상은 적확한 판박이 사례라 하겠다.
인류 사회는 미미크리와 일링크스가 인간사회를 지배해온 끈덕진 야만의 역사시대를 벗어나는 데 거의 모든 인류의 시간을 보냈다. 주술과 미신, 환상과 공상의 허구 세계, 이를 벗어나 아곤과 알레아의 세계, 다시 말해 규칙과 기회의 평등이 지배하는 사회, 문명사회로의 진보를 이루어냈다. 따라서 자신들의 사회를 표상하는 재능과 노력의 산물을 겨루는 놀이들과 평등 실현을 보충하려는 제비뽑기, 공공 복권, 슬롯머신 등 우연 놀이가 현대 놀이의 중심을 이룬다. 사회가 제아무리 평등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소질이나 악착같은 노력, 끈기있는 근면에도 획득할 수 없는 보상의 사회임을 부정 할 수 없다. 출생의 우연은 끈질기게 능력 경쟁을 방해하며, 차지한 기득권은 장벽을 세우고 사다리를 걷어차 기어오를 수단이나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인간 사회의 오래된 비극적 실상이다. 우연 놀이는 이러한 현실을 보상한다.
이처럼 문명으로의 이행은 일링크스와 미미크리의 우위를 점차적으로 없애며 대신 아곤과 알레아, 경쟁과 우연의 쌍을 사회관계의 우위에 놓는 것이다. 이 세계는 능력과 운 사이의 불안정하며 무한히 변하기 쉬운 균형 위에 근거를 둔 불안정한 곳이다. 때문에 출생의 우연을, 계급 특권을 효과적으로 없애버리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것의 투영이 아곤과 알레아다. 아곤의 시합에서 이길 수 없는 공정 실현 불능의 인간 사회에 무차별적 은혜인 우연놀이를 통해 마침내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링크스와 미미크리가 다시 재용출(再湧出)되고 있다. 흥분의 즐거움, 환상의 즐거움, 충격의 즐거움, 홀림과 취함의 세계로 회귀하려 한다. 일링크스가 놀이려면 한정된 시간의 추구여야 한다. 이것이 한정되지 않고 지속되면 혼란과 광기로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한편 미미크리, 즉 흉내와 가면 놀이가 놀이기를 멈추고 주술과 미신으로 실생활과 섞이기 시작하는 사회적 부패가 정치의 장에서 행해지고 있다. 놀이의 이러한 병적 일탈이 사회를 오염시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권력은 홀림과 취함을 지속하려고 매양 알코올 타령이고 왠 주술사가 국가 행정, 외교, 국방, 경제를 훈수하고 있다. “놀이는 풍부한 문화적 창조성을 설명해 줄 뿐 아니라 그 사회의 얼굴, 스타일, 가치를 보여주고 이해하게 해준다.(107쪽)”고 했다.
이러한 표상들은 2023년의 한국 사회가 대략 30년 전의 망상적 주술사회, 불평등과 불공정이 만성적으로 날뛰는 야만적 세계로 퇴행하고 있음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리라. 게다가 우중(愚衆)은 대중음악 스타와 스포츠 챔피언 등, 이들 필연적으로 단명(短命)하는 신(神)들을 숭배하는 일링크스 놀이에 심취해 화장법, 식사요법, 옷 입는 방식...까지 모방, 흉내 내며 동일시하려는 일반적 욕구로 대리 만족에 방목되고 있는지도 모른 체 문명과 정치적 퇴행에 일조한다,
출생과 실력(재능)의 싸움은 엉뚱한 교체가 일어나지 있는 이상 대다수의 군중은 결코 최상의 지위를 차지 할 수 없다. 여기서 일링크스 놀이, 즉 벗어나야 하는 환상의 대리라는 속임수가 생겨난다. 상상체험, 이는 알코올과 함께 타락한 사회, 부패한 기득권의 불안을 위한 평형추로 쓰인다. 제한된 장소의 한시적 체험이 아닌 일상과 뒤섞인 놀이는 놀이의 부패와 타락으로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놀이에서 속임수를 쓰는 자보다 더 나쁜 자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카이와는 경고한다. “그것은 규칙을 조롱하거나 규칙에는 근거가 없다고 말하면서 거부하거나 경멸하는 자이다.(262쪽)”라는 것이다. 법 위에서 행위하려는 불손한 인간들.
우중과 함께 이 사회의 가장 악질적인 자들에게 권력이 주어졌다. 무수한 희생과 노고 끝에 축적한 귀중한 사회적 제도와 윤리적 역량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있다. 이 몽매한 권력은 왜 낮은 소득 계층의 사람들에게 보상이 주어져야 하는지 모른다. 그것이 사회의 균형성과 안전성을 확립하는 것임을, 보다 문명적인 공정의 지향인 것을, 공정과 자유를 추한 입으로 뱉어내지만 놀이의 정신인 자유와 공정, 규칙의 엄수, 정정당당한 페어플레이 정신을 알지 못한다.
패자를 위로해주고 규칙있는 경쟁이 상대에게 손상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능력의 발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능력도 보여주지 못하며 단지 주술과 홀림의 정치를 하는 권력의 퇴행성이 이 오래된 책을 다시 읽게 했다. 이 책의 부제는 ‘가면과 현기증’이다. 가면 뒤에 숨겨진 본래의 얼굴을 내밀고 민중과 마주하여 진실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 이 사회에 아곤과 알레아는 위축되거나 사라지고 일링크스와 미미크리가 횡행한다는 것은 곧 문명 퇴행의 지표이다. 놀이를 사회학의 중요 주제로 연결한 이 역작에 이은 정치학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가 있다면 어쩌면 놀라운 저작이 탄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한한 영감을 지펴내는 위대한 걸작이다. 호이징가의 ‘호모루덴스’를 같이 읽는다면 더욱 알찬 지식 여행이 되어 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