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의 문학사적 위치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헤아려야 한다.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 체사레 파베세(1908~1950)’어른이 되어서는 두 가지 경험, 즉 성공과 실패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 서글픈 말이다. 극단의 투쟁, 살기 아니면 죽어야 하는 것이 그가 숨 쉬던 파쇼 사회였기에 가능한 말이었을 것이다. 흰 고래를 죽이든지 배가 난파되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이 양단의 잔혹하고 참담한 이야기의 교훈이 무엇이겠는가?  한 메이저 온라인 책 판매 사이트에 벌어지고 있는 흉물스런 얘기다.

 

폐쇄집단의 자기이익 실현에만 능숙한 한 천박한 인간이 모비딕을 읽었다는 것을(정말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천박성을 넘어 수치도 모른 체 책 판매의 선전문구로 사용하고 있음에 아연실색했다. 해당 출판사와 인터넷 서점 두 집단의 권력을 향한 더러운 아부이자 정치적 야합(野合)일 것이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그리고는 그 실패를 덮기 위해, 다시 한 방을 돌려주기 위해 무슨 일이든 실행하는 폭력성, 무도함을 내놓고 지껄이는 이 후안무치함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겁에 질렸거나 이익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기회주의적 패거리들이 극성을 부린다.

 


에이허브는 마치 빈틈이 없으면 강제로라도 뚫어 만들어내서 그 구멍에 온갖 추잡한 것들을 들이 밀어야 한다는 강박적 악의에 경도된 인물이다. 이 인물에 매료된 인간 군상들을 상상해 보라. 왜소한 능력으로 장대한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 무엄함과 무법성을.

 

거대하고 불가해한 자연에 도전하는 인간 불굴의 의지라고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하며, 인간의 지성과 무한한 능력의 한 표본으로 제시되어 왔지만, 이것은 배에 탑승한 모든 이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가장 유해하고 극악하며 탐욕스런 욕구 이상이 아니다. 아직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위엄이 인류사회에 터 잡지 못했던 180년 전 야만의 시대(1851년 초판출간)에 출현한 옛날의 허구 이야기다. 타인의 희생을 토대로 하는 이러한 영웅주의적 기만은 오늘의 세계에서 더 이상 그 도덕적 지위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불의와 어리석음이 저지르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 그 배경의 인식 수단으로 모비딕을 이용하는 저열한 욕심만이 선명하게 드러날 뿐이다.

 

나와 다른 상대를 죽여 없애거나 거꾸러 뜨려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것,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해야 하고, 나만이 옳다고 믿는 것, 그것이 파시즘이다. 파시스트의 세계가 무엇인지 너절한 설명을 생략하겠지만. 그것은 수많은 사람의 참혹한 학살의 역사임을 알려준다. 그것의 끝은 광기와 전쟁, 공멸의 이야기로 구성된 것이다.

 

출판업자와 유통판매업자의 무지함이 빚어낸 실수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판매 전략은 의도라는 적극성의 산물이니까. 어느 누구도 시선을 피할 수 없게 배너 창까지 띄워대고, 더러운 욕망을 노골적으로 과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원시적이고 퇴행적 교활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한국 사회가 이렇게까지 부패하고 있다는 것의 한 상징적 이벤트 같다.

 

어느 누구나 모비딕을 읽을 수 있으며, 또한 읽어야 하는 고전적 지위를 확보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낱 파렴치한 인간의 정치적 선전 수단의 도구로 둔갑했다는 것, 그리고 이에 적극적으로 뇌동(雷同)하는 인간 집단이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모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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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1-09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필리아님!

필리아 2024-01-12 22:35   좋아요 1 | URL
네, 너무도 흉물스러워서요...

그레이스 2024-01-12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속이 시원하네요
 
꿰맨 눈의 마을 트리플 22
조예은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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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집은 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단편은 연작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각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연속성을 지닌 동일 캐릭터이며, 배경 또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난화로 인해 극지대의 빙하가 80퍼센트 너머 녹기 시작하면서 활성화된 신종 바이러스로 인류 신체의 변형이 발생한 근미래(近未來)이다. 이러한 감염자(변형 신체자)들이 증폭되자 변이를 겪지 않은 일군의 사람들은 인간이 찾지 않은 황야에 마을을 건설하여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다. 이렇게 건설된 곳이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가는 타운이라 불리는 곳이다.

 

표제작 꿰맨 눈의 마을을 시작으로 히노의 파이그리고 의 순서로 수록되어 있는데, 하나의 원처럼 첫 단편과 마지막 단편이 시간상 맞닿아 있으며, 그 사이에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회상의 시간이 놓여 소설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듯하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미안합니다

교장 나침이 조례 때마다 하는 말이었다.”

 

타운을 변이를 겪지 않은 사람들로만 유지하기 위해 감염자, 즉 신체에 변형이 발견된 사람들은 타운 밖으로 버리듯 내쳐진다. 그래서 타운을 지키는 제 1규칙은 얼굴이 아닌 곳에 난 이목구비를 보면 신고하라!”. 교장의 말은 한 아이가 버려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꿰맨 눈의 마을은 이렇게 한 아이를 타운으로부터 퇴출시키는 사건을 중심으로 고립된 공간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관찰토록 한다.

 

자신의 등에 또 하나의 눈을 옷 속에 감추고 살아 온 소년 이교는 타운 밖 황야로 내쳐진 절친 에 대한 그리움과 그와 나누었던 타운 밖의 세계에 대한 상상의 이야기들, 그곳에 관한 소문들을 통해 타운의 규칙들이 공포라는 하나의 장치에 의존한 공간이라는 의심을 키운다. 폐쇄적 공간의 존립은 외부 정보의 유입 차단과 단일 정체성을 위한 수많은 장치들로 구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의 발생은 불가피하며 장치들은 거짓으로 축조된 것임을 드러낸다. ‘이교는 자가용 비행기의 추락으로 타운에 떨어져 만나게 된 타운 밖의 변형된 존재인 으로부터 타운내 사람들이 구인류, ‘도망친 포비아들로 불린다는 것을, 최선이자 배려라 믿었던 타운의 규칙이 야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단일성, 순수성이라는 역겨운 폭력성의 잠재태임을...

 

히노의 파이는 조카인 이교를 황야에 버리고 돌아온 문지기인 백우의 자기 행위에 대한 윤리적 성찰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감염자로부터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타운 밖 황야에 감염자를 유기하는 일, 그들에게 치사량의 독극물을 버무려 구워낸 미트파이와 콜라 한 병을 들린 채 버리고 돌아오는 일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동정심이나 죄책감으로 감정을 소모하는 것은 멍청한 문지기라는 신념으로 할아버지까지 버린 문지기인 아버지의 대를 이은 문지기 백우는 외부자로서 독극물 파이를 구워내야만 했던 히노와의 사랑의 추억, 히노가 그에게 던졌던 황야에 남겨진 이들의 최후에 대한 상념으로 이어지며, 타운의 규칙들에 의혹을 품지 않았던 자신을 발견한다.

 


권력의 명령, 체제의 수호를 책임진다는 미명 하에 젊은이들을 고문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며 자신의 도덕성을 돌아보지 못했던 민주화투쟁 시절의 고문기술자를 떠 올리게 한다. 백우는 최선을 다하는 게 어떤 최악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사유할 줄 모르는 이 땅의 공권력 수행자들과 다르다. 타운의 장노들, 권력이 요구하는 짐짓 배려인 채 행하는 유기가 과연 추방되는 이들의 선택, 문지기인 자신의 선택이라 할 수 있는지 자신이 외면했던 질문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다. 황야로 자발적으로 사라진 히노에 대한 그리움, 그녀가 미트파이 레시피와 함께 남겨놓은 우리는 언젠가 황야 너머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널 위한 쿠키를 구워둘게. 사랑해, 백우.”, 라는 메모는 그가 행한 일에 대한 정당화란 비루하기만 한 한낱 위로와 합리화에 불과했다는 각성에 이르게 한다.

 

단편 은 추방된 이교의 친구 램의 버려진 황야에서의 삶을 향한 도전의 걸음이다. 램은 굶주림에 독이 있다는 미트파이를 꼭꼭 씹어 삼킨다. 스스로 조용한 죽음에 이르기 위한 행위지만 그는 깨어난다. 미트파이에 독극물이 주입되지 않고 만들어진 것은 아마 히노의 은밀한 전환, 타운의 체제에 대한 저항, 동료 주민에 대한 연민의 행위였을 것이다. 램은 이교와 나누었던 황야에 대한 상상, 괴물이 득실거린다는 황야란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한낱 거짓이었음을 상기한다. 램은 추락하는 비행기를 환영처럼 발견하지만 그 실체의 확인을 위해 추락지점으로 반죽음의 육신을 옮긴다. 그리곤 추락한 비행기 무전기에서 울리는 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타운은 소거법으로 유지되는 땅.  그렇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 곳에는 몇이나 남게 될까?”   -155쪽에서

 

이렇게 꿰맨 눈의 마을에서 추락했던 비행기와, 추락한 비행기의 소년 람과 이교의 발걸음 은, 시체가 파이와 나뒹구는 황야를 조카 이교가 벗어나길, 그리고 그리운 이 히노를 향해 황야를 걷는 백우의 히노의 파이를 경과하여, 다시 무전기를 향해 살려주세요를 부르짖는으로, 회귀한다. 세 편의 소설은 굵직한 하나의 주제들을 품고 우리들에게 윤리적 질문을, 그리곤 자성(自省)을 촉구하는 듯하다. 세계 밖을 상상해 보세요, 그 상상의 지대에 진실이 숨 쉬고 있어요. 라고.

 

이 가상의 이야기들은 작가의 에세이 빛나는 모형들에서 들려주는 진실보다 더 진실로 여겨지는 삿포로 시장의 어느 음식점의 진열대 너머 모형이 일으키는 진짜에 대한 맛의 상상처럼, 더욱 풍성한 맛을 느끼게 해준다. 닫힌 세계, 고립을 요구하는 폐쇄된 세계를 벗어나 열린 외부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수한 다양성, 그 다름의 세계와 인간을 사랑할 수 있게 될 터이다. 타자를 향한 너그럽고 부드러운 시선, 조금은 더 진실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 때론 가짜가 거짓을 말하는 진짜의 위선보다 더 진실하다는 것을. 나른한 평온함과 밝은 생명력이 절로 발산되는 조예은 작가의 이 소설을 읽으며 왠지 세상이 살만한 이유가 있다고 느꼈다면 과장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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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사악함을 못 본 체함으로써 혹은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허무주의를 극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유일한 희망은 허무주의를 명명하고, 질병의 치료약을 찾기 위해 그것을 목록화하는 데 있다. 요컨대 지금이 희망의 시간임을 인식하자. 비록 실현되기 어려운 희망일지라도."

Nous sommes dans le nihilisme. Peut-on sortir du nihilisme? C’est la question qu’on nous inflige. Mais nous n’en sortirons pas en faisant mine d’ignorer le mal de l’epoque ou en decidant de le nier. Le seul espoir est de le nommer au contraire et d’en faire l’inventaire pour trouver la guerison au bout de la maladie. Cette collection est justement un inventaire.

 -갈리마르에스푸아르 총서, 책임편집자 알베르 카뮈,

출처: <카뮈, 지상의 인간2> 47, 한길사

 

 

인용한 위 문장은 에스푸아르(Espoir) 총서 모든 책의 뒤 표지에 표기되었던 알베르 카뮈의 글이다. 프랑스 최고의 출판사인 갈리마르의 책임편집자였던 알베르 카뮈는 에스푸아르(희망)라는 소설과 비소설을 망라한 총서 발간의 책임자로서, 전후(戰後) 프랑스인들의 앞에 놓여있는 납득할 수 없는 불의한 세계의 성분을 직시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때문에 이 총서의 초기 목록들은 어둠이 지배하는 저작들이었으며, 표지조차 회색빛을 띤 소프트 커버였다고 한다.

 


설혹 달성이 미완에 그칠지라도 무엇인가를 희망하기 위해서는 직면한 문제들을 회피하거나 부정하지말고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함을, 그 문제가 품고 있는 혐오스러움, 더구나 그것이 마주 선 자신의 것일지라도 전부 열거해서 제대로 성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믿음의 천명이다. 전후 독일 부역자들의 처리문제로 프랑스 사회는 용서와 처벌로 양분되어 곤혹을 치렀다. 그럼에도 드골 임시정부는 엄중하고 주저 없이 민족 반역자들을 극형으로 단죄했다. 프랑스 문단에는 친독은 아닐지라도 기회주의적 방관자들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인 양 슬그머니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어 놓고 있었다. 카뮈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카뮈는 시몬 베이유의 유작 <뿌리 내리기>의 한 문장을 인용한다. "공식적인 역사는 살인자들의 말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 천박한 영혼이 아니고서 어느 누가 알렉산더를 성심껏 찬미할 수 있겠는가?" , 알렉산더의 동방침략 전쟁과 2차 세계대전은 물론 인간의 역사는 이렇듯 무법자들의 언어로 써진 기록이다. 카뮈에게 인간은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여겼던 듯하다. 인간들 자신의 어둠의 지대를 죽 나열해서 그것들에 웅크리고 있는 어둠의 욕망들을 들춰내는 것이 당대 문학예술의 의무라 생각했다고 이해된다.


한국 사회는 이러한 지성의 노력을 갖지 못했을 뿐아니라, 민족을 배신한 파렴치한들을 단죄하지 못한 역사를 가지고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 우리에겐 이같은 목록화된 문제들의 기록이 없다. 때문에 치료약도 없으며, 희망의 목록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70여 년 전의 과거에 발목이 잡혀있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노력을 하여야만 할 것이다. 역사에 늦은 것이란 없다. 이 목록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부질없는 모래성 쌓기가 될 것이다. 현실이 그러함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오늘 한국의 시인들, 문인들은 희망이란 단어를 삭제하고 이 단어에 혐오와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것이 모두가 될 수는 없다. 목록을 만들어라! 사악하고 부정했던 것들의 목록을. 이 노력을 회피하면서 희망은 무지하고 분별없는 인간들이나 하는 망상이라 말하는 것은 무책임과 의무의 방기일 뿐이다. 상처를 보려 하지 않는다고 그 상처가 없었던 것이 되지 않는다. 카뮈의 희곡 작품인 <오해>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실존 전체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 기반 자체를 갱신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미래에 대해 희망을 걸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전시(戰時)에 의지와 관계없이 고향 알제로 돌아갈 길이 차단된 채 이방인으로 프랑스 본토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한 인간의 고뇌어린 성찰이다.

 

"정신이 마침내 칼은 칼로써 정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무기를 들고 승리를 쟁취했을진대, 어느 누가 정신으로 하여금 잊을 것을 요구하겠는가? " 이 발언의 의미는 증오가 아니라 기억에 기초한 정의 그 자체의 실현이다. 정의를 잃어버린 민족에겐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책을 읽다 하나의 단상을 더해 놓는다.

 


"이상도 고결함도 갖추지 못한 자들이 정치와 인간의 운명을 빚고 있다.

정치판에서 고결함을 갖춘 이들은 찾아볼 수 없다."

-출처: 알베르 카뮈, 작가 수첩 1,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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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독서를 정리하지 못했다. 이제 마음에 어떤 작은 흔들림을 주었던 책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본다. 국내 문학(소설과 시, 에세이)은 여러 이유에서 소홀히 했다. 부분적으로 새로운 작가들의 몇몇 작품을 읽긴 했으나, 어떤 의무감에 가까운, 작은 기여의 차원이라는 소박한 심정의 독서였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무수히 발간되는 모든 책을 망라할 사진 기억술을 지닌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취향 또한 편협해서 비평과 철학을 비롯한 역사분야와 해외 문학의 범주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특히 올 한해는 알베르 카뮈의 글 읽기에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내게 새로운 이해를 안긴 역사 및 문화 비평과 세계를 진술하는 방식의 다양성에 관한 저작들이 비교적 인상 깊게 남아있는 정도이다.

 

문학 분야부터 정리한다면, 단 하나의 작품만이 마음에 남아있다. 인간 실존의 본질적 문제를 들여다보게 해준 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도어이다. 역사를 말하지 않으면서 역사적 실존을 탐색하게 하고, 그 가운데 인간 존재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게 한 작가의 발견이었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국내 문학분야는 이미 등단시점부터 읽어 온 김사과 작가에 대한 짝사랑이 지속될 뿐이다. 그리고 안윤 작가와 올 한해 새롭게 알게 된 한정현 작가와 성해나 작가의 작품 정도가 여전히 기억에 살아있다. 두 날카로운 시선의 작가와 유머 넘치는 즐거움 속에서 진지한 사유가 피어오르도록 쓰는 두 작가는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취향인 까닭일 것이다.

 

그리고 분야의 분류가 까다롭기는 하지만 문예비평에 가까운, 그럼에도 문화사에 가까운 한스 블루멘베르크난파선과 구경꾼은 인류가 지혜를 전달해 온 오래된 방법으로서 은유를 재발견을 하도록 해주었다. 진열된 앎이 아니라 표면과 달리 짐짓 진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비-개념의 이 특별한 언어 도구와 이를 수단으로 한 인간 역사의 통찰은 세계를 인식하는 시선을 확장해주었다고 하겠다.

 

이와 아울러 로버트 단턴의 사회문화 현상의 저변에 자리잡은 개인들에 잠재하고 있는 집단적 의식과 무의식, 즉 광범위하게 시대의 삶을 지배하는 정신을 탐색하는 망탈리테의 역사인 미시사를 알게 해준 고양이 대학살은 정말 아름답기까지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과학분야라면 단연 움베르또 마뚜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로 대표되는 인간 유기체의 의식과 정신 작용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을 통한 자기 고유의 구조적 역동성과 자기생성과 적응에 대한 것이다. 이젠 고전적 과학 저술이 된 앎의 의지자기 생성과 인지두 저술은 아마도 다윈의 책보다 내게 더 많은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칠 것 같다. 이렇게 정리해보면 이렇다 할 독서라고 내세울 것도 없어 보인다.

 

아마 2024년의 독서도 이 범주를 벗어나는 일은 내겐 극히 예외적 사태일 것만 같다. 카뮈와 카프카를 비롯한 고전이 된 작품들의 몇몇 작가는 여전히 내 머리 속을 맴돌고 있으며, 마뚜라나와 바렐라, 그리고 블루멘베르크도 거듭 읽는 저술이 될 것 같다. 보르헤스가 이미 말했듯 이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는 더 이상은 없을 것이다. 다만 내 앎이 부족 할 뿐이지 그 무엇이 새로울까? 2024년은 읽었던 책들의 내용이 보다 깊숙이 내게 체화되는 독서를 이어갈 계획이다. 아마 거듭 읽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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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파상의 시칠리아 작가가 사랑한 도시 5
기 드 모파상 지음, 어순아 옮김 / 그린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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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문을 읽게 된 사연은 모순을 지닌, 조금은 괴팍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우선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읽으며 편치 않은 인간적 혐오스러움과 자기중심적이고, 편익을 위해서는 거짓말과 기만적 행동을 서슴지 않고 행하는 이에 대한 반감의 촉발이 하나였으며, 50년이 되지 않아 반복되는 지중해 연안의 작열하는 태양 빛을 사랑했던 카뮈의 영혼이 이미 모파상에 의해 선취되고 있었다는 발견이었다. 이 두 관련 없는 동기는 모파상의 글을 읽으며, 한편으론 괴테의 오직 앎의 축적 시선이 아닌 감각과 영혼의 순수한 체험을 통해 불쾌함을 희석시키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또 한편으론 지중해 쪽빛 바다와 빛의 찬란함에 전율하는 두 유사한 정신에 감응하고자 하는 욕심이었다.

 

이제 괴테의 글을 내 마음에서 지워버린다. 이 자연그대로의 글에 대한 감응을 방해하는 기분, 그래서 분석적이 되려는, 괴테를 비난하고 싶은 읽기를 그만두었다. 178745일 시칠리아의 주도인 팔레르모에서의 일기에 괴테는 여기는 로마와 달라서 제작을 지배하는 예술 정신 같은 것이 없다.”, 이에 더해 아무런 취향이나 지도도 없이 한 장소에 가져다가 붙여놓아서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시칠리아에 대한 자신의 예술적 인상을 적고 있다. 자기가 알고 있으며 익숙한 것, 자신이 예술이라고 세운 기준에 벗어나는 것들은 여지없이 폄훼한다.

 

괴테의 여행으로부터 102년 뒤인 1889년 모파상의 팔레르모 첫 인상은 관대하게 열린 시선, 다름에 대한 수용의 정신으로 가득하다. 마차를 끌고 가는 짐승의 머리에 달린 방울 술과 요염한 마구, 알록달록 칠해진 마차들에 시선을 보내며, 흥미를 유발시키면서 우리가 어떻게든 풀어봐야 하는 수수께끼 놀이를 하듯 움직인다.”고 쓰고 있다. 이 젊은 예술가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을 자기 알량한 지식의 기준으로 재단하려하지 않는다. 물론 1세기라는 결코 짧지만은 않은 세월의 간극이 있긴 하지만 동일한 공간에 대한 감상은 무척이나 대조적이다. 때문에 정말 편안한, 자연같은 마음으로 이 산문을 읽었다.

 

모파상의 시칠리아란 표제를 한 이 산문은 1889년 우울증에 시달리던 모파상이 치료의 방편으로 떠난 여행 에세이로 1890년에 출간된 La Vie errante (人生流浪)에서 시칠리아 방문 부분을 발췌한 글이다. 그의 여정에 지중해의 가장 큰 섬 시칠리아 일주가 포함된 것은 파리 어느 곳에서도 보이는 검은 철로 세워진 에펠탑, 문명의 오만과 속물성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계적이고 냉혹한 이성주의가 인간 영혼이 지닌 아름다움이나 심미안까지 훼손시키고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어쨌거나 이 부유한 젊은 예술가는 지적 미인인 어머니의 어릴적 친구인 정치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을 지닌 플로베르의 보호 하에 문학계의 사다리를 수월하게 오르며, 인기 작가이자 거장의 반열에 우뚝 선다.

 


모파상과 괴테는 팔레르모에 있는 노르만 궁전을 두 사람 모두 방문하게 되는데, 모파상은12세기에 건축된 이 궁전이 동서(그리스,비잔틴,아랍문명 등)의 여러 양식이 혼합된 시칠리아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절대적 걸작이라 감탄하지만, 꽤나 수다스럽게 작은 장소조차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는 괴테는 당시 총독관저로 사용되던 곳에 초대되어 방문한 장소였기 때문인지 이렇다 할 의견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는 총독 옆에 앉아 식사했다는 언급과 자기 여행에 편의를 제공해주겠다는 총독의 친절만을 쓰고 있다. 즉 자기 명성의 과시에 열중하고 있었기에 정작 궁전의 매력적인 아름다움은 인식조차 못한다. 모파상은 12세기의 노르만인들이 세운 거대한 요새에 장식된 치장 벽들과 숨겨진 듯 자리잡고 있는 그 안의 붉은 빛이 은은하게 발산하는 작은 팔라티나 성당의 장식예술과 색채가 형태에 미치는 거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에 감동받고 사로잡히기까지 한다.

 

인간의 마음이란 이처럼 다른 것이리라. 자신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찾은 자와 목적 성취의 수단을 위해 찾은 자의 감상은 이처럼 천양지차이다. 시칠리아 유적들로부터 창조성의 재인식과 심미안을 개발시켜 주리라는 참모습을 발견할 준비가 된 인간에게는 숨겨진 의미들이 찬란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 영감의 빛을 무한히 발산한다. 모파상은 소설가로서의 목표를 이야기 사건 내부에 깊이 감춰져 있는 의미를 생각하게 하고 이해시키는 데 있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감춰진 것의 의미를 발굴하려는 의지는 이렇게 다른 문화에 대한 관대하게 열린 시선일 것이다.


이 산문에는 몇 가지 특이한 감상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회랑에 매달려 가족들이 찾는 미라가 된 시체들이 전시되어있는 카푸친형제회 수도원의 지하묘지의 장장 여섯 쪽에 걸친 관람기다. 시체를 잘 분해하는 수도원 땅 덕택에 1년 동안 검고 마른 살갗의 미라로 만들어, 이 미라에 옷을 입혀 가족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이상하고 기괴한 방식으로 옷을 입은 해골 무리들로 채워진 지하묘지, 금속왕관을 쓰고 하얗게 몸치장을 한 처녀 미라들과 작은 유리관에 있는 아이들의 미라까지, 게다가 생전의 사진까지 같이 걸려있어 그 대비가 일깨워주는 충격적인 장면들이 불길하게 코믹스러우면서 참을 수 없는 웃음까지 던져줬다며 죽음의 사육제를 묘사하고 있다. 이 장황한 묘사는 모파상의 우울증이 심각한 정신질환적 국면에 이미 진입해 있었던 것임을 추정케 하는 대목이다. 이 여행 이후 4년이 지나지 않은 1892년의 자살시도와 1893년 사망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엉뚱한 길로 빠졌는데, 이 글의 진정한 맛은 모파상의 지극히 친근하고 평범한 시선, 인간미다. 괴테에게는 발견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시선, 연민과 동료애, 인간과 자연과 옛 인간들의 손길이 만들어 낸 유적의 일체적인 감응이다. 화산섬이다 보니 화산에 오르는 여정이 모파상이나 괴테 모두에게 기록되고 있는데. 둘 모두 유황가스와 불꽃이 피어오르는 분화구 가까이 다가가는 행위는 유사하지만 세부에서 커다란 차이가 발견된다. 괴테는 호기심, 암석과 화산활동이라는 법칙의 관찰로써 앎의 축적이지만, 모파상에게는 인간 영혼에 불러일으키는 감각에 대한 체험이고, 생의 의지의 환기이다.

 

모파상은 울부짖는 유황광산의 거친 계단을 기어오르는 10~12살 어린아이들의 고된 노동을 바라본다. 바구니에 유황덩어리를 가득 채우고 나르는 작고 말랐으며 안색이 누런 아이들, 가장 고통스러운 광경이었다고 모파상은 쓰고 있다. 괴테에겐 이런 시선이 없다. 단순히 시차의 간극에서 오는 생활상의 변화로만 보기도 힘든 것이 이미 괴테의 시대에도 이러한 노동은 흔했다는 점에 있다. 문학의 의무란 무엇일까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Venus Laudolina, sculpture, Museum of Syracuse, Sicily, Italy 


아마 이 산문의 가장 멋들어진 부분이 될 듯한데, 오늘날 시라쿠사의 비너스로 불리는 머리와 한 쪽 팔이 없는 토르소에 대한 감상기다. 모파상은 대리석으로 조각된 이 고상한 여인이 여행을 결심하게 만든 것이라 쓰고 있듯, 이것이야말로 오염된 근대문명을 일깨우는 예술의 재인식과 부흥을 위해 당대에 요구되는 예술의 전범(典範)이라 생각했던 것인 모양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너스라 부르며,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여인, 우리가 사랑하는 여인, 우리가 갈망하는 여인, 우리가 포옹하고 싶은 그런 여인이다.”라는 찬양으로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급기야 나는 그보다 감동을 주고, 그보다 더 주목을 끄는 인간의 모습을 본적이 없다.”고 쓴다.

 

숨기는 듯 감추고, 가리는 듯 드러내며, 유인하는 듯하면서 숨어버리는 수줍음과 관능으로 가득 차 있는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몸짓은 지구 상에 있는 여성의 모든 모습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리석은 살아있다. [...] 그녀는 신성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74

 

이름 모를 고대 예술가에 의해 예언된 인간의 계략이자, 삶의 황홀한 신비를 감추기도 하며 보여주기도 하는 파로스의 대리석으로 조각된 작품이야말로 그가 찾으려했던 새로운 예술의 지향점이자 감흥이기도 했음일 것이다.

 

카뮈가 티파사에서의 결혼에서 말했던 야생의 푸른 하늘과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말하는 신들의 세계20여 개의 도리아식 거대한 신전의 폐허가 평원 전체를 가득 채운 지르젠티에 있는 신전의 계곡에서 부풀어 오른 모파상의 감동어린 문장으로 그 유사한 감각 이미지들이 다시 100년 남짓 시간 뒤의 독자에 그대로 되살아난다. 폐허와 봄의 결혼, 이 세계와 인간의 결혼, 아마 공감은 인식으로, 관능은 의지로 심화되는 이 감응의 경이로운 묘사는 현존하고 있다는 느낌, 실체감인 생에 대한 사랑의 찬미로 다가온다.

 

지중해의 쪽빛 바다에 쏟아지는 태양을 사랑했던 이 두 예술가들은 마치 인간 정신을 승계하듯 고독에 대한 사랑, 죽음에 대한 항구적 반항과 병을 감추려는 본능조차 닮아있다. 전율하고 싶은 욕망 없이, 영혼 속에 긴 여행에 대해 전율하는 갈망을 일깨우지 않고 빛을 볼 수 있는가?” 묻는 모파상을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한 인간의 예술적 영혼이 그려낸 산문을 읽으며 나는 완전히 매혹되었다.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재능과 선으로 유혹하는 신비스런 비밀을 간직한 가히 우아하다고 할 글이다. 모처럼 영혼이 휴식할 수 있는 독서였다고 감히 말하련다. 300여 편에 이르는 중단편 소설과 여섯 편의 장편을 남기고 마흔셋이란 젊은 나이에 생을 달리한 천재 예술가의 작품들에 다시 손을 뻗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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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문장의 출처

 

1. 괴테의 문장: 박찬기,이봉무,주경순 共譯, 이탈리아 기행민음사 2023년 7, 11


2. 카뮈의 문장: 김화영 , 결혼,여름책세상 , 20112, 개정 19


3. 모파상의 문장 : 어순아 모파상의 시칠리아그린비 , 20107, 초판 1


原書 - Guy de Maupassant, La Vie errante, 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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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3-12-29 23: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심하게 비교해주셔서 <이탈리아 여행기>를 새롭게 보게 됩니다. 모파상과의 시선이 이렇게나 다르다니요^^ 모파상의 시칠리아에 대한 평에 번역에 대한 피드백이 있는데 직접 읽기에 어떠셨나요?

필리아 2023-12-30 09:04   좋아요 2 | URL
번역을 문제 삼을 문장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읽어주셔 감사드립니다.
초란공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