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독서는 소설문학 읽기가 될 것 같다. 한국 문학으로 서윤빈의 날개 절제술과 윤고은의 불타는 작품두 권의 소설과 길 위에 찬사를보낸다는 허연 시집 불온한 검은 피, 그리고 해외문학으로 국내 독자들의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감상을 보이는 올해 노벨상 수상자인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 ,Ⅱ』, 장웨이의 漁神을 찾아서, 줄리언 반스의 연애의 기억, 옛 감성이 떠올라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푸시킨의 시집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밀란 쿤데라의 소설론에 이은 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강의, 이렇게 오직 문학에만 잠겨볼 예정이다.

 

 

한 권 예외로 역사서를 사두었는데, 문학만을 읽다 이야기들에 권태가 느껴질 때, 조금씩 펼쳐 읽기 시작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하이켈하임 로마사로마사를 서술한 책 중 그나마 가장 분량이 적은 책이면서, 알차게 저술된 책이어서 선택한 역사서다. 저자인 토론토그리스 로마사 교수였던 프리츠 M. 하이켈하임이 생전에 출간한 단 2 권의 책 중 하나이다. 고밀도로 응축된 내용들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1,000페이지이니 매일 짬짬이 30페이지씩 읽으면 한 달에 읽어낼 수 있으리라.

 

윤고은의 불타는 작품은 도입부를 읽다가 잠시 접어둔 상태이다. 내처 읽게하는 어떤 의욕이 갑작스레 식었기 때문인데, 아마 다른 책들을 모두 읽고나면 새롭게 읽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서윤빈의 소설집 날개 절제술은 표제작보다는 단편 리튬에서 내 눈이 밝아졌는데, 주인공의 인과관계에 집착하는 과학적 논리, 즉 전자제품의 고장 수리에 동원되는 원인추구 접근 방식과 그의 훼손된 인간관계가 대비되어, 또 하나의 현대적 인간상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아무튼 천천히 그리고 세심히 읽어봐야겠다. 허연의 시집은 출판사가 일종의 리바이벌을 노려 재출간한 것 같은데, 작고한 손상기 화백에 대한 몇 몇 시(), 시집을 가득 채우는 비애(悲哀)의 유혹이었다고 해야 할까?

 

다섯 권의 해외문학 중 정작 의욕이 집중된 책은 중국 소설가 장웨이의 漁神을 찾아서, 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강의이다. 장웨이의 책은 3편의 중편 혹은 경장편 분량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표제작인 어신을 찾아서는 순박한 인물들과 자연을 배경으로 동화적 주제를 펼치고 있어 모처럼 긴장을 놓은 채 글 속으로 빠져드는 평온함이다.

내 작업의 대부분은 무거움을 제거하는 것이었다고. [...] 무엇보다도 이야기 구조와 언어에서 무게를 제거하고 싶었다.(81)”라며, 다가오는 새 천년(21~29세기)의 문학의 특질에 대한 문학론을 여는 이탈로 칼비노의 책은 책의 옹색한 외장편집과는 달리, 문학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울림이 깊은 시선을 전해준다. 아무래도 내 것으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몇 차례 반복 읽기의 과정을 통해야 할 것 같다.

 

철지난 낭만적 서정시인 푸시킨의 시집은 가끔씩 건조해진 마음을 달랠 때 읽으려 구입 한 것인데, 내 감성이 이를 어떻게 수용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욘포세의 소설은 무려 100여 쪽을 읽어나갔으나, 하나의 진전된 문장을 더하기 위해 그 반복되고 반복되는 동일 문장들의 누적을 읽는 것은 정말 지루한 인내를 요구하는 듯하다. 아무튼 이 정도의 인내 끝에 무엇이 있는지 더 나가 봐야할 터. 줄리언 반스의 작품들은 이미 모두 갖고 있는데, 새로운 장정의 유혹에 못 이겨 인간 생애의 절대 주제인 사랑의 기억을 얘기하는 책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작가의 말처럼 그의 온전한 하나의 이야기(The Only Story)에서 고통과 매혹을 느끼게 될까?

 

11월은 어쨌든 내겐 문학을 읽는 달이 되었다. 아마 잠시만이라도 퇴행의 멍청한 소음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혼란한 마음이 진정될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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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전집 11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민음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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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존재의 부분을 찾아내려 하지 않는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이다. 앎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모럴(morals)인 것이다.” -15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이지만 역사적 뿌리가 천박한 단어라며, ‘보헤미아인으로 자처했던 농담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인 밀란 쿤데라의 소설론(小說論)이다. 6부로 구성되었으나 역자(譯者)의 요구에 의해 쿤데라의 이스라엘 문학상 수상연설7부로 추가되어, 밀란 쿤데라가 숙명처럼 여겼던 ‘7’이라는 숫자를 완성해, 이 위대한 소설가에게 경의를 표하려 했던 듯싶다. 성급한 독자는 책의 끝에 수록된 이 응축된 연설문(예루살렘 연설)에서 쿤데라의 소설문학에 대한 일관된 의지를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히 그의 소설론이 집약된 명문장이기에 역자의 구색 맞추기 편집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다소 긴 문장이지만 세계와 인간을 정의하는 데 있어 소설의 입지 혹은 지위에 대한 그의 신념을 읽을 수 있기에 인용해 본다.

 

한 세계의 정신이란 예술, 특히 소설에 대한 고려를 빠뜨린 채로 오로지 사상과 이론 개념들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세기 기차를 발명해냈고, 헤겔은 보편적 역사 정신 자체를 포착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멍청함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감히 이것이야말로 과학적 이성에 그토록 자부심을 지녔던 한 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221

 

데카르트가 문을 연 근대 이후, 잘난 척하며 마치 과학과 철학이 시대정신을 해석하고 확신했다고 우쭐거렸지만, 근대성이라는 이 진보는 오히려 인간의 시선을 축소하고 멍청함만을 진보시켰다는 것이다. 소설은 과학과 이론이 감지하지 못한 인간 정신을 발견하고 그것의 이유에 대해 물음을 제기할 수 있는 유일한 범주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소설의 소명에 대한 이 주장은 밀란 쿤데라의 초지일관한 소설의 세계-()’ 역할이고 소임이며 존재 이유이다. 세계를 단순히 기술적이고 수학적 개발의 대상으로 축소하여 인간의 삶으로부터 구체적 세계를 제거해버려 단편성만을 보게 한 과학의 합리주의적 이성에도 불구하고, 근대는 이것만으로 이해될 수 는 없는 것이며, 소설은 바로 이것이 배제한 인간 삶의 가능성에 눈을 돌려 동굴에 갇힌 인간을 넒은 지평으로 끌어낸 것이 바로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시작인 1부는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이다. 신이 선악과 가치질서를 규정하던 이 세계를 떠나자 돈키호테는 집을 떠나 드넓은 광야로 나섰다. 세계를 과학적 이성으로, 유일한 절대 진리를 선언하던 때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세계는 절대진리가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상대적 진실들의 더미와 맞서야 함을 알았으며, 불확실함의 지혜라는 유일한 확실성으로 인간 존재를 망각하기 시작한 근대성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시대의 이성이 인간 존재를 망각했을 때, 소설은 모험하는 인간을 통해 근대적 인간이라 선언된 것과는 다른 상이한 존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소설은 심판관이 부재하는 세계에서 상대적이며 애매해지고, 흩어진 진실들을 찾는 모험을 시도한 것이다. 밀란 쿤데라, 자신의 소설은 근대 소설의 시작을 알린 세르반테스, 다시 말해 유럽 소설문학의 적장자임을, 자신이 바로 그 후계자임을 선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는 일종의 소설의 역사, 그 계보를 읊는다. 드넓은 지평(인간의 무수한 실존적 가능성)에로의 모험은 발자크에 이르러 경찰, 법률, 군대, 국가와 같은 사회제도라는 건축물들의 배후로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플로베르의 보바리에 이르면, 집 마당의 울타리만큼 좁아지고, 돈키호테의 모험은 감당할 수 없는 권태 속에 꿈과 몽상에 자리를 넘겨줬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시금 사회라는 역사의 힘에 인간 장악을 넘기면서 그 신통력을 잃었을 때, 돈키호테의 세() 세기에 걸친 여행은 카프카의 측량기사 K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나타나, 모험은 고작 서류상의 하자로 관리와 말다툼하는 모험으로 정말 하찮은 것으로 축소되었음을 주장한다. 밀란 쿤데라는 세르반테스에서 발자크를 지나, 카프카로 이어지고, 유럽소설 문학의 정통 계보의 후예로서 밀란 쿤데라, 바로 자신의 소설이 있다는 간접적 선언일 것이다.

 

근대의 이성이란 것이 과학과 합리주의를 내세우며, 진보를 떠들 때, 소설가들은 바로 그 이성이 계승된 인간의 가치들을 하나씩 좀먹어 들어가는 역설적 세계를 발견하고, 규명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 공인된 가치 체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극단의 세계는 하셰크나 카프카가 발견한 인간과 그리 다르지 않다, 오히려 그네들이 상상한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오늘의 그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영혼하고만 싸워야했던 평화로운 시기는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 시대를 마지막으로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리곤 하셰크, 카프카, 무질, 브로흐는 영혼을 벗어난 바깥, 외부에서 온 힘과 마주한 완전히 새로운 모험에 나서야 했다고 지적한다.

 

이제 인간은 비인격적이어서 다스릴 수도, 예측 할 수도. 이해할 수 도 없는 외부의 힘에 장악되어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그것을 느끼고 고통에 방황한다. 그래서 이 인간들이 처한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케 한다. 현대사회의 특성은 이처럼 세계 모든 것이 축소되는, 사회적 기능으로 인간의 삶을 축소하고, 민족의 역사는 몇 개의 사건으로 축소되며, 그마저도 편향된 해석으로 축소되는, 축소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방이 깜깜해지고 존재가 망각된 세계이다. 소설은 이 때문에 세르반테스가 근대 이성으로 인한 존재 망각에서 인간을 건져 올리려 했던 시도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필요한 것이 된다. 쿤데라는 그래서 말한다. 나는 세르반테스의 *절하(切下)된 유산 말고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세르반테스 소설의 작품적 위상 또는 가치를 낮추어 보는시선에 대항한 표현)

 

2소설의 기술에 관한 대담4예술의 구성에 관한 대담은 쿤데라의 소설 작품을 기반으로 한 소설론에 대한 대담이고, 6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 어()은 그의 각 작품상의 키워드(핵심 주제어 및 주인공의 상징적 약호 등)의 사전(辭典)적 기능으로서 일종의 미학적 진술과 작품의 번역 및 출간에 대한 해명과 소신이라 할 수 있다. 특히 2부에서는 소설이란, 자아의 수수께끼에 대한 관심이라며, 나는 무엇에 의해 포착될 수 있는 가에 대한 물음으로서 소설 역사의 시대구분이란 이 물음에 관한 상이한 대답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초기에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이 행동과 모험뿐이었으며, 디드로에 이르러 행위와 자아의 간극, 즉 행동으로부터 인간을 포착할 수 없음에 대한 고민으로 내면의 삶을 탐색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인간 내면적 탐구는 그 극점인 프루스트와 조이스에서 정점을 이루고 불충분한 추구로 막을 내리지만, 자아를 생각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한 카프카를 통해 새 지향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판단한다. 소송의 요제프 K, ()의 측량기사 K는 개별적 존재로 규정될 수 없는 인물들로 이름, 외모, 버릇이나 행위, 하물며 자유로운 영역에서조차 제한되어 있는 존재로써 현재의 상황만을 빙빙 도는, 자신들의 내면적 삶은 모조리 자신들을 옭아맨 상황에 휩쓸려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프루스트의 경탄으로서의 내면적 세계와 달리 카프카의 내면세계에는 이렇다 할 내적 동기도 없으며, 그 동기에 관심조차 발견 할 수 없다. 외부적 결정이 압도적인 것이 되어버린 세계이기에 남아있는 가능성이란 어떤 것인지를 찾는 인간이 출현한 것이다. 현대적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아마 밀란 쿤데라 자신이 카프카의 후예, 세르반테스라는 유럽 소설 문학을 잇는 적통자임을 확인하기라도 하는 듯, 이 세계에는 역사 기술을 하는 전문가가 따로 있는데, 소설이 역사에 대해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라는 물음에 자신의 소설은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고, 특정한 시기의 사회를 묘사하는 역사적 실제를 말하는 부류의 소설이 아님을 강론한다. 그러면서 소설은 인물들의 실존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정황으로서 역사를 말하는 것이며,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이 각기 다른 시대를 통해 사라져가는 가치훼손의 역사를 말하는 것과 같이, 인간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발생시키는 실존적 상황으로서 역사를 말한다고 설명한다. 즉 인간 실존의 가능성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변화된 역사의 상황에 따라 발견되지 못했던 새로운 인간을, 낯설지만 현재하는 인간을 찾아내고 세상에 묻는 것이다.

 

5저 뒤쪽 어디에라고 명명된 논설은 현대사회 속에서의 인간 실존 가능성의 한 발견으로서 카프카를 말하고 있는데, 카프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지녔던 통찰이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한 예견적 발견이었기에 오늘의 독자들에게 가장 친근하고, 매력적인 글이 될 것 같다. 우리는 카프카의 작품은 단 번에 이거 카프카 아니에요? 혹은 카프카적인데. 라고 말하곤 한다. 카프카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보이지 않는 미로의 성격을 가진 권력과 대결이 있으며, 실존 자체가 하나의 착오인 것으로 그려지며, 부조리함을 참을 수 없어 자신이 처한 고통을 합리화하고자 벌이 잘못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측량기사 K를 떠올려보자. 그는 관련된 모든 행정관청들이 시효가 지나 까맣게 잊어버린 명령이 관료적 착오에 의한 사소한 장난으로 보내진 초청장에 의해 성으로 간 것이다. 결국 측량기사 K는 실존 자체가 하나의 착오이고, 착오 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의 사회활동은 거의 모두 관료화되어 있으며, 제도들 또한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로 바뀌어 있다. 이렇게 관료화된 사회의 권력은 점진적으로 그 자체가 절대적이고 신격화되는 경향이다. K처럼 개인은 원인과 동기를 어디서도 찾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저질러지지도 않은 죄로 벌 앞에 선 요제프 K처럼, 자신의 생애와 과거를 면밀히 검토해보는 것이나, 마침내 스스로 죄인으로 만드는 기계가 작동하게 하고, 죄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현대라는 역사의 시간 속 인간의 가능성으로서 양태이다. 즉 카프카의 세계는 인간과 세계가 맺는 원초적 가능성, 인간을 영원히 따라다닐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 세계의 또 다른 특징은 외로움의 저주라 지적한다. 즉 현대의 인간에게 닥친 가능성은 내면적 침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제프 K나 그레고르 잠자 모두 침대라는 내적 공간을 침해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혼자라고 느낄 수 없는, 더구나 이들은 모두 명령과 규율에 복종하여야 하는 존재의 세계 속에 있다. 즉 근원적 존재방식이 하나의 관료화된 인간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거대한 일부밖에 보지 못하고, 목적과 전망을 보지 못한다. 복종과 기계와 추상의 세계에서 사는 관료화된 현대적 인간에게 모험이란 고작 관청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이 유일한 존재이다. 이 길고 긴 소설론은 결국 인간의 실존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 소설의 본질적 소명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세계는 그 속도를 더욱 높이며 과학기술의 진보, 합리주의 이성을 부르짖는다. 그리고 모든 정보와 이야기들은 매스미디어의 수중에 장악되어 통합과 획일화로 치닫는다. 이 획일화는 인간의 시선을 극단적으로 협소하게 만들고, 급기야 단순하고 상투적인 똑 같은 내용들만이 맴돌게 된다. 설혹 정치적 상이함을 말할지라도 이러한 표면적 상이함의 이면에는 동일한 정신이 군림하고 있을 뿐이다. 즉 감추어진 이면인 시대정신이라는 것의 똑 같은 어휘와 똑 같은 예술과 취향, 똑 같은 형태, 똑같은 문체, 중요한 것과 시시한 것을 가리는 기준마저도 똑 같은 것만이 떠돈다. 복잡한 인간의 정신을 말하는 소설조차 이에 휩싸이는 양상을 보인다. 때문에 한국 소설 문학에도 성급한 대답들의 시끄러움들로 점점 진실이 들리지 않는 지경이다.

 

쿤데라의 비판처럼 소설 아닌 소설의 무늬를 뒤집어 쓴 것들이 우리들의 지평에서 과거를 몰아내고 시간을 현재의 순간만으로 축소시켜, 현재에 매몰된 동일성의 문학을 쳇바퀴 돌 듯 양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미래와 조화를 이루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미래문학, SF문학이나 전위문학이 유행처럼 쏟아지고 있다. 물론 이들은 용감하고 어렵고 고무적인 창조 작업이라 주장하겠지만, 시대정신이라는 지배적 권력에 토대를 두고 미래가 자신들을 정당화해주리라는 확신을 은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가지고 논다는 것은 강한 자에 대한 비열한 아첨임을 부정할 수 없다. 미래는 언제나 현재보다 강하다는 이들의 숨겨진 기반 논리는 수구적인 나쁜 의지가 아닐 수 없다.

 

요즈음 한국 소설문학에서는 이 엄청난 풍파를 겪는 사회로 인해 돌연히 그 실존적 의미를 달리하게 되는 인간의 가능성들을 생산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 소설에는 이러한 발견의 성찰이 없어 보인다. 이 세계와 복잡해진 인간의 정신은 풀어야 할 대상, 즉 앎의 열정을 요구하는 대상이다. 현실에서 너무 어처구니없는 별난 실존 가능성이 현재적으로 펼쳐져 소설이 말을 잊은 것인가? 엄청난 비극이 발생했는데 웃게 만드는 것, 이 재미도 위안도 없는 웃음을 만들어내는 카프카적인 한국의 소설가를 상상해 본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작품에 들어가기 전, 혹은 다시 읽어보려는 모든 이들에게 이 소설론은 어마어마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 같다. 아니 왜 소설 문학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소설은 무엇을 써야하는 것인지에 대한 거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이 적어도 삶의 낭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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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 (리커버 특별판)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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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여러 다른 시대, 다른 질서를 요구하는 현실에 때론 순응하거나 저항하며, 삶을 견뎌낸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달리 변화하는 그 질서와 무관하게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 물론 이처럼 외부에서 적응을 강요하는 사회적 힘의 존재와 무관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진장한 내적 긴장과 외적 경계를 요구할 것이다. 아무튼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역사가 기술하지 못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 한 개인의 심적 변화와 행위에 대한 고독한 투쟁을 보았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술로서의 문학이 역사를 말하는 또 하나의 방식을 보았다고 해야겠다.

 

거창하게 권력관계의 변화, 전쟁의 발발, 인종말살, 이데올로기 대립과 같은 시대 전환적 사건들이 사회, 국가, 세계에 미친 영향들과 같은 역사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이러한 질곡(桎梏)을 통과해내야 하는 한 인간의 삶의 형상, 두려움, 버려짐, 고통과 인내, 이것들이 응고되어 침전된 생()의 시선으로부터 역사를 말하는, 규명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시대를 통과해 온 에메렌츠라는 한 나이 든 여인이 바로 이러한 역사의 실존적 가능성의 발견일 것이다.

 

이야기는 전업 작가인 작중 화자의 집과 그녀의 가족을 20년 넘게 돌봐주었던 에메렌츠의 삶의 기원들과 행적들의 회고이다. 사실 소설의 줄거리는 '(door)'이라는 소설을 시작하는 장()에 이미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징적인 꿈의 이야기지만 이것이 현실의 작가를 하나의 의식으로 끊임없이 몰아대는 이유는 해소되지 못하는, 아니 해소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했다는 말도, 여기서는 그 사실 관계를 바꿀 수 없다.” 죄의식!

 

어쩌면 이 죄의식이라는 것은 화자인 작가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고 해석하고 싶어진다. 사회와 국가가 외면해온, 질서를 강요해 온 권력들의 무도함이 만들어 낸 희생물에 대한 애도(哀悼), 참회(懺悔), 환기(喚起)일 것이다. 전업작가로 전환하면서 작가는 집안일을 돌보아 줄 사람으로 에메렌츠를 맞는다. 아니다. 에메렌츠가 그들을 돌보아 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올바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에메렌츠는 지독할 정도로 엄격한 사람으로 다가오고, 작가가 에메렌츠의 관계망 속에 자리잡기까지 그녀에겐 여성 작가도 부인도 아니었으며, 필수불가결한 접근만 허용된다. 에메렌츠는 작가부부의 집안 일 외에 그녀가 사는 공동주택의 관리인이며, 건물 11곳의 제설작업까지 맡고 있다.

 

그녀의 삶은 가히 초인적이고 경악할 정도로 자신에게조차 자비없이, 노동으로 꽉 채워진 24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20년 넘는 두 사람의 동행에서 작가와 에메렌츠의 심적 대치 국면들이 소설의 전반부를 장악하고 있는데, 이 대치는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상대에 대한 평가로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만큼 이 둘의 감정적 교류에는 위선이 없다. 에메렌츠는 작가부부의 삶에 관심이 없는 듯 행동하지만, 이는 그녀의 삶을 구성하는 시간으로부터 불가피한 것일 수밖에 없다. 화자는 에메렌츠에 대한 의혹과 불신, 몰이해를 한 동안 유지하지만, 남편의 폐종양 수술로 감정적 고통을 겪는 작가에게 베풀어지는 에메렌츠의 투박하고 거친 보살핌은 조각으로 이루어진 에메렌츠에 대한 세간의 소문들과 억측들을 점진적으로 무력화시키며, 진실에 다가가게 한다.

 

정치인들의 허언, 정치적 처형과 전쟁이 앗아간 남자들의 목숨, 남아있는 여인들의 처절한 고통들, 그리고 겹친 불행의 순간들은 어린 소녀 에메렌츠의 삶마저도 어둡게 내리누른다. 불행과 고통의 존재로 내던져진 여자아이는 유대인 부부의 하녀로 팔려가게 되고, 그녀는 세상의 곡해된 증오의 제물이 된 유대인 가족의 죽음을 목도한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이념의 헤게모니싸움으로 갈라져 참혹하게 서로 죽고 죽이는 세상에서 그들이 규정한 질서와 무관하게 도피처를 찾는 상처난 이들 모두를 숨겨주고, 사랑을 베풀지만 그녀에겐 배신과 갈취의 흔적만이 남는다. 한 여인에 대한 압축된 나의 묘사는 조각조각 작가에게 에메렌츠가 들려준 자신의 이야기와 작가가 이웃들, 에메렌츠의 유일한 조카, 그녀의 고향 마을 사람들로부터 모아들은 자취들의 짜맞춤이다. 이 이야기들, 특히 에메렌츠가 작가에게 직접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는 작가의 타인에 대한 몰이해를 보일 때 혹은 선한 의지에 대한 교감이 있을 때만 가르침처럼 흘러나오는 것들이다.

 


이들 이야기의 편린으로부터 한 여인, 한 인간의 현재적 삶이 왜 그러해야 했는가를 우리는 어설프게 구성할 수 있다. 에메렌츠의 집 문은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열린 적이 없으며, 그 누구도 집안에 들이지 않는다. 그 문은 항상 굳게 걸어 잠겨있으며, 그 폐쇄적 공간에는 침대도 없으며, 오직 아홉 마리의 고향이가 있을 뿐이다. 그녀는 누워서 자지 않는다. 그녀는 끊임없는 도움과 노동으로 삶을 채우고 있다. 철저한 냉담함으로 감싸인 천상의 성녀, 그녀라는 존재의 모든 중요한 부분들을 덮고 있는 에메렌츠의 하얀 머릿수건처럼 걸어 잠겨진 문은 그렇게 한 인간의 내적 세계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숨긴 인간과 만물에 대한 연민이자 사랑이고, 보이고 싶지 않은 흉터이며, 고귀한 영혼이며 남루한 현실이다. 그녀는 이것들, 세상의 비뚤어진 시선, 몰이해에 드러내 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눈이 내리면 새벽처럼 동네의 길에서 빗질하는 에메렌츠가 보이는 듯하다. 작가는 20년 넘게 그런 에메렌츠의 돌봄으로 영예로운 국가 최고의 문화훈장을 수상하게 된다. 그때 에메렌츠는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자신의 집으로 숨어든다. 그녀는 사람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도 열지 않는 문, 그 집안으로 단 한번 들인 사람은 오직 작가 한 사람 뿐 이었다. 에메렌츠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그녀의 실천적 삶이 보여주는 생의 교훈으로부터 작가는 자신의 바보같은 오만함을 조금씩 벗어나고, 두 사람은 소름끼칠 정도의 냉소적 교류 속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확신했다. 작가는 에메렌츠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누군가 조건 없이, 아낌없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녀 말고는 다른 누군가를 생각할 수 없었다.”.

 

작가는 에메렌츠의 닫힌 문을 열어 그녀가 방치된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에메렌츠는 마비된 몸으로 찾아 온 작가에게 문틈으로 고양이의 사체를 담을 작은 나무상자를 가져다 줄 것을 요청한다. 에메렌츠는 그 누구도 그녀의 집안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내적 세계로 아무도 들어 갈 수 없다. 들어가게 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작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에메렌츠의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악취는 임박한 죽음처럼 그녀를 살려내야 한다는 딜레마가 된다. 상자를 가져다주는 기회에 그녀를 구해내 병원으로 호송해야 한다고 에메렌츠의 염원에 반하는 결정을 내린다. 의사와 이웃들에 에메렌츠를 넘겨주고는 임박한 자신의 강연을 위해 그녀와 그녀의 집안을 사람들로부터 지켜주지 못하고 떠나버린다.

 

에메렌츠는 이미 뇌졸중으로 온 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으며, 악취가 진동하는 집 안에는 이웃들이 문틈으로 전해준 음식들에 구더기가 들끓고, 몇 안 되는 세간들은 안간힘을 글어 모으던 그녀의 흔적들로 흐트러진,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져 있다. 에메렌츠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숨기고 싶었던, 자신이 그토록 타인들부터 지켜내고 싶었던 완벽성, 철저한 완전성이 파괴되도록, 그 은닉된 것들이 드러나도록 작가는 방치한 것이다.

 

이 소설에는 삶의 이해방식에 대한 지극한 엄밀성과 섬세함이 이룩한 위대한 성취’, 또는 응축된 감정의 치열함을 통한 사랑의 예찬’, ‘창조적 성취의 이면에 있는 열정적 헌신으로 이루어진 돌봄 노동에 대한 존경의 고백이라는 찬사어린 감상들이 있다. 이들 진심어린 감상처럼 작품의 수면아래 낮게 그러나 도도하게 분명 흐르고 있어, 격렬한 감동에 휩싸이게 하는 것은 독자에겐 커다란 기쁨이다. 그러나 나는 이 감상의 글 모두에서 말한바와 같이 이 작품을 소설만이 말 할 수 있는 역사를 쓴 것이라고 읽었다.

 

그것은 인간 실존의 본질적 문제를 실존의 역사적 차원을 검토하는 언어로서, 소위 세계--존재로서의 인간 개인의 변화를 목격하게하고 있다고. 역사학자들이나 사회, 정치학자들이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는 사람들의 잊혀진 삶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고 읽는다. 역사로서의 실제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만이 말 할 수 있는 역사적 실존을 탐색하는 이야기라고.

 

즉 작가는 실존의 가능성을 포착하여 독자로 하여금 누군가를 보게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려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소설의 축을 이루는 두 인물, 작가와 작가의 가족 살림을 돕는 에메렌츠라는 여성의 20년 넘는 삶의 동행에서 겪는 치열한 심적(心的)대치와 가치의 충돌이라는 격전의 시간에 펼쳐진 마음과 육신의 교감, 그 속에 진술되는 기억과 현재적 일상이라는 증거를 통한 확증에 의해 또 따른 역사의 진술을 하고 있다고.

 

이 엄청난 작가를 어쨌든 지금이라도 읽게 됨으로써 나는 역사를 말하는 하나의 새로운 시선을 얻게 되었다고 해야겠다. 사실 시대의 시간 속에 살아내야 하는 한 인간의 삶이라는 실존적 가능성의 면모로부터 역사를 말하는 것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작가는 인간 시선의 협소화를 강요하는 20세기 문명 속에서 그 축소된 개인주의의 편협성을 돌파하며, 인간의 심적 지평을 확장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역할은 작중 화자인 작가가 맡고 있으며, 세계대전을 전후한 그 전환적 사건들을 살아낸 독특한 한 여인(에메렌츠)의 삶의 모습에서 그 실존적 가능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말을 하는 것. 그것은 돌봄 노동에 대한 겸허한 존경으로, 좀처럼 존재하기 어려운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고 처절한 죄의식의 인지로서 말하는 것일 게다. 그 어떤 역사기록보다,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내게 끼친 영향이 큰 책으로 남아있을 것 같다. 나만의 소설이다. 들여다보지 말아야 했을 문을 열어젖힘으로써 이 세계의 그 악취, 치욕스러움이 죄의식과 함께 이 세계의 인간들에게 스며들게 한 작가에게 존경의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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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 토끼전 / 심청전 북현무 1
구윤숙.손영달 옮김, 고미숙 기획 / 북드라망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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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질서가 요구한대로 읽어왔던 옛 이야기를 이젠 이러한 틀을 벗어나 주체적인 읽기를 해보아야겠다는 내심을 실행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밥벌이의 근간이 있고, 게다가 읽을 책이 산더미인데,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옛날이야기를 굳이 다시 읽어 무엇을 입증하겠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은 그럴듯한 핑계가 되어왔다. 그렇다고 몇몇 우리 고전 작품을 읽었다고 내 성장과정에 주입되었던 개념들이 단 번에 해소되어 마음이 정갈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일단은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하나의 작품씩이라도 읽어나가며 바로 잡아 내 마음을 조금은 후련하게 하고 싶어 한 걸음을 내디뎌 본다.

 

이 책 낭송, 토끼전/심청전 낭송이라는 말처럼, 소리 내어 고전을 읽음으로서 몸과 우주의 감응을 만드는 일종의 양생(養生)법의 실천으로서 기획되었던 듯싶다. 때문에 이 책의 저본(底本)도 수많은 판본과 이본(異本) 중에서 신재효 판소리(신씨 가장본)를 저본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창본(昌本)을 두루 섞어 낭송대본으로 엮어 만들어진 것이다. 하여 심청전>의 경우 주로 사용되는 완판본이나, 완판본 또는 경판본을 주요 저본으로 삼는 <토끼전>과 부분의 장면들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함에도 모든 텍스트에서 변화하지 않는 공통된 부분이 있으며, 그것은 당해 작품들이 전달하려는 중요한 메시지일 것이다.

 

이 책은 왜 <토끼전><심청전>을 한 권의 책에 같이 수록하였는지에 대해, 두 작품 공히 주인공이 물에 빠졌다는 것용궁에 다녀왔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면서 물()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맞춰간다는 액체(液體), 즉 유동성(流動性)의 지혜를 말한다. 그리고는 용궁에 대해서는 별다른 규명이 눈에 띄지 않는다. 심청이나 토끼의 지혜를 보라는 얘기인 것 같은데, 너무 두루뭉술하고 포괄적 언어여서 뜬 구름처럼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 말이다. 심청의 지혜가 대체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지, 토끼의 지혜는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보다 구체성을 가지고 작품의 이야기 속에서 그것을 집어 말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심청전>()’를 말하는 대표적 작품으로 꾸준히 호명되는 것이고, <토끼전>은 충()과 지배계급의 부패와 탐욕을 풍자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니, 이를 토대로 전복하거나 공감하거나 다른 의견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 그 흔한 표면을 읽거나, 남의 다리 긁는 듯한 동떨어진 주장을 하는 것이 다른 읽기는 아닐 것이다.

 


심청전 - 정말 효()에 대한 얘기인가?

 

우선 조선이라는 나라의 윤리적 배경을 알아야 할 것 같다. 철저한 유교의 나라, 삼강오륜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윤리의 지표로 삼았던 사회이다. 세종은 백성을 장악 통제하기위해 그림까지 덧붙여 충성,효행, 열행의 삼강을 가르치는 삼강행실도를 만들어, 지배질서의 윤리를 강력하게 주입한다. 그 내용은 허벅지 살을 잘라 부모에게 먹이거나, 제 손가락을 잘라 뼈를 고아 드리고, 목숨까지 바치라는, 백여 가지에 이르는 극단의 이야기들을 열거한 윤리 모범집이다. 이러한 당대 백성들에게 폭넓고 뿌리 깊게 알려지고 체화된 도덕의 엽기적 훈계를 전제로 하여야만 심청전의 이해의 문을 열 수 있다.

 

눈먼 아비가 터무니없는 자존심으로 몽은사 화주승에 약속한 공양미 삼백석이 화근이다. 어린 딸의 동냥과 남의 집 살림을 거들어주고 연명하는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이의 생각없는 약속은 분명 눈을 뜨고자 하는 욕망과 빈곤의 모욕에 대한 반발심리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약조된 공양미는 효성 지극한 심청에게는 삼강행실도에서 말하는 지켜야 할 자식의 도리다. 문제는 이 공양미를 살림이 뻔한 마을에서 삼백석이라는 엄청난 백미를 구할 도리는 없다는 것이고, 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외부세계로부터 들여와야 한다는 것이다. 마침 남경상인의 바닷길 제례를 위한 제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고 공양미 삼백 석을 몽은사에 바치기로 한다.

 

, 여기서부터가 문제적이다. 심청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아비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이 진짜 효인가하는 물음이다. 자식의 죽음은 부모에게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슬픔이다. 이러한 통한을 주는 것이 과연 효행인가 하는 것이 하나이고, 공양미 삼백 석을 자신이 살고 구할  방법이 이야기 내에서 불가능했던 것인가가 또 하나이다. 심청이 살아서 공양미를 바치면 눈 먼 아비의 공양을 계속할 수 있으며(효행이 중단되지 않는다), 3년 후면 아비의 눈까지 뜨니 이것이야말로 진짜배기 효행이 될 것이다. 실제 심청을 어여삐 여기는 승상 부인은 공양미를 자신이 마련하겠다며 심청의 인당수 제물로 팔려나가는 것을 만류하는 장면이 있다. 그럼에도 심청은 자신의 죽음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엽기적 훈계로 세뇌되어 어지간한 행위에는 무감해진 당대의 백성들에게는 극단적 행위 아니고서는 동조를 이끌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정도는 돼야 환호하며 감동할 수 있다는 작자의 의도가 있었다고 추정 할 수 있다. 이는 지배계급이 강요하는 삼강오륜의 뻔한 상투성을 알고 있는 백성에게 이 정도의 자극적 수위(水位) 아니고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리라는 반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다른 측면에서 해독하는 이들도 있는데, 심청의 죽음 선택은 효라는 이상(理想)을 실천하는 비장미(悲壯美)’라고 한다. 즉 효를 과시하기 위해 선택한 일종의 거대한 이벤트라는 것인데, 그렇게되면 심청의 행위인 효라는 숭고성은 이 작품에서 사라지고 말아버린다. 이 작품은 분명 효를 말하긴 하지만 자식의 죽음과 같은 극단의 희생을 요구하는 윤리는 뭔가 잘못된 것이라며 은근히 반기를 드는 것이다. 나는 이진경 교수의 의견에 공감하는데, 명령에 절대 순응함으로써 그 명령의 부당성을 드러내는 항의라는 지적이다.

 

도덕적 규범과 통제가 지엄하게, 혹은 잔혹하게 실행되던 조선조에서 직접 반기를 들거나 저항하는 것은 곧 목숨을 내놓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 삼강실행을 극단적으로 실행함으로써 그들의 입맛도 맞추는 은닉된 반어적 전략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책 낭송~의 두 편저자 구윤숙, 손영달은 물을 지혜의 상징으로 보았는데, 심청이 몸을 던지는 바다는 오히려 깊은 바다인 심연에 빠져드는 것, 즉 모든 근거를 잃고 어둠 속으로 용해되어 새로운 가치의 재탄생을 위한 근본의 장소로 보는 것이 보다 구체적 의미를 지닌 해석이 되지 않을까? 심청은 조선의 효라는 극한의 도덕을 같이 가지고 뛰어듦으로써 그것들을 용해시켜버리고, 연꽃으로 재탄생하지 않는가? 연 꽃봉오리라는 꽃의 잠재성을 지닌 모습으로 재탄생하여 바다라는 거대한 가변적 흐름위에 떠있는 것은 이러한 해석에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남경 상인에 의해 건져 올려진 연꽃, 심청은 도화동 눈먼 아비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마 당대 사대부들은 이를 해독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정말 효를 말하려는 것이었다면 심청은 아비에게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심청은 돌아가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갔다면 심청의 이야기는 도로 아미타불이 되고 말았을 것 같다. 자아를 죽이고 새로운 자아로 탄생하려던 행위가 무위가 되어버리는 것이고, 또한 옛 미명의 원작자의 비판의도가 소멸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도덕적 명령에 대한 지나친 복종의 이야기를 통해 그 명령 자체를 황당하게 만드는 역설적 비판으로 읽어야 한다. 부모를 위해 자식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인륜(人倫)인가?,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따라 죽어야 하는 것이 인륜인가? 만일 이런 것이 인륜이라면 오히려 반()인륜을 택하는 것이 진정 좋은 삶을 만드는 진짜배기 인륜이란 말이 옳을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오늘날 더 이상 회자되어야 할 작품으로서 그 의미를 소진한 작품이 아닐까?

 

토끼전 - 속임수가 은폐한 것

 

책의 편저자들은 <토끼전> 힘 있는 자가 주린 자를 등쳐먹는 약육강식의 세상, 강자가 누리는 풍요는 무지와 부패와 병고(病苦)가 되어 스스로 옭아매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물론 이 해석은 이야기의 표면적 내용에서 도출되는 것이어서 하나의 해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공평할 것도 정의로울 것도 이 풍진(風塵) 세상!”의 푸념이라고만 읽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히려 편저자들이 지나치듯 언급하는 말빨의 향연이라는 말에 주목하는 것이 이야기 속에 은폐된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 말빨은 언제 느껴지는 것일까? 화려한 언변, 듣는 자의 귀를 솔깃하게 할 설득의 수사는 언제 구사할까? 이야기는 수중의 자라가 뭍에 사는 토끼를 잡아오는 이야기다, ()의 약()이 무용한 병을 앓는 용왕을 위해 토끼의 간을 구하기 위한 여정이고, 현혹당하여 수중에 끌려온 토끼가 다시 뭍으로 살아 돌아오는 일련의 술책 이야기다. 처음부터 끝까지 속임수가 무한히 교환되는 이야기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토끼의 간이라는 것은 애초에 정당한 대가를 무용하게 만들어버리는 대상이다. 다시말해서 어떠한 증여도 교환도 불가능한 것이 문제가 지닌 근본적 난점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때 사용 가능한 방법은 오직 속이는 것 이외에는 없다. 토끼전 혹은 수궁가, 별주부전은 속임수 교환의 이야기이다. 속여야 한다는 것의 이면에 놓인 본질을 살펴야 하는 것인데, 토끼를 속여야 그의 간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생명, 재산의 강탈이 있는 것이다. 속임수는 이러한 강탈을 은폐하는 고도의 전략이다.

 

자라는 토끼를 토()선생(先生)이라 높여 부르며, 수궁에서의 고위관직이라는 속임수를 쓰고 토끼를 데려온다. 또한 용왕은 토끼에게 간을 아주 직설적으로 요구하는데, 이때 하는 말이 우리네 들이 즐겨 사용하는 기만적 언어, 속임수인 위선의 말이다.

 

네 간을 내어 먹고 짐()의 병이 낫는다면 기특한 너의 공을 내가 어찌 잊을쏘냐. [...] 네 형용을 만들어서 사당 안에 앉힐 테고, 기린각 능운대에 네 이름을 새길 테니 살신성명(殺身成名) 그 아니냐.” -73쪽에서

 

소위 대의를 위해, 영광스러운, 혹은 성스럽고 고귀한 희생 운운하며 고귀한 자신을 위해 미천한 자의 자발적 증여, 자발적 복종을 압박하는 채색된 윤리의 기만적 언어이다. 토끼는 간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신선한 산바람 부는 곳에 꺼내 널어놨다며 진즉 말했다면 가져올 것이었다고 용왕을 속인다. 두 이질적 세계에 대한 앎이 없는 존재들이기에 이 거짓말이 먹혀든다.

 

뭍으로 돌아 온 토끼가 자라에게 한 마디 한다. 생명의 가치에 대소, 귀천이 어디 있느냐!”. 이 속임의 언어, 대의로 치장한 무수한 말들에서 강탈의 욕심을 배제하고 듣는다면 그것은 바로 가장 어리석은 행위가 될 것이다. 생명의 가치에 위계를 설정하려는 당대 지배계급의 태도와 유교적 질서를 비판하고, 그 통념적 윤리가 은폐하는 더러운 욕망을 질타하는 것이다. 아동용으로 재구성된 이야기책들을 보면 지혜()의 얘기로 윤색되어 지배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을 요구하는 것 일색이다. 우리 민담이나 옛 소설, 판소리 등이 새로운 세계를 향해 달리 변신한 작품들의 출현을 기대하게 된다. 구태, 극복하여야 할 지배질서의 위선을 답습케하는 책들은 이제 그만 지양(止揚)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 차례의 다시 읽기도 역시 많은 왜곡된 해석이 만연하는 <흥부전><허생전>을 생각하고 있는데, 언제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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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픽션 : 런던 시티 픽션
버지니아 울프.캐서린 맨스필드.헨리 제임스 지음, 김영희 외 옮김 / 창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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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통한 세계문학 여행이라는 시티픽션 시리즈로 파리 편에 이은 두 번째 읽기이다. 이 런던 편은 네 편의 영국 작가의 단편으로 엮인 작은 소설선집이다. 헨리 제임스는 사망 즈음에 영국으로 귀화한 미국인이니 조금 애매한 분류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의 작품 활동기 대부분이 런던에서의 삶이었으니 그리 부적당하다고만은 할 수 도 없을 게다. 선집은 버지니아 울프의 큐 가든으로 시작된다. 런던 근교 왕립식물원인 큐가든을 지나는 군상들의 행동과 대화를 세밀한 시선에 담아내고 있는 단편이다. 이 선집의 마지막 수록작인 헨리 제임스의 진품을 읽으면서 어떤 공통된 시선을 느끼게 되는데, 아마 감정 또는 심리의 섬세한 관찰 시선의 강렬함 같은 것이었다. 물론 관찰이 소설의 한 특성이기는 하지만 그 시선 자체가 작품 표면에 보란 듯 드러나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고 할까?

 

헨리 제임스 (Henry James)

 

나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이 이렇게 기지 넘치는 재미를 품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보르헤스가 편집한 바벨의 도서관시리즈로 간행된 친구 중의 친구, 1890년대인 그의 중기(中期) 작품으로 분류되는 나사의 회전과 같은 유령소설로 제한된 내 독서가 선입견을 가지게 했던 듯하다. 수록작인 진품(The real thing)은 초상화를 지향하지만 벌이를 위해 소설 삽화 그리는 일을 병행하는 화가의 관점으로 이루어져 있는 작품이다. 어느 날 그를 찾아온 두 남녀를 맞이하면서 그들의 인물을 품평하는데, 콧수염이나 외투를 직업적 관점에서 눈여겨본 내게 그는 유명인사로 여겨졌을 법도 하다. [...] 유명인사가 그렇게 두드러지게 멋진 경우가 있다면 말이다.” 라며, 역설적 모습을 한 인물을 나름의 경험으로 축적된 실감의 구절처럼, 화가인 작중 화자는 타인의 작은 표정과 몸동작, 어조에 이르기까지 면밀한 관찰을 통해 자기감정과 마음을 교류하며 반응한다.

 

화자는 이러한 세밀한 관찰을 통해 두 사람이 초상화를 의뢰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아니라 삽화의 모델을 통해 돈벌이를 하려온 이들임을 바로 간파한다. 회화적 관점에서 나는 즉각 그들을 간파해버렸다.”는 그의 진술처럼 그들이 어떤 유형인지 파악하고, 이미 어떻게 다룰지 결정해버린다. 화가는 두 사람이 퇴역한 모나크 소령과 그의 아내임을 설명받지만, 삽화의 모델로 전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들의 겸허한 소개와, 적극적이지만 완곡하게 자신들의 장점을 말할 때, 화가는 변화하는 관찰 결과를 통해 자기 작업과의 연결성을 검토한다. 귀족적 분위기를 갖춘 맵씨있는 사람들이지만 그에게는 이미 미스 첨이라는 타고난 위트와 변덕스러운 감수성과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다채로운 인상의 모델로 변신할 줄 아는 고용인이 있다.

 

모나크 부인은 미스 첨의 낮은 신분이 귀부인역의 모델이라는 것에 당혹해하며, 자신은 귀부인에 더 적합한 모델임을 강조한다. 진품 말입니다. 진짜 숙녀나 신사 말이죠.”, 그들은 생계를 위한 벌이가 필요한 궁핍의 한계에 몰린 이들이었다. 화가는 그들의 절실함에 그 귀족적 형체의 소용을 고려하여 삽화 모델로 당분간 함께하기로 결정한다. 그럼에도 화가는 이러한 분위기가 작업의 실용적 국면과 어울리지 않는 예술적 효과가 발생할까 걱정한다.

 

모나크 부부와 화가, 그리고 조연격인 신분이 낮은 남녀 모델이 등장하면서, 모나크 부부는 삽화모델로 부적절한, 나아가 화가의 회화능력을 훼손시키는 양상으로 이어진다. 화가는 모나크 부부가 아닌 모델들에게 더욱 적합한 삽화모델로서의 능력에 매혹되고, 모나크 부부를 멀리하려 하지만 생계를 위한 직업을 찾을 수 없는 이들은 화가의 작업장을 맴돌며 떠나지 못한다. 그들, 자신들을 진품이라 생각하는 그들은 점차 가짜인 비천한 이들과 모델로서의 신분의 역전을 체감한다.

 

이 소설은 이야기의 줄거리를 이끌고 있는 주도면밀한 관찰에 따른 화가의 심리적 움직임을 따라가며 읽는 재미가 아주 그만 끝내주는 소설이다. 진짜와 가짜, 결코 절대적 가치기준이 아닌 이 개념어가 파편이 되어 흩어진다. 이 작품은 그가 사회적 소설을 쓰며 작가로서의 명성이 주춤하자 전환을 위해 희곡작품에 매진할 때에 사이사이 남긴 몇몇 소설 작품의 하나이다. 때문에 연극적 요소가 반영되어 그 실감성이 여타 작품에 비해 두드러지는 것이 특색인 듯하다. 신분의 격이 삶의 수단을 저해하는 그 모순으로 혼란의 격변을 겪는 시대의 한 초상일 것이다. 제법 기억에 남는 작품 일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 유품(The Legacy)또한 소설의 진행에 따라, 고위 정치관료인 길버트 클랜던이 차도에 내리다 사망한 아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의혹과 의심에서, 배신, 그 파국의 감정으로 치닫는 가히 통속적 재미를 성취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죽은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며 아내가 주기를 바랐던 물품들을 모두 전달하고 마지막 유품인 브로치를 아내의 비서였던 시시밀러에게 전달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길버트는 아내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가득안고 추억에 잠겨 일기를 읽는다. 남편인 자신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배려의 마음들이 가득 쓰여져 있는 일기를 읽으며,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내에 대한 그리움의 위로를 느낀다.

 

그러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이니셜로만 지칭된 인물이 등장하다 그 빈도가 급작스레 늘어난 것을 느끼며, 알지 못하는 인물에 대한 시기와 의혹이 증폭된다. 이윽고 이니셜은 사라지고 라는 호칭으로 바뀐 인물이 동일 인물임으로 굳어지고, 그와 아내의 만남과 남자의 격렬한 동행의 요구가 있었음과 마침내 이를 거절하는 아내의 분열적 마음을 읽는다. 남자가 자살했음을 발견하고, 아내의 죽음은 바로 이 죽음의 동반 행위였음을 알게 된다. 감정의 급진적 전환을 일으키는 일기의 내용과 병행하여 이야기의 진행 속도 또한 급격히 빨라지는 데, 이러한 속도에 휘말려드는 독자의 감성또한 아찔할 정도이다.

 

울프의 또 하나의 단편인 큐 가든(Kew Gardens)은 작가를 모르고 읽어도 버지니아 울프가 절로 떠오를 듯한 작품이다. 큐 가든을 스치듯 지나가는 군상들의 발걸음과 꽃나무에 기어오르는 달팽이의 이동이 대비되며, 그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전경이 우울한 인상에 젖어들어 들려온다. 허무와 부질없음이 팽배한 그 어떤 의식들만이.

 

캐서린 맨스필드 (Katherine Mansfield)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 파티(The Garden Party)는 어떤 세계문학 단편선집에든 감초처럼 수록되어있는 작품이다. 부유한 중산층 가족의 가든파티 준비와 파티의 즐거움과 대비되어 이들의 저택과 멀지 않는 골목길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빈곤층 거주 구역에서의 한 젊은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반응들이 내용을 채우고 있다. 셰리든 집안의 딸 중 한 명인 로라는 가든파티를 위한 천막 일꾼들의 설치를 지시하기 위해 정원에 나선다. 그녀는 일꾼들은 저다지도 멋질까.”라 생각하며, 매번 춤 상대가 되는 바보 같은 남자애들이 아니라 이들 일꾼들과 친구가 되면 왜 안 되는 것인지, 말도 안 되는 계급적 구분의 터무니없음을, 자신만큼은 어떤 차이도 느낀 바 없음을 자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꼭 일꾼 처녀가 된 기분으로 우쭐한 기분으로 즐겁다.

 

그런데 그날 동네 어귀의 청년이 마차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나 집 안의 어느 누구도 그 죽음에 대해 어떤 연민도 지니지 않는 듯하다. 로라는 대문 밖에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파티를 열어요.”라며 파티가 이웃의 죽음에 대한 무례함으로 느껴져 당일의 파티 행사 취소를 요구하지만, 어머니를 비롯한 언니들은 작고 초라한 저 빈곤의 거처들이 이곳에 들어 설 권리가 없었다는 듯, 감상적으로 굴어봐야 막노동꾼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니.”라며, 파티의 취소를 용납하지 않는다. 파티는 예정대로 열리고 가족들과 초대자들은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아마 로라에게 선물된 우아한 검정색 모자는 중산층의 이러한 이기적 즐거움과 빈곤층의 불행을 대비하는 수치와 과시의 경계에 놓여, 그녀의 곤혹스러운 감정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파티에서 남은 음식을 바구니에 담아 문상아닌 문상을 가게 되었을 때, 그녀가 처한 상황을 대신 표현한다. 계급의식에 대한 비난과 인생이란 것의 그 설명할 수 없는 비애가 낮게 흐르며 작품의 커튼은 내려진다. 발랄하고 경쾌한 분위기를 시종 잃지 않으면서, 산다는 것에 대한 그 어처구니없음의 실체, 가진 자의 생각없는 무례한 동정 등이 당대 영국인들의 인식을 넌지시 고발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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